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s of Design Research
[ Article ]
Archives of Design Research - Vol. 35, No. 3, pp.301-319
ISSN: 1226-8046 (Print) 2288-2987 (Online)
Print publication date 31 Aug 2022
Received 07 Jun 2022 Revised 10 Jul 2022 Accepted 12 Jul 2022
DOI: https://doi.org/10.15187/adr.2022.08.35.3.301

젊은 여성 소비자의 부상과 가전제품 디자인·광고의 변화, 1989~1994

Haecheon Park박해천
Department of Design, Associate Professor, Dongyang University, Donducheon, Korea 동양대학교 디자인학부, 부교수, 동두천, 대한민국
The Emergence of Young Female Consumers and the Change of Home Appliance Design and Advertising, 1989~1994

초록

연구배경 1980년대 후반, 한국 사회는 대량 생산-대량 소비 체제로의 진입과 함께 점차 성숙기 소비사회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국내 가전업체들은 내수 시장의 구조 변동에 대처하기 위해 시장 세분화 전략을 본격화하면서 새로운 소비자 집단의 발굴에 나섰다. 당시 신진 소비자 집단으로 급부상하던 20대 후반·30대 초반의 중산층 여성 소비자는 국내 가전업체에게 꽤나 매력적인 존재였다.

연구방법 본 연구는 1980년대 후반 이후, 20대 후반·30대 초반의 중산층 여성 소비자를 소구 집단으로 설정했던 가전제품의 사례들을 분석하면서, 디자인과 광고 등 당대의 문화적 생산양식이 이 집단과 맺는 관계의 양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1989년 금성사의 ‘베스트셀렉션’ 시리즈, 1992년 금성사의 ‘아베스트’ AV 시스템, 그리고 1993~94년 금성사의 식기세척기와 대우전자의 ‘공기방울Z’ 세탁기 등이 사례 연구의 대상이다.

연구결과 ‘베스트셀렉션’ 시리즈와 ‘아베스트’ AV 시스템에서 20대 후반·30대 초반의 중산층 여성 소비자는 각각 신혼 주부나 결혼 적령기 여성으로 정의되고 라이프스타일 연구의 대상으로 전유되었다. 그 결과로, 양자의 사례에서 ‘인테리어 지향성’은 무척 중요한 디자인 콘셉트로 제시되었는데, 그것은 가정 공간 중 주방과 거실의 시각 질서를 젊은 감각의 현대적인 형태로 재편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한편 금성사의 식기세척기와 대우전자의 ‘공기방울Z’ 세탁기에서는 당대 유행하던 ‘미시’ 담론을 수용함으로써 가사 노동의 경감이 주부의 자아실현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강조했다. 위 사례들은 가전업체들이 기존의 제품 디자인 프레임에서 탈피하기 위해 특정 소비자 집단과 전략적인 동반자적 관계를 설정하고 일상생활의 미학화를 실행에 옮기는 과정을 보여준다.

결론 위의 사례들이 주목한 20대 후반·30대 초반의 여성들은 1994년 이후 ‘미시’라는 명칭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성숙기 소비사회의 도래와 함께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중심으로 부족화되었던 이 소비자 집단은 IMF외환위기를 전후로 한 1990년대 후반 이후에는 가전제품을 비롯한 내구소비재의 고급화를 주도하면서 내수 시장의 지형 변화를 선도했다. 이런 측면에서 1989년 ‘베스트셀렉션’ 시리즈부터 1994년 미시 유행에 이르는 일련의 흐름은 1990년대 후반의 변화를 예비하는 전초전과도 같은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Abstract

Background In the late 1980s, Korean society gradually began to take the form of a mature consumer society with the entry into a mass production-mass consumption system. Home appliances companies began to explore new consumer groups as they began their market segmentation strategies in earnest to cope with structural changes in the domestic market. At that time, middle-class female consumers in their late 20s and early 30s, who were rapidly emerging as a rising consumer group, were quite attractive to them.

Methods This study aims to analyze the cases of home appliances that set middle-class female consumers in their late 20s and early 30s as a target group since the late 1980s, and to examine the relationship between this group and the cultural mode of production such as design and advertising. Case studies include the ‘Best Selection’ series in 1989, the ‘Avest’ AV System in 1992, the Goldstar dishwasher in 1993 and the ‘Gongibangul Z’ washing machine in 1994.

Results In the ‘Best Selection’ series and the ‘Avest’ AV System, middle-class female consumers in their late 20s and early 30s were defined as newlyweds or a woman of marriageable age, and appropriated as an object of lifestyle studies. As a result, in both cases, ‘interior orientation’ was presented as a very important design concept, which played a role in reorganizing the visual order of the kitchen and living room in the home space into a modern form. Meanwhile, advertisements for the Goldstar dishwasher and the ‘Gongibangul Z’ washing machine emphasized that the mitigation of housework is closely related to the realization of the housewife’s self by accepting the ‘missy trends’ that was popular at the time. The above examples show the process by which home appliances companies established strategic partnerships with the specific consumer group to break away from the existing product design frame and implement the aesthetics of daily life.

Conclusions Women in their late 20s and early 30s began to be called “missy” after 1994. With the advent of a mature consumer society, this new lifestyle-oriented consumer group led the change in the domestic market after the IMF financial crisis in the late 1990s, leading the luxury of consumer electronics and other durable goods. In this respect, the series of flow from the ‘Best Selection’ in 1989 to the ‘missy trends’ in 1994 was the same as the prelude to a change in the late 1990s.

Keywords:

Missy, Lifestyle, Consumer Society, Home Appliance Design, Market Segmentation Strategy, 1990s, 미시, 라이프스타일, 소비 사회, 가전제품 디자인, 시장 세분화 전략, 1990년대

1. 서론

1. 1. 연구 배경과 목적

1997년 5월, 삼성전자는 새로운 냉장고 브랜드 ‘지펠(Zipel)’을 출시하며 고급 양문형 냉장고 시장에 출사표를 던졌다. 1996년 당시, 이 시장은 제너럴 일렉트릭(GE)과 월풀(Whirlpool) 같은 미국 가전업체의 수입 제품이 선점하고 있던 연간 4만5천 대 판매 규모의 틈새시장에 불과했다. 삼성전자의 조사에 따르면, 이 시장의 주요 고객층은 인구 통계와 라이프스타일, 양 측면에서 뚜렷한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인구 통계 측면에서 “40평형 이상의 아파트”에 거주하는 “35~50대 연령대”로 “월 소득 3백만 원 이상 고소득층”에 속했고, 라이프스타일 측면에서는 “자기 연출 욕구가 강하여 집안을 꾸미는 데 비용을 아끼지 않고 과시 욕구 역시 강해 유명 브랜드의 의류를 선호”했다. 삼성전자는 바로 이 집단을 지펠의 소구 집단으로 설정하고 수입 제품과 정면승부에 나섰다(Her, 1999; Park, 2021).

한편, LG전자는 경쟁사의 지펠 출시 이후 1여 년이 지난 1998년 9월에 고급 양문형 냉장고 브랜드 ‘디오스(Dios)’를 시장에 내놓았다. LG전자가 시장 세분화 전략을 통해 설정한 디오스의 소구 집단은 “월 소득 3백만 원 이상으로 30평형대 이상 아파트에 거주하며 과시 욕구를 가진 35세 이상 대졸 주부”로, 거주 아파트 크기를 제외하곤 지펠의 소구 집단과 큰 차이가 없었다. 양자 모두 35세 이상 상위 중산층의 주부를 소구 집단으로 설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양자 간에는 접근방식상의 큰 차이가 존재했는데, 그것은 디오스의 경우 국내 소비자의 냉장고 평균 사용 기간이 8년이라는 사실에 주목했다는 것이었다. LG전자는 역산(逆算)을 통해 디오스의 소구 집단 중 가장 젊은 연령대에 속하는 30대 중후반의 주부들이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에 결혼과 함께 혼수로 생애 첫 냉장고를 구입했을 것이라고 가정하고, 1998년을 전후로 냉장고의 교체 시점에 도달할 것이라고 추론했다. LG전자는 삼성전자에 선수를 빼앗긴 만큼 이를 만회하고자 소구 집단의 인구 통계 특성과 라이프스타일뿐만 아니라 그들의 생애주기까지 고려해 그것을 냉장고의 교체 주기와 동기화(synchronization)하려고 했던 것이다(Lee, 1999; Park, 2021).

