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s of Design Research
[ Article ]
Archives of Design Research - Vol. 27, No. 1, pp.199-217
ISSN: 1226-8046 (Print) 2288-2987 (Online)
Print publication date Feb 2014
Received 14 Jan 2014 Revised 19 Jan 2014 Accepted 20 Jan 2014
DOI: https://doi.org/10.15187/adr.2014.02.109.1.199

State intervention on individuals’ design consumptions in the Chosǒn Dynasty

ChoErin ; KimJangho
Strategic Design Management, Parsons, The New School for Design, New York, USA CSSRI and School of Humanities, Korea University, Seoul, Korea
디자인을 통한 소비자와 국가의 갈등구조 관계의 고찰:조선왕조실록에 기반한 문헌과 실증연구

Correspondence to: Jangho Kim kimjangho1028@gmail.com

This journal was supported by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 Grant Funded by the Korean Government(MEST)
이 학술지는 2013년도 정부재원(교육과학기술부)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출판되었음

Background The role of design in product consumption, particularly in terms of reflecting and satisfying consumers’ aesthetic desires, has been well noted throughout the history. While recognizing its value as a driver for economic advancement, the society has often casted wary eyes and attempted to curve design-driven conspicuous consumptions. In this paper, we examine the fight between these two forces in the Chosǒn dynasty.

Method The data for the study were collected by analyzing the contents of Chosǒn Wangjo Silok,” the Annals of the Chosǒn Kindom between 1392 and 1910. Specifically, we identified sentences and phrases in Chosǒn Wangjo Silok,” that contained the information about the way Chosǒn dynasty had viewed and handled design-driven conspicuous consumptions. We then categorized these in terms which ruling king and which social class each phrase describes about, whether such consumptions were actually punished by the government, on which bases they were penalized, and so on. Frequency analysis, Chi-square analysis, and logit analysis were used for the empirical analysis for the study.

Results The results show that there was a significantly greater number of cases in the later half than the first half of Chosǒn dynasty where design-driven conspicuous consumptions were recognized as individuals’ desires to express themselves. The results also indicate that the legal enforcement for excessive conspicuous consumptions was based on the concern for resource depletion rather than ethical considerations. Furthermore, the results find a greater number of punishment cases for an excessive conspicuous consumption when it was committed by the ruling class(Yang-Ban) than by commoners.

Conclusion Although the Chosǒn dynasty has been characterized as the Confucius society which imposed modesty and frugality on all aspects of people’s lives, the government actually struggled to suppress the society’s desire to consume excessively decorative designs. The government framed a design-driven conspicuous consumption as a factor depleting the nation’s wealth as well as decreasing its moral standards. The government, however, relied more on the former argument than the latter as a reason for legal punishment.

초록

연구배경 소비자의 미적욕구를 반영하고 만족시킨다는 점에서 디자인은 상품생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는 점을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러나 디자인적인 세련됨을 사치와 동일하게 생각하고 윤리적으로 또 합리적인이유로 억제해 왔는데 조선도 그 예외는 아니었다. 주자학이 지배하는 유교(儒敎) 이상국가(理想國家) 이념에 따라 국가가 개인을 억압하는 사회로 알려진 조선은 디자인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또 어떻게 사치를 억제하고 처벌했는지를 탐구해 본다.

연구방법 조선왕조실록의 각권의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하여 “장신구”와 관련된 기록들을 추출하였다. 시대별로 문헌들을 내용분석하였다. 그리고 이 기록들을 카테고리별로 분류하여 왕실, 양반, 중인, 평민으로 나누었고 어떠한 이유로 사치를 억제했는지를 윤리성과 합리성으로 나누어 분류하여 실증분석을 시도하였다. 빈도분석과 함께 카이 스퀘어 분석, 로짓 분석이 사용되었다.

연구결과 조선은 엄격한 신분제 사회를 통해 개인의 욕망이 표현될 기회가 거의 없었다고 생각을 한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조사한 결과 조선인들의 마음에도 사치스러움에 대한 욕망이 사회적 요구와 충돌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조선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보았을 때 후기에 사치한 디자인의 소비가 더 억제되고 있었다. 조선은 신분제에 근거한 윤리적 강요보다는 검소해야 한다는 유교적 덕목에 의한 합리성이 디자인과 그 소비에 있어서 더 강조되고 있었다는 것을 밝힌다. 특히 양반계층의 검소(儉素)함을 더 강조하고 있고 사치(奢侈)를 금지하고 있다. 비윤리적 이유 보다는 비합리적이라는 근거로 사치스러운 소비를 처벌한다는 점을 로짓분석을 통해 발견하였다.

결론 한국 문화에서 강조되는 검소를 존중하고 사치하고 화려한 것을 배격하는 전통은 현대에 있어서도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현대 한국인들의 미의식과 디자인 감각은 이러한 양면성이 동시에 나타나는 복잡성으로 요약할 수 있다. 디자인의 역사를 내용분석과 실증분석을 통해 복합적으로 접근하는 후속 연구들이 필요할 것이다.

