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Vol. 37, No. 2

물질문화 연구에서 나타난 사물의 행위능력과 매개 가능성
The Agency of Thing and Its Capacity for Mediation Emerged in Material Culture Studies
  • Jeong Hye Kim : Department of Design, Research Professor, Seoul National University of Science and Technology, Seoul, Korea
  • 김 정혜 :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 연구교수, 서울, 대한민국

연구배경 디자인사에서 생태론은 20세기 중·후반 서구의 일부 디자이너/이론가(버크민스터 풀러, 빅터 파파넥)들의 담론과 실천 이후 진전되지 못하고, 지속가능한 디자인 방법론에 집중되어 왔다. 본 연구는 20세기 말~21세기 초, 물질문화 연구가 현재 인간-사물의 상호관계성에 기반한 생태적 디자인 사고의 토대가 되는 새로운 ‘사물’ 개념의 출발점이라는 가정에서 시작되었다.

연구방법 21세기 전환기에 국내외에서 전개된 물질문화 중심의 디자인 연구에서 나타나는 사물에 대한 시각의 변화를 빌 브라운의 사물론(Thing Theory)과 함께 조명한다. 이 디자인 연구의 방향 전환이 한국에서 ‘일상’과 ‘키치’ 논의로 이어지는 양상을 재조명하고, 산업 논리와 분리된 사물 개념이 디자인 개념에 야기하는 변화를 사례를 통해 분석한다. 이는 사물 개념에 대한 인식론적인 분석에 기반한 디자인 연구 방법이다.

연구결과 21세기 전환기에 국내외에서 전개된 물질문화 중심의 디자인 연구에서 나타나는 사물에 대한 시각의 변화를 빌 브라운의 사물론(Thing Theory)과 함께 조명한다. 이 디자인 연구의 방향 전환이 한국에서 ‘일상’과 ‘키치’ 논의로 이어지는 양상을 재조명하고, 산업 논리와 분리된 사물 개념이 디자인 개념에 야기하는 변화를 사례를 통해 분석한다. 이는 사물 개념에 대한 인식론적인 분석에 기반한 디자인 연구 방법이다.

결론 디자인에 대한 물질문화 연구는 주로 문화 연구의 흐름을 형성했는데, 그 이면에는 사물을 상품 논리에서 분리된 독립 개체로 보는 시각의 전환이 있었다. 그로부터 사물 자체의 행위능력, 매개능력을 고찰할 수 있는 기반이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인간-사물, 인간-비인간 간의 수평적 관계성 속에서 물질 세계의 체계와 순환을 고찰하는 생태론으로 연결되는 단초가 된다.

Abstract, Translated

Background In design history, the ecological approaches of figures such as R. B. Fuller and V. Papanek in the mid-20th century were not further developed in subsequent discussions of sustainable design methodologies. This study arises from the observation that a new notion of ‘thing’ emerged in material culture studies in the late 20th and early 21st centuries, laying the foundation for ecological design rooted in the human-nonhuman relationship.

Methods This article combines conceptual analysis with case studies of design projects. First, it examines the evolving concept of ‘thing’ within studies of material culture and design at the turn of the 21st century, following Bill Brown’s Thing Theory. Second, it explores the implications of this perspective for the realms of ‘everyday’ and ‘kitsch’ in South Korea. Third, the article analyzes design projects to illustrate how the renewed notion of ‘thing,’ detached from the industrial system, has reshaped the understanding of design.

Results Material culture studies in design have shifted the concept of ‘thing’ from the industrial context to the everyday sphere. While engaging with cultural studies that focus on everyday lives of individuals, this perspective allows for the reclaiming of agency for thing itself, freeing it from the predetermined function imposed on by the industrial structure. This orientation resonates with Bill Brown’s Thing Theory which seeks to disentangle ‘thing’ from commodity. The discussion of ‘everyday’ and ‘kitsch’ in South Korea is also premised on the inherent power of ‘thing.’

Conclusions Within material culture studies on design, there has been a shift in the perspective of ‘thing’: from commodity to thing itself. This conceptual evolution lays the ground for considering the agency inherent in the thing and its capacity for mediation. The renewed notion of ‘thing’ provides the basis for considering its autonomous agency and mediating power. The renewed understanding is in line with ecological thinking, which perceives the material world as a cyclical system characterized by a paralleled relationship involving humans and things (nonhuman beings).

Keywords:
Thing, Material Culture, Thing Theory, Thing-Human Relationship, Ecological Discourse, 사물, 물질문화, 사물론, 인간-사물 관계성, 생태담론.
pISSN: 1226-8046
eISSN: 2288-2987
Publisher: 한국디자인학회Publisher: Korean Society of Design Science
Received: 30 Jan, 2024
Revised: 19 Mar, 2024
Accepted: 21 Apr, 2024
Printed: 31, May, 2024
Volume: 37 Issue: 2
Page: 403 ~ 413
DOI: https://doi.org/10.15187/adr.2024.05.37.2.403
Corresponding Author: Jeong Hye Kim (j.kim.13@ucl.ac.uk)
PDF Download:

Funding Information ▼
Citation: Kim, J. H. (2024). The Agency of Thing and Its Capacity for Mediation Emerged in Material Culture Studies. Archives of Design Research, 37(2), 403-413.

Copyright : This is an Open Access article distributed under the terms of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Non-Commercial License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3.0/), which permits unrestricted educational and non-commercial use, provided the original work is properly cited.

