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s of Design Research
[ Article ]
Archives of Design Research - Vol. 35, No. 1, pp.347-365
ISSN: 1226-8046 (Print) 2288-2987 (Online)
Print publication date 28 Feb 2022
Received 12 Oct 2021 Revised 15 Nov 2021 Accepted 27 Jan 2022
DOI: https://doi.org/10.15187/adr.2022.02.35.1.347

성숙기 소비 사회의 도래와 라이프스타일 개념의 도입 :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 한국의 디자인, 광고, 영화 사례를 중심으로

Haecheon Park박해천
Department of Design, Professor, Dongyang University, Donducheon, Korea 동양대학교 디자인학부, 교수, 동두천, 대한민국
Introducing Lifestyle in the Consumer Society in South Korea: Cases of Design, Advertisement, and Film in the Late 1980s and Early 1990s

초록

연구배경 1980년대 후반, 한국 사회는 대량 생산-대량 소비 체제로의 진입과 함께 점차 일상생활 전반에 걸쳐 성숙기 소비 사회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라이프스타일 개념은 이러한 소비문화의 재편 과정에서 등장했다. 디자인을 비롯한 문화적 생산 영역의 주체들은 이 개념을 매개항으로 삼아서, 당시 급격히 팽창하던 일상의 문화적 차원에 대한 다양한 접근을 시도했다.

연구방법 본 연구는 디자인, 광고, 영화 등 세 가지 영역의 사례들에 주목해 개별 사례들이 라이프스타일의 개념을 전유하면서 문화적 생산 방식의 변화를 유도하는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순차적으로 등장한 금성사의 LSR연구실, 대우전자의 TV광고 <신대우 가족>, 신씨네의 영화 <결혼 이야기>가 사례 연구의 대상이다.

연구결과 금성사의 LSR연구실에서 라이프스타일은 제품 개발을 위한 시장 조사의 분석 대상으로, 가치관, 생활 양식, 행동 양식 등의 변수를 통해 유형화될 수 있는 삶의 패턴을 의미했다. 광고 <신대우 가족>에서 라이프스타일은 ‘물질적 풍요’와 ‘화목한 가정’의 이미지를 통해 중산층의 표준적 정체성을 담아내는 일상의 문화적 형식이었다. 양자의 사례에서 라이프스타일은 일종의 윤활유로서 상품 소비의 흐름을 매끄럽게 확대 재생산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한편, 영화 <결혼 이야기>에서 그것은 젊은 세대가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하고 자신의 개성, 취향, 감수성을 드러내는 경험의 표현 방식을 뜻했다. 위 세 가지 사례들은 라이프스타일 개념이 일상의 문화적 차원을 분석, 전시, 연출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유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결론 위에서 살펴본 세 가지 사례에서 다음과 같은 문화적 생산 방식의 변화가 가시화되었다. 디자이너를 비롯한 소비 사회의 문화적 생산 주체들이 맡은 역할이 “라이프스타일의 전문가”, “생활 장면의 프로듀서” 등으로 재정의되었고, 중산층의 대표적인 주거 유형인 아파트의 실내 공간을 모형화한 공간들이 라이프스타일의 분석, 전시, 연출을 위해 등장했으며, 라이프스타일의 소비자로서 베이비붐 세대 중산층에 대한 관심 또한 증대했다.

Abstract

Background In the late 1980s, with the entry of mass production-mass consumption system, South Korean society gradually began to take on the aspect of a mature consumer society. The concept of lifestyle emerged in the process of reorganizing the consumption culture. Subjects in the field of cultural production, including design, tried various approaches to the dimension of everyday life, which was rapidly expanding at the time, using this concept as a medium.

Methods This study aims to examine the process in which cases such as design, advertisement, and film appropriated the concept of lifestyle and induced changes in cultural production methods. Case studies include the LSR Lab of Goldstar, Daewoo Electronics' TV commercial ‘Shin Daewoo Family’, and ShinCine's movie ‘Marriage Story’, which appeared sequentially from the late 1980s to the early 1990s.

Results In Goldstar's LSR Lab, lifestyle was an object of market research for product development, meaning a pattern of life that can be categorized from variables such as sets of values, ways of life, and modes of behavior. in the TV commercial ‘Shin Daewoo Family’, it was a cultural form of everyday life that contained the standard identity of the middle class through the images of 'material abundance' and 'harmonious family'. Both cases were a kind of lubricant that smoothly expanded and reproduced the flow of commodity consumption. Meanwhile, in the movie ‘Marriage Story’, it meant the way of expressing experiences in which the younger generation constructs their identity and reveals their individuality, taste, and sensibility. The above three cases show the process in which the concept of lifestyle is appropriated as a means to analyze, display, and express the cultural dimension of everyday life.

Conclusions In the above three cases, the following changes occurred in cultural production method. The roles of subjects in the field of cultural production in consumer society, including designers, were redefined as 'experts of lifestyle'. Spaces that modeled the interior space of an apartment, a typical residential type of the middle class, appeared for analysis, exhibition, and expression of lifestyle. Interest in the baby boom generation middle class as consumers of lifestyle increased.

Keywords:

Lifestyle, Consumer Society, LSR Lab, <Shin Daewoo's Family>, <Marriage Story>, 라이프스타일, 소비 사회, LSR연구실, <신대우 가족>, <결혼 이야기>

1. 서론

1. 1. 연구 배경과 목적

한국 경제는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 ‘대량 생산-대량 소비’의 포드주의 체제를 갖췄다. 1970년대 전반에 걸쳐 박정희 정권은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분업 구조 속에서 수출주도형 성장 전략, 중화학 공업 중심 산업 정책, 장시간 저임금 노동 등을 기반으로 대량 생산 체제를 구축했지만, 그것이 국내 시장의 대량 소비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대량 생산된 제품 대부분은 수출 중심 경제 운영과 계층 간 소득 격차로 인해 일반 가계의 소비 대상이 되지 못했다. 백욱인은 이를 두고 “중상층에 한정된 불완전한 대량 생산 체제”로서 “주변부 포드주의(Fordism)”의 특징을 보여준다고 지적한다(Baek, 2008). 일반적으로 포드주의적 산업화는 대량 생산뿐만 아니라 대량 소비까지 동반하는 역사적 과정이지만, 한국 경제의 주변부적 성격으로 인해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 사이에 시간적 지체가 발생했던 것이다.

상황이 변한 것은 1980년대 후반 이후였다. 한국 경제는 이 시기에 대량 생산을 대량 소비로 연결할 수 있는 물질적 토대를 갖췄다. 1985년 플라자 합의 이후 세계 경제 환경 변화에 따른 ‘3저 호황’을 근간으로 실질소득 증가, 소득 격차 완화, 수출 비중 감소, 내구소비재 보급, 대량유통체계 확립, 신용금용제도 확립 등이 교차된 결과였다(Baek, 2008). 여기에 1987년 6월 항쟁과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를 전후로 정부의 소비 억제 정책 기조가 약화된 것도 한몫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6년 연두교서에서 한국적 발전주의 모델의 성공적인 실행을 통해 1970년대 후반에는 "소비가 미덕"이 되는 "대량 생산-대량 소비의 '풍요한 사회'"에 당도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었는데(『동아일보』, 1966년 1월 18일), 그의 예측은 본래 목표보다 10년 늦게 현실화되었던 것이다.

대량 생산-대량 소비 체제로의 진입은 소비 양식의 변화를 동반했다. 실제로 1980년대 후반 이후, 한국 사회는 1인당 국민소득 5천 달러의 벽을 넘어서면서, 필수 내구소비재 소비를 중심으로 의식주의 기본적인 욕구 충족을 중시하는 소비 사회의 형성 단계에서 일상생활 전반에 걸쳐 다양한 소비 경험을 향유하는 소비 사회의 성숙 단계로 본격 이행하기 시작했다. 특히 오랜 권위주의와 집단주의에 억눌려 있던 개인의 욕망은 이 시기를 통과하면서 소비 행위를 통해 출구를 찾아 분출되기 시작했다.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에 도달한 1990년대 중반 시점까지 실질소득 증가는 이러한 변화를 가능하게 만든 강력한 동력원이었다.

이 시기, 소비 양식의 변화와 관련해서는 크게 두 가지 집단적 흐름이 두드러졌다. 한편에서는 이제 막 중산층에 진입한 집단의 구성원들이 생활 수준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며 왕성한 구매력으로 내구소비재 구입을 늘려나갔고, 다른 한편에서는 젊은 세대 일부가 개인주의적 성향을 내비치며 기성세대와는 구분되는 차별화된 소비 패턴을 선보였다.

실질소득 증가를 경험한 신규 중산층에게 아파트, 가전제품, 승용차를 하나의 패키지로 묶는 소비의 프레임은 물질적 풍요를 향유하며 새로운 일상생활의 질서를 구축하는 데 필수 조건이나 다름없었다. 이런 경향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듯이, 1980년대 후반 이후 가계 지출에서 내구소비재 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은 1985년 2.94%에서 1989년에는 5.80%로, 1991년에는 6.54%로, 불과 6년 사이에 2배 이상 증가했다(Baek, 1994). 그리고 이와 보조를 맞춰 컬러텔레비전의 보급률은 88올림픽 전후로 거의 100%대에 도달했고, 냉장고와 세탁기의 보급률은 1980년대 중반 이후 급상승의 그래프를 그리면서 1990년에는 각각 90%대와 70%대를 넘어섰다.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중산층 이상의 일부 계층에 국한되었던 이 제품들의 보급은 이 시기에 전체 사회 계층으로 확대되었다. 이후 1990년대 초반의 내구소비재 시장은 승용차가 선두를 이끌고 에어컨과 VTR 등이 그 뒤를 따르는 모양새였다(Nam, 2011).

