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운궁 내 대한제국 외교 접견 의례 변화와 실내디자인의 지향
초록
연구배경 서구인들과의 접견을 독립국가의 지위를 지키기 위한 기회로 활용하고자 하였던 고종에게 접견 공간은 대한제국과 자신의 지위 및 존립의 명분을 드러낼 공간적 표상이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대한제국은 접견 의례를 근대적으로 정비해 나가며, 외교 의례 수용을 위한 공간 조성에 힘썼다. 이러한 맥락에서 당시의 접견 의례 변화와 이를 지원하는 공간의 변화상을 추적하고 그 이면에 담긴 의미를 도출하고자 하였다.
연구방법 본 연구의 대상은 대한제국의 외교 접견 의례와 의례 장소들의 실내공간의 변화상이며, 주요 접견 장소로 활용되었던 함녕전, 경운궁 휴게소, 돈덕전을 중점적으로 살펴보았다. 연구방법은 고종실록과 공사청일기, 주본 등 대한제국의 각종 기록물을 분석하였으며, 내용의 구체성을 보완하기 위하여 당시 고종을 접견하였던 외국인들의 자서전과 회고록, 신문 기사를 살펴보았다.
연구결과 대한제국의 접견 절차는 입궐-대기-알현의 순으로 규정되었으며, 알현의 절차는 전통적 절차에 서양식 예법을 절충하였다. 이에 따라 초기에는 전통적 궁궐 배치 속에 서양식 접객 공간을 삽입하고, 서양식 가구를 절충하여 접견 체계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대한제국 후기에는 서양식 공간 내에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지닌 표상을 융합하여 근대성과 정통성이라는 이중적 표상을 통합하려 한 변화가 확인된다.
결론 대한제국 접견 의례 공간에 나타난 실내공간의 특징은 시대적, 지정학적 위치가 만들어낸 동아시아 실내공간의 특수한 성격을 보여준다. 특히 접견 공간의 실내공간에 나타난 절충 양상은 조선의 임금이었던 고종이 근대 군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습득한 혼성적 감성과 이를 바탕으로 정립된 대한제국의 공간적 표상을 보여주는 사례로 의미가 있다.
Abstract
Background For Emperor Gojong, who sought to use audiences with Westerners as an opportunity to assert Korea’s status as an independent nation, the diplomatic reception rooms of the Daehan Empire served as spatial representations of the state’s legitimacy and his own sovereign authority. The empire sought to modernize its diplomatic rituals and devoted efforts to creating interior spaces suitable for Western-style etiquette. This study aims to trace the transformation of reception ceremonies and the corresponding spatial changes during this period.
Methods This study focuses on the diplomatic reception ceremonies and reception rooms in the Daehan Empire. The methodology involves the analysis of various primary sources from the Daehan Empire, including the Annals of Emperor Gojong, records of the Bureau of Construction, and official diplomatic documents. To supplement the specificity of these materials, the study also examines autobiographies and contemporary newspaper articles written by foreign envoys who met with Emperor Gojong.
Results The reception procedure in the Daehan Empire was standardized into the sequence of palace entry–waiting–audience. The protocol for audiences combined traditional court procedures with elements of Western etiquette. Initially, Western-style reception rooms and furnishings were inserted into traditional palace layouts to facilitate these process. In the later period of the empire, however, the integration of symbols from diverse cultural backgrounds integrated within Western-style spaces.
Conclusions The characteristics of reception rooms during the Daehan Empire reflect the unique nature of East Asian interiors shaped by the geopolitical and temporal context of the era. In particular, the eclecticism of these spaces illustrates the hybrid sensibilities developed by Emperor Gojong as he transitioned from a Confucian monarch to a modern sovereign. These spaces thus serve as significant examples of how spatial representation was employed to articulate the dual aspirations of modern statehood and dynastic continuity.
Keywords:
Daehan Empire Reception Room, Gyeongungung Foreign Reception Hall, Korean-Western Eclectic Interior Style, 대한제국 접견 공간, 대한제국 알현실, 한양절충 실내양식1. 서론
1. 1. 연구의 배경 및 목적
대한제국이 선포된 1897년부터 고종이 실권을 잃게 되는 1907년까지 10여 년의 짧은 존립기간은 궁궐 내 서양 실내장식이 압축적으로 유입된 시기다. 경복궁 시절부터 고종은 만국공법 아래 평등한 국가 간의 외교를 지향하기 위해 접견 절차를 점차 간소화하고, 유교적 규례에 따라 정전에서 거행되었던 접견 의례를 편전과 침전이 있는 내전 영역 중심으로 이동시켰다(Lee, 2018). 경복궁 시절 접견 장소였던 건청궁을 단장하면서 ‘황실전례관’이었던 손탁(Marie Antoinette Sontag)으로 하여금 서양 가구류를 들여와 외인 응접실을 서양식으로 꾸미도록 하였다는 기록은 대한제국 이전부터 알현실이 서양식으로 조성되는 변화가 있었음을 시사한다(Hwang, 2016). 대한제국 선포 후 고종은 황궁의 면모를 갖추기 위한 각종 사업을 시행하면서 천자(天子)라는 최고 존엄으로 격상된 지위를 드러내기 위한 전통적 상징화를 추진하는 과정 속에서도 궁역 내 근대적 외교 의례 수용을 위한 양관 건축에 힘썼다(Lee, 2020). 조선에 온 서구인들과 적극적인 접견을 통해 다양한 정보를 수집하고, 독립국가의 지위를 지키기 위한 기회로 활용하고자 하였던 대한제국의 의지가 서양식 실내장식을 들이는 가장 큰 계기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고종실록에 따르면 완전한 서양식 접견 공간으로 알려진 돈덕전이 완공되기 전까지 가장 많은 외교적 접견을 받은 장소는 전통 침전인 함녕전이었다. 그간 석조전을 비롯한 양관을 중심으로 고종 연간의 실내장식에 관한 연구, 조사가 이루어졌으나 서구적 물품의 조형적 특징과 유입경로에 집중되었으며, 접견 공간의 사용성 변화와 실내의장에 대한 종합적 고찰은 이루어진 바가 없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당시의 접견 의례 변화와 지원 공간의 변화상을 추적하고 의미를 재검토하는 작업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본 연구에서는 대한제국 접견 의례의 변화와 이의 지원시설인 외교 접견 의례 공간의 변화상을 통시적으로 살펴보고 그 산물로서 시기별 실내의장의 특성과 함의를 종합하고자 한다.