1. 서론

사물(thing)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 쉽지 않은 이유는 사물/물질 세계의 형성과 그에 관한 인식이 다분히 문화적으로 결정되어 왔기 때문이다. 주디 앳필드(Attfield, 2000)는 사물을 물질 세계의 총체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라고 정의하고, 잡동사니 인공물의 복합체(conglomerate clutter of artefacts)로서의 사물에 주목하면서, 이것을 가공되지 않은 순수한 ‘질료(matter)’의 뭉치가 아니라 인간의 정체성, 삶, 죽음이라는 근원적 의미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인간적인 것의 연합으로 이루어진 물질의 문화 - 문화적 총체로서의 물질 - 라고 본다. 이러한 시각은 디자인 결과물을 물질문화 측면에서 바라보는 근거를 이룬다.

물질문화 연구에서 두드러지는 특징 중에 하나는, 기획과 제조 과정에서 특정한 기능을 수행하기에 적합하도록 만들어진 사물, 즉 산업 경제 사회에서 요구되는 특정한 태도가 부여된 사물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예컨대, 산업 시스템에서 의자는 디자이너와 그 외 다른 관계자[요인]들이 부여하는 의도에 따라 형성되는 산업적, 경제적 차원을 포괄하는 사회문화적 산물로 인식된다. 이와 달리, 물질문화에서 사물은 디자인이 주로 행해지는 생산/제조 단계 이후, 즉 소비가 발생한 후에 비로소 일상의 의미망으로 들어가, 아르준 아파두라이(Appadurai, 1986)가 말하는 ‘가치의 체제(regimes of value)’를 통해 생명을 얻게 된다.

물질문화 연구는 ‘물질’과 ‘문화’ 중 어디에 방점을 두는가에 따라 연구 방법과 사고 체계에 미치는 영향에 차이가 발생하는데, 20세기 후반 이후 디자인과 관련된 물질문화 연구는 물질보다 문화에 무게를 두는 사회문화 연구가 주류를 형성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의 저변에, 사물을 한시적 취향이 더해진 거래 대상으로서의 상품이 아니라 실제 세계에 놓인 사물성(thingness) - 물질성(materiality)에 기반한 사물 자체의 고유성(authenticity) - 으로 보려는 관점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었다(Miller, 1987). 시각의 중심을 인간 문화에서 사물로 이동하면, 사물 자체의 내재적 행위성 혹은 행위능력을 상상할 수 있고, 궁극적으로 사물을 인간-비인간의 관계성 속에 존재하는 개체로 이해할 수 있다. 사물을 산업적 맥락의 상품 경제에서 문화적 맥락으로 이동시킨 물질문화적 접근이 사물의 물질성과 내재적 존재 가치를 이끌어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그러한 이동의 과정에서 사물의 매개적 행위능력이 나타난 지점을 포착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비인간 존재인 사물, 그리고 그것이 구성하는 인공 환경과 인간을 상호 관계성에 기반한 생태적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본 연구에서는 첫째, 물질문화 연구의 흐름속에서 사물에 대한 시각이 어떻게 변화했는지에 대해, 빌 브라운의 사물론(Thing Theory)과 함께 조명한다. 둘째, 일상과 연결된 한국의 키치 연구를 재조명하고, 그 안에 사물의 내재적 행위성이 전제되어 있음을 밝힌다. 그리고 사례를 통해 디자이너들이 인간-사물 간 상호 관계성(생태적 순환 관계)을 실험하면서 디자인과 디자이너의 역할을 재정의하는 시도를 분석한다.

사물-인간의 유기적 관계성을 탐구하는 배경에는 20세기 말 세계화를 통해 변화된 시공간 개념이 자리한다. 시공간의 압축에 대해 많은 학자들은 시간적 동시성이 강화되면서 공간이 지역 문화의 역사성과 특수성이 배제된, 즉 장소성이 사라지는 경향에 우려를 나타냈고, 이러한 시각은 도시사회학에서 비판적 논의의 축을 형성했다(Harvey, 1989; Frampton, 1983). 한편, 공시성이 강화된 여건에서는 선적인 역사가 아닌, 동시적이고 감각적인 경험에 대한 논의를 시작할 수 있다. 이 시대 사물과 물질의 본질에 대한 이해 또한 동시성이 강화된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이는 전 지구적으로 흐르는 물질 - 대기, 해류, 국제 무역 선박, 항공, 유통 상품, 쓰레기에 이르는 자연 물질과 인공 물질 포괄 - 이 상호 영향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양상을 실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조건이다.

동시적 시간 개념은 사물을 사물 자체로 바라볼 수 있는 요건을 형성한다. 1970년대 후반, 인류학자 메리 더글러스와 배런 이셔우드(Douglas & Isherwood, 1978)는 대량소비사회의 인류학에서 ‘민족지학적 현재(ethnographic present)’라는 개념을 제기하는데, 이는 과거, 현재, 미래 사이의 문화적 연결성을 공시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토대이며 모든 시간을 현재로 집중시키는 시제이다. 이 존재론적 시간 개념은 사물 환경이 개별적으로 경험되는 방식, 그것이 타 영역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 변형되고 새로운 의미 체계를 구축하는 방식을 파악하는 데 효과적이다. 20세기 후반 본격화된 일상(사적 영역)의 사물에 관한 탐구는 이렇게 변화된 시간성 - 강화된 공시성 - 맥락에서 이루어진다.

