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s of Design Research
[ Article ]
Archives of Design Research - Vol. 26, No. 3, pp.161-175
ISSN: 1226-8046 (Print) 2288-2987 (Online)
Print publication date Aug 2013
Received 05 Jan 2013 Revised 24 Jan 2013 Accepted 10 Jul 2013
DOI: https://doi.org/10.15187/adr.2013.08.26.3.161

A Study on the Basic Foundation for Automobile Design in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LeeOakboon
Design Studies Lab. Kookmin University, Seoul, Korea
일제시대 자동차 디자인의 기초적 토대 형성에 관한 연구

Background The car is an item that contributed greatly to the development of Korean design together with urbanization and industrialization. Having a leading role in industrialization, the car’s historic significance is concentrated in the process of its growth since the 1960s. The design history also focuses on the development achieved by introducing foreign technology at that time. In this recognition, studies on the cars introduced to Korea for the first time under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that were set as daily means of transportation are insufficient. This study is based on the vision to extend the history of Korean automobile design, and considers the course of formation for a practical foundation of the automobile industry and the design at that time.

Methods This study encompasses all types of cars including passenger-type vehicles, buses and trucks. While previous studies on the economy, the industry and the technology were researched, references on the formation of several conditions, its background and design production activities accordingly related to the process of diffusion toward various cars and their manufacture were also collected.

Results The Korean automobile industry was started in the process of the spread of modern institutions and infrastructures by Japan in the Joseon dynasty, but it was subject to Japanese control and monopoly capital. Thus its substantial development was not achieved because it was industrialization for Japan’s interests. The foundation of industrialization was established due to the efforts of Koreans who took this as an opportunity to accumulate the technology actively by responding to the industrialization process of Japan, and these efforts have supported the formation of a modern design. Although the cars manufactured or modified in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may have been possible cases of design activity, it was difficult to identify the sufficient data on to what extent and what kinds of modifications were attempted. However, we just found that there was a history of efforts to bring about change and make progress even during the colonial period, and traces of the design through such evidence in this study.

Conclusion We could verify that this kind of history reflects the desire of the Korean people to pursue economic independence, and it was tacit knowledge that sustained the development of the automobile and the design within the limits of the era after liberation. These study results were based on a perspective that emphasized the proactive response of Koreans and the accumulation of experience, and identified the design history with a continuous viewpoint connecting the pre-and post-liberation periods.

초록

배경 자동차는 도시화, 산업화와 더불어 한국의 디자인 발전에 크게 기여한 사물이다. 산업화의 주역으로서 자동차는 1960년대 이후의 성장과정에 그 역사적 의미가 집중되고, 디자인 역사 또한 이 시기 외국에서 기술을 도입하여 이룩한 발전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이러한 인식에서 자동차가 한국에 처음으로 들어와 일상적인 교통수단으로 정착한 일제시기에 대한 연구는 상당히 미흡하다. 이 연구는 한국 자동차 디자인의 역사를 근대기로 확장하는 시각에 바탕을 두고, 자동차 공업과 디자인의 실질적인 토대가 형성되는 과정에 대해 고찰했다.

방법 연구 범위와 방법은 일제시기 자동차를 대상으로 하여, 경제, 산업, 기술 등 관련 선행자료를 살펴보고, 다양한 차량으로 확산되는 과정과 차량 제작에 관련된 여러 조건이 형성되는 배경 및 그 활동 사례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여 진행하였다.

결과 한국의 자동차 공업은 일본이 조선에 근대적 제도와 기반 시설을 보급하는 과정에서 시작되었으나, 실질적인 발전을 이룩하지 못했다. 실제적인 토대는 일제의 공업화 과정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며 기술력을 쌓은 조선인의 노력으로 이루어졌고, 이러한 노력은 근대 디자인의 형성을 뒷받침했다. 당시 자동차 조립과 개조 활동은 디자인 사례로 가능성을 가지지만, 이 활동이 어느 정도 범위로, 어떠한 형태 변형을 가져왔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확인하기 어려웠다. 단지 이 연구를 통해 주권을 잃은 식민지시기에도 삶의 변화와 진보를 위해 노력한 역사가 있었으며, 그러한 증거로 디자인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결론 이러한 역사는 해방 후 시대적 한계 속에서도 경제적 자립을 이룩하는 힘의 바탕이자, 자동차 산업 발전과 디자인을 받쳐 주는 암묵적 지식으로 존재했다. 이 연구는 조선인의 능동적인 대응과 경험을 중시하며, 자동차 산업과 디자인의 역사를 해방 이전과 이후를 잇는 연속적인 시각에서 파악하는 것이다.

