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s of Design Research
[ Article ]
Archives of Design Research - Vol. 34, No. 2, pp.221-233
ISSN: 1226-8046 (Print) 2288-2987 (Online)
Print publication date 31 May 2021
Received 09 Feb 2021 Revised 16 Feb 2021 Accepted 02 Mar 2021
DOI: https://doi.org/10.15187/adr.2021.05.34.2.221

80년대 초 한국형 냉장고의 출현과 등장 배경

Chang Sup Oh , 오창섭
Department of Industrial Design, Professor, Konkuk University, Seoul, Korea 건국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 교수, 서울, 대한민국
The Emergence Background of Korean-style Refrigerators in the Early 80s

Correspondence to: Chang Sup Oh changsup@konkuk.ac.kr

초록

연구배경 88 서울 올림픽이 개최될 무렵부터 본격화된 한국형 제품의 유행은 한국 디자인 역사에서 두드러진 현상이었다. 그 때문에 지금까지의 한국형 제품 관련 연구는 80년대 말과 90년대를 주로 주목해 왔다. 하지만 한국형 가전제품은 80년대 초반에도 이미 생산되고 있었다. 1981년에 금성사가 ‘금성 한국형 냉장고’로 광고한 금성 눈표 냉장고가 바로 그것이었는데, 이 냉장고는 88 올림픽 이후 본격화된 한국형 가전제품의 내용을 선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디자인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 냉장고나 80년대 초 한국형 가전제품에 관한 연구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에 본 연구는 1981년에 출현한 금성 한국형 냉장고의 내용을 이해하고, 왜 하필 그때 이러한 제품이 출현했는지 그 등장 배경을 밝히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연구방법 본 연구는 80년대 초 한국형 냉장고와 관련된 문헌과 신문 기사, 광고 등을 도상 해석과 담론분석의 방법을 활용해 분석한 후, 비평적 서술의 방법을 통해 결론에 이르고 있다.

연구결과 연구 결과 80년대 초 한국형 냉장고의 등장 이면에는 다음과 같은 경제적, 정책적, 문화적 배경이 자리하고 있었다. 첫째, 1979년 2차 석유파동과 그에 따른 에너지 절약 분위기는 제품 개발에 있어 전력 소모량을 줄이는 것을 핵심 의제로 만들었다. 냉동실을 줄이고 냉장실을 키운 한국형 냉장고는 그러한 배경 속에서 만들어졌다. 둘째, 1978년부터 1979년 사이에 이루어진 3차례의 수입자유화는 기업에게 국내 시장을 상실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끼게 했다. 이러한 기업의 두려움은 한국인의 라이프스타일을 주목한 한국형 제품 개발의 또 다른 배경이었다. 셋째, 한국의 고유한 전통을 호명하는 당시 사회 분위기 역시 중요한 배경이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기업으로 하여금 제품 판매에 있어 소비자의 애국심에 기댈 수 있게 함으로써 한국형 냉장고와 같은 제품 생산을 가능하게 했다.

결론 한국형 제품은 1980년대 초에 출현했는데, 그것의 등장 이면에는 2차 석유파동이라는 경제적 요인, 수입자유화라는 정책적 요인, 한국을 호명하는 사회·문화적 요인이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Abstract

Background Korean-style products, which became fashionable around the 1988 Summer Olympics in Seoul, are prominent phenomena in South Korean (hereafter, Korean) design history. Thus, studies on Korean-style products have focused mainly on the late 1980s and 1990s. However, Korean-style electronic products appeared in the early 1980s. For example, one well-known product was the “Gumsung Korean-style refrigerator” produced by Goldstar in 1981. This refrigerator is of great significance in the design history because it contained the characteristics and contents of Korean-style home appliances manufactured after the 1988 Summer Olympics. However, until now, there has been no research on the “Gumsung Korean-style refrigerator” or any other Korean home appliance in the early 1980s. Therefore, this study focuses on the Korean-style refrigerator of Goldstar, which appeared in 1981, based on the recognition that this research is necessary. This paper aims to clarify why the product appeared at that time and the background of its appearance.

Methods The research has reached conclusions using methods of iconic analysis and discourse analysis of related literature, newspaper articles, and advertisements.

Results The following economic, policy, and cultural backgrounds were behind the advent of the 'Gumseong Korean-style refrigerator' in the early 1980s. First, the second oil shock of 1979 highlighted energy efficiency as a key issue in product development. The Korean-style refrigerator, which reduced the freezer size and widened the refrigerator size, was created in such a background. Second, during the three openings of the import market, which occurred between 1978 and 1979, companies feared losing the domestic market. The company's fear was another background for developing Korean-style products that focused on Koreans' lifestyle. Third, the social atmosphere that evoked “Korea” at that time was also an important element. This atmosphere enabled the companies to rely on consumers' patriotism in selling products, thereby enabling products such as the Gumseong Korean-style refrigerator.

Conclusions The Korean-style design had already appeared in the early 1980s. Behind its appearance were the economic factors of the second oil shock, the policy factors of opening the domestic market, and the social and cultural factors that evoked Korea.

