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디자이너 정연종 작품의 시대사적 이해 - ‘한국적 디자인’을 중심으로
초록
연구배경 본 연구는 그래픽 디자이너 정연종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고찰함으로써, 1970~80년대 ‘한국적 디자인’이 형성된 시대적 배경과 그 과정에서 수행된 디자이너의 역할을 추적하고자 한다.
연구방법 정연종의 작품 세계와 활동 궤적을 문헌 및 신문 자료를 바탕으로 시간순으로 고찰한다. 특히 1960년대 홍익대학교와 서울의 사회문화적 지형, 정부의 정책 기조, 교류 작가들의 경향성이 그의 작품 형성에 미친 유기적 상관관계를 분석한다.
연구결과 정연종이 지향한 ‘한국적 디자인’ 사조는 1960~70년대 국가 정책에 따른 수출 촉진 및 관광 홍보를 위한 도구적 역할에서 출발하여, 1980년대 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그 수요가 비약적으로 증가하였다. 정연종은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면서도, 전통 미술 기법을 재해석한 독창적 표현을 통해 자신만의 포스트모더니즘적 양식을 구축하였다.
결론 정연종의 작업은 시대적 산물인 동시에 개인의 예술적 개성이 투영된 결과물이다. 그는 진정성 있는 탐구 자세를 바탕으로 관념화되기 쉬운 ‘한국적 디자인’의 범주를 확장하고 대중화함으로써, 한국 현대 디자인의 원형을 정립하는 데 기여하였다.
Abstract
Background This study examines the life and artistic characteristics of graphic designer Chung Yeon-jong, while tracing the historical context of the formation of “Korean-style design” and the evolving role of designers during the 1970s and 1980s.
Methods The researcher chronologically analyzed Chung’s works and professional activities through literature reviews and archival newspaper data. Furthermore, this study investigates the socio-cultural atmosphere of Hongik University and Seoul in the 1960s, government policy directions, and the artistic trends of contemporary colleagues to determine their influence on Chung’s design philosophy.
Results The ‘Korean-style design’ movement pursued by Chung initially emerged as a promotional and propaganda tool for exports and tourism in alignment with government policies during the 1960s and 70s. The demand for this aesthetic reached a zenith through the 1988 Seoul Olympics. While Chung resonated with his contemporaries in pursuing national identity, he distinguished himself by showcasing a postmodern style through unique expressions rooted in traditional artistic techniques.
Conclusions Although Chung Yeon-jong’s ‘Korean-style design’ was a product of his era, it was ultimately a reflection of his distinct individuality. Through an authentic approach to his craft, he expanded and popularized the often abstract realm of “Korean-style design,” significantly contributing to the establishment of the archetype of contemporary Korean design.
Keywords:
Chung Yeon-jong, Korean-style Design, National Industrial Art Exhibition (Sanggong Mi-jeon), Export, Tourism, 정연종, 한국적 디자인, 상공미전, 수출, 관광1. 서론
디자이너 정연종(鄭然鍾)이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국풍 81> 행사와 <롯데월드 로티> 사건이다. <국풍 81>은 독재정권을 대표하는 관제 행사이고, <로티> 사건은 디자이너로서는 드물게 대기업과 저작권 분쟁을 벌여 디자이너가 파산하다시피 한 불행한 사건이었다. 정연종이 디자인한 팬시용품과 화장품, 캐릭터, 아파트 인테리어나 환경디자인 등이 국민적인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교수가 아닌 개인 사업가였던 탓에 작가의 이름은 감추어지고, ‘한국적 디자인’을 대표하는 그래픽 작가였다는 점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정연종은 국내 미술대학에 산업디자인 전공이 설치되기도 전에 대학을 마치고, 산업디자이너로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사회적으로 디자인에 대한 인식 수준이 낮고 직업적 영역이 불명확한 탓에 생계 유지 차원에서 공예나 교육직을 겸하는 것이 일반적이어서, 사회적 성공을 위해 정부가 제시하는 과업을 수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스스로 최초의 산업디자이너임을 자처하는 정연종도 예외가 아니어서, 시기별로 잡화개발에서 공예, 인테리어, 그래픽, 브랜딩 등 다양한 영역의 업무를 수행하고, 정부가 제시하는 아젠다를 충실히 이행했다. 이 글에서는 디자이너 정연종의 생애와 작품을 살펴, 1960~80년대, 한국 사회에서 디자이너에게 요구되었던 자질이 무엇이고, 디자이너 개개인은 이를 어떤 식으로 수용해 나갔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시대적 배경
2. 1. 홍익대 공예학부
정연종은 1944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고, 춘천고등학교를 나왔다. 1964년 홍익대 미술대학 공예학부로 진학하여 1968년에 졸업했다. 정연종이 대학을 다니던 1960년대는 한국사회에 디자인이 정착되던 매우 중요한 분기점이다. 이때까지 국내에 디자인이라는 용어는 공식적으로 등장하지 않았고, 여전히 공예와 상업미술(시각디자인)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국내 최초로 근대적인 개념의 디자인교육을 실시한 서울대학교에서는 1968년경 상업미술, 공예미술이 도입되었고, 1972년 상업미술, 공업미술, 공예미술로 분과가 나뉘었다. 정연종이 수학했던 홍익대학교는 1958년에 설치된 공예학부에 1964년 도안과가 생겼고, 1965년부터 공예과(도자기ㆍ섬유ㆍ금속ㆍ목칠전공)와 도안과로 나뉘어 교육되기 시작했다. 공예와 디자인이 분화되던 시점으로 디자인교육의 체계는 잡혀 있지 않았다. 1968년에 비로소 홍익대학교에 공업디자인 전공이 설치되었지만, 이미 정연종은 졸업한 이후의 일이다.