Keywords:

introduction of the automobiles, accumulation of maintenance engineering, the armaments industry, training of technical professionals, self sustainable design, 자동차 공업화, 정비 기술의 축척, 조립 공장의 설립, 군수산업화, 기술 인력의 성장, 자생적 디자인, 암묵적 지식

1. 서론

자동차는 도시화, 산업화와 더불어 한국의 디자인 발전에 크게 기여한 사물이다. 산업화의 주역으로서 자동차는 1960년대 이후의 성장 과정에 그 역사적 의미가 집중되어 있고, 디자인 역사 또한 이 시기 외국에서 기술을 도입하여 이룩한 발전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이러한 인식에서 자동차가 한국에 처음으로 들어와 일상적인 교통수단으로 정착한 근대기에 대한 연구는 상당히 미흡하다. 이 연구는 한국 자동차 디자인의 역사를 근대기로 확장하는 시각에 바탕을 두고, 이 시기 자동차 공업과 디자인에서 그 기초적인 토대가 형성되었음을 밝히는 것이다. 따라서 연구 범위는 자동차가 처음 도입되고 관련 제도와 시설, 제작 시스템이 마련된 일제시기를 대상으로 하여, 먼저 자동차 도입 초기의 전반적인 교통 상황을 살펴보고 다양한 차종으로 확산되는 과정과 차량의 주요 디자인을 살펴보았다. 다음으로 정치, 경제, 공업, 기술 부문 등의 선행 자료를 살펴보면서 차량 제작에 관련된 여러 조건이 형성되는 배경과 과정에 대해 고찰했다. 이 과정에서 도시 사회적 요구와 산업 확장, 기술 인력의 등장 등 자동차 제작을 이끈 제반 요인과 이에 대응해 나타난 제작 활동과 공장 설립 과 같은 구체적인 사례를 수집하면서, 자동차 디자인의 흔적을 발견하고자 노력했다. 이것은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적 한계 속에서 한국 자동차 디자인의 토대가 어떠한 방식으로 형성되었는가에 대한 결론과 그 의미를 도출하는 것이며, 이 시기를 한국 자동차 디자인의 맹아기로 의미짓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결론은 한국 자동차 디자인의 역사를 해방 이전으로 확장하는 시각에 기초한다.


2. 자동차의 국내 도입과 양적 증가

2.1. 자동차 도입 전후의 교통 환경

19세기말 이전 자동차가 도입되기 전의 한성은 걸어서 다닐 수 있을 정도의 공간, 즉 종로 네거리를 포함하여 4대문에서 연결된 대로와 4소문에서 연결된 중로, 구불구불 이어진 골목길이 전부인 농경도시였다. 이처럼 도로가 원시적인 상태에 놓여 있었던 것은 농본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던 시대에 여행과 이동은 불필요했고, 상업행위를 천하게 여겨 지역 간 물자교류도 드물었으며, 운송 수단도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보행에 의존하여 좋은 길이 필요 없었고, 오히려 길을 잘 닦아 두면 외침을 당했을 때 적의 침입을 쉽게 한다고 생각하여 험한 길을 그냥 두었기 때문에 도성과 지방을 연결하는 도로는 굴곡도 많고 거칠고 폭도 일정하지 않았다.(Park, 2003) 따라서 운송수단이라고는 가마와 교자, 말이 전부로 도성에서는 사람이나 짐승이 끄는 수레도 거의 다니지 않았다. 이러한 교통 환경은 1876년 일본과의 강화도 조약을 시작으로 서구 여러 나라와 국교를 수립하고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빠르게 변화했다. 갑오경장(1894년)을 전후해서 서양 마차, 인력거, 자전거가 들어왔고 1899년에는 전차와 철도가 부설되었다. 전차를 도입하면서 종로거리를 정비 확장하기 시작했고, 일제시기에 들어 도로의 신설과 확장, 개수가 이루어지고 아스팔트가 깔리면서 본격화 되었다. 길을 따라 근대적 교통수단은 빠르게 늘어났고, 서울의 변화를 주도했다.(Son, 1994) 철도가 장거리 이동을 담당하는 대신 단거리 이동은 자전거, 인력거, 우차와 마차가 맡았고, 이러한 차량을 제조하는 업체도 생겨났다. 여러 우마차 운송회사들은 서울 전역을 연결했고,(Jeon, 2011) 1920년대에 들어서는 자동차 운송회사도 설립되면서 근거리 지방을 연결하는 교통망의 형성에 가세했다.