Keywords:

Chosǒn dynasty, design, conspicuous consumption, punishment, luxury, Chosǒn Wangjo Silok, 사치(奢侈), 조선 디자인, 유교, 합리성, 처벌, 과소비, 신분제, 조선왕조실록

1. 서론

현대사회에서 디자인은 미학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세상을 움직이는 중요한 키워드가 되었다. 디자인의 중요성을 강조한 담론은 제품개발과 마케팅을 넘어, 디자인적 사고방식(design thinking)에서 디자인 도시(design city)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영역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러나 디자인의 역할을 소비상황에 국한하여 볼 때, 현 사회가 보이는 디자인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를 관찰할 수 있다. 디자인이 상품에 대한 유저의 경험을 증진하고, 나아가 삶의 질과 국제 경쟁력 제고에 도움이 된다는 점에 동의하면서도, 디자인 중심의 마켓상황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소비자제에서 디자인을 통하여 미적 아름다움과 쾌락 추구 중심의 소비문화 조장, 정도가 지나치게 돈이나 물건에 집착하고 소비(사치)하는 사회문화를 끌어내려 한다는 비판이 있다. 특히 이는 기능의 차이 없이 디자인만의 업그레이드로 새 버전을 내놓아 상품의 라이프사이클(product lifecycle)을 단축하여 필요치 않은 과소비 문화를 촉진한다는 점을 우려한다고 하겠다. 사실 이런 두 가지의 시각은 역사를 통해, 그리고 동서고금(東西古今)에서 끊임없이 제기되었던 바, 현대 한국 사회가 가지고 있는 디자인에 대한 이중적이고 때로는 모순적인 태도도 역사적 배경이 있을 것이라는 점에서 이 연구는 시작되었다.

실제 19세기 유럽에서는 귀족과 평민 사이의 경제적 격차가 만들어 내는 갈등에 민감했지만 부자에게 사치스러운 물건은 격식을 차리고 생활의 편의를 위한 것으로 경제를 위해서는 긍정적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는 기록이 있다.(Davidson(1898)) 우리 역사에서도, 조선시대 박제가(朴齊家)는 북학의에서 “검소(儉素)의 강조와 소비의 억제”를 조장하여 결국 경제 활동 자체의 위축을 초래하게 되었음을 비판하고 있다. 그는 “다른 나라는 정녕 사치로 말미암아서 망한다고 할 수 있겠으나, 조선은 반드시 검소함으로 인해 멸망할 것”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이 논의는 “사치를 허용해야 산업이 발전한다.”로 해석할 수 있다.(김성준(2003))

“검소하다는 것은 물건을 남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자신에게 물건이 없다 하여 스스로 단념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재물이란 우물에 비유할 수 있다. 퍼내면 물이 가득해지지만 길어내기를 그만두면 물이 말라버리는 것과 같다. 화려한 비단 옷을 입지 않으므로 나라에는 비단을 짜는 사람이 없고 기술이 피폐해졌다.”

그러나 조선시대 전체를 관통해서 흐르는 분위기는 국가가 개인에게 반복적으로 강조한 유교적 검약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유교적 검소와 사치의 배제가 개인의 내면에까지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이다.

검소와 소비의 양면성은 동서양의 철학에서도 볼 수 있다. 자본주의의 발전의 근원에 프로테스탄트의 청교도 정신과 금욕에 의한 자본의 축적이 있었다.(Weber(1905)) 반면에 18세기 후반 영국에서 소비혁명이 있었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Campbell(1987)) 18세기 낭만주의가 만들어낸 감정이 소비자의 쾌락으로 연결되며 칼뱅의 금욕주의에 반발하는 케임브리지 플라톤주의자(Cambridge Platonist) 등의 또 다른 종교적 전통이 낭만적 소비와 사치품의 부흥(Campbell(2010))과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케인즈(1936)가 지적한 “절약의 역설”은 근검절약을 통한 저축의 증가가 개인적 차원에서는 합리적이지만 국가 전체로서는 유효수요의 부족으로 인해 공황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소비는 경제에서 생산만큼 중요한 요인이며 소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 가를 이해하는 것은 경제를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산업혁명 이후 디자인은 대량 생산한 제품을 차별화하고 경쟁력을 확보하려는 노력의 결과였으며, 그 결과 디자인은 부가적인 장식을 넘어서 응용 미술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당시 영국의 면직물이 다른 국가와 비교해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문양의 역할이 컸다. 이런 디자인적인 노력은 근대 이전의 한국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데 밖으로 드러난 부분은 평범한 명주이지만 안감은 화려한 무늬의 비단으로 만든 겹으로 지은 단령이 그러한 사례일 것이다. 이러한 디자인 컨셉은 영국의 폴 스미스(Paul Smith)가 만든 실용적 겉감과 화려한 안감의 양복과 통한다는 점에서 조선 공예의 현대 디자인적 감각을 찾을 수 있다. 김여온 (1550-1592)의 무덤에서 출토된 단령과 겉은 차분한 회색의 모직이지만 안감은 화사한 보라색 비단인 폴 스미스 재킷은 묘한 동질감을 준다. 협의의 디자인의 역사는 짧지만 장식, 기능을 동시에 고려한 조선의 장신구에서 디자인의 원형을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이 논문은 쓰여졌다.

이 연구는, 조선 시대에 디자인 소비 메커니즘을 고찰하여, 유교적 윤리를 실현하려는 국가적 의도와 소비를 추구하는 개인의 자연스러운 욕망의 충돌을 조사한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윤리적 동기 이외에도 개인의 사치스러운 소비가 조선의 한정된 자원의 낭비라는 합리적 접근방법을 어찌 활용하였고, 개인의 소비 욕망은 어떠한 방식으로 나타났는지를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하여 본 연구는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나타난 디자인 소비에 있어서 개인의 욕망이 국가 권력, 신분제 사회, 유교 이데올로기 등 정치사회적 메카니즘에 의해 어떻게 그 선택에 제한을 받으며, 어떻게 저항하고 또 타협하는지를 문헌을 통해서 추적해 보고 통계적으로 정리해 보고자 한다.