Keywords:

Korean-style, Korean-style Home Appliance, Korean-style Design, Korean-style Refrigerator, Korea Design History, 한국형, 한국형 가전제품, 한국형 디자인, 한국형 냉장고, 한국 디자인 역사

1. 서론

2020년 4월, 삼성전자는 식기세척기를 출시하면서 ‘한국형 식기세척기 신모델 출시’라는 문구를 사용했다. 이 제품은 “한국인의 식생활과 설거지 습관을 오랫동안 연구한 결과물”로 소개되었다.(“Samsung Electronics,” 2020) 한국인은 쌀을 주식으로 생활해 왔다. 최근 들어 식문화가 많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밥과 찌개류는 한국 음식의 주된 내용을 형성하고 있다. 한국인이 사용하는 그릇을 보면 속이 깊은 사발류가 많은데, 이러한 그릇의 형태는 한국 고유의 식문화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릇의 생김새가 그렇다 보니 아무래도 밥풀 같은 음식물 찌꺼기가 눌어붙기 쉽고, 눌어붙은 찌꺼기는 씻기 어렵다. 본 세척 전에 그릇을 물에 담가 두거나 애벌 세척하는 한국의 설거지 문화는 그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애벌 세척을 통해 그릇에 눌어붙은 찌꺼기를 효과적으로 세척할 수 있도록 디자인한 삼성전자의 식기세척기 신모델은 한국인의 식문화를 주목하면서 관련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는 이유에서 ‘한국형’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접근을 핵심 콘셉트로 하는 식기세척기 제품은 80년대 말, 다시 말해 88 서울 올림픽 무렵에 이미 출시되었다. 당시에는 한국의 식문화를 반영한 식기세척기만이 아니라, 먼지 흡입과 걸레질을 동시에 할 수 있는 물걸레 청소기, 한국 가옥에 흔히 있는 문턱을 쉽게 넘어 다닐 수 있도록 디자인한 진공청소기, 삶아 빠는 효과를 내는 세탁기, 찜이나 찌개 같은 요리를 가능하게 하는 전자레인지, 한국인의 식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김치를 효과적으로 보관할 수 있는 냉장고 등이 ‘한국형’이라는 이름으로 생산되었다. ‘한국형’은 80년대 말부터 IMF로 환경이 달라진 90년대 말까지 가전 3사로 불렸던 금성사, 삼성전자, 대우전자가 벌인 치열한 경쟁의 핵심 화두였다.

88 서울 올림픽이 개최될 무렵부터 시작된 한국형 제품의 유행은 한국 디자인 역사에서 두드러진 현상이었다. 그 때문에 ‘한국형’ 관련 선행 연구들도 80년대 말과 90년대를 주목하며 논의를 전개해 왔다. 이 시기를 다룬 주요 선행 연구로는 오창섭(Oh, 2015)의 「90년대 한국형 가전제품의 풍경」과 박해천(Park, 2019)의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 국내 가전 업체의 디자인 전략 연구」가 있다. 「90년대 한국형 가전제품의 풍경」에서는 80년대 말부터 90년대 중반까지 한국의 사회, 문화적 상황을 개관하며 당시 본격화된 한국형 가전제품의 출현과 그 전개 양상을 밝히고 있다.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 국내 가전 업체의 디자인 전략 연구」는 그 시기 가전 업체들이 어떠한 전략으로 한국형 제품들을 쏟아내었는지 금성사와 대우전자의 사례를 중심으로 보여주고 있다.

지금까지 한국형 제품 관련 논의가 88 올림픽 이후에 집중되어 왔고, 한국형 가전제품이 하나의 현상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난 시기 역시 80년대 말 이후 10여 년간이었기 때문에 오늘날 한국형 가전제품은 80년대 말부터 등장한 것으로 이해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하지만 한국형 가전제품은 80년대 초반에 이미 출현했다. 1981년에 금성사가 생산한 ‘금성 한국형 냉장고’가 바로 그것이었는데, 이 냉장고는 88 올림픽 이후 본격화된 한국형 가전제품 현상을 그로부터 10여 년 전에 선취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냉장고를 중심으로 한 80년대 초 한국형 가전제품은 한국 디자인 역사의 맥락에서 의미 있는 현상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관련 연구는 찾아볼 수 없는 실정이다. 이에 본 연구는 1981년에 출현한 금성 한국형 냉장고를 대상으로, 왜 하필 그 시기에 이러한 제품이 출현했는지 등장 배경을 밝히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연구는 관련 문헌과 신문 기사, 광고 등을 도상해석과 담론분석의 방법을 활용해 분석한 후, 비평적 서술의 방법을 통해 결론에 이르고 있다.


2. 80년대 이전의 ‘한국형’이라는 용어

1958년 1월 27일 자 동아일보(“Greatly praised,” 1958)에 미국 워싱턴 국립미술관에서 열린 한국 국보 전시회를 찾은 미국인들이 ‘한국형’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찬사를 보냈다는 기사가 등장한다. 이를 통해 50년대에도 이 용어가 사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로부터 5년 후인 1963년, 미국의 이브닝 스타(“Korean politics,” 1963)는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를 “엄격하고 말이 적은 5피트 4인치의 키를 가진 한국형 나폴레옹식 야심을 가졌을지 모르는 인물”이라고 묘사했다. 50, 6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형’은 이렇게 외국인들이 한국 밖에서 한국을 바라보며 한국의 산물이나 문화, 인물 등을 표현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었다.