1. 2. 연구의 대상 및 방법
본 연구의 대상은 대한제국 외교 접견 의례 현황과 이의 지원시설인 경운궁 권역 내 접견 의례 공간이다. 참고로 경운궁은 고종 폐위 후부터 현재까지 덕수궁으로 불리고 있으나 본 고에서는 고종 황제 재위 기간의 명칭을 따라 경운궁으로 칭하였다. 본 연구의 시간상 범위는 대한제국을 선포한 1897년부터 주체적 외교권을 상실하게 되는 1905년 을사늑약 시점까지이다. 고종은 환궁 후 외교 의례에 적합하도록 경운궁을 대대적으로 재편하고, 왕실 업무를 전담하는 궁내부 산하에 대한제국의 궁내 교섭과 일체의 예식, 문서 번역 사무를 전담하는 기구인 ‘예식원(禮式院)’을 증설하는 등 외교 의례 정비에 힘썼다. 또한 고종은 정궁으로서는 부족한 점이 많았던 경운궁을 황궁으로 조성하며, 세계 각국에 대한제국과 황제의 위상을 드러내기 위한 행사로 추진된 ‘어극 40년 망육순 칭경예식(御極四十年望六旬稱慶禮式)’을 염두하고 경운궁 개조 작업을 이어갔다. 그리고 이 기간 고종의 외교 접견은 가장 활발히 이루어졌다. ‘황궁의 면모를 갖추어 가는 과도기 속에서 대한제국과 고종은 달라진 외교 접견 의례를 어떠한 방식으로 수용하였나?’ 그리고 ‘이를 지원하기 위한 실내공간은 어떠한 모습으로 조성되었나?’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본 연구에서는 대한제국 선포 이후 1905년까지 외교 접견 의례와 공간의 변화상을 추적하고자 한다.
주요 연구 방법은 문헌 연구로 진행되었다. 일차적으로 접견 의례를 지원하는 물리적 기반이 되는 건축물들의 건립 현황과 실질적인 행위를 지원하는 행정기구인 궁내부의 직제 개편과 주요 활동을 선행 연구를 통해 종합하였다. 또한 고종 재위기간 국정 기록인 『고종실록(高宗實錄)』과 대한제국 궁내부 공사청에서 작성한 『공사청일기(公事廳日記)』에서 외국 공사, 영사의 폐현 기록을 앞의 내용과 교차분석하여 대한제국 기간 동안 접견 장소가 변화하는 주요 시기 및 주요 접견 장소를 도출하였다. 두 번째 단계로는 최초의 근대적 국가전례서인 『대한예전(大韓禮典)』의 <각국사정국서시접견의(各國使呈國書時接見儀)>와 이를 보완하여 1902년에 마련된 외빈 영송 예식 규정인 『예식장정(禮式章程)』을 참고하여 앞서 구분한 시기별, 장소별 구체적인 접견 절차와 공간사용 양상을 도출하였다. 세 번째 단계에서는 황제로부터 안건을 재가받기 위해 작성되는 공문서인 『주본(奏本)』과 국가유산청(전 문화재청) 및 고궁박물관에서 발간한 경운궁 내 유적지 및 유물 조사 보고서를 분석해 시기별 주요 접견 공간에 소요된 마감재와 물품들을 검토하고, 각 요소의 조형적 특성과 실내의장의 지향점을 도출하고자 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1897년부터 1905년까지의 기간 동안 고종을 접견한 외국인들의 저서, 신문기사, 삽화를 분석하여 문서의 한계를 보완하고 실내공간 전반의 사용성과 분위기에 근접하고자 하였다. 일반인의 회고는 그들이 이전에 습득한 지식과 경험이 주관적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특정한 사실관계를 밝히는 목적으로는 한계가 있지만, 사용자 중심의 신체적, 정서적 경험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실내공간의 분위기를 전달하는 목적으로는 적절한 자료라고 판단된다. 따라서 접견 과정에서 이루어진 행위와 그에 사용된 실내에 대한 묘사와 감정을 중점으로 검토하였다.