2. 개인의 욕망과 국가의 통제에 대한 모델

소비의 경제사회학적 연구는 다수 이루어져 있다. 사치와 관련 가장 대표적인 문헌은 과시적 소비(conspicuous consumption)이다(Veblen (1899)). 과시적 소비의 근본은 소비를 통하여 자신의 부와 지위를, 나를 알고 있는 사람들뿐만 아닌 불특정 다수 사회 구성원에게 알리고자 하는 욕구에서 비롯되는데, 사회경제적 지위의 열망이 강한 집단에서 특히 잘 관찰되는 소비행위이다. 베블렌(1899)은 유한계급(leisure class)들이 하는 소비를 관찰하고 그들의 소비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고 배타적인 지위 상징(nonessential and exclusive status symbols)이라는 것을 발견하였다. 베블렌은 과시적 소비가 가장 빈곤한 계층을 포함해서 사회의 모든 계층 간에 존재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역시 이 현상이 가장 현저한 케이스는 부르주아 계층이다. 과거의 귀족들과 달리 새로 부를 취한 부르주아들은 부를 통한 지위향상을 이룩할 목적으로 주변을 의식하면서 과소비를 한다.

사치를 사회현상으로 접근하는 이면에는 과소비 자체를 죄악시하는 윤리적 차원도 있다. 19세기말의 유럽 문헌들, 특히 Davidson(1898)을 참조할 수 있다. 근대 이전에는 사치를 종교적인 관점에서 접근했다면 근대 이후에는 경제적으로 비생산적이라는 논의도 발견된다. 사치품이 화폐가 순환하는 것에 도움을 줄 수는 있지만 합리적인 필요에 의해서 소비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사치를 경제적으로 합리화할 수 없으며 정치사회적 위험이 있을 수 있다. 실제 19세기 이후 윤리적인 것의 강조 보다는 경제적 합리성(合理性)의 측면에서 더 논의가 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현대에 와서는 “사치”라는 주제를 피에르 부르디외의 구별짓기 (distinction) 라는 관점에서 바라 볼 수 있다.(Bourdieu(1987)) 경제학에서 “사치”라는 주제는 연구의 대상으로 거의 등장하지 않는데 일종의 가치 판단을 하는 주제로 기피되는 측면이 있다. Sau(1985)는 사치재의 생산 확대가 국가 전체의 성장으로 이어지지만 빈자의 절대적 소득은 감소하기에, 성장의 빈곤화(immiserising growth)의 또 다른 사례라는 것이다. 이 반대의 견해도 물론 팽배하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귀족이나 부르주아 계급의 사회적 소비 취향이 디자인의 발전과 경제성장을 촉진시켰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조선시대에 이런 틀을 적용할 수 있을까? 일단 조선시대에는 미학은 기능과 아무런 연관이 없거나 오히려 충돌하는 것으로 여기어 졌었다는 것을 조선왕조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국가가 구체적으로 상품의 기능과 디자인에 개입하고 있고 기능을 절대적으로 우선시하고 있다. 디자인의 또다른 중요한 역할은 신분제 사회 조선의 신분제 질서의 강화로, 자신의 신분계급에 맞지 않는 소비는 철저히 금지되고 때로는 처벌되었다. 명나라에 보내는 물건이나 왕실에 진상되는 물품에 대해서는 일정 이상의 화려함이 허용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지나친 사치스러움은 유교적 이상에 따라 사대부들에 의해 억제되었다. 조선사회는 왕과 사대부가 공동경영하는 측면이 강한 군약신강의 사회이기도 했다. 주자학은 국가의 유일한 이데올로기였고 국가통치의 이념이자 왕, 양반, 평민에 이르는 모든 사람의 행동을 구속하는 통제의 수단이기도 했다. 특히 중인이나 평민들의 사치스러운 소비는 더욱 철저히 억압되었다. 이에 “검소한 것을 미덕으로 삼고, 형식적인 예절을 숭상하는” 주자학이 조선시대 사람들의 예술적 정서를 메마르게 하였고, 조선 예술/디자인에서 섬세하고 화려한 것이 실종되었다는 비판도 있다.

즉 조선에서도 디자인이 아름답다는 미학적인 요소를 경유하여 개인의 욕망과 연결시키기도 하고 이 미학적인 것이 사치스럽다는 인식을 통하여 반국가적, 반유교적인 것으로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19세기 유럽 사회처럼, 조선시대에서도 개인의 사치에 대한 욕망과 국가/유교의 사치에 대한 윤리적 억압이 조선사회에서도 빈번히 충돌했을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이상의 논의를 정리하여 개념적인 정리를 한 것이 Figure 1에 정리된 모델이다.

Figure 1

Individuals’ desires vs state’s intervention in the design consumptions of the Chosǒn dynasty


3. 내용분석

본 연구는 디자인에 대한 조선시대의 관념에 대한 분석을 위해 (1) 조선왕조실록을 통한 문헌조사와, (2) 디지털 문서화된 조선왕조실록에서 디자인이라는 키워드 써치를 통해 나타난 기록을 바탕으로 하여 통계적 실증분석을 하였다.