위와 같이 양대 가전업체가 고급 냉장고 브랜드의 소구 집단 중 하나로 주목했던 30대 중후반의 상위 중산층 주부들은 실제로 1990년 후반을 기점으로 생애주기의 새로운 단계에 진입하고 있었다. 그들은 기존에 사용하던 가전제품이나 가구를 교체하거나 좀 더 넓은 평형대의 아파트로 이주하고 있었다. 특히 IMF 외환위기 이후 소득의 양극화에 뒤이어 소비의 양극화가 본격화되는 가운데, 그들은 가전제품을 비롯해 소비 제품 전반의 고급화를 선도하면서 1990년대의 중산층과는 다른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새롭게 선보였다. 지펠과 디오스의 성공에 뒤이어 2000년대 초반 트롬, 하우젠, 휘센 등 “프리미엄 라이프스타일”을 모토로 내건 고급 생활가전 브랜드들이 속속 등장할 수 있었던 것도 이들의 왕성한 구매력에 힘입은 바가 컸다(Park, 2021).

본 연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들, 즉 1990년대 후반에 30대 중후반의 연령대였던 상위 중산층 주부들이다. 이들이 주요 가전업체에게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은 1990년대 후반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들은 1980년대 후반, 그러니까 결혼을 전후로 20대 후반·30대 초반의 연령대를 통과하던 시점에도 국내 가전업체들이 주목하던 소비자 집단 중 하나였다. 주지하다시피 1980년대 중반까지 금성사(현 LG전자), 삼성전자, 대우전자 등 가전 3사는 제품 다양화는 엄두도 내지 못한 채 표준형의 텔레비전과 범용의 백색 가전을 생산하는 데 급급했다. 표면적으로 시장 점유율을 두고 가전 3사가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지만, 개별 업체들은 주문자 상표 부착 생산(OEM) 방식의 수출 제품 생산에 치중하면서 내수 시장에서는 “만들면 팔린다”는 생산자 중심적 사고를 견지했다. 내수 시장은 아직 성숙 단계에 진입하지 못한 상태였고, 따라서 제품의 다양성보다는 보급률이 중요한 시점이었다. 신제품은 더디게 출시되었으며, 그 외형 역시 별다른 변형 없이 기존 디자인을 답습했다.

상황이 변모한 것은 1980년대 후반이었다. ‘3저 호황’을 전후로 구매력을 갖춘 중산층이 큰 폭으로 증가하면서 내수 시장은 급격히 팽창했고 소비자 욕구도 다양화되었다. 국내 가전업체들은 이러한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 제품의 라이프사이클을 조정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초반만 해도 4~5년이던 신제품의 출시 주기가 1~2년으로 감소했고, 미니 카세트 라디오 등 소형 제품은 청소년층의 유행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거의 6개월 주기로 신제품을 출시하기도 했다. 가전업체들은 이와 함께 기존의 생산자 중심적 사고에서 탈피해 시장 지향적인 제품 개발 프로세스의 체계화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신기술 선도형 제품 개발이 당시 국내 연구개발 수준으로는 무리가 따르는 탓에, 마케팅과 디자인의 공조 체계 아래 시장의 변화에 적극 대응하는 모델 변경형 제품 개발에 치중했다.

이러한 제품 개발 전략을 구체화하는 데에는 무엇보다 시장에서 새로운 소비자 집단의 움직임을 포착하는 것이 중요했다. 당시 구매력을 갖춘 소비자 집단으로 부상하던 20대 후반·30대 초반의 중산층 여성 소비자는 국내 가전업체에게 꽤나 매력적인 존재였다. 이들 중 상당수는 1980년대 전반에 걸친 여성의 고학력화에도 불구하고 남성 중심적 사회 질서로 인해 취업에 어려움을 겪으며 미혼 여성 대상 사무직에 종사하고 있거나, 결혼과 함께 가정 공간에 전업주부로 머물게 된 이들이었다. 그들은 일정 수준 이상의 교양과 취향, 즉 문화자본을 보유하고 기성세대의 여성들과는 뚜렷하게 구분되는 소비 성향을 가시화하고 있었다. 바로 그런 이유로 1990년대 초반, 특히 이들 중 기혼 여성들은 대중매체와 광고에 의해 “신세대 주부”로 주목받기도 했고, “미시(missy)”라는 부족화된 명칭으로 호명되기도 했다. 주지하다시피, 이 시기의 주거 공간 역시 아파트의 급속한 보급에 영향을 받으면서, 노동 재생산을 위한 일상생활의 기본 단위에서 가족의 라이프스타일이 전시되는 소비의 전초 기지로 재편되고 있었다. “신세대 주부”나 “미시”로 불리던 이들은 이러한 변화의 중심부에서 그 흐름을 주도하면서 ‘가사 관리자’라는 기존의 정형화된 주부 역할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그들은 주거, 가사, 육아, 패션, 미용 등 일상의 다양한 영역에서 세련된 소비 감각으로 가족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을 연출할 줄 아는 적극적인 소비 주체로 주부 정체성을 새롭게 조형하고 있었다(Park, 2010).

본 연구는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중반 시점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당시 20대 후반·30대 초반의 중산층 여성 소비자를 소구 집단으로 삼았던 가전제품의 사례들을 분석하면서, 디자인과 광고 등 당대의 문화적 생산양식이 이 집단과 맺는 관계의 양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1. 2. 연구 대상과 방법

본 연구는 문헌 연구와 광고 분석을 중심으로 진행하면서, 1989년 금성사의 ‘베스트셀렉션’ 시리즈, 1992년 금성사의 ‘아베스트’ AV 시스템, 그리고 1993~94년 금성사의 식기세척기와 대우전자의 ‘공기방울Z’ 세탁기 등의 디자인과 광고를 사례로 삼아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자 한다. 첫째, 위 사례들이 다양한 접근법을 통해 당시 새롭게 부상하던 20대 후반·30대 초반의 여성 소비자를 주요 소구 집단으로 설정하고, 라이프스타일 연구와 결합된 제품 디자인·홍보 프로세스를 경유해 새로운 디자인 콘셉트와 광고 이미지를 제시하는 일련의 과정을 살펴볼 것이다. 둘째, 위 사례들에서 20대 후반 30대 초반의 여성 소비자 집단이 각각 결혼 적령기의 여성 소비자로, 혼수 시장의 신혼 주부로, 그리고 “신세대 주부”와 “미시”라고 불리는 젊은 기혼 여성으로 각각 모습을 변모하면서, 디자인과 광고 등 당대의 문화적 생산양식 내부에서 독특한 위상을 점유하는 과정을 고찰할 것이다. 본 연구는 위와 같은 분석을 통해 디자인 및 광고와 관련된 문화적 생산의 실무자들이 백색 가전을 비롯한 기존의 제품들과는 차별화된 디자인 콘셉트와 광고 이미지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데 있어서 이 여성 소비자 집단을 인구 통계적 자원이자 방법론적 촉매제로 활용했다고 주장할 것이다.


