
사물의 생태학: 자발적 생성과 상호-응답-능력
초록
연구배경 생태 논의에서는 비인간 존재의 중요성이 강조되어 왔지만, 자연물과 인공물의 비/포함 여부 등과 관련해서 ‘사물’(thing)과 ‘객체’(object), 인공물(artifact) 개념은 다소 혼란스럽게 남겨져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지구환경과 기술환경의 문제를 다루며 물질을 통해 문제와 대안을 제시하는 디자인에서는 용어에 대한 정의를 통해 현재의 실험들을 명확히 진단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가야 한다.
연구방법 역사적으로 이론가들이 ‘사물’을 어떻게 정의해 왔는지를 살펴보기 위해 어원적, 철학적으로 개념을 분석한다. 특히 하이데거의 ‘사물’ 논의와 21세기 물질적 전환을 선언한 팀 잉골드의 생태적 사물-물질론을 중심으로 논의하고, 이들 사이에 공유되는 지점을 포착함으로써 생태적 디자인론에서 사물이 개념화되는 지점을 밝힌다. 이를 기반으로, 자연과 합성물질을 오가는 알렉산드라 데이지 긴즈버그의 작업을 중심으로 동시대 실험적 디자인에서 사물이 지니는 의미를 미학적으로 분석한다.
연구결과 첫째, 로마어(라틴어)와 고대 고지 독일어에서 ‘사물’은 ‘모임’(gathering)을 의미하고, 사물의 세계는 ‘관심의 문제’(matter of concern)에 관한 것으로 인식했다. 이는 인간과 비인간의 서식에 관한 관심 사안을 다루는 생태적 논의와 연결되는 개념이다. 둘째, 사물이 움직이는 물질들의 모임이라는 점은 사물 세계를 순환성에 기초한 생명 세계의 일부로 인식하는 토대를 제공한다. 셋째, 상호-응답-능력에 기반한 사물의 세계는 근원적으로 ‘함께-존재’(Mitsein)라는 점에서, 생태론에서 말하는 ‘함께 존재하기’(being-with) 및 ‘함께 되어가기’(becoming-with)와 맥을 같이한다.
결론 물질과 비물질, 자연물과 인공물, 인간과 비인간이 엉키는 동시대 환경에서, ‘사물’은 ‘지속적으로 움직이는 물질들의 모임’이라는 측면에서 확장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이렇게 확장된 사물 개념은 동시대 실험적 디자인을 분석하고, 자연과 인공, 인간과 비인간의 상호-응답-능력을 생태적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한다. 또한 사물의 어원적 의미를 회복함으로써, ‘함께 존재하기’ 및 ‘함께 되어가기’에 기초하여 지구 환경의 문제를 다루는 생태적 디자인의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
Abstract
Background Although ecological discourse emphasizes nonhuman entities, the concepts of the “thing” and the “object” remain unsettled, especially regarding the inclusion or exclusion of natural and artificial entities. Against this backdrop, design practices engaging with planetary and technological environments and proposing problems and alternatives through material interventions must clarify their conceptual terms to critically assess current experiments and to open up new possibilities.
Methods This article examines how theorists have historically defined the “thing” through an etymological and philosophical analysis of the concept. Specifically, the article focuses on Martin Heidegger’s account of the thing and Tim Ingold’s ecological theory of things and materials. By identifying points of convergence between these two perspectives, the article clarifies how things are conceptualized within ecological approaches to design theory. Based on this foundation, the article provides an aesthetic analysis of the things in contemporary experimental art, paying special attention to Alexandra Daisy Ginsberg’s work with natural and artificial (synthetic) materials.
Results First, in Roman (Latin) and Old High German usage, “thing” referred to a “gathering” convened to deliberate matters of concern. This conception resonates with ecological discourse because it addresses shared concerns about the human and nonhuman habitat. Second, understanding the thing as a group of moving materials provides a foundation for conceiving the world of things as part of a world grounded in circulation and transformation. Third, the world of things is characterized by Mitsein (being-with) insofar as it is based on capacities for correspondence (mutual responsiveness). This aligns with ecological notions of being-with and becoming-with, which emphasize relational coexistence and co-constitution.
Conclusions In contemporary environments characterized by the intertwining of the material and the immaterial, the natural and the artificial, and the human and the nonhuman, the “thing” must be interpreted broadly as a group of ever-changing materials. This expanded conception provides a framework for analyzing experimental design practices, such as Ginsberg's, and interpreting the correspondence, or mutual responsiveness, between nature and artifice and between human and nonhuman agents within an ecological context. By recovering the etymological meanings of “thing” as a “gathering” and a “matter of concern,” this perspective offers direction for ecological design that addresses planetary environmental issues based on being-with and becoming-with.