3.1. 문헌고찰

(1) 과소비 억제에 근거한 조선의 합리성

조선은 엄격한 신분제 사회를 유지했지만 양반계급의 솔선수범하는 검소함을 유교적 덕목으로 삼았다. 유럽에 비해서 화려함과 사치는 강하게 억제되었다. 개인적 욕망에 대해서는 국가가 개입하여 금지 내지는 처벌해야한다는 것이 조선 시대의 분위기이기도 했다. 우리는 조선시대가 사치에 대해 엄격한 사회였다고 생각하지만 개인의 화려하고 세련된 디자인과 그 소비에 대한 욕망을 보여주는 실례도 찾아 볼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조선 초기부터 사치풍조를 막기 위해 화려한 비단제품(사라능단)을 금한다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고 조선 중기 이후에는 한복 저고리 길이가 짧아지고 양반집 여인, 기생들이 머리 위에 가채(여자의 머리숱이 많아 보이게 하기 위하여 덧넣는 땋은 머리로써 고려 초기로부터 조선 중기 영정조 시대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명문가에서는 값비싼 큰 사이즈의 가채를 선호하였다는 점에서 신분적 우월함을 드러내기 위한 방법의 하나라고도 할 수 있다.)를 얹는 유행이 있었다. 조선 21대 왕 영조에 이르러 기와집 가격에 맞먹는 가채가 등장하였고 이는 사치와 허영이라는 폐단 뿐 아니라, 궁중여인들의 목 건강을 위해 금지령이 내려져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도 개인은 화려함을 열망한다는 증거가 계속 나온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이하 언더라인은 저자가 그 내용을 강조한다는 의미이다.

성종 130권, 12년(1481년 辛丑 / 明 成化 17년) 6월 21일(甲子) 1번째 기사 홍문관 부제학 이맹현 등이 가뭄에 대해 상소하다.

“너무 일찍이 시집보내고 장가들이는데, 몸을 단장하는 장신구가 매우 사치하고 주어 보내는 물건이 매우 많습니다. 사라능단(紗羅綾緞)은 우리나라에서 나는 것이 아닌데, 한 생각이 싹트거든 반드시 삼가서 ‘이것이 검소한 것인가 사치한 것인가?’ 하고 살피어, 검소한 것이면 공경히 넓히고, 사치한 것이면 공경히 극복하소서

젊은 사내들이 귀를 뚫고 귀고리 하는 풍조를 금하도록 한다는 기록도 보인다.

선조 6권, 5년(1572 壬申 / 明 융경(隆慶) 6년) 9월 28일(辛亥) 2번째 기사

“신체(身體)와 발부(髮膚)는 부모에게 물려받는 것이니 감히 훼상(毁傷)하지 않는 것이 효(孝)의 시초라고 하였다. 우리나라의 크고 작은 사내 아이들이 귀를 뚫고 귀고리를 달아 중국사람에게 조소(嘲笑)를 받으니 부끄러운 일이다. 따르지 않는 자는 헌부가 엄하게 벌을 주도록 할 것으로 승전(承傳)을 받들라.”

그러나 이러한 문헌들은 통제정책의 이면에 경제적 합리성을 고려하여 사치 억제 정책을 실시하고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세조는 엄격하게 사치스럽다고 생각되는 것을 금지하고 처벌했다. 사치스러운 생활이 물가에 영향을 준다는 지적도 있었고 세조는 도자기의 생산조차 금지했는데 이러한 조치가 장기적으로 상공업과 디자인에 부정적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도 있다.

성종 286권, 25년(1494 甲寅 / 明 홍치(弘治) 7년) 1월 16일(丙午) 2번째 기사

“손주(孫澍)가 아뢰기를, “ 존비(尊卑)의 구분이 없으며, 물가(物價) 또한 이로 인하여 오르니 청컨대 금(禁)하는 법을 세우소서.”

세조 38권, 12년(1466 丙戌 / 明 성화(成化) 2년) 4월 18일(戊午) 4번째 기사사헌부(司憲府)에 전지(傳旨)하기를, “자기(磁器)는 이제부터 진상(進上)하는 것 외에, 공사처(公私處)에서 널리 행하여 쓰는 것을 일체 금한다. 경외(京外)에 장인(匠人)이 몰래 숨어서 자기를 만들어 저자 안과 조관(朝官)·서인(庶人)의 집에 사사로이 서로 매매하는 자는 위제율(違制律)로 논한다.” 하였다.

조선시대의 사고방식은 사치에 대해서는 매우 경직적으로 보인다. 심지어 왕에게까지 사치해서는 안 된다는 직접적인 말을 서슴지 않는다.

구체적으로 문헌을 보면 정말 세세하고 엄격하게 조선시대 사람들의 행위를 구속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삼사(三司)의 하나인 사헌부에서 건의한 금령의 조문을 요약하여 광화문 밖 등지에 내걸도록 건의한 기록에서 사대부와 백성들의 사치를 경계하고 있다.

세종 43권, 11년(1429 己酉 / 明 선덕(宣德) 4년) 2월 5일(辛巳) 7번째 기사

“상하 의복의 샛수[升數]는 등분이 없으나, 모시·베와 명주·무명과 무늬를 놓아 섞어 짠 것은, 1품부터 양반의 자제에 이르기까지는 12 새[升] 이하로 하고, 공인(工人)·상인(商人)과 천인(賤人)과 하인배는 8새 이하로 하며, 잘옷[貂裘]은 양반의 자제 이외에 공인·상인과 천인과 하례(下隷)는 그것을 입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고, 어기는 것을 금지할 것이며

이는 제한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겠다는 합리성의 발현으로 볼 수도 있다.