물론 외국인들만 ‘한국형’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던 것은 아니다. 소수이기는 하지만 한국인들 사이에도 이 용어를 사용하는 이들이 있었다. 1962년 동아일보(“First meeting,” 1962)에 소개된 한 좌담회에서 “아메리카형의 길도 아니고 프로이센형의 길도 아닌 한국형의 길을 가야 한다.”라고 주장했던 경제학자 박근창이 그런 경우다. 박근창은 한국인이면서도 마치 외국인이 한국 밖에서 한국을 바라보듯이 한국을 대상화하여 바라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외국인의 시선, 다시 말해 타자의 시선을 내면화한 인물이었다. 그와 같이 타자의 시선을 내면화한 이들은 타자의 시선으로 한국을 바라보면서 때로는 부끄러움에 냉소를 보냈고, 때로는 현실을 성찰하면서 한국만의 고유한 차별점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동안 ‘한국형’은 이처럼 성찰의 언어이면서 동시에 차별성을 상상하는 경쟁의 언어로 자리했다.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한국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무엇인가를 표현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다가 1978년에 이르러 매체에 이 용어의 등장 빈도수가 갑자기 급증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여기에는 몇 가지 계기가 있었다. 그해 4월에 있었던 박정희의 전차 생산공장 시찰은 그중 하나였다. 대통령의 시찰 내용을 다루면서 매체들은 당시 개발 중이던 전차를 ‘한국형 전차’라는 이름으로 소개했다. “우리 손으로 설계된 한국형 전차의 양산도 가능”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조선일보(“High-performance,” 1978) 기사가 그런 사례였다. 매체마다 그런 방식으로 관련 내용을 다루었기 때문에 ‘한국형’이라는 용어의 등장 빈도수는 증가할 수밖에 없었다. 기사에서 언급한 한국형 전차는 그해 10월 1일 국군의 날 행사에서 공개되었다. 1978년은 건군 30주년이 되는 해였기 때문에 군의 발전상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인식이 정권 내부에 팽배한 상태였다. 이러한 인식이 군의 발전상을 대표하는 상징물을 찾게 했고, 그 과정에 ‘한국형 탱크’가 발전된 군을 대표하는 상징물로 주목받게 되었다. 그 결과 ‘한국형’이라는 용어는 다시 한 번 매체에 대대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국군의 날이 지난 며칠 후, 국회에서 대통령 시정 연설이 있었는데, 이 자리에서 박정희가 “고도 전자 병기와 항공기 등 한국형 무기 개발에 총력을 기울”이겠다고 말함으로써 이러한 분위기를 이어갔다(“President Park,” 1978).

이 시기부터 ‘한국형’이라는 용어는 ‘한국에서 한국인이 한국의 고유 기술로 만든 산물’을 의미하기 시작했다. 70년대까지만 해도 반공 이데올로기의 영향으로 사회적 관심이 군사 분야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한국형’이라는 용어는 주로 군사 관련 산업 분야에서 유통되었다. 하지만 60년대부터 추진된 산업화의 영향으로 70년대에는 그 이외의 산업 영역 또한 급속히 발전하고 있었다. 그에 따라 ‘한국형’이라는 용어의 사용범위 역시 확대되는 모습을 띠었는데, 그 대표적인 영역이 자동차 분야였다.

현대자동차는 1973년부터 고유 모델 개발에 착수했다. 포니 자동차는 바로 그러한 노력의 결과물이었는데, 1974년 10월 토리노에서 열린 국제 자동차 박람회에서 첫선을 보였다. 그런데 당시 소개된 포니 자동차는 콘셉트카였다. 실제 생산은 1975년 12월에 이루어졌고, 판매는 다음 해인 1976년 1월부터 시작되었다. 판매 시점에 내보낸 광고에서 현대자동차는 포니 자동차를 “우리 힘으로 만든 한국 최초의 고유모델 차”로 표현했다. 엔진 등 주요 기술은 미쓰비시와 같은 일본 기업의 도움을 받았고, 디자인 역시 이탈 디자인의 주지아로가 진행했지만, 홍보는 한국 기업이 만든 최초의 고유 모델 자동차라는 점에 초점이 맞춰졌다. 당시에는 국산 최초의 자동차 모델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대단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포니 자동차의 등장에 사람들은 크게 환호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경향신문(“Direction of the development,” 1976)은 ‘자동차 공업의 육성 방향’이라는 사설을 내보내면서 “외국에서 판매된 적이 없는 한국형 고유 모델을 갖추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여기에서 ‘한국형’의 의미는 앞서 한국형 전차에서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3. 한국형 냉장고의 출현과 논란

1978년에 이어 1981년에도 ‘한국형’이라는 용어의 사용 빈도수가 갑자기 늘어나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해 전두환의 해군사관학교 졸업식 참석과 해군 함대 기동 시범 훈련 참관에 따라 매체들이 “한국형 구축함인 울산함”에 관한 내용을 다룬 것이 하나의 원인이었다(“President Chun,” 1981). 하지만 여기에는 그 외에도 몇 가지 다른 이유가 더 있었다. 자동차 산업 분야의 조치는 그중 하나였다. 1979년 10.26 사건 이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신군부 세력(국가 보위비상대책위원회)은 1981년 2월 28일에 ‘자동차 공업 합리화 조치’를 발표했다. 자동차 산업의 효율성과 합리성을 재고한다는 명분으로 내려진 이 조치는 기업별로 생산할 수 있는 차종을 할당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자동차 공업 합리화 조치로 현대자동차와 새한자동차는 승용차 생산을 맡게 되었고, 기아자동차는 5t 이하의 트럭과 버스를 생산하게 되었다. ‘자동차 공업 합리화 조치의 배경’이라는 기사에서 “한국형 자동차 개발 추진”이라는 문구를 사용했던 매일경제처럼 매체들은 그 조치를 보도하면서 ‘한국형’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Background of the Automotive Industry,” 1981).

그런데 1981년 ‘한국형’이라는 용어가 활발하게 유통된 보다 핵심적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해 초에 ‘한국형’이라는 표현을 이름에 단 최초의 전자제품이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1981년 4월, 금성사는 ‘금성 한국형 냉장고’를 출시했다. 이 냉장고가 Figure 1과 같이 ‘한국형 냉장고’라는 이름으로 광고되면서, 그리고 그 광고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면서 ‘한국형’이라는 용어는 이전의 어느 해보다 활발하게 유통될 수밖에 없었다.