2. 금성사의 ‘베스트셀렉션’ 시리즈

2. 1. 시장 세분화 전략과 “가전제품의 토탈 패션”

1989년, 금성사는 “가전제품의 토탈 패션”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베스트셀렉션’ 시리즈를 출시했다. 이 시리즈는 주방 가전을 중심으로 14종의 제품을 선별해 하나의 패키지로 구성한 것이었다. 당시 금성사는 가전업체들 중 상대적으로 가장 체계적인 제품 개발 조직을 갖추고, 시장 세분화 전략에 기반해 제품 디자인 프로세스를 재편하고 있었다. 이 전략에 따르면 시장의 소비자들은 성별, 나이, 소득, 지역 등에 따라 다양한 집단으로 분류될 수 있는데, 이 가운데 금성사가 신제품 개발과 관련해 특히 주목한 집단은 노년층, 신혼 주부, 청소년, 어린이였다(Park, 2019). ‘베스트셀렉션’ 시리즈는 바로 신혼 주부를 소구 집단으로 기획된 패키지 가전제품이었다.

‘베스트셀렉션’ 시리즈는 소구 집단의 특성에 초점을 맞춰 컬러 중심의 디자인 콘셉트를 제안했다. 그것은 순검정색을 제품의 주조색으로 내세워 백색 가전의 획일적인 이미지에서 탈피하되, 시리즈로 묶인 다양한 제품들에 시각적 통일성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한때 청결과 위생의 상징이었던 백색은 여기에서는 교체되어야 하는 대상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디자인 콘셉트는 1985년 이후 일본의 마쓰시타 전기가 독신 여성 생활자를 소구 집단으로 삼아 여러 차례에 걸쳐 출시한 패키지 가전 시리즈, ‘비긴(BEGIN)’을 참조한 것임이 분명해 보였다. 실무진은 출시 초기만 해도 백색 가전에 익숙한 국내 소비자들이 검정색 제품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까 우려하기도 했지만, 여성 소비자로부터 호평을 받자 제품 생산량을 늘리고 가격대에 따라 패키지 구성도 다양화했다(『한겨레』, 1989년 9월 9일). 그런데 컬러 중심의 디자인 콘셉트는 제품 자체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었다.

Figure 1

A newspaper advertisement for the ‘Singsing Refrigerator Accent’ (1990)

사실 금성사가 제품 디자인에서 컬러의 활용을 본격화한 것은 ‘베스트셀렉션’과 같은 해에 조금 앞서 출시한 ‘싱싱냉장고 액센트’의 디자인에서였다. 금성사는 흑진주색, 장미색, 비둘기색, 갈대색 등 총 11가지 컬러의 냉장고를 내놓았다. 여기에는 당시 급속히 확산되던 아파트 주방의 시스템키친 설치 유행과 보조를 맞추려는 의도도 담겨 있었다(Hong, 1989). 이 컬러들 중 가장 큰 인기를 끈 것은 흑진주색, 즉 검정색 제품이었다. 주목해야 할 점은 1990년 초에 신문 지면에 게재된 이 제품의 광고가 단순히 다양한 컬러로 소비자의 시선을 끌어 모으는 데 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것은 냉장고의 컬러가 주방의 실내 분위기를 새롭게 연출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었다. 광고는 몬드리안 풍의 추상회화를 오른쪽에 배치하고 흑진주 빛 냉장고가 자리한 실내 공간을 현대적인 전시 공간으로 연출했다. 광고 카피는 “아름다운 공간이 싱싱한 생활로 이어진다”는 것이었다. 제품과 공간의 시각적 관계성에 대한 강조는 당시로서는 새로운 시도였다. 그 시기 광고 대다수는 냉장고를 공간에서 분리한 채 신제품의 성능 개선이나 기술적 특성을 홍보하는 데 주안점을 뒀기 때문이다.

Figure 2

A TV advertisement for the ‘Best Selection’ Series (1990)

‘싱싱냉장고 액센트’가 선도한 광고의 흐름은 ‘베스트셀렉션’ 시리즈의 TV광고로도 이어졌다. 사실 ‘싱싱냉장고 엑센트’는 ‘베스트셀렉션’ 시리즈 제품 중 하나로서, 패키지 구성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것이기도 했다. ‘베스트셀렉션’ 시리즈의 TV광고는 ‘싱싱냉장고 액센트’ 광고의 바통을 이어받되, 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여기에서 카메라는 당시 인기 팝송이던 네델란드 가수 헤라르트 욜링(Gerard Joling)의 <사랑은 그대 눈 안에(Love is in Your Eyes)>의 선율에 맞춰 젊은 부부의 동선에 따라 이동하면서, 다양한 촬영 기법으로 검정색 가전제품들을 포착했다. 진공청소기, 냉장고, 전기프라이팬, 토스터, 주스믹서기, 전기밥솥, 식기세척기 등이 수평 트래킹, 부감 쇼트, 클로즈업 등의 촬영 기법을 통해 차례대로 화면에 등장했고, 백색 벽면과 회색 패턴으로 이뤄진 실내 공간과 극적인 대비를 이뤘다. 실내 공간은 주방이나 거실 같은 구체적인 실내 공간이 아니라 선과 면, 컬러와 패턴으로 추상화된 가상공간의 형태로 제시되었다. 여기에서 벽면에 걸린 원색의 그림, 식탁 위의 과일과 야채, 여성 모델의 남색 원피스 등은 제품과 공간의 흑백 대비를 부각하면서 화면에 감각적인 활력을 불어넣는 역할을 했다.

광고는 이렇게 현실로부터 분리된 가상공간을 구축하고 그 공간에 가전제품을 배열했다. 여기에서 실용성, 편의성. 효율성 같은 제품의 기능적 문제들은 다뤄지지 않았다. 가정주부의 집안일을 보조하는 기술적 사물이라는 가전제품의 본래 속성 역시 부각되지 않았다. 오히려 광고에서 가전제품은 공간에 컬러로 “액센트”를 부여하는 인테리어 지향의 시각 기호로 제시되었다. 이때 실내 공간 곳곳에 배치된 가전제품은 “개성 있는 생활”을 위해 “디자인과 컬러”로 그 공간의 시각 질서를 재조직하면서 “색다른” 분위기의 연출을 유도해내는 것이었다. 광고는 기존과는 다른 접근법으로, 가전제품의 달라진 위상을 시청자에게 확실하게 전달하고자 했다.

이러한 새로움은 광고 속 주부 이미지의 재현으로도 이어졌다. 1986년에 금성사의 전속이 된 1962년생 여성 모델(서정희 역)은 이전까지만 해도 냉장고나 세탁기의 광고에 등장해 앞치마를 착용하거나 빨랫감을 든 모습을 연기하면서 젊은 주부의 전형적인 이미지를 선보인 바 있었다. 이 이미지는 가사 노동의 담당자 혹은 집안 살림의 관리자로서의 주부를 재현한 결과였다. 그런데 이 여성 모델은 ‘베스트셀렉션’ 시리즈의 TV광고에서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신했다. 그녀는 여기에서 남색 원피스 차림으로 세련된 도시 여성의 이미지를 전시하는데, 그것은 시각 기호로서의 가전제품과 짝을 이루는 화보 속 미적 오브제 같은 모습이었다. 광고 속 가전제품이 가사 노동과 무관하듯이, 그녀 역시 집안일을 돌보는 주부의 배역에서 자유로워진 상태였다. 확실히 1980년대 전반에 걸쳐 가전제품 광고에서 재현되던 상투형의 주부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베스트셀렉션’ 시리즈는 “가전제품의 토탈 패션”을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웠는데, 여기에서 토탈 패션의 대상은 가전제품뿐만 아니라, 그것이 놓인 공간, 그리고 그것을 사용하는 주부까지 포괄하는 것이었다.

