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MF 외환위기 이후 아파트 브랜드의 전개 과정과 그 맥락에 관한 연구
초록
연구배경 IMF 외환위기 이후 국내 건설사들은 아파트에 독자적 브랜드를 도입하며 주택을 차별화된 소비재이자 자산 상품으로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본 연구는 1998년 분양가 자율화 이후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전까지 10년 동안 전개된 아파트 브랜드의 도입과 경쟁 과정을 검토하고, 이를 가능하게 한 경제·사회·문화적 요인들을 고찰하고자 했다.
연구방법 본 연구는 문헌 연구를 중심으로 진행했다. 연구 대상 시기를 1998~1999년, 2000~2003년, 2004~2007년, 세 단계의 시기 구분을 바탕으로 각 시기별 제도 변화, 부동산 시장 동향, 건설사의 브랜드 전략, 브랜드의 사회문화적 의미 형성을 고찰하고, 이 일련의 과정을 배태한 주택의 금융상품화, 중산층의 계층 재편, 소비문화의 변동이라는 심층적 요인들을 종합적으로 분석한다.
연구결과 1998년 분양가 자율화 조치 이후 건설사들은 양적 공급 위주의 정체 상태에서 벗어나 ‘LG빌리지’, ‘타워팰리스’ 등 선행적 차별화 모델을 시장에 선보였다. 이후 강남 재건축 시장이 아파트 브랜드 서열을 결정짓는 핵심 무대로 부상하면서 ‘래미안’, ‘e-편한세상’, ‘자이’ 등의 통합 브랜드가 체계적으로 도입되었고, 200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선도·추격·기타 그룹으로 나뉘는 확고한 브랜드 위계가 고착화되었다. 이러한 위계 형성은 아파트가 미래의 자산 가치를 보증하는 금융상품으로 변모한 경제적 토대, 외환위기 이후 부상한 상위 중산층의 구별짓기 욕망, 그리고 건설사와 소비자의 복합적인 이해관계를 '브랜드'의 시각 언어로 번역해낸 디자인 전문회사들의 문화적 매개가 중층적으로 결합된 결과였다.
결론 1998년부터 2007년까지의 10년은 아파트 브랜드가 단순한 상품의 상표를 넘어 한국 사회의 주거 가치와 사회경제적 위계를 규정하는 강력하고 공고한 상징적 질서로 뿌리내린 역사적 전환기였다.
Abstract
Background Following the IMF Asian Financial Crisis, domestic construction companies began introducing independent brands to apartments, reconstructing housing into differentiated consumer goods and asset commodities. This study aims to examine the introduction and competition process of apartment brands that unfolded over the 10 years from the deregulation of pre-sale prices in 1998 to just before the Global Financial Crisis in 2008, and to investigate the economic, social, and cultural factors that made this possible.
Methods This study was conducted primarily through a literature review. Based on a three stage periodization(1998–1999, 2000–2003, and 2004–2007), it examines the institutional changes, real estate market trends, brand strategies of construction companies, and the formation of the socio-cultural meanings of brands in each period. Furthermore, it analyzes key drivers underlying these processes, including housing financialization, middle-class restructuring, and changes in consumer culture.
Results Following the deregulation of pre-sale prices in 1998, construction companies broke away from a stagnant state focused on quantitative supply and introduced pioneering differentiated models to the market, such as ‘LG Village’ and ‘Tower Palace’. As the Gangnam reconstruction market subsequently emerged as the core arena determining the hierarchy of apartment brands, integrated brands like ‘Raemian’, ‘e-Pyeonhansesang’, and ‘Xi’ were systematically introduced. By the mid-2000s, a firm brand hierarchy divided into leading, chasing, and other groups became entrenched. The formation of this hierarchy was confirmed to be the result of a multilayered combination: the economic foundation where apartments transformed into financial products guaranteeing future asset value; the desire for distinction among the upper-middle class that emerged after the financial crisis; and the cultural mediation of design professional firms that translated the complex interests of construction companies and consumers into the visual language of “brands”.
Conclusions The decade from 1998 to 2007 was a historical turning point during which apartment brands transcended mere product trademarks to become a powerful and solidified symbolic order defining residential values and socio-economic hierarchies in South Korean society.
Keywords:
Apartment Brands, Identity Design Firms, Financialization of Housing, Upper-Middle Class, 아파트 브랜드, 아이덴티티 디자인 전문회사, 주택의 금융상품화, 상위 중산층1. 서론
1. 1. 연구 배경
2026년 현재, 강변북로를 달리는 운전자의 눈앞에 한강 너머 강남의 아파트 단지들은 하나의 거대한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고층의 타워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솟아올라 수평선을 분할하고, 유리와 금속으로 마감된 외벽은 시간에 따라 상이한 빛을 반사하며 강 표면 위에 그 잔영을 드리운다. 한강과 나란히 이어지는 이 스카이라인은 반포에서 잠원, 압구정으로 이어지는 강남 재건축 벨트를 따라 끊임없이 갱신되고 있다. 이미 완공된 단지들 사이로는 타워크레인이 올라선 공사 현장이 끼어 있고, 그 너머 압구정에서는 최고 70층 규모의 재건축이 계획되어 있어, 이 스카이라인은 현재진행형의 도시 변환 과정을 그대로 가시화한다. 그리고 이미 완공된 각 동의 외벽에는 대형 건설사의 브랜드 로고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아크로리버파크, 래미안원베일리, 아크로리버뷰신반포, 디에이치반포라클라스 등, 재건축을 통해 하이엔드 브랜드 아파트로 거듭난 강남의 단지들이 한강을 배경으로 늘어선 이 경관은 시각적 위용의 차원을 넘어 특정한 사회적 의미 체계를 공간에 새겨 넣은 하나의 지형도다.
이 경관에서 아파트 브랜드는 실제로 해당 단지의 경제적 가치를 함축하는 가격표인 동시에, 거주자의 계층적 위치를 명시하는 표지판으로 기능한다. 저 타워들이 만들어내는 도시 경관은 이미 브랜드라는 언어가 깊숙이 개입된 상징적 질서의 산물이다. 그렇다면 한강변을 비롯해 브랜드에 의해 매개되고 조직된 서울의 아파트 경관은 역사적으로 어디에서 연원한 것일까? 본 연구는 이 질문에서 출발하여, IMF 외환위기 직후 ‘분양가 자율화’가 시행된 1998년부터 세계금융위기 직전인 2007년까지의 10년을 ‘아파트 브랜드 시대’가 시작된 시기로 규정하고, 이 기간 동안 진행된 브랜드 도입·확산·경쟁의 궤적과 이를 둘러싼 역사적 맥락을 고찰하고자 한다.
1. 2. 연구 대상과 방법
본 연구는 『월간 디자인』, 주요 일간지 기사, 관련 단행본과 논문 등 문헌 연구를 중심으로 진행하며 연구 대상과 방법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첫째, 아파트 브랜드화의 전개 과정을 정부의 부동산 정책과 건설사의 시장 전략과 연계해 설명한다. 이를 위해 연구 범위가 되는 시기를 크게 세 단계로 구분한다. 제1기는 1998~1999년으로 아파트 브랜드의 태동기, 제2기는 2000~2003년으로 아파트 브랜드의 도입기, 제3기는 2004~2007년으로 아파트 브랜드의 전면화 시기다. 이러한 구분은 가설적 차원에서 잠정적으로 설정한 것이며, 당시 서울 아파트 가격의 동향을 기준으로 삼았다.
제1기는 IMF 외환위기의 여파로 한국 경제 전반이 극심한 혼란을 겪은 시기다. 1998년 실질 GDP 성장률은 -5.5퍼센트로 하락했고 실업률은 8.7퍼센트로 급등했으며 원·달러 환율은 최고 1,900원대를 기록했다. 정부가 주택 시장 부양을 목적으로 1999년 분양가 자율화를 전면 시행하자, 건설업계는 이에 부응하며 ‘아파트 브랜드화’라는 새로운 시장 흐름을 창출했다. 제2기는 1999년 GDP 성장률이 10.7퍼센트로 반등하며 시작된 경기 회복 국면으로, 한국은행이 저금리 기조를 유지하는 가운데 가계부채가 빠르게 팽창하면서 부동산 시장에 유동성이 집중되었다. 강남 재건축 열풍과 함께 서울 아파트 가격은 2001년과 2002년 각각 전년 대비 19.3퍼센트와 30.8퍼센트를 기록하며 폭등했고 수도권 주요 단지의 분양가는 3.3㎡당 1,000만 원을 넘어섰다. 이 팽창 국면은 2003년 10·29 부동산 종합대책과 카드사태로 촉발된 내수 침체가 맞물리며 일시적인 조정으로 마무리되었다. 제3기인 2004~2007년은 연 4~5퍼센트대의 안정적 경제 성장이 이어지는 가운데 풍부한 시중 유동성이 강남·분당·용인·목동 등 이른바 ‘버블세븐’ 지역으로 집중되면서 2차 가격 급등이 전개된 시기이다. 서울 아파트 가격은 2006년 전년 대비 24.1퍼센트 상승하며 2002년 이후 최대 상승폭을 기록했고 강남권 주요 단지의 분양가는 3.3㎡당 2,000만 원을 상회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러한 흐름은 2007년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부터 시작된 2008년 세계금융위기의 충격을 계기로 위축 국면으로 진입했다. 실제로 2007~2009년 서울 아파트 가격 변동률은 각각 3.6퍼센트, 3.2퍼센트, 2.6퍼센트를 기록했다.
둘째, 위와 같은 세 시기의 전개 과정을 가능하게 한 경제·사회·문화적 요인을 분석한다. 본 연구는 부동산 시장의 변화와 주택의 금융상품화, 중산층의 재편과 상위 중산층의 부상, 문화적 매개자(cultural intermediary)1)로서의 디자인 전문회사의 실천 등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되, 아파트 브랜드가 이 요인들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면서 부동산 시장에 자리 잡으며 그 내외부의 변화를 이끌었는지 고찰한다.
2. 분양가 자율화 이후 아파트 브랜드의 시기별 전개
먼저 위에서 구분한 세 시기를 중심으로 아파트 브랜드화의 전개 과정을 살펴본다.
2. 1. 제1기(1998~1999년): 분양가 자율화 이후 아파트 브랜드의 태동기
1997년 11월 발생한 IMF 외환위기 직후, 국내 부동산 시장은 급격한 위축 국면에 진입했다. 시중 금리가 연 20~30퍼센트 수준으로 급등함에 따라 부채 의존도가 높았던 건설사들은 심각한 유동성 제약에 직면했다. 이는 신규 사업 추진 동력의 상실로 이어졌다. 1998년에 접어들면서 당시 서울 지역 아파트 가격이 단기간에 급락하는 현상이 빈번히 나타나면서, 부동산 시장의 불확실성은 더욱 심화되었다. 아파트 분양시장 역시 심각한 수요 침체가 계속되면서, 1998년 4월 말 기준 미분양 물량은 약 10만 2,000가구에 달했다. 시장 환경이 악화됨에 따라 상위 건설사 중 극소수만이 생존할 것이라는 부정적 전망이 확산되며 시장 내 위기감이 고조되었다(『동아일보』, 1998년 5월 21일).