Keywords:
Thing, Ecological design, Martin Heidegger, Tim Ingold, Alexandra Daisy Ginsberg, 사물, 생태적 디자인, 마르틴 하이데거, 팀 잉골드, 알렉산드라 데이지 긴즈버그1. 서론
역사적으로 디자인 철학과 이론에서는 사물(thing)의 의미를 정의하려는 시도가 부단히 이어져 왔고, 사물(thing), 객체(object), 인공물(artifact) 사이에서 용어를 정의하는 데 여러 차원에서 어려움이 잇따랐다. 산업/제품 디자인 분야에서는 줄곧 인공물을 핵심적으로 다루면서 이를 인간의 의도, 기능, 문화, 사용성이 내포된 인간이 만든 사물로 정의하였다(Thomasson, 2003). 특히 페터 크루스와 안토니 메이어스는 기술적 인공물(technical artifacts)이 1. 물리적 구조를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2. 의도를 지닌 기능적 객체라는 이중적 속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의견을 피력하는데, 이는 제품 디자인 이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Kroes and Meijers, 2006). 객체는 인간 주체와 대비되는 비교적 중립적이고 물질적인 대상의 세계로 여겨져 왔다. 이에 비해 디자인에서 사물은 가장 본질적으로 다루는 대상이라는 포괄적이고 암묵적인 인식이 있어왔지만, 이에 대한 논의는 상대적으로 밀려나 있었다. 그러나 주체와 객체의 이분화된 세계관이 도전받으면서 사물, 객체, 인공물 사이의 복잡하고 모호한 의미 관계가 부각되었고, 또한 인간 존재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요구되는 생태적 디자인 인식이 커지면서 그 어느 때보다 사물 개념을 명확히 해야 할 필요성이 요구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마르틴 하이데거의 에세이 ‘사물이란 무엇인가?’(What is a Thing [The Thing], 1967)와 현상학 논의들에서 사물을 정의하는 토대를 제공해 왔다. 21세기를 전후하여 브뤼노 라투르의 객체지향존재론과 그레이엄 하먼 같은 신유물론자들의 기여로 객체는 사물과 구분되면서 비교적 명확히 자리잡아 왔다. 그럼에도 사물과 객체의 의미 관계는 계속해서 모호하게 흘러온 경향이 있다. 특히 빌 브라운은 ‘사물론’(Brown, Thing Theory, 2001)에서 하이데거의 사물 개념과 브뤼노 라투르의 객체 개념을 미묘하게 오가면서 상품문화적 콘텍스트로부터 사물을 분리시키는 데 방점을 두었는데, 이 때 그가 말하는 사물은 객체와 선명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한편 미셸 세르의 경우 준객체(quasi-object)라는 개념을 통해 주체-객체의 분리불가능성을 설명하는데, 사실 여기에서 객체는 주체를 둘러싼 사물 세계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물과 객체 사이에 넓은 공유 지대가 있다고 볼 수 있다(Serres, The Parasite, 1980).
21세기 이후 줄곧 물질적 전환(Material Turn)을 강조해 온 고고인류학자 팀 잉골드는 논문 ‘물질의 생태를 향하여’(Toward an Ecology of Materials, 2012)에서 사물의 물질적 자질과 특질을 이해하고 닫힌 객체로부터 벗어나 열리고 확장되는 사물로 시선을 이동할 것을 촉구했다. 그래야만 에너지의 흐름 및 생동성의 원천과 연결된 사물 세계—자연적 유기물을 포함한 인간 외 모든 타존재—를 제대로 정의할 수 있고, 그것을 통해 생태적 지각과 상호-응답-능력(co-response-ability)을 유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글에서는 하이데거와 잉골드의 사물 개념을 중심으로 분석하면서 두 개념이 생태적 인식과 조응하는 지점을 포착하고자 한다. 방법론적으로, 사물이라는 용어를 둘러싼 여러 어원적 뿌리를 통해 그것이 담고 있는 다양한 의미를 밝히고 그 사이를 연결하는 공통의 의미망을 파악함으로써 사물이 동시대 디자인에서 지니는 본질적인 의미, 그리고 확장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잠재성을 도출한다. 이 과정에서 사물이 생태론 및 공공적인 것(the public/publicness)으로 연결될 수 있는 개념적 근거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이어서 알렉산드라 데이지 긴즈버그의 실험적 디자인 프로젝트를 사례로 들어, 자연물(식물, 동물, 곤충, 흙, 햇빛, 기후 등), 인공물, 합성물질이 복합적으로 엉키는 21세기 생명 세계에서 사물 개념을 어떻게 확장적으로 정의할 수 있을지를 분석적으로 적용한다. 이렇게 기후위기 및 생태계 혼란과 관련하여 문제를 제기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다양한 작업들 속에서 사물 개념을 재정의함으로써, 동시대 디자인이 물질적 사물 세계(생명 세계)에서 어떤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을지를 진단할 수 있을 것이다.