한편, 금성사가 ‘베스트셀렉션’ 시리즈를 신혼부부용 패키지 가전제품으로 시장에 내놓자, 삼성전자도 곧바로 그와 유사하게 ‘네오’ 시리즈를 출시했다. “신혼을 위한 흑과 백의 앙상블”이라는 디자인 콘셉트를 내세운 ‘네오’ 시리즈는 하얀색 바탕에 검정색을 가미하는 방식으로, 경쟁사 제품과의 차별화를 시도했다. 텔레비전, 냉장고, 보온밥솥, 오디오, 전자레인지 등을 패키지화한 이 시리즈는 컬러와 디자인을 통일해 제품 차원에서 일관된 아이덴티티를 표현하고자 했다. 1990년에는 ‘네오’ 시리즈를 한층 발전시켜 흰색과 빨강색의 조화를 강조한 디자인으로 ‘신네오’ 시리즈를 출시하기도 했다. 대우전자 역시 경쟁사들과 유사하게 ‘넥스트’ 시리즈를 선보였다. 이 시리즈는 제품 모서리의 라운딩 처리를 디자인의 차별점으로 내세웠다. 이와 같은 가전 3사의 가전 패키지들은 구매자의 선택 폭을 고려해 가격대가 1백만 원대부터 3백만 원대까지 여러 단계로 다양하게 구성되었다(『경향신문』, 1991년 2월 27일).

Figure 3

A newspaper advertisement for the ‘Neo’ Series (1989)

2. 2. 혼수 시장의 성장과 신혼 주부 대상의 패키지 가전

앞서 서론에서 언급했듯이 1980년대 후반 내수 시장은 빠른 속도로 팽창했는데, 그 중 단연 두각을 나타냈던 부문은 혼수 시장이었다. 후기 베이비붐 세대에 속하는 1960년대 초중반생들이 본격적으로 생애주기상 결혼 적령기에 진입했고 40여만 쌍에 달하는 신혼부부가 매년 가정을 꾸렸다. 이들이 혼수로 구입하는 가전제품의 시장 규모는 1989년 약 4,500억 원대로 추산되었고, 매년 증가세에 있었다(Kang, 2006). 여기서 주목할 대목은, 이 시기에 혼수 시장을 선도하던 1960년대 초중반생의 특정 집단이 이전 세대와는 다른 방식의 혼수 구입을 통해 신혼살림을 마련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1970년대 후반 이후 중산층 이상 계층을 중심으로 신랑과 신부 양측에서 지속적으로 증가하던 혼수는 1980년대 후반부터는 과잉 혼수의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중산층을 중심으로 신랑 측에서 아파트 구입이나 전세의 형태로 주거 문제를 해결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고, 신부 측에서 이와 균형을 맞추기 위해 혼수용품의 범위를 늘리거나 예단 일부를 금전으로 대체하기도 했다. 이전까지 침구류, 보석류, 한복, 가구, 주방용품 등에 국한되었던 혼수용품의 범위 역시 가전제품으로 확대되는 경향을 보였다. 이와 같은 혼수 문화의 변화는 1930년대생의 상위 중산층 부모 세대가 자산 증여를 통해 자녀의 주거 문제를 해결해주는 경향이 확산되는 과정과 맞물려 있었다. 실제로 1980년대 후반, 강남 지역의 아파트에 거주하던 젊은 신혼부부 상당수는 기존 중산층의 자녀 세대,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상위 중산층 부모를 둔 후기 베이비붐 세대에 해당하는 경우였다(Kim, 2005).

이처럼 혼수 시장은 상위 중산층 출신의 신혼부부들이 유행을 선도하고, 일정 수준의 구매력을 갖춘 신규 중산층 신혼부부들이 그 뒤를 추격하는 형국이었다. 가전 3사는 빠르게 성장하던 이 시장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확실히 이 시점의 혼수 시장은 국내 가전업체들이 초보적인 수준에서나마 시장 세분화 전략을 실행에 옮겨볼 만한 규모를 갖추고 있었다. 금성사의 ‘베스트셀렉션’ 시리즈는 바로 이러한 맥락 속에 놓인 제품이었다. 흥미롭게도 ‘베스트셀렉션’ 시리즈는 시장 세분화 전략의 일환으로 기존의 백색가전과의 차별화를 꾀하기 위해 제품의 컬러를 적극 활용했다. 이는 디자인의 측면에서 보자면 다소 소극적인 전략이었지만, 아파트와 같은 현대적인 주거 공간을 ‘스위트 홈’으로 꾸미기 원하던 신혼 주부의 욕구에 접근하는 데 유용한 방법이었다. 왜냐면 여기에서 컬러의 활용은 제품 자체의 표면에만 머무르지 않고 그 제품이 배치된 실내 공간을 새로운 시각 질서로 재편하려는 야심을 내비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베스트셀렉션’ 시리즈가 제시한 컬러 주도의 디자인 콘셉트는 단순히 차별화의 방법에 그친 것이 아니라, 그 차별화의 가능성을 사물 중심의 디자인에서 인테리어 지향의 디자인으로 확장하기 위한 방편으로 제시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에 따르면 가정의 실내 공간은 이제 제품 디자인의 진두지휘 아래 미학화되어야 하는 대상으로 간주되어야 했다.


3. 금성사의 ‘아베스트’ AV 시스템

3. 1. 라이프스타일 연구와 인테리어 지향의 디자인

금성사는 ‘베스트셀렉션’ 시리즈 출시 3년 뒤인 1992년에 다시 한 번 시장 세분화 전략에 기반해 젊은 여성 소비자를 소구 집단으로 삼는 오디오·비디오 통합 제품의 개발에 착수했다. 이번에는 소구 집단이 신혼 주부가 아니라 결혼 적령기의 여성 소비자였다. 당시 금성사는 새롭고 젊은 기업 이미지의 창출을 위해 “신세대, 신생활, 신금성”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전략 사업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신제품 개발에 나섰다. ‘아베스트’ AV 시스템은 1992년 8월부터 8개월 동안 진행된 프로젝트의 산물이었다. 이 프로젝트는 기존의 시장 세분화 전략과 라이프스타일 연구를 종합해 차세대 표준이 될 만한 제품 디자인 프로세스를 실질적으로 가시화했다. 최고경영진 직속의 특별 조직이었던 프로젝트 팀은 기술경영 부문 임원의 강력한 리더십 아래 마케터, 디자이너, 엔지니어 등 20여 명의 팀원들로 구성되었다. 당시 기술경영 부문은 연구개발 성과를 상품화로 연결하기 위해 멀티미디어와 차세대 가전제품의 선행 개발을 담당하는 실무 총책 조직이었다(Shim, 1993; Park, 2021).