한편, 정부는 경기 침체 타개 및 시장 정상화를 목적으로 1998년 2월 포괄적인 부동산 규제 완화책을 시행했다. 해당 대책은 분양가 자율화의 단계적 도입, 분양권 전매 제한 해제, 소형평형 의무건축 비율 폐지, 한시적 양도세 면제 등 공급 촉진과 수요 진작을 위한 세제 및 행정 지원을 망라했다. 이 중 향후 아파트 시장의 구조 변동을 야기할 핵심 조치는 분양가 자율화였다. 본래 1977년에 도입된 ‘분양가 상한제’는 시대 변화에 따라 채권 입찰제 도입, 원가 연동제 적용 등의 보완이 더해지긴 했지만, 20년 넘는 기간 동안 가격 상승 억제와 실수요자의 주거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국가 주도의 가격 통제 장치로 기능했다. 외환위기 이전인 1997년 6월 이미 비수도권 지역에 분양가 자율화가 도입되어 있었으나, 수도권은 여전히 규제 대상이었다. 그러나 건설업계의 경영난이 가중되자, 정부는 건설 경기 부양책의 일환으로 수도권 내 분양가 상한제를 단계적으로 폐지하고 나섰다. 분양가 자율화는 1998년 2월 수도권 민간 택지 아파트를 시작으로, 10월에는 수도권 공공택지 내 중대형 아파트로 확대되었으며, 1999년 1월에는 국민주택기금 지원 대상을 제외한 모든 주택 유형에 전면 적용되었다(『동아일보』, 1998년 1월 14일). 분양가 상한제 체제하에서 건설사들은 표준화된 형태의 아파트를 싼 가격에 대량 공급하는 데 집중할 뿐, 품질을 개선할 유인이 부족했다. 분양가 자율화는 바로 이러한 정체 국면을 반전시킬 계기로 주목받았다. 가격 규제에서 벗어나면 건설사들이 품질 기반의 차별화 전략을 추구하게 되고, 그 결과 시장의 경쟁 원리가 원가 절감·저단가 중심의 ‘양적 공급’에서 고부가가치 창출을 위한 ‘질적 경쟁’으로 전환될 것이라는 기대에서였다.
이러한 기대 속에서 건설사들의 사업 전망은 수도권 내 보유 택지의 입지적 가치에 따라 뚜렷하게 엇갈렸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대우건설, 삼성물산, 현대산업개발 등은 보유 택지의 소규모성 및 지리적 한계로 인해 분양가 상승을 통한 수익성 제고에 제약이 있었던 반면, LG건설, 현대건설, 동아건설 등은 수도권 핵심 요지에 우량 택지를 확보함으로써 상대적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주요 시장 참여자들은 후자 그룹이 침체된 부동산 경기를 회복시키는 데 견인차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했다(『매일경제신문』, 1998년 1월 23일). 당시 제도적 환경 변화에 발빠르게 대응하며 새로운 돌파구를 제시한 곳은 1997년 기준 국내 건설사 시공능력 6위였던 LG건설이었다.2)
LG건설은 보유 택지의 입지적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기존의 획일적 공급 방식을 탈피하는 새로운 상품 전략을 기획했다. 그 결과물은 1998년 5월에 분양한 용인 수지 지구의 아파트 단지 ‘LG빌리지’였다. 이는 당시 업계 최초로 고급화에 기반한 차별화 전략을 선보인 사례였다. LG건설의 전략은 크게 세 가지 차원에서 분석될 수 있다. 첫째, 주거 공간의 질적 향상을 위해 아파트의 대형화를 채택했다. 이 건설사는 소형 주택 의무건축 비율 폐지라는 제도 변화를 선제적으로 활용하여, 전 세대를 60평형 이상의 대형 평형대(61평형~91평형)로 구성한 1,164가구 규모의 대단지를 기획했다. 3.3㎡당 분양가는 530만 원 선으로 당시 최고 수준이었으나, 용적률 229퍼센트의 저밀도 개발과 32퍼센트의 높은 녹지율 확보를 통해 “광교산 기슭의 자연 경관”을 최대한 살린 쾌적한 주거 환경이라는 경쟁력을 갖췄다(『한겨레』, 1998년 5월 4일). 둘째, 정교한 시장 세분화를 바탕으로 타깃 마케팅(target marketing)을 전개했다. LG건설은 경기 침체로 인해 중산층의 유효 수요가 급감한 상황에서, “불경기에도 강남 지역의 부유층 수요는 풍부하다”는 시장 분석을 토대로 분양 홍보를 위한 소구 집단을 설정했다. 거시경제적 변동에 상대적으로 덜 영향을 받는 강남권의 고소득층, 전문직 종사자, 노후 안정층 등이 그 대상이었다. 이를 위해 강남권의 대형 아파트 거주자를 대상으로 현장 밀착형 판촉 활동을 집중적으로 진행했다(『조선일보』, 1998년 11월 24일). 셋째, 실내 인테리어 등 내부 사양의 고도화를 통해 상품 가치의 차별화를 시도했다. 고분양가 수용도를 높이기 위해 기존의 정형화된 아파트 마감재 수준을 탈피하여, 고급 빌라급의 인테리어 자재를 적용함으로써 물리적 공간의 질적 변별력을 확보했다(『조선일보』, 1998년 10월 14일).
자연 친화적 입지의 60평형 이상 대형 평형 중심, 강남권 거주자 대상 홍보, 실내 인테리어의 고급화로 요약되는 LG건설의 전략은 업계 전반의 주목을 받았다. 업계 관계자들은 이 프로젝트의 성패가 이후 아파트 분양시장의 향방을 가를 시금석이 될 것으로 내다보았다. 결과는 시장의 예측을 상회하는 큰 성공이었다. IMF 외환위기 직후라는 최악의 경제 여건 속에서 1천 가구가 넘는 대단지를 60평형 이상의 대형 위주로 구성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순위 청약 시작 단 1주일 만에 분양이 완료되었다. 당시 LG건설의 고위 관계자는 “청약자들의 80퍼센트 이상이 서울 강남의 대형 평형대 거주자들인 것으로 나타났다”며, “연령별로는 50대가 가장 많았고 직업별로는 자영업자와 전문직 종사자, 연예인들이 많았다”고 언급했다. 이는 구매력 있는 특정 집단을 겨냥한 LG건설의 타깃 마케팅이 실제로 유효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동아일보』, 1998년 5월 16일). IMF 외환위기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시점에 거둔 이 성과는, 불황기에도 고급 주거 상품에 대한 수요가 특정 계층을 중심으로 유지되고 있음을 확인해주었다.
수지 LG빌리지가 촉발한 아파트의 대형화·고급화 경향은 1999년 분양가 자율화가 서울로 확대됨에 따라 한층 더 뚜렷한 움직임으로 가시화되었다. 그동안 분양가 상한제라는 제도적 천장 아래 억눌려 있던 주거의 고급화 욕구가 서울 도심부에서 두 가지 사례를 통해 비로소 출구를 찾게 되었던 것이다. 그 사례는 바로 ‘롯데캐슬 84’와 ‘타워팰리스’였다. 롯데캐슬 84는 1999년 2월, 롯데건설이 분양에 나선 소규모 고급 아파트였다. 이 건설사는 서초구 서초동에 16층 2개 동, 75평형 중심의 아파트 84가구를 3.3㎡당 분양가 1,050만 원에 공급하면서, “중세 시대의 성을 연상시키는 고급 주거 공간”이라는 의미를 담아 “캐슬”이라는 독자적인 명칭을 전면에 내세웠다. “50평형대 이상 아파트에 거주하는 부유층”을 핵심 소구 집단으로 설정하고, 아파트에 호텔식 서비스 모델을 접목하려는 시도였다. 당시 아파트 시장에서는 무명이나 다름없던 시공능력 순위 10위권 밖의 건설사로서는 모험적인 분양 계획이었다(『중앙일보』, 2002년 1월 30일). 그러나 대기업 계열 건설사라는 후광 효과와 초고급화 전략 덕분에 이 아파트는 시장의 주목을 이끌어내며 분양에 성공을 거뒀다. 역세권이라는 입지적 강점 외에도, 아파트 외벽의 화강석 시공, 실내 공용부 및 전용부의 고급 대리석 적용, 가구당 3.2대에 달하는 주차 공간 확보 등이 주요 차별화 요인이었다(『조선일보』, 1999년 3월 9일).
두 번째 사례는 ‘롯데캐슬 84’ 분양 한 달 뒤인 1999년 3월, 삼성물산이 예약 분양을 단행한 주상복합 아파트 ‘타워팰리스’였다.3) 강남구 도곡동 1만 평의 대지에 지상 66층 1개 동, 59층 2개 동 규모로 구성된 이 주상복합 아파트는 30평형부터 120평형까지 총 1,329가구로 구성되었으며, 3.3㎡당 분양가는 1,100~1,200만 원대로 책정되어 당시 평균 수준을 크게 상회했다. 타워팰리스의 등장은 주상복합 아파트에 대한 기존 부동산 시장의 부정적 인식을 불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전까지 주상복합은 본래 상업 용지에 지어지는 특성 탓에 주거용으로는 부적합하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삼성물산은 호텔식 로비, 고도화된 보안 체계, 수영장·골프 연습장·연회장을 망라한 입주민 전용 커뮤니티 시설을 제공함으로써 이를 ‘최고급 주거 모델’로 재정의했다. 나아가 초고층 마천루라는 건축적 형태는 이 유형의 아파트를 거주자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가시화하는 강력한 ‘상징’으로 기능하도록 만들었다. 1999년 분양 초기에는 시장의 불확실성으로 인해 미분양 우려가 제기되기도 했으나, 삼성그룹 임직원을 우선 대상으로 한 사내 분양 추진 전략과 특정 계층을 대상으로 한 비공개 타깃 마케팅을 통해 분양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2002년 입주 시점에 이르러 타워팰리스는 최상위 아파트 단지로 자리매김하면서 도곡동을 서울의 부촌 지도에 편입시켰다(Park, 2011).