2. 생태적 사물
2. 1. 모으는 사물
어원적으로 사물(thing)은 로마어(라틴어) ‘레스’(res)로 널리 해석되어 왔다. 레스는 시대에 따라 의미 변화를 겪어 왔는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의미는 중세시대의 개념, 즉 ‘무엇이든, 어떤 식으로든 현존하는 모든 것’을 가리키는 존재로서의 존재(ens qua ens)를 뜻한다. 또한 이는 근대적 의미의 이성적 존재(ens rationis)와 같이 정신적 재현으로만 존재하는 것을 가리키는 데도 사용되었다(Heidegger, 2019: p. 147).
그러나 고대 고지 독일어(Old High German)에서 사물(thing)은 ‘모으다’(gather)를 의미하는데, 이는 특히 논쟁거리가 되는 토론의 사안에 대해 생각하기 위한 모임을 의미한다. 결과적으로 고대 고지 독일어의 사물(thing)과 딩크(dinc; 근대 독일어 ding)는 사건이나 사안을 가리키는 이름이 되었고, 어떤 식으로든 인간과 관련되는 담론의 사안을 의미하게 되었다. 물론 로마어(라틴어)에서 레스도 담론의 사안(a matter for discourse)을 의미하고 있어서, 두 언어권의 용어는 분명히 연계성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Heidegger, 2019: p. 147). 이는 결국 사물 세계를 ‘사실의 문제’(matter of fact)에 국한하지 않고 ‘관심의 문제’(matter of concern)로 인식하는 것으로, 이 점에서 사물이 인간과 비인간의 서식에 관한 ‘관심 사안’을 다루는 생태적 논의와 연계되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한국어·한자어 사물(事物)의 의미를 살펴보면 1. 일과 물건(物件)을 아울러 이르는 말, 2. 물질세계에 있는 모든 구체적이며 개별적인 존재를 통틀어 이르는 말로 정의되어 있고(표준국어대사전), 추가적으로, 3. 사건(事件)과 목적물(目的物)을 이르는 말로 정의되기도 한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의미에 따르면 사물은 물리적으로 닫힌 객체가 아니라 사물 세계, 관심의 사안으로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e-한자). 팀 잉골드는 논문 ‘물질의 생태를 향하여’(Toward an Ecology of Materials, 2012)에서 객체가 아니라 사물로 향함으로써 물질적으로 흐르는 생태적 세계로 전환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외부 세계로 확장해 가는 사물의 본질에 대해 분석적으로 기술한다. 이는 사물이 에너지의 흐름과 물질 속에서 생동성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 그래서 자발적인 생성 능력과 상호-응답-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논의로 연결되는 부분이다.
잉골드는 비인간 존재들 가운데 자연물과 인공물을 구분하지 않고 이들을 사물 개념에 포함시킨다. 예컨대 벼랑이나 땅은 물리적인 의미에서도 분명 사물일 뿐만 아니라, 그 장소를 오가는 인간과 비인간들의 이야기와 엮임이라는 측면에서, 즉 사회물질적 차원에서 사물이라는 것이다. 그는 호주 원주민의 토템적 경관에서부터 포스트모던 문화에 이르기까지 공통적으로 흐르는 역사적 궤적이 바로 비인간 행위자들의 혼합에 있다고 보고, 문명은 점점 더 많은 사물들을 끌어들임으로써 농경문화, 도시화, 국가의 형성, 산업화 같은 역사의 에피소드들을 창출하고 경험해 왔다고 주장한다(Ingold, 2012: pp. 429-430). 비요나르 올슨도 사물들이 인간과 혼합되면서 사회와 역사를 형성하는 문제를 제기한다(Olsen, 2010).
