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70년대 문우식 관광포스터의 특징과 배경
초록
연구배경 문우식(1932~2010)은 미술을 전공하고 1950, 60년대에 화가로 활동하다 1960년대 중반에 디자인 활동을 시작해 1966년부터 1979년까지 홍익대학교 도안과 교수를 역임했다. 미술가이자 디자이너로서 이중정체성을 가진 그는 디자인 분야가 제도적 틀을 갖추고 전문화되면서 잊혔다가 최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된 ≪모던 데자인: 생활, 산업, 외교하는 미술로≫ 전(2022.11.23.~2023.03.26.)을 통해 재조명되었다. 본 연구에서는 관광포스터를 중심으로 그동안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문우식의 생애와 디자인 활동을 고찰하고자 한다.
연구방법 문우식의 차녀 문소연과 인터뷰하고 가족 소장품을 살펴보았다. 또한 홍대 재직 시절 제자인 백금남과의 인터뷰도 진행했다. 문우식의 유작전인 ≪문우식: 그리움의 기억≫ 전과 ≪모던 데자인: 생활, 산업, 외교하는 미술로≫ 전, 그리고 산미협회 회원전의 전시 도록들을 참고하였고 신문 및 잡지 기사와 영상물 등을 조사했다. 본 연구에서 중점으로 다룬 시기는 문우식이 산미협회 회원전에 처음 포스터를 출품했던 1964년부터 홍대 교수직을 사임한 1979년까지 약 15년간이다.
연구결과 미술가로 주목받던 문우식이 디자이너이자 디자인 교육자로 변모한 데에는 1960년대 중반의 사회 분위기와 디자인계 상황이 영향을 미쳤다. 그의 작업 중 관광포스터가 많은 것은 당시 관광산업 진흥이 주요한 국가 정책이었기 때문이었다. 문우식은 수채화 물감을 사용해 포스터를 그렸고 자연환경과 함께 자신의 취미 활동 및 현대적 라이프스타일과 관련된 소재를 자주 등장시켰다. 소묘력과 표현력이 바탕이 된 그의 포스터는 조형성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얻었다. 하지만 그래픽 디자인 분야가 발전하면서 이미지 표현보다 메시지 전달이 중심이 되고 사진, 실크스크린, 인쇄 등 새로운 매체 활용이 중요해지면서 그의 작업은 점차 잊혀 갔다.
결론 그래픽 디자인이 응용미술에서 현대 디자인으로 발전하던 전환기에 활동한 문우식은 일제강점기에 디자인을 공부한 초창기 원로 세대와 1970년대 이후 새롭게 주류로 부상한 젊은 디자이너 세대 사이에서 중간적 위치에 있었다. 이에 문우식에 대한 연구는 20세기 중반의 미술과 디자인의 관계 변화를 파악하고 한국디자인사를 보다 연속성 있고 포괄적인 맥락에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Abstract
Background Moon Woosik (1932-2010) majored in fine art and worked as a painter in the 1950s and 1960s before starting design activities in the mid-1960s. He was also a design educator teaching graphic design at Hongik University from 1966 to 1979. As the field of design became institutionalized and specialized, Moon Woosik, who had a dual identity as an artist and designer, was forgotten. Then, his work was recently introduced through ‘Modern Design: The Art of Life, Industry and Diplomacy’ exhibition (2022.11.23.~2023.03.26.) held at the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This study aims to examine Moon Woosik's life and design activities that have not been well known, focusing on his tourism posters.
Methods Moon Soyon, the second daughter of Moon Woosik, was interviewed and the family collection was reviewed. Also, an interview was conducted with Baik Kumnam, who was a student of Moon Woosik when he worked at Hongik University. Catalogs of Exhibitions such as ‘Moon Woosik: Memories of Longing’, ‘Modern Design: The Art of Life, Industry and Diplomacy’ and ‘The Korean Industrial Artist Association Member Exhibitions’ were referenced. In addition, various newspaper and magazine articles and videos related to Moon Woosik were investigated. The period focused on in this study is about 15 years from 1964, when Moon Woosik first exhibited his poster at The Korean Industrial Artist Association Member Exhibition, to 1979, when he left Hongik University.
Results The social and cultural atmosphere of the mid-1960s and the situation in the field of design influenced Moon Woosik, who was a painter, to become a designer and design educator. At the time, tourism was a popular theme among designers as the government implemented a policy to promote the tourism industry. Moon Woosik used watercolor paints for posters, and he enjoyed using objects related to hobbies and leisure activities that reflect the modern lifestyle against a natural landscape background. His posters were praised for their delicate drawing skills and expressive power. Then, as message communication became more important than image expression in graphic design, and new media such as photography, silk screen, and printing were used, his manual work was gradually forgotten.
Conclusions At a time when graphic design was developing from applied art to modern design, Moon Woosik was in an intermediate position between the older generation who studied design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and the younger designer generation who emerged as the mainstream after the 1970s. A study on Moon Woosik will be helpful in examining the changes in the relationship between art and design in the mid-20th century and understanding Korean design history in a more continuous and comprehensive context.