이 시기에 등장한 ‘LG빌리지’, ‘롯데캐슬’, ‘타워팰리스’ 같은 새로운 형태의 아파트 이름은 용인과 강남 지역의 개별 단지에 부여된 고유명사적 성격이 강했다. 당시의 지배적인 명명법은 ‘현대’, ‘우성’, ‘신동아’ 등 건설사의 사명을 직접 노출하여 기업의 신뢰도를 바탕으로 품질을 보증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위의 세 사례는 이 방식에서 탈피하여, 거주자의 가치관과 정체성을 함축하는 아파트 브랜드의 선행적 형태로 등장했다. 이는 각 건설사가 분양을 위한 소구 집단으로 특정 사회 계층을 명확히 설정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 건설사들은 서로 다른 소구 집단을 겨냥하면서도 아파트 명칭이 거주자의 사회적 욕망과 관련된 기호로 기능해야 한다는 인식을 공유했던 것이다. 예컨대 ‘빌리지(village)’는 중산층 일부가 지닌 전원적 주거 선호와 동경을 반영하여 자연환경과의 조화를 강조한 반면, ‘팰리스(palace)’와 ‘캐슬(castle)’은 궁전과 성채의 이미지를 매개로 배타적 위계성과 귀족적 이미지를 부각했다. 후자의 경우, “특별한 신분의 사람들”이 거주한다는 의미를 강조하는 것으로, ‘하이엔드 지향’의 명품 이미지를 구축하려는 의도가 뚜렷했다(Chae, 2004).
이러한 시도들은 아직 완전한 브랜드 개발·관리 체계를 갖추지는 못했지만, 시장 조사, 타깃 마케팅, 네이밍, 시각적 정체성 구축, 공간 설계 등 다방면의 기획을 유기적으로 연계하면서, 분양가 자율화라는 제도적 변화가 촉발한 새로운 시장 경쟁 규칙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이때 축적된 전략 기획 방법론은 이후 주요 건설사가 브랜드 전략을 수립하는 데 중요한 참조점이 되었다.4)
2. 2. 제2기(2000~2003년): 아파트 브랜드의 도입기
2000년대 초입, 한국 경제의 회복세와 더불어 저금리 기조 및 강남권 재건축 기대 심리가 맞물리며 부동산 시장은 급격한 팽창 국면에 진입했다. 이 시기 아파트 분양시장의 과열은 건설사 간 브랜드 도입 경쟁을 개별 단지 차원에서 전사적 차원으로 격상시키는 계기로 작용했다. 주요 건설사들은 시장 조사, 콘셉트 도출, 브랜드 아이덴티티(brand identity, 이하 ‘BI’) 설계, 통합적 마케팅 커뮤니케이션(IMC) 전략 수립 등을 포괄하는 체계적인 브랜드 개발·관리 체계를 구축하며 ‘브랜드 아파트 시대’로의 진입을 이끌었다.
이러한 전환의 선두에 선 것은, 2000년 1월 ‘주택 비전 선포식’을 통해 공식적으로 ‘래미안’ 브랜드를 대중에게 공개한 삼성물산 건설부문이었다. 삼성물산은 이에 앞서 1999년에 정보통신 기술을 접목한 ‘사이버 아파트’를 통해 브랜드화를 시도한 바 있으나, 이는 범용적 주거 콘셉트의 제시에 머물러 지속적이고 차별화된 브랜드 전략의 구축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에 따라 삼성물산은 일시적 유행을 넘어선 일관된 BI 확립을 목적으로, 제일기획과 브랜드메이저 등 전문업체와의 협업을 통해 보다 고도화된 브랜드 개발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브랜드메이저는 ‘타워팰리스’ 브랜드 개발도 함께한 브랜드 컨설팅 전문회사였다.
브랜드 개발은 크게 시장 조사, 전략 기획 수립, 콘셉트 제안, 브랜드 네이밍, 디자인 개발 등의 단계로 체계적으로 진행되었다. 먼저 삼성물산은 브랜드 콘셉트 제안 단계에서 기존 시장의 절대 강자였던 현대건설의 ‘현대아파트’를 핵심 벤치마킹 대상으로 설정했다. 조사 결과, 1970년대 중반 이후 ‘아파트 시대’를 선도한 현대아파트의 이미지는 “튼튼하고 믿음직한 아파트”의 대명사로 소비자 신뢰의 상징과 같은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삼성물산은 현대아파트가 보유한 ‘전통’과 ‘신뢰’의 이미지와 정면승부를 벌이기보다는, 새로운 주거 가치를 제안하는 차별적인 포지셔닝 전략을 채택했다. 이를 위해 기업 내부 역량, 시장 경쟁 구조, 소비자 욕구 등을 다각도로 분석한 결과, 브랜드의 핵심 가치로 “환경 친화, 첨단 기능, 건강 중시, 생활 서비스, 커뮤니티, 가족 중시”를 도출했다(Jeon et al., 2004). 이어진 브랜드 네이밍과 디자인 개발 단계에서는 이 가치를 반영한 다양한 브랜드명이 제안되었다. 최종 후보로 오른 것은 ‘에버하임(Everheim)’과 ‘래미안(來美安)’이었다. 삼성물산이 선택한 브랜드명은 ‘래미안’이었는데, 이는 “미래를 내다보는 공간 래(來), 아름다움을 담은 공간 미(美), 편안하고 안락한 공간 안(安)”, 이렇게 세 한자의 의미론적 결합이 만들어낸 명칭이었다. 이러한 선택에는 최고 의사결정권자의 강력한 지지가 뒷받침되었다(Brandmajor, 2001).
삼성물산에 이어 브랜드 경쟁에 가세한 것은 대림산업이었다. 이 건설사는 2000년 2월, ‘e-편한세상’ 브랜드를 시장에 공개했다. 이 브랜드명은 ‘정보통신 인프라를 매개로 구현되는 주거 편의성’을 핵심 가치로 상정한 결과로, 첨단 IT 기술의 기호인 ‘e’와 정서적 편익을 강조하는 ‘편한 세상’을 결합한 형태였다. e-편한세상의 도입은 대림산업이 당시 직면한 구조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장치 산업 중심의 사업 구조로 인해 아파트 시장에서의 대중적 인지도가 상대적으로 취약했던 이 건설사로서는, 외환위기 이후 급감한 건설 수주 침체를 벗어날 새로운 돌파구가 절실히 필요했다. 이에 대림산업은 분양가 자율화 이후 재편된 아파트 시장에서 경쟁력 확보를 위해 브랜드 개발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1999년부터 시행된 소비자 조사 및 경쟁사 마케팅 분석을 토대로, “첨단 기술과 주거 본질의 융합”이라는 방향을 설정하고 ‘편안함’, ‘실용성’, ‘고급성’을 전략적 핵심 키워드로 도출했다. 브랜드 네이밍 단계에서 대림산업은 다수의 광고대행사를 대상으로 한 경쟁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최종안을 선정했다. ‘e-편한세상’, ‘넷파트(Netpart)’, ‘넷시(Netsi)’ 등이 최종 후보군에 올랐는데, 소비자 니즈, 경쟁사 대비 차별성, 시대적 적합성, 임직원 선호도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끝에 최종 채택된 명칭은 대홍기획이 제안한 ‘e-편한세상’이었다(Yoo et al., 2011). 도머스파트너스가 담당한 이 브랜드의 디자인은 기존 건설업계의 보수적 문법을 전면 부정하는 파격성을 보였다(『월간 디자인』, 2005년 3월호). 탈네모꼴의 한글 서체와 유기적 곡선 형태의 구름 모티프, 오렌지색 적용은 당시 통용되던 권위주의적이고 기하학적인 디자인 언어에서 과감히 탈피한 것이었다. 이러한 디자인 방향은 자칫 제품 브랜드 로고나 웹사이트의 클릭 버튼처럼 비춰질 위험이 있었음에도, 거주자 중심의 젊고 친근한 BI를 확립하고 후발주자로서의 차별성을 확보하는 발판이 되었다.
대림산업은 ‘e-편한세상’ 도입과 동시에 브랜드 인지도 확보를 목표로 내세우며, 당시 최고의 인기 배우 중 한 명이던 채시라를 전속 모델로 기용해 대대적인 광고 캠페인을 전개했다. 인쇄 광고는 정보화 시대의 편리하고 세련된 라이프스타일을 구현하는 여성상을 자사 아파트 거주자의 전형으로 제시했고, TV 광고는 “자연과 함께, 첨단과 함께, 대한민국 사람 모두가 e-편한세상에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편안하고 풍요로운 생활”을 중심으로 새로운 주거 문화의 이미지를 전달했다. 이 광고들은 e-편한세상 브랜드가 단기간에 업계 최상위권의 인지도를 확보하는 데 상당히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건설사가 상품 홍보를 위해 최정상급 모델을 내세워 전국 단위의 TV 캠페인을 전개한 것은 대림산업이 처음이었다. 이는 기존의 아파트 광고가 신문 및 직접 마케팅(DM) 매체를 통해 가격, 입지, 규모 등 분양 관련 정보 전달에 머물렀던 것과는 구별되는 전략이었다. 업계에서는 대림산업의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전략을 두고 “아파트 분양시장의 혁명”이라는 평가까지 나왔다(『조선일보』, 2007년 4월 4일).
2001년에 접어들면서, 아파트 브랜드가 주요 건설사의 핵심적인 경영 전략의 일부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현대산업개발과 두산건설이 각각 디자인포커스와 디자인그룹 인터내셔널 등 디자인 전문회사와의 협업을 통해 ‘아이파크(I’PARK)’와 ‘위브(We’ve)’ 브랜드를 선보이며 경쟁에 가세했다. 특히 약 20퍼센트에 육박하는 서울 지역의 아파트 가격 급등세와 1,000만 원대를 넘어선 강남 아파트 3.3㎡당 분양가 상승세는 이 흐름을 더욱 가속화하는 동인으로 작용했다. 여기에서 브랜드 확산 과정을 상승 궤도에 올려놓은 결정적 계기는 강남권 노후 단지의 재건축 사업 본격화였다. 재건축 시장은 대형 건설사들의 역량이 집중되는 격전지였다. 건설사에게 강남 재건축 수주전은 단순한 사업 기회를 넘어, 자사의 브랜드 선호도가 실제 수주 경쟁력으로 전환됨을 확인하는 무대였다. 2001년부터 전개된 강남 지역 시공사 선정 과정에서 삼성물산, LG건설, 대림산업, 롯데건설 등은 치열한 경합을 벌였다. 구체적인 사례로, 2001년 7월 반포주공 2단지 시공사 선정 과정에서 삼성물산은 조합원 투표를 통해 LG건설과 근소한 표 차이의 접전 끝에 승리했고, 이어 동년 11월 반포주공 3단지 선정에서는 LG건설이 롯데건설을 제치고 시공사로 선정되며 앞선 패배를 만회했다(Park, 2011).