Figure 1

Goldstar Korean-style refrigerator advertisement (1981)

1981년 동아일보에 게재된 금성 한국형 냉장고 광고(“Goldstar Korean-style,” 1981)는 흥미롭다. “금성 한국형 냉장고 탄생”이라는 큰 표제 아래에 문이 열려 있는 두 개의 냉장고가 좌측과 우측에 각각 하나씩 자리하고 있다. 우측 냉장고 왼편 윗부분에 적힌 ‘한국형’이라는 글자는 해당 냉장고가 한국형 냉장고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전 모델로 보이는 좌측의 냉장고는 형태가 선으로 표현되어 있어 사실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우측의 한국형 냉장고는 실사 이미지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좌측의 냉장고보다 입체적으로 보일 뿐만 아니라 사실적으로 느껴진다. 두 냉장고의 냉장실은 점선으로 표현되어 있다. 화면 중앙에 좌측 냉장고의 냉장실 부분에서 우측 냉장고의 냉장실 부분으로 향하는 굵은 화살표가 자리하고 있는데, 그 안에는 “냉장실은 더욱 커지고, 전기료는 대폭 줄였습니다.”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점선으로 표현된 냉장실 부분을 비교해보면 우측 냉장고의 냉장실이 조금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로부터 한국형 냉장고의 냉장실이 기존 제품보다 커졌다는 점, 그리고 전력 사용량을 줄여 경제적이라는 점을 드러내는 게 광고의 핵심임을 알 수 있다. 화살표의 방향과 그 안의 문구는 이러한 내용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더 나아가 웃으면서 정면을 응시하는 주부, 다시 말해 야채 바구니를 든 주부를 한국형 냉장고 옆에 배치함으로써 해당 제품이 소비자 가까이에 있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한국형 냉장고 탄생을 알리는 금성사의 광고가 나가고 얼마 후인 1981년 5월 19일, 삼성전자도 중앙일보(“Samsung High Cold Refrigerator,” 1981)에 Figure 2와 같은 냉장고 광고를 내보냈다. 작업복을 입은 남성, 다시 말해 삼성전자 절전연구팀장이 하이콜드 냉장고를 가리키는 모습을 화면 좌측에 배치하고, 우측에는 텍스트로 이루어진 설명을 배치했다. 이 광고에서도 앞서 금성사의 광고에서처럼 강조 부분을 표시하는 방법으로 점선이 활용되었다. 그런데 금성 한국형 냉장고 광고에서와 달리 냉동실 부분이 점선으로 표시되어 있다. 모델로 등장한 삼성전자 절전연구팀장은 뭔가를 설명하는 듯한 몸짓을 취하며 손으로 그 냉동실 부분을 가리키고 있다. 이러한 도상을 통해 광고는 광고를 보는 이들의 시선을 냉동실로 향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는 냉장실을 강조했던 금성사 광고와 대비되는 것이었다. 사실 삼성전자의 광고는 여러 면에서 금성 한국형 냉장고 광고와 대조적이다. 한쪽은 냉장실을 주목하고 다른 쪽은 냉동실을 주목하는 점도 그렇지만, 광고 화면에서 등장인물의 위치 역시 서로 대조적이다. 등장인물이 여성 대 남성이라는 점도 그렇고, 야채 바구니를 든 주부 대 절전연구팀장이라는 전문가라는 점도 대조적이다.

Figure 2

Samsung high cold refrigerator advertisement (1981)

삼성 하이콜드 냉장고 광고 화면 상단에는 “하이콜드는 소비전력을 줄이기 위해 냉동실을 줄이는 변칙방법을 택하지 않았습니다.”라는 문구가 자리하고 있다. 그것도 화면 안에서 가장 큰 글자로 말이다. 내용과 그것을 표현하는 형식을 보았을 때, 변칙방법을 채택한 누군가가 있다는 확신 속에서, 그 존재를 떠올리도록 하기 위한 문구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설명 부분의 “눈 딱 감고 냉동실만 줄이면 절전은 쉽지만”, “식생활 추세를 무시한 냉장고를 만들 수야”, “냉장고 냉동실을 줄이는 변칙방법을 쓰지 않고 … 소비전력을 낮추는 데 성공”, “양심의 승리” 등의 표현을 통해 그러한 의도는 더욱 구체화되고 있다. 그 표현들은 전력 소모량을 줄이기 위해 냉동실을 줄이는 변칙방법을 쓴 누군가, 식생활 추세를 무시한 냉장고를 만든 누군가, 양심적이지 않은 누군가가 있다는 말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의 광고는 바로 그 대상을 타자화함으로써 자사 제품의 우월성을 확인받으려는 의도를 품고 있었다.

광고의 전후 맥락을 고려할 때, 삼성전자가 광고에서 암시하고 있는 누군가, 다시 말해 소비전력을 줄이기 위해 냉동실을 줄이는 변칙방법을 사용한 누군가가 금성사임을 떠올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삼성전자의 광고가 나가고 이틀 후인 5월 21일, 금성사는 자사 냉장고에 대해 “변칙적인 방법에 의한 절전형”이라고 표현한 것을 문제 삼으며 공정거래위원회에 삼성전자를 고발했다. 상대를 비방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에 질세라 삼성전자도 금성사가 과장 광고를 했다고 맞고발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삼성전자의 광고에 대해 취소하고 사과 광고를 내라고 시정 명령을 내렸다. 이것은 1981년 5월에 발족한 공정거래위원회가 내린 첫 시정 명령으로 기록되었다(Noh, 2019). 금성사에 대해서도 시정 명령이 내려졌는데, 냉장실의 크기가 크게 변한 것처럼 광고한 것은 허위과장 광고에 해당한다는 이유에서였다.