사물에 대한 이 같은 사회물질적 시각은 첫째, 사물의 물질적 속성에 대한 이해를 높이면서, 둘째, 그것이 사회적 공간과 문화의 형성으로 연결되는 양상을 설명해준다. 사물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형하는 물질들의 모임이라는 점, 그리하여 외부 세계로 확장되면서 타존재들과 상호-응답하며 세계를 형성한다는 이러한 시각은 사물에 대한 생태론적 시각을 명확히 하고, 궁극적으로 사물을 통한 생태적 디자인의 방향을 제시하는 토대가 된다.
2. 2. 물질로서의 사물
사물을 물질적 차원에서 접근함으로써 비인간 존재 영역에서 자연물과 유기체의 정체성을 보다 명확히 정의할 수 있다. 잉골드는 인간과 비인간을 지속적으로 구분해 온 역사 속에서 유기적인 생명체들, 이를테면 햇빛, 공기, 흙, 습기 같은 것들이 사물 논의에서 배제되고 생략되어 왔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자연을 포함하여 대상 세계 전체를 사물의 위상으로 끌어올림으로써 생기적 세계에 관한 논의에서 물질적 흐름과 형성적 과정에 초점을 둘 수 있다고 주장한다. 디자인에서 이는 특히 제작에 대한 시각에 변화를 야기한다. 즉 제작을 인공물의 구성이나 구축에 국한하지 않고,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성장 과정 혹은 개체발생의 과정으로 바라보는 시각으로의 전환이다.
Alexandra Daisy Ginsberg, ‘Every Thing Eats Light,’ Installation view at Manifesta 15 Barcelona Metropolitana at The Three Chimneys, 2024. Photo © Alexandra Daisy Ginsberg Ltd.
사물의 발생과 관련하여 개체발생적 시각은 기존의 질료형상론(hylomorphism)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에서 출발한다. 형상이 개념적으로 미리 존재하고 물질에 그 상을 투사하여 구현된다는 질료형상론과 달리, 개체발생은 요소들 간의 만남과 그들 사이의 상호-응답적 과정을 통해 형상이 발생한다는 논리다. 이러한 맥락에서 질베르 시몽동은 물질의 본질을 형상-취득 활동(form-taking activity)으로 여겼다. 개념적 상(image)으로서의 형태가 물질과 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형상과 물질이 모두 외부 요소에 의해 계속해서 변화하는 변형적 반(半)-사슬(demi-chaînes de transformations)로서, 상호 융합하는 과정을 통해 특정한 지점(형상)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흙과 주형틀을 이용한 성형의 과정은, 흙이 주형틀을 취하고 주형틀이 흙을 취하는 상응의 과정이고 상호-응답-능력의 결과인 것이다(Simondon, 1964: pp. 120-130).
들뢰즈와 가타리는 물질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융합하고 변화하기 때문에 장인이나 작업자들은 그 물질의 흐름을 따라가는 입장에 놓인다고 말한다(Deleuze & Guattari, 2004: pp. 451-452). 이렇게 물질은 지속적인 연결과 움직임 속에서 성형되기 때문에, 잉골드는 물질의 자질이나 특질을 고정된 특성으로 보기보다 시간성 속에 놓인 ‘역사’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질의 역사성에 관해서는 과학이론가 캐런 버라드도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녀는 물질이 수동적으로 외적인 힘의 신호를 기다리는 ‘자연의 작은 파편들’이 아니라, “(물질은) 언제나 이미 진행중인 역사성”이며 “(물질은) 되어가는 과정 중에 있는 실체적 본질(substances-in-becoming)”이라고 강조한다(Barad, 2003: pp. 801-831). 인공물과 기념물은 역사의 낡은 잔여물인데 반해, 물질, 그리고 물질로서의 사물은 지속적인 역사성이다. 왜냐하면 물질은 시간 ‘안에’ 있지 않고 시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Barad, 2003: p. 821).