2. 상품에서 사물로
2. 1. 물질문화 연구와 ‘사물’: 사물의 삶은 소비 이후에 시작된다

20세기 말~21세기 초 후기자본주 상품 경제의 정점을 지나면서 디자인 내외부에서는 산업 구조 바깥에서 디자인 결과물, 즉 인공물을 바라보는 사회문화적·인류학적 고찰이 이루어지고, 인간, 사물, 환경에 대한 다학제적인 접근이 본격화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특히 고고인류학 분야를 중심으로 나타났는데, 고고학자 이언 호더로 대표되는 케임브리지 학파와 인류학자 대니얼 밀러로 대표되는 UCL 학파가 이 흐름을 이끌었다(Hodder, 1982; Miller, 1987), 한편으로는 20세기 후반부터 부상한 소비 사회에 관한 상징 연구(기호학 기반)가 21세기에도 문화 비평의 형태로 이어졌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일반 대중의 ‘일상(everyday)’을 중심으로 하는 물질문화 연구를 통해 사물이 사적 영역에서 형성하는 비결정적 기능과 가치에 대한 논의가 다른 줄기를 형성했다.

1980년대를 지나면서 디자인 연구는 디자인 수행 과정([원자재 가공] -생산/제작-소비-[폐기/재사용])과 관련된 사회문화적 측면 전반을 포괄하는 방향으로 전환되고 있었다. 이 때 영향을 준 이론가로 페니 스파크(Penny Sparke), 에이드리언 포티(Adrian Forty), 주디 앳필드(Judy Attfield)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의 연구는 21세기 전환기에 크게 부상한 물질문화 연구와 맞물리면서 사물의 사회문화적 가치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로 확장되었다. 20세기 후반, 사물과 물질을 통해 사회문화를 통찰하려는 시도는 타 분야(인류학, 문학 등)에서 동시에 나타나는데, 세계화 현상을 중심으로 현대인의 삶을 탐구해 온 인류학자 아르준 아파두라이는 『사물의 사회적 삶: 문화적 시각에서 본 상품 The Social Life of Things: Commodities in Cultural Perspective』(1986)에서 상품 자체를 경제적 가치뿐만 아니라 정치경제적 가치 체제의 일부라는 입장을 표명했다.

20세기 말, 일상의 사물을 대상으로 하는 물질문화에 대한 관심이 확장되면서, 그 연구 방법이 디자인을 해석하는 핵심적인 렌즈로 부상했다. 미디어 비평가이자 철학가인 빌렘 플루서는 『사물의 형태: 디자인 철학 The Shape of Things: A Philosophy of Design』(Flusser, 1999)에서, 일상에서 흔히 마주하는 사물들(바퀴, 용기, 카펫, 텐트 등)에 주목하며 예술, 과학, 기술, 건축, 고고학, 철학과 신학이 교차하는 상호 관계성을 강조하고 사물의 특정 형태와 디자인이 삶의 조건을 구성하는 힘과 그 가능성을 역설했다. 2000년 출간된 주디 앳필드의 『야생의 사물: 일상적 삶의 물질문화 Wild Things: The Material Culture of Everyday Life』는 20세기 말 전개된 이러한 디자인 연구의 다학제적 변화사를 정리하고 있다.

물질문화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봄으로써, 상품 시장에서 거래되는 가치의 문제에서 나아가, 사물을 매개로 창출되는 문화적 상징으로 초점이 이동하였고, 결과적으로 디자인 결과물을 시장 가치로 평가되는 상품의 틀 바깥으로 끌어내어 인간/비인간 삶의 환경을 구성하는 요소, 즉 문화적 구성물로 되돌리려는 시도로 이어졌다.

그러나 문화 연구는 상징체계와 ‘재현(representation)’ 이론에 기반하여, 사물 그 자체보다 그것이 상품 경제에서 기호로 작동하는 체계에 더욱 초점을 맞추면서, 디자인 결과물을 통해 형성되는 사회적 의미 - 예컨대, 여성의 이미지와 사회적 스테레오타입 형성 - 를 분석하는 데 집중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디자인의 실천적 행위나 결과물의 물질적 측면은 상대적으로 축소되고 모든 것이 시각적 이미지로 환원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요컨대, 기호학에 기초한 디자인 문화 연구는 사물에 대한 경험을 바탕으로 현상을 바라보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Hall, 1997; McRobbie, 1997).

그럼에도, 특히 일상을 중심으로 하는 물질문화적 접근은 일정 정도 사물의 존재 가치 즉 사물성과 물질성을 회복하면서 인간과 인공물의 관계를 부각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아울러 이러한 접근은 사물 자체의 본성에 대한 인식론적 변화로 연결된다. 즉, 사물의 본성을 질료의 물리적 속성 - 나무는 녹지 않는다, 철은 팽창·수축한다 - 이나 제작 과정에서 부여된 결정적 기능에 국한하지 않고, 일련의 제작 행위가 물리적으로 표명된 상태(physical manifestation of making)라고 보는 시각이다(Attfield, 2000: p. 41). 이에 따르면, ‘디자인에 의해’ 혹은 ‘디자인을 통해’ 사물에 발생하는 변화를 사물 자체의 행위능력(agency)이 발현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인식적 토대가 형성된다. 이런 의미에서, 물질문화적 사물 탐구는 사물이 제작, 소비/사용되는 ‘과정(process)’에 주목함으로써, 사물이 인간-비인간 관계 형성에서 어떻게 매개적 역할을 수행하는지에 주목하도록 이끌었다고 볼 수 있다.