2.2. 자동차의 증가

1911년 고종의 어차가 도입된 이후 상류층을 중심으로 차츰 늘어난 자동차는 1920~30년대를 지나며 대폭 증가했다. 개인 소유 보다는 자동차 운송회사가 늘어나면서 차량 수가 증가했고, 주로 상류층의 유흥거리나 사업용 또는 일본인 진출 지역의 이동과 화물 운송에 사용되었다. 자동차 영업은 일정 사용료를 지불하고 자동차와 운전수를 임대해 운영하는 방식의 택시업과 근거리 지방을 연결하며 손님을 실어 나르는 시외버스업으로 이루어졌다. 주로 미국 포드와 시보레의 8인승이나 14인승 포장형 승합차가 사용되었다. 시외버스는 주요 도시를 연결하며 점차 전국으로 확대되어 30년대 말에는 36인승 대형버스도 등장했다.(Son, 1996) 1928년에는 경성 시내를 노선 따라 다니는 시내버스도 운행 되기 시작했다. 시내버스는 일본에서 들여온 차량으로 좌석 14명과 입석 8명으로 총 승차정원이 22명이었다. 처음에 경성부에서 운영할 때에는 시내 노선을 다녔으나, 경성전기로 넘어가서는 전차가 다니지 않는 구간에 배치되었다. 버스가 생기면서 서민들도 자동차를 탈 수 있게 되었고, 공업이 발달하면서 화물 운송을 전담하는 트럭도 수입되었다. 1930년대 초반에 이르면 지방의 작은 도시에서도 낡은 포드차를 볼 수 있고, 경성에만 영업소가 60개소를 헤아릴 만큼 자동차가 대폭 늘어났다.(Lee, 2004) 자가용, 영업용 자동차, 버스, 트럭 등 차량의 종류가 다양해지고, 또한 포드 T형에 이어 GM의 유선형 차량이 증가해 스타일도 다양해지는 등<Table 1>에서 보듯이 자동차 보유대수는 1911년 2대에서 1920년 679대, 1930년에는 3,873대로 증가하였다.(Son, 1996)

The number of automobile ownership of the country (Son, 2005)

(1) 포드 T형

자동차 도입 초기 들어온 포드 T형은 천장이 없는 천막지붕의 포장형 (오픈형)으로 부속품 교체가 편리하고 가격이 저렴했다. 포드T형은 1920년대 자동차 가격을 이전에 비해 절반 이하로 떨어뜨린 생산 방식의 혁신으로 전 세계 자동차 시장을 석권한 표준 자동차였다.(Moser, 2007) 이러한 디자인은 1886년 벤츠가 자동차 특허를 내고 새로운 동력기관으로 널리 퍼진 초기 자동차의 형태에서 탈피한 것으로, 이동성에 초점을 맞춘 기능적이며 보편적인 디자인이었다. Figure 1에서 보듯이 스타일은 차고가 높고, 벨트라인이 탑승자의 허리보다 낮으며, 단순한 평면 차체로 가공이 용이한 형태였으며,(Gu, 1998) 목재 프레임에 금속판을 덧붙여 차체를 만든 각이 진 박스형이었다. 포드자동차가 세계적으로 진출하면서 1924년 일본에 조립공장이 설립되었고(Shin, 2007) 이 공장에서 조립된 자동차가 국내에 들어왔다. 특히 철도회사가 시외버스 영업을 연계 운영하면서 일괄해서 포드차를 승합버스로 운영했기 때문에 포드차가 압도적으로 많았다.(Son, 2005)

(2) 지엠 유선형 자동차

유선형 스타일은 프레스 판금 성형한 철재부품들을 용접해서 곡면으로 제작하는 성형기술이 개발되면서 나타났다. 이러한 성형 기술은 이전의 목재차체로는 적용할 수 없었던 둥근 금속판의 자유로운 스타일링을 가능하게 했다. 원래 유선형은 공기저항을 최소화하는 형태라는 의미를 지니나, 당시에는 이와는 상관없이 곡면의 스타일을 일컬었으며, 초기 성형 기술의 한계로 굴곡이 크고 부드럽고 유연했다. 이와 같은 금속제 차체는 차체의 외형만이 아니라 자동차 디자인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자동차 구조가 외부와 내부로 격리되었으며, 기계 장치가 집중된 조종 계기판이 구성되어 모든 조작을 운전석에 앉아서 할 수 있게 되었다. 유선형은 부품의 표준화를 통해 획일적이며 각진 스타일을 지닌 포드디자인에서 벗어나 대량생산 시스템을 기반으로 기술적인 진보를 이룩하고 모델의 다양화를 가져온 스타일이었다.(Moser, 2007) 이러한 유선형의 자동차는 지엠이 주도했으며, 1925년 일본에 지엠 조립 공장이 설립되면서 국내 도입이 증가했다. 1930년대에 들어서도 여전히 국내에는 포드차가 많았지만(Son, 1996), 유선형의 지엠 시보레와 뷰익, 크라이슬러 등 여러 브랜드의 차량이 등장하면서 각진 마차 스타일의 포드형에서부터 곡면의 낮은 유선형 스타일까지 그 종류가 다양해졌다. 일제시대 자동차는 이와 같은 대량 생산을 실현한 보편적인 스타일의 포드와 기술적 진보가 이루어낸 유선형 지엠이 대다수를 차지했다.