강남권 재건축 수주 과정에서 주요 건설사들이 제시한 모델하우스와 홍보물은 기존 분양가 상한제 체제의 표준화된 아파트와는 궤를 달리하는 파격적인 청사진을 담고 있었다. 이들이 제안한 신평면 설계, 타워형 주동 형태, 지상 주차장 지하화, 테마형 조경 체계 등은 아파트의 물리적 상품성을 새롭게 규정하는 규범으로 부상했다. 먼저 거실과 침실을 전면에 배치하여 채광과 환기를 극대화하는 3·4베이(bay) 평면 도입으로 아파트 전면 폭이 크게 확장되었고, 그에 따라 발코니 서비스 면적도 증가했다. 내부 공간 구성에서도 침실·드레스룸·욕실의 유기적 결합, 공용 거실 및 주방 면적의 확대, 아일랜드형 주방의 보급 등이 일반화되었다. 또한 주차 공간의 전면 지하화를 통해 확보된 지상 유휴 공간은 각 브랜드의 정체성을 집약한 테마형 조경으로 채워졌다. 수변 공간, 정자, 산책로, 중앙광장 등을 포괄하는 이러한 조경 설계는 단지 내부를 ‘리조트형 휴식 공간’으로 재구성했다(Park, 2013). 주거 공간의 이러한 진화는 분양가 자율화 초기 용인의 대형 평형 아파트 단지와 강남의 주상복합 아파트에서 시도된 고급화·초고급화 전략이 재건축 단지를 거치며 질적으로 한 단계 더 발전한 결과였다. 이를 통해 아파트라는 상품의 물리적 경쟁력은 새로운 층위로 격상되었다.
한편, 강남 재건축 수주전에서 승리한 브랜드는 그 후광 효과를 앞세워 서울 강북과 수도권, 지방 주요 도시의 분양시장에서도 경쟁 브랜드에 대해 압도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강남 재건축 사업 수주전의 최대 수혜자는 반포주공 2단지 시공사 선정으로 강남 재건축 사업에 제일 먼저 안착한 삼성물산이었다. 이 건설사는 2002년에 접어들자 시장의 선도적 지위를 한층 더 강화하기 위해 ‘자부심’을 핵심 가치로 하는 브랜드 전략의 재정립을 단행하고 나섰다. 이는 “리딩 브랜드에서 파워 브랜드로의 도약”을 목표로 한 것으로, 통합적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차원의 BI 리뉴얼과 TV 광고의 전략적 강화로 구체화되었다(Jeon et al., 2004). 디자인 전문회사 디자인파크가 주도한 BI 리뉴얼은 인간·자연·기술의 조화를 상징하는 기존의 수직선 모티프를 계승하되, 배색과 서체, 요소 배치의 변경을 통해 시각적 정교함과 현대적 세련미를 높이는 데 주력했다. 과거의 다채로운 원색 조합을 지양하고, 이후 래미안의 정체성을 상징하게 된 ‘래미안 그린’과 ‘래미안 그레이’의 저채도 배색으로 전환하였으며, “단순하고 지적인 이미지의 새로운 한글 서체”로 디자인의 디테일을 보강했다(Kim, 2018).
이와 함께 래미안의 TV 광고 전략 역시 기능적 소구에서 정서적·상징적 소구로 전환되었다. 초기 광고가 인지도 제고를 위해 층간 소음 저감과 같은 기능성이나 보편적 가족애에 의존했던 것과 달리(Jeon et al., 2004), 2002년 하반기의 캠페인은 상위 중산층 여성을 핵심 소구 대상으로 삼아 “당신의 이름이 됩니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전면에 내세웠다. 래미안은 거주자의 계층적 소속감을 “남다른 자부심”이라는 키워드로 번역하며 소비자의 심리적 욕망에 직접 호소했다. ‘오페라 하우스’ 편과 ‘갤러리’ 편으로 대표되는 일련의 광고 시리즈는 ‘래미안 거주자’를 바라보는 ‘타자’의 선망 섞인 시선을 정교하게 연출했다(Seo et al., 2009).5) 오페라홀이나 미술관과 같은 ‘품격 있는’ 문화 공간을 배경으로 설정하고, 브랜드 로고가 각인된 열쇠고리를 노출함으로써 래미안을 단순한 주거지가 아닌 거주자의 사회문화적 지위를 증명하는 기호로 재현했다. 이렇게 타자의 시선이 화면상의 마침표를 거쳐 브랜드 로고로 전이되는 연출 방식은, 래미안 브랜드를 계층적 구별짓기를 매개하는 강력한 상징적 기제로 안착시키려는 건설사의 전략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었다.
래미안의 ‘오페라 하우스’ 광고가 방영되던 시점인 2002년 9월, LG건설은 기존의 ‘LG빌리지’를 대체하는 신규 브랜드 ‘자이(Xi)’를 도입하며 브랜드 전략의 전환을 시도했다. ‘LG빌리지’는 편안하고 가족적인 이미지로 중장년 중산층의 호응을 얻었으나, ‘빌리지’로 끝나는 유사 브랜드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변별성과 희소성이 크게 약화되었다. LG건설은 이러한 상황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2세대 브랜드로의 전환을 결정했다. 신규 브랜드 ‘자이’는 ‘eXtra Intelligence(특별한 지성)’를 의미하는 영문 약어로, 앞서가는 라이프스타일을 향유하는 도시적이고 지적인 전문직 계층을 핵심 소구 집단으로 설정하며 첨단 기술과 고품격 주거 가치의 결합을 지향했다. 이 브랜드의 네이밍은 ‘타워팰리스’와 ‘래미안’을 진행한 ‘브랜드메이저’가 담당했고, 디자인은 래미안 BI 리뉴얼을 진행한 ‘디자인파크’가 맡았다. 네이밍 측면에서는 관습적인 명명 패턴에서 탈피하여 알파벳 ‘X’를 핵심 기표로 채택했으며, 이는 당시 ‘X노트’, ‘X캔버스’ 등 LG그룹 계열사가 공유하던 첨단 기술의 브랜드 이미지를 주거 상품에도 적용한 것이었다(BrandMajor, 2007). 그리고 디자인파크가 디자인한 브랜드 로고는 첨단성을 시각화하는 동시에 건축적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이중적 전략을 보여주었다. 알파벳 ‘X’의 유기적인 획 구성은 상승하는 형상을 통해 첨단 주거 문화의 유연성과 선도성을 상징하는 한편, 로고 우측의 ‘i’는 고전 건축의 수직 기둥(column) 형태를 차용하여 물리적 안정감과 정통성을 시각화했다.
LG건설은 브랜드 공개와 함께 “앞선 생활로의 초대”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배우 이영애를 전속 모델로 앞세워 TV 광고에 나섰다. 시리즈 형식으로 방영된 광고는 “앞선 사람, 앞선 라이프스타일”이라는 콘셉트로, 아파트의 물리적 속성을 거의 드러내지 않은 채 첨단 주거 환경 내에서 향유하는 우아한 일상생활을 연출함으로써, “능력 있고 세련된 감각을 지닌 사람들이 선택하는 아파트”라는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자 했다(Seo et al., 2009). 초기에는 제품과의 연계성이 약하다는 비판적 견해가 존재했으나, ‘LG=자이=이영애’라는 강력한 연상 작용이 대중 사이에 확산되면서 기대 이상의 효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되었다(『동아일보』, 2009년 10월 9일). 특히 자이의 광고는 ‘앞선 라이프스타일’을 강조함으로써, ‘남다른 자부심’에 호소하던 래미안과 선명한 대립 구도를 형성했다. 이 시점에 이르면 브랜드 아파트 광고는 소비자의 선택을 받기 위해 상이한 정체성과 라이프스타일이 경합을 벌이는 장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2000년대 초반 아파트 브랜드 경쟁은 국내 건설사가 외면하기 어려운 시장의 대세로 자리 잡아갔다. 이 시기에 잇달아 등장한 브랜드들은 각기 상이한 콘셉트 축을 선점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고급화를 기본으로 삼되, 문화적 정체성, 웰빙, 자연친화성 등 서로 다른 가치를 내세우며, 아파트 브랜드의 의미 지형은 더욱 다층화되었다. 이를테면 2002년 롯데건설은 개별 단지 차원의 명칭이었던 ‘롯데캐슬’을 고급 아파트 브랜드로 재정립했으며, 포스코건설도 1년 전에 공표한 기존 브랜드 ‘파크뷰’가 별다른 이목을 끌지 못하자, 삶의 질을 한 단계 끌어올린다는 의미를 담은 ‘더샵(The Sharp)’이라는 신규 브랜드를 도입했다. 더샵의 브랜드 개발 프로젝트에는 제일기획과의 협업 하에 브랜드메이저와 인덱스파트너스가 참여했다(『월간 디자인』, 2003년 2월호). 더샵은 브랜드명과 로고 디자인 모티프로 음악 기호인 올림표(♯)를 채택한 점이 특징적이었는데, 브랜드 기획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는 “음악이 흐르는 거주 공간”이라는 정서적 가치에 “철골 구조를 연상”시키는 조형적 특성을 결합함으로써 포스코의 기업 정체성인 ‘견고함’이라는 이미지를 중의적으로 표상한 결과였다(『한국경제신문』, 2006년 4월 6일). 그 뒤를 이어 2003년 2월, 대우건설 역시 기존의 ‘드림월드’와 ‘그랜드월드’를 대체하는 새로운 아파트 브랜드로 ‘푸르지오’를 발표했다. ‘푸르지오’는 순우리말 ‘푸르다’와 지형을 뜻하는 ‘GEO’의 합성어로, 자연과 인간의 유기적 결합을 브랜드의 핵심 가치로 세웠다. 이 브랜드는 당시 사회 전반에 불기 시작한 ‘웰빙’ 트렌드6)를 브랜드 콘셉트와 디자인에 발빠르게 접목한 사례로 주목받기도 했다(Kim et al., 2007). 소디움파트너스가 담당한 푸르지오의 BI는 이니셜 ‘P’를 모티브로 한 ‘푸르지오 트리(Tree)’와 이들이 모여 형성된 ‘푸르지오 숲’의 이미지를 통해 단지 내 구현된 자연 친화적 가치와 리듬감 있는 공간감을 시각화했다. 이와 함께 중간 채도의 그린 색상은 이 브랜드의 상징성을 한층 강화해주는 역할을 했다.7)
제2기 종반부, 아파트 브랜드 도입 경쟁은 예기치 않은 변수를 마주하며 그 궤도를 부분적으로 수정해야 했다. 그 변수는 2003년 하반기에 불거진 ‘새집 증후군’ 사태였다. 신축 아파트의 고급화를 위해 사용되었던 마감재 및 내장재, 빌트인 가구에서 방출되는 유해 화학물질이 거주자의 건강(호흡기 질환, 두통, 아토피 등)을 심각하게 위협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커다란 사회적 파장을 낳았다. 특히 2004년 초 공중파 다큐멘터리 방영을 기점으로 이 문제가 전국적으로 공론화됨에 따라, 주요 건설사들은 브랜드의 핵심 가치를 거주자의 건강과 직결된 ‘친환경’이라는 새로운 콘셉트 축으로 시급히 선회하거나 확장해야만 했다. “남다른 자부심”을 표방하던 래미안조차 TV 광고에 어항 속 열대어와 어린이를 등장시켜 ‘무해한 아파트’가 보장하는 ‘건강한 삶’의 이미지를 강조해야 했다(Seo et al., 2009).