객체/인공물 또는 물질의 모임으로서의 사물, 둘 중 어디에 방점을 두는가에 따라 지속성의 의미도 달라진다. 객체/인공물의 시각에서 보면 지속성은 또다른 사용으로 이어지는 재활용 개념으로 수렴되는 데 반해, 물질로서의 사물에 초점을 둘 때 그것은 생명 세계의 일부로, 그 세계를 유지하는 지속적인 발생으로 초점이 이동한다. 재활용은 원론적으로 지속적인 소비의 틀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한계가 있다. 반면, 생명 세계의 원리는 탄생-노화·부패-죽음[휴면상태]-재탄생으로 연결되는 순환성에 기초하기 때문에, 사물의 지속성이라는 관점에서는 제작의 과정—지속적인 개체발생의 과정—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2. 3. 사물: 흘러나오는 몸
하이데거와 잉골드는 공통적으로 객체/인공물과 사물을 엄격히 구분하며 둘 사이의 급진적인 분리를 주장했다. 이들이 주장하는 내용의 핵심은, 객체/인공물과는 상호작용(interact)이 이루어질 수 있지만 사물처럼 상호-응답(correspond)이 이루어질 수는 없다는 것, 그리고 객체/인공물이 우리의 대척점에 놓여 있다면 사물은 우리와 ‘함께 존재’한다는 점에 있다. 같은 맥락에서, 잉골드는 브뤼노 라투르의 객체(그리고 그가 말하는 비인간)가 부동적이고, 또 이들의 작동 방식이 끊임없는 생동적 움직임이 아니라 네트워크 안에서 발생하는 상호적 인터랙티브 효과이기 때문에 사실상 그의 정치 생태학은 에콜로지로서 실패할 수 밖에 없다고 비판한다(Ingold, 2012: p. 436). 이러한 논리의 저변에는 사물이 물질들의 모임이라는 점, 그래서 물질의 유동성, 변형가능성, 상호-응답-능력이 그 안에 담겨 있다는 전제가 있다. 이것은 각자 닫힌 체계를 유지하면서 점으로 연결된 네트워크 체계 안에서 상호작용—일종의 신호 주고받기—하는 것과 엄밀히 구분된다. 이와 달리 상호-응답은 열린 체계를 유지하면서 유동성 속에서 부단히 관계적으로 엮여 나가는 존재 방식이다.
실타래 같은 움직임 속에서 발생하는 사물들의 상호-응답적인 움직임과 이들의 함께-되어감(becoming-with)은 잉골드가 말하는 존재 방식인 직조(meshwork)와 연결된다. 이는 또한 현상학자 메를로 퐁티가, 모든 살아 있는 사물은 세계의 직조적 구조(fabric) 안에 꿰매어진다고 했던 것과도 맥을 같이 한다(Ingold, 2012: p. 437; Merleau-Ponty, 1968). 즉 지각적이고 감각적인 세계에서는 직조를 통해 모든 존재가 사물적인 면모를 갖추게 되고, 다시 역으로 사물은 지각적이고 감각적인 삶의 가능성을 만들어낸다. 이 상호-응답의 세계에서 지각자·감각자들은 사물을 향해 열리고, 사물은 다시 지각자·감각자들을 향해 열린다. 이곳에서는 지각적인 것과 감각적인 것이 구분되지 않는다. 운동감각(kinesthesia)에서는 움직임에 대한 감각과 인식/지식을 분리할 수 없듯이, 그것은 주변을 둘러싼 사물들과의 계속되는 상호-응답 속에서 움직이고 또 움직여지면서 새로운 물질적 존재로 변화해 간다.
사물의 상호-응답-능력은 그것의 누수(leak) 작용 때문에 가능하다. 잉골드에 따르면 유기체를 포함한 모든 사물의 몸은 지속적으로 외부 세계를 향해 흘러나오고, 이들의 삶은 실제 이 작용에 의해 유지된다. 살아 있는 사물의 몸은 주변 환경으로부터 계속해서 물질을 취함으로써 유지되고, 반대로 이들의 몸은 호흡과 신진대사 과정을 통해 주변 환경으로 배출된다. 이 지점에서, 사물의 범위에는 물리적 환경과 사회적 환경에 지속적으로 노출되고 휘말리는 인간의 몸과 정신, 지각과 감각이 모두 포함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Ingold, 2012: p. 438; Webmoore & Whitmore, 2008: pp. 53-70).
2. 4. 사물과 공공적인 것: 관심의 문제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우리(인간 주체)를 둘러싼 환경에 놓인 타자 및 사물들과의 실체화된 관계에서 나온다. 따라서 사물은 그 자체의 고립된 공간이 아니라 이미 공공적인 영역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사물은 앞서 언급한 누수 작용 및 상호-응답-능력을 통해, (인간을 포함한) 타 존재들과 관계를 형성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관계에 방점을 두는 학자들, 특히 현상학자나 생태론자들은 사물 그 자체보다 그것을 둘러싼 관계가 나타나는 방식과 조건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
현상학자 에드문트 후설은, 우리는 세계 안에, 사물들 사이에서, 타인들 사이에 존재하고, 의식은 세계와의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또한 후설을 계승하며 존재론적 현상학을 발전시킨 하이데거가 말하는 ‘현존재’(Dasein, Sein-da, being there, 거기-있음)는 본질적으로 ‘함께-존재’(Mitsein)를 존재론적 구조로 전제한다(Read, 2019: pp. 43-53). 철학자 프레데릭 올라프손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하이데거의 존재론에는 개인의 시각이 중심에 있지 않으며, 세계 안에서 타자와 함께 존재하는 ‘함께-존재’가 근원적이라고 역설한다. 그리고 ‘함께-존재’의 방식으로 주체와 사물들이 상호적으로 현존하며, 바로 거기에서 자아와 타자가 드러난다고 강조한다(Olafson, 1994: pp. 3-4, 7).