한편, 젊은 세대 일부가 대중매체로부터 “신세대”나 “X세대”로 불리면서 새로운 감수성의 소비 주체로 주목받았다. 이 집단은 주로 서울 거주 중산층의 자녀 세대로, 고도성장이 가능케 해준 풍요로운 일상 속에서 성장기를 보냈고 유소년기부터 컬러텔레비전과 컴퓨터, 비디오 게임 등 새로운 영상 매체를 접해 대중문화와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들은 기성세대와는 구분되는 세대 경험을 바탕으로, 개인주의적 태도, 개방적인 가치관, 다양한 취향을 지녔고, 자신의 폭넓은 소비 경험을 자기표현, 개성 추구, 상징 부여 등과 결부 지으려고 시도했다. 이러한 특징은 기성세대의 문화에 내재된 획일주의, 집단주의, 권위주의 등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확실히 이들이 보여준 소비에 대한 문화적 감수성은 이전 세대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이었다(Joo, 1994; Park, 1994)

이 두 가지 흐름은 역동적으로 상호작용하면서 소비문화의 지형을 재편해 나갔다. 전자가 신규 중산층이 대량 생산-대량 소비 체제에 부합하는 소비 양식을 지배적인 형태로 안착시키는 과정이었던 반면, 후자는 젊은 세대의 소비 주체가 그러한 체제를 후경으로 삼아 대중문화의 팽창과 함께 새롭게 부상하는 과정이었다. 소비문화의 측면에서 전자가 '전통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의 공존에서 현대적인 것으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면, 후자는 '현대적인 것에서 포스트모던한 것으로의 이행"을 뜻하는 것이었다.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이라고 불릴 만한 상이한 양상이었지만, 양자 모두 성숙기 소비 사회의 도래를 보여주는 지표와 같은 것이었다.

‘라이프스타일(lifestyle)’은 위와 같은 사회 구조 변동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등장한 개념이었다. 본래 이 개념은 소비에 대한 태도를 중심으로 사회적·행위적·심리적 차원의 다양한 변수를 활용해 개인이나 집단을 유형화·군집화할 수 있는 삶의 패턴을 의미했다. 여기에서 라이프스타일을 규정하는 변수는 계층이나 계급 같은 사회경제적 범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사용의 맥락에 따라 유연하게 정의될 수 있는 것이었다. 라이프스타일 개념은 1970·80년대 서구의 마케팅과 소비자 행동 연구 전문가들이 일상의 문화적 차원에 주목하던 사회학의 '생활 양식'에 관한 논의를 일부 수용해 실용적인 관점에서 시장 조사의 방법론적 모델로 변형한 결과였다(Baek, 1994). 사회학이 '생활 양식'이라는 개념을 통해 주목하고자 했던 연구 대상을 마케팅과 소비자 행동 연구는 '라이프스타일'이라는 개념으로 접근하고자 했던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1980년대 후반 이전까지 국내에서 ‘라이프스타일’이라는 개념에 주목한 사례는 거의 없었고, 일반인에게는 생소하기까지 했다. 당시 국내 시장 상황이란 ‘만들면 팔리는’ 생산자 중심주의에 의해 동질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국내 제조업체들은 굳이 ‘라이프스타일’ 같은 개념에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값싸고 고장 없는 기능적인 제품이면 시장에서 경쟁 우위를 점하는 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소비 사회 성숙기에 접어들고 시장의 전개 양상이 변화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소비 규모의 증가와 소비 성향의 다양화로 인해 시장의 역동성이 급격히 증가했고 이전까지 납작했던 일상의 문화적 차원도 빠르게 팽창했다. 라이프스타일 개념이 입지를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상황 변화 덕분이었다.

이 시점에 ‘라이프스타일’에 주목한 이들은 주로 기존의 생산자 중심 접근에서 탈피하기 위해 새로운 시장 전략 수립에 골몰하던 소비 사회의 문화적 생산 주체들이었다. 제품 개발 프로세스에 참여해 소비자가 원하는 신제품 콘셉트를 제안해야 하는 디자이너나 상품 기획자, 광고 기획 분야에서 상품 소구 집단의 관심을 유도하기 위해 홍보 전략을 구상해야 하는 마케팅 전문가 등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들은 일단 일상의 문화적 차원과의 연관성 속에서 소비 행위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인식했고, 특정 소비자 집단의 라이프스타일을 온전히 분석할 수 있다면 그들의 소비 패턴 역시 예측할 수 있다는 믿음을 공유했다. 확실히 상품 기획, 디자인, 마케팅 같은 문화적 생산의 실무 영역에서 라이프스타일 연구는 세분화된 시장의 흐름 속에서 소비자를 유형별로 분류해 그 특성을 정의하는 데 무척 유용한 접근법으로 간주되었다.

한편, 대중문화 영역에서도 라이프스타일은 중요한 주제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라이프스타일은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전시와 연출의 대상으로 전유되었다. 앞서 살펴봤듯이 일상생활에서 소비 경험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졌고, 이에 따라 상품 구입에 의존해 일상생활의 질서를 좀 더 현대적이고 심미적인 형태로 재편하려는 시도 역시 거듭되었다. 이런 변화를 포착한 영화나 드라마는 등장인물들의 캐릭터를 설정하고 거기에 리얼리티를 부여하는 수단으로 라이프스타일을 활용했다. 이때 라이프스타일은 현재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의미에 근접한 것으로, 등장인물들을 타인과 구별하게 만드는 일상적인 행위의 유형을 뜻했다(Chaney, 2004). 그들은 극중에서 특정한 행위를 통해 자신을 둘러싼 사람, 사물, 공간, 환경과 관계를 형성하고 그 관계를 통해 자기 자신을 표현하며 캐릭터를 구축했다. 그들의 캐릭터는 라이프스타일의 전시와 연출을 통해 가시화되는 것이었다. 물론 대중문화 속 라이프스타일의 역할이 여기에 그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대중이 선망할 만한 새로운 일상생활의 이미지를 소개함으로써 그들이 더 나은 물질적 삶의 가능성에 매혹되거나 특정 상품에 대한 소비 욕구를 자각하도록 독려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본 연구는 위와 같은 맥락에서 성숙기 소비 사회 이행기라고 할 수 있는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의 디자인, 광고, 영화 등 세 가지 영역의 사례들을 주목하면서, 그 사례들 배면에 자리 잡은 라이프스타일 개념과의 관계 역학을 분석하고자 한다.

1. 2. 연구 방법과 대상

본 연구가 사례 분석의 대상으로 삼고자 하는 것은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순차적으로 등장한 금성사의 LSR(Life Soft Research)연구실, 대우전자의 TV광고 <신대우 가족>, 그리고 신씨네의 영화 <결혼 이야기>이다. 먼저 금성사의 LSR연구실에서 라이프스타일은 앞서 살펴본 마케팅과 소비자 행동 연구가 정의한 바의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제품 개발을 위한 시장 조사의 방법론적 모델로 전유되었다. 상품 기획자와 디자이너들은 시장의 경계를 넘어 일상의 문화적 차원을 탐색하는 데 라이프스타일 개념을 활용했다. 금성사의 LSR연구실에서 라이프스타일이 상품의 생산-소비 과정에서 소비에 관한 정보를 생산의 차원으로 피드백하는 것과 관련되었다면, TV광고 <신대우 가족>과 영화 <결혼 이야기>에서는 생산-소비 과정, 그 사이의 차원에서 커뮤니케이션의 활성화를 통해 수요 촉진을 유도하는 것과 연관되었다. 뒤의 두 사례는 라이프스타일 개념을 명시적으로 내세우지 않았지만, 대중문화를 접면으로 삼아 그 의미를 변형하고 범위 역시 확장했다. 여기에서 라이프스타일은 중산층적 생활 방식을 주조하는 일상의 문화적 형식을, 그리고 더 나아가 개인이나 집단의 개성, 취향, 감수성 등을 가시화하는 정체성의 표현 방식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당시 국내에 도입되기 시작한 ‘라이프스타일’ 개념은 디자인, 광고, 영화 등 문화적 생산의 다양한 영역에 걸쳐 각각 다른 방식이긴 했지만, 일상생활의 현대화와 미학화라는 맥락 위에 소비의 위상을 재배치하는 방편으로, 그리고 소비와 일상의 매개 지점을 포착하고 거기에 매끄럽게 연속성을 부여하는 수단으로 전유되었다. 그리고 그 전유의 과정을 통해 상품의 생산-소비 과정 내·외부를 관통하면서 성숙기 소비 사회로의 전환을 추동하는 사건들의 계열을 만들어냈다. 본 연구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사례들은 바로 그 사건들의 계열 일부로서 대량 생산-대량 소비 체제가 요구하는 새로운 일상생활의 경관을 구축하는 데 일조했다. 본 연구는 바로 이런 측면에서 위 세 가지 사례들이 라이프스타일 개념을 전유하는 구체적인 과정을 살펴보면서, 그 과정이 추동한 문화적 생산 방식의 변화를 분석하고자 한다.


2. 성숙기 소비 사회의 라이프스타일 도입 사례 분석

2. 1. 금성사 LSR연구실, 라이프스타일의 실험실

1989년, 럭키금성그룹은 매킨지 사의 자문을 받아 “21세기 비전 계획”의 개념을 설정하고 그 구체적인 계획과 실행에 착수했다. 그룹의 최고경영진이 1980년대 후반 이후의 급격한 국내외 환경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장기적인 경영 계획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결과였다. 그 계획의 첫 단계는 조직 체계에 대한 자체 진단을 실시해 법인별 경영 체계를 사업문화 단위(culture unit)로 개편하고 개별 단위에 경영 전략 차원의 자율성을 부여하는 것이었다(Wang, 1991).