2. 3. 제3기(2004~2007년): 아파트 브랜드의 전면화
2004년 이후 국내 주택 시장은 브랜드 아파트의 전면화 단계에 들어섰다. 주요 건설사들이 저마다의 BI를 확립하면서 더 이상 브랜드 보유 여부 자체가 경쟁력을 가르는 기준은 아니게 되었다. 대신 개별 브랜드 간의 인지도와 선호도 격차가 자산 가격에 직접 반영되는 ‘브랜드 위계의 공고화’ 현상이 나타났다. 이하에서는 분석의 편의상, 당시의 브랜드 지형을 선도 브랜드 그룹, 추격 브랜드 그룹, 기타 브랜드 그룹으로 분류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이는 엄밀한 계량 분류라기보다 2005년과 2006년 언론 보도와 각종 브랜드 선호도 조사 등을 종합한 서술적 분류라고 할 수 있다.8)
첫째, 선도 브랜드 그룹은 시장 트렌드를 주도하는 최상위 브랜드들로, 삼성물산의 ‘래미안’, GS건설(구 LG건설, 2005년 사명 변경)의 ‘자이’, 대림산업의 ‘e-편한세상’이 이른바 ‘3강 체제’를 형성했다. 이들은 소비자 인지도와 선호도 면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며 아파트 분양시장의 가격 형성을 견인했다. 래미안과 e-편한세상은 선제적 시장 진입을 통해 축적된 브랜드 가치와 신뢰도를 바탕으로 견고한 시장 입지를 구축한 반면, 후발주자인 자이는 세련된 브랜드 이미지를 앞세운 공격적인 통합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전략을 통해 단기간에 선도 그룹의 반열에 올랐다. 이 시기 세 브랜드는 제2기에 형성된 전략적 자산을 계승하는 동시에, 브랜드 콘셉트와 아이덴티티를 한층 정교화함으로써 선도 그룹 내 자신들의 위상을 공고히 하고자 했다. 특히 ‘새집증후군 사태’ 이후 2004년을 기점으로 래미안은 ‘자부심’이라는 핵심 가치를 근간으로 ‘건강·환경·첨단’으로 브랜드 콘셉트의 외연을 확장하는 전략을 취했고, e-편한세상은 주거 본연의 가치로서 ‘친환경’과 ‘건강성’을 전면에 내세웠다. 자이는 홈네트워크 시스템을 기반으로 ‘선도적 라이프스타일을 향유하는 첨단 고급 주거’라는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강화해 나갔다.
둘째, 추격 브랜드 그룹은 각종 조사에서 10위권을 형성하는 차상위 브랜드들로, 선도 그룹과의 격차를 좁히면서 시장 점유율 확대를 꾀하고 있었다. 대우건설의 ‘푸르지오’, 롯데건설의 ‘롯데캐슬’, 현대산업개발의 ‘아이파크’가 이 그룹의 선두를 점하며 ‘3강’과 직접 경쟁을 벌였고, 현대건설의 ‘현대홈타운’, 포스코건설의 ‘더샵’, 두산건설의 ‘위브’, SK건설의 ‘SK뷰’ 등이 그 뒤를 바짝 추격했다. 이들은 선호도와 인지도 면에서 선도 그룹에 다소 미치지 못했으나, 저마다의 독자적인 브랜드 콘셉트를 전면에 내세우며 시장에서 경쟁력과 존재감을 키워나가고자 했다. 푸르지오는 기존의 웰빙 이미지를 기반으로 “그녀의 프리미엄”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통해 ‘감각적인 트렌드세터’로서의 위상을 추가하려 했고, 롯데캐슬은 주거 공간의 고전적 웅장함과 위계감을 지속적으로 부각했다. 아이파크는 스마트홈 시스템 등 IT 기반의 주거 편의성 특화를 강조했으며, 더샵은 브랜드 네이밍의 함의에 걸맞게 고급 마감재 중심의 디자인 혁신을 핵심 차별화 요소로 제시했다.
셋째, 기타 브랜드 그룹은 브랜드 아파트화의 흐름이 중견·중소 건설사로까지 확산된 2000년대 중반을 전후하여 다양한 브랜드들의 혼재 양상을 나타냈다. 이 그룹에는 선도·추격 그룹에 속하지 않은 수십 개의 브랜드들이 포진해 있었다. 예를 들면 한화건설의 ‘꿈에그린’, 금호건설의 ‘어울림’, KCC건설의 ‘스위첸’, 경남기업의 ‘경남아너스빌’ 등이 대표적이었고,9) 이외에도 지역 건설사들이 운용하는 다양한 브랜드들 역시 이 그룹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지역 시장 내 성공을 바탕으로 상위 그룹으로의 진입을 시도했으나, 대체로 전국 단위의 인지도와 브랜드 자산의 총량 측면에서 선도·추격 그룹에 미치지 못했다.
이처럼 2000년대 중반 이후, 아파트 분양시장은 선도 그룹의 강한 지배력, 추격 그룹의 추격 양상, 기타 그룹의 다양한 브랜드 혼재가 공존하는 다층적 경쟁 구조를 띠게 되었다.10) 이들 간의 경쟁 과열을 보여주는 객관적 지표는, 아파트 광고를 중심으로 한 건설·건재·부동산 업종의 TV 광고비 증가 추이였다. 한 조사에 따르면, 이 업종의 2005년 TV 광고 규모는 1,684억 원으로 전체 TV 광고 시장(2조 965억 원)의 약 8퍼센트를 차지했다. 이는 컴퓨터 및 정보통신, 식품, 금융·보험 및 증권, 음료 및 기호식품, 화장품 및 보건용품에 이어 업종별 광고비 6위에 해당했다. 나아가 2001년 대비 TV 광고비 증가율은 294.7퍼센트를 기록하여 전체 업종 가운데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Park, 2007).11)
다른 한편, 브랜드 위계가 공고화됨에 따라 아파트 브랜드가 아파트 가격 결정의 중요 변수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선도 그룹의 아파트가 인근의 유사 조건 단지 대비 높은 시세를 형성하는, 이른바 ‘브랜드 프리미엄’이 실증적인 자산 가치 격차로 현실화되었다(Lee et al., 2012). 실제로 2006년 이후 “브랜드 아파트는 시간이 지날수록, 아파트 가격이 높을수록, 강남 지역에서 보다 높은 영향력을 나타”냈다(Lee et al., 2012). 이에 따라 부동산 정보업체와 언론에서는 ‘○○브랜드 아파트 평균 매매가가 인근 단지보다 몇 퍼센트 높다’는 식의 분석을 내놓으며 브랜드 프리미엄을 강조했다.12)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집값을 좌우하고, 빈부를 가르는 부작용”이라는 비판도 낳았다. 고가 브랜드 아파트 선호가 주택 시장의 계층화를 부추겼고, 상대적으로 저렴한 구축 단지나 비브랜드 단지가 기피되는 현상이 뚜렷해졌다.
대형 건설사들의 치열한 브랜드 경쟁 속에서 예외적인 궤적을 보인 것은 가장 늦게 시장에 진입한 현대건설이었다. 이 건설사는 ‘압구정 현대’로 대변되는 독보적인 브랜드 가치를 선점하고 있었으나, 2000년 촉발된 그룹 유동성 위기와 채권단 관리 체제라는 구조적 제약으로 인해 신규 브랜드 도입이 지연되었다. 1999년 말 이후 ‘현대홈타운’이라는 아파트 명칭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브랜드라고 부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현대건설은 경영 정상화가 이뤄진 2006년에 이르러서야 새 브랜드 ‘힐스테이트(Hillstate)’를 공개하며 본격적인 브랜드 경쟁에 합류할 수 있었다. 브랜드 컨설팅 전문회사 크로스포인트가 담당한 이 브랜드의 네이밍과 디자인은 기업명(Hyundai)와 브랜드명(Hillstate)이 공유하는 알파벳 ‘H’를 핵심 조형 모티프로 삼아, 기업의 역사적 전통과 신규 브랜드의 현대적 감각을 통합하고자 했다(Son, 2012). 현대건설의 브랜드 경쟁 합류는 국내 대형 건설사 모두가 독자적인 브랜드를 내세워 경쟁하는 ‘브랜드 아파트 시대’가 사실상 제 궤도에 올랐음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거의 모든 건설사가 독자 브랜드를 출범시키면서 경쟁은 정점에 달했다. 과도한 마케팅 비용은 분양가 거품을 키웠고, 아파트 가격 상승에 대한 기대는 가계의 과도한 부채를 동반했다. 계속 지속될 것 같았던 부동산 시장의 팽창 국면은 2008년 세계금융위기에 직면하면서, 빠른 속도로 움츠러들기 시작했다. 이 충격을 기점으로 시장은 위축 국면으로 진입했고, 건설사 간 브랜드 경쟁 역시 소강상태를 맞이했다. 그러나 2000년대 중반을 거치며 형성된 아파트 브랜드의 위계는 이후에도 계속 유지되었으며, 한국 사회의 주거 문화를 규정하는 상징적 질서로 공고히 자리 잡았다.
3. 아파트 브랜드화를 둘러싼 경제·사회·문화적 요인들
2장에서 아파트 브랜드화의 전개 과정을 살펴보았다면, 3장에서는 그 과정을 가능하게 한 경제·사회·문화적 요인을 검토하고자 한다. 아파트 브랜드화는 건설업계의 시장 전략 변화만으로 설명되지 않으며, 경제적 제도의 변화, 계층 구조의 재편, 소비문화의 변동이 중층적으로 교차한 결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이 장에서는 세 가지 경제·사회·문화적 요인으로, 주택의 금융상품화, 상위 중산층의 부상, 아이덴티티 디자인 전문회사의 실천을 살펴본다.