Keywords:
Moon Woosik, Poster, Graphic Design, Korean Design History, 문우식, 포스터, 그래픽 디자인, 한국디자인사1. 서론
1. 1. 연구 배경 및 목적
문우식(1932~2010)은 화가이자 디자이너이며 디자인 교육자다. 그는 1950년대 중반에 촉망받는 20대 젊은 서양화가로 두각을 나타내었고 1960, 70년대에는 디자인 분야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미술계와 디자인계 양쪽에서 점차 잊혔다. 미술계는 그의 디자인 활동 때문에, 디자인계는 그가 화가 출신이라는 이유로 주목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미술가이자 디자이너로서 문우식의 이중정체성과 중간자적인 성격은 개인의 특성이자 그래픽 디자인 발전 과정에서 나타나는 미술과 디자인의 과도기적 단계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포스터의 아버지’로 불리는 쥘 세레(Jules Cheret, 1836~1932)나 알폰스 무하(Alphons Mucha, 1860~1939),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Henri de Toulouse-Lautrec, 1864~1901)도 화가이자 디자이너였다. 국내 사례로는 일제강점기에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미술과 디자인 영역을 오가며 활동했던 한홍택(1916~1994)을 꼽을 수 있다. 한홍택의 작품 세계는 최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개최된 ≪모던 데자인: 생활, 산업, 외교하는 미술로≫ 전(2022.11.23.~2023.03.26.)을 통해 재조명되었다. 이 전시회의 제3부 「정체성과 주체성: 미술가와 디자이너」는 한홍택을 디자인 분야가 제도화되기 이전에 미술과 디자인 사이에서 두 가지 정체성을 가지고 활동했던 대표적 인물로 평가하면서 문우식도 함께 소개했다. 제4부 「관광과 여가: 비일상의 공간으로」에서도 문우식의 관광포스터가 전시되었으나 일부 작품만 다루어 아쉬움을 남겼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그동안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문우식의 생애와 디자인 작품 및 활동을 살펴봄으로써 초창기 한국 그래픽 디자인 전개 과정 속 그의 역할과 작품의 특징, 시대적 배경과 디자인사적 의미 등을 고찰하고자 한다. 주요 연구 문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주목받는 화가였던 문우식이 디자인 활동을 하게 된 계기와 상황을 고찰하는 것이다. 둘째는 관광포스터를 중심으로 문우식 디자인의 특징 및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는 것이다. 셋째는 대한산업미술가협회(약칭 산미협회)에서 활동하고 홍익대학교 교수를 역임한 그가 지난 수십 년간 디자인계에서 잊힌 이유를 파악해보는 것이다. 1970년대 들어 디자인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커지고 산업적 수요가 늘면서 디자인계는 독자성과 차별성을 확보하며 전문성을 심화시켜 나갔다. 이러한 과정에서 미술가이자 디자이너라는 이중정체성을 가지고 활동했던 디자이너들은 단절과 극복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한국 디자인의 변천 과정을 보다 연속적이고 포괄적인 차원에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작품과 활동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문우식에 대한 고찰은 한국디자인사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키고 디자인 인식과 실천의 폭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1. 2. 연구 방법 및 범위
문우식의 생애 중 본 연구에서 중점적으로 살펴본 시기는 그가 산미협회 회원전에 포스터를 처음 출품했던 1964년부터 홍익대학교 교수직을 사임한 1979년까지 약 15년간이다. 본 연구는 유작전인 ≪문우식: 그리움의 기억≫ 전(2018)을 기획하고 이후 관련 자료를 계속 조사하고 수집해온 문우식의 차녀 문소연과의 인터뷰로부터 시작됐다. 이후 유족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을 살펴보았고, 그가 참여했던 산미협회 관련 자료들과 신문 및 잡지 기사와 삽화도 조사했다. 문우식의 홍익대학교 재직 시절 제자로 대학 졸업 후 도안과 조교를 역임하고 산미협회 활동도 함께 한 백금남과의 인터뷰는 디자이너이자 디자인 교육자로서 문우식의 면모와 그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또한 ≪모던 데자인: 생활, 산업, 외교하는 미술로≫ 전에 소개된 한홍택, 이완석, 권영휴, 김관현 등 산미협회 초창기 회원들의 작품과 전시 도록, 그리고 이 전시회를 기획한 이현주 학예연구사가 조사한 관련 영상물 및 시각문화 자료를 살펴봄으로써 문우식이 활동하던 당시 디자인계 상황을 파악하고자 했다.
2. 문우식의 생애와 디자인 활동
2 .1. 문우식의 생애
1932년 충청남도 천안에서 태어난 문우식은 황해도 해주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해방 후 서울에 왔다. 1948년에 남관미술연구소 1기생으로 미술을 시작한 그는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에 피난지였던 부산에서 홍익대학교 미술학부에 입학해 1956년에 서울에서 졸업했다. 문우식은 재학시절 김환기, 박고석, 정규, 한묵 등으로부터 서양화 교육을 받았고 이대원, 이중섭과도 교류했다. 그의 생애는 크게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는데 첫째는 대학 재학 시절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서양화가로 활발히 활동했던 시기이며, 둘째는 산미협회 회원전에 포스터를 출품하고 홍익대학교 도안과 교수로 부임해 디자인 작업과 디자인 교육에 매진했던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말까지의 시기이다. 셋째는 교수직 사임 후 2010년 작고할 때까지다.