한편, 철학자 스티븐 리드는 사물과 공공적인 영역의 관계를 탐구하는 가운데, 공공성(the publicness)을 ‘비결정적 타자들이 밀도 높게 이어진 연결망’으로 정의하며, 이 타자들이 상호-지시적인 공통의 세계를 구성한다고 말한다(Read, 2019: p. 51). 그리고 사물은 세계와의 마주침 안에서 우리 앞에 드러난다고 하면서, 사물의 존재와 그것의 드러남을 도시라는 마주침의 공간과 연결시킨다. 이는 도시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이 도시 공간의 본질적인 존재 양상을 끊임없는 우연적 마주침에서 찾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세넷은 타인들과의 마주침에 주목하는 데 반해, 리드는 사물 존재들과의 마주침으로 영역을 확장한다(Sennett, 2014, 2023). 이렇게, 사물은 세계의 구성 요소를 모으고 세계를 향해 흘러나오며 확장되는 것으로서, 도시 공간을 비롯한 공공적 영역에서 공통의 사안에 관한 관심을 불러 모은다. 구체적으로 사물은 이 공간에서 ‘사실의 문제’뿐만 아니라 ‘관심의 문제’에 관한 담론을 생성하는 매개체이자 동인으로 작동한다. 특히 동시대의 관심의 문제는 다양한 이해당사자를 포함한 사회정치적 사안과 관련된 것으로, 무엇보다 기후변화, 생물다양성, 환경 오염과 같이 논쟁적인 생태적 이슈와 연관된다(Latour, 2004[1999]).
그러나 이때 리드가 말하는 공공적 공간은 일군의 관련된 사람들 사이에 공유된 사물과 그것으로 매개되는 공간에 국한되고, 사물 자체의 생동적 상호-응답-능력에는 크게 주목하지 않는 한계가 있다. 이와 달리, 사물을 생태론적 관점에서 조명하면, 그것은 닫힌 객체가 아니라 주체와 객체 사이에서 계속해서 확장해 가는 일종의 준-객체로서, 오직 관계로만 존재하고 지속적으로 타자와 공유하며 서로를 변환시키는 과정에 놓여 있다. 이 점에서 사물의 존재 양상은 도나 해러웨이가 말하는 ‘함께 존재하기(being-with)’ 및 ‘함께 되어가기(becoming-with)’와 맞닿아 있다(Haraway, 2021[2016]).
3. 알렉산드라 데이지 긴즈버그: 확장된 사물 생태계
알렉산드라 데이지 긴즈버그(Alexandra Daisy Ginsberg)는 2000년대 후반부터 현재까지 자연과 비자연(인공, 합성)의 세계를 탐색하며 둘의 경계에 의문을 제기하고, 나아가 이들 비인간 존재들과 인간의 관계를 새로운 시각에서—때로는 역할 바꾸기를 통해—조명하면서 생명세계와 사물세계의 분리불가능한 관계적 존재 양상을 제시한다. 이 장에서는 긴즈버그의 프로젝트 <합성 왕국>과 <합성 미학>에서 자연과 인공물의 경계를 넘나들며 사물의 영역을 넓히는 양상을 살펴본다. 그리고 이어서 긴즈버그의 최근 대표작 <폴리네이터 패스메이커>를 통해 사물의 의미가 인간-비인간의 엉킴 속에서 생존 환경에 대한 관심 사안을 포괄해 나가는 확장적 흐름을 포착한다.