3. 1. 아파트의 금융상품화: 자산 가치의 보증 장치로서 브랜드
아파트 브랜드화를 추동한 첫 번째 요인으로 경제적 맥락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주택의 금융상품화다. 1998년부터 단계적으로 시행된 분양가 자율화 이후 고분양가 책정이 제도적으로 허용됨에 따라, 아파트 가격은 더 이상 지대를 포함한 건축 원가만을 기준으로 책정되지 않았다. 입지, 브랜드, 미래 시세 상승에 대한 시장의 집합적 기대 등도 가격 구성의 핵심 변수로 부상했다. 이러한 변화를 거치며 아파트는 주거 공간이라는 고유의 사용 가치 못지않게 자산으로서의 투자 가치 측면에서도 중대한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2003년 한 건설사 마케팅 담당자가 “브랜드 아파트를 구매하는 것은 안정적인 주식을 보유하는 것과 같다”(『월간 디자인』, 2003년 2월호)고 언급한 사실은 이 시기 아파트가 투자를 위한 독특한 형태의 금융상품으로 주목받기 시작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2000년대 초반 저금리 기조는 이러한 변화를 더욱 가속화했다. 가계는 주택담보대출 제도 확대와 대출 한도 상향 조정에 힘입어, 현재의 자산뿐 아니라 미래의 상환 능력까지 담보로 삼아 주택 시장에 적극적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아파트는 금융 레버리지를 활용해 자산을 증식하는 대중적 투자 수단으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Yoo, 2010). 요컨대 분양가 자율화가 아파트의 가격 결정 원리를 바꾸었다면, 주택담보대출 확대는 가계가 그 시장에 참여하는 방식 자체를 변화시켰다. 이 두 가지 변화가 중첩되면서, 아파트 구매 행위는 이전과는 다른 복합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사회학자 김명수의 분석에 따르면, 이 시기 국내 아파트 시장은 “생존과 투기 사이”에서 작동하는 독특한 구조를 형성했다. 아파트를 구입하는 행위는 안정적인 거처로서 주거 공간을 확보하는 실천인 동시에, 미래의 자산 가치를 선취하기 위해 가계의 경제적 역량을 동원하는 금융적 결정이기도 했다. 주거와 투자는 더 이상 분리된 것이 아니었다(Kim, 2020).
아파트가 독특한 금융상품의 위치를 점유하게 되면서, 아파트 브랜드는 일반 상품이나 서비스의 브랜드와는 구별되는 독자적인 속성을 지니게 되었다. 우선 그것은 여타 브랜드와 마찬가지로 상품의 물리적 품질을 나타내는 지표에 그치지 않고, 그 상품을 소비하는 집단의 계층적 정체성이나 라이프스타일을 대변하는 기호로 기능했다. 그러나 아파트 브랜드의 질적인 차별성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데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 기호의 의미작용을 통해 자산 가치의 하락을 방어하고 상승을 약속하는 ‘보증 장치’로 작동한다는 점에서 다른 유형의 브랜드와 근본적으로 구별되었다. 다시 말해, 소비자가 특정 브랜드의 아파트 구입에 상대적으로 높은 비용을 지불하는 행위는, 해당 브랜드가 미래의 시세 상승을 견인할 것이라는 시장의 집합적 기대를 수용하는 과정의 일부였다. 따라서 건설사들은 브랜드의 역할을 여타 업종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하게 인식할 수밖에 없었고, 자사 브랜드에 투영된 기대를 객관화된 수치로 입증하여 시장 참여자들에게 확신시키려고 했다.
실제로 2002년 고려대 박찬수 교수는 삼성물산의 의뢰로 진행한 연구에서 소비자들이 비브랜드 아파트보다 래미안에 3.3㎡당 476만 원의 프리미엄을 추가로 지불할 용의가 있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이를 바탕으로 산출된 래미안의 브랜드 자산 가치는 약 1조 7천억 원에 달했다(Jeon et al., 2004). 브랜드 프리미엄이 객관적 수치로 확인되자, 건설사들은 그 기대 가치를 광고의 시청각적 언어를 통해 소비자에게 직접 각인시키는 전략으로 나아갔다. 2004년, 대우건설이 배우 김남주를 내세운 푸르지오의 TV 광고에서 “그녀의 프리미엄”을 슬로건으로 선보인 것은 이러한 시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였다. 이 광고에서 ‘프리미엄’은 푸르지오 거주자가 향유하게 될 ‘라이프스타일’의 수식어인 동시에, 입주 이후 누리게 될 자산 가치의 상승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200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브랜드 프리미엄’이 부동산 시장의 관용어로 정착되면서, 소비자들은 브랜드에 기인한 가격 편차를 시장의 합리적 가격 형성 원리로 자연스럽게 수용하게 되었다. 그 결과, 브랜드는 미래의 자산 가치에 대한 기대를 응축하고 유통하는 ‘금융적 기호’로 소비자들에게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브랜드에 독특한 역할을 부여하는 금융상품화의 중요한 귀결은 아파트를 둘러싼 사회적 상상력과 공간적 위계가 구조적으로 변형되었다는 점이다. 분양가 자율화 이전의 아파트는 국가가 공급을 관리하는 표준화된 주거 공간으로서, 구매의 선택 기준이 대체로 입지와 평수, 가격에 국한되었다. 그러나 금융상품화 이후 아파트는 ‘어느 지역에 사느냐’와 ‘어떤 브랜드를 소유했느냐’에 따라 미래 자산 가치와 계층적 귀속감을 규정하는 상품으로 전환되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서울의 특정 부촌이나 강남 지역의 일부 아파트 단지가 그와 같은 기능을 수행하긴 했으나, 그것이 서울과 수도권을 넘어 전국 주요 도시로 확산된 것은 2000년대 아파트의 금융상품화가 본격화된 이후에 뚜렷해진 현상이었다. 바로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브랜드 아파트에 대한 소비는 단순한 주거 상품에 대한 소유 욕망의 차원을 초과하여 합리적 투자를 통한 자산 증식과 계층 이동의 차원으로 확장되었다. 특정 브랜드 아파트가 밀집한 지역은 그저 ‘살기 좋은 동네’가 아니라 자산 가치 상승의 안전지대로 인식되었고, 반대로 브랜드 아파트가 부재한 지역은 그에 비해 상대적으로 투자 가치의 공백 지대로 여겨졌다. 이로써 아파트의 금융상품화는 브랜드의 위계가 곧 자산 가치의 위계이자 거주 계층의 위계로 이어지는 연쇄적 메커니즘을 작동시킴으로써, 사회경제적 위계를 도시의 일상 공간에 고스란히 각인시키는 구조적 기제가 되었다.
3. 2. 상위 중산층의 부상: 구별짓기의 욕망과 브랜드 수요의 형성
IMF 외환위기 이후 가속화된 중산층의 분화와 상위 중산층의 본격적인 등장은 사회적 측면에서 아파트 브랜드화를 추동한 두 번째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외환위기는 한국 사회가 1980년대 후반 민주화 이후 경제 성장, 소득 증가, 주택 보급을 통해 지향해온 ‘중산층 중심의 사회’라는 신화를 근저에서 균열시켰다. 그 이전까지 중산층은 일정 수준의 표준화된 생활양식을 중심으로 소득수준, 자가 주택 보유 여부, 자산 규모, 여가 활동, 계층 귀속 의식 등의 측면에서 비교적 동질적인 계층으로 인식되곤 했다(Song, 2022). 그러나 대규모 구조조정과 정리해고, 노동 시장 유연화와 비정규직화, 자영업 증가 등의 변화를 거치면서 상이한 경제적 조건과 정체성을 가진 집단들로 분화되기 시작했다. 이른바 ‘중산층의 양극화’라고 불릴 수 있는 이 일련의 변화 속에서, 한편에는 고용 불안과 소득 감소로 중산층의 지위를 상실하거나 위협받는 집단이 등장했던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대기업 사무직, 고위 관리직, 전문직, 자영업 성공층 등을 중심으로 경제적 안정성을 유지하면서도 소득과 자산이 증가하는 집단이 뚜렷이 부상하기 시작했다(Nam, 2009).
사회학자 구해근이 ‘특권 중산층’으로 개념화한 후자의 집단, 즉 상위 중산층은 바로 외환위기 이후 2000년대 초반까지 ‘브랜드’를 내건 아파트 공급의 실질적 수요 기반을 형성했다. 앞서 살펴본 1998년 수지 LG빌리지의 분양 성공은 이와 같은 상위 중산층이 경제 위기 직후에도 강남을 중심으로 이미 뚜렷하게 형성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첫 사례였다. 아울러 2000년대 초반 주요 건설사 마케팅팀이 자사 브랜드의 성공적 시장 안착을 위해 핵심 소구 집단으로 설정한 “경제적 구매력을 갖춘 지적이고 세련된 30~40대 중상층 주부” 역시 이 상위 중산층의 주요 구성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들 상위 중산층은 외환위기 이후 주식과 부동산 시장을 통해 자산을 증식했으며, 기존 중산층의 표준화된 생활양식에서 벗어나 계층적 정체성을 차별화하는 소비 실천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Koo, 2022). 이러한 구별짓기 실천은 주거 공간의 물리적 소유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브랜드 아파트 열풍과 함께 1990년대 후반부터 등장한 프리미엄 가전(삼성 지펠·하우젠, LG 디오스·트롬)은 수입 가구 및 고급 차량과 결합하여 아파트 내외부를 ‘프리미엄 라이프스타일’의 무대로 탈바꿈시켰다. 그리고 이렇게 연출된 라이프스타일은 중산층 내 다른 집단과 명확한 선을 긋는 ‘구별짓기’의 언어로 기능했다(Park, 2021). 서울이나 수도권의 특정 지역에 위치한 중형 이상 평형대의 주요 브랜드 아파트에 거주하면서 프리미엄 가전과 고급 가구로 실내를 꾸미며 다양한 여가 활동을 즐기는 행위는 대중매체를 통해 상위 중산층이 자신의 계층적 지위를 확인하고 표현하는 일관된 소비 서사의 구성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이 지점에서 브랜드 아파트 광고는 다른 상품 광고들과 결합되면서 상위 중산층의 계층적 정체성을 구성하는 문화적 언어로 기능했다. 2001년 BC카드의 “부자 되세요”, 쌍용자동차 렉스턴의 “대한민국 1퍼센트”, LG전자 디오스의 “여자라서 행복해요” 같은 캐치프레이즈가 명품 소비 열풍과 함께 대중매체를 휩쓴 것은 이러한 변화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2장에서 살펴본 래미안의 ‘남다른 자부심’과 자이의 ‘앞선 라이프스타일’이라는 브랜드 콘셉트가 등장한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그것들은 외환위기 이후 새로운 소비자 집단으로 부상한 상위 중산층의 정체성 형성 욕구에 정확히 응답하는 것이었다.
이 집단의 부상이 아파트 브랜드 경쟁의 무대를 서울과 수도권의 특정 지역, 특히 강남 일대로 집중시키는 효과를 낳았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상위 중산층의 상당수는 1970년대 중후반 강남 개발 이후 이 지역에 정착해 왔거나, 또 다른 일부는 강남으로의 진입을 열망해 왔기 때문에, 주요 건설사들에게 반포, 잠원, 잠실 등 강남권 재건축 사업은 강남 거주 상위 중산층의 집합적 선택을 통해 자사 브랜드의 지위를 확인하는 핵심 무대였다. 달리 말해, 그것은 상위 중산층이 자신의 핵심 자산의 향방을 결정하는 투표 행위를 통해 특정 브랜드를 추인하고, 그 브랜드에 ‘우월적 지위’라는 상징 자본을 부여하는 일종의 사회적 의식(ritual)으로 기능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강남 재건축 수주전은 개별 정비 사업의 범위를 넘어, 브랜드 위계가 경합을 통해 형성되는 장이자 새로운 주거 모델이 전국으로 확산되기에 앞서 시험되는 무대이기도 했다.