대학 3학년 때인 1954년에 문우식은 ≪제1회 홍익미술전≫에서 학부장상을, ≪제6회 대한미술협회전≫에서 협회장상을, ≪6.25 4주년 기념전≫에서 장려상을, 그리고 ≪제3회 대한민국미술전(약칭 국전)≫에서 입선해 주목을 받았다. 1956년 대학 졸업 후 김영환, 김충선, 박서보와 함께 ≪4인전≫을 개최했다. 1957년에는 ≪현대미술가협회 창립전≫에 참여하고, 조선일보사 주최 ≪제1회 현대작가초대미술전≫에도 참여해 이후 제6회 때까지 출품했다. 같은 해 ≪자유미술초대전람회≫에도 참여했다. 1958년에는 미국 뉴욕 월드하우스 갤러리에서 열린 ≪한국현대미술전≫에 출품하고 ≪아시아반공미술전≫에서 공보실장상을 수상했다. 1961년에 일본 도쿄에서 개최된 ≪국제자유미술전≫에 참여했는데 이 무렵 주한 미군을 대상으로 발간되던 군사 전문 일간지인 『성조지(星條紙, The Stars and Stripes)』에서 일한 것이 계기가 되어 미국 시카고공과대학 현대조형미술연구원에서 판화를 수학하기도 했다. 1962년에는 신상회1) 창립회원으로 참여했으며, 이세득과 함께 명동 국립극장 개관 기념 벽화 작업도 진행했다. 문우식은 1964년에 개최된 제14회 산미협회 회원전에 처음 포스터를 출품하면서 전시 포스터도 맡아 디자이너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하는 한편 1965년 4월에 발족한 일요화가회2) 지도교수로도 활동했다. 1966년 9월에 홍익대학교 도안과 교수로 부임한 후 1970년에 개최된 전국대학미술전3)을 추진한 공로로 1971년에 국민훈장 석류장을 받았다. 1979년에 홍익대학교를 떠나 1980년대에는 디자인 실무 작업을 하다가 1990년대에 수채화 작업으로 다시 미술계 활동을 재개해 1996년과 1997년에 개인전을 열었다. 1998년과 1999년에는 공주대학교에서 강의했고, 2002년부터 2006년까지 ≪대한민국수채화작가협회전≫에 출품했으며 2010년에 향년 79세로 별세했다. 이후 유족들에 의해 2018년에 홍익대학교 현대미술관에서 유작전인 ≪문우식: 그리움의 기억≫ 전이 개최되었다.
2. 2. 문우식의 디자인 활동
조선산업미술가협회라는 이름으로 1945년에 창립돼 정부 수립 후 대한산업미술가협회로 명칭을 변경한 산미협회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디자인 단체다. 발족 당시 창립회원으로 권영휴, 엄도만, 유윤상, 이병현, 이완석, 조능식, 조병덕, 홍남극, 홍순문, 한홍택 등이 참여했다. 문우식이 산미협회에서 활동하게 된 것은 신상회가 주관한 ≪신상전≫이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1963년에 개최된 제2회 때 회화부와 조각부 외에 디자인부가 추가되어 산미협회 회원이던 권영휴, 조병덕, 한홍택이 참여해4) 당시 ≪신상전≫의 로고, 리플릿, 현수막, 포스터 등을 디자인한 문우식과 친분을 쌓게 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산미협회 자료를 살펴보면 1964년부터 1969년까지, 그리고 1972년부터 1976년까지 문우식이 포스터를 출품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자료 유실로 1970년의 출품 여부는 확인이 어려운 상태이고 1971년에는 출품하지 않았다. 문우식의 디자인 활동에서 중심이 되는 시기는 산미협회에 포스터를 출품하던 때지만 디자인에 대한 그의 관심은 훨씬 이른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학 재학 중 홍익대학교 교표를 디자인한 그는 1957년에 개최된 ≪제1회 현대작가초대미술전≫의 행사 포스터를 디자인했다.
1962년부터 1968년까지 ≪신상전≫ 관련 디자인 작업을 총괄 담당한 문우식은 1967년에는 ≪민족기록화전≫ 포스터와 홍익산악회 로고를 디자인을 했으며, 그해 개최된 제48회 전국체육대회 개회식 카드섹션 도안을 담당했다.5) 또한 반도화랑을 운영하던 이대원과 함께 『영빈관 실내장식디자인』6) 매뉴얼도 제작했다. 1970년에는 한국 방문 귀빈 선물용 대한민국 금화 디자인을 위해 일본 오사카를 방문했고, 1974년에는 한국등산학교와 남해화학의 로고를 디자인했다.