1981년의 금성 한국형 냉장고 광고에는 “커다란 냉장실로 야채, 김치 등 냉장식품이 많은 우리 가정에 가장 알맞은 금성 한국형 냉장고”라는 표현이 있다. 이 표현을 풀어보면 한국 가정에서는 야채, 김치 등 냉장 식품을 주로 소비하기 때문에 냉장실이 커야 하고, 금성 한국형 냉장고는 그러한 한국인의 라이프스타일에 맞춰 냉장실을 넓혔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광고는 많은 주부로부터 그러한 사실을 얻었다고 밝힘으로써 설득력을 높이고 있다. 여기에서도 한국인의 라이프스타일을 주목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해당 냉장고가 왜 그러한 방식으로 디자인되었는지에 대한 논리적 배경이 되고 있다. 한국인의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주목, 그리고 그것을 통한 제품 디자인은 80년대 말 올림픽 이후 한국형 제품 개발의 기본적인 프로세스로 자리한다. 그런데 1980년대 초 금성 한국형 냉장고는 이미 10여 년 전에 그러한 내용을 선취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982년 들어 금성사는 기존의 ‘금성 눈표 냉장고’라는 명칭 대신 ‘금성 한국형 냉장고’라는 이름을 달고 3칸으로 된 신제품을 내놓았다. 이 제품은 냉동실과 냉장실 이외에 야채실을 별도로 마련한 제품이었다. 여기에서도 금성사는 “채식을 많이 하는 한국인의 식생활에 알맞게 냉장실을 키우고 냉동실, 냉장실, 야채실을 용도별로 독립 설계”했다고 주장했다. 삼성전자 역시 같은 달에 3도어 하이콜드 냉장고를 선보였다. 하지만 이때에도 삼성전자는 ‘한국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80년대 초 가전제품에 있어 ‘한국형’이라는 용어는 금성사에 의해 사용되었다. 금성사는 1981년 금성 한국형 냉장고 이후에도 라이프스타일을 주목했고, ‘한국형’이라는 용어를 활용해 제품을 홍보했다. Figure 3과 같이 1982년 5월에는 전체 냉장고 모델을 ‘한국형 냉장고’라고 광고하기도 했다. 80년대 초 한국형 제품의 아이템은 냉장고에 한정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80년대 말에 이르러 ‘한국형’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제품의 아이템 수는 급속히 늘어났고, 금성사뿐만 아니라 삼성전자나 대우전자도 한국형 제품 개발에 본격적으로 나서는 모습을 보였다.

Figure 3

Goldstar Korean-style refrigerator advertisement (1982)


4. 80년대 초 한국형 냉장고의 등장 배경

4. 1. 2차 석유파동과 에너지 절약

하나의 제품이 기획에서 출발해 디자인 과정과 생산을 거쳐 판매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 금성 한국형 냉장고도 다르지 않았다. 한국형 냉장고는 1981년 4월 무렵에 판매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1년 전인 1980년 5월 31일에 발간된 동아일보(“Summer home appliances ,” 1980)를 보면 “육류 소비량이 많지 않은 우리나라 식생활에 착안, 냉동실을 축소하고 냉장실을 넓힌 한국형 냉장고도 곧 선보일 예정”이라는 기사가 등장한다. 그것은 금성사의 움직임을 소개하는 기사였다. 기사의 내용으로부터 1980년 5월에 금성사는 이미 ‘한국형 냉장고’를 개발하고 있었고, “곧 선보일 예정”이라는 말을 통에서 제품 개발이 상당히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더 나아가 ‘한국형 냉장고’의 기획이 그 이전, 다시 말해 1980년 초반이나 1979년 즈음에 시작되었음을 추측하게 한다.

1979년은 어떤 해였을까? 금성사가 한국형 냉장고를 출시하기 2년 전인 1979년부터 한국은 2차 석유파동으로 몸살을 앓기 시작했다. 2차 석유파동은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단계적 가격 인상을 예고한 데도 원인이 있었지만, 더 큰 이유는 그해에 일어난 이란혁명의 여파로 중동 지역 불안이 증폭되면서 공급량이 줄어든 데 있었다. 1973년 1차 석유파동 때와 달리 70년대 말의 2차 석유파동은 한국 경제에 큰 충격을 주었다. 한국 경제 규모가 1차 석유파동 때보다 커진 상태였기 때문에 원유를 전량 수입하는 한국은 가격 인상에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6개월 정도였던 1차 석유파동 기간과 달리 2차 석유파동은 2년 넘게 이어졌다. 당시에 중동산 석유 의존도가 높았던 것도 충격이 컸던 이유였다. 석유파동으로 세계 경제가 얼어붙으면서 수출 주도의 한국 경제는 더 크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1978년 11.6%였던 경제 성장률은 1979년 6.4%로 떨어졌고, 1980년에는 –4.6%로 떨어졌다(Ministry of Power and Resources, 1988).

2차 석유파동은 에너지 절약을 국가적 이슈이자 국민적 관심사로 만들었다. 정부도 기업도 에너지 절약에 고심했고, 매체들도 에너지 절약을 독려했다. 매일경제(“Only strong economy,” 1979)의 ‘강력한 절약만이 살 길이다’라는 사설은 당시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한 사례다. 매일경제는 그 사설에서 “우리에게 지금처럼 강력한 절약이 요청되는 때는 없었다”고 전제한 후, “불필요한 에너지 사용과 물자의 낭비를 일체 금하고 … 최대한 에너지 효율을 높이고, 이(에너지)를 절약할 수 있는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기업은 “최대한 에너지 절약이 가능한 모델을 개발하고 모든 것을 소형화해야” 한다고 구체적인 방법론까지 제시했다. 정부도 가정에 전류 제한기 부착 의무화, 에어컨 사용 제한, 옥외 전기 간판 억제, 주유소의 영업 제한, 단열 장치 의무화 등의 정책을 내놓았다(“Let's banish,” 1979).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전력 소모량을 줄이는 문제는 당시 막 성장하기 시작한 가전제품 산업에 있어서 핵심 화두로 자리할 수밖에 없었다.