3.1.2. 신분제 사회 조선

전반적으로 사치는 비난과 처벌의 대상이었다. 화려함이 허용되는 것은 왕실과 명나라에 관련된 것이다. 화려한 디자인도 왕의 위엄이나 사대부의 높은 신분을 상징하기 위해서 쓰였다고 볼 수 있다. 화문석에 관한 예를 들어보면,

세종 43권, 11년(1429 己酉 / 明 선덕(宣德) 4년) 2월 5일(辛巳) 7번째 기사

“화문석(花紋席)은 〈명나라에〉 헌납하거나 국가에서 사용할 것 이외에는 일절 모두 금지할 것이며, 진상하는 의대(衣襨)와 대궐 내에서 쓰는 것을 제외하고는 자색(紫色)의 의복은 경술년부터 이를 금지할 것이며,

라는 기록이 있다.

허나 왕이 양반들에게 격식을 위한 어느 정도의 사치를 허용하기도 했다. 사치스러움이 허용되는 것은 더 나아가 사대부와 그 부인과 자제를 포함했는데, 흥미로운 것이 이 목록에 기생이 끼어있다는 것이다. 천한 신분이기는 하지만 기생이 조선시대의 트렌드세터(trendsetter) 역할을 암암히 고려한 처사인 듯 본다.

세종 43권, 11년(1429 己酉 / 明 선덕(宣德) 4년) 2월 5일(辛巳) 7번째 기사

“금과 은은 본국의 소산이 아니므로 진상하는 의복과 기명(器皿), 또는 대궐 안의 술그릇, 중국의 사신에게 접대하는 기명과 조관(朝官)의 품대(品帶), 명부(命婦)의 수식(首飾), 사대의 자제들의 귀고리[耳環], 기생의 수식(首飾) 이외의 기명과, 금은을 녹여 부어 만들거나 도금하는 것을 금지할 것이며”

그러나 다음의 문헌에서 나타나듯이, 디자인을 강조하는 소비형태는 평민에게는 거의 대부분이 금지의 대상이었다. 또한 상인이나 평민들이 조금이라도 자유롭게 멋을 부리면 신분제에 입각하여 금지를 요구하고 있다.

성종 286권, 25년(1494 甲寅 / 明 홍치(弘治) 7년) 1월 16일(丙午) 2번째 기사

손주(孫澍)가 아뢰기를, “서피 이엄(鼠皮耳掩)과 오십죽립자 (五十竹笠子)는 복례(僕隷)·하인(下人)이나 시전[市肆]의 장사꾼이라 하더라도 또한 쓸 수가 있으니, 매우 옳지 못합니다. 특히 존비(尊卑)의 구분이 없으며, 물가(物價) 또한 이로 인하여 오르니 청컨대 금(禁)하는 법을 세우소서.”

임금의 책임을 직접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기록도 보인다. 이런 점에서 군약신강(君弱臣强)의 조선정치를 엿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성종 시기의 다음과 같은 상소가 대표적일 것이다.

성종 130권, 12년(1481 辛丑 / 明 성화(成化) 17년) 6월 21일(甲子) 1번째기사. 홍문관 부제학 이맹현 등이 가뭄에 대해 상소하다.

신들이 듣건대 재변이 나타나는 것은 음양(陰陽)이 고르지 않기 때문이고, 음양이 고르지 않은 것은 임금과 신하에게 부족하고 잘못된 일이 있기 때문이라 합니다. 예전부터 밝은 임금은 혹 재변을 당하면 반드시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조선 전기 화려함에 대한 풍류가 가장 많이 언급되고 있는 것은 연산군 시절이다. 그는 일단 디자인에 관심이 많았다. 조사의 옷소매를 넓히는 등 옷의 형식에 대해 전교를 한다. 내관의 사모 체제를 그리고 새겨서 남기도록 한 것도 디자인에 민감하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연산군은 디자인에 관심이 많고 풍류를 아는 왕이었기에 유교 이념에 충실한 신하들과 충돌을 일으키기도 한다. 특히 성종이 권한을 강화시킨 삼사와의 충돌이 두드러진다. 화려한 물건들은 낭비라는 것이다.

홍문관 부제학 김수동(金壽童) 등이 상차(上箚)하기를, “ 신심(宸心)이 혹시라도 진기한 놀음[玩好]에 옮겨질까 하옵니다. 공장(工匠)을 불러 모아 병풍을 장식 제조하고 또 화사(畫史)를 시켜 세화(歲畫)를 더 많이 그린다고 하는데, 신등은 이 말을 듣고 놀람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병풍이 꼭 필요한 것이라면 담당 관청[有司]에 분부할 것이지 궁궐 안[禁內]에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세화나 완상품과 같은 물건은 평상시에도 쓸데없는 것인데 완상물에 마음을 어지럽히지 말으시고,”

임금 자신은 사치스러운 면이 있었지만 백성들의 사치에 대해서는 처벌을 명하기도 했다. 혼수 마련이 어려워 혼인을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현대 한국사회의 많은 풍속의 기원이 조선 시대에 있다는 느낌이다.

연산 62권, 12년(1506 丙寅 / 明 정덕(正德) 1년) 5월 12일(辛卯) 1번째 기사

전교하기를, “명박(命珀)과 산호를 혼인에 쓰는 것은 이미 금령(禁令)을 내렸는데, 쓰는 사람이 자못 많아, 가난한 집에서는 이 때문에 혼기를 놓친다. 만약 혼수감을 마련하기 어려워 때가 지나도록 혼인하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그 죄를 다스리라.” 하였다.