문우식은 삽화가로도 꾸준히 활동했다. 그는 1956년에 녹양사에서 발간한 김지향의 시집 『병실』의 책 표지를 디자인했고 서울대학교 문리대 문학회에서 발간한 『문학』 지 창간호에 삽화를 실었다. 1958년 5월 16일 자 조선일보 「안테나 광장」에 글과 그림을 게재하고 같은 해에 『신태양』 잡지 표지화와 『늙은 수부의 노래』 책 표지를 디자인했다. 또한 문림사에서 출판한 『에반제린』 단행본의 책 표지를 맡았다. 1959년에는 『The Korean Republic』7)에 삽화를 그렸다. 『성조지(星條紙, The Stars and Stripes)』 편집을 담당하면서 1961년에는 『자유문학』 잡지 표지 작업도 진행했다. 1963년에는 을유문화사에서 발간한 세계아동문학독본 시리즈 중 『인도 아동문학독본』의 일러스트레이션을 담당했다. 1965년에는 홍익대학교 교지인 『홍익』 지에 글과 삽화 및 차례컷을 남겼고, 청구출판사의 『보고듣는 동요집』도 디자인했다. 1967년에는 『현대문학』 지에 삽화를 게재하고 이후 수차례 잡지 표지와 삽화를 담당했다. 1970년에는 『안병원 동요 50곡집』 책 표지를 디자인하고, 1975년에 현암사에서 출간한 『인간의 소리』 책 표지를 디자인하는 등 그는 1970년대까지 여러 신문 및 잡지, 그리고 단행본의 표지와 삽화 작업을 이어나갔다. 또한 가구와 실내장식 등 다양한 디자인 영역에서 활동했다.8) 이와 함께 대한산업미술가협회 이사 및 심사위원, 한국디자인실험작가협회 고문, 조선일보 조일광고대상 심사위원, 경주보문관광단지 한국관광센터 상임 실행위원, 대한민국 체신부 우표 심의위원 등을 역임했다.
3. 문우식 관광포스터의 특징과 배경
3. 1. 문우식 관광포스터의 전개와 특징
문우식 디자인의 특징이 잘 나타난 것은 산미협회 회원전에 출품한 관광포스터 작품들이다. ≪고도경주전≫(1947)이나 ≪남해의 조선전≫(1948)처럼 관광이라는 주제는 산미협회에서 초창기부터 관심을 가져온 주제였다. 1962년에 협회 회원들이 제주도로부터 공식 초청을 받아 단체로 스케치 여행을 다녀온 후 열린 제13회 회원전은 ≪제주관광전≫(1963)으로 개최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강원도 초청으로 이루어진 제14회 회원전은 ≪강원도관광전≫(1964)으로 열렸다. 이 전시회 때 처음 참여한 문우식은 이완석, 조능식, 한홍택 등과 함께 강원도를 시찰한 소감을 스케치와 글로 남기고 개인 출품 포스터뿐 아니라 회원전 포스터도 디자인했다. 현재 예화랑에서 소장하고 있는 문우식의 <강원의 설악산>(1964) 포스터는 이 시기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Lee, 2022).
포스터는 그래픽 디자이너들이 디자인 감각과 조형성, 창의적 콘셉트와 아이디어를 교류하는 전시회에서 자주 활용해온 매체다. 사회적으로 홍보 수단이 다양하지 못했던 1960, 70년대에는 선전과 광고를 할 수 있는 수단으로 포스터가 특히 각광을 받았다. 하지만 제작 여건상 사진이나 인쇄를 쉽게 이용하기 어려워 이 시기에 디자이너들은 주로 손으로 직접 포스터를 그렸다. 그래서 소묘력과 표현력이 중요할 수밖에 없었는데 문우식은 회화 작업을 통해 쌓은 예술적 기량을 포스터 작업에서 한껏 발휘했다.
1960~70년대 문우식 관광포스터의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문우식은 포스터 소재로 설악산, 대관령, 동해안 등 강원도의 산과 바다를 즐겨 그렸다. 젊은 시절부터 등산과 스키 등 산악 스포츠를 좋아했던 그는 이러한 취미 활동을 반영해 등산 모자, 배낭, 신발, 스웨터 등 자신의 취향을 반영한 소지품을 포스터에 자주 등장시켰다. 문우식은 1960년대에 대한스키협회 엠블럼을 디자인하고 1971년까지 협회가 주최하는 스키대회 진행요원으로도 활동했는데 1980년대까지 사용된 그의 엠블럼은 인기가 많아 관계자들이 배지를 즐겨 착용했다고 한다. 또한 그는 1974년에 개교한 등산학교에도 강사로 참여하며 학교 휘장을 디자인했다. 1960년대 관광포스터에는 자연환경과 더불어 전통문화 관련 소재가 자주 다루어졌다. 한홍택이나 이완석 등 산미협회 초창기 회원들도 전통 소재를 활용한 경우가 많았는데, 이들과 달리 문우식은 자연환경을 다루면서도 전통 소재보다는 개인적 관심사가 반영된 현대적 일상문화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백금남(Baik, 2018)에 의하면 그는 포스터에서 이미지 표현만이 아니라 스토리텔링 역시 중시해 자신만의 이야깃거리를 담고자 했다고 한다.
둘째, 재료와 기법 측면에서 문우식은 1960년대에는 수채물감을 주로 사용하다가 1970년대 들어 포스터칼라를 함께 사용했다. 그는 수채화 기법에서 나오는 시각적 투명성을 활용해 다양한 소재들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질감을 풍부하게 표현하는 독특한 색면 처리 방식을 고안해 그만의 고유한 포스터 스타일을 구현했다. 이러한 조형적 특징은 그가 회화 작품에서 이미 사용했던 방식이기도 했다. 회화 작품과 포스터는 서로 장르가 다르고 매체 성격에도 차이가 있지만 수채물감으로 포스터를 그렸던 문우식에게는 미술과 디자인이 분야의 경계를 넘어 하나의 시각적 세계로 연결돼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점은 화가 출신인 그의 강점이자 동시에 시대적 한계이기도 했다.