물론 브랜드 아파트의 사회적 수요가 강남을 비롯한 특정 지역 거주 상위 중산층에만 한정되었던 것은 아니다. 2000년대 초반 이후 저금리 기조와 함께 주택담보대출 제도가 본격적으로 확대되면서, 일정 수준의 신용 접근성을 갖추고 내 집을 마련하거나 좀 더 나은 주거 조건을 갖춘 집으로 이주하려는 30~40대 중산층 역시 브랜드 아파트의 새로운 소비 주체로 등장했다(Yoo, 2010). 주요 건설사들이 TV 황금 시간대를 점유하고 일반 대중을 상대로 대규모 광고 공세를 펼친 2002년은 이러한 전환의 변곡점이었다고 볼 수 있다. 강남 재건축 시장이 기존 보유 자산으로 브랜드 아파트를 소비하는 상위 중산층의 선점 영역이었다면, 대출 레버리지를 활용한 젊은 중산층의 브랜드 아파트 구매는 서울 강북 뉴타운과 수도권 신도시, 그리고 지방 주요 도시로 브랜드 경쟁을 확산시킨 실질적인 동력이었다. 이 신규 진입층에게 브랜드 아파트 구입은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지녔다. 상위 중산층의 주거, 정체성, 라이프스타일에 접근하는 상징적 소비이자, 미래 자산 가치에 대한 기대를 반영한 금융적 선택이었다. 이처럼 주요 브랜드 아파트는 상위 중산층의 주거 상향·자산 투자 욕구와 젊은 중산층의 레버리지 기반 주택 마련·자산 형성 욕구에 차례대로 응답하면서, 특정 소수의 전유물에서 보다 광범위한 사회적 욕망의 대상으로 빠르게 영향력을 확대했다. 그 결과, 강남을 중심으로 형성된 브랜드 위계는 전국 주요 도시로 확장되었고, 아파트 가격이라는 시장 언어를 통해 계층 격차를 가시화하고 정당화하는 기제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3. 3. 문화적 매개자로서 디자인 전문회사의 실천
앞서 살펴본 바에 따르면 아파트 브랜드는 금융상품화된 아파트와 분화된 중산층 구조가 상호작용하면서 형성된 사회적 질서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아파트 브랜드화를 이끈 세 번째 요인은 바로 이 질서를 ‘브랜드’라는 형태로 시각화한 아이덴티티 디자인 전문회사(이하 ‘디자인 전문회사’)의 실천이었다.
이러한 역할이 가능했던 것은 1990년대 본격 소비사회 진입 이후 국내 디자인 전문회사의 역량이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1990년대 이후 한국의 소비문화는 제품의 기능적 속성만큼이나 브랜드가 제공하는 상징적 가치와 라이프스타일 이미지가 구매 결정의 핵심 변수로 부상하는 경향이 뚜렷해졌다(『월간 디자인』, 2006년 10월호). 이러한 경향은 IMF 외환위기 직후 잠시 약화되었다가 경기 회복을 거치면서 일상 경험의 차원에서 한층 더 강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에 따라 식품, 의류, 주류를 시작으로 가전, 금융, 통신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소비재 영역에서 브랜드가 경쟁력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고, 국내 기업들 역시 기업 경영이나 마케팅 차원에서 브랜드를 핵심적인 전략적 도구로 인식하고 강조하기 시작했다(Kang, 2020). 과거 CI(Corporate Identity)에 치중하던 아이덴티티 디자인 전문회사들도 이러한 흐름 속에서 브랜드 디자인 영역으로 본격적으로 진출했다. 『월간 디자인』의 구분법에 따르면, 이들은 주로 국내 디자인계에서 2·3세대에 속하던 디자인 전문회사들이었다. 1세대가 조영제, 권명광 교수를 필두로 하는 교수 중심의 디자인 전문회사들이었다면, 2세대는 1980년대부터 CI 중심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인피니트, 디자인파크, 디자인포커스, 심팩트 등이었다. 3세대는 2세대 전문회사에서 성장해 독립한 젊은 디자이너들이 1990년대 후반부터 활동을 개시한 디자인 전문회사로, “체계적인 디자인 인프라 시스템 구축, 철저한 시장과 소비자 분석에 따른 브랜드 연구”, 그리고 “소규모 운영” 등이 특징이었다(『월간 디자인』, 2003년 9월호). 이 세대 구분에 따르면, 아파트 브랜드 개발을 주도한 디자인 전문회사 중 디자인파크는 2세대에 속했고, 브랜드메이저, 소디움파트너스, 도머스파트너스 등은 3세대에 위치했으며, 크로스포인트는 2·3세대의 중간적 성격을 띠었다.13) 이들은 아파트 브랜드의 등장 이전부터 국내 기업들의 의뢰로 다양한 유형의 브랜드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디자인 역량을 축적해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변화된 환경 속에서 기업과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거나 주도적으로 합리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는 디자이너들도 적지 않았다. 이들은 여전히 ‘조형적이고 심미적인 차원에서 로고를 잘 디자인하는 것’이야말로 경영 컨설턴트나 마케팅 전문가가 범접할 수 없는 디자이너만의 고유 영역이라는 전통적 인식을 고수하고 있었다(Kang, 2008). 반면, 이 시기에 브랜드 디자인 분야에서 실질적인 성과를 거둔 디자인 전문회사들은 이와는 다른 태도를 취했다. 2004년, 디자인파크의 김현은 “마케팅 논리에 맞는 디자인이 성공을 보장하지만, 결국 최종적인 결과물은 디자인이다. 훌륭한 마케팅 논리도 좋은 디자인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힘을 발휘할 수 없다”며 프로젝트 내 디자이너의 능동적 역할을 강조했다(『월간 디자인』, 2004년 10월). 크로스포인트의 손혜원 역시 2005년 인터뷰를 통해 마케팅을 단순한 ‘협업의 차원’을 넘어 디자이너 스스로 ‘내면화해야 할 대상’으로 규정하며 인식의 확장을 보여주었다. 그에 따르면, 브랜드 디자인은 마케팅 감각을 내면화한 디자이너가 디자인 전 과정에서 그 감각을 개입시키는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효율적인 기호 체계를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었다(『월간 디자인』, 2005년 4월호). 이때 디자이너의 언어로 표현된 “마케팅 감각”이란 경영 컨설턴트나 마케팅 전문가들이 지닌 시장 중심의 전략적 사고와 기획 방법론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주요 디자인 전문회사들은 디자이너의 역할에 대한 문제의식을 심화하는 과정에서 아파트 브랜드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대부분의 프로젝트는 건설사 마케팅팀, 대형 광고대행사 혹은 브랜드 컨설팅회사의 협업 형태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디자인 전문회사는 의사결정의 주도권을 확보하는 데에는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각 언어의 전문가로서 최종 결과물을 완성해야 하는 주체로서의 디자인 전문회사의 위상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앞서 살펴봤듯이 아파트 브랜드는 한편으로는 특정 계층의 정체성과 라이프스타일을 함축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거주자가 보유한 자산의 시장 내 위치를 보증해주는 이중의 기능을 수행해야 했다. 이는 전략 기획의 실행만으로는 달성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일반 대중, 특히 주요 소비자층과 설득력 있게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도록 브랜드의 핵심 가치와 콘셉트를 시각화하는 전문적 실천이 반드시 뒷받침되어야 했다. 실제로 e-편한세상의 구름 모티프와 오렌지색 사용, 래미안의 저채도 배색과 지적인 한글 서체, 자이의 상승하는 ‘X’ 형태의 로고, 푸르지오의 초록색 계열 색상과 자연 친화적 이미지 등은 모두 이 번역의 산물이었다.
이들 디자인 전문회사가 개발한 브랜드의 기호 체계가 지닌 중요성은 그것이 단지 로고, 서체, 색채 등의 미시적 차원에만 머물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었다. 이 기호 체계는 TV 광고를 비롯한 다양한 통합적 마케팅 커뮤니케이션의 차원을 거쳐 실내 인테리어, 건축, 조경 등 아파트 단지의 물리적 환경 전반으로 확장될 수 있는 시각 언어의 프로토타입으로 기능했다. 이 프로토타입은 거주자가 아파트에 내재된 경제적 가치, 계층적 위계, 라이프스타일 등을 구체적으로 체감하게 만드는 다양한 물질적 형식의 근간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디자인 전문회사들은 아파트의 금융상품화와 상위 중산층의 부상이라는 조건 속에서, 건설사와 소비자 각각의 이해관계를 통합된 기호 체계로 번역해내고 그것을 통해 양자를 단단히 결속시키는 문화적 매개자의 역할을 담당했다. 바로 그런 역할의 성공적 수행을 발판으로, 그들 중 일부는 브랜드의 전략 기획에 깊이 관여하면서 디자인뿐만 아니라 네이밍 개발도 주도하는 전략적 파트너로서의 위상을 확보할 수 있었다.14)
4. 결론
2008년 세계금융위기로 부동산 시장이 위축 국면에 접어든 뒤, 2000년대 초중반의 브랜드 경쟁 열기는 한동안 재연되지 않았다. 2010년대 중반, 대림산업의 아크로(Acro), 대우건설의 푸르지오 써밋(Summit), 현대건설의 디에이치(The H) 등 주요 건설사들이 기존 브랜드의 상위 라인으로 하이엔드 브랜드를 출시하기 전까지는 그러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1998~2007년, 이 10년의 시기는 비록 외환위기라는 위기 상황 속에서 출발하긴 했으나, 브랜드 아파트가 한국 아파트 시장의 새로운 질서로 뿌리내린 역사적으로 특수한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본 연구는 이러한 맥락에서 IMF 외환위기 이후 아파트 브랜드화의 전개 과정과 이를 둘러싼 경제·사회·문화적 요인을 살펴보았다. 연구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1998년 분양가 자율화 이후 아파트 브랜드화의 전개 과정은 크게 세 단계로 구분해볼 수 있다. 첫 번째 시기는 1998년부터 1999년까지로, 분양가 자율화라는 제도적 변화를 계기로 LG빌리지, 롯데캐슬, 타워팰리스 등 아파트 브랜드의 선행적 형태들이 등장하는 단계이다. 이 시기의 시도들은 완전한 브랜드 체계를 갖추지는 못했으나, 소구 집단을 명확히 설정하고 그들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가시화하는 디자인 기제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두 번째 시기는 2000년부터 2003년까지로, 삼성물산의 래미안과 대림산업의 e-편한세상을 선두로 주요 건설사들이 체계적인 브랜드 개발·관리 시스템을 구축하며 아파트 브랜드가 본격 도입되는 단계이다. 강남 재건축 수주전이 브랜드 서열의 시험대로 부상하는 한편, TV 광고의 전면화로 아파트는 거주자의 정체성과 라이프스타일을 표상하는 기호 상품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세 번째 시기는 2004년부터 2007년까지로, 거의 모든 건설사가 독자 브랜드를 내세워 경쟁하는 ‘브랜드 아파트 시대’가 완성되는 단계이다. 이 시기에는 브랜드 보유 여부 자체가 아닌 개별 브랜드 간의 인지도와 선호도 격차가 자산 가격에 직접 반영되는 ‘브랜드 위계의 공고화’ 현상이 나타났으며, 선도·추격·기타 브랜드 그룹이라는 다층적 경쟁 구조가 형성되었다.