2. 2. 사물의 행위능력: 사물의 삶은 기능을 상실할 때 시작된다

2001년, 영문학 비평 분야에서 빌 브라운(Bill Brown)의 논문 ‘사물론(Thing Theory)’이 발표되면서, 사물을 상품 가치와 사용 가치(기능성)로부터 떼어놓으려는 시도가 본격화되었다. 매튜 잔틴그(Jantingh, 2013: p. 625)에 따르면 사물론자들은 상품과 연관된 상징 체계 안에서 사물이 평면화되고 납작해진다고 진단하는데, 이는 사회문화적으로 부여되는 기호적 의미에 갇히는 상태를 의미하며, 이를 교정하기 위해 물질적 객체가 만들어내는 과도함, 불편함, 방해 요인 등, 다시 말해, 기능과 편의의 반대편에 주목한다.

특히 브라운은 근대 산업 사회에서 사물에 엄격하게 부여된 ‘코드(code)’로부터 사물 자체를 해방시키기 위해, 사물을 분류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사이의 중간 지대에 위치시켰다. 아무런 기능이나 사용과 무관한 상태에 놓는 과정이다. 그는, 사물이 정해진 기능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사용성을 상실하는 순간, 외적 요건에 의해 부여된 목적성에서 떨어져 나오면서 진정한 ‘사물성(thingness)’이 발현되기 시작한다고 보는 시각을 견지하면서, “드릴이 부러지고, 자동차가 멈추고, 창문이 더럽혀지는” 순간, 다시 말해, 생산, 분배, 소비, 전시와 같은 일련의 산업적 순환 체계의 흐름이 멈추는 순간이 되어서야 비로소 사물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시각은 사물이 특정한 사건에서 분리되고 변증법적 의미 생성 논리에서 벗어나야만 비로소 사물 자체(사물의 사회적 삶, 사물의 진화 등)를 볼 수 있다는 논리이다. 이처럼 ‘사물론’은 외부에서 의도적으로 부여한 사용 가치나 사회적·문화적 문맥을 초월함으로써 사물 안에 내재하는 사물성을 모색하는데, 이는 인간과 인공물(인공 환경)의 관계적 작용을 파악하기 위해 모든 행위 관계 요소들을 최대한 근원적인 상태로 되돌리려는 시도이다.

문학 비평에서 기원한 브라운의 사물론과 근원은 다르지만,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의 행위자-네트워크 이론(과학기술연구STS[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에서 출발)은 인간과 사물을 주체-객체의 위계를 벗어나 상호 관계적으로 위치시킨다는 점에서 둘 사이의 연관성을 고려해볼 수 있다. 그는 사물이 인간의 개입 없이 존재할 수 없다는 점과 아울러 인간을 고려한다는 것에는 반드시 사물에 대한 고려가 포함된다고 주장한다.

사물을 생각해보라. 그러면 인간이 존재하게 될 것이다. 인간을 생각해보라. 그러면 바로 그 행위에 의해, 사물에 관심을 갖게 될 것이다. 단단한 사물과 관계 맺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면, 그것이 곧 유연하고 부드러운 것, 즉 인간이 되는 것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인간에게 관심을 돌리면 이들이 곧 전기 회로나 자동 기어 장치, 소프트웨어가 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Latour, 2000: p. 20).

라투르는 미셸 세르(Michel Serres)의 말을 빌어, 무생물적 대상과 생물적 인간 주체의 분리는 근대성으로 야기된 인위적인 존재론적 구분일 뿐, 실제 세계에는 ‘준-객체(quasi-objects)’와 ‘준-주체(quasi-subjects)’로 가득하다고 강조한다(Latour, 1993: pp. 51-55). 이는 사물론과 매우 유사한 입장이다. 예컨대, 사물론에서 말하는 나의 컴퓨터는 단순히 나의 일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기능하는, 내가 소유한 장치가 아니다. 그것은 이미 나라는 주체와 나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한 부분으로, 주체와 객체의 중간지대 어딘가에 위치한다. 물질적 사물/객체가 지닌 이 같은 잠재적 힘은, 사물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여러 형태의 관계를 성공적으로 매개시키는 기제이며, 따라서 결국, 컴퓨터는 정의되지 않고 정의 내리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제 3의 것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

요컨대, 사물론에 따르면 사물은 물질화되거나 사용성을 외화한 것을 훨씬 넘어서는 것으로, 그 자체로 감각적인 존재의 힘을 보유하고 있다. 브라운은 사물에 내재한 바로 그 마술과 같은 힘으로 인해 사물의 가치, 페티시, 우상, 토템 같은 것들이 생겨난다고 보았다. 이에 따르면, ‘사물성’이란 아직 형상화되지 않은 ‘잠재태(latency)’로 존재하고, 인간/비인간과 맺는 관계에 따라 계속해서 변화하는 행위능력을 발현한다. 사물론은, 사물이 단 하나의 결정적 가치(기능)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사물로 표명함으로써, 인간/비인간-사물의 관계를 새롭게 볼 수 있는 가능성, 그리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주체-객체 관계성을 향한 길을 열어준다.