초기에 긴즈버그는 주로 합성생물학(synthetic biology)의 방법론을 적용하여 자연적인 것과 비자연적인 것에 대한 기존의 분류 방식에 도전해 왔다. <합성 왕국: 합성 미래의 자연사>(The Synthetic Kingdom: A Natural History of the Synthetic Future, 2009)는 유기체의 DNA를 다른 생물학적 몸에 삽입함으로써, 공학적으로 조작된 그 생명체가 에너지를 생산하거나 오염 물질을 제거하고, 질병을 없애고, 인간의 노동을 대리한다는 디자인적 기획이다. 그리고 이렇게 조성된 합성물질의 왕국은 궁극적으로 새로운 자연의 한 부분을 형성하게 된다는 시나리오다.
그 뒤에 이어진 공동 프로젝트 <합성 미학>(The Synthetic Aesthetics, 2010-13)에서 긴즈버그는 디자인의 영역을 가촉적인 인공물에 국한하지 않고 미시생물학의 영역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타진한다. 디자인이 살아 있는 물질의 생명 세계에 관여하면 그것은 한 차원 다른 복잡성의 세계로 들어가는데, 이때 디자이너는 ‘자연을 디자인하는 것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정의에서부터 ‘어떻게 자연을 디자인할 수 있을까?’라는 방법론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이는 비인간 영역에 자연이 포함되고, 그 살아 있는 물질의 자연세계가 곧 사물의 세계라는 잉골드의 주장과 연결되는 부분이다.
<합성 미학> 프로젝트에서도 계속해서 합성생물학을 중심으로 실험이 진행되는데, 특히 자연물질과 인공물질의 경계에 급진적으로 도전하며 신합성물질로 외화된 사물의 영역을 과감히 확장시킨다. 여기에 참여한 크리스티나 아가파키스와 시셀 톨라스 팀의 <셀프메이드>(Selfmade)는 인간의 몸에서 채취한 박테리아로 치즈를 만듦으로써 인간, 비인간, 자연, 인공의 범주를 파괴시켰다. 데이비드 벤저민과 페르난페데리치 팀에서 진행한 <바이오컴퓨테이션>(Biocomputation) 연구에서는 박테리아의 분비물—흰색의 골조 같은 물질과 투명하고 유연한 셀룰로즈 같은 물질—을 결합하여 실제 건축이나 조형 작업에 적용할 수 있는 신소재를 창출해냈다(Benjamin, 2010-13). 특히 합성생물학 프로젝트에서는 후각이나 촉각 같은 감각적인 부분에 집중하면서, 물질과 사물의 세계가 지식의 세계가 아니라 지각과 감각이 운동감각처럼 하나로 작동하는 원리에 기반한 세계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러한 접근에서 디자인, 건축, 미술, 음악, 과학을 포괄하며 장르와 범주가 무의미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이다(Agapakis, Tolaas, 2010-13).
긴즈버그의 최근 대표작인 <폴리네이터 패스메이커>(꽃가루 매개자, 길을 여는 자, 2021-진행중)는 알고리즘 기술을 결합한 온-오프라인 가드닝 프로젝트이다. 식물이 번식하고 생태계가 융성하기 위해서는 꽃가루를 매개하는 꿀벌, 말벌, 꽃등에, 나비, 나방, 딱정벌레 같은 수분자가 필수적이다. 그러나 살충제의 사용, 침입종의 번식, 기후변화 등으로 이들의 서식지가 사라져가고 종 수도 크게 줄어들었다. 이렇게 수분자-식물-열매(잠재적 양식)로 연결되는 생명 사슬의 위기 앞에서 긴즈버그는 ‘어떻게, 무엇을 심는가가 중요하다’(How and what we plant matters)고 선언하고, 기후대와 토양 등 개별 자연 환경에 적합한 정원의 디자인을 제안한다.
Alexandra Daisy Ginsberg, Digital render of Pollinator Pathmaker LAS Edition in mid-summer in ‘pollinator vision,’ 2023. © Alexandra Daisy Ginsberg Ldt.
Alexandra Daisy Ginsberg, ‘Four Epochs of Paradise’ (Pollinator Vision side), 2024. Documentation hang. Photo Thierry Bal. © Alexandra Daisy Ginsberg Ltd.