일단 이 프로젝트의 제품 디자인 프로세스 초기 단계는 라이프스타일 연구의 몫이었다. 프로젝트 팀은 1960년 이후 출생한 20·30대 여성을 ‘신세대 여성’이라고 정의하고 이들의 라이프스타일을 조사했다. 그들은 먼저 연령별로 20~23세, 24~26세, 27~30세의 세 그룹으로 나누고 그룹별로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 분석을 진행했다. 이들의 식생활, 여가, 구매, 학습, 사교, 가사, 건강, 미용, 결혼에 대한 설문 결과, 가치관에 따라 크게 세 유형의 라이프스타일을 정의할 수 있었다. 자기표현에 소극적이고 저축을 중시해 알뜰한 경제생활을 영위하며 합리적인 결혼을 선호하는 “현실 안정형”, 자기중심적이고 현재의 삶을 중시하며 외향적인 특성을 지닌 “감성 향유형”, 자기주장이 강하고 진취적인 직업관을 지니며 실질적인 여가 활동을 중시하는 “적극적 개성형” 등 이렇게 세 유형이었다. 프로젝트 팀은 이와 같은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소구 대상의 범위를 “감성 향유형”과 “적극적 개성형”의 라이프스타일을 지닌 결혼 적령기의 여성으로 정의했다. 프로젝트 팀에 따르면, 이 두 유형에 속한 여성 소비자 집단은 “스스로의 욕구에 대응할 만한 경제적 구매력을 갖추고 있”었고 특정 브랜드에 대한 분명한 선호도를 지니고 있었다. 달리 말하자면, 그들은 1980년대 중후반 이후 증가세에 있던 고학력 미혼 여성 대상의 사무직에 종사하던 이들로서, 자신의 수입을 자신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이들이었다. 무엇보다 “장차 결혼에 따른 혼수품의 구매를 앞”둔 터라, 급성장 중이던 혼수 시장의 예비 소비자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그들은 가까운 미래에 생애 처음으로 가전제품을 구매하게 될 이들로서, 가전업체의 입장에서는 반드시 공략해야 할 소비자 집단이었다. 확실히 ‘베스트셀렉션’ 시리즈에서 다소 막연하게 혼수 시장의 신혼 주부로 지목되었던 소구 집단은 ‘아베스트’ AV 시스템에서는 라이프스타일 연구를 통해 좀 더 세부적인 면모를 드러냈다. 아베스트 프로젝트 팀에 참여한 디자이너 심재진의 표현을 빌리자면, “미혼 여성의 라이프스타일 연구를 통해 혼수 시장의 구체적 모습에 대한 조감이 가능”해졌던 것이다(Shim, 1993).

아베스트의 프로젝트 팀은 결혼 적령기의 미혼 여성을 소구 집단으로 설정하고, “신세대 디자인”을 주축으로 “인테리어 부각형 디자인”과 “탈일본 디자인”을 디자인 개발 전략의 목표로 정의했다. 여기에서 신세대 디자인은 기존 AV 제품과는 차별화된 감각의 디자인 접근을 강조하기 위해, 인테리어 부각형 디자인은 제품과 공간의 관계를 통합적으로 접근하기 위해, 그리고 탈일본 디자인은 일본 제품을 모방한 OEM 방식의 제품 개발에서 탈피하기 위해 내세운 것이었다. 이 팀이 최종적으로 제안한 제품 콘셉트는 아파트 거실 공간과의 조화에 초점을 맞춘 AV 통합 시스템이었다. 별도의 장식장을 디자인해 텔레비전, 오디오, 비디오 플레이어 등을 거실의 한쪽 벽면을 차지하는 단일한 시스템으로 통합했다. 특히 사용하지 않을 때에도 젊은 세대가 선호하는 실내 분위기의 연출을 위해 제품 형태의 기하학적인 면 비례를 면밀히 고려했고, 형태, 패턴, 컬러 등의 디자인 요소를 적극 활용했다. 또한 사용의 편의성을 위해 마우스바 버튼과 간단한 인공지능이 채용된 통합 리모컨도 제안했다. 사용자는 이 리모컨을 통해 텔레비전 화면에 표시된 메뉴를 선택하고 개별 기기를 자유롭게 제어할 수 있었는데, 이는 초기 형태의 대화형 사용자 인터페이스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Shim, 1993; Park, 2021).

‘베스트셀렉션’ 시리즈에서 디자이너의 시선이 가사 노동이 집중적으로 이뤄지는 주방 공간에 집중되었다면, ‘아베스트’ AV 시스템에서는 그 시선이 가족 여가 활동의 주무대인 거실로 옮겨갔다. 당시 젊은 부부의 주거 모델로 인기가 높았던 아파트의 실내에서 주방과 거실이 가전제품이 주로 배치되는 공간이었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자연스러운 이동이었다. 또한 ‘베스트셀렉션’ 시리즈가 냉장고를 중심으로 주방 가전제품을 일련의 계열체로 연결했던 반면, ‘아베스트’ AV 시스템은 장식장의 프레임을 이용해 텔레비전, 오디오, 비디오 플레이어를 단일한 통합체로 묶어냈다. 양자 모두에게 제품이 놓인 공간과의 조화를 고려하는 ‘인테리어 지향성’은 무척 중요한 디자인 콘셉트였다. 이를 반영하듯이 전자가 컬러를 매개항으로 삼아 단일한 제품 아이덴티티를 구성하면서 주방의 시스템키친과 조화를 이루려고 했다면, 후자는 거실의 한쪽 벽면을 점유하면서 장식장과 리모컨의 도움을 받으며 그 공간을 텔레비전을 위한 극장으로 변형하고자 했다. 양자의 디자인은 아파트 실내 공간의 기능적 요구에 충실히 대응하면서 각각의 공간에 새로운 시각 질서를 부여하고자 했다.

Figure 4

A newspaper advertisement for the ‘Avest’ AV System (1993)

Figure 5

A newspaper advertisement for the ‘Avest’ AV System (1994)

3. 2. 결혼적령기 여성의 라이프스타일과 “신세대 주부” 담론

‘아베스트’ AV 시스템 프로젝트가 유형화한 “감성 향유형”과 “적극적 개성형”의 라이프스타일이 보여주듯이, 이 시기에 결혼 적령기의 여성들은 앞선 세대의 여성들과는 뚜렷하게 구분되는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특성들은 당시 광고대행사들이 젊은 주부들의 변모하는 소비 성향을 포착하기 위해 담론화한 “신세대 주부”와 상당 부분 겹쳐지는 것이기도 했다. 여기에서 신세대 주부란 일정 이상의 구매력을 갖추고 가정의 내구소비재 구입에 결정권을 행사하며 소비 지향적인 라이프스타일을 선보이고 있던 “1960년 이후 출생한 33세 이하 주부”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1993년 한 광고대행사가 전국의 주부 1,3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라이프스타일 조사에 따르면, ‘신세대 주부’는 “집은 없어도 자동차는 있어야 하고 VTR, 전자레인지, CD 플레이어 등 갖출 것은 갖춰 놓고 살고 있”으며, “인스턴트 식품이나 양식을 좋아”하지만 “무공해 식품도 즐겨 이용”하며, 패션과 유행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가급적이면 세일 기간을 이용해 유명 브랜드를 구입하려고 했다. 또한 활발하게 여가와 취미 활동에 참여해 자기만의 생활을 즐기고 여성의 자아실현에 대한 자기주장 역시 뚜렷한 편이었다(『경향신문』, 1993년 4월 6일.). ‘신세대’라는 수식어가 가리키듯이, 신세대 주부의 라이프스타일은 바로 앞 세대, 즉 1950년대 중후반 태생의 베이비붐 전기 세대의 주부의 것과는 분명하게 차별성을 보이는 것이었다. 베이비붐 전기 세대 주부들은 1960·70년대 산업화와 함께 구성된 핵가족 모델의 영향력 안에 놓여 있었다. 그 모델에 따르면, 주부의 역할이란 아내이자 엄마로서 가사 노동과 자녀 양육이라는 두 가지 과업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었다. 부부 간의 정서적 친밀감이나 수평적 관계, 그리고 주부 자신의 자아실현 등은 부차적인 문제로 다뤄졌다(Kim, 2017).

이렇게 광고대행사의 주도로 정의된 ‘신세대 주부’의 정체성은 언론의 기획 보도를 거치면서 현실적으로 좀 더 정교한 모양새를 갖춰 나갔다. 한 언론사는 “단칸방에서 월급봉투를 쪼개 쓰며 하나하나 세간살이를 장만해온 ‘개미형’ 부모들과는 달리 비록 준비된 돈을 부족해 부모나 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리더라도 ‘완성형’의 생활을 시작하려는 젊은이들”이 증가하는 상황에 주목했다. 이 기사에 따르면, 신세대 주부는 은행 대출을 받아서 전세로 시작하더라도 “거실이 있는 아파트에서 생활의 틀을 잡고 ‘스위트 홈’의 꿈을 키우겠다”는 경향이 강했다(『경향신문』, 1993년 10월 11일). 확실히 광고대행사와 언론이 제시한 ‘신세대 주부’는 연령대의 측면에서 ‘베스트셀렉션’ 시리즈의 소구 집단이었던 신혼 주부와 거의 동일했고, ‘아베스트’ AV 시스템의 소구 집단이었던 결혼 적령기의 여성과는 라이프스타일의 측면에서 상당 부분 겹쳐졌다. 실제로 기성세대와는 구분되는 신세대 주부의 소비 성향은 ‘베스트셀렉션’ 시리즈와 ‘아베스트’ AV 시스템이 각각 주방과 거실을 대상으로 인테리어 지향의 디자인을 시도할 수 있었던 배경이기도 했다.