가전 사업문화 단위에 속한 금성사는 이에 따라 “고객을 위한 가치 창조”와 “인간 존중의 경영”을 경영 이념으로 내세우고, “세계화, 독자 기술 확보, 마케팅 강화” 등의 전략을 추진하기 위해 조직 개편을 단행했다. 전사 조직을 영업, 제조, 경영 지원, 경영 촉진의 4개 사업부로 구성하고, 사업부 책임자에게 강력한 의사결정권을 부여해 자율 경영 체계를 구축했다. 이 과정에서 금성사는 자사의 미래상을 “세계적 시각에 입각해 비교우위의 기술 분야를 바탕으로 마케팅이 강점인 경영 전략을 전개해 고객에게 최고의 만족을 제공하는 세계 가전업체 초우량기업”으로 설정하고, ‘고부가가치 제품 개발’에 초점을 맞춰 “상품 개발력 향상”과 “상품 이미지 재구축” 등을 전략 과제로 제시했다. 하지만 여기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금성사 이헌조 사장의 지적대로, “부가가치가 높은 고급 제품이라야 고객의 니즈가 무엇인지 신경쓰기 마련인데, 싼 가격으로 팔다보니 고객에 대한 관념이 전혀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헌조는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제 “물질적으로 꽤 풍요로운 생활을 누리는 만큼 문화적 수준에 있어서도 돌파구를 찾아야” 하며, 마케팅이 주도하고 디자인이 중심이 되는 방식의 제품 개발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Lee, 2004).

1989년 8월에 이헌조 사장의 주도로 설립된 LSR연구실은 위와 같은 문제의식의 연속선상에서 제품 개발 역량을 혁신하려는 시도였다. 금성사의 표현을 빌리자면, LSR 연구실의 임무는 “고객 밀착형 소비자 리서치“를 진행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고객 밀착형 소비자 리서치”란 일상 속에 감춰진 소비자의 잠재적 욕구를 발견해 그것을 필요(needs)로 전환하고 욕구와 필요의 관계를 좌표로 삼아 독창적인 신제품 개발의 밑그림을 그려내는 것이었다. 욕구가 개인이나 집단의 심리적 차원에 속하는 것이라면, 필요는 그 욕구를 물질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 기능적 차원에 속하는 것이었다(Giddens & Sutton, 2018). 당시 소비자의 욕구는 성숙기 소비 사회 진입과 함께 “기본 생활을 누리기 위한” 욕구에서 “생활을 즐기고 그 가치를 창출하고자 하는” 욕구로 변모하고 있었고, 이에 따라 소비자가 ‘필요’로 하는 제품의 성격 역시 “즐거운 생활을 누”리며 “개성을 표현할 수 있는 것”으로 변화하고 있었다(Kim, 1991). 이러한 시대 변화를 따라잡기 위해서는 기존의 시장 정보 수집 방식만으로는 부족했다. 소비자 모니터링 제도를 통한 불만 접수, 대리점과 백화점의 영업사원 인터뷰, 선도 기업과 경쟁사 분석 등과 같이 주먹구구식의 느슨한 시장 조사 방법으로는 한계가 분명했다. 무엇보다 소비자에게 밀착하기 위한 체계적인 접근법이 필요했다.

LSR연구실 책임자였던 김성택 부장은 당시 국내 마케팅이나 소비자 행동 연구에서 주목받던 ‘라이프스타일 연구’를 기존 접근법의 대안으로 제시하면서 제품 개발 프로세스에서 소비자 개념을 생활자 개념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Kim, 1991). 그는 10년 가까이 일본 소니에서 VTR, 워크맨, 자동차 CD 플레이어 등의 상품 기획을 담당한 바 있었다. 본래 ‘생활자’는 1980년대 중반 일본의 마케팅 전문가들이 제안한 것으로, 라이프스타일 연구의 체계를 구성하는 데 구심점 같은 개념이었다. 이에 따르면, 소비자가 합리적 의사결정 과정을 거쳐 상품 구매 여부를 결정하는 행위자를 뜻하는 반면, 생활자는 나름의 주체적인 방식으로 다양한 제품을 사용하면서 그 관계 속에서 일상생활의 질서를 구축하는 행위자를 의미했다. 전자가 시장의 경제적 차원과 직결된다면, 후자는 일상의 문화적 차원과 연관되는 것이었다(Park, 2019). 김성택에 따르면, 전자는 소비 사회 형성기, 즉 “상품 우선 시대”에 어울리는 개념인 반면, 후자는 소비 사회 성숙기, 즉 “생활 우선 시대”에 적합한 개념이었다. 그가 보기에 LSR연구실이 제품 개발에 필요한 좀 더 심도 깊은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서는 소비자의 구매 패턴뿐만 아니라 생활자의 일상생활에도 주목해야 했다. ‘라이프스타일’이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 대목이었다. 김성택은 라이프스타일이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개념으로 확정된 의미를 지니지는 않는다고 지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LSR연구실에서 잠정적으로 정의한 바에 따르면, 그것은 생활자가 일상생활의 다양한 과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활용하는 패턴화된 체계로, 가치관, 생활 양식, 행동 양식, 이렇게 세 가지 차원으로 구성되는 것이었다(Kim, 1991). 생활자의 일상생활은 바로 이렇게 정의된 라이프스타일의 모델에 따라 정보 형식으로 번역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LSR연구실은 생활자의 일상생활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크게 두 가지 방향의 접근법을 활용했다. 하나는 원거리에서 표본 여론 조사를 통해 생활자의 가치관과 생활 양식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생활자의 일상 공간에 근거리로 접근해 그들의 행동 양식에 대한 정보를 추출하는 것이었다. LSR연구실은 초기의 조직 정비 과정을 거쳐 생활조사팀, 여성기획팀, 상품추진팀, 상품제안팀, 이렇게 4개 팀으로 구성되었는데, 생활조사팀과 여성기획팀은 각각 전자와 후자의 접근법과 관련된 업무를 수행했다. 다른 두 팀은 이 두 팀이 제공하는 정보를 바탕으로 본격적인 제품 개발에 나섰다. 상품추진팀은 아이디어의 타당성을 검토해 신상품 콘셉트를 제안했고, 상품제안팀은 중장기적 관점에서 상품 기획을 진행했다(Park, 2019).

1991년 9월, “테크노패션”이라는 이름으로 운영되기 시작한 ‘필드테스팅오피스(field testing office)’는 여성 기획팀이 소비자의 일상생활에 근접 조우를 시도하는 과정의 산물이었다. 소비자의 일상생활은 사적 영역인 터라 직접 관찰하는 데에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LSR연구실은 이런 이유로 나름의 우회로를 만들었는데, 그것은 바로 생활자의 대표적인 주거 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 아파트 실내 공간을 모형화해 제품 개발 프로세스 내부로 옮겨놓은 것이었다. 필드테스팅오피스는 바로 이런 모형화의 결과로 만들어진 일종의 실험실이었다. 실제로 강남구 청담동의 오피스텔을 개조한 110평 규모의 공간에는 일반 아파트와 동일한 구조로 침실, 거실, 주방, 서재, 작은방이 꾸며져 있었고, 금성사의 최신 가전제품 50여 종이 구비되어 있었다. 이를테면 거실에는 사무용 책상과 의자를 대신해 텔레비전과 오디오, 소파가 놓여 있는 식이었다.

Figure 1

An interior view of the field testing office (『한겨레신문』, 1991년 9월 18일)

여성기획팀은 바로 이 모형화된 공간에서 생활자가 제품을 사용하는 일련의 과정을 시뮬레이션했다. 출근 후 오전에 신문이나 잡지를 살펴보면서 새로 나온 상품의 정보를 수집하고 오후에는 자사 제품을 사용설명서대로 직접 써보며 불편 사항이나 개선점을 정리했다. 여성기획팀은 팀 명칭대로 여성 직원만으로 운영되었는데, 구성원은 10명 미만으로 사내 지원자를 중심으로 선발했으며 여성 디자이너가 파견 나오기도 했다. 여기에서 시뮬레이션은 생활자의 제품 사용 경험에 바탕을 둔 신제품 아이디어 도출을 위한 것으로, 일상생활을 있는 그대로 모사한 것이라기보다는 그것을 제어 가능한 형태로 변형한 것에 가까웠다. 여성기획팀은 시뮬레이션 과정에서 이중의 역할을 수행했는데, 그것은 ‘생활자’를 연기하는 동시에 ‘생활자’를 연기하는 자신을 관찰하는 것이었다. 이 팀이 여성 연구원으로만 구성된 이유는 명확했다. 실제 가전제품의 경우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생활자’ 대부분이 바로 성별 분업 체계에 따라 가정에서 집안일을 전담하는 주부였기 때문이다. 남성보다 여성이 시뮬레이션 과정에서 행위자와 관찰자라는 이중의 역할을 수행하는 데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한편, 이 과정에서 주부가 자신의 사용 경험을 제공하는 '생활자'로 자리매김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제 주부는 소비의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고, 비록 시뮬레이션이라는 간접적인 방식이지만 생산의 차원, 즉 제품 개발 프로세스에 참여하는 정보 제공자로 변모했던 것이다. 여성기획팀의 임무 중 하나는 바로 주부의 대리인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금성사의 LSR연구실은 시장의 경계를 넘어서 일상의 문화적 차원과 접촉 지점을 마련하고 거기에서 제품 개발을 위한 정보를 추출하려고 시도했다. 일상의 문화적 차원은 상품이 시장 교환을 거쳐 당도하는 소비 과정의 종착지가 더이상 아니었다. 그것은 다양한 분석 방법을 통해 수집되어야 하는 정보의 원천이면서, 다시 생산의 차원, 특히 제품 개발 프로세스로 선순환되어야 하는 피드백의 출발점이었다. 따라서 상품의 생산-소비 과정이 제품 개발 프로세스에서 일회적인 직선적 과정이 아니라 나선형의 순환 과정으로 재정의된 것은 당연했다. 생산에서 소비로 이어지는 유통 과정에서 움직이는 대상은 상품이었지만, 소비가 다시 생산으로 연결되는 피드백 과정에서 이동하는 대상은 상품이 아니라 정보였다. 그리고 이때의 정보는 바로 ‘라이프스타일’이라는 개념적 모델의 필터를 거쳐 추상화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확실히 LSR연구실은 ‘생활자’ 개념 도입, 다양한 정보 수집 방법 활용, 필드테스팅오피스 운영 등 라이프스타일 연구를 경유해 디자인을 포함한 제품 개발 프로세스를 일종의 정보 처리 모델로 재구성하는 과정의 초입 단계를 밟고 있었다. 이 모델에 따르면, 소비자는 가전업체가 제조한 상품의 소비자일 뿐 아니라 그 상품에 내재한 라이프스타일 정보의 생산자이자 소비자이기도 했다.