1960년대 말까지 서울대학교 응용미술과와 홍익대학교 도안과 외에 디자인 전공이 있는 대학으로는 1960년에 이화여자대학교에 신설된 생활미술과 정도가 있지만, 마찬가지로 전공 구분은 없다시피 했다. 도안 전공의 교육 내용은 ‘선전미술, 공예미술, 장식 도안’으로 공예와 시각디자인이 섞인 것이었고, 특히 전통공예가 큰 몫을 차지했다. 이 시기 도안 전공자는 순수미술과 대비하여 ‘실패한 미술가’ 내지는 돈을 쫓는 ‘상업미술가’, 또는 양가집 규수들에게 강요되던 ‘규방공예’의 연장선상에서 여성에게 적합한 전공이라거나, 인쇄업을 하는 식자공, 도안공 등의 직업과 비교되어 낮은 수준의 기술이라는 사회적 편견과 맞서야 했다.
정연종이 수학하던 홍익대 공예학부에는 유강렬, 한홍택, 한도룡, 세 사람이 교수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유강렬은 1960년 홍익대에 부임했는데, 전통기반의 추상표현주의적 섬유공예에 몰두했던 작가이다. 한도룡은 목칠장인으로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후, 홍익대 공예과에서 목칠공예를, 서울대와 이화여대에서는 디자인을 가르쳤고, 이화여대 사범대학의 자수과, 상업도안과에서 강의를 맡는 등 전공 구분 없이 강의하다가, 1966년, 홍익대에 목공예전공이 신설되면서 교수로 부임했다. 상업도안과에는 백태원이 출강하여 상업디자인을 맡았는데, 백태원과 한도룡은 전통의 현대적 해석을 강조하고, 수출품 생산을 고민하던 공예가이다. 당시 홍익대의 학제는 1학년에 ‘뎃상’과 같은 기초과목을, 2학년에 탐색과목을 공통으로 진행하였으며, 3학년 때 도안과, 공예과 등으로 분리가 되었다. 정연종은 공예와 상업도안을 배웠는데 교수진의 작품 경향으로 미루어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방법을 교육받았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전통에 관한 관심은 그의 개인적인 성향이라기보다는 당시 홍익대학교 공예학부의 학풍이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2. 2. 프로파간다와 예술
1960년대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정통성에 대한 불신을 줄이고자, 민족과 애국심을 강조하고 문화재 복원사업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박정희는 철저한 근대주의자였던 것으로 알려졌지만, 정권의 프로파간다 수단으로 유독 ‘전통과 민족중흥’을 강조했다. 정부는 1961년에 문화재관리국을 설치하고, 1962년에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된 이후 국가적 차원의 문화재 보수정화사업을 펼쳤다. 1961년 남대문 공사를 시작으로, 동대문 단청 보수, 경복궁 경회루 단청, 북한산 성곽, 낙산사 5층 석탑/석불, 경복궁 민속관, 탑골공원(파고다공원), 광화문, 사직공원 내 단군성전과 사직기념관, 도산서원, 불국사, 첨성대, 한산도 충무공 유적 등 10여 년간 문화재 복원을 요란하게 지속했다.
정연종이 서울로 상경한 1964년, 당시 공화당 창당준비위원장이자 ‘5·16민족상’ 재단 이사장이었던 김종필은 서울대, 홍익대, 이화여대 조각과 학생들을 동원해 역사 위인의 석고상 37기를 만들어, 세종로의 중앙청에서 태평로의 남대문까지 길 양편으로 설치했다. 1966년 광복절, 본격적인 ‘애국선열들의 조상 건립 운동’을 위해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가 결성되어 1968년 4월 이후 세종로에 이순신 장군 동상, 덕수궁에 세종대왕 동상, 장충단공원에 사명대사 동상 등이 세워졌고, 박정희 대통령은 열두 번째 동상 기공식 때까지 어김없이 제막식에 참석하였으며, 그 과정은 여과 없이 전국에 중계되었다. 1966년 10월에는 서울 시내의 가로명을 정비하는 사업이 시작되어 ‘율곡로’, ‘다산로’, ‘난계로’, ‘왕산로’, ‘감찬로’, ‘진흥로’ 등과 같은 위인들의 명칭을 딴 가로명이 등장했다. 정연종이 대학을 다니던 1960년대 중반, 홍익대와 서울 시내는 줄곧 문화재와 관련된 공사와 이벤트들로 떠들썩했다(Kim J. 2025). 매일 같이 민족적인 이슈가 넘쳤고, 미술의 수요는 대부분 프로파간다와 관련된 것이었으며 예술의 역할이란 정부시책을 홍보하는 것으로 깊은 각인이 된 것으로 추측되는 부분이다.