Figure 1

Ford T and GM Buick


3. 자동차 제작 여건의 형성

3.1. 도시 인구의 증가와 수요의 확대

1910년대 중반이후 자동차 판매점, 주유소, 보험업, 정비소, 운전강습소 등 자동차의 운행과 관련된 부문이 자리 잡고, 시내버스도 운영되는 등 1920~30년대 경성에는 근대적 교통수단이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변화는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경제가 성장하고 인구가 증가해 사람과 물자의 이동이 활발해지면서 나타났다.

일제의 농촌 수탈을 피해서, 교육의 기회를 좇아서, 농촌의 지주도 도시에 자리 잡으면서, 지속적으로 경성의 인구 집중이 이루어졌고, 용산, 영등포, 인천 등 공업지대가 형성되면서 산업이 발전했다. 국내 경제가 이처럼 활성화된 것은 일본의 경제 상황과 맞물려 있었다. 세계1차대전(1914~1918년) 동안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한 일본은 자본을 수출할 만한 여력을 갖추게 되었고, 종전 후에는 설비 투자의 과잉상태와 세계 대공항의 여파로 경제공항이 닥치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기업들의 조선 진출을 장려했다. 이러한 정책으로 국내에는 1917년 까지만 해도 매년 20개 업체 정도가 새로 설립되었으나, 1919년에는 100개 업체, 1922년에는 239개 업체로 늘어났다.(Lee, 1993) 또한 국내에 근대적인 금융기관이 정비되고, 철도와 도로, 항만, 발전소 등의 사회간접자본이 확충되어 일본 기업체가 진출할 수 있는 기반이 조성되면서 이러한 붐을 흡수했다.(Jeon, 1990) 산업경제적인 여건이 조성되고 도시 집중이 이루어지며, 특히 1930년을 전후해서는 조선의 군수공업화가 추진되고 산업시설이 도시에 건설되면서 인구 집중이 더욱 가속화되었다. 이에 따라 대중교통수단의 증대가 절실해졌다. 차량은 대부분 일본에서 비싸게 수입해 왔고, 수적으로 꾸준히 증가했지만, 교통 수요에 비해 크게 부족했다.

3.2. 공업화와 기술 인력의 성장

(1) 정비 기술의 축적

정비 기술은 1901년 철도 차량의 제작과 재생 작업, 보수를 겸하면서 시작되었고, 자동차 정비소는 1915년 정동에서 자동차 판매점을 운영하던 미국인이 고객들의 차량을 수리해 주면서 나타났다. 이 정비공장에서 조선의 젊은이를 뽑아 정비 기술을 가르치면서 최초 정비사가 탄생했다. 1922년에는 일본에서 정비 기술을 배운 정무묵 등이 을지로에 ‘경성서비스 공장’을 차리면서 조선인이 운영하는 정비업체도 생겨났다.(Jeon, 2010) 1946년 두산그룹의 토대를 마련한 박두병은 중고 포드승용차와 일제 트럭을 구입해 택시와 화물 운송업을 하면서 정비소를 함께 운영했다.(Doosan, 1996) 자동차 정비업은 독립된 형태로 운영되기 보다는 운송업자 또는 판매업자가 자기 차량이나 고객 차량을 수리하기 위해 운영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처럼 자동차 공업의 기초는 정비 기술이 중심이 되었다. 자동차 기술은 산업 발전에 필요한 중요 신기술로 일제가 독점적으로 장악하고 있었으며, 일제의 신기술은 기술과 과학의 문명화를 이루지 못한 조선으로 침투할 수 있는 장치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일본은 조선인의 기술발전을 차단했고 조선인은 정비나 수리, 기술 보조 등 하급 부문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Kim, 2005) 이러한 상황에서 국내 기술의 교육과 보급은 공업보습학교나 지방공업전습소와 같은 교육기간에서 하급 수공업 인력을 양성하는 초보적인 수준으로 유지되었다. 조선인의 기술 습득이 이처럼 기초적인 수준으로 제한 되었지만, 점차 기술을 축적한 사람이 나타나며 공업 기술력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는 대부분 일본으로 건너가 공장에 취업하거나 학원에 다니는 등 스스로 기술을 익히며 공업기술 주변에서 경험으로 배운 사람들이 주도했다. 최무성과 함께 최초 국산자동차 시발(1955년)을 제작한 최순성은 경성서비스공장에서 엔진반장을 했던 정비기술자였고, 시발의 엔진 제작을 주도했던 김영삼은 일본에 건너가 기계학원에서 설계와 용접기술을 배우고 엔진수리공장을 찾아다니며 기술을 배운 사람이었다.(Car life, 1993.5) 1950년대 중반 규격 버스를 만들어 서울시내 버스의 90%를 점유했던 하동환버스의 성공을 뒷받침한 사람 역시 철도청 공작창에서 오랫동안 단조품 제조에 종사했던 기술자였다.(Jeon, 1992) 이처럼 자동차 기술은 실제 현장에서 체득한 암묵적 지식으로 축적되었다.