이와 같은 LSR연구실의 성과는 이후 라이프스타일 연구가 당시 유행하던 ‘한국형 가전’ 개발과 연계해 제품 개발 프로세스의 중추로 발전하는 데도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금성사가 라이프스타일 연구에 첫발을 내디딘 직후 경쟁사들도 발 빠르게 LSR연구실과 유사한 조직을 만들기 시작했다. 대우전자는 1990년에 여직원만으로 구성된 상품평가연구팀을 구성했고, 삼성전자도 1991년에 생활소프트팀을 신설한 후 그 이듬해에는 강남구에 생활문화연구센터를 설립했다. 오피스 빌딩 내에 위치한 생활문화연구센터는 실제 생활 공간처럼 꾸며진 1백여 평 규모의 공간에 가전제품과 컴퓨터 등 190여 종의 제품을 배치했다. 외형은 필드테스팅오피스와 유사했지만, 운영 방식은 상이했다. 삼성전자는 이 공간에 직접 방문한 소비자들, 특히 주부들의 의견을 모니터링하기 위한 창구로 활용하고자 했다. 이와 같이 1990년대 초반 이후 제품 개발을 위한 라이프스타일 연구는 다양한 형태로 가전업체 전반으로 확산되었다(Park, 2019).

2. 2. 대우전자 TV광고 <신대우 가족>, 상품의 라이프스타일화

1990년, 대우전자는 일련의 “하이터치” 제품을 발표하면서 금성사와 삼성전자의 양강 구도에 맞서고 있었다. “기술 대우”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기업 광고를 진행했지만, 만년 3위의 이미지를 탈피하는 데에는 한계가 뚜렷했다. 한편 국내 광고 시장이 성숙기 소비 사회로의 이행을 반영하듯이 가파른 우상향의 그래프를 그리면서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었다. 1988년에 1조 2,700억 원대를 기록하며 1조원 대를 처음 돌파했던 국내 광고 시장은 1989년에는 1조 5600억 원, 1990년에는 2조 원에 도달했다. 1985년만 해도 7,400억 원대에 불과했던 광고 시장은 불과 5년 만에 3배 가까이 성장했던 것이다(Joo, 2010).

1991년, 대우전자는 광고 시장의 성장세와 보조를 맞추면서 시장에서의 열세를 만회하고자, 광고 예산을 전년 대비 50% 증액한 250억 원으로 책정하고 대규모 광고전을 준비하고 나섰다. 그 첫 단계는 최고경영진의 진두지휘 아래 국내 유수의 광고 기획사 3개 업체를 초청해 대행사 선정을 위한 경쟁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치열한 경쟁전이 진행된 후 최종적으로 선정된 대행사는 코래드였다. 이 업체가 대규모 설문조사를 바탕으로 제안한 광고 기획안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Yun, 1992). 코래드는 광고 기획안 준비 과정에서 전국의 소비자 2,7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한 바 있었다. 그 결과는 크게 두 가지 내용으로 요약되었다. 첫째, 매장에 직접 방문해 가전제품을 구입하는 소비자 대부분은 주부라는 것이었다. 냉장고와 세탁기 같은 백색가전뿐만 아니라 텔레비전과 VTR의 구입에서도 주부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이런 경향은 이후에도 더욱 강화될 것으로 예측되었다. 둘째, 소비자가 제품을 구매할 때 기업 이미지를 가장 중요하게 고려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소비자의 구매 결정 요인은 기업 이미지, 본인과 주변의 사용 경험, 기능, 디자인, 가격 순으로 나타났다. 대우전자가 경쟁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취약하다고 판단하고 있던 기업 이미지가 소비자에게는 가장 중요한 구매 결정 요인이었던 것이다(Kang, 2007).

코래드는 위 두 가지 조사 결과를 적극 반영한 광고 기획안을 제안했다. 우선 첨단 컴퓨터그래픽 기술을 통한 표현 기법의 차별화로 ‘기술 혁신’을 강조하던 경쟁사들의 기업 이미지 광고와는 방향을 달리 하는 것이 중요했다. 코래드가 판단하기에 이런 유형의 광고는 가전제품의 주요 구매층인 20~40대 주부들의 정서와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코래드가 제시한 광고 기획의 기본 방향은 주부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새로운 형식의 광고를 제작해 대우전자의 기업 이미지를 친근한 모습으로 일신하는 것이었다. 기획팀은 주부의 시선을 사로잡기 위해 당시 높은 시청률로 큰 인기를 누리던 텔레비전 연속극에 주목해 광고에 드라마 형식을 접목하기로 결정했다(Korad, 1993).

대우전자가 야심차게 제작한 TV광고 <신대우 가족>은 이런 과정의 결과물이었다. 총 13편으로 구성된 <신대우 가족>은 1991년 8월말부터 1992년 3월초까지 2주마다 1편씩 약 6개월에 걸쳐 방영되었다. 대우전자는 가상의 중산층 가족을 내세워 이들의 일상생활 속 이야기를 연속극 형식으로 담아내되, 극의 전개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자사의 주요 제품을 소개하고자 했다. 당시 국내 최고의 영화감독이었던 이장호가 감독을, 그리고 베스트셀러 작가였던 신달자가 극본을 맡았고, 대중적으로 인기 높은 유명 배우들, 유인촌, 박상원, 김미숙, 강문영, 송채환 등이 참여했다. 개별 광고에는 각각 프롤로그, 우리 가족 역사, 맞선, 만남, 패션쇼, 사랑의 전주곡, 사랑의 데이트, 크리스마스 파티, 눈 내리는 피아노 학원, 누나와의 갈등, 포장마차, 화해, 결혼식 등의 부제가 붙여졌다. 드라마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신대우(유인촌 역)의 처남인 윤석(박상원 역)은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한 뒤 누나(김미숙 역)의 소개로 패션 디자이너 혜란(강문영 역)과 맞선 비슷한 만남을 가진다. 하지만 윤석은 조카의 피아노 선생인 희원(송채환 역)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 누나는 이들의 관계를 눈치 채고 반대에 나서지만, 윤석은 이미 희원과 사랑에 빠진 상태다. 드라마는 신대우가 아내를 설득하고 윤석이 가족의 축복을 받으며 희원과 결혼식을 올리는 것으로 끝맺는다.

Figure 2

Main scenes of TV commercial <Shin Daewoo's Family>(Her, 1991)

예고편 격으로 방송된 “프롤로그” 편(1편)은 광고 시간의 거의 대부분을 할애해 광고 촬영 준비 과정과 함께 신대우 가족의 실내 세트 제작 현장을 소개했다. 감독은 탁자 위에 도면을 펴놓고 배우들에게 연기와 동선을 지도하고 스텝들은 분주히 움직이며 소품들을 배치한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거실 세트에서 감독, 스텝, 배우들이 다 함께 모여 기념 촬영을 한 다음, 드라마가 본격적으로 막을 올린다. 이렇게 광고는 시청자의 시선을 <신대우 가족>의 가정 공간으로 인도하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이 공간은 아파트 실내 공간을 드라마의 무대로 재구성한 것이었다. 대우전자의 주요 제품들은 이 공간 곳곳에 배치되어 각 편마다 드라마의 흐름과 보조를 맞추며 등장했다. “대우텔레비전 슈퍼비전 임팩트”, “대우VTR 디지털셔틀”, “대우냉장고 셀프”, “대우세탁기 파워”, “대우AV콤포넌트 마제스타”, “대우캠코더 탤런트 무비”, “대우디지털 피아노 벨로체” 등이 그 제품들이었다.

이 제품들은 신대우 가족의 일상생활과 접점을 마련한 후 쓰임새를 기능적 차원에 국한하지 않고 다각도로 확장하면서, ‘풍요’와 ‘행복’에 초점을 맞춘 중산층 가족의 이미지를 구현하는 데 주력했다. 먼저 냉장고부터 살펴보자. “맞선” 편(3편)에서 혜란과 맞선을 보고 돌아온 윤석은 매형인 신대우와 술 한 잔 하기 위해 주방으로 들어가 냉장고를 열고 안주거리를 찾는다. 이때 활짝 열린 냉장고 내부는 부족함 없는 일상의 풍요를 전시하려는 듯이 신선 보관된 먹거리들로 가득 차 있다. “우리집 역사” 편(2편)에서는 윤석은 피아노 선생 희원에게 호감을 느끼는데, 그가 그녀를 처음 보는 것은 실제 만남을 통해서가 아니라 비디오로 재생된 조카의 피아노 연주 동영상 속에서이다. 여기에서 비디오 플레이어는 인물 간의 관계를 연결하고 사건 전개를 돕는 커뮤니케이션 미디어의 역할을 담당한다. “사랑의 데이트” 편(7편)에서는 신대우 부부가 어린 자녀들과 함께 대화면의 텔레비전으로 영화를 감상하는데, 온 가족이 정겹게 거실 소파에 둘러앉은 모습은 화목한 가족의 전형적인 일상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크리스마스 파티” 편(8편)에서는 신대우가 산타클로스 분장을 한 채 캠코더로 아이들이 노는 장면을 촬영한다. 당시 국내 시장의 도입 초기 단계였던 캠코더를 가족의 역사를 기록하는 장치로 정의하면서 다정한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그 쓰임새를 자연스럽게 보여주고자 했다. 또한 “누나와의 갈등” 편(10편)에서 신대우는 아내의 가사를 돕기 위해 직접 세탁기를 사용해 빨래를 하면서 공기방울의 세탁 기능에 감탄한다. 남성 가장이 빨래하는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당시에는 익숙하지 않았던 가사 분담을 제안했던 것이다. 전편에 걸쳐 신대우는 '남성 생계부양자-여성 전업주부'라는 가정 내 성역할의 틀을 위협하지 않는 선에서 수평적인 가족 관계를 지향하며 가사 분담에 적극적인 현대적인 가장의 모습을 보여준다.