문우식은 1965년에 <서울> 포스터를 발표한 후 1966년에는 <인천항> 포스터와 <부산> 포스터를 제작했다. 이 중 수채물감과 유화물감을 함께 사용한 <부산> 포스터는 표현 방식에서 회화 작품과의 연관성이 두드러진 작품이다. 그는 바다의 수면은 수채물감 특유의 투명한 느낌을 살려 표현하고 배는 유화물감으로 두텁고 불투명하게 그려 전체적으로 화면의 질감을 풍부하게 하면서 시각적 대비 효과가 크게 구성했다. <서울>을 주제로 한 포스터에서는 서울 강북의 산 능선과 한강을 배경으로 북악스카이웨이, 팔각정, 워커힐의 힐탑과 더글라스하우스 등 당시 서울의 주요 관광 명소를 전차, 관광버스, 자동차, 배 등의 교통수단과 함께 표현해 1960년대 중반 서울의 모습을 흥미롭게 보여주었다(Lee, 2022). <인천항> 포스터는 엮인 굴비를 클로즈업해 강조하고 바다에 떠 있는 배들과 인천 부두 근처 공장 모습을 섬세하게 배경에 그려 넣어 인천항의 풍경을 특징적으로 잘 담아내었다.
셋째, 문우식의 뚜렷한 개성과 강한 주관성은 화면 구성과 작업 방식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여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도 포스터의 주목도를 높이기 위해 주요 소재와 대상을 클로즈업해서 강조함으로써 시각적 균형과 조화를 추구했다. 백금남(Baik, 2018)은 문우식이 포스터 화면에서 전체와 부분 사이에 일관된 법칙을 정한 뒤 입체적 거리를 두면서 평면적 시각 효과를 극대화하는 방법을 구사했다고 평가하였다. 타이포그래피 측면에서도 그는 고딕체나 명조체 등의 일반적인 서체를 사용하는 대신에 포스터 이미지에 어울리는 개성적인 레터링 작업을 시도했다. 포스터 규격도 국전지 크기를 자주 사용했는데 이는 당시 디자이너들이 일본의 영향을 받아 B1 크기를 선호했던 것과는 다른 선택이었다. 또한 그는 포스터 화판을 제작할 때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합판이 아니라 동양화를 표구하듯이 창살 모양의 틀을 직접 짠 후 얇은 종이를 여러 번 겹쳐서 배접하는 방식을 활용했다.
문우식의 고유한 디자인 스타일이 잘 드러난 시기는 수채물감으로 작업했던 1960년대로, 포스터칼라를 사용하기 시작한 1970년대에는 오히려 작품의 수도 줄고 그만의 개성도 약해졌는데 현재로서는 그 이유를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 유족이 소장하고 있는 문우식의 관광포스터는 <강원의 설악산>(1964), <대관령 스키장>(1964), <백령의 초대>(1965), <서울>(1965), <부산>(1966), <인천항>(1966), <산장>(1967), <대관령>(1968), <강원산장>(1969), <설가>(1969), <강원도>(1971), <설악산과 동해>(1976) 등이다. 이 중 스키장 홍보용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1964년의 <대관령 스키장> 포스터만 오프셋 인쇄되었고 다른 작품들은 모두 손으로 그려졌다.
3. 2. 문우식 관광포스터의 배경과 의미
문우식의 포스터 작품 중 관광을 주제로 한 작품이 많은 이유는 1960년대에 관광산업 진흥이 외화 확보를 위한 국가 주요 정책으로 부각되면서 디자인계 안팎에서 지역 홍보 포스터에 대한 관심이 높았기 때문이다. 제주도와 강원도가 산미협회 회원들을 초청했던 것도 이러한 사회 분위기와 관련이 있었다. 정부는 1961년에 관광사업진흥법을 제정하고 그해를 ‘한국방문의 해’로 지정해 비자 발급을 간소화하고 외국인 관광객 유치에 힘을 쏟았다. 1963년에는 현대적 개념의 호텔인 워커힐이 개관했다. 1967년에 공원법이 공포되고 지리산이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1968년에는 관광 진흥을 위한 종합시책이 발표되었다. 이후 조선호텔이 신축되고 반도호텔 자리에 롯데호텔이 들어섰으며 부산, 대구, 온양 등 전국 각 지방에 관광호텔이 늘어나 숙박 시설이 확충됐다. 관광버스, 열차, 여객선 등 교통편도 개선되어 1970년대 들어 관광과 여행이 중심이 되는 여가문화가 대중적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문우식의 차녀 문소연은 아버지 문우식이 주목받던 화가의 길을 접고 디자이너이자 디자인 교육자로서의 길을 가기로 한 것은 일종의 시대적 소명의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이 시기는 아직 실무 현장에서 디자인 비즈니스가 본격적으로 활성화되기 전이었지만 사회적으로 점차 디자인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디자인 진흥 정책이 구체화되던 시기였다.
문우식이 홍익대학교 도안과 교수로 부임해 디자인 교육자가 된 데에는 대학 시절 은사인 김환기의 영향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48년부터 1950년까지 서울대학교 예술학부 교수였던 김환기는 문우식이 대학에 입학한 해인 1952년에 홍익대학교 교수로 부임했다. 김환기는 서울대학교 재직 시절에 화가인 유영국이 응용미술과에서 구성 수업을 하도록 미대학장이었던 장발에게 추천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 자신도 책 장정 및 삽화 작업을 했다. 물론 이보다 더 구체적인 계기는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산미협회 회원들과의 교류를 통해 만들어졌는데 무엇보다도 한홍택과의 만남이 큰 영향을 미쳤다. 평소 디자인 작업에서 회화력을 강조했던 한홍택으로서는 뛰어난 조형 감각과 섬세한 표현력을 지닌 문우식에게 자연스럽게 호감이 생겼으리라 생각된다.