2. 3. 일상-키치 연구: 사물의 행위능력

사물성을 탐구하는 디자이너나 이론가들은 물건의 소비 이후 단계에 주목하는데, 소비 이후의 세계는 곧 일상의 영역으로 연결된다. 사전적 의미에서 ‘일상적인 것’은 평범하고(ordinary), 일반적이고(usual), 격식이 없고(비정형적 informal), 시시하고(banal), 대단치 않은(unremarkable) 것을 가리키는데, 디자인에 관한 물질문화 연구의 특징 중에 하나는, 사물을 디자인 프로세스를 거친 제품/상품에서 분리된 ‘일상적 사물’로 다룬다는 점이다.

전문 제작자의 손을 거친 디자인, 특히 근대 디자인의 반대편에 위치한 것으로 종종 키치를 언급하기도 하는데, 고급문화와 대비되는 것, 저급 취향을 뜻하는 키치와 일상적 사물을 반드시 동일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형식적인 면에서 키치는 과장된 규모나 색, 장식으로 외화되는 측면이 강하기 때문에, 기능에 충실하면서 절제된 단순미를 강조하는 근대 디자인과 분명히 구분된다. 그러나 비전문 디자이너가 일상의 조건에서 제작한 사물은 형식적인 면에서 키치적으로 나타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으며, 따라서 일상적인 것과 키치는 맥락에 따라 동일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디자이너들은 일상에 대한 탐구에서 흔히 키치라는 비-미학적(non-aesthetic) 사물에 관심을 보인다. 이때 키치는 대체로 아이러니컬한 형식미를 지닌 유희적 요소로 다루어지기 때문에, 과도한 추함이나 위협적인 이미지를 가지지 않으며 유해한 요소가 제거된 상태라야 쉽게 받아들여진다. 추함이 대중적으로 다가가기 위해서는 사물 자체의 야생성 - 근대 디자인에서 추구한 질서에서 벗어난, 기능이나 물질이 그대로 드러나는 날 것의 상태 - 을 담고 있어야 한다.

한국 디자인에서 일상에 대한 관심은 키치와의 관련성 속에서 논의된 점이 특징적이다. 일상의 미학이 곧 키치적인 것(형식 혹은 양식)으로 인식될 정도로 일상과 키치는 밀접한 관련성을 유지해나갔다. 이런 특징은 오창섭의 연구를 통해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그가 말하는 키치는 첫째, 사물을 상품 경제 구조에서 탈피시키고, 둘째, 사물과 인간에 관해 상호 관계성을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면서, 그 과정에서 사물을 일상의 문맥으로 되돌린다. 이 두 가지는 모두 21세기 전환기에 등장한 물질문화 이론이나 사물론과 마찬가지로 사물을 산업 구조에서 해방시키는 과정이다.

첫째, 상품 경제 논리와 사물의 분리는 근대 디자인의 도그마적 기능주의와 사용 가치에 대해 재고하면서, 근본적으로 사물을 생산-소비라인에서 끌어내어 일상이라는 사회 구조 안에 재위치시키는 과정이다. 오창섭(Oh, 2012: p. 100)에 따르면 “기능주의는 어떤 사물의 절대적이고 본질적인 기능을 찾아 나서는 것을 구체적인 디자인 행위의 미덕으로 이해”해 왔는데, 특히 여기에서 기능은 특정한 실제적 기능에 국한된다. 이에 맞서 저자는 인간이 사물과 실제적인 기능만으로 관계 맺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문화적 맥락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 가능한 상징적 의미 기능을 강조한다.

이러한 입장은 디자인을 전문 디자이너의 업무로 국한하지 않고 모든 사람을 잠재적 제작자이자 사용자로 확대하면서 ‘필요’, ‘제작’, ‘소재’, ‘도구’ 등을 포함한 제작 관련 정보의 민주적 공유 문제를 제고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현재 조건에서 가용한 소재와 도구를 사용하는 일상의 제작 활동은, 근대 대량 생산 체제에서 ‘일반적 다수’를 위해 고안된 - 이 점에서 근대 디자인이 나름의 민주화를 지향한 것을 부인할 수 없다 - 표준의 틀을 벗어남으로써, 조화에 기반한 미적 권위에 도전한다. 일상-디자인은 일반화된 목적과 체계화된 방법을 따르기 보다 기존에 존재하는 것, 지금 바로 가용한 것들을 재사용, 재배치, 재구축하여 상황에 대응하는 것을 지향한다. 이러한 제작 방식의 근저에는, 문화인류학을 비롯한 여러 인문학에서 적용해 온 브리콜라주(bricolage) 개념, 그리고 그와 유사한 맥락에서 특히 건축과 디자인 분야에 특정하여 발전된 애드호키즘(adhocism)이 자리한다(Louridas, 1999; Jencks & Silver, 2013).

둘째, 키치 논의는 사물과 인간의 관계에 관한 인식으로 연결된다. 디자인이 경제 논리에 종속되었던 생산 중심의 근대 디자인 구조에서는 일상의 주체가 물리적, 심리적으로 직접 개입하는 형태의 디자인 즉 키치 형식을 띠는 사물이 디자인 내부로 진입할 수 없이 배척되어 왔다. 키치는 바로 이 외곽의 의미를 되살림으로써 기존의 디자인 영역을 사용자의 일상으로 확장시키고 사물-인간의 관계를 생산-소비의 틀 바깥에서 상상할 수 있게 이끈다.