<신대우 가족>과 같이 가전제품의 소비 단위를 개인에서 가족으로 확장하고 제품의 쓰임새를 일상생활의 맥락에 배치하는 방식의 광고는 기존의 가전제품 광고들과는 방향을 달리 하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대우전자의 슈퍼비전 임팩트 TV광고는 제품 이미지를 중심으로 "선명"한 화질과 "웅장"한 사운드가 전해주는 생생한 현장감을 연출하면서, 신기술 도입에 따른 제품의 성능 향상과 기능 개선을 강조했다(Kim, B, 2015). 이런 경향은 경쟁사의 광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기존 제품이나 경쟁 제품과 차별화된 성능으로 신제품 교체 욕구를 자극하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Kim, 2015).

물론 <신대우 가족> 같은 광고의 전례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1989년 방영 이후 “최진실 신드롬”을 일으킨 바 있는 삼성전자의 “톱스타 VTR” 광고는 짧은 콩트 형식으로, <신대우 가족>과 유사한 유형의 광고 중 하나였다(Ma, 2004). 이 광고는 텔레비전과 VTR의 동시 시청 기능, VTR의 간편 예약 녹화 기능을 강조하기 위해 이 기능들을 남편의 퇴근 시간과 연관시켰다. 당시 신인 배우였던 최진실이 맡은 젊은 주부는 VTR로 영화를 관람하다가 시계가 오후 5시를 가리키는 걸 보고선 놀란 듯 “어머 축구할 시간이네”라고 독백한다. 그리고 영화를 계속 보면서 남편이 좋아하는 축구 경기 중계를 녹화한다. 퇴근 시간, 집에 도착한 남편이 아내에게 녹화 여부를 묻자 아내는 자신보다 축구가 더 좋으냐며 토라지는 표정을 짓는다. 다음 장면에서 텔레비전 앞에서 축구 중계를 시청하는 남편을 뒤에 두고, 아내가 시청자를 향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남편 퇴근 시간은 여자하기 나름이에요.”

앞서 살펴보았듯이 <신대우 가족>은 20~40대 주부의 눈높이에 맞추려는 의도로 드라마 형식을 차용하고 극 전개의 주 무대를 가정 공간으로 설정함으로써 가족의 일상생활을 담아낼 수 있었다. 여기에서 신대우 가족은 1980년대 후반 이후 가전제품을 비롯해 내구소비재 시장의 소비자로 새롭게 부상한 집단이 계층적인 귀속감을 느낄 법한 중산층의 표준적인 라이프스타일을 선보였다. 당시 각종 조사에서는 중산층 귀속 의식을 지닌 사람의 비중이 전체의 60~70%에 달한다는 결과가 나오곤 했다. 광고는 이를 반영이라도 하듯이, 중산층 정체성에 대한 대중의 집단적 선망과 욕구를 우회적으로 자극하는 방식으로 라이프스타일을 전시했다. 스타급 배우들이 연기한 드라마 속 일상생활이 라이프스타일의 전시를 위한 기본 얼개를 제공했고, 가정 공간에 배치된 제품들은 등장인물들과 짝을 이뤄서 라이프스타일의 구체적인 세부를 보여줬다. 이 광고에서 라이프스타일은 대우전자의 가전제품을 통해 ‘물질적인 풍요’과 ‘화목한 가정’의 이미지를 구현하면서 중산층 핵가족의 생활 방식을 가시화하는 일상의 문화적 형식으로 제시되었다. 이에 따르면 소비란 욕구 해소와 필요 충족의 차원을 넘어선 라이프스타일의 구현을 위한 활동이었다.

<신대우 가족> 광고는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상투적인 인물 연기와 거친 편집 리듬으로 인해 드라마 전개가 매끄럽지 않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광고가 드라마와 접목된 결과, 제품은 자연스럽게 라이프스타일과 결합될 수 있었다. 게다가 독특한 광고 형식 덕분에 세간의 관심을 모으며 수용자의 주목도도 높일 수 있었다. 실제로 이 광고는 여론조사 결과, 기업 이미지 개선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분석되었다. 광고 방영 초기만 해도 광고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높으나 실제 제품 구매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평가되었지만, 방영 중반을 넘어서며 “파워세탁기”와 “슈퍼비전 임팩트” 같은 신제품 판매 매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한 조사 기관의 면접조사에 따르면, <신대우 가족>은 ‘1992년 가장 인상에 남는 TV 광고’ 2위에 오르기도 했다(『조선일보』, 1993년 2월 8일).

1993년, 언론학자 강준만은 광고 기획사야말로 대중문화의 실세라고 지적하면서 텔레비전 광고가 대중문화의 지형을 새롭게 재편하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당시 새롭게 등장한 광고 상당수는 상품을 직접 홍보하는 방식에서 탈피해 상품과 연관된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소개하는 방식으로 변모하고 있었다(Kang, 1993). 언론학자 강명구 역시, 이와 유사하게 이 시기의 광고가 인간과 사물,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규정하고 그 관계가 경험되는 방식을 담아내는 문화적 형식으로 변모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었다(Kang, 1993). 대우전자의 <신대우 가족>은 ‘상품의 라이프스타일화’라고 불릴만한 이러한 경향의 출발선상에 위치한 광고 중 하나였다. 앞서 살펴본 금성사의 LSR연구실이 제품 개발 프로세스에 라이프스타일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소비와 생산을 연결하는 정보의 피드백 장치 역할을 담당했다면, <신대우 가족>은 제품과 라이프스타일을 접목한 TV광고를 선보임으로써 생산과 소비 사이에서 정보의 커뮤니케이션 채널 역할을 수행했다. 대량 생산-대량 소비 체제의 차원에서 보자면, 양자는 하나의 목표를 공유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라이프스타일을 윤활유로 삼아서 상품의 생산-소비 과정을 좀 더 매끄럽게, 그리고 좀 더 빠르게 작동시키는 것이었다.

2. 3. 영화 <결혼 이야기>, 라이프스타일의 상품화

1992년 7월 초에 개봉한 <결혼 이야기>는 “1990년대 한국 영화의 지형도를 바꾼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기획 영화’를 표방한 첫 번째 상업 영화이자 김의석 감독의 데뷔작이기도 했던 이 영화는 서울의 두 극장에서 개봉해 3개월 동안 52만 6천 명의 관객을 동원했고, 당해 한국 영화 흥행 1위, 역대 한국 영화 흥행 3위를 기록하며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뒀다. “세련된 도시 여피족을 대표하는 젊은 커플의 짜릿하고 갈등 많은 신혼 생활”을 솔직하게 다룬 로맨틱 코미디 영화로서, 특히 일상의 디테일을 “감각적인 영상”과 “경쾌한 속도”로 담아내 할리우드 영화 문법에 익숙한 젊은 관객들의 주목을 받았다. 무엇보다 이 영화를 통해 한국 영화 산업은 제작 사전 단계에서의 전문 기획의 중요성을 확인했고 대기업의 자본 투자로 제작 시스템을 현대화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Seo, 2007; Kim & Kim, 2017).

먼저 이 영화의 기획 과정을 살펴보자. 이 영화를 기획한 전문 기획사 신씨네는 1989년 강우석 감독의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를 기획할 당시 수백 명의 중고생을 대상으로 설문과 인터뷰를 진행해 청소년이 직접 경험한 생생한 에피소드로 시나리오를 구성한 바 있었다. 이 기획사는 <결혼 이야기>에서도 동일한 접근 방식을 취했다. 10여 쌍의 신혼부부를 밀착 인터뷰했고 결혼 생활의 에피소드를 수집해 시나리오에 반영했다. 달리 말하자면, 기획 단계에서 조사한 ‘정보’를 바탕으로 스토리의 기본 골격을 만들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영화의 소재인 신혼부부의 일상생활은 설문과 인터뷰, 통계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다각도로 분석되어야 하는 정보의 원천으로 간주되었다(Seo, 2007). 영화 기획 프로세스는 앞서 살펴본 LSR연구실의 라이프스타일 연구와 유사하게 일종의 정보 처리 과정으로 정의되었는데, 이는 감독이나 제작자의 ‘감’에 의존하던 당시의 지배적인 제작 풍토와는 거리를 둔 채 나름의 방법론적 합리성을 추구한 결과였다.