한편, 상공부는 1966년 상공미전을 개최하기로 결정하고, 공모전의 주제로 ‘수출’과 ‘관광’을 제시했다. 직업적 불안정성이 큰 디자이너들에게 ‘상공미전’이라는 등용문을 통해 입상하는 것은 경제적 안정성을 담보해 주는 지름길이었고, 수상을 위해서는 정부정책의 홍보가 디자이너의 사명처럼 인식되었다. 이 당시 도안의 주제로는 ‘충무공’, ‘거북선’이나, ‘화랑’ 혹은 ‘태권도’, ‘고도경주’나 ‘통일신라’ 관련 아이템이 각광받았다. 화랑은 멸사봉공의 정신으로 삼국의 통일을 이룩한 신라의 청년단체로 정부가 요구하는 청년상에 부합하였으며, 박정희 대통령의 고향과 물리적으로 가까웠던 경주를 발굴하고 개발하는 과정에 등장한 ‘불국사’나 ‘천마총’, ‘첨성대’ 등은 정책 홍보에 좋은 아이템이었다. ‘한국 관광’ 사업도 당시의 주요한 정부시책이자 디자인계의 이슈였다. 당시 외화벌이의 일환으로 기생관광을 용인하는 분위기였고, 한국관광포스터에서도 기생이 등장하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문화가 통제되고 모든 산업의 주도권을 정부가 통제하는 시대에 ‘산업디자인’의 최대 발주처와 심사위원, 디렉터는 모두 정부였다. 60년대 거의 모든 1세대 디자이너의 포스터 작품이 관광과 수출, 혹은 사회캠페인 포스터로 점철된 것도 이러한 시대분위기가 반영된 것이다.
2. 3. 디자인포장센터 설립과 디자인에 대한 오해
1970년대까지 국내에서 디자인에 대한 인식이 왜곡되는 경향을 보였는데 그 한 원인을 상공부의 정책에서 찾을 수 있다. 정부는 1965년 9월 13일 청와대 수출진흥확대회의에서는 수출진흥책의 일환으로 한국공예기술연구소(한국디자인진흥원의 전신)를 서울대학교 부설 연구 기구로 설립하고, 상공미전(현 대한민국디자인전람회)을 개최할 것을 의결했다. 당시, 수출 증대라는 목표에 큰 걸림돌이었던 수출품 포장지 클레임을 줄이기 위해 포장재 개선에 힘을 쏟았는데, 관료들의 시선에서 포장지와 디자인은 구분되지 않았고 포장과 디자인이 한데 묶인 육성책이 발표되었다. 1966년 상공부의 지원으로 서울대 부지에 설립된 한국공예기술연구소는 원래의 이름과 다르게 ‘디자인’이라는 단어를 넣어 ‘한국공예디자인연구소’로 설립되었다. 하지만, 설립초기 한국공예디자인연구소의 공식적인 담당 분야는 목칠공예, 도자공예, 금공공예, 직조공예, 날염공예, 공업미술, 상업미술 등이었고, ‘디자인’이라는 용어는 사용되지 않아, 정부의 의도가 연구소 운영에까지 미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상공부는 연구소의 명칭을 ‘한국수출디자인센터’로 개칭하는 한편, 1966년 시작된 상공미전에 ‘수출’과 ‘한국관광’을 시상의 핵심으로 제시함에 따라 산업디자인의 목표는 일사분란하게 정리되어 나갔다. 1970년, 수출디자인센터가 한국포장디자인센터로 합병되면서 결국 디자인과 포장은 동일한 개념으로 완성되었다.
정연종은 대학졸업 후, 몇 년간 한국디자인포장센터에서 일했다. 당시 한국디자인포장센터는 상공부 장관이 센터장이고 소속연구원은 대부분 서울대 출신의 교수나 졸업생이었다. 정부와 교육기관이 화학적으로 결합된 한국디자인포장센터에서 상공부의 지침이 디자인의 목표였고, 디자이너는 정부와 산업의 계몽시책을 수행하는 전위대 역할을 맡았다. 권위적인 군사정권하에서 자발적, 혹은 암묵적으로 정권과 사회의 압력을 받아온 디자이너들은 애국심을 강조하고, 정권의 홍보를 위한 프로파간다 작품을 생산함으로써, 수출증대와 관광산업 육성이라는 시대적 사명을 내재화하고 수행해 나갔다.