2. 대한제국 외교 접견 의례 기반의 변화
2. 1. 대한제국 이전 외교 접견 의례와 궁궐 사용성의 변화
조선시대 외교 의례는 중국 사신으로부터 황제의 칙서를 받는 사대외교를 의미하였으며, 오례의(五禮儀)에 근거한 전통적 절차에 따라 정전에서 거행되었다. 그러나 1876년 조일수호조약(朝日修好條規)을 필두로 미국, 러시아, 독일, 영국, 프랑스 등 서방 국가들과 상호조약을 체결함에 따라 고종은 각 나라의 외교관을 접견하기 위해 옛 규례와 서양식 의례를 절충한 새로운 접견 의례를 마련하였다. 대한제국 이전 고종 재위기 궁궐 내 외교 장소와 접견 의례를 분석한 이강근(Lee, 2018)의 연구를 토대로 당시 접견 절차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춘 국왕이 교의 앞에 서면(南面立), 외빈이 당에 올라 기둥 안으로 들어가(陞堂入楹內) 타공례(打恭禮)를 행하고 국왕이 이에 대해 읍례하였다. 국서를 봉정하거나 담소를 나눈 뒤 물러날 때에도 타공례와 읍례로 서로 인사하고 외빈이 기둥 밖으로 퇴장을 한다. 계단과 기둥이 의식을 규범화하는 주요한 공간적 장치로 여겨졌으며, 따라서 넓은 마당과 6칸 대청이 알현실의 최소요건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황제가 일어나 인사를 받은 점, 엎드려 절하는 고두례가 아닌 타공례와 읍례로 인사법이 간소화된 점도 확인된다. 이강근(Lee, 2018)은 이러한 변화가 조선말 외교 접견 의례가 서양식으로 의례화되어 가는 과정으로 보았으며, 이와 더불어 주요 접견 장소가 정전이나 편전이 아닌 침전인 건청궁 권역과 별전인 집옥재 및 함화당 등으로 이동하는 변화에 주목하였다. 허유진 외(Huh et al., 2018)의 연구에 따르면, 건청궁 내에서도 왕의 침전이었던 장안당은 Reception Hall이라고 기록될 정도로 중요한 외교 장소로 여겨졌다. 장안당 뒤에는 조선 궁궐 내 최초의 양관이자 왕의 도서관으로 알려진 관문각이 건립되기도 하였다. 즉 아관파천 이전부터 서양식 접견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궁역 내 전통 궁궐 전각들과 서양식 건축물을 절충하여 배치하고, 서양식 실내공간을 조성한 시도가 확인된다. 이러한 시도는 이후 대한제국 접견 공간 조성에도 유의미하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2. 2. 대한제국 외교 접견 의례 체계의 변화
고종은 1897년 2월 경운궁 환궁 후 가장 먼저 태조의 어진을 봉안하기 위한 선원전을 중건하였고, 10월 12일 환구(圜丘)에서 제사를 지낸 뒤 황제로 즉위하였다. 이후 11월부터 명성황후의 국장이 치러졌는데, 11월 21일 발인 이후 신주가 빈전이었던 함녕전 옆 경소전에 봉안됨으로써 명칭을 경효전으로 변경하고 1898년 4월까지 이곳에서 상례(喪禮)를 행하였다(Lee, H., 2019). 일련의 의식을 주관한 것은 궁내부 산하의 장례원(掌隷院)으로 이들은 왕실 제사를 관장함은 물론 궁중의식, 조회의례와 외교사절의 접견을 지원하는 일도 담당하고 있었다. 국장 이후인 1898년 7월 장례원에서는 대한제국 최초의 근대적 국가전례서인 『대한예전(大韓禮典)』을 편찬하며, 외교관 접견 의례의 기초가 되는 <빈례(賓禮)>를 함께 제정하고 근대적 접견 의례를 규범화하였다.
『고종실록』 1900년 12월 16일 기사에 따르면, 고종은 궁내의 교섭과 일체의 예식, 친서, 국서 및 외국 문서의 번역 업무를 전담하는 기구인 예식원을 증치하며, 외교 업무를 더욱 강화하였다. 초대 예식원장은 특명 전권공사로 러시아 니콜라이 황제 대관식 및 영국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바 있는 민영환이었으며, 미국인 샌즈(William F. Sands)를 예식원찬무(禮式院贊務)로 임명하였다. 1901년에는 고종의 즉위 40주년과 기로소 입소를 축하하기 위한 ‘어극 40년 망육순 칭경예식’ 준비에 착수하며, 민영환을 위원장으로 한 예식 전담 기구인 ‘칭경예식사무소’가 설치되었다(Jeon, 2012). 고종은 1902년 2월 8일 임시 정전이었던 중화전(당시 즉조당)에서 즉위 40주년 축하와 대사령(大赦令)을 선포하고, 기로소(耆老所) 입소 의례와 진연을 베푸는 등 전통 의식을 거행하였으며(Lee, 2020), 예식원에서는 하반기 예정된 칭경예식에 대비하여 1902년 5월 13일 대한예전에서 부족한 빈례를 보완하여 각국 사신 등의 폐현과 영송절차를 수록한 <외빈폐현급영송식(外賓陛見及迎送式)>을 마련하였다(Chang, 2018). 이는 외빈이 폐하를 폐현하고 영송하는 예식 규정인 『예식장정(禮式章程)』으로 제작되어 1902년 6월 23일 각국 공사관, 영사관에 배포되었다. 그러나 거듭된 전염병 발발로 1902년 하반기 예정되었던 칭경예식은 결국 개최되지 못하였다.
2. 3. 경운궁 내 건축 활동과 외교 접견 의례 공간의 조성
고종이 이어할 당시 경운궁 내에는 즉조당과 석어당만이 있던 상태였다. 따라서 1897년 2월 이어 후 침전인 함녕전과 태조의 어진을 모시기 위한 선원전 등이 급히 중건되었다. 서양식 정전인 석조전도 이 시기 착공되었다(Ahn, 2013). 그리고 같은 해 양관인 구성헌이, 1898년에는 황제 도서관인 수옥헌이 준공되었는데(Woo, 2010), 이처럼 전통적 내전 영역과 양관을 하나의 궁역 내에 배치시키는 방식은 아관파천 이전 경복궁 건청궁에서 이미 시도된 바 있던 것이었다. 이후 1899년 말부터 접견 지원시설인 경운궁 휴게소 건립을 위한 3단계의 공사가 진행되었음이 『주본』을 통해 확인된다. 장필구(Chang, 2018)의 연구에 의하면, 공사의 재가(裁可)를 요청하는 첫 청의서(請議書)가 1899년 11월 13일 발송되었고, 3단계 공사를 위한 마지막 청의서는 1901년 12월 3일에 발송되었다. 정관헌의 완공도 이 무렵으로 추정된다.