<결혼 이야기>는 이런 기획 과정을 거쳐 맞벌이 신혼부부의 라이프스타일을 독특한 방식으로 연출했다. 영화 초반부는 이제 막 결혼식을 마친 라디오 방송국 PD 김태규와 신참 성우 최지혜의 애정 행각을 보여주는데 집중했다. 주 무대로 삼은 것은 LSR연구실의 필드테스팅오피스나 <신대우가족>의 드라마 세트와 마찬가지로 아파트 실내 공간이었다. 건설사의 아파트 모델하우스를 세트로 활용한 이 공간은 방 2개, 거실, 주방, 화장실로 중소형 평형대 아파트의 평면을 갖추고 있었지만, 실내의 개방적인 분위기를 강조하기 위해 아트디렉터의 지휘 아래 거실을 중심으로 리모델링되었다. 거실의 우측 벽면에는 수납장과 함께 그 위에 텔레비전이 자리 잡고 있었고, 좌측 벽면에는 패브릭 소파가 배치되었다. 침실과 거실 사이 벽은 하단 부분만 남기고 상단 부분 절반을 허물어 좌우로 길게 창을 냈는데, 침실에서 이 창을 통해 거실을 바라보면 텔레비전이 놓인 거실 반대편 벽면이 한눈에 들어왔다. 필요에 따라 블라인드를 내리면 시선을 차단할 수 있었다(『행복이 가득한 집』, 1992년 6월호).

Figure 3

A scene from the movie <Marriage Story>

여기에 삼성전자가 협찬한 텔레비전과 VTR, 세탁기, 전기밥솥, 냉장고, 전화기 등이 가구들과 조화를 이루면서, 신혼의 실내 공간을 현실감 있게 꾸미는 역할을 했다. 이 가전제품들의 역할은 장식적 기능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영화 초반부에서 가전제품을 비롯한 일상 사물은 두 주인공의 캐릭터를 가시화하는 소품으로, 그리고 부부 간의 정서적 교감을 매개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이를테면 김태규와 최지혜는 거실의 조명 스탠드 위치를 두고 실랑이를 벌이고 치약을 짜서 쓰는 방법을 놓고 티격태격한다. 취향과 습관이 달라서 사소한 갈등이 불거지곤 하지만, 그 다름이 서로 자신의 개성 때문이라고 생각할 뿐 양보할 뜻은 없다. 한편 갈등만큼이나 교감의 순간 역시 일상 사물을 통해 표현된다. 이를테면 자동응답 전화기에 자기소개를 녹음할 때 이 부부는 모두 성인답지 않은 장난기를 발동한다. 또한 최지혜는 혼자 있을 때 신기한 눈으로 남성용 전기면도기를 바라보다가 집어 들고선 남편을 흉내 내며 자신의 턱밑을 밀어본다. 여기에서 전기면도기는 신혼부부가 성차로 인해 서로 알지 못했던 배우자의 은밀한 사적 차원을 경험해보는 탐색의 수단으로 활용된다.

한편 일상 사물들은 맞벌이 부부의 가사 분담을 보여주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번갈아가며 당번제로 세탁기로 빨래를 하거나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것은 기본이고, 식사를 마친 뒤 주방의 싱크대에 나란히 서서 엉덩이춤을 추면서 함께 식기를 설거지한다. 김태규는 자신이 입을 셔츠를 직접 다리미질하기도 한다. 이렇게 맞벌이 부부의 가사 분담을 경쾌하고 발랄하게 보여주는 것은 1990년에 방영된 럭키 “랑데뷰샴푸”의 TV광고 <맞벌이 부부의 아침> 편의 연속선상에 있었다. 이 광고에서 맞벌이 부부는 시계 알람 소리에 깨어나 바쁘게 출근 준비를 시작한다. 1분 1초가 아쉬운 상황에서 샴푸 따로, 린스 따로 머리를 감을 시간이 없다. 샴푸와 린스가 하나로 합쳐진 ‘랑데뷰샴푸’만 있으면 시간을 반으로 줄일 수 있다. 이 광고에서 맞벌이 부부는 기존의 가부장제적 관념에서 일찌감치 벗어나 있다. 아내는 따로 남편을 위해 아침 식사를 준비하지 않고 간단히 음료수만 냉장고에 꺼내며, 남편은 스스로 넥타이를 고르고 옷차림새를 매만진다. 빠른 장면 전환 속에서 부부는 각자 출근 준비에 여념이 없다(Kang & Jeon, 2007). <결혼 이야기>의 맞벌이 부부도 이와 다를 바 없다. 그들 역시 부부 간 성별 분업이라는 가부장제적 관념에 크게 괘념치 않고 자유롭게 가사를 분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의 초반부가 마무리될 무렵, 남녀 주인공은 각각 내레이션 형식으로 결혼의 본질이란 “한 봉지의 생리대 속에 한 개가 아니라 무려 열 개의 생리대가 들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며, “남자의 노랗게 된 팬티를 세탁기 안에 집어넣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이런 식의 결혼의 정의는 <신대우 가족>이 보여준 낭만적인 결혼관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것으로, 이 영화가 다양한 유형의 사물을 어떻게 활용하는지를 단적으로 암시한다. 영화에서 결혼이란 성인 남녀의 관계를 규정하는 사회적 제도일 뿐만 아니라 타인과의, 그리고 사물과의 관계 맺음을 통해 새로운 일상생활의 질서를 만들어가는 과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가전제품을 비롯한 일상 사물을 인물과 공간 사이, 인물과 인물 사이에 배치하면서, 사물이 남녀 주인공이 공유한 일상생활의 질서로 자연스럽게 스며들도록, 그리하여 사물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를 통해 부부의 라이프스타일이 표현되도록 유도한다. 남녀 주인공을 맡은 배우 최민수와 심혜진은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당시 그들은 드라마, 영화, 광고 등 대중문화 전반에 걸쳐 상호텍스트적 정체성을 지닌 ‘스타’였다. 최민수는 영화 개봉 1년 전에 방영된 텔레비전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에서 대발이 역으로 큰 인기를 누렸고, 심혜진은 1980년대 후반 "코카콜라“ TV 광고에서 발랄하고 세련된 도시 여성의 이미지를 선보여 크게 주목 받은 바 있었다. 이들은 특정 계층에 속한 신혼부부의 라이프스타일을 표현하는 데 자신의 스타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한편, <결혼 이야기>의 초반부 장면들은 색다른 화면 구성과 경쾌한 편집 리듬으로 마치 특정 제품의 광고처럼 연출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개봉 당시 영화평론가 이효인은 이 영화가 “짧은 호흡의 촬영과 앞질러 자르는 편집에 의해 각 신들이 제각기 훌륭한 시청각 광고처럼 연결되어 있다”고 지적했다(Lee, 1992). 실제로 이 영화는 국내 최초 영화 간접 광고의 사례로 꼽히기도 했다(『한겨레신문』, 1992년 11월 21일). 영화에 소품으로 등장한 가전제품들은 삼성전자가 그룹 계열사인 삼성물산이 투자한 영화에 협찬한 것이었다. 삼성전자는 이 제품들의 간접 광고 대가로 개봉 전 영화 관람권 5만 장을 구입해 사실상 2억여 원의 광고료를 영화사에 지원했다(Kang, 2006). 그런데 그보다 중요한 것은 이 장면들이 일상 사물에 대한 감각적이면서도 유희적인 접근으로 라이프스타일 연출의 표본이라고 할 만한 영화적 스타일을 선보였다는 점이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등장인물의 이미지, 행동, 말투, 그리고 그들의 주거 형태와 일상생활을 ‘라이프스타일’로 수렴하여 이해할 줄 아는 젊은 관객의 존재를 이 영화가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결혼 이야기>에서 라이프스타일은 <신대우 가족>보다 한층 더 섬세하게, 젊은 감각으로 연출되었다. 앞서 살펴봤듯이 <신대우 가족>은 텔레비전 시청자를 대상으로 한 기업 이미지 광고이니만큼 다소 정형화된 일상생활의 틀 안에 가전제품의 쓰임새를 배치하고 중산층 이미지에 걸맞은 전형적인 라이프스타일을 전시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반면 <결혼 이야기>는 20·30대 관객층을 겨냥한 기획 영화로서 당시 젊은 세대의 중산층을 중심으로 진행된 라이프스타일의 분화를 반영하고 있었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사적인 친밀성의 차원에서 일상 사물과 관계를 맺었고, 그 사물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줄 알았다. 그리고 바로 이런 방식의 관계 맺음을 통해 <결혼 이야기>에서 라이프스타일은 주인공이 타인과 구별되는 자기의 개성, 취향, 감수성 등을 일상적으로 가시화하는 정체성의 표현 방식으로 제시되었다. 앞서 살펴본 LSR연구실의 관점에 보자면, 두 주인공 중 최지혜는 확실히 이상적인 형태의 ‘생활자’라고 할 만했다. 그녀는 백화점 쇼핑 중에 “좋은 물건은 사람을 감동시키는 법”이라고 말할 정도로 소비 주체로서 자기 취향을 당당하게 드러낼 줄 알았으며, 욕망에 충실한 소비가 일상생활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지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녀에서 라이프스타일은 취향을 중심축으로 삼아 소비와 일상의 조합을 통해 선택할 수 있는 자기표현의 전략이었다.

성숙기 소비 사회는 막강한 전파력을 지닌 대중문화의 차원에서 젊은 세대에게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제시할 수 있는 접근법을 요구하고 있었다. <결혼 이야기>는 영화 매체의 특성을 활용해 이러한 요구에 화답했다. 이 영화는 <신대우 가족>이 보여준 ‘상품의 라이프스타일화’를 한 단계 더 진전시켜 독특한 영화적 스타일로 ‘라이프스타일의 상품화’를 실행함으로써, 젊은 세대의 관객들에게 엿보기의 시각적 쾌감을 선사하고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욕망의 자각을 유도할 수 있었다. 한 영화 평론가가 1960년대 중반 이후 태어난 세대의 관객들이 <결혼 이야기>를 전후로 자기 세대가 추구하는 변화된 삶의 모습을 외국 영화가 아니라 한국 영화에서 발견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던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Kim, 1992). 그것은 이 영화의 제작진이 상품을 기획하듯이 라이프스타일을 분석하고, 광고를 촬영하듯이 라이프스타일을 연출한 결과였다.