사용자 중심 디자인의 경우 일반적으로 사용자에 최대한의 주체적 권한이 부여된다고 여겨지지만, 오창섭은 이 때에도 사용자가 살아있는 존재, 창조적인 존재, 개별성을 지닌 존재인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그는 “[키치는] 모든 인공물과의 관계 방식 속에서 나타날 수 있는 것으로, 사물과 인간이 어떻게 관계하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유형”(Oh, 2012: p. 13)이라며, 근대 산업 구조 속 상품의 문제를 사물과 인간의 관계 문제로 전환한다. 이 때 논의의 문맥은 시장 경제에서 일상으로 이동하는데, 일상에서 모든 인공물은 생산 시점(혹은 디자인 과정)에서 부여된 의미와 관계없이 ‘나름의 의미’ - 언제든 또 다른 의미로 변환 가능한 의미 - 를 지니면서 사회경제적 위계를 떠나 수평적으로 위치한다. 무엇보다 오창섭은 인공적으로 고안된 사물이 인간의 경험을 구성하는 ‘매개’(Oh, 2012: p. 43) 역할을 한다고 보는데, 이것은 브라운의 사물론과 라투르의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에서 말하는 주체와 객체 사이의 흐린 경계, 양자가 상호적 교류 관계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논리와 연결된다.

요컨대, 키치 논의는, 일상의 문맥에서 사물이 결정적으로 부여된 기능이나 사용 가치에 갇히지 않고 맥락에 따른 변화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는, 사물에 행위능력이 내재함을 전제하는 것이고, 또한 모든 행위능력은 상호 관계적이고 매개적인 역할이 교차 개입하는 네트워크에서 작동한다는, 사물-인간에 대한 대안적 인식을 바탕으로 한다.

3. 사례분석: 사물의 행위와 매개

20세기 말~21세기 초, 디자이너들은 산업 생산 시스템의 바깥에서 인공물을 구축하는 다양한 시도를 통해 사물에 대한 대안적 시각을 보여주었다. 이들은 종종 폐기된 사물을 재활용하는 방식으로 접근하기 때문에 친환경 디자인 맥락에서 포괄적으로 언급되곤 한다. 그러나 본 논문에서는 이러한 맥락에 놓인 세 가지 디자인 사례를 통해, 개별 사물의 행위능력을 재배치(Gamper, 2006~2007; Bey, 1999)하고 인간과 비인간을 매개(Kim, 2009)하는 방식을 탐구함으로써 디자인을 재정의하려는 시도를 분석한다.


Figure 1 Martino Gamper, Sonnet Butterfly from ‘100 Chairs in 100 Days in Its 100 Ways,’ 16 August 2006.

마르티노 갬퍼(이탈리아 출신, 런던 기반)의 ‘100일 동안 100가지 방식으로 만드는 100개의 의자’ 프로젝트(Gamper, 2007)는 형식적인 면에서는 키치적 특성을 보여주는데, 제작 프로세스의 측면에서는 물질/사물(기능을 잃은 상태를 포함하기에 ‘물질’을 병기함)을 일상적 환경에서 수집하여 재배치하는 일종의 문화적 반응으로 볼 수 있고, 사용이 다한 물질/사물의 재활용이라는 측면에서 지속가능한 디자인의 관점에서 해석될 수도 있다. 폐 구조물을 재활용하는 이 디자인 프로젝트에서는, 조화로운 형식적 질서에 도전하는 데서 나아가, 사물 세계의 본질이 물질/사물의 잠재적 행위성과 각 개체들 사이의 상호적 매개 능력에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금, 현재, 일상-환경에서 가용한 물질/사물을 수집(발굴), 재배치하는 방식에 기초한 제작으로, 폐 의자의 부속이 재활용되기도 하고, 의자와 무관한 사물(자전거, 조명, 지팡이, 여성 드레스 등)이 결합되기도 한다. 디자이너가 고려하는 것은 존재하는 물질/사물이 의자의 기본 구성 요소인 다리, 좌대 혹은 추가 구조인 등받이나 팔걸이의 잠재성을 지니고 있는가이고, 디자이너의 역할은 그 물질/사물의 [상호 매개적] 행위 가능성이 발현될 수 있도록 객체와 객체를 연결하는 또 하나의 매개성으로 전환된다.

네덜란드 드로흐 디자인의 위르헨 베이가 1999년에 처음 선보인 ‘통나무 벤치’는 버려진 나무를 특별한 가공 프로세스를 거치지 않은 채 재사용하면서 디자이너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기했다. 이 디자인은, 나무가 쓰러지거나 버려져 가로로 놓인 상태에서는 그 위에 앉을 수 있는 행위 가능성(seatablity)이 발생한다는 사물의 행위 능력(사물의 형태와 구조에서 기원)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디자이너의 역할은 사물의 행위 가능성을 지각할 수 있는 인지적 매개 장치를 제안하는 것으로 전환된다. 이것은 사물에 이미 행위능력이 잠재한다고 보는 빌 브라운의 사물론뿐만 아니라, 1979년 제임스 J. 깁슨이 주장한 어포던스 - 환경 안에서 개인에게 가용한 행위 가능성으로, 그것은 그 가능성을 개인이 지각하는 것과는 무관하다(Gibson, 1979) -개념과도 닿아 있다.

이 프로젝트에서 주목할 또 다른 지점은 디자이너가 물질/사물의 사용가능성을 발현시키는 매개적 역할이다. 여기에서 디자이너의 주요 관심사는 원료 수급 환경-디자인 환경-사용 환경[-잠재적 폐기 혹은 재사용 환경]을 유기적 관계 속에서 바라보고 작동 인자들을 어떻게 에너지 효율적으로 연결하는가이다.