1901년 8월에는 경운궁의 정전을 건립하기 위한 『중화전 영건도감(中和殿營建都監)』이 설치되며 황궁의 면모를 갖추기 위한 공사가 속속 진행되었다. 1902년 즉위 40주년 축하 진연에 대비해 임시 정전으로 쓰이던 즉조당과 석어당 권역이 재편되었고, 1902년 10월 비로소 중층의 중화전이 완공되었다. 또한 기존의 정문이었던 인화문이 철거되고 동문이었던 대안문이 정문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면서, 대안문-조원문-중화문의 삼문(三門)체계도 완성되었다. 전통 정전인 중화전 건립을 위해 석조전 공사는 연기되어 고종 폐위 이후에야 완공된다(Ahn, 2013). 이처럼 경운궁의 중심부가 변화하며 법궁의 체계를 갖추어 가는 동안 칭경예식의 서구식 연회장소로 활용될 돈덕전도 착공되었는데, 이 기간 중 수옥헌에 화재가 발발하여 이의 재건도 함께 진행되었다. 1903년경 돈덕전이 완공됨에 따라 황궁의 면모를 갖춤과 더불어 외교 접견 의례를 위한 공간적 바탕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1904년 4월 경운궁 내 대화재가 발생함에 따라 중화전과 함녕전을 비롯한 주요 전각이 대부분 소실되었고, 복구를 위한 중건공사가 1906년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2. 4. 소결_대한제국 외교 접견 장소의 변화
경운궁 내 접견 의례 체계와 주요 건축 활동의 변화와 더불어 경운궁 내 접견 장소가 변화한 양상을 검토하기 위해 1897년(光武 1년) 대한제국 선포 이후부터 1905년(光武 9년)까지의 『고종실록』과 『공사청일기』 중 1901, 1902, 1904년의 기록인 5, 6, 7책에 기재된 외교사절 접견 기록을 분석하였다. 『고종실록』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제공하는 국역본을, 『공사청일기』의 경우 5책은 소장처인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제공하는 디지털 원문을, 원문이 공개되지 않은 6, 7책은 소장처인 국립고궁박물관 유물열람신청(유물번호-고궁2152)을 통해 확인하였음을 밝힌다. 분석을 통해 도출된 외교 접견 장소 변화 양상은 다음과 같다.
접견 기록을 종합한 결과, 『고종실록』 1897년 10월 13일자 기사에 기록된 대한제국 선포와 황제 즉위 축하를 위한 각국 공, 영사의 소견을 시작으로 이후 1898년까지 외교사절의 접견이 있었음이 확인되나 장소는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1898년 샌즈(Sands, W. F., 1930)와 비숍(Bishop, I. B., 1897) 여사의 저서에 기록된 비공식적 접견을 통해 접견 장소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샌즈의 경우 당시 주한미국 총영사 알렌(Allen, H. N.)과 함께 미국공사관에 인접한 ‘초라한 벽돌집’에서 알현하였다고 기록하여 수옥헌 또는 구성헌에서 접견하였을 것으로 보이며, 명성황후 상례 기간 중 방문한 비숍은 ‘흰 창호지의 나무문과 격자창이 달린 새 전각’과 ‘신축 건물이 밀집된 중앙의 국왕의 처소(함녕전)’에서 두 차례 알현하였다. 이처럼 대한제국 초기 경운궁의 접견은 미비한 공간적 한계와 국장이라는 상황으로 유동적으로 운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명성황후 상례 이후 접견 의례를 위한 일련의 기반들이 준비되는 움직임 속에서 이루어진 1899년 첫 공식 접견은 『고종실록』 1월 12일 기사에 기록된 러시아 공사관의 폐현이다. 그리고 같은 해 청나라 전권공사, 독일 헨리 친왕, 일본 공사의 접견도 이루어졌는데, 장소는 모두 함녕전이었다. 1897년 완공된 구성헌의 기록상 첫 접견은 1899년 11월 14일로 경운궁 휴게소 건립 시기와 일치하는 점으로 미루어 휴게소 건립 과정 중 구성헌 내 알현실이 갖추어졌을 가능성이 시사된다. 1900년 공식적인 외교 접견 기록은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공사청일기』를 통해 1901년의 접견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대부분의 접견이 함녕전과 구성헌에서 이루어졌으며, 휴게소, 경운당, 덕경당에서 이루어진 접견이 일부 확인된다. 경운궁 휴게소가 접견 장소로 처음 언급된 것은 1901년 10월 18일 벨기에 공사의 폐현으로 이 무렵 휴게소가 완성에 이르렀음도 알 수 있다.
1902년 중화전과 삼문체계가 완성되며 황궁의 체계가 갖추어진 이후부터 1904년 4월 14일 대화재 발발 전까지 『고종실록』에 기록된 접견은 모두 함녕전에서 이루어졌다. 이를 통해 이 시기 함녕전을 중심으로 한 접견 의례 체계가 정착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공사청일기』에는 1904년 2, 3월 구성헌에서 이루어진 7건의 접견과 하반기 함녕전에서 이루어진 6건의 접견이 추가로 확인된다. 두 기록을 종합하면 중화전 완공 후 경운궁 대화재까지 함녕전이 외교사절의 주요 접견 장소로 기능하는 가운데 양관인 구성헌 또한 접견 의례 공간으로 여전히 기능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간 구성헌의 사용성에 대해 밝혀진 바가 거의 없었으나 서구식 접견을 수용하기 위한 목적으로 건립되었음이 시사된다.
1904년 경운궁 대화재로 함녕전이 소실된 이후부터 고종은 각국 공사관에 인접해 있는 수옥헌(현재의 중명전)을 편전 겸 침전으로 사용하였다. 『고종실록』상 1904년 하반기 외교사절의 접견은 확인되지 않지만, 『공사청일기』에는 수옥헌 6건, 돈덕전 7건의 접견이 확인된다. 화재 이후 구성헌에 대한 기록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1905년에는 11월 17일 을사늑약 이전까지 20여 차례의 영사, 공사의 접견이 『고종실록』을 통해 확인되는데, 이 중 16건이 돈덕전에서 이루어졌다. 즉 화재 이후 주요 외교 의례 장소는 돈덕전이 되었으며, 이를 통해 수옥헌으로의 이어가 당초 연회 목적으로 건립되었던 돈덕전을 공식 접견장으로 사용하는 계기로 작용하였음도 알 수 있다. 반면 을사늑약 이후 황제 양위까지 접견은 수옥헌에서 명칭을 변경한 중명전에서만 이루어졌는데, 대부분 일본인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군사령관을 만나는 일이었다.