조선 후기에 사치해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규범은 더 엄격히 강조되었다. 조선 후기의 분위기를 볼 수 있는 문헌은 다음과 같다. 영의정 김상철이 체발 금지 건에 대해 고증하고 정조가 스스로 사치를 반성하고 있고 유행이라는 herding behaviour가 조선 시대에도 존재했다는 기록이다.

정조 7권, 3년(1779 己亥 / 淸 건륭(乾隆) 44년) 2월 25일(庚辰) 1번째 기사

임금(정조)이 또 말하기를, “근래 사치하는 풍습이 문득 고질적인 폐단으로 되어 버렸으니 체발에 관한 한 가지 일뿐만이 아니다. 의복과 음식에 대한 사치와 거마(車馬)와 제택(第宅)에 대한 화려함이 더욱 점점 더 사치스러워져 가고 있는데 돌려가면서 서로들 모방하여 한 사람이 비단옷을 입으면 1백 사람이 따라서 입고, 한 집에서 담장을 높이면 1백 집에서 이를 사모하고 있기 때문에 조정에 있는 진신(搢紳)들은 모두가 글을 읽어 옛 법을 사모하기 때문에 염치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식견이 있는데도 오히려 폐단을 바로잡아 풍속을 변경시키지 못하고 있으니, 더구나 여항(閭巷)의 규문(閨門) 안에 있는 부인(婦人)과 여자(女子)들에게 검소함을 숭상하고 사치를 제거하라는 것을 요구할 수 있겠는가?  사치스런 풍습이 날로 더하여 가고 사치스런 풍속이 점점 더 성하여지는 것은 모두 나 한 사람의 탓인 것이다. 한 번씩 반성하노라면 다만 얼굴이 뜨거워짐을 깨달을 뿐이다.”

3.2. 실증분석

과거에는 실제 문헌이나 영인본을 통해서만 접근 가능했던 조선왕조실록이 국역본이 완간되고 온라인을 통해 공개됨으로서 국학분야를 넘어 연구가 가능하게 되었다. 실록은 정치, 경제, 문화의 분야별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데 디자인을 가장 잘 나타내어 주는 “장신구”를 주제어로 하여 조사한 결과 145건의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 대체적으로 조선 전기에 장신구에 대한 기록이 많이 발견되고 있고 세종, 연산군, 고종시기에 대부분의 기록이 집중되어 있다. 또한 장신구에 나타난 디자인에 관한 논의는 국가적 차원의 철저히 사치의 배격과 검소한 기풍의 진작에 맞추어져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조선 시대 장신구에 대한 문헌을 하나하나 고찰하며 다음과 같은 분류를 하였다. 특히 문헌이 다음의 분류에 해당되면 1 이라는 숫자를 주어 더미변수와 로짓 분석의 편의를 위한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었다.

실록에서의 기록이 1)왕/왕실, 2)명나라에 대한 사대, 3)사대부, 4) 중인/천민에 대한 것인지를 먼저 분류하였다. 그리고 장식을 함에 있어서 5)사치에 대한 합리성에 어긋난다는 억압(repression)인지, 6)실제로 처벌을 받았는지, 7)화려한 것에 대한 개인의 욕망을 반영했는지, 8) 장신구도 유교적 예절에 입각한 억압이었는지를 조사하였다. 그 분류 기준은 왕의 사치를 언급할 때는 구체적으로 왕을 지칭하는 표현이 나오기에 분류의 어려움은 없었고 왕비, 세자, 왕실에 대한 내용을 하나의 범주로 묶었다. 명나라 관련하여서는 주로 명나라 사신이 와 있을 때의 이야기와 중국 황제에게 보내는 물품에 대한 이야기가 여기에 해당되었다. 사대부는 주로 양반 계층의 사치에 대한 언급을 기준으로 분류하였고 기타 사람들은 중인/양민/천민 카테고리에 포함하였다. 많은 경우에 양반과 일반 백성에게 동시에 사치를 경계하는 내용이 있었는데 이때는 동시에 체크되었다. 다음으로 “사치에 대한 질책”의 항목은 사치가 낭비이고 비합리적이라는 내용을 포함하였고 “유교적 예(禮)”의 표현이라는 것은 신분제 사회 조선의 사회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다. 사치풍조를 개탄하고 걱정하는 것과 실제로 처벌을 받았다는 것을 또한 구별하였고 처벌을 받은 경우는 마지막에 회귀분석을 시도하였다. 먼저 왕대 별로 어떻게 장신구 디자인과 관련 기록이 남아 있는지를 내용상의 카테고리와 신분으로 나누어 Table 1Table 2에 정리해 보았다.

frequency of categories in the decorative designs

frequency according to the social statussource: Chosǒn Wangjo Silok

다음은 왕대 별 분포에 이어 임진왜란 이후를 후기로 분류하여 조선 전기와 후기를 비교해 보았다. 조선 전기에 비해 후기에 개인의 욕망이 더 억제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조선 전기에 유행했던 가채도 후기에는 금지되었다. 그 결과가 Table 3에 제시되어 있는데, chi-square 분석결과 전기와 후기와의 차이가 p < 0.1에서 유의함이 나타났다.

individual desires in the design consumption1% 수준에서 유의: chi2(1) = 10.7828 Pr = 0.001