한편, 주요 가전업체들은 신세대 주부 담론과 보조를 맞추면서 그와 유사한 연령대의 배우를 자사의 전속 모델로 내세웠다. 금성사와 삼성전자가 새로 발탁한 광고 모델은 각각 1960년생 배우 원미경과 1965년생 배우 전인화였다. 이 업체들은 라이프스타일의 특성을 살리되, 가장의 권위나 기존의 주부 이미지와 크게 충돌하지 않고 적절히 타협하는 선에서 ‘신세대 주부’의 이미지를 연출하려고 했다. 이 업체 광고 담당자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너무 똑똑한 현대적 주부상은 보통 주부들에게 거부감을 줄” 수 있고 “그렇다고 현모양처상을 강조하면 시대 흐름에” 뒤쳐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이들 업체의 광고에서 신세대 주부의 이미지는 “집안 살림을 알뜰살뜰하면서도 자신의 생활을 가꾸는 여성, 능력이 있으면서도 가장 앞에서 나대지 않는 여성, 펑퍼짐한 아줌마가 되기보다 상큼한 매력을 간직한 여성”과 같이 절충적인 형태로 재현되었다(『동아일보』, 1993년 1월 16일).


4. 금성사의 식기세척기와 대우전자의 ‘공기방울Z’ 세탁기

4. 1. 가전제품 광고에서 새로운 유형의 젊은 주부의 등장

1993년 12월, 금성사는 자사의 식기세척기 광고를 신문에 게재하면서, 파격적으로 지면 정중앙에 바지 정장 차림의 젊은 여성 모델을 내세웠다. 당시 식기세척기는 1989년에 첫 국산 제품을 선보인 이래 보급률이 0.3%에 머물러 있던 시장 진입 초기 단계의 가전제품이었다(『한겨레신문』, 1993년 10월 4일). 광고에서 팔짱을 끼고 곧게 선 채 자신감 넘치는 시선으로 지면 바깥을 응시하는 여성은 1992년 발표 이후 세간의 주목을 받았던 마몽드 화장품 광고의 미혼 커리어우먼(이영애 역)과 외형상 지근거리에 있는 듯 보였다. 하지만 광고 우측 상단의 문구가 가리키듯이, 그는 화장품 광고 속 여성과는 달리 미혼이 아니라 “신세대 주부”였다. 이와 같은 명칭이 붙은 것은 확실히 당시 유행하던 신세대 주부 담론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이는 그의 라이프스타일을 짧게 기술하는 대목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광고 문구에 따르면, 그는 주부로서 “집안일엔 누구보다 꼼꼼”하지만 여자로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사랑”하는, 그러니까 주부와 여자 사이에서 정체성의 타협점을 찾을 줄 아는 라이프스타일의 소유자였다. 한편, 다른 광고에서라면 주인공이어야 할 식기세척기는 신세대 주부의 등장으로 인해 그리 주목받지 못한 채 광고 우측 하단으로 밀려난 모양새였다. 여기에서 식기세척기는 신세대 주부의 조력자 역할을 부여받았다. 그것은 신세대 주부를 돕기 위해, “불리고, 닦고, 말리고, 소독하”는 기능을 갖추고 주부를 대신해 “오목한 우리 그릇”을 “구석구석 깔끔하게” 설거지한다. 이렇게 광고는 신세대 주부에게 주인공 자리를 맡기는 대신, 식기세척기에는 조연 역할을 배정했다.

Figure 6

A newspaper advertisement for Goldstar's Dishwasher

이 광고로부터 10개월이 지난 1994년 10월, 이번에는 넥타이를 맨 남성 정장 차림의 주부가 대우전자 ‘공기방울Z’ 세탁기의 신문 광고에 등장했다. 본래 공기방울 세탁기는 1991년 출시 이후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면서 당시 12%에 머물렀던 대우전자의 세탁기 시장 점유율을 1993년 하반기에는 33%까지 끌어올린 공전의 히트작이었다. 기존 제품의 광고는 공기방울의 세척 기능을 강조하는 데 초점을 맞췄지만, 1994년 출시된 신제품의 광고는 그와는 방향을 달리했다. 주부에게 지면 정중앙의 자리를 배정했고, 그 주부 뒤로는 “MISSY”라는 영문 신조어를 대문자로 배치했다. 그리고 그 양편으로 “젊게 사는 나”와 “합리적인 나”라는 문구로 “MISSY”의 의미를 부가 설명했다. 여기에서 미시란 “집안일은 똑 부러지게” 해내는 주부이면서, 동시에 “절대 아줌마 티를 내지 않”고 “젊게 살”면서 “나를 위해 투자”할 줄 아는 “신세대 감각파”이자, 체크리스트를 작성해 계획적으로 소비 활동에 임하는 합리적인 소비자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 광고에서도 세탁기는 뒤로 물러나 조연 역할을 맡았다.

Figure 7

A newspaper advertisement for the ‘Gongibangul Z’ Washing Machine

10개월의 시차를 두고 등장한 이 두 광고는 정장 차림의 젊은 기혼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그들의 라이프스타일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뚜렷한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이 두 광고에서 주부 이미지는 패션 화보 속 모델처럼 연출되었는데, 이는 무엇보다 광고 대상인 세탁기와 식기세척기가 가져다줄 라이프스타일의 변화 가능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주지하다시피 이 두 가전제품은 가사 노동 중 빨래와 설거지를 주부 대신 담당하는 자동화 기계 장치였다. 따라서 이런 가전제품들의 광고가 가사 노동 시간의 단축과 주부의 여유 시간 증가를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문제는 그 여유 시간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였다. 위에서 살펴봤듯이 금성사의 식기세척기 광고는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며 휴식을 취하라고 권했다. 반면, ‘공기방울Z’ 세탁기 광고는 그보다 한 걸음 더 나갔다. 그것은 “빨래는 공기방울에 맡”기고 “나를 위해 투자하”라고 조언했다. 그러니까 주부가 가사 노동에 얽매이지 말고 자아실현을 위한 자기 계발에 적극 나서라고 독려했던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공기방울Z’ 세탁기 광고에서 주부가 착용한 남성 정장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그것은 주부가 가정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공적 영역의 문턱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가능성을 환유하는 것이었다.

4. 2. 신세대 주부에서 미시로의 전환

위 두 광고의 차이는 금성사의 식기세척기에서 신세대 주부로 호명되던 이들이 대우전자의 ‘공기방울Z’ 세탁기에서는 미시로 이름을 바꾸었다는 점에서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사실 신세대 주부에서 미시로의 전환은 1994년 대중문화 전반을 휩쓸던 미시 유행을 고스란히 반영한 결과였다. 이 유행의 진원지는 서울 신촌에 위치한 그레이스백화점이었다. 이 백화점은 그해 1월에 “미시는 다르다. 그레이스는 다르다”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대대적인 광고 캠페인에 나섰다. 당시 생소한 용어였던 미시는 광고 속 설명에 따르면, “신감각, 신생활의 신세대 여성”, 좀 더 구체적으로는 “새롭고 신선한 감각으로 자신만의 라이프스타일을 창조해가며, 명쾌한 지성과 합리적 사고로 삶을 아름답게 가꾸어 가는 항상 깨어 있는 여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후 “아가씨 같이 젊은 20·30대 기혼 여성”으로 의미가 굳어진 미시라는 신조어는 1993년 말 광고대행사인 동방기획이 제안한 것이었다. 1992년 11월에 개점한 그레이스 백화점은 유통업계의 후발주자로 경쟁업체와의 차별화를 위해 서울 서북 지역의 상권 특성을 고려해 전체 고객의 80%를 차지하고 있는 20·30대 여성을 소구 집단으로 새롭게 호명할 필요가 있었다(『경향신문』, 1994년 8월 16일). 미시는 바로 이러한 요구에 화답하는 것이었다.