3. 대한제국 외교 접견 절차와 공간 사용성
3. 1. 알현 시 복장
대한제국은 1900년 칙령(勅令) 제14호 〈문관복장규칙(文官服裝規則)>과 제15호 〈문관대례복제식(文官大禮服製式)>을 제정하여 행정 사무를 보는 문관의 알현 복장은 물론 일상복 역시 서양식으로 하도록 규정하였다(Lee, 2012). 이처럼 궁내 관원들의 복장조차 서양식 예복으로 규정한 점을 미루어 외국인이 황제를 접견할 시에도 서양식 예복 착장이 의무화되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칙령에 따른 구체적인 복식의 형태를 살펴보면, 알현 시 착용하는 궁중 내 대례복은 연미복 형식으로 모자, 상의, 검에 무궁화가 표현되어 신분을 구별하도록 하였으며, 각국의 사신을 만날 때, 궁중에서 잔치를 베풀 때, 내외국의 관인과 만찬할 때는 소례복인 연미복을 착용하도록 하였다. 1901년 방문한 여성 외국인인 테일러(Tayler, J. C., 1904)의 경우 ‘이브닝드레스’가 ‘필수(de rigueur)’라는 안내를 받았다.
3. 2. 대기 및 응접
1898년 편찬된 『대한예전』 <각국사정국서시접견의>에는 각국 외교관이 고종에게 국서(國書)를 올릴 때 인화문을 통해 입궐하여 외교관의 대기 장소인 대후소(待候所)에서 궁내부 대신, 외부대신과 함께 담소하였다가 고종을 접견하도록 하였다. 입궐 시 통과하는 문을 명시한 것으로 보아 편찬 시점에 지정된 대후소 역시 마련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위치를 특정할 만한 정보는 확인되지 않았다. 이를 보완하여 작성된 1902년의 『예식장정』에서는 황족 및 특파대사 등 외빈의 지위에 따라 휴게소에서 예식원장이 응접 및 다과를 접대하는 규정을 두었다(Chang, 2018). 경운궁 휴게소는 영건의궤나 궁궐도형류에도 남겨진 기록이 없어 실질적인 모습을 추정하기 어렵지만, 1904년 4월 발행한 『Korean Review』의 기사 <The Burnning of Palace>에 수록된 배치도[Figure 1]를 통해 화재 이전 경운궁 휴게소의 위치를 가늠해볼 수 있다.
Site plan of Gyeongungung Palace in 1904출처: Hulbert, Homer B., <The Burning of Palace>, Korea Review, V.4, 1904.4.
장필구(Chang, 2018)의 분석에 의하면 중화전을 의미하는 1 Audience Hall 동측이자, 함녕전을 의미하는 20 Imperial Apartment 전면에 위치한 15 Foreign Reception Hall이 경운궁 휴게소로 추정되며, 그 뒤에 위치한 19 Ceremonial Office는 예식원 사무소로 추정된다. 1901년에 고종을 접견하였던 테일러(Tayler, J. C., 1904)는 함께 알현하게 된 다른 ‘외국인 귀부인들과 함께 궁궐의 한 방’에서 대기하였으며, 궁궐 고관의 안내로 알현실로 향했다. 1905년 접견한 엠마크뤠벨(Kroebel, E., 1909)은 휴게소 대신 ‘중명전(수옥헌) 접견실 앞의 큰 홀’에서 대기하였고, 그 동안 민영환과 담소를 나누고, 의전 책임자인 고영희의 안내를 받았다. 그리고 하인들이 ‘다과와 궐련을 제공’하였다고 기록하여 예식장정의 규정이 실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3. 3. 알현실로의 이동
휴게소에 대기하였던 외빈들은 예식원 직원의 안내에 따라 알현실로 이동하여 황제를 알현하였다. 1901년 알현한 테일러(Tayler, J. C., 1904)는 ‘황제께서 준비되었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미궁 같은 통로와 한두 개의 안뜰을 지나 마침내 황제를 알현하러 들어갔다.’고 전하고 있어 1900년 2단계 공사로 마련된 휴게소의 복도를 거쳐 함녕전 또는 구성헌으로 이동한 정황을 확인할 수 있다. 1905년 수옥헌 홀에서 대기하였던 엠마크뢰벨(Kroebel, E., 1909)은 의전 책임자가 ‘황제가 행차하신다.’고 알리자 문이 열리고 알현실로 들어갔다고 하였다. 돈덕전에서의 구체적인 알현 기록은 없지만, 수옥헌을 통해 양관 내에는 휴게소와 알현실이 긴밀히 연계되었음을 알 수 있다.
3. 4. 알현
『대한예전』과 『예식장정』상 알현실 내 행동양식에 대한 구체적 규정은 나타나 있지 않지만, 『공사청일기』에 기록된 접견 기록의 시작이 대부분 ‘皇上具翼善冠小禮黃龍袍殿座’로 기록되어 있어 어좌 위 교의 앞에 황제가 자리하는 것으로 알현 의식이 시작되는 조선말의 절차가 대한제국 시기에도 변함없이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외빈에게 서구식 예복이 필수적이었던 것과 달리 황제는 황룡포를 착용하였다는 점도 확인된다. 황제와 황태자로 격상된 지위를 복식에 반영하여 공식석상에서 고종은 금척대훈장에 황포를 순종은 적색 곤룡포를 착용하는 것이 관례였다. 과거 접견례에 수반되는 행위 양식과 전통적 공간체계 간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구체적 표현은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칭경예식을 위해 배포된 『예식장정』에 첨부된 ‘정전배하지도(正殿拜賀之圖)’, [Figure 2]에서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지도의 위쪽 면에 어좌가 배치되어 있으며, 알현실 둘레로 정방형 도형이 그려져 있는데, 외빈이 사각형으로 둘러싸인 영역 밖의 서측에서 진입하여 어좌 앞을 가로질러 반대편 영역 밖으로 퇴장하는 경로가 표현되어 있다. 이 도식을 통해 알현 시 전통 전각이 지닌 구조에 대응하여 ‘당으로 오르는’, ‘기둥 안으로 들어가는’ 공간적 도상 개념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5. 인사법
알현실 내 인사법은 고종을 알현한 외국인들의 저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1898년 알현한 샌즈(Sands, W. F., 1930)는 ‘무릎 꿇고 절하는 대신 세 번 목례를 하고서’라고 하였고, 1905년의 엠마크뢰벨(Kroebel, E., 1909)은 ‘궁중의 의전절차에 따라 짧은 간격을 두고 세 번 머리를 깊숙이 숙이며 인사했다.’고 하였다. 이를 통해 알현 시작과 퇴장 시 세 번 머리를 숙여 인사하는 목례가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샌즈는 ‘황제와 황태자가 서 있는 탁자로 다가갔고’ 이어 ‘황제가 작고 섬세한 손을 내밀었다.’고 하였다. 또한 1901년 알현한 테일러의 저서(Tayler, J. C., 1904)에는 ‘황제의 손을 잡고 팔꿈치를 높이 들어 궁정 예의를 표하였다.’라는 기록이, 엠마 크뢰벨의 경우 ‘황제가 다가와 손을 내밀어 인사를 건넸다.’라는 언급이 있어 대한제국 선포 이후 황제가 악수로 답하였음이 확인된다.