디자인도 예절의 차원에서 고려되어 있고 신분을 넘어선 화려한 물건은 처벌의 대상이다. 처벌을 함에 있어 왕과 신하 사이의 의견대립과 논리적 토론이 있었다. 이에 사치한 행위에 대해서 윤리적 논쟁결과를 바탕으로 분석 정리하여 보았으나, 결과는 유의하지 않았다.

ethics and luxury consumptionPearson chi2(1) = 2.1676 Pr = 0.141

세조 이후 연산군, 중종 시기까지 조선 전기에는 사치를 금지하는 논의가 많으나 후기에 가면 디자인에 대한 언급의 빈도 자체가 눈에 띠게 줄어들어 임진 병자 양란 이후의 어려움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에 사치해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규범의 국가적 억압에 대한 증거를 찾아 분석하였고 그 결과는 Table 5에 정리되어 있다. 여기서도 볼 수 있듯이 조선 후기에 사치해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규범은 더 엄격히 강조되었음이 p < 0.1에서 유의하였다.

luxury as irrational behavior10% 수준에서 유의: Pearson chi2(1) = 3.2708 Pr = 0.071

또한 신분에 따라 실록에 언급된 횟수는 Table 6에 정리되어 있다. 왕실과 양반은 통계적으로 유의한 차이가 없으나 중인과 평민에 대한 언급은 많아졌다. 상인 계층은 아무리 재력이 있더라도 집의 크기에서 단청 같은 장식에 이르기까지 규제되었기 때문에 양반계층을 모방하는 소비행위의 유혹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정조 시기 서얼 출신이 등용되고 중인인 역관의 재력이 커지는 현상이 있었다. 후기에는 양반 계층의 숫자가 확대되면서 국가는 개인의 소비에 더 통제를 가하려는 노력이 있었던 것으로 관찰된다.

records based on the social status

조선에서는 사치함을 윤리적 차원을 넘어서 처벌하기도 했는데, 중신의 첩이 머리 장식한 것까지 처벌하느냐 마느냐 논란이 된다는 것이 조선시대의 분위기였다. 이 분석결과를 Table 7에 제시한다. 실록의 케이스는 왕이 판단을 내리기를, 처벌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대신들을 오히려 달래고 있다. 이 기록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통상적으로 처벌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유추할 수 있다는 점이다. 여인네 머리 장식한 것까지 국가적 규제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흥미롭다. 과도한 처벌이 문제가 되기도 한다. 비단옷 한번 잘못 입어서 집안 전체가 지방으로 추방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조(正祖)를 통한 문헌조사에서 나타나듯이 처벌의 효과가 거의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상할 수 있듯이 사치한 행위를 처벌하는 것은 다음과 같이 전기와 후기의 차이가 없었고 통계적으로 유의하지 않았다.

luxury and punishment

마지막으로 사치가 신분제 사회에서 윤리적으로 옳으냐, 자원의 효율적 이용이라는 측면에서 합리적이냐 라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사치행위를 처벌할 때 그 근거를 찾는다는 측면에서 조선의 통치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프레임을 실록의 기록을 검토하면서 들여다 볼 수 있었다. 특히 조선 시대에 사치와 과소비로 인한 처벌은 어떤 요인에 의해 결정되었는가에 대해 회귀분석을 실행하였다. 구체적으로 처벌(punish) 변수를 종속변수로 하고 사건이 기록된 달을 통제 변수로 하여 사치억제, 신분제 예(禮), 양반 계층을 독립변수로 하여 logit 분석을 실행하였다. 음력으로 기록이 되어 있어 윤달이 발생하는데 이도 별개로 처리하였다. 그 결과가 표 8에 제시되어 있는데, 여기서 보듯 “윤리” 변수는 유의하지 않으나 “사치억압” 변수는 모두 1% 수준에서 유의한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즉 처벌이 이루어진 것은 윤리적인 이유 보다는 조선시대 자원의 낭비를 막겠다는 합리성에 기반하였다. interactive variable로 양반계층에서 사치했을 경우를 의미하는 “사치억압*양반” 변수를 도입하였다. 그 결과 “사치억압” 변수의 유의성은 사라지지만 “사치억압*양반” 계수 값이 크게 증가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는 양반계층의 사치에 더 처벌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사회지도층의 문제를 더 엄격하게 처벌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결과라고 생각한다. 한국 언론에서 “사회지도층 비리와 망국의 사치열풍”이런 기사를 쏟아내는 것은 조선시대 삼사(三司)가 했던 기능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logit analysis of punishment