긴즈버그가 디자인하는 정원은 인간의 시각이 아니라 비인간 수분자들의 시각에서 고안된 것이다. 실제 꽃가루를 매개하는 수분자들은 인간과 다른 방식으로 컬러를 감지하고, 각자의 경로를 따라 먹이를 찾으며, 종마다 서로 다른 계절에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이 정원은 인간의 지각과 감각으로 경험하는 정원과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외화된다. 지금까지 <폴리네이터 패스메이커>는 크게 세 가지 형식, 즉 옥외 정원(서펜타인 갤러리, 2022-24), 비디오(브리티시 라이브러리, 2025), 태피스트리(Four Epochs of Paradise,’ 2024; ‘Perceptual Field,’ 2025) 형태로 선보여 왔다. 이들은 모두 인간의 눈이 아니라 수분자들의 시선에서 구현된 것으로, 특히 디지털에 기반한 비디오와 태피스트리 형식에서는 정원의 규모가 휴먼 스케일을 훌쩍 넘어서서, 최대 건물 4층 높이에 이르기도 한다. 확대된 정원 앞에서 우리는 수분자가 되고 우리의 몸을 에워싼 살아 있는 사물(식물과 토양과 햇빛 등)의 세계 내부로 들어가는 경험을 한다.
여기에서 흙, 햇빛, 식물, 수분자는 상호-응답을 통해 존재를 구성하고 유지하며, 또한 외부 존재를 향해 흘러나오고 확장되는 물질적 존재로서의 사물이다. 그리고 이 정원 프로젝트는 식물을 둘러싼 생태계의 작동 방식 즉 ‘사실의 문제’에 관한 것이면서 동시에 그 생명 세계가 처한 현재에 대한 인식, 위기에 대한 염려 즉 ‘관심의 문제’에 관한 것이라는 점에서 사물의 생태, 혹은 생태적 사물이라는 조건에 부합한다.
4. 결론
마르틴 하이데거와 팀 잉골드를 중심으로 한 이론가들의 어원적, 철학적 해석에 따르면 사물은 근본적으로 관심의 문제를 다루는 것으로, 이는 인간과 비인간의 서식에 관한 관심 사안을 다루는 생태적 논의와 연결된다. 첫째, 고대 고지 독일어와 로마어(라틴어)에서 사물은 ‘모으다’를 의미하며, 특히 토론의 사안을 논의하기 위한 모임을 뜻한다. 이는 인간과 비인간, 자연과 인공을 아우르는 세계에 대한 ‘관심의 문제’를 다루는 생태적 논의와 맥을 같이한다. 둘째, 사물은 움직이는 물질들의 모임으로, 그것의 제작은 질료형상론적 방식(개념적 상을 물질에 투사, 형상화)이 아닌, 존재들 간의 상호-응답에 의한 발생적 과정으로 이해된다. 셋째, 사물의 범위에는 물리적 환경과 사회적 환경에 지속적으로 노출되고 휘말리는 인간의 몸과 정신, 지각과 감각이 모두 포함된다. 넷째, 존재는 근원적으로 ‘함께-존재’(Mitsein)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이미 타자들과 연결된 공공적인 영역에 놓여 있다. 이 공공성을 바탕으로, 사물은 동시대 관심의 문제에 관한 담론을 생성하는 매개체이자 동인으로 작용한다. 결과적으로 상호-응답-능력에 기반한 사물의 세계는 근원적으로 ‘함께-존재’라는 점에서, 생태론에서 말하는 ‘함께 존재하기’(being-with) 및 ‘함께 되어가기’(becoming-with)와 맥을 같이한다.
알렉산드라 데이지 긴즈버그의 실험적 디자인 프로젝트는 자연과 인공(특히 합성생물학)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인간과 비인간 간의 상호-응답 작용을 탐구한다. 긴즈버그의 작업을 확장된 사물 개념에 비추어 분석하면, 그것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상호-응답하는, 살아 있는 사물 세계에 관한 문제 제기와 대안의 모색으로 해석된다. 특히 <폴리네이터 패스메이커>에 참여하는 식물, 동물, 흙, 햇빛, 인간과 컴퓨터 알고리즘은 사물 세계의 구성체들이며, 상호-응답을 통해 함께 변화, 형성되어 가는 과정 중에 있는 생태적 요소들이다.
아울러, 확장된 사물 개념을 바탕으로 할 때, 디자인의 범위, 디자인 과정, 디자인 결과물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가능해질 수 있을 것이다. 물질적 존재로서의 사물이 가지는 시간성(역사 그 자체) 측면에서 볼 때, 사물의 역사는 세계의 상징적 재현이 아닌, 물질 세계의 구성과 과정으로 재해석될 수 있다. 또한 디자인의 공공적 의미도 외적(사회적) 요인뿐만 아니라 사물 자체의 공공적 존재 방식으로부터 도출할 수 있을 것이다.
Acknowledgments
이 논문은 2025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NRF-2025S1A5B5A16006297)
This work was supported by the Ministry of Education of the Republic of Korea and the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 (NRF-2025S1A5B5A16006297)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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