3. 6. 소결_접견 행태 지원을 위한 공간적 대응
대한제국의 접견 절차는 입궐-대기-알현의 순으로 규정되었으며, 이에 맞추어 궐문을 통과해 대후소 또는 휴게소에 대기하였다가 알현실로 향하여 황제를 접견한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외빈의 대기와 접객을 지원하기 위한 시설로 경운궁 휴게소가 마련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1900년 이후 궐문-휴게소-함녕전 또는 구성헌의 동선이 마련되었는데, 이는 입궐-대기-알현이라는 접견 절차와 독립된 채와 채로 구성되는 전통 궁궐의 배치 특성을 대응시킨 것이었다. 반면 경운궁 대화재 이후에는 휴게홀과 알현실이 하나의 건축물에 통합된 돈덕전 또는 수옥헌에서 알현하게 되었으므로 궐문에서 돈덕전 또는 수옥헌으로 직접 향하는 동선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각 공간 내 행위를 종합하면, 서양식 예복을 갖춘 외빈이 휴게소에 당도하면, 다과나 궐련을 제공하는 등 서양식 접대가 이루어졌다. 알현실 내에서는 전통적 절차에 따라 외빈과 황제의 읍례와 답례가 이루어졌는데, 인사법의 경우 대한제국 이전 삼배 고두례를 타공례로 간소화하였던 변화에서 더 나아가 세 번의 목례와 악수라는 동서양 절충식 인사법이 정착되었음이 확인된다.
4. 주요 접견 지원 공간의 실내의장 분석
일련의 분석의 내용을 종합하면 시기별 경운궁 주요 접견 지원 공간은 경운궁 화재를 기점으로 전기에는 휴게소-함녕전 또는 구성헌, 후기에는 돈덕전 또는 수옥헌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중 구성헌은 석조전 건립 후 시기를 특정할 수 없는 시점에 철거되었고, 중명전 역시 1925년의 화재로 벽면만 남았던 것을 현재 외관만 복원한 상황이다. 그러나 경운궁 휴게소, 함녕전, 돈덕전의 경우 당시 모습을 추정할 만한 문헌들이 남겨져 있어 이를 토대로 접견 공간의 실내의장 요소들을 분석하였다.
4. 1. 대기 및 휴게공간
1901년에 고종을 접견하였던 테일러(Tayler, J. C., 1904)는 알현 전 머물렀던 공간을 마치 ‘영국의 응접실을 흉내 낸 것(imitation of an English parlour)’과 같은 모습이라 하였는데, 이는 당시 영국의 빅토리안 주택의 응접실과 유사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당시 테일러가 머물렀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은 경운궁 휴게소로 『주본』에 남겨진 1899년부터 1902년까지 휴게소의 건립 및 수리에 대한 기록을 통해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1899년 11월 13일 경운궁 휴게소 공사의 재가(裁可)를 요청하는 청의서상 1단계 공사명세서에 기재된 경운궁 휴게소의 규모는 전체면적 총 55칸으로 약 220㎡ 규모로 추정된다. 휴게소 내에는 48칸 규모의 대형홀과 작은 양실, 주방이 계획되었는데, 문양이 있는 양탄자(洋花氈子)가 366마(碼, yard)가 소요되어 대부분의 바닥에 카펫이 설치되었으며, 모자걸이(帽架)가 주문되었다. 1900년 1월 22일 발송된 2단계 공사 청의서에는 휴게소 복도를 서양식(洋製)으로 조성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으며, 화유리18촉괘등(花琉璃十八燭掛燈), 동8촉괘등(銅八燭掛燈)으로 기록된 샹들리에(掛燈)가 포함되어 있다.
모자걸이는 20세기 전후 유럽에서 고안된 홀 가구(hall furniture)의 한 유형이며([Figure 3] 참조), 동8촉괘등의 경우 당시 유럽에서 가장 보편적 형태의 청동 샹들리에였던 플레미쉬 샹들리에(Flemish brass chandeliers)로 추정된다([Figure 4] 참조). 이러한 요소들은 모두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 유럽의 중산층 응접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었다. 1901년 이루어진 3단계 공사는 휴게소 양실(陽室)과 차양(遮陽)의 신축공사 그리고 휴게소 수리와 목책 신축공사의 두 건으로 구성되었는데, 청의서상에는 큰 기둥(大樓柱)과 천장, 바닥 마감을 위한 소나무 판재(天板薄松, 地板長松), 줄함석(乼咸錫)이 기재되어 있다. 또한 대형 판유리(大琉璃)와 문양이 있는 화유리(花琉璃) 등이 포함되어 있어 유리문과 유리창이 설치되었고, 청색, 홍색 벽돌(靑紅壁石)이 주문되어 벽돌벽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녹색(綠柒)과 옥색(玉色柒) 채색안료가 사용되었다. 외장재의 전반적 특징으로 보아 앞서 건립된 정관헌과 매우 유사한데, 이는 광저우, 상하이 조계지에서 유행하였던 매판(買辦, Compradore)양식과 매우 유사한 특징이 있어 비슷한 시기 건립된 경운궁 휴게소 또한 이와 공통된 건축적 양식을 지녔을 것으로 판단된다.