1981년 금성사의 한국형 냉장고는 바로 이러한 상황 속에서 등장했다. 냉동실은 줄이고 냉장실을 넓힌 것은 전력 소모를 줄이려는 의도의 결과였다. 냉동실을 줄이면 아무래도 냉각에 필요한 전력 소모를 줄일 수 있어 에너지 효율이 높아지기 때문이었다. 광고는 이러한 내용을 적극적으로 홍보했다. 구체적으로 ‘초절전’이라는 수식어를 내세워 “전기료는 대폭 줄였습니다.”라거나 “월 소비전력을 55Kwh에서 37Kwh로 줄였습니다.”라고 구체적인 숫자까지 제시하며 에너지 효율이 높은 제품임을 내세웠다(“Goldstar Korean-style,” 1981). 이러한 움직임은 에너지 절약 여부가 제품 선택의 중요한 기준으로 자리하던 당시 사회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었다.

4. 2. 수입자유화에 따른 기업의 위기의식

60년대부터 한국은 수출 중심의 경제발전 정책을 펴 왔다. 초기에는 경공업이 산업의 중심이었지만, 1972년의 유신체제 이후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의 영향으로 상황이 달라졌다. 한국의 수출은 꾸준히 증가했다. 1964년에 수출 1억 불을 달성한 후부터 13년이 지난 1977년에 이르러 한국은 수출 100억 불을 달성했다. 그해 100억 불 수출 달성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정부는 지난 성과를 축하하며 앞으로의 더 큰 성과를 다짐했다. 그런데 수출을 계속 확대하기 위해서는 국내 시장 역시 개방해야 했다. 수출만 하고 수입문을 닫는 것은 국제적으로 역풍을 맞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주요 수출국이었던 미국의 시장개방 요구가 있었고, 그에 따라 일정 부분의 수입자유화 조치는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1978년 5월부터 1979년 초까지 3차례에 걸쳐 수입자유화 조치가 취해졌다. 그 결과 1978년 1월 53.9%였던 수입 자유화율은 1979년 1월에 이르러 68.6%로 높아졌다(“The economy in a diagram,” 1981). 수입자유화 조치를 앞두고 전경련(“National Federation,” 1978)은 수입자유화는 “국내 기업의 경쟁력 강화를 통한 자원 배분의 합리화와 경제 능률의 향상 등 장기적인 산업 정책적 측면에서 강구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수입자유화 시한을 1982년으로 연기하고 대상 품목도 1~2년간의 준비 기간을 두어 선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표했다. 이는 수입자유화에 따른 국내 시장 상실을 우려한 발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기업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1978년 5월 1일, 1차 수입자유화 조치가 취해졌다. 1차 수입자유화 조치 품목은 생필품과 국제경쟁력을 갖춘 제품, 그리고 질이 현격히 떨어지는 국산 제품 영역으로 구성되었다. 선풍기, 9인치 이상 흑백 TV, 3백 리터 이하의 냉장고와 같은 가전제품도 품목에 포함되었다(“Opening the domestic,” 1978).

1차 수입자유화 조치가 있고 6개월 정도가 지난 1978년 10월 매일경제(“Six months after,” 1978)는 ‘수입자유화 6개월’이라는 시리즈 기사를 통해 업종별 상황과 문제점을 점검하는 기사를 내보냈다. 전자 분야의 내용을 다룬 1978년 10월 19일 기사에는 “새로운 모델변경과 고가품 개발이 국내 기술축적의 빈약, 부품 및 소재의 높은 수입의존도 때문에 너무나 힘겹다.”라는 금성사 이희종 전무의 이야기가 실렸다. 이 이야기는 부품과 소재의 수입의존도가 높고, 제품 개발에 필요한 기술이 부족해 경쟁력을 갖춘 신제품 개발이 쉽지 않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이러한 상황에서 수입자유화로 유입된 수입품과 경쟁하는 게 쉽지 않다는 호소로도 해석될 수 있다. 저임금과 수입 규제를 통해 보호되어왔던 국내 기업이 당시 수입자유화 조치에 얼마나 당황했는지를 이휘종 전무의 발언은 잘 보여주고 있다.

당시 소비자는 이중구속의 상태에 있었다. ‘질을 기준으로 소비하라’는 명령과 ‘국산품을 애용하라’라는 명령 사이에서 주춤거리고 있었다는 말이다. 1978년 9월 9일 ‘수입개방 물결에 홍역 앓는 소비자’라는 경향신문(“Consumers suffering,” 1978) 기사는 당시 소비자들이 처해 있었던 이러한 모순적 상황을 잘 보여준다. 기사는 수입자유화가 소비자 의식구조와 행동을 동요시키고 있다고 서술한 후,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 결과를 보여주었다. 외제 사용에 관한 의견을 묻는 설문에 대해 ‘좋다’가 36%, ‘나쁘다’가 64%라는 결과가 나왔는데, 이는 당시 외제 사용에 있어 여전히 부정적 의견이 높았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직장 여성의 경우는 ‘좋다’가 57%, ‘나쁘다’가 53%로 나타나 전체 여성을 상대로 한 결과와 차이를 보였다. 당시만 해도 산업화 초기였고 성 역할에 대한 전통적 의식이 강력했기 때문에 직장을 다니는 여성은 대부분 젊은 층이었다. 직장 여성의 응답 내용은 젊은 층을 중심으로 가치관이 점차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설문 결과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외제를 사용하는 이유로 90%가 ‘품질이 좋다’고 답한 부분이다. 이러한 응답 결과는 외제가 좋기는 하지만 국산품을 애용하라는 사회적 명령 때문에 외제 사용에 부정적 태도를 드러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기사는 “국산 가전제품이 수입품과 경쟁을 하려면 이른바 한국형 등 독특한 기술개발이 필요하다.”라는 결론으로 마무리함으로써 한국형 제품 개발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그런데 위 기사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 또 하나 있다. 수입품 중 선호하는 품목이 냉장고(30%), TV(20%) 순이라는 점이다. 금성 한국형 냉장고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기획되었다. 위의 설문 결과에서도 알 수 있듯이 외제 냉장고에 대한 선호가 강력한 상황에서, 더욱이 시장개방 품목에 냉장고가 포함된 상황에서, 가전제품을 생산하는 기업의 두려움은 클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금성사 이휘종 전무가 밝혔듯이 경쟁력 있는 제품 생산에 필요한 새로운 기술은 부족한 상태였고, 따라서 신기술을 통한 경쟁력 확보는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1981년에 출시된 금성 한국형 냉장고의 내용을 자세히 보면 새로운 기술을 사용했다기보다는 기존의 기술을 활용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기존 기술을 창의적으로 활용해 신제품을 만들어내는 것은 한국형 제품의 고유한 특징인데, 80년대 후반에 쏟아진 한국형 가전제품들에서는 이런 특징이 보다 뚜렷하게 나타난다.