4. 결론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조선은 유교 성리학 이념에 따라 국가가 개인을 억압하는 사회이다. 또한 엄격한 신분제 사회를 통해 개인의 욕망이 표현될 기회가 거의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록을 통해 조사한 결과 조선인들의 마음에도 과소비에 대한 욕망이 사회적 요구와 충돌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비록 그 영향력이 조선 후기로 가며 격감하기는 하였으나, 국가가 이를 끊임없이 통제하려 했던 노력들이 보인다. 조선의 과도한 사치 억제정책이 당시의 장인들에게 영향을 주고 디자인의 방향을 일방적으로 단순 소박미에 한정하게 만든 것은 아닌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한국 문화에서 강조되는 검소를 존중하고 사치하고 화려한 것을 배격하는 전통은 현대에 있어서도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국가가 개인의 소비 방식을 통제하는 전통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이 논문의 결과는 조선은 신분제에 근거한 윤리적 강요보다는 검소해야 한다는 유교적 덕목에 의한 합리성이 디자인과 그 소비에 있어서 더 강조되고 있었다는 것을 밝힌다. 특히 양반계층의 검소(儉素)함을 더 강조하고 있고 사치(奢侈)를 금지하고 나아가서 처벌한다는 점이 주자학 이념이 지배하는 유교(儒敎) 이상국가(理想國家) 조선의 특색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심플하고 소박한 조선 디자인의 특성으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는데 고려 시기의 화려하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문화가 억제된 것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현대 한국인들의 미의식과 디자인 감각은 이러한 양면성이 동시에 나타나는 복잡성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에서 디자인 연구자들이 “전통적 미학의 현대화”라는 주장을 하고는 있지만 “거대 담론의 단계”를 넘어서 현장에서 어떻게 이 원리가 적용되어 현실화할 것 인지에 대해서는 이론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있다.(이옥분, 조현신(2011)) 이 논문은 디자인에 대한 한국인의 심층에 어떠한 사고가 깔려 있는가를 사료를 통해 구체적으로 들여다봄으로써 “전통적 미학에 대한 집단 무의식”을 조사해 보는 기초적 연구에 기여하고자 한다. 우리가 아는 한국미라는 것도 조선왕조에 의하여 우리에게 강요된 것은 아닌지 역사적 관점에서 디자인을 바라보는 후속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Acknowledgments

This work was supported by the IT R&D program of MKE/KEIT. [10039161, Development of core technologies for high-physicality control interfaces and personalized intelligent user interfaces based on Smart TV user experience]

Notes

Citation: Cho, E. (2014). State intervention on individuals’ design consumptions in the Chosǒn Dynasty. Archives of Design Research, 27 (1), 199-217

This is an Open Access article distributed under the terms of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Non-Commercial License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3.0/), which permits unrestricted educational and non-commercial use, provided the original work is properly c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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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1

Figure 1
Individuals’ desires vs state’s intervention in the design consumptions of the Chosǒn dynasty

Table 1

frequency of categories in the decorative designs

시호 개인욕망 비윤리 비합리성 처벌 기타이유 Total
太宗 1 0 5 0 2 8
世宗 4 5 4 8 2 23
端宗 0 0 0 2 0 2
世祖 1 12 2 4 2 21
睿宗 0 0 0 1 0 1
成宗 3 1 1 3 0 8
燕山 12 3 2 7 1 25
中宗 1 4 7 0 2 14
宣祖 0 0 0 1 0 1
光海 0 1 2 0 0 3
仁祖 0 2 1 0 0 3
顯宗 0 0 1 0 0 1
肅宗 0 0 0 2 0 2
英祖 0 0 2 3 0 5
正祖 0 0 3 2 0 5
純祖 0 1 0 0 0 1
高宗 1 14 3 3 1 22
Total 23 43 33 36 10 145

Table 2

frequency according to the social statussource: Chosǒn Wangjo Silok

시호 왕_왕실 양반 중인_평민 기타 Total
太宗 6 1 0 1 8
世宗 7 5 8 3 23
端宗 0 2 0 0 2
世祖 7 12 2 0 21
睿宗 0 0 1 0 1
成宗 2 4 2 0 8
燕山 12 8 4 1 25
中宗 8 5 1 0 14
宣祖 0 0 1 0 1
光海 1 0 1 1 3
仁祖 3 0 0 0 3
顯宗 1 0 0 0 1
肅宗 0 1 1 0 2
英祖 2 3 0 0 5
正祖 1 0 4 0 5
純祖 0 1 0 0 1

Table 3

individual desires in the design consumption1% 수준에서 유의: chi2(1) = 10.7828 Pr = 0.001

시대 개인욕망 억압 Total
전기 30 72 102
29.41% 70.59% 100%
후기 2 41 43
4.65% 95.35% 100%
Total 32 113 145
22.07% 77.93% 100%

Table 4

ethics and luxury consumptionPearson chi2(1) = 2.1676 Pr = 0.141

시대 비윤리성 상관없다 Total
전기 41 61 102
40.2% 59.8% 100.0%
후기 23 20 43
53.5% 46.5% 100.0%
Total 64 81 145
44.14% 55.86% 100%

Table 5

luxury as irrational behavior10% 수준에서 유의: Pearson chi2(1) = 3.2708 Pr = 0.071

시대 비합리성 아니다 Total
전기 38 64 102
37.25% 62.75% 100%
후기 23 20 43
53.49% 46.51% 100%
Total 61 84 145
42.07% 57.93% 100%

Table 6

records based on the social status

양반 중인/평민
기록 없음 기록 기록 없음 기록 기록 없음 기록
전기 48 54 56 46 84 18
후기 25 18 21 22 28 15

Table 7

luxury and punishment

시대 처벌 안함 처벌 Total
전기 77 25 102
75.49% 24.51% 100%
후기 32 11 43
74.42% 25.58% 100%
Total 109 36 145
75.17% 24.83% 100%

Table 8

logit analysis of punishment

(1) (2) (3)
변수 처벌 처벌 처벌
통제변수 (월 별 더미) 유의 유의 유의
 
사치억압 2.21*** 2.48*** 0.38
(0.524) (0.609) (0.787)
윤리 -0.05 -0.56 -0.52
(0.528) (0.581) (0.629)
양반 2.29*** 0.03
(0.619) (0.853)
사치억압*양반 4.03***
(1.237)
상수 -1.84*** -2.84*** -1.26
(0.707) (0.824) (0.795)
Observations 136 136 136
pseudo R2 0.20 0.31 0.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