또한 디자인의 사회적 수요가 부족한 시대에 작가 개인이 디자인 전공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사회적으로 성공하려면 국전이나 상공미전에서 수상하여 추천작가가 되고, 교육자로 임용되는 것이 중요했으므로, 정부의 시책과 작가의 창작목표가 일치되어 나가는 것은 당연했다. 정연종이 상공미전에서 수상한 작품이 모두 한국 전통을 소재로 제작한 관광포스터이거나 수출용 캘린더인 점도 그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다.
3. 디자이너 정연종과 한국적 디자인
정연종의 주요 약력은 다음과 같다.
3. 1. 상공미전과 한국적 디자인
정연종은 학부 시절 오구(烏口, Ruling pen)로 쌀알에 쌀미(米)자를 세 개나 새긴 일화가 남아있을 정도로 대단히 섬세한 감각을 지녔었지만1), 서울에 와서 처음으로 포스트컬러를 접했다고 할 정도로 당대 디자인계의 흐름을 잘 이해하고 있지는 못했던 것으로 추정된다.2) 그는 소위 ‘자유로운 영혼’의 예술가였고, 한국의 전통 문양을 현대화하고 상품화시키는 데에 탁월했다. 1974년 산업디자인전문회사 ‘선광기획’을 설립했고,3) 상공미전에서 수차례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았다. 1974년 <관광포스터>로 상공부장관상, 1976년 <해외용 캘린더>로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 회장상, 1977년에 <캘린더 디자인>으로 상공부장관상을 수상했다. 상공미전의 연이은 수상은 작가로서의 성공을 암시하는 중요한 징표였다. ‘한국적 디자인’을 표방한 작품도 연이어 선보였다.
Tourism Poster(1974, Minister of Commerce and Industry Award, Commercial and Industrial Design Exhibition)
Calendar for Overseas Use(1976, Chairman’s Award of the Korea Federation of SMEs, Commercial and Industrial Design Exhibition)
Calendar Design(1977, Minister of Commerce and Industry Award, Commercial and Industrial Design Exhibition)
1979년, 30대 초중반의 홍익대 출신 디자이너, 정연종, 나재오, 권명광, 류재우, 전후연, 방재기, 홍종일 7인은 ‘미도파’ 화랑에서 <한국 이미지전(Image of Korea)>을 개최했는데, 정연종은 포스터 9점을 전시했다. 1981년 개최한 <한국의 미>개인전에도 다수의 그래픽 작품을 전시했고, 이 중 전통탈의 이미지가 <국풍 ‘81>행사4)의 공식포스터로 채택5)되었다. 1986년에는 김교만, 김현, 나재오와 함께 동방플라자 미술관에서 <아름다운 한국> 전시를 개최하고, 그래픽 화보를 출간하였다.
Selected works exhibited at the <Korean Image Exhibition>(1979), <Korean Beauty>(1981), <Graphic 4>(1986)
3. 2. 토종 캐릭터 개발과 상업적 성공
정연종의 활동은 그래픽디자인에 국한되지 않았다. 1982년, 제12회 전국민예품경진대회에서 최고상인 국무총리상을 수상했고, ‘대왕기획’, ‘디자인 스튜디오 CDS’ 등의 이름으로 산업디자인전문회사를 운영했다. 1980년대에는 국내에 널리 알려진 <산도깨비> 방향제를 출시하여 상업적인 성공을 이뤘다. 문구류 회사인 <바른손 팬시>나 의류업체와 협업하여 “금다래, 신머루, 떠버기, 개골구리”와 같은 토종 캐릭터를 개발하여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특히 <금다래ㆍ신머루> 캐릭터는 90년대 초, 대표적인 토종 캐릭터로 전성기를 구가했다. 제품이나 환경디자인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에바스> 화장품 CI와 패키지, <아가월드> 브랜드를 개발하였다. 특히 <에바스>의 <마렛(Marait)> 브랜드 화장품 용기는 당시로써는 사출로 뽑아내기 어려운 곡선을 구현한 패키지로 각광받았다. 한편 서울지하철 여러 역의 벽화를 제작하고, 서울올림픽 기념 민속공예품, <오줌싸개>, <산골 아이들> 같은 목각인형형태의 전통 문화상품도 제작했다. 기타 팬시용품이나 자체 브랜드로 기획된 패션 잡화, 지역 브랜드개발사업 등, 디자인 영역을 넘나들며 종횡무진하였고, 그의 온 생애에 걸쳐 전통 문양 수집과 상품화에 매진하여 한시적으로 성공가도를 달렸다.