연원을 따지자면, 본래 미시라는 신조어는 우리보다 한발 앞서 1970년대의 일본에서 유행했던 것이다. 당시 일본의 패션의류 시장에서는 단카이 세대의 젊은 여성 소비자를 중심으로 미혼과 기혼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연령대 구분 없이 개성을 추구하는 경향을 두고 “미시 캐주얼”이라고 불렀다(Kim and Lim, 1995). 약 15~20년의 시간차를 두고 국내에 유입된 이 용어는 초반에는 일본과 유사하게 패션의류 시장의 특정 소비자 집단을 가리키는 것이었지만, 이후에는 그 집단의 라이프스타일 전반을 함축하는 것으로 의미의 폭을 넓혀갔다. 그레이스백화점은 광고를 통해 이런 변화를 주도했다. 실제로 이 백화점은 ‘미시’ 광고의 성공으로 패션 의류의 매출이 크게 증가하자, 일련의 시리즈 광고를 통해 미시가 주부이자 소비자로서 추구할 법한 라이프스타일의 세목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면서 미시 대상의 제품군을 라이프스타일 관련 제품 전반으로 확대했다. 이 시리즈 광고에 따르면, 미시는 주부로서 “여유와 만족, 둘 다 놓치지 않”고 가사를 돌보고 남편을 내조하며, 가족의 모습이 자신의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그는 소비자로서 “유행의 뒤보다는 감각의 앞에 서”며 “화려한 공간보다 표정 있는 공간”을 선호하고, “좋은 상품의 특별한 가치를 존중”한다. 그리고 “실속가로 여유 있게, 고품질로 돋보이게” 일상을 표현할 줄 안다. 앞서 살펴본 ‘공기방울Z’ 세탁기 광고는 확실히 그레이스 백화점 광고의 영향권 안에 놓여 있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 광고가 제시한 미시의 라이프스타일 상당 부분은 이 백화점 광고를 참고한 것이 분명했다.

한편, 그레이스 백화점 광고의 성공 이후 미시 유행에 합류한 광고들은 주부 이미지를 필요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변주했는데, 그중 가장 주목을 받은 것은 1994년 6월에 파격적인 미시 이미지를 내세우며 등장한 남양유업의 ‘스텝로얄’ 이유식 광고였다. “예쁘고 통통한 아기와 온화한 미소의 엄마”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던 이전의 이유식 광고와는 달리, 이 광고에서 젊은 엄마는 짧은 단발머리와 미니스커트 차림에 발목까지 올라온 워커 구두를 신은 채로 등장해, 한 손으로 아이를 안은 채 도발적인 포즈로 “내 아이는 다르다”고 선언했다. 이 광고의 기획자는 “대학생 같은 젊은 엄마”를 미시 이미지로 표현하려고 했다고 말했지만, 여기에서 미시는 그저 활동적이고 젊은 여성 소비자의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한겨레』, 1994년 10월 11일). 광고 속 미시는 한 아이의 엄마로서 구별짓기에 대한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내면서 모성의 실현이 자아의 실현과 분리되거나 충돌하는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광고의 표현을 빌리자면, “내가 남들과 다른 것처럼 내 아기는 그 누구와도 다”른 것이기에, “내 삶에 최선을 다하듯 내 아기에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Figure 8

A newspaper advertisement for Namyang ‘Step Royal’

식기세척기와 ‘공기방울Z’ 세탁기 광고의 주부 이미지는 바로 이 남양유업 광고의 미시 이미지와 친연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었다. 주목해야 할 대목은 이 광고들이 주부에게 부과된 가사 노동과 자녀 양육이라는 성별 분업 체계의 과업에 대해 그 나름의 해법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식기세척기와 ‘공기방울Z’ 세탁기의 광고는 가사노동의 부분적 자동화가 주부에게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제공할 수 있다고 제시했고, 남양유업의 광고는 자녀 양육, 특히 육아의 문제가 주부가 소비자로서 선택할 수 있는 라이프스타일의 문제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 광고들에 따르면 주부의 과업이란 이제 라이프스타일과 연관되거나 그것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이며, 그에 따라 자아실현의 문제를 중심으로 재배치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한편, 위 광고들이 보여주는 주부 이미지의 친연 관계는 시간을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앞서 살펴본 ‘베스트셀렉션’ 시리즈와 ‘아베스트’ AV 시스템의 사례로까지 확장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미시가 지시하는 젊은 세대의 기혼 여성들은 1980년대 후반 이후 생애주기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변모하면서 내수 시장의 새로운 소비자 집단으로서 제품 개발, 디자인, 광고와 긴밀한 관계를 맺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그들 중 일부는 1989년 ‘베스트셀렉션’ 시리즈에서는 시장 세분화 전략의 대상으로서 혼수 시장의 신혼 주부였고, 1993년 ‘아베스트’ AV 시스템에서는 라이프스타일 연구의 대상으로 결혼 적령기의 여성 소비자였다. 그리고 그들 일부는 1994년에 이르러 마침내 한 백화점의 광고를 통해 ‘미시’라는 부족화된 명칭으로 수렴되었고, 금성사의 식기세척기와 대우전자의 ‘공기방울Z’ 세탁기의 광고에서는 그 구체적인 면모를 드러냈다.

물론 이와 같은 흐름은 다른 주체와 접근법에 의해, 서로 상이한 제품군을 대상으로 분절된 것이었다. 이를테면 ‘베스트셀렉션’ 시리즈의 광고와 ‘아베스트’ AV 시스템의 제품 개발이 시장에서 주류의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 기존의 백색가전과의 차별화를 통해, 그리고 그 대척점에 시장 진입로를 마련하기 위해 젊은 여성 소비자 집단을 동원했다. 반면, 금성사의 식기세척기 광고는 시장에 선보인 지 얼마 되지 않은 새로운 유형의 가전제품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기 위해, 그리고 대우전자의 ‘공기방울 Z’ 세탁기 광고는 시장의 주류 제품에 새로움을 더하기 위해 각각 당시 유행으로 부상하던 신세대 주부와 미시의 라이프스타일이 필요했다. 확실히 후자의 두 사례는 앞선 두 사례와는 다른 맥락에서 젊은 여성 소비자 집단을 전유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위 네 사례들은 일련의 계열로 상호 연결된 것으로, 미시 유행이 보여주듯이 특정 세대의 여성 소비자 집단이 시장에서 빠르게 부상하는 상황을 반영한 것이었다.

사회학자 장경섭은 미시를 두고 1990년대 초반 국내 기업들이 거시 경제적 필요성에 따라 내수 시장의 새로운 소비자 집단을 발굴하기 위해 “소비와 관련된 사회적 정체성들을 제조”한 결과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미시 대상의 광고가 소비의 주체로 호명된 주부들로 하여금 “가족의 한 부분으로 가족의 집단적 소비 과정에 참여하던” 방식에서 탈피해 개인화된 소비 경험을 선택하도록 전략적으로 부추겼다고 지적했다(Jang, 2009). 한편, 문화평론가 백지숙은 미시의 이미지가 광고를 통해 만들어지긴 했지만 그에 머무르지 않고 젊은 주부들의 자아실현에 대한 잠재적 욕구를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미시의 이미지란 바로 그 욕구를 압축적으로 시각화한 결과물이었다(Baek, 1995).