3. 라이프스타일 도입에 따른 문화적 생산 방식 변화

본 장에서는 앞서 살펴본 디자인, 광고, 영화의 세 가지 사례가 상품의 생산-소비 과정 내·외부를 관통하면서 추동해낸 문화적 생산 방식의 변화를 검토해 보고자 한다. 성숙기 소비 사회의 내적 역학을 구체화하는 그 변화의 양상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①디자이너, 상품 기획자, 광고 기획자 등을 포함한 문화적 생산 주체들의 위상 변화와 역할 재정의, ②라이프스타일의 분석, 전시, 연출을 위해 소비자의 주거 공간을 모형화한 공간의 등장, ③라이프스타일의 소비자로서 베이비붐 세대의 중산층에 대한 주목이 그것이다.

3. 1. “생활 장면의 프로듀서” 혹은 문화적 매개자

1993년, 금성사의 이헌조 사장은 시대 변화에 따라 디자이너에게 새롭게 부여된 역할 중 하나가 “생활 장면의 프로듀서”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디자이너는 기업의 핵심 기술과 소비자의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면밀한 이해를 바탕으로 새로운 디자인 콘셉트를 창안해 제품으로 구현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대목은 그가 지적하는 디자이너의 역할이 이렇게 생산 단계의 제품 개발 프로세스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주지하다시피 제품은 매장 진열대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구매가 이뤄진 이후에는 소비자의 거주 공간으로 진입해 다른 사물들과 어울려 새로운 일상생활의 질서를 만들어낸다. 따라서 디자이너가 구매 이후의 상황도 디자인의 대상으로 고려해야 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즉 제품이 실내 공간에서 어떤 모습으로 배치되고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사용될 것인지를 염두에 두고 일상의 문화적 차원에 적극 개입해야 한다는 것이다(Lee, 1993). 이헌조가 보기에 디자이너는 바로 이런 측면에서 “생활 장면의 프로듀서”로서 일상생활의 미장센(mise-en-scène)을 연출하고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런데 시야를 좀 더 확대해 1990년대 초반의 성숙기 소비 사회로의 이행이라는 맥락에서 보자면, 생활 장면의 프로듀서라는 역할은 디자이너에게만 부여된 것은 아니었다. TV광고 <신대우 가족>과 영화 <결혼 이야기> 등이 보여주듯이, 디자인뿐만 아니라 광고와 영화 등 다양한 문화적 생산 영역에서 “생활 장면의 프로듀서”라고 불릴 만한 일련의 전문적 실무 활동이 ‘라이프스타일’ 개념을 발판 삼아 등장했다. 결과적으로 라이프스타일은 이 영역들에서 문화적 생산 주체의 위상을 변화시키고 그 역할을 재정의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마이크 페더스톤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들에게는 “문화적 매개자”로서의 위상이 부가되었는데, 그 역할은 취향, 선호, 미적 경험과 가치에 대한 다양한 지식과 정보를 바탕으로, 전문적 프로세스와 접근법을 통해 대중에게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제시하고 유행으로 확산시키는 것이었다(Featherstone. 1991).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대목은 "생활 장면의 프로듀서"이자 "문화적 매개자"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일상생활 속 사람과 공간, 사람과 사물의 다채로운 관계를 다각도에서 디테일하게 포착할 수 있는 클로즈업의 시선이 요구되었다는 점이다. LSR연구실의 필드테스팅오피스에서 여성기획팀은 가전제품을 사용하는 생활자를 연기하면서 자신의 행동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분석할 수 있어야 했다. <신대우 가족>에서는 연출자는 드라마가 전개되는 중산층 가족의 일상생활이라는 맥락 속에 가전제품을 배치할 수 있어야 했고, <결혼 이야기>에서는 등장인물의 라이프스타일을 일상 사물과의 관계를 통해 연출할 수 있어야 했다. 세 가지 사례는 모두 라이프스타일의 분석, 전시, 연출을 위해 일상생활의 세부를 들여다볼 수 있는 클로즈업의 시선을 전제하고 있었다. 특히 <신대우 가족>과 <결혼 이야기>의 연출자는 바로 이 시선의 보유자로서 적극적으로 라이프스타일의 의미를 재정의하면서, 광고와 영화의 매체적 특성에 맞춰 각각 ‘상품의 라이프스타일화’와 ‘라이프스타일의 상품화’라는 전략을 구체화했다. 클로즈업의 시선이란 당시 금성사의 슬로건을 빌리자면 “생활 문화의 창조자”가 되기 위한 필수 조건이나 다름없었다.

디자인 영역을 시야를 좁혀서 살펴보자면, 확실히 라이프스타일의 도입은 기업의 디자인 조직, 전략, 방법론의 차원에 있어서도 큰 변화의 계기가 되었다. 국내 가전업체들은 라이프스타일의 개념적 전유를 통해 "한국형 가전" 개발에 나섰는데, 이 과정은 제품 개발 프로세스에서 디자인 조직의 역할을 강화하고 위상을 높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디자인 조직은 마케팅 부서나 기술 부서와 이전에 비해 수평적인 협업 관계를 맺으며 그들의 파트너로 제품 개발에 참여할 수 있었다. 또한 조직 내부의 디자이너들 역시 제품 외형 시각화나 스타일링의 전문가라는 역할에만 머무르지 않고, 관련 분야의 지식과 정보를 습득해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과 공통의 언어로 의사소통할 수 있어야 했다(Park, 2019). 즉 제품 개발 프로세스가 정보 처리 모델로 변형됨에 따라, 문화적 매개자로서 자기 정체성을 확장 변형해야 했던 것이다.

3. 2. 라이프스타일의 실험실, 모델하우스, 극장

LSR연구실의 필드테스팅오피스와 <신대우 가족>의 가정 공간은 라이프스타일과 관련된 독특한 공간의 출현이라는 점에서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이 두 공간은 현실 속 소비자의 주거 공간을 모형화한 가상 공간이라는 점에서 사실상 동일한 유형의 공간이었다. 주목해야 할 대목은 이때 모형화의 대상이 양자 모두 아파트의 실내 공간이었다는 점이다. 위의 두 공간은 소비 사회의 문화적 생산주체들이 ‘라이프스타일’을 매개항으로 삼아 소비자의 일상생활에 접근하는 과정의 산물이었는데, 일상생활에 대한 이들의 관심은 당시 중산층의 대표적인 주거 형태로 부상하던 아파트의 실내 공간을 모형화하는 것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또한 LSR연구실의 필드테스팅오피스가 강남이라는 특정 지역, 특히 압구정동 인근의 청담동을 근거지로 삼았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주지하다시피 당시 강남은 1970년대 후반 이후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토대로 형성된 도시 중산층 문화의 본진이었을 뿐만 아니라, 1980년대 후반 이후 '압구정동' 일대를 중심으로 형성된 새로운 소비문화의 발신지였다. 그러니까 가전업체의 입장에서 강남은 정보 수집의 레이더망을 가동해 최신 유행의 라이프스타일을 모니터링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던 것이다. 논리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신제품들은 이 지역에서 수집된 라이프스타일 정보를 다른 지역으로 전파하고 확산시키는 일종의 미디어나 다름없었다. 이 미디어에게 라이프스타일 정보는 1989년 이후 수도권 신도시를 비롯해 전국 각지에 건설되던 200만 호의 아파트에서 집단적 계층 감각을 형성해 가던 신규 중산층에게 반드시 전달되어야 할 메시지였다.

한편, LSR연구실의 필드테스팅오피스와 <신대우 가족>의 가정 공간, 이 두 공간은 라이프스타일과 관련해 서로 다른 용도를 지니고 있었다. 무엇보다 상품의 생산-소비라는 순환 궤도에서 점유한 위치가 달랐다. LSR연구실의 필드테스팅오피스는 소비를 생산으로 선순환시키는 피드백 루프에 자리잡고 제품 사용 경험에 대한 미시적 정보를 수집하는 분석 장치로 기능했던 반면, <신대우 가족>의 가정 공간은 생산에서 소비로 이어지는 흐름 위에 위치하고 제품을 라이프스타일 일부로 연출하기 위한 전시 장치로 역할했다. 전자가 아파트 실내 공간을 ‘라이프스타일의 실험실’로 전유했다면, 후자는 ‘라이프스타일의 모델하우스’로 차용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각 공간에서 일상생활을 영위한다고 전제된 소비자의 성격 역시 판이하게 달랐다. 전자의 공간에서 소비자는 ‘생활자’라는 호명에 따라 다양한 제품들과 반복적으로 상호작용하는 자동인형 같은 존재였던 반면, 후자의 공간에서 중산층 가족의 일원으로 유명 배우의 몸을 빌려 자신에게 부여된 라이프스타일을 연기하는 살아 숨 쉬는 존재였다. 달리 말하자면, <신대우 가족>의 등장인물들은 LSR연구실의 생활자가 드라마 속 캐릭터로 업그레이드된 결과였다고 볼 수도 있다.