3. 3. 저작권 소송과 ‘한국형 디자인’6)
정연종의 인생에 전환점이 된 것은 1988년 시작된 디자인 저작권 송사이다. 1987년 5월 롯데월드측은 (주)대홍기획을 통해서 마스코트 지명 공모를 실시했고, 정연종의 <롯티(Lottie)>라는 애칭을 가진 너구리 도안이 당선되었다. 롯데월드 측은 너구리 도안이 미국의 한 캐릭터와 비슷하다는 이유로 수정을 요청하였고 정연종은 수차례 보완했지만, 수정 요구는 계속되었다. 정연종이 추가 수정을 거절하자, 롯데월드 측은 정연종에게 롯티 캐릭터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통보하고 계약 파기 합의금을 지급하였다. 이후, 롯데월드측은 1987년 12월, 만화가 이항재 씨와 도안개발 용역계약을 맺고 정연종의 작품과 유사한 너구리 도안 <로티(Lotty)>를 만들었고, 1988년 9월 롯데월드가 개장하면서 로티가 광고물이나 상품 등에 등장하였다.7)
정연종은 저작권침해로 서울민사지법에 저작물 사용금지 가처분신청을 냈다. 80년대까지도 디자인은 예술이라기보다는 기술로 인식하는 경향이 지배적이었고, 디자이너는 발주처가 요구하는 대로 용역을 제공할 뿐, 자존심을 내세우거나 저작인격권을 주장하지 않는 풍토였다. 정연종은 이미 작품에 대한 대가를 받아서 저작재산권은 다툴 수 없었고, 대신 ‘로티’의 표절 여부를 두고 저작인격권8)으로 법정 싸움을 벌여 1심에서 패소, 2심에서 승소했다.9) 캐릭터디자인의 저작권 분쟁은 이례적으로 대법원까지 상고되었다. 대법원 선고는 지연되었고 1992년 12월 24일, 이례적으로 작가의 저작인격권을 제한하는 판결이 내려졌다. 권력과 자본에 맞서는 개인 디자이너의 싸움은 무모했다. 당시 롯데월드 사장은 김영삼 대통령과 사돈 관계였고, 법원이 재벌 대기업에 우호적인 판결을 내리기 일쑤였다.10) 대법원에서 최종 패소한 이후, 4년간의 소송으로 회사가 망하고, 정연종은 가산을 탕진했다.11)
정연종은 자신의 전셋집에 ‘죠이정 인터내셔널’12)이라는 간판을 걸고 그래픽 대신 인테리어 디자인과 팬시용품 관련 사업을 시작했다. ‘죠이정(JOYCHUNG)’ 브랜드를 개발하고 스카프와 넥타이, 손수건, 우산 같은 생활소품과 의류를 제작했는데, 주로 태극, 신라금관과 귀걸이, 조선시대 여성 장신구 등의 전통소재를 현대 문양으로 재해석하였다. 한편, 삼성물산과 협업하여 아파트 인테리어 프로젝트도 진행했는데, 전통 한옥의 인테리어와 음양오행사상을 아파트 단지에 도입한 <삼성 한국형 아파트>(1996년 준공)를 선보여 큰 인기를 끌었다.13) 아파트의 단지 중앙에는 태극모양의 광장이 도입되고, 아파트 실내에 해와 달, 원앙, 사슴, 석류, 포도 등의 문양을 채택했다.14) 방바닥에는 전통마루의 격자무늬 바닥 문양을 입혔고, 벽지, 거실 바닥, 화장실 타일, 문 등에는 십장생, 단청, 우물마루, 사군자, 고구려 문양을 재해석해 새겨 넣었다. 심지어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사용했던 ‘전술비연(戰術飛鳶)’15) 모양을 거실의 등에 그대로 옮기기도 하였다. 그가 제안하는 조명, 벽지 등은 대단히 흥행했고, ‘한양화학’의 적극적인 협력에 힘입어 장판으로 생산되기도 했다.
하지만 로티 사건 이후, 정연종의 작가로서의 동력은 약화되었고, 사업은 순탄하지 못했다. 비록 40여 년간 산업디자이너로 활동을 인정받아 1996년 <산업디자이너 100인>에 선정되고16) 『한글은 단군이 만들었다』17)와 같은 책을 출판했지만 활동은 뜸해졌다. 2000년대 들어 제주도로 거처를 옮겨 ‘디자인산업전략연구소’를 설립하고, 제주도 중심의 디자인컨설팅사업을 펼치며 지역특산품의 브랜드화와 캐릭터를 포함한 테마파크 조성 등을 구상하였지만,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한 채 2024년 9월 타계하였다.18)
4. ‘한국적 디자인’이라는 시대사적 과제
4. 1. 정연종의 한국적 디자인 해석
정연종은 거의 평생 ‘한국적 디자인’에 천착하였지만, 당시 명성 있는 작가들은 한결같이 한국적 디자인을 주창하였으므로, 이를 정연종만의 작품 특징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70년대 그래픽디자인의 주된 성격은 ‘프로파간다’로, 정부시책을 홍보하는 것이 디자이너의 주된 사명과 같았다. 1972년 박정희 정권이 주창한 ‘한국적 민주주의’를 표상으로 하는 ‘한국적 추상’, ‘한국적 건축’ 등의 논의가 문화예술계에 먼저 일고, 뒤늦게 ‘한국적 디자인’ 논의가 시작되었는데, 김교만의 경우, 1970년대 중반부터 농악이나 탈춤 등 민속적인 소재를 아르데코풍이 가미된 모더니즘 스타일로 해석하여 한국적 디자인을 표현하였다. 대부분 작가들은 한국 전통 소재에 모더니즘적 방법론을 결합하는 방식의 디자인이 주종이었다. 70년대 ‘한국적 디자인’은 상공미전 수상의 지름길이었고, 80년대 서울올림픽 준비 과정에 ‘한국적 디자인’은 행사의 전체 주제로 설정되어 그 수요가 폭발하였다. 소규모 갤러리전 형식으로 ‘한국적 디자인’ 작품전이 다수 개최되었고, 각 지역의 관공서나 기념비적 건축물은 암묵적으로 한국적인 형상을 강요받는 분위기였다.