양자의 주장을 종합하자면, 미시란 국내 기업의 변화하는 시장 전략과 젊은 주부들의 점증하는 자아실현 욕구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특정 연령대의 주부 정체성이 특정 유형의 라이프스타일을 지향하는 적극적인 소비 주체로 재구성되는 과정을 담고 있었다. 특히 이 호명법이 특정 단계의 생애주기를 통과하고 있던 주부들을 수신인으로 삼고 있었다는 점을 주목할 만하다. 그들은 가족 내에서 자녀의 교육 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이전, 그러니까 자녀가 아직 없거나 있더라도 미취학 아동인 시기의 중산층 주부들이었다. 미시 대상의 광고들은 바로 이들이 남성 가장과의 정서적 친밀성에 바탕을 두고 수평적인 부부 관계를 유지하되, 활발한 소비 활동을 일상생활의 구심점으로 삼아 라이프스타일의 연출에 몰두하도록 독려했다. 다른 방향에서 보자면, 1990년대 초중반, 당시 일정 수준의 구매력을 갖추고 있던 20대 후반·30대 초반의 여성 소비자들은 대중매체에 의해 신세대 주부로,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미시로 호명되는 가운데, 국내 가전업체들이 시장 세분화 전략과 라이프스타일 연구의 성과를 바탕으로 독특한 형태의 디자인 콘셉트와 광고 이미지를 선보일 수 있도록 매개하는 담론적 공간을 제공했다고 말할 수 있다.


5. 결론

1980년대 후반 이후, 국내 가전업체들은 일부 제품 개발 프로젝트들을 통해 시장 세분화 전략을 실행에 옮기면서, 20대 후반·30대 초반의 중산층 여성 소비자들을 소구 집단으로 정의하고 제품 디자인·홍보 프로세스 내부로 포섭하고자 했다. 여기에서 이 여성 소비자들이 지녔다고 가정된 욕구와 필요는 인구 통계적 분석이나 라이프스타일 연구를 통해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었고, 제품 디자인·홍보 프로세스를 거쳐 디자인 콘셉트나 광고 이미지로 번역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국내 가전업체들은 이들과 전략적인 동반자적 관계를 설정함으로써 기존의 일반형 가전제품 디자인의 프레임에서 벗어나기 위한 시도를 감행할 수 있었다. ‘베스트셀렉션’ 시리즈와 ‘아베스트’ AV 시스템은 그 결과물이었다.

주목해야 할 대목은 이 제품들의 디자인 논리가 실용성, 편의성, 효율성 등의 가치를 추구하는 기능적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주방과 거실을 거점으로 실내 공간의 시각 질서를 재조직하는 기호적 차원으로 진입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 제품들의 디자이너나 광고 기획자가 디자인 콘셉트로 인테리어 지향성을 강조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인테리어 지향성이란 결국 실내 공간 내부에 기호로 전시된 제품들이 만들어내는 시각 효과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물의 기호화란 가정의 실내 공간을 소비자의 라이프스타일을 전경화하는 무대로 전환하는 데 필수적인 것으로, 일상생활의 미학화를 위한 물적 토대나 다름없었다. 특히 이러한 변화는 정부의 주택 200만호 건설과 신도시 개발이 진행되는 가운데 아파트가 젊은 중산층 부부의 주거 모델로 보편화되는 과정과 중첩되어 있었다.

한편, 1990년 전후로 가전업체들이 주목했던 20대 후반·30대 초반의 여성 소비자들 중 기혼 여성들은 1993년에는 ‘신세대 주부’로, 그리고 1994년에는 ‘미시’라는 부족화된 명칭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특히 대중매체를 중심으로 급속히 확산된 미시 유행은 여성의 자아실현이라는 측면에서 주부의 두 가지 과업, 즉 가사 노동과 자녀 양육의 성격을 재정의하면서, 주부의 정체성을 적극적인 소비의 주체이자 라이프스타일의 연출자로 새롭게 조형해 나갔다. 확실히 미시는 한편으로는 1980년대 후반 이후 신혼 주부의 혼수 문화 변화와 결혼 적령기 여성 소비자의 구매력 증가, 1990년대 초반 신세대 주부 담론의 유행 등 20대 후반·30대 초반의 여성 소비자들을 중심으로 진행된 소비 성향의 변화를 단일한 라이프스타일의 형식으로 수렴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다시 대중매체를 통해 세대를 넘어 중산층 주부 전반으로 확산시키는 담론적 매개체 역할을 수행했다.

금성사의 식기세척기와 대우전자의 ‘공기방울Z’ 세탁기는 바로 이러한 미시 유행의 전후에 놓인 가전제품으로, 각각 신세대 주부와 미시의 라이프스타일과의 관계를 광고를 통해 강조했다. 그런데 그 관계의 양상은 ‘베스트셀렉션’ 시리즈와 ‘아베스트’ AV 시스템과는 구별되었다. 이 제품들은 시각 기호라기보다는 기능적 사물로서, 주부에게 신체적·시간적 여유를 제공하는 가사 노동의 조력자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즉 그것들은 라이프스타일을 연출하는 데 직접 활용되는 무대 위의 전시물이라기보다는, 그러한 연출이 가능하도록 무대를 지탱하는 지지대에 가까웠다.

사실 20대 후반·30대 초반의 여성 소비자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디자인과 광고의 흐름은 당대에 시장 주류의 지배적인 경향은 아니었다. 그것은 성숙기 소비사회의 도래와 함께 시장의 주변부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며 새롭게 부상하는 부류의 것이었다. 상황이 변모하기 시작한 것은 IMF 외환위기를 전후로 한 1990년대 후반 이후였다. 서론에서 지적한 대로, 1990년대 초중반 신세대 주부나 미시로 불리던 여성 소비자들 일부는 1990년대 후반에 이르러 30대 중후반의 문턱을 넘어서며, 지펠과 디오스 등 고급 가전제품의 구입을 주도하면서 소비의 양극화에 따른 내수 시장의 지형 변화를 선도하기 시작했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비록 사후적인 판단이긴 하지만, 1989년 ‘베스트셀렉션’ 시리즈 출시부터 1994년 미시 유행에 이르는 사건들의 계열은 1990년대 후반 이후의 변화를 예비하는 서막(序幕) 같은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Acknowledgments

본 연구는 2020년도 동양대학교 학술연구비의 지원으로 수행되었음.

This study was supported by grant from Dongyang University in 2020

Notes

Citation: Park, H. (2022). The Emergence of Young Female Consumers and the Change of Home Appliance Design and Advertising, 1989~1994. Archives of Design Research, 35(3), 301-319.

Copyright : This is an Open Access article distributed under the terms of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Non-Commercial License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3.0/), which permits unrestricted educational and non-commercial use, provided the original work is properly c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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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1

Figure 1
A newspaper advertisement for the ‘Singsing Refrigerator Accent’ (1990)

Figure 2

Figure 2
A TV advertisement for the ‘Best Selection’ Series (1990)

Figure 3

Figure 3
A newspaper advertisement for the ‘Neo’ Series (1989)

Figure 4

Figure 4
A newspaper advertisement for the ‘Avest’ AV System (1993)

Figure 5

Figure 5
A newspaper advertisement for the ‘Avest’ AV System (1994)

Figure 6

Figure 6
A newspaper advertisement for Goldstar's Dishwasher

Figure 7

Figure 7
A newspaper advertisement for the ‘Gongibangul Z’ Washing Machine

Figure 8

Figure 8
A newspaper advertisement for Namyang ‘Step Roy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