Figure 2 Jürgen Bey, ‘Tree-trunk Bench’ (Chatsworth House, Derbyshire, UK), First designed in 1999.

매개 작용은 디자인의 전 과정에 관여하는 모든 개체들 사이에서 상호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디자이너의 행위와 사물의 행위가 모두 매개적으로 작동한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디자이너는 물질/사물이 생성, 사용, 재사용되는 과정에서 작용하는 각 개체들의 매개적 행위에 주목하면서, 그 자신이 또 다른 매개체로 물질 성형 과정에 개입한다.

한편, 디자이너 김보섭은 ‘종이 뭉치 벤치’ (Kim, 2009)에서 물질/사물과 행위, 행위자들의 관계를 탐색한다. 이 가구는 사용이 끝난 종이를 사용자가 뭉쳐 특정 장소에 던져 넣는 행위에 의해 쌓인 고형의 결과물이다. 이때 디자이너는 종이 뭉치가 모여 벤치로 형성되는 일련의 과정에서 물질/사물, 디자이너, 사용자의 역할을 결정적으로 규정할 수 있을지, 반대로 역전이나 상호 개입이 가능한지에 대한 물음을 제기한다. 여기에서 디자이너의 역할은 환경 내 모든 요소들 예컨대, 종이, 종이를 뭉쳐 던지는 사람, 뭉친 종이가 담기는 틀, 틀이 놓일 수 있는 공간적 여건, 행정적 허가 등이 연결될 수 있는 장치를 구상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일상에서 디자인이 발생할 수 있는 연결 지점을 발견하거나 구성하고, 매개 가능성이 있는 요소들이 연결될 수 있는 탄력성 있는 - 또다른 변화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 장치를 놓는 일이다. 이러한 접근에는 이미 물질/사물에 잠재적 행위 가능성이 내재하고, 이를 둘러싼 환경에서 작동하는 힘들의 상호 관계성이 전제되어 있다. 디자이너는 “하나의 기능으로 소비되는 사물은 무기력하지만 일상적 사물의 다양한 잠재적 힘들이 교차[된다]”(Kim, 2009: p. 98)고 언급하는데, 이는 일상의 사물을 활용, 재활용하는 과정에서 작용하는 관계적 역학에 대한 고찰이고, 디자인 행위는 관련 행위들이 상호 매개적으로 작동하도록 배치, 재배치하는 과정으로 전환된다. 이때 디자이너-물질/사물-사용자의 역할은 뚜렷이 구분하기 어려운 흐린 중간 지대에서 끊임없이 교차된다.


Figure 3 Bosub Kim, ‘Paper Wad Bench,’ 2007.
4. 결론

디자인과 관련한 물질문화 연구는 대체로 물리적 사물을 통해 사람들의 행동 방식과 정체성 형성 과정, 문화에 관한 물리적 표명, 관계의 대상화(객체화) 과정을 탐구하는 데 집중해 왔다. 이것은 인간과 사물의 관계, 인간이 사물에 질서를 부여하거나 역으로 사물에 의해 인간 혹은 인간 사회가 질서를 갖게 되는 방식에 주목하는 것이다. 또한, 물질문화 연구는 일상의 맥락에서 사물과 사람(제작자와 사용자를 포함한 일반 대중)이 상호작용하는 데에 주목하기 위해 ‘소비 이후’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이 과정에 사물이 발생하기 이전(원자재 상태의 물질)이나 소멸 과정(폐기물)까지 포함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사물을 물질문화의 요소로 바라보는 시각의 전환이 이루어짐으로써, 주체와 객체에 대한 기존의 위계적 관계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모든 개체를 존재론적으로 고찰할 수 있는 토대가 형성되었다. 이는, 빌 브라운이 ‘사물론’에서 제기한 사물 자체에 잠재태로 내재하는 행위 가능성이나 제임스 J. 깁슨의 어포던스 개념과도 맥을 같이 한다.

이와 관련하여, ‘일상’은 사물의 행위능력이 발현되는 공간으로, 디자인 연구의 주요 콘텍스트가 되었고, 특히 한국 디자인 연구의 경우, 일상에서 발생하는 사물의 끊임없는 변화 가능성은 키치 개념을 중심으로 논의되었다. 다시 말해, 21세기를 전후하여 크게 부상한 키치-디자인 연구는 비단 산업 구조에서 일상 문화로 이동하는 문맥상의 전환에 그치지 않고, 그 사고의 전환 과정에서 사물의 잠재적 행위능력을 포착하고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주체-객체의 이분법적 위계에 도전하며, 인간-비인간(또는 인간-자연환경/인공환경)의 관계를 상호적이고 순환적인 시스템으로 바라볼 수 있는 근거를 찾을 수 있다. 한 단계 더 확장적으로 보면, 일상을 콘텍스트로 하는 사물, 그것이 지닌 행위능력의 발현과 변화 가능성에 대한 인식이 일어나면서 인간과 환경을 관계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생태적 인식의 기틀이 조성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20세기 말~21세기 초반, 디자이너들은 산업적 생산-소비 구조에서 벗어나, 일상의 문맥에서 물질/사물의 내재적 행위 가능성을 탐색하는 작업을 시도한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디자인 작업 중에는 이른바 키치적인 형식적 특징을 보이는 경우가 많은데, 그 이유는, 디자인 행위가 주어진 상황 - 변화무쌍한 일상 환경 - 에서 가용한 물질/사물을 재배치하는 데서 나타나는 즉흥성 때문이다. 아울러 여기에는 지속가능성에 대한 현대 디자이너의 윤리적 책임과 실천(물질/사물의 재사용)이 결합되어 있다. 갬퍼, 베이, 김보섭의 디자인은 메시지가 방점을 두는 지점에 차이가 있지만, 공통적으로 이들은 물질/사물이 내재하고 있는 행위능력을 전제하고, 디자인 실천을 물질/사물의 재배치를 통해 행위성을 매개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인간-사물, 인간-비인간의 관계를 평형적이고 순환적인 시스템으로 보는 토대를 형성한다는 데, 즉 생태적 이해에 기반한 디자인을 지향한다는 데 의의가 있다.