(2) 산업 기술 인력의 성장

초보적인 수준에서 유지되어 오던 국내의 기술 교육은 1930년대 들어 산업 기술 인력을 양성하기 위한 집중적인 과정으로 본격화되었다. 이러한 교육 방침의 전환은 일제가 대륙침략을 감행하면서 조선을 병참기지화하고 이에 필요한 기술 인력을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일제는 군수산업화를 위해 국내 산업구조를 경공업에서 군수공업 중심의 중화학 공업으로 급격히 재편하고, 중화학공업에 관련된 기계와 전기, 광산 관련 산업시설을 설치했다. 이 과정에서 숙련공이 대거 필요했으나, 고급 기술 인력은 일본인이 독점해 온 상황에서 조선에는 이에 대응할만한 인력이 없었고, 일본인 숙련공이 전쟁에 동원되어 빠져나가면서, 생산현장에 투입할 수 있는 기술 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일제는 단기간에 기술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전문 교육기관을 설치했다. 관공립 양성소와 공장 내에 사설 양성소를 설치하는 등 1~2년 단기과정을 마련했다. 특히 조선공업협회가 설립한 숙련공양성소는 조선인 기능 인력이 가장 많이 배출된 곳으로 교육생을 주요 공장에 위탁해 실습 교육을 했다. 이 기관에서 1945년까지 약 1천명 규모의 인력이 양성되었다. 이러한 정식학교 외에 조선인이 세워 운영한 사설 학원에서도 단기 과정으로 인력을 배출했다. 직업학교 단기과정과 공업계 강습소, 학원이 대거 설치되는 등 기술교육이 확장되면서 산업계에 파급되었다. 이처럼 1930년대 후반부터 일제의 기술 장악이 느슨해진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조선인에게 기술 습득의 기회가 주어졌고, 조선인은 이를 계기로 삼아 기술능력을 갖추는데 노력했다.(Kim, 2005) 조선인은 1930년만 해도 주로 간단한 농업용 기계, 우마차, 짐차 등의 조악한 차량을 제조하는데 그쳤으나, 기술 교육이 확대되면서, 1937년에는 철도차량, 선박 등 주요 생산을 제외한 모든 업종에 걸쳐 진출하였고 특히 군수에 사용되는 운송수단의 제조, 수리 분야에 많이 진출했다.(Jeon, 2011)