Hat rack in product catalog출처: Maple & Co., <A few illustrations of useful articles suitable for presents>, 1900, p.90.
양관 내 마련된 휴게실의 실내의장에 대해서는 『덕수궁 돈덕전지 발굴조사(2018)』보고서를 통해 장식물의 편린을 확인할 수 있다. 출토된 유물 중에는 휴게실과 식당에서 발견된 석회(plaster)로 제작된 [Figure 5]의 부조장식이 다수 있는데, 고전적 장식인 팔메트, 루이 15세 양식의 특징을 지닌 스크롤과 함께 이화문 부조도 있어 대한제국의 실내장식물이었음을 시사한다. 또한 휴게소에서 발견된 [Figure 6]의 선형 또는 곡선의 몰딩 또한 확인된다. 이 장식물들을 통해 당시 휴게실이 지향한 입면의 양식적 특성을 유추할 수 있다.
선형 또는 곡선의 몰딩을 통해 벽 상부 또는 아치형 상인방 등을 몰딩으로 장식하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전반적으로 직선 형태의 몰딩과 고전주의적 모티브가 절충된 점으로 미루어 프랑스풍 신고전주의의 특징을 지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유럽에서는 19세기 중반부터 건축 현장에서 수작업으로 이루어지던 부조 장식이 교육 또는 상업적 목적으로 영국, 미국 등의 제조소(manufactories)를 중심으로 제품화되어 생산되고 있었으며, 프랑스 부흥양식의 영향으로 레일, 문틀과 창틀, 벽난로, 판벽 등을 장식하기 위한 목적의 로코코, 르네상스 양식의 재현품이 특히 유행하였는데(Thornton, J., 1994), 돈덕전에서 발견되는 조각들 역시 이와 유사한 제품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유물로 식당, 휴게실, 계단, 지하층 등에서 발견된 타일이 있어 알현실을 제외한 공간의 바닥 장식재로 문양 타일을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Figure 8] 참조). 이 타일들은 점토를 상감하여 구워내는 기법으로 만들어지는 엔코스틱(encaustic) 타일 패턴과 매우 유사하다. 엔코스틱 타일은 1843년에 허버트 민튼(Herbert Minton)이 중세 타일 패턴을 모방하여 양산하기 시작한 것으로([Figure 7] 참조), 19세기 후반 고딕 부흥 양식의 유행과 내구성 있는 바닥재 수요에 부응하여 영국의 교회와 공공건축물의 바닥재로 널리 사용되었다(Grimmer, A. E., 1996).
Pattern from Encaustic Tiles Pattern Book소장처: The Minton Archive(themintonarchive.org.uk), Finding No.-SD 1135/1-2
초기 엔코스틱 타일은 점토와 유약으로 만들어 가마에서 구워내는 세라믹 타입이었으나 대중적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시멘트를 경화시켜 만드는 시멘트 엔코스틱 타일이 등장하며 주택에서도 널리 사용되었다. 돈덕전 발굴조사 보고서(Cultural Heritage Administration of Korea, 2018)의 유물설명에 ‘태토(胎土)는 시멘트와 모래를 섞어 사용’하였다고 분석 결과를 밝히고 있는바 돈덕전 타일도 시멘트 엔코스틱 타일로 추정된다.
4. 2. 알현 공간
1989년 고종을 알현한 샌즈(Sands, W. F., 1930)는 구성헌으로 추정되는 알현실에 대해 ‘값싸고 번쩍번쩍하는 양탄자와 양식 접대용 의자’가 있는 ‘고궁의 거대한 대사 접견실과는 다른 모습’에 실망감을 표하였으며, 1901년 하반기 고종을 알현한 테일러(Tayler, J. C., 1904) 역시 ‘동양 궁전의 화려함과 눈부심에 둘러싸인 어좌’를 기대했다면 실망하였을 것이라고 하며, ‘방의 한쪽 구석에는 작은 테이블이 있었고, 그 뒤에 황제로 알아볼 수 있는 인물이 서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두 인물의 묘사를 통해 서양식 탁자와 의자를 들여 접견실을 양식으로 조성하는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초기 알현실 모습은 상당히 소박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902년 6월부터 8월까지 한국에 체류하며 고종의 초상화를 그리게 된 조셉 드 라 네지에르(Joseph de la Nézière)의 인터뷰를 게재한 프랑스 일간지 『라 비 일뤼스트레(La Vie Illustree)』의 1904년 1월 29일 기사는 달라진 알현실의 분위기를 전하고 있다. 기사에 따르면, ‘그 방은 가구들이 마치 프랑스 응접실처럼 갖추어져 있었고, 붉은색 옻칠로 장식된 병풍이 있었는데...’라고 하여 전통요소와 서양식 가구가 절충된 알현실의 모습을 전하고 있다.
네지에르가 고종을 접견한 시점의 알현은 대부분 함녕전에서 이루어졌다. 함녕전은 1904년 대화재로 소실된 후 1906년 다시 중건되었으며, 강제병합 이후 일제의 개입으로 개수작업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1904년 이전의 모습은 알 수 없다. 다만 『함녕전 해체수리 조사보고서(2002)』에 [Figure 9]의 수리공사 이전 함녕전 대청의 모습이 실려 있는데, 창호에는 프랑스 섭정 양식의 특징을 담은 황금색 코니스와 발란스로 구성된 커튼 박스가, 바닥에는 붉은색 카펫이 설치되었으며, 중앙에 10폭 병풍을 두고 그 앞으로 동일한 양식의 황금색 탁자와 의자가 배치되어 있다. 사진 속의 모습이 어느 시기 연출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네지에르가 전한 프랑스 응접가구가 절충된 알현실에 대한 분위기와는 부합함을 알 수 있다.
1904년 8월 27일 영국잡지 『The illustrated London news』에 실려 있는 유럽과 미국 종군기자들의 고종 접견 모습을 담은 삽화 [Figure 10]이 돈덕전으로 추정되어 대한제국 후기 양관 내 마련된 알현실의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다.