결국, 1981년의 금성 한국형 냉장고는 정부의 수입자유화에 따른 기업들의 국내 시장 상실의 두려움, 그런 두려움에도 새로운 기술개발은 쉽지 않은 기업의 상황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진 결과물이었다. ‘한국형’을 통해 여전히 유효하게 작동하고 있는 애국심을 자극하며 국산품 애용 경향에 호소하는 것은 당시 기업에게 매력적이면서 효과적인 접근법이었다. 이것은 당시가 사회적으로 한국의 고유한 전통을 호명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4. 3. 한국의 고유한 전통을 호명하는 사회 분위기

한국의 고유한 전통을 호명한다는 것은 다른 국가나 문화권으로부터 한국성을 구별해 낸다는 뜻이다. 이러한 감각, 다시 말해 공간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한국을 별도의 단위로 바라보는 감각은 세계를 거시적으로 바라보며 다른 나라나 다른 민족의 존재를 의식할 때 가능한 것이다. 한동안 그것은 제국의 것이었다. 일제강점기 동안 일본은 제국의 시선으로 한국이라는 지역과 문화를 구분하고 타자화했다. 그러한 타자화는 자신들의 정체성과 우월함을 확인받는 움직임이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의 전통적인 삶의 방식이나 문화는 시대에 뒤떨어진 후진적인 것으로 규정되었다. 하지만 한국의 민족주의 세력은 전통을 자랑스러운 역사의 산물로 호명하며 그러한 타자화의 움직임에 저항했다. 그 결과 전통은 극단적 부정과 극단적 옹호의 대상으로 양분되었다. 전통에 대한 이러한 양분된 태도는 해방 이후에도 전통을 바라보는 주된 관점으로 자리했다.

일제강점기 동안 한국을 타자화하는 감각은 통치의 효율성을 재고하려는 의도에 따라 작동했다. 이런 맥락에서 보았을 때, 한국을 다른 지역이나 문화로부터 구분해내는 움직임은 권력 작용과 일정 부분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해방 이후에도 통치자들은 국민의 관심을 돌리고 효율적인 통치를 위해 ‘한국’이라는 공간과 문화를 구분하고 활용해 왔다. 하지만 그 움직임의 관심은 타자화가 아닌 공동체화에 있었다. 지리적으로나 감정적으로 거리가 있는 이들을 하나의 국민으로 묶는 공동체화의 움직임은 베네딕트 앤더슨(Anderson, 2005)이 말한 상상의 작용이 있어야 한다. 그는 “면대면의 원초적인 마을보다 큰 공동체는 상상의 산물”이라고 말했다. 여기에는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기술적 수단이 필요한데 신문이나 소설, 교통 등이 바로 그것들이다.

신문이나 소설과 같은 매체는 직접적인 대면 관계에 있지 않은 이들에게 하나의 공동체라는 기분과 의식을 갖도록 만드는 장치로 기능해 왔다.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어 어떠한 직접적인 경험을 공유하지 않는 이들이 같은 민족, 같은 국민이라는 의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그러한 매체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권이 언론을 장악하거나 매체 활용에 열을 올리는 것은 이런 이유와 무관하지 않다. 어쨌든 ‘한국’을 부정적인 대상으로 호명했던 일제와 달리, 해방 후의 정권들은 무조건적 옹호의 대상으로 전통을 주목하면서 정권에 대한 비판을 약화하거나 국민 만들기의 차원에서 한국적인 것을 활용했다. 이러한 국가주의는 70년대 한국 사회를 지배했던 이념이었다. 금성 한국형 냉장고가 등장했던 1981에도 그러한 분위기는 여전했다.

1981년 5월 28일부터 6월 1일까지 여의도광장에서 개최된 ‘국풍 81’은 그러한 분위기를 반영한 행사였다. 당시 정권은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기 때문에 정당성에 문제가 있었다. 전두환 정부는 이러한 정당성의 문제를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를 활용해 피하고자 했는데, 국풍 81은 그러한 맥락에서 등장한 행사였다. 국풍 81은 외형적으로는 ‘한국신문협회’가 주최하고 KBS 한국방송공사가 주관하는 행사였다. 하지만 개막 전날 대통령이 현장을 방문하여 진행 상황을 보고받았던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정권이 주도한 행사였다. 국풍 81은 “사상 최대”, “건국 이래 최대의 행사” 등의 표현으로 수식될 만큼 큰 규모를 자랑했다. 첫날 100만 인파가 몰렸다는 신문 기사에서 알 수 있듯이 행사는 큰 관심 속에 치러졌다. 마당놀이, 탈춤, 농악, 부채춤, 승무, 씨름, 무형문화재 공연, 별신굿, 남사당패 등은 물론 토산품과 음식에 이르는 소위 ‘전통’이라고 호명될 수 있는 것들이 행사에 불려 나왔다. 매일경제(“The great festival,” 1981)는 “양품이나 외풍, 사대풍을 몰아내고 우리 것을 찾기 위해 마련된 이번 행사에서는 우리 겨레가 갈고 닦으며 꽃피워온 슬기와 멋이 재현”되었다고 평했다. 이는 그 행사가 한국의 전통을 호명하는 행사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 경향신문 논단에서 소설가 김주영(Kim, 1981)은 “우리 것에 굶주려 있는 인파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고 썼다. 이러한 그의 감회는 국가주의 이데올로기가 지배하고 있던 당시의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그곳을 찾은 인파들이 우리 것에 굶주렸던 이들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이러한 국가주의적 메가 이벤트를 통해 우리와 우리 것에 대한 굶주림이 만들어졌다고 하는 편이 타당한 설명일지 모른다. 그가 이야기한 ‘우리’를 구성해내는 것이야말로 당시 정권이 의도하던 바였다. 우리를 주목할 때 우리 안의 문제는 은폐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한 정권들은 언제나 이러한 방법을 사용해 왔다.