4. 자동차 제작 사례

4.1. 개조차의 제작

1920년대 후반, 경제 활동이 활발해지고 자동차가 증가하면서 필요에 맞춰 개조한 차량이 등장했다. 천막 지붕을 없애고 얇은 철판 지붕과 유리 창문을 달아 개조한 차량이었다. 국내에 들어온 미국 승용차들은 지붕이 없는 오픈형이 대부분으로 차량 외부에 있는 장치를 조작하는데 번거로움을 피하고, 비를 피하는 정도에서 천막 지붕을 달은 형태였다.(Moser, 2010) 천장이 있는 클로즈드형도 있었지만 고가로 판매해 국내에는 대부분 저가형인 포장형이 많았다.(Kim, 1999.2) 그러나 오픈형 자동차는 포장이 안 된 흙길을 달리면서 먼지를 뒤집어 쓰기 일쑤였고, 겨울에는 추워서 타기 힘들었다. 그렇다 보니 영업용 자동차는 먼지를 덜 뒤집어쓰는 운전수 옆 자리가 특등석이 될 정도였다.(Jeon, 2010)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천정을 설치하는 개조 작업이 유행했다. 비용을 고려하고 사용 환경에 맞게 개선하는 과정이었다. 이러한 자동차 개조 기술은 점차 확대되면서, 1930년대 후반 일제가 중일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에 들어가면서 시작된 전시 경제의 일상을 도왔다. 미국이 군수물자인 자동차의 일본 공급을 중단하면서 1938년부터는 차량과 부품 조달이 어려워졌다. 1941년에 이르러서는 ‘자동차 수리용 부품 배급 통제 규칙’이 발포되어 일본에서 부품이 수입되는 것이 전면적으로 금지되었다. 게다가 전쟁 수행을 위해 철, 고무, 석유, 석탄, 석유, 종이와 설탕에 이르기까지 모든 물자가 동원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동차는 대부분 고장나거나 사용할 수 있더라도 기름이 없어 운행이 중지되었다. 수리용 부품, 타이어, 튜브, 석유 등 모든 것이 품귀되는 상황에서 관용차나 군수품 수송 등 시국에 관련된 일이 아니면, 개인이 자동차를 사용하는 일은 거의 사라졌다. 택시도 중지되고 버스와 화물자동차 회사는 1도 1사로 통합되는 등 자동차 사용이 억제되었다. 자동차가 부족해지면서 노후차를 해체하여 폐부품을 재생하거나 석유 대신 대체 연료를 사용하는 차량으로 개조하는 일이 등장했다. 목탄차와 카바이트차는 1939년 연료 자급력이 낮았던 일본이 고안해 개발한 차량이었다. 목탄차는 자동차 엔진 옆에 가스발생로라는 별도의 장치를 설치하여 숯불을 피워 엔진을 움직이는 차량이었다.(Son, 2005) 카바이트(아세틸렌)차는 석회석에서 짜낸 카바이트를 원료로 하여 제작한 자동차였다. 일제는이 차의 성능이 가솔린차에 못지 않다고 선전했다.(Dongailbo, 1939.8.31) 카바이트는 철도국과 경성전기주식회사에서 유력한 대용연료차로 운행하면서, 1940년 200여 대에 달했다. 또한 조선금속공업주식회사에서는 운영비를 줄이고 수송인력을 늘이기 위해 종래의 35인승 차를 50인승 대형 자동차로 개조했다. 이 차가 교통량이 많은 노선에 투입되었다.(Kim, 2005) 이처럼 자동차 공업과 기술력은 사용상의 문제나 전시 환경에 맞도록 자동차를 개조하는 작업을 중심으로 축적되었다.

4.2. 조립자동차의 제작

처음으로 생긴 자동차 조립공장은 1935년 포드대리점 세루상회를 인수해 자동차 판매점을 운영하던 일본인이 오사카의 포드 조립공장에서 엔진, 변속기, 핸들, 브레이크가 달린 하체를 들여와 국내에서 차체를 조립한 공장이었다.(Jeon, 2010) 이 곳에서 제작된 20인승과 30인승 포드버스는 수입에 의존해 오던 이전 버스들에 비해 훨씬 저렴했다. 1935년에 이르러서는 조선인이 경영하는 공장이 생겨났고 주로 자동차 차체를 제작했다. 1936년 말에 부산에서 정비업을 하던 백영식은 버스 차체를 만들어 첫 국산 버스를 제작했다. 이처럼 1930년대 후반 일본에서 엔진과 모터 등 주요 부품을 수입하여 조립하고 부수적인 가공을 거쳐 완성차를 만들어 판매하는 소규모 공장이 늘어났다. 이러한 공장 중 조선인이 경영하는 공장은 절반 정도였고 직공이 50명 미만의 소규모였다. 차량 제조 공장은 계속 증가해 1929년 40개, 1936년 65개, 1940년 104개에 달했다.(Gazo, 2003). 1936년 2월 2일 동아일보 기사에는 조선내 자동차 공업대책을 확립할 계획으로 진행한 식산국 조사 기사가 있는데, 이에 따르면 조선내 자동차공업은 차체제조, 조립공장이 주류이고, 연간 자동차 수요는 2000대 수준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소규모 제조업체는 1941년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어 부품 수입이 중지되면서 조립 제작을 중단하게 되었다. 업체들은 폐업하거나 노후 차량의 해체작업과 이 과정에서 나온 부품의 재생에 주력했다. 이와 같은 소규모 공장이 파산하는 동안, 대규모 전문공장이 일본에서 직접 진출해 들어왔다. 자동차 공업은 시대적인 조류에 휩쓸리며 낮은 기술 수준에 머물러 있었지만, 30년대 후반을 거치며 양적으로 조금씩 성장했고, 군수 산업화되면서 소규모 업체는 거의 사라지고 일본 대기업으로 개편되었다.