이처럼 ‘한국적 디자인’이 정연종 작품만의 특징은 아니지만, 그의 작품에는 분명한 개성이 있었다. 당시 한국적 디자인을 표방한 그래픽 작품은 대체로 일러스트레이션이거나, 일본의 ‘다나카 잇코(田中 一光)’나 ‘가메쿠라 유사쿠(龜倉雄策)’의 영향을 받은 모더니즘적 표현을 추구하는 경향이 짙었다. 특히 국내에 큰 영향을 미친 ‘다나카 잇코’의 작품은 엄격한 기하학적인 면 분할과 강렬한 원색이 특징이나, 정연종의 작품은 수묵화나 문자도의 먹선을 연상시키는 자유롭고 굵은 검정 선과 면 등의 특징으로 스타일상 큰 차이가 났다.19) 1986년 정연종이 참여한 전시 <아름다운 한국>전에서 김교만, 나재오, 김현이 선보인 작품들은 대부분 기하학적인 면 분할과 삼원색의 적극적인 활용을 통해 모더니즘적 표현에 충실한 반면, 정연종의 작품은 비정형의 수묵의 필법과 검은색 면으로 화면을 압도하고, 임의의 면 분할과 중저채도의 다양한 색상을 사용했다.
특히, 80년대는 컬러의 시대로, 컬러텔레비전 방송 송출과 더불어 전 국민은 컬러의 범람을 맛보았고, 올림픽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오방색이 한국사회를 뒤덮었다. 모더니즘의 색상이 삼원색이라면 한국적 디자인의 색상은 오방색으로 대표되었다. 오방색은 삼원색에 무채색인 검정과 흰색이 더해진 정도로, 사실상 삼원색과 같은 것이었다. 정연종의 디자인은 당대의 그래픽 조류를 따르지 않은 셈이다. 통상의 작가들이 한국적 디자인을 소재주의와 모더니즘으로 풀어낼 때, 정연종은 포스트모더니즘적 표현을 한발 앞서 도입했다 평가할 수 있다. 이런 특징이 잘 드러난 작품으로는 <국풍 81> 포스터가 대표적이며, <롯티> 캐릭터, <에바스> 로고, <금다래ㆍ신머루>의 캐릭터, 지하철역 벽화 등에서도 일관되게 표현되어 있다.
4. 2. 한국적 정체성에 대한 신념
정연종은 한국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도 깊었다. 한 예로 정연종은 1997년 4월 1일 <정연종 가구 전시회>20)를 열고 탁자 14종과 의자 2종을 전시했다. 탁자 상판에는 십장생 문양이 은입사(銀入紗) 기법으로 그려졌다. 4㎜ 깊이로 모양을 만들고, 그 안에 단청과 토분을 합한 석채(石彩) 도장을 하였던 점21)으로 미루어, 피상적인 도안만을 본 딴 작품들은 아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정연종은 “한국적 소재를 현대적 감각의 디자인으로 상품화하는 일은 내가 추구하는 일생의 과제이자 일관된 목표”라고 밝혔다.22) 그는 대학 시절에 어느 일본인 노벨 수상자23)의 ‘가장 일본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라는 말을 들은 것이 계기가 되어 한국적인 디자인을 택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이 ‘한국적 디자인’은 특정 개인이 어떠한 계기를 통하여 얻게 된 각성이라기보다는 국내 디자인계의 공통된 화두였다. 또한 정연종은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고 말하는데, 이 말은 서울올림픽뿐만 아니라, 1990년대 초, 시장개방을 통해서 위기감을 느끼던 한국 사회에서 애국심을 강조하고, 신토불이(身土不二, 몸과 땅은 둘이 아니며 하나라는 뜻) 캠페인을 펼치던 시기의 디자인계의 슬로건이기도 하여,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한편, 1980년대 초, 국내 그래픽계에서 바람을 일으킨 ‘다나카 잇코’의 작품이 ‘가장 일본적이면서 가장 세계적인’ 그래픽으로 칭송받는 분위기였고, 당대 한국적 디자인을 고민하던 일부 작가들은 다나카 잇코의 그래픽 기법에 한국 전통소재를 결합하는 방식으로 ‘한국적 디자인’의 해법을 모색했을 뿐 아니라, 나아가 ‘가장 한국적이면서 가장 세계적’이라는 표현까지 차용하였다.24) 정연종이 추구했던 한국적 디자인은 기존에 입지전적인 성공을 거두고 있던 교수 디자이너들과 함께 작업하며 자연스레 공유받은 노하우이자, 디자이너로 성공하기 위한 일종의 사업 방법론에 가까운 것이기도 했다. 그는 김교만 교수와 한국적 디자인을 주제로 그래픽 작업을 했고, 조영제 교수의 서울올림픽 행사 준비를 도왔으며, 한도룡 교수와 올림픽 조형물과 서울지하철 작업을 진행했고, 안정언 교수와 바른손 팬시의 그래픽 작업을 수행하는 등, 명성 있는 교수진과 폭넓게 교류했기 때문이다.