한홍택이 홍익대학교 교수로 부임한 것은 1959년인데 이후 1963년에 공예과 내에 도안 전공이 신설되었고, 1965년에는 공예과와 도안과가 분리되는 등 학과 구성에 변화가 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1966년에 문우식이, 그리고 이듬해인 1967년에 박선의가 연달아 부임했는데 이것은 서울대학교 응용미술과 교수진 구성의 확대를 의식한 것이었다. 홍익대학교보다 앞서 1946년에 도안과로 출발한 서울대학교 응용미술과에서는 1965년 12월에 상업디자인 분야를 전담할 교수로 본교 졸업생인 김교만과 조영제 두 사람을 나란히 임용했다. 이것은 당시 디자인계 안팎의 변화에 선제적이고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은 1968년에 회화과와 조소과에서 입학 정원을 각각 5명씩 감축시켜 응용미술과 입학 정원을 기존 20명에서 30명으로 증원시키기도 했다(Kang, 2021). 홍익대학교에서도 교수 충원이 시급했는데 당시 디자인계에서 활동하는 졸업생 수가 많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미술과 출신이지만 디자인 경험을 가진 문우식이 신설된 도안과에 처음 부임한 교수로서 이전 공예과 시절에 부임한 한홍택과 함께 학생들을 지도하게 되었다.
문우식이 산미협회 활동을 시작한 시기는 협회 회원 구성에서 세대교체가 한창 진행되던 때였다. 1945년 창립 때 참여했던 초창기 회원들은 1960년대 중반 무렵 대부분 활동을 중단해 한홍택이 대표로 협회를 이끌어가게 되었다. 1965년에 시작된 공모전은 후속 세대 디자이너가 산미협회에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는데 이 공모전을 통해 새롭게 부상한 젊은 디자이너 대다수가 홍익대학교 출신이었다. 1979년에 한홍택이 산미협회 대표직에서 물러나면서 문우식이 아니라 박선의가 후임 대표가 된 것은 문우식이 미술과 출신이라는 점이 한계로 작용한 결과로 보인다. 당시 도안과 교수진에는 문우식과 박선의 외에 권명광과 최동신이 있었다. 문우식이나 박선의와 달리 권명광과 최동신은 주로 한국시각디자인협회(KSVD)를 기반으로 활동했다. 1973년에 부임한 권명광은 1965년부터 1971년까지 산미협회 회원전에 참여하다가, 1972년에 서울대학교 응용미술과 교수 및 졸업생이 주축이 되어 한국그래픽디자인협회(KSGD, KSVD의 전신)가 만들어지자 창립회원으로 참여했다. 1975년에 부임한 최동신은 서울대학교 응용미술과 출신으로 학과 교수진을 다양한 대학 출신으로 충원하도록 하는 정부 교육정책이 시행됨에 따라 임용된 경우였다. 최동신은 디자인 실무 현장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았지만 산미협회에서 활동한 경력은 갖고 있지 않았다.
1965년 9월 11일부터 17일까지 신문회관 화랑에서 제1회 공모전 전시회를 개최한 후 한홍택은 정부와 문화 관련 기관 및 단체(문교부장관, 국회문사분위, 예술원 등)에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이하 국전)에 디자인부를 신설해달라는 건의서를 제출했다. 1965년 10월 11일자 『경향신문』 5면에 실린 기사에 따르면 이 건의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었다: “20세기 후반기의 디자인은 현대생활과 밀접한 연관성을 맺는 목적미술로서 크고 뚜렷한 각광을 받고 있다.” “매년 각 미술대학의 도안과나 응용미술과 혹은 생활미술과 지망 학생들의 수가 타 미술 부문에 비해 월등하다는 점은 디자인에 대한 일반 관심이 그만큼 깊어지고 있다는 산 증좌라 아니할 수 없다.” “따라서 국전에 디자인부가 독립된 하나의 장르로 설치되어 ‘디자인한국’을 과시할 날을 바라며 선처와 용단을 건의한다.” 1966년에 대한민국상공미술전람회(이하 상공미전)가 출범하게 된 데에는 디자인 진흥의 필요성에 대한 정부 차원에서의 정책적 판단과 함께 디자인계에서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인데9) 산미협회 대표간사였던 한홍택의 건의 역시 영향을 미쳤다.