둘째, 이 변화 과정은 아파트의 금융상품화, 상위 중산층의 부상, 디자인 전문회사의 실천이라는 세 가지 경제·사회·문화적 요인이 중층적으로 결합한 결과였다. 분양가 자율화와 주택담보대출 확대로 촉발된 아파트의 금융상품화는 브랜드가 자산 가치를 담보하는 ‘금융적 기호’로 기능하는 경제적 토대를 마련했다. 이 토대 위에서 외환위기 이후 분화된 중산층, 특히 경제적 안정성과 강한 계층적 정체성 욕구를 동시에 갖춘 상위 중산층은 브랜드 아파트를 자산 증식과 구별짓기를 동시에 실현하는 소비 수단으로 전유하는 핵심적 수요 집단으로서 사회적 기반을 형성했다. 그리고 저금리를 기반으로 대출 레버리지를 활용해 시장에 진입한 젊은 중산층은 그 욕망을 전국적 규모의 사회적 현상으로 확산시켰다. 그러나 이 두 요인만으로는 어떻게 브랜드의 기호 체계가 시각화되었는지를 설명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바로 이 지점에서 주요 디자인 전문회사들이 문화적 매개자로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처럼 세 요인은 경제적 토대, 사회적 수요, 문화적 매개라는 각자의 논리를 따르면서도 서로를 강화하며 맞물렸고, 바로 그 맞물림 속에서 아파트 브랜드는 하나의 사회적 질서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본 연구의 향후 과제를 두 가지로 정리하고자 한다. 첫째, 문헌 자료 해석에 기반한 연구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래미안, 자이, 푸르지오 등 주요 아파트 브랜드의 개발 사례를 중심으로 해당 프로젝트에 참여한 디자인 전문회사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한 인터뷰 및 구술 채록을 추후 진행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브랜드 개발 프로젝트의 내부 역학과 의사결정 과정, 디자인 프로세스 등을 보다 실증적으로 규명할 수 있다면, 본 연구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세부적인 맥락을 한층 풍부하게 보완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2010년대 중반 이후 아파트 시장이 일반 브랜드와 최고급 하이엔드 브랜드로 뚜렷하게 이원화되는 현상과 그 역학을 본 연구의 연속선상에서 분석할 필요가 있다. 이는 2000년대 초·중반에 형성된 아파트 브랜드의 위계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진화했는지를 실증적으로 규명하는 데 중요한 단초를 제공할 것이다.
Glossary
1) 문화적 매개자는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제안한 개념으로, 이상길에 따르면 “생산과 소비 중간에 개입하면서 두 계기의 접합을 특수한 방식으로 수행”하는 전문가 집단을 의미하며, 디자이너, 마케팅·광고·홍보 전문가, 라디오와 텔레비전 제작자, 잡지 기자, 언론인, 평론가 등을 포함한다(Lee, 2010).
2) 건설교통부의 1997년 발표에 따르면, 국내 건설사의 시공능력 순위는 현대건설, 대우건설, 삼성물산, 동아건설, 대림산업, LG건설 순이었다(『조선일보』, 1997년 6월 26일.).
3) 브랜드 컨설팅 전문회사가 삼성물산의 주상복합 아파트 브랜드로 타워팰리스를 제안하던 당시 경쟁 테이블에 올랐던 브랜드명은 “라이프 프라이드, 삼성 프레미어스(Premier's)”, “루소의 자연, 다빈치의 예술, 뉴턴의 과학, 삼성 토로이스(Trois)”, “정상의 명사들이 우뚝 선 곳, 삼성 마루스(Marus)”였다(Brandmajor, 2001).
4) 아파트 브랜드 등장 초기에 등장한 대표 브랜드들은 이후 수많은 유사 브랜드를 양산하며 건설업계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LG빌리지’에서 ‘빌리지’라는 단어는 2000년대 초반에 ‘빌’로 축약되어 동부건설의 ‘센트레빌’, 성원건설의 ‘상떼빌’ 등 다수의 브랜드명에 적용되었다. ‘빌리지’가 보여준 주변 환경과 조망권을 강조하는 브랜드 네이밍 경향은 이후 ‘~힐’, ‘~뷰’, ‘~파크’ 등으로 확장되었다. 또한 ‘타워팰리스’의 팰리스는 ‘트라팰리스’, ‘루체팰리스’, ‘로얄팰리스’ 등에 적용되었다(Kang, 2006).
5) 이 역학을 전형적으로 보여준 것은 시리즈의 첫 광고인 ‘오페라 하우스’ 편이었다. 이 광고에서 공연 시작 직전에 도착한 여성 주인공이 기다리고 있던 동창생들 앞에서 입장표를 핸드백에서 꺼내 드는데, 그 순간 동창생들의 시선이 그녀가 손에 쥔 열쇠고리에 집중된다. 거기에는 디자인파크가 디자인한 래미안의 로고가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다. 동창생들의 표정은 화면 위의 마침표 세 개와 함께 부러움에 가득 찬 상태로 정지된다. 그 마침표 세 개는 곧이어 래미안의 브랜드 로고로 치환된다.
6) 웰빙은 단순히 질병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육체적·정신적으로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는 삶을 의미하는 것으로 1960년대 초반 미국에서 등장하여, 1970년대를 거치면서 ‘요가와 유기농 식당, 명상’ 등을 포함하는 일종의 라이프스타일로 정착되었다. 국내에 이 용어가 소개된 것은 2001~2002년이었으며, 사회적 트렌드가 된 것은 2003년이었다.
7) 소디움파트너스의 브랜드 디자인 설명을 참조. https://www.sodiumpartners.com/wk-prugio. (2026년 3월 1일 확인)
8) 그룹 구분은 2005/2006년의 K-BPI 브랜드파워(한국능률협회컨설팅), NCSI국가고객만족도 (한국생산성본부), 2005년 한국일보의 아파트브랜드대상, 2005/2006년 부동산 포털 닥터아파트의 아파트 브랜드 파워 설문조사, 2006년 부동산 114의 상반기 아파트 브랜드 선호도 조사 등의 결과를 종합한 것이다.
9) 이 가운데 공개 자료에 따르면, SK건설의 SK뷰는 디자인네트워크, 한화건설의 꿈에그린은 iBIZ커뮤니케이션, 금호건설의 어울림은 디자인파크가 브랜드 디자인을 담당했다.
10) 기타 그룹의 혼재 양상은 2007년에 출간된 아파트 브랜드 관련 저서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저서는 위에서 언급한 주요 건설사의 브랜드를 포함해 총 64개 국내 건설사의 아파트 브랜드를 다루고 있었다. 건설사별 브랜드는 다음과 같다. 극동건설의 스타클래스, 신동아건설의 파밀리에, 벽산건설의 블루밍, LIG건영의 캐스빌, 쌍용건설의 예가, 코오롱건설의 하늘채, 현진의 에버빌, 이수건설의 브라운스톤, 대우자동차판매 건설 부문의 이안, 계룡건설의 리슈빌, 금광기업의 베네스타, 남광토건의 하우스토리, 대동건설의 디:숲, 대성산업의 유니드와 스카이렉스, 대원의 칸타빌, 대주건설의 피오레, 동양건설산업의 파라곤, 롯데기공의 인벤스, 명지건설의 엘펜하임, 보성건설의 수자인, 삼부토건의 르네상스, 삼환기업의 나우빌, 서해종합건설의 그랑블, 서희건설의 아리채, 성원건설의 상떼빌, 신성건설의 미소지움, 우방의 유셀, 월드건설의 월드메르디앙, 한라건설의 비발디, 한신공영의 휴플러스(Ko, 2007).
11) 2005년, 스타급 여성 연예인을 모델로 내세운 아파트 브랜드의 TV 광고는 정점에 도달했는데, 이런 현상에 대한 문화적 비판 담론도 언론 지면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해, 문화평론가 김종휘는 아파트 브랜드명 대신 아파트에 여성 모델의 이름을 붙여 부르는 것이 더 변별성이 있을 것이라며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고현정 아파트, 이영애 아파트, 김남주 아파트, 최지우 아파트, 채시라 아파트, 김현주 아파트, 송혜교 아파트, 장진영 아파트, 김희애 아파트, 신애라 아파트, 김지호 아파트, 한가인 아파트.”(Kim, 2005, October 17).
12)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식이었다. “12월 입주를 앞둔 서울 역삼동 e-편한세상 아파트는 주변 아파트보다 2000만~3000만 원쯤 시세가 더 나간다. 외관이 독특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소비자들의 선호도가 높아졌다.” 이는 『조선일보』 계열사인 부동산 인터넷신문 『땅집고』의 2005년 10월 5일 기사 <아파트, 멋이 곧 머니다> 일부이다.
13) 디자인파크는 88서울올림픽 호돌이 마스코트로 대중에게 이름을 알린 김현이 1984년 창립했다. 크로스포인트는 디자인포커스 출신의 손혜원이 1986년 공동 창업했다가 1990년 단독으로 인수했다. 소디움파트너스는 미국 랜도 어소시에이츠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출신인 정일선이 1997년 문을 열었고, 도머스파트너스는 디자인네트워크와 심팩트를 거친 이재옥이 2000년 출범시킨 회사다. 브랜드메이저는 디자인파크 아이덴티티 기획팀 출신의 황은석이 1994년 창립한 브랜드 컨설팅 전문회사다.
14) 2006년 공개된 현대건설의 ‘힐스테이트’는 이러한 디자인 전문회사의 위상을 그 정점에서 증명하는 사례였다. 전통적인 시공 능력에서 압도적 우위를 점하고 있던 대형 건설사가 신규 브랜드의 네이밍과 아이덴티티 구축을 위해, 당시 ‘처음처럼’, ‘트롬’ 등의 연이은 성공작으로 브랜드 업계의 높은 평판을 얻고 있던 손혜원 대표의 크로스포인트에 크게 의지해야 했다.
Acknowledgments
이 논문은 2022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인문사회분야 중견연구자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NRF-2022S1A5A2A01047661).
This work was supported by the Ministry of Education of the Republic of Korea and the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NRF-2022S1A5A2A01047661).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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