다만, 9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어 대부분의 작가들이 더 이상 ‘한국적’인 것을 추구하지 않는 상황에, 정연종은 한국전통문화를 바탕으로 한 ‘한국형 디자인’을 ‘세계화’하려고 노력했다는 점, 작업 범위를 공예와 인테리어로 넓혀나간 점에서는 달랐다. 한국적 디자인이 적용된 팬시용품을 수출하려 노력했고, 2006년 삼성건설과 협업하며 한국형 건축양식을 설계하며 “TIS(Total Interior-fashion System)”이라는 개념을 주장25)하는 등 끝까지 ‘한국적 디자인’ 방법론을 연구했던 진정성만큼은 인정받아야 할 부분이다.
5. 결론
정연종은 산업화가 강조되던 시기에 금성사26)를 시작으로 하여, 한국적 디자인이 이슈로 떠오르던 시기에 가장 한국적인 디자인을 추구하였다. 관제행사로 국민을 호도하던 5공화국의 출발점에서 그의 작품은 관제행사의 아이콘으로 주목받았고, 우리나라 저작권법에 대대적인 개정이 이루어진 올림픽 전후로 저작권 분쟁을 치르며 유명세를 치렀다. 한국형 디자인이 이슈가 되던 90년대에는 전통을 소재로 상업성 있는 아파트 환경디자인을 구현했고, 지역브랜드를 강조하던 2000년대 이후에는 지역특산물과 관광상품 생산에 전념했다. 그는 모든 트렌드에 앞서 있었다. 그래픽과 공예, 인테리어를 통하여, 일찍부터 ‘한국적 디자인’에 천착하였고 한국의 정체성을 찾는 데 골몰했는데, 이는 시대가 그에게 부여한 사명에 가까운 것이었다. 척박한 디자인 인식과 문화를 가졌던 한국의 고도성장기에 교육받은 그의 작품에는 시대사적 굴곡이 고스란히 투영되어 현대 디자인의 형성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권위주의 시대, 한국사회에서 디자인은 개성 있는 작품이라기보다는 국가와 사회의 도덕성을 반영하는 선전물이자 공적인 기술이었고, 디자이너는 산업의 전사로 호명되었으며, 정연종은 그 전선에서 앞장섰다. 하지만 수동적인 태도로 흐름을 쫓기만 한 것은 아니었고, 한국적 디자인에 대한 진정성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상품화하고 세계화시키려는 실험을 계속하고,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미의 본질을 찾으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당대의 트렌드인 모더니즘, 혹은 미니멀리즘적 경향을 적극 따르지 않고, 자유로운 표현방식으로 대중적인 작품을 선보였던 점도 높이 평가할 부분이다. 한 신문기사에서 전하듯, “전통 민화 특유의 자유로운 기법과 해학적인 요소를 계승하여 자신만의 화법으로 발전시켰다는 평가”27)가 그의 작품 경향을 잘 설명한 것이라 할 것이며, 관념과 프로파간다에 갇힌 ‘한국적 디자인’을 현실로 끌어내는 데 이바지하였다.
Glossary
1) ‘윤내한’ 인터뷰 (2025.12.14.18:00~19:00)
2) “정씨의 말로는 강원도에서 응용미술학과에 진학한 첫 사례였다고 한다. 『학교에 와서 보니 서울 학생들 정말 그림을 잘 그리더군요. 섬세하고 세련되고. 제 솜씨로는 어떻게 흉내도 못 내겠더라구요. 제그림은 투박한 편이었습니다. 포스터컬러라는 것을 대학 와서 처음 봤으니 말다한 셈이죠.』 실력이 부족했던지 자꾸 뒤처졌다. 다른 학생들 흉내를 내면 낼수록 더했다. 3학년때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학생들을 이기려면 자신만의 독특한 주제를 내세워야겠다고 생각했다.”(「한국적 소재, 현대화ㆍ상품화에 심혈」, (『한경BUSINESS』, 2006.9.2.) https://magazine.hankyung.com/business/article/202103051181b
3) 정연종은 자신이 최초의 디자인전문기업을 창업했고, 최초의 산업디자이너로 활동했다고 주장한다.