상공부는 제1회 상공미전 개최를 앞두고 이순석, 한홍택, 박대순, 민철홍, 권길중 등 5명으로 집행위원회를 구성하고 제1부 상업미술, 제2부 공예미술, 제3부 공업미술 분야의 초대작가를 선출해 발표했다. 이 중 제1부 상업미술 초대작가로는 김교만, 김명호, 김수석, 김홍련, 봉상균, 염인택, 이명구, 조병덕, 조영제, 한홍택이 선정되었다.10) 이러한 결정에는 이순석을 대신해 한홍택과 논의했던 조영제의 의견이 강하게 반영됐다. 한홍택은 산미협회 회원인 조병덕, 이완석, 김관현, 문우식 등을 추천했는데 조영제는 이들이 대부분 미술가로 활동해왔다는 점을 지적하며 자신이 생각하는 추천 기준을 제시했다. 첫째는 가급적이면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사람일 것, 둘째는 디자인 개발 실적과 근무 경력을 가진 사람들 중 자타가 인정할 만한 인물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Kang, 2005). 결국 한홍택이 추천한 인물 중 조병덕만 포함되고 문우식은 초대작가가 되지 못했다. 제2회 때에는 정부가 상공미전 전시작품 심사위원회 규정을 별도로 정해 미술계와 산업계에서 각 20명씩 위촉한 40명으로 심사위원회가 구성되었다.11) 제3회 때는 상공부가 추천작가 심사기준을 공고해 상공미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자와 상공미전에서 연속 3회 이상 특선한 자 및 상공미전에서 10회 이상 입선한 자 등에게 추천작가 자격을 부여하기로 했다.12) 제3회 상공미전은 운영 방식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연판장 소동과 출품거부성명 등이 이어져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치러졌다. 이 과정에서 심사위원직을 사퇴한 한홍택의 뜻에 따라 홍익대학교 출신 졸업생 및 재학생은 상공미전에 참여하지 않는 분위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군복무 중이던 권명광이 출품해 그해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대통령상 수상자에게 추천작가 자격이 부여되는 상공미전 규정에 따라 권명광은 제4회 때인 1969년에 추천작가가 되었고 공교롭게도 그해 한홍택이 교수직을 사임했다. 한홍택은 대학을 그만두는 이유를 명확히 밝히지 않았으나 제3회 상공미전 사태를 겪으며 대학 안팎에서 그의 권위가 손상된 것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1970년대 들어 상공미전이 사회적으로 점차 공식적인 디자이너 등용문으로 자리매김하게 되면서 문우식의 위치가 애매해졌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디자인을 공부한 이순석이나 한홍택의 경우처럼 디자인계 원로 자격으로 상공미전의 집행위원, 초대작가, 심사위원 등으로 활동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일찍이 젊은 나이에 교수가 된 탓에 공모 형식인 상공미전에 작품을 출품해 홍익대학교 졸업생 및 재학생들과 경쟁하는 부담을 굳이 가질 필요가 없어 수상 경력으로 추천작가가 될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4. 결론
문우식은 미술가이자 디자이너로서 이중정체성을 가지고 응용미술로서의 디자인 작업을 했던 거의 마지막 세대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한국 현대미술 모색기에 그는 화가로서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하며 국내 전시뿐만 아니라 해외 전시에도 활발히 참여했다. 당대에 문우식은 독창적인 조형 언어와 탁월한 미적 감각을 보여준 다재다능한 인물(Lee, 2022)로 인정받았다. 그런 그가 디자인 분야에서 활동하게 된 것은 디자인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과 디자이너로서의 감각 및 표현력에 대한 자신감도 있었지만 이와 함께 모교에 대한 각별한 애정과 책임감도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대학 재학 중 홍익대학교 교표를 디자인하고 ≪제1회 홍익미술전≫에서 학부장상을 타는 등 교내 활동에서도 두각을 나타내 미대 교수진들로부터 주목을 받으며 가깝게 교류했다. 디자인에 대한 사회적인 수요가 커지면서 홍익대학교는 공예과 내에 도안 전공을 신설했으나(1963) 담당 교수는 한홍택뿐이라 새로운 교수진의 충원이 시급했다. 그 당시 디자인계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본교 출신 졸업생을 찾기 어려운 상황이었던 점을 고려할 때 문우식이 1964년에 산미협회 활동을 시작하고 도안 전공이 공예과에서 분리돼 도안과가 된(1965) 후 1966년에 도안과 교수로 부임하게 된 것은 우연의 일치만은 아니라고 짐작된다. 당시 미술계 일각에서 문우식의 선택을 미술을 포기한 일종의 자기희생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했다고 하는 문소연의 이야기는, 그가 학교 발전을 위해 신설된 도안과에 헌신하기로 했다는 의미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후 문우식은 화단에서 멀어져 그의 회화 작업은 현재 한국미술사에서 거의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
《모던 데자인: 생활, 산업, 외교하는 미술로》 전을 기획한 이현주(Lee, 2022) 학예연구사는 디자인 분야가 제도화되기 이전에 산업미술가라는 명칭으로 활동했던 디자이너들은 시대와 사회의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미술의 사회적 역할을 고민하며 디자인 영역을 개척해 나갔다고 평가하면서 미술과 디자인, 그 사이의 영역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이들의 작업을 시대적 맥락 속에서 재평가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보았다. 문우식이 디자인 활동을 시작한 1960년대 중반은 디자인 분야가 제도적 틀을 갖추기 시작한 시기였다. 그는 미술과 디자인 양쪽 분야에서 활동하던 초창기 원로 세대의 전통을 이어 나갔으나 1970년대 들어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디자이너 수가 늘어나고 이들이 적극적이고 독자적인 행보를 펼치면서 디자인계에서 문우식의 입지가 좁아졌다. 최성민(Choi, 2021)은 『리처드 홀리스, 화이트채플을 디자인하다』를 출간하며 번역 후기에서 디자인 분야 초창기 서구에서의 그래픽 디자인과 미술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래픽 디자인과 미술의 관계는 간단하지 않다. 반세기 전까지만 해도 전자는 후자의 기법이나 발상을 실생활에 적용하는 활동, 즉 ‘응용미술’로 여겨지곤 했다. 그래픽 디자인 분야의 직업적 정체성에는 순수 미술과 의식적으로 단절하고 하위 미술이라는 지위에서 벗어나려는 자의식이 여전히 강하게 작용한다. 그러나 미술이 현대 그래픽 디자인의 형성과 발전에 끼친 영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그래픽 디자인 산물(광고, 출판, 브랜드 등)이 현대미술에 끼친 영향 역시 마찬가지다. 초기 그래픽 디자이너 중에는 추상 미술가를 겸한 인물이 적지 않았다.