주목해야 할 대목은 이 유형의 공간들이 상품의 순환 궤도 위에만 머무르지 않고 대중문화의 차원으로 이동해 영향력을 확대했다는 점이다. <결혼 이야기>에서 맞벌이 신혼부부의 아파트 실내 공간이 보여주듯이, 그 공간들은 드라마나 영화 속 공간들과 뒤섞이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확대 재생산되었고, 일반 대중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라이프스타일의 전시 장치로 자리 잡았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드라마나 영화에서 제품 간접 광고(PPL)가 일반화되기 시작한 것은 이런 변화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즉 ‘라이프스타일의 실험실‘이 ‘라이프스타일의 모델하우스‘를 거쳐 ‘라이프스타일의 극장’으로 변모한 결과였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라이프스타일은 개념적 차원에서 그 의미망을 확장 변형해나갔다. 라이프스타일의 의미는 LSR연구실에서는 가치관, 생활 양식, 행동 양식 등을 변수로 삼아 분류될 수 있는 삶의 유형이었던 반면, <신대우 가족>에서는 ‘물질적 풍요’와 ‘화목한 가정’의 이미지를 통해 중산층의 표준적인 생활 방식을 담아내는 일상의 문화적 형식으로, 그리고 <결혼 이야기>에서는 한 단계 더 나아가 타인과 구별되는 개인의 개성, 취향, 감수성 등을 가시화하는 정체성의 표현 방식으로 변형되었다. LSR연구실에서 분석의 대상이었던 라이프스타일은 <신대우 가족>과 <결혼 이야기>를 거치면서 전시와 연출의 대상으로 변모했던 것이다. 그것은 이제 일상생활 분석을 통해 발견되어야 하는 정보 형식일 뿐만 아니라, 대중매체의 무대 위에서 표현되어야 하는 행위 패턴이기도 했다.

한편 이 시점에 일군의 문화비평 담론이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문화산업론이나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의 소비사회론에 기대어 라이프스타일과 관련된 새로운 시도들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견지했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그 담론에 따르면, 이러한 시도들은 한편으로는 자본의 요구에 따라 소비자의 심리를 조작하는 욕망 창출의 메커니즘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상품을 '기호'로 연출해 소비의 환영(幻影)을 만들어내는 무대 장치였다.

3. 3. 라이프스타일의 소비자로서 베이비붐 세대의 중산층

앞서 살펴봤듯이 세 사례가 공통적으로 모형화하고자 했던 현실의 공간은 20‧30평형대 규모로 추정되는 아파트의 실내 공간이었다. 당시 이 공간의 거주자 상당수가 특정 연령대의 중산층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세 사례가 보여준 라이프스타일의 분석, 전시, 연출은 불특정 다수의 일반 대중이 아니라 특정 소비자 집단을 대상으로 삼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신대우 가족>에서는 30대 중후반의 가족과 20대 후반의 젊은 남성이 아파트 실내 공간을 무대로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유인촌과 김미숙은 30대 중후반의 연령대로 50년대 중반생 중산층 부부를, 박상원은 유학 생활로 결혼 적령기를 넘긴 60년대 초반생의 미혼 남성을 연기한다. 그리고 <결혼 이야기>에서는 최민수가 심혜진과 짝을 이뤄 20대 후반의 신혼부부 역을 맡았다. 극중 인물과 배우의 연령대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광고와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모두 베이비붐 세대에 속한 이들이었다. 한편, LSR연구실의 필드테스팅오피스에서 분석의 대상으로 삼고자 했던 것 역시 바로 이들, 즉 <신대우 가족>의 신대우 가족과 <결혼 이야기>의 신혼부부가 재현하고 있는 현실 속 베이비붐 세대의 중산층 소비자였다. 실제로 필드테스팅오피스에서 직접 ‘생활자’를 연기하면서 그들의 일상생활을 분석하던 여성기획팀의 연구원들 역시 이 집단에 속하는 이들이었다.

이와 같이 라이프스타일의 분석, 전시, 연출의 측면에서 베이비붐 세대에게 관심이 집중된 것은 서론에서 살펴봤듯이 이 세대의 중산층 소비자들이 1980년대 후반 이후 내구소비재 시장의 폭발적인 성장세를 견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베이비붐 세대는 휴전 이후 1955년부터 1963년까지 태어난 이들로, 상당수는 어린 시절을 농촌에서 보냈고 학업을 위해 도시로 이동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1970년대 이후 경제 성장이 뚜렷하게 가시화된 덕분에 취업 전선에 뛰어들 시기에 이전 세대에 비해 어렵지 않게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또한 1980년대 중후반의 3저 호황에 따른 실질 소득의 증가는 이 세대의 선발 집단 일부가 30대 문턱을 넘어서면서 빠른 속도로 중산층에 진입하는데 동력원 구실을 했다(Choi, 2018). 특히 “보통 사람의 시대”를 슬로건으로 내건 노태우 정권의 ‘신도시 개발과 주택 200만호 건설 정책’은 이들이 신시가지나 신도시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에 자신의 집을 마련하고 사회적 이동의 한 단계를 안정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이와 같이 경제 성장의 흐름을 타고 대규모로 중산층에 진입한 이들은 점차 근검절약의 생활 태도에서 벗어나 강력한 구매력을 바탕으로 대량 생산-대량 소비 체제의 핵심적인 소비 주체로 변모했다. 바로 이 시점에 LSR연구실의 필드테스팅오피스가 문을 열고 <신대우 가족>이 텔레비전에 방영되고 <결혼 이야기>이 극장에서 상영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이 세대 중산층 소비자의 본격적인 등장과 맥락을 함께 하는 움직임이었다.

흥미롭게도 이와 같이 성숙기 소비 사회 진입에 따라 라이프스타일 개념이 부각되는 과정이 특정 세대 중산층의 부상과 교차된 것은 일본의 사례와 유사했다. 실제로 1970년대 후반 일본의 디자이너나 광고 전문가들은 라이프스타일의 프레임을 경유해 젊은 중산층의 소비 행위를 분석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이 중산층 상당수는 전후에 출생한 단카이 세대의 구성원이었다. 그들은 이 시점에 30세 전후의 연령대를 거쳐 “뉴 패밀리”라는 새로운 소비 중심형 가족 모델을 만들어가고 있었다(Moon, 2007). 일본에서 라이프스타일과 관련된 문화적 생산의 움직임들이 단카이 세대의 생애 과정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처럼, 1990년대 초반 국내의 움직임 역시 베이비붐 세대와 그와 유사한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베이비붐 세대의 중산층은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라이프스타일을 소비하기 시작한 첫 번째 집단이었다.


4. 결론

본 연구는 금성사의 LSR연구실, 대우전자의 TV광고 <신대우 가족>, 신씨네 기획의 영화 <결혼 이야기>를 중심으로 1990년대 초반 성숙기 소비 사회 진입과 함께 라이프스타일 개념이 도입되고 그 의미가 확장되는 과정을 살펴봤다. LSR 연구실에서 제품 개발을 위한 시장 조사의 분석 대상이었던 라이프스타일은 <신대우 가족>에서는 중산층 가족이 향유하는 일상의 문화적 형식으로 전시되었고, <결혼 이야기>에서는 젊은 세대가 자신의 정체성을 가시화하는 경험의 표현 방식으로 연출되었다. 소비 규모의 증가와 소비 양식의 다원화로 인해 시장의 불확실성이 증가함에 따라 소비 사회의 문화적 생산 주체들은 이에 대처하기 위해 라이프스타일 개념을 동원해 일상의 문화적 차원에 접근하려고 시도했다. 위 세 가지 사례는 이러한 시도를 통해 라이프스타일 개념이 각각 분석, 전시, 연출의 대상으로 전유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라이프스타일 개념의 전유는 소비 사회의 문화적 생산 방식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먼저 상품 기획자, 디자이너, 광고 전문가를 비롯한 문화적 생산 주체들은 이제 ‘클로즈업의 시선’으로 일상의 문화적 차원에 잠재하는 소비자의 욕구를 발견해낼 뿐만 아니라, ‘생활 장면의 프로듀서’로서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상품 형식으로 제안하고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전시, 연출할 수 있어야 했다. 라이프스타일의 전문가라는 새로운 역할은 개별 조직 내에서 문화적 생산 주체들의 위상을 격상시키기도 했다. 한편, 문화적 생산 주체들은 아파트의 실내 공간과 베이비붐 세대의 중산층에 주목했다. 당시 중산층의 대표적인 주거 유형으로 부상하던 아파트의 실내 공간은 문화적 생산 과정에서 일상생활의 시뮬레이션을 위해 라이프스타일의 실험실로, 모델하우스로, 그리고 극장으로 모형화되었다. 여기에서 베이비붐 세대는 라이프스타일의 소비자로 주목받았는데, 당시 그들은 왕성한 구매력으로 내구소비재 시장의 성장세를 견인하면서 소비 중심형 가족 모델을 만들어 나가고 있었다.

여기까지가 본 논문의 연구 내용을 요약한 것이라면, 그 연장선상에서 향후 과제를 제안하는 것으로 결론을 마무리하겠다. 일단 라이프스타일의 도입기 이후, 그러니까 1990년대 중반 이후 ‘일상의 라이프스타일화’라고 부를 수 있는 소비 사회의 전반적인 변화, 그리고 그에 따라 이루어진 디자인을 비롯한 문화적 생산 방식의 정교화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특히 IMF 외환위기를 변곡점으로 삼아 ‘프리미엄’이라는 수식어를 단 라이프스타일이 소비의 양극화와 함께 사회 전반에서 부각되던 과정에 대한 연구는 1990년대 한국 소비 사회의 성격을 규명하고 디자인의 사회경제적 역할 변화를 되짚어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Acknowledgments

이 논문은 2019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NRF-2019S1A5A8041088).

This work was supported by the Ministry of Education of the Republic of Korea and the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 (NRF-2019S1A5A8041088).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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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pyright : This is an Open Access article distributed under the terms of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Non-Commercial License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3.0/), which permits unrestricted educational and non-commercial use, provided the original work is properly c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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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1

Figure 1
An interior view of the field testing office (『한겨레신문』, 1991년 9월 18일)

Figure 2

Figure 2
Main scenes of TV commercial <Shin Daewoo's Family>(Her, 1991)

Figure 3

Figure 3
A scene from the movie <Marriage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