4) 한국신문협회 주최, 한국방송공사 주관, 1981.5.28.~6.1.
5) 5공화국 정부 측에서 대규모의 관제행사를 기획하는 가운데, 당시 한창 개발 중이던 여의도의 대형건물 건설현장을 가릴 목적으로 대형 걸개그림을 기획했고, 정연종의 작품이 선택되어 <국풍‘81> 포스터로 사용되었다.
6) ‘한국적 디자인’이 1980년대에 유행한 관념적인 작업임에 반해 ‘한국형 디자인’은 1990년대, 한국인의 라이프스타일에 맞춘 실용적인 디자인을 지칭한다.
7) 「로티, 1989」, 네이버캐스트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3568911&cid=58795&categoryId=58795> 검색일: 2025.10.19.
8) 저작인격권이란 저작물을 저작자의 정신적, 인격적 창작물로 보아 저작자의 인격을 보호하는 권리이다. 공표권(공개 여부 결정), 성명 표시권, 동일성 유지권을 포함하며, 저작자에게 일신전속되어 양도나 상속이 불가능하고, 저작자가 사망하면 소멸한다. 정연종 측이 주장한 것은 ‘동일성 유지권’으로, 작가의 허락 없이 저작물의 변경, 개작 등을 해서는 안 되는 권리이다.
9) 재판부는 결정문에서 “호텔롯데 측은 눈 부위 선의 모양이나 손의 형태 등이 다르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복장의 종류 ▲얼굴 방향이나 발을 벌린 각도 ▲3등신 비례 ▲앞니가 하나이고 웃을 때 혀가 보이는 점 등 기본자세와 이미지가 매우 비슷하다.”고 밝혔고, 2심에서 정연종은 승소했다.
10) 한편, 롯데월드 측은 정연종이 군 미필인 점을 시비걸 정도로 감정이 격해져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연종은 오른손 검지손가락에 장애가 있어 군복무 부적합 판정을 받았고, 평소 그림도 다른 손가락으로 그렸는데, 이를 무시하고 병역법으로 고발하려는 태도조차 보였다(윤내한 인터뷰).
11) 대법원 1992.12.24. 선고 92다31309 판결.
12) 이후 ‘안도정 인터내셔널’로 개칭하였다.
13) 당시 부동산경기 악화로 수원 영통지구에 아파트들이 대부분 미분양된 것과 대조적으로 삼성 한국형아파트는 크게 성공하였다.
14) 「삼성 한국형아파트 모델 개발」, 『조선비즈』, 1996.7.15.
15) 임진왜란 당시에 충무공이 원거리간의 통신과 전술신호수단으로 사용한 연이다.
16) 「한국의 산업디자이너 100인 선정」, 『산업디자인』 148호, (1996.8.)
17) 『한글은 단군이 만들었다』, 넥서스(1996). 한글의 역사를 태극, 한글, 역사편으로 나누어 방대한 고증자료와 사진 250여 장을 실어 설명하고 있다.
18) 말년에 소위 ‘이단’으로 불리는 특정 종교단체에서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자세한 내용은 아는 이가 거의 없다.
19) 정연종의 초기 그래픽 작품의 일부에서 ‘밀턴 글레이저’나 ‘다나카 잇코’의 표현기법을 차용하는 경우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월간 『디자인』 1990년 12월호 인터뷰에서 “지금까지 우리나라 디자이너들은 그래픽 아트를 예술의 경지로 승화시킨 다나카 잇코처럼 되기를 소원해 온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울타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가로막힘을 힘차게 뛰어넘어야 비로소 자기의 모습이 보입니다.”라고 말하는데, 정연종은 다나카 잇코 스타일을 뚜렷이 경계하고 있었던 것이 확인된다.
20) 전시장을 따로 마련할 돈이 없어 국제전자센터빌딩 내에 커피점 ‘가림토’에 가구를 제공하고, 그 대가로 전시 공간을 빌렸다. 커피점 입구에는 ‘정연종 가구 상설 전시장’이라는 간판을 작게 붙였다고 한다.
21) 「30년 외길 ‘디자인 독립운동가’ 정연종씨」, 『시사저널』, 1997.04.24.
22) 위의 글.
23)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1899~1972), 1968년 아시아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일본의 미의식을 깊이 파헤치는 것으로써 세계적인 보편성을 갖게 된다는 취지의 발언인데, 당시 일본의 미의식을 이상화한 문장이 서구인의 오리엔탈리즘적 상상력을 자극한 측면이 있다.
24) 김종균(2015), 「1960~80년대 국내 일본디자인의 영향과 과제」, Archives of Design Research. 참고.
25) 「한국적 소재, 현대화ㆍ상품화에 심혈」, 앞의 글.
26) 금성사는 국내 최초로 디자이너를 공개채용(1958)하고, 디자인실(1963)을 설치한 대기업이다.
27) 「한국적 소재, 현대화ㆍ상품화에 심혈」, 앞의 글.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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