5. 군수산업화와 자동차 공장의 건설

자동차 관련 기계공업은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 중일전쟁을 계기로 조선의 병참 기지화가 이루어지면서 본격적으로 형성되었다. 또한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으로 전쟁이 이어지면서 군수물자의 생산과 수리, 운수 공장, 광산 분야의 확대는 더욱 시급해졌다. 군수산업화로 들어가면서 기계공업은 다른 분야보다 양적인 면에서 급속하게 성장했다. 조선은 전력과 군수물자의 원료가 풍부할 뿐만 아니라 중국대륙에 인접한 지리적 조건으로 산업의 군사화가 급격하게 진행 되었다. 1936년 조선 산업의 군사적 재편성안이 계획되고 이를 계기로 일본의 중화학 공업이 국내에 대거 진출했다.(Jeon, 1990) 일제는 대기업 진출을 위한 제반 시설을 정비하고, 중소공업은 군수관련 산업으로 전환시키거나 하청하는 방침하에 기계공업의 급속한 확장 계획을 추진했다. 동경, 지포, 일립 등 기계공장을 유치하고 비행기, 디젤자동차, 전기기계 등 특수 기계와 공작 기계를 생산하기 위한 기업 정비를 실시했다.(Kim, 1998) 자동차 관련 공업은 군수품 공장으로 전환되거나 새로 신설되기도 하였다. 1935년 자동차 차체 제조 및 수리를 목적으로 조선금속공업이 설립되었고,(Park, 2005) 1938년 일본차량주식회사 인천공장이 건설되었으며, 1905년 설치되어 철도 차량의 제작을 맡았던 용산 공작주식회사는 시설이 확충되고 군수품 생산업체로 전환되었다.(kim, 1985) 자동차산업은 일본에서도 1945년 종전 때까지 미국에서 생산된 포드와 시보레가 주로 사용될 만큼 산업 진입이 늦은 업종이었으나, 전쟁 준비에 들어가면서 1936년 ‘자동차제조법’을 제정하고 닛산과 도요타에서 자동차 생산을, 이스즈와 미쓰비시 등에서는 각종 부품 생산을 허가하고 정부지원책을 강구하기 시작했다.(Son, 2005) 일본 내 자동차산업을 육성하면서 국내에서도 일본의 전시경제를 뒷받침하는 대규모 공장을 건설해 자동차 공업을 급하게 추진하려 했다. 하지만 국내에 기술적인 기반이 성장하지 못한 상태에서 생산력의 확대나 내실있는 발전은 불가능했다. 1938년 기계 분야는 조선 총공업 생산의 단지 2.3%에 불과할 정도로 비중이 매우 낮으며, 기계의 보수와 수리도 일본에 의지할 만큼 기초적인 토대를 갖추지 못했다.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도 모든 자본재와 기계기구만이 아니라 부속품과 부분품도 일본 기술에 의존했고, 너트와 볼트, 와셔조차도 일본에서 수입해 와야 했다. 기계와 부품만이 아니라 최신 설비를 도입해도 올바른 작동법이나 고장 수리법을 몰라 일본의 전문 기술과 숙련 인력에도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Carter, 2008) 주요 공작기계나 기관차 등은 전량 일본에서 수입하였고 국산조달비율은 10%를 넘지 못할 정도로 후진성을 면치 못했다. 1930년대 후반부터 일본 대기업 중심으로 자동차 공업이 재편되었으나, 공업 토대가 갖추어지지 못한 상황에서 실제적인 생산력이 확대되지는 못했다.