존 A. 워커는 『디자인의 역사』(1995)에서 한 분야의 “무의식”(인식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문제, 부재, 침묵 등)은 진술된 것보다 진술되지 않은 것에 주목하는 방법을 통해서도 드러난다고 했는데, 이러한 맥락에서 문우식이 그동안 디자인계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은 이유를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는 디자인이 미술과 과감하게 의식적으로 단절해 독립된 전문 분야가 되어야 한다는 인식을 강하게 가진 디자이너 후속 세대가 등장해 짧은 기간에 빠르게 주류로 부상했기 때문이었다. 둘째는 사진과 인쇄술이 발달하고 광고 및 매스미디어 시장이 활성화되면서 포스터를 비롯한 그래픽 디자인 영역 전반에서 회화성보다 콘셉트와 아이디어 등 메시지가 강조된 시각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해졌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우식의 1960, 70년대 작업은 해방 이후 응용미술로 인식되던 그래픽 디자인이 현대적인 시각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으로 변모하게 되는 중간 단계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특히 수채물감으로 그려진 그의 관광포스터는 미술과 디자인의 관계 변화와 디자인 도구 및 매체 발전의 궤적과 흔적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라 할 수 있다. 본 연구에서 문우식을 재조명하고자 한 것은 이처럼 그의 작업과 활동이 초창기 한국 그래픽 디자이너 생태계 형성의 구조와 특징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Glossary
1) 신상회는 박선호, 임완규, 유영국, 이대원, 이봉상, 임완규, 장욱진 등 16명의 작가들이 설립한 단체다. 1962년에 결성되어 1968년 제8회 때까지 회원전과 공모전을 열었다.
2) 일요화가회 회장은 이마동이었고 지도교수로는 문우식과 함께 김인승, 박상옥, 박석환, 박광진 등이 함께 활동했다.
3) 제1회 전국대학미술전은 1970년 9월에 국립현대 미술관에서 개최된 대학생 공모전으로 동양화, 서양화, 조소, 공예, 건축, 서예, 사진, 그래픽디자인 등 8개 부분이 운영되었다.
4) 제3회 ≪신상전≫에 조영제가 참여했고 이후 권명광, 박선의, 양규희, 윤병규, 정대길도 참여했다. 이대원. 「신상회 시절」, 『혜화동 50년』, 열화당, 1988 참조.
5) 카드섹션은 1970년 서울 개최 예정이던 제6회 아시아경기대회 개회식에 대비한 준비 작업의 일환이었다. 여고생 2천 명이 참여해 선수단이 입장할 때부터 개회식이 끝날 때까지 30여 가지 디자인을 선보였다. 『중앙일보』 1967년 9월 12일 자 참조.
6) 『영빈관 실내장식 디자인』은 총 세 권으로 이루어진 실내장식 및 가구 디자인 제안서로 문우식과 이대원은 한국적인 조형요소를 활용해 객실, 커튼, 조명 등의 디자인을 제안했다. 이현주, 「모던 데자인 : 생활, 산업, 외교하는 미술로」, 『모던 데자인 : 생활, 산업, 외교하는 미술로』, 국립현대미술관, 2022, 24~25쪽 참조.
7) 1953년 8월 15일에 창간된 『The Korean Republic』은 『The Korea Herald』의 전신이다.
8) 문소연은 『영빈관 실내장식디자인』 매뉴얼(1967)을 제작한 문우식이 명동 세시봉, 무교동 엠파이이어 비어홀, 워커힐 카지노, 정부종합청사 실내디자인, 타워호텔, 서소문 남강 한식당, 아미가호텔 근처 신송일식당, 압구정동 경복궁 한정식, 청남대 등의 작업에도 참여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으나 자료가 전해지지 않아 확인이 어렵다.
9) 1965년에 박대순은 상공부 공무원들과 만나 국전과 같은 성격의 전시회 개최와 이를 준비하기 위한 간담회를 제안했다. 간담회 추진 대표로 이순석이 추천됐고 이후 간담회에서 상공미전 개최가 논의됐다. 김종균, 『한국의 디자인』, 안그라픽스, 2013, 117쪽 참조.
10) 「한국상공미전 개최 7월 21일까지 작품공모」, 『경향신문』 1966년 5월 23일 자 5면 참조.
11) 「40명으로 구성 상공미전심위」, 『매일경제』 1967년 5월 9일 자 5면 참조.
12) 「3회 이상 특선자로 상공미술작품 추천」, 『매일경제』 1968년 7월 10일 자 3면 참조.
Acknowledgments
This work was supported by INHA UNIVERSITY Research Grant.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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