물론 고유의 전통을 향한 관심이 국가주의적 차원에서만 등장했다고는 할 수 없다. 한편으로 그것은 70년대 급격히 이루어진 산업화의 반작용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산업화에 따른 급격한 변화는 과거에 대한 그리움의 감정을 만들어내었고, 전통의 이름으로 과거를 찾는 움직임을 불러들였다. 산업화 시기에 탈이나 표주박 같은 전통적인 물건들로 가정의 실내를 채우는 움직임은 그런 맥락에 자리한다. 즐비하게 늘어선 아파트들을 배경으로 찍힌 국풍 81 행사장의 모습(Figure 4)은 그러한 실내 풍경이 외면화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National style 81,” 1981). 그게 무엇이었든 중요한 사실은 한국 고유의 전통을 호명하는 움직임이 당시에 무르익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1981년 금성사의 한국형 냉장고는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출현한 것이다.

Figure 4

National style 81 event in the background of apartments


5. 결론

‘한국형’은 한국 밖에서 한국을 바라보며 한국의 문화나 특징들을 표현하는 용어였다. 하지만 그러한 시선을 내면화한 한국인들에 의해 이 용어는 점차 사용 빈도수를 높여갔다. 그들의 발화 속에서 이 용어는 성찰의 언어이자 차별성을 상상하는 경쟁의 언어로 존재했다. ‘한국형’은 ‘한국 고유의 기술로 한국인이 만든 산물’에 붙여지는 이름이었다. 군사 장비에 주로 적용되었던 이 이름은 70년대 후반 무렵에 이르러 다른 산업제품에도 사용되기 시작했다. 1981년에 등장한 금성 한국형 냉장고는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비록 제한적일 수는 있지만, 금성 한국형 냉장고는 한국인의 라이프스타일을 주목하면서 디자인되었다는 면에서 88 올림픽 전후부터 불기 시작한 한국형 제품 열풍의 내용을 선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본 연구는 금성 한국형 냉장고가 왜 하필 그때 그러한 모습으로 등장했는지, 그 원인과 배경을 밝히는 데 목적이 있다. 연구 결과 당시 금성 한국형 냉장고와 같은 한국형 제품의 등장 이면에는 다음과 같은 배경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첫째, 2차 석유파동과 그에 따른 에너지 절약 분위기가 배경이었다. 1979년의 2차 석유파동은 성장 과정에 있던 한국 경제에 큰 어려움으로 다가왔다. 1972년 유신 이후 한국의 산업구조는 중화학공업 중심으로 바뀌고 있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2년 여간 지속된 2차 석유파동의 기간은 한국 경제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에 국가적으로 에너지 절약이 핵심 화두가 되었고, 제품 개발에도 중요한 요소로 자리했다. 한국형 제품의 특징으로 효율과 절약이 강조되었던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둘째, 수입자유화에 따른 기업의 위기의식이 또 다른 배경이었다. 1977년 수출 100억 불 달성 이후 한국은 시장개방 압력에 시달렸다. 이에 정부는 1978년부터 1979년 초까지 3차례의 수입자유화 조치를 취했다. 수입자유화 품목에는 냉장고도 포함되어 있었다. 게다가 당시 수입 냉장고는 국민들이 가장 선호했던 외제품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내 시장을 상실할지 모른다는 기업들의 두려움이 증폭되었고, 그러한 두려움이 여전히 유효하게 작동하고 있었던 국산품애용에 기대는 한국형 제품 개발을 가능하게 했다.

셋째, 한국의 고유한 전통을 호명하는 당시 사회 분위기 역시 중요한 배경이었다. 정당성을 가지지 못한 정권들은 ‘우리’를 호명함으로써 국민의 관심을 돌리고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판을 피하려고 했다. 그와 더불어 급속한 근대화의 반작용으로 전통에 관한 관심도 나타났다. 이러한 과정에서 ‘전통’은 다양한 방식으로 불려 나왔고, 그에 따라 국가주의적인 분위기가 한국 사회를 한동안 지배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기업들이 애국심에 호소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고, 금성 한국형 냉장고와 같은 제품의 등장을 가능하도록 만든 배경이 되었다.

Acknowledgments

This work was done by 2019 Konkuk University Research Fund.

Notes

Citation: Oh, C. S. (2021). The Emergence Background of Korean-style Refrigerators in the Early 80s. Archives of Design Research, 34(2), 221-233.

Copyright : This is an Open Access article distributed under the terms of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Non-Commercial License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3.0/), which permits unrestricted educational and non-commercial use, provided the original work is properly c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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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1

Figure 1
Goldstar Korean-style refrigerator advertisement (1981)

Figure 2

Figure 2
Samsung high cold refrigerator advertisement (1981)

Figure 3

Figure 3
Goldstar Korean-style refrigerator advertisement (1982)

Figure 4

Figure 4
National style 81 event in the background of apart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