6. 국내 자동차 공업과 디자인 토대의 형성과 의의

자동차 공업은 근대 산업의 핵심임에도 불구하고 일제말기에 이르기까지 발전되지 못했다. 1910년대 후반부터 조선의 주요 수송수단은 철도와 자동차로 넘어왔고, 자동차는 철도 운송을 보조했다. 1920~30년대 조선의 공업화가 추진 되었지만, 전적으로 일본의 필요에 따라 수공업 기술에 기반하거나 기술과 설비수준에 크게 좌우되지 않는 노동집약적인 부문을 중심으로 추진되었다.(Jeon, 2011) 공업 원료, 천연자원 개발, 경공업 등의 분야로 국한되면서, 기계공업은 수리 가공업이나 단순한 부품의 제작공장으로 허가되었다.(KDB, 1960) 1930년대 군수 공업화가 진행되면서 급격하게 중공업 건설과 산업 인력 양성을 추진했지만, 기반이 부실한 상태에서는 한계가 있었다. 기계 공업의 발전은 이처럼 부진을 면치 못했지만, 조선인은 이 틈에서 능동적으로 대처하며 기술적 역량을 쌓았다. 경제사학자 안병직(An, 2011.12)은 식민지 기간에도 노동 경험을 축적해 조선인 기능 인력이 크게 성장했다고 주장했다. 한국의 자동차 공업 발전은 일제의 지원과는 거리가 멀었고, 열등한 민족으로 간주되어 하급 수공인력으로 운용되었지만, 조선인은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 자기 향상을 이루었다고 강조했다.(Jeon, 2010) 주익종은 60년대 빠른 경제 성장은 이러한 흡수 능력이 조선인 내부에 이미 상당한 정도로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주장했다.(Carter, 2008) 이러한 노력으로 일제가 물러간 후 관련 산업설비와 하부구조를 이용해 새로운 필요에 맞추어 활용할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다시 말해서 한국 공업이 발전할 수 있는 토대가 조선인의 자생적 대응력에 있다는 주장이다. 이와 같은 자생적 대응력은 1920년대 말 자취를 감추었던 인력거와 객마차가 다시 생겨날 정도로 교통수단이 부족했던 광복 후의 상황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전쟁 후 남은 노후차와 미군정에서 흘러나온 지프와 트럭을 개조해 만든 차량은 부족한 교통문제를 스스로 해결한 사례였다.(Car Life, 2009.11) 이와 같은 재생 자동차 제작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1946년 9천106대였던 자동차 수가 49년에는 1만6,351대로 대폭 늘어났다.(Son, 2005) 6.25전쟁 후에도 재생자동차는 일상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었다. 차축, 엔진 등 부품과 석유드럼통 철판을 모아 수작업으로 제작한 차량은 기계도 자본도 아닌 사람의 힘, 자동차를 조립해 본 경험과 의지만으로 이룬 결과였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1955년 국산 엔진을 제작해 최초 국산 자동차인 시발을 만들었다. 이와 같은 자동차는 삶의 최소한의 필요를 채워주며 일상에서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한 디자인의 결과였고, 1960년대 자동차 산업화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일상의 공백을 채워준 디자인이었다. 이러한 디자인이 한국 자동차 디자인과 자동차 산업의 실질적인 토대로서 역할하지는 못했지만, 자동차 제작에 참여했던 하급 기술자들과 정비공장에 종사했던 인력, 그리고 그들의 경험은 산업화 시기 자동차산업을 일으키는데 기여했다. 예를 들어 1967년 현대자동차를 창업한 정주영은 일제시기 ‘아도 서비스’라는 이름의 자동차 수비공장을 운영했던 인물이었다. 수리 공장을 운영하면서 정주영도 폐차의 엔진과 차축을 가지고 차체를 만들어 재생한 트럭을 몇 대 꾸민 경험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기아자동차의 김철호는 일본에서 기계공장에 취업하여 기술을 익히고 해방을 맞아 국내로 들어와 ‘경성정공’을 설립했다. 일제시기를 거친 이들의 경험은 해방 후 자동차회사의 설립과 성공의 기저에 흐르고 있다.


7. 결론

한국의 자동차 공업은 일본이 조선에 사회간접시설을 건설하고 근대적 제도를 보급하는 과정에서 시작되었으나, 일제의 통제와 독점 자본에 예속되는 형태였고 그들의 이익을 위한 공업화였기 때문에 실질적인 발전을 이룩하지 못했다. 자동차 공업과 디자인의 실제적인 토대를 형성한 것은 일제의 공업화 과정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며 축적한 조선인의 기술력이었으며, 이러한 주체적 경험은 근대 디자인의 형성을 뒷받침했다. 이 때 제작되거나 개조 변형된 차량은 디자인 활동 사례로 가능성을 가지지만, 형태 작업이 어느 정도 범위로, 어떠한 변형이 시도되었는지에 대한 자료가 불충분하여 구체적으로 확인하기는 어려웠다. 단지 이 연구를 통해 주권을 잃은 식민지시기에도 삶의 변화와 진보를 위해 노력한 역사가 있었으며, 그러한 증거로 디자인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또한 이러한 역사는 시대적 한계 속에서도 경제적 자립을 추구하는 힘의 바탕이자, 자동차 산업 발전과 디자인을 받쳐 주는 암묵적 지식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연구 결과는 조선인의 능동적인 대응과 경험을 중시하며, 자동차 산업과 디자인의 역사를 해방 이전과 이후를 잇는 연속적인 시각에서 파악하는 것이다.

Notes

Citation: Lee, O. (2013). A Study on the Basic Foundation for Automobile Design in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 Archives of Design Research, 26(3), 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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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1

Figure 1
Ford T and GM Buick

Table 1

The number of automobile ownership of the country (Son, 2005)

연도 1911 1915 1920 1925 1930 1935 1940 1945
차량수 2 70 679 1,341 3,873 7,360 1만대이상 추정 7천여대 추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