기후위기, 인류세, 포스트휴먼과 같이 인간-비인간의 관계에 관한 논의들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자연물과 인공물을 포괄하는 비인간, 그 가운데 인간의 삶의 환경(인공 환경)을 압도적으로 채우고 있는 사물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선행되어야 한다. 20세기 말~21세기 초, 디자인 및 관련 분야의 연구에서 사물을 그 자체의 개체로 보려는 시도가 있었다는 점은, 디자인 연구가 이후 다양하게 시도되는 생태 담론과 연결되는 지점을 보여준다.

Acknowledgments

이 논문은 2023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NRF-2023S1A5A8078028)

This work was supported by the Ministry of Education of the Republic of Korea and the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 (NRF-2023S1A5A8078028)

References
  1. 1 . Appadurai, A. (Ed.). (1988). The social life of things: Commodities in cultural perspectiv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 2 . Attfield, J. (2000). Wild Things: The Material Culture of Everyday Life. London: Bloomsbury. [https://doi.org/10.5040/9781350036048]
  3. 3 . Brown, B. (2001). Thing Theory. Critical Inquiry, 28(1), 1-22. [https://doi.org/10.1086/449030]
  4. 4 . Cambridge Dictionary ('Everyday'). Retrieved from https://dictionary.cambridge.org/dictionary/english/everyday.
  5. 5 . Douglas, M., & Isherwood, B. (1978). The World of Goods: Towards an Anthropology of Consumption. London: Allen Lane.
  6. 6 . Flusser, V. (1999). The Shape of Things: A Philosophy of Design. IL: University of Chicago Press.
  7. 7 . Frampton, K. (1983). Towards a Critical Regionalism: Six Points for an Architecture of Resistance. In H. Foster (Ed.), The Anti-Aesthetics (pp. 16-30). WA: Bay Press.
  8. 8 . Gamper, M. (2007). 100 Chairs in 100 Days and its 100 Ways. London: Dent-De-Leone.
  9. 9 . Garvey, P & Drazin, A. (2016). Design Dispersed: Design History, Design Practice and Anthropology. Journal of Design History, 29(1), 1-7. [https://doi.org/10.1093/jdh/epv054]
  10. 10 . Gibson, J. J. (1979). The Ecological Approach to Visual Perception (pp. 127-137). Boston: Houghton Mifflin.
  11. 11 . Hall, S. (Ed.), (1997). Representation: Cultural Representations and Signifying Practices. London and CA: Sage Publications & Open University.
  12. 12 . Harvey, D. (1989). The Condition of Postmodernity. Cambridge, MA and Oxford, UK: Wiley-Blackwell.
  13. 13 . Hodder, I. (1982). The Present Past: An Introduction to Anthropology for Archaeologists. Chicago: Chrysalis Books.
  14. 14 . Jencks, C., & Silver, N. (2013). Adhocism (Rev. ed.). Cambridge, MA: MIT Press.
  15. 15 . Kim. B. S. (2009). The Design Methodology of Everyday Life: Focusing on the Applications of Paper Wad [Master's thesis]. Seoul National University.
  16. 16 . Latour, B. (1993). We Have Never Been Modern, tr. Catherine Porter.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17. 17 . Latour, B. (2000). The Berlin Key, or How to Do Words with Things. In P. M. Graves-Brown (Ed.), Matter, Materiality and Modern Culture. New York: Routledge.
  18. 18 . Louridas, P. (1999). Design as Bricolage: anthropology meets design thinking. Design Studies, 20(6), 517-535. [https://doi.org/10.1016/S0142-694X(98)00044-1]
  19. 19 . McRobbie A. (Ed.), (1997). Back to Reality? Social Experience and Cultural Studies. Manchester and New York: Manchester University Press.
  20. 20 . Miller, D. (1987). The Humility of Objects. Material Culture and Mass Consumption (Ch. 6). Oxford: Blackwell.
  21. 21 . Oh. C. S. (1997). Design and Kitsch. Seoul: Tomato.
  22. 22 . Oh. C. S. (2012). Kitsch Around Me. Seoul: Hongsi Communication.
  23. 23 . Tree-trunk bench by Jurgen Bey. Retrieved January 10, 2024, from https://www.droog.com/projects/tree-trunk-bench-by-jurgen-bey/.
  24. 24 . Zantingh, M. (2013). Act Up: Thing Theory, Actor-Network Theory, and Toxic Discourse in Rita Wong's Poetry. Interdisciplinary Studies in Literature and Environment, 20(3), 622-646. [https://doi.org/10.1093/isle/ist0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