Illustration of meeting with Emperor Gojong출처: The illustrated London news, <Artist and Emperor: Our War Correspondent Received at the Court of Korea>, 27 Aug. 1904,
단상과 바닥에는 문양이 있는 카펫이 묘사되어 있는데, 돈덕전 삽화에 묘사된 문양 카펫은 창덕궁 희정당 알현실 내낭하(복도) 및 왕비 알현실의 페르시안 문양 카펫[Figure 11]과 매우 유사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박성희 외(Park. et al., 2021)의 연구에 따르면 20세기 초 궁궐에 유입된 카펫들의 직조 특징이 윌튼(Wilton) 카펫과 매우 유사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윌튼 카펫은 19세기 중후반 영국 키더민스터 지역 대형 카펫 공장들이 터키 및 페르시안 카펫을 모방하여 생산한 양모 카펫의 한 유형이다. 창덕궁 대조전과 희정당에 남아있는 카펫들은 모두 끝단이 처리되지 않은(seamless) 타입으로, 27인치 폭으로 생산되어 벽지처럼 원하는 길이만큼 주문하여 공간의 크기와 형태에 구애받지 않고 설치할 수 있어 벽지 카펫(wallpaper carpet)이라 불렸다(Jackson, M., 2018).
삽화를 통해 무엇보다 왕이 자리하는 단상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확인할 수 있는데, 단상 위 서양식 왕좌(throne)를 설치하지 않고 7폭 병풍을 둔 것을 알 수 있다. 대한제국은 경운궁 알현실뿐 아니라 해외공사관의 접객 공간, 황제의 초상 사진에 자수병풍을 두루 활용하였는데, 장경희(Jang, 2022)의 연구에 따르면 의궤에 기록된 병풍장의 숫자가 조선 후기에 비하여 대한제국 기간에 크게 증가했으며, 특히 경운궁 중건에 동원된 병풍장이 압도적으로 많았다고 한다. 즉 경운궁 재정비 과정에서 병풍이 실내장식물로 적극 활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889년 2월 워싱턴 D.C.에 개설한 [Figure 12]의 주미대한제국공사관의 객당(客堂)에도 빅토리아 양식의 실내공간에 10폭의 자수 병풍을 배치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자수병풍은 화가와 자수장인 및 병풍장의 협업을 통해 제작된다는 점에서 근대화되어 가는 황실 공예품 제작의 과도기적 산물의 의미가 있다. 당시 황실에서 이를 한국의 전통적 예술성과 근대성이 접목된 상징물로 인식하고 두루 활용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Kim, 2013).
Reception hall of the Korean Empire Embassy in the USA출처: 문화재청, <주미대한제국공사관 매입 1주년 기념 학술대회 자료집>, 2013, p.97.
크뢰벨(Kroebel, E., 1909)의 저서와 일본인 釋尾東邦가 순종의 즉위식을 기록한 『조선병합사 (朝鮮倂合史)』(1926) 중 <한왕즉위대전(韓皇卽位の大典)>의 돈덕전에 대한 묘사는 흑백의 그림이 지닌 한계를 보완하는 데 참고가 된다. 크뢰벨은 알현실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파리’를 지향하였으며, ‘황제의 색’인 ‘황금색 비단 커튼과 황금색 벽지’, ‘황제의 문장인 오얏꽃(rose)으로 장식’된 가구들로 장식되었다고 하였다. 현재 고궁박물관에는 프랑스 양식의 특징으로 구별되는 아칸서스 스크롤과 로카이유 부조장식을 지닌 가구[Figure 13, 14]들이 소장되어 있는데, 최지혜(Choi, 2019)의 연구에 따르면 이 가구 중 일부에 ‘惇德殿上二第一號卓子’라는 레이블이 있어 돈덕전에서 사용되었다 창덕궁으로 이관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밖에 돈덕전에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덕수궁 소장품인 제너럴 일렉트릭(General Electric Co.)의 샹들리에[Figure 15]에서 오얏꽃 주물 장식이 확인되어 이화문이 실내장식에 두루 활용되었다는 기록을 뒷받침하고 있다. 대한제국은 근대적 국가관과 통치권력을 상징하는 상징요소로 태극문과 이화문을 새롭게 도입하였는데, 이 중 태극기로 대표되는 태극문은 국가식별 문장으로, 이화문은 대한제국 황실을 상징하는 국장으로 주로 활용되었다(Mok, 2008). 이 샹들리에는 정형화된 스크롤과 고전 모티브의 조합으로 프랑스 신고전주의의 특징을 담고 있으나 곡선 파이프와 판형 금속재, 이화문과 잎사귀형 주물 장식이 조립되어 전체를 이루는 점, 전기 샹들리에가 지닌 아래로 구부러진 팔을 통해 양식주의와 근대 디자인 사이 특징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밖에 <한왕즉위대전>을 분석한 윤일주의 저서(Yoon, 1966)에는 ‘6본(本)의 대원주에는 금색의 용이 조각’되었다는 표현이 있는데, 이는 돈덕전 삽화의 기둥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기둥을 용으로 장식하는 것은 유럽 장식예술의 주제와 부합하지 않으며, 오히려 [Figure 16]에 보이는 자금성의 정전 태화전 옥좌에 설치된 6개의 금색 ‘반룡대주(蟠龍大柱)’, [Figure 17]의 청나라 심양고궁 대정전의 실내기둥과 의미상 일치하는 면이 있어 중국 황제의 상징을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왕실 내 청 법랑자기의 유입경로를 연구한 김은경(Kim, 2019)의 견해와 같이 대한제국이 청의 제후국을 탈피한 천자국임을 천명하였으나 현실적으로 참조할 수 있는 동양 최고의 시각적 형상이 청나라밖에 없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4. 3. 소결_대한제국 접견 공간의 실내양식과 의미
황제의 알현을 기다리는 대기 공간의 실내양식은 동시대 유럽 중산층 주택의 응접실이 지향하였던 빅토리아 양식과 유사하였을 것으로 파악된다. 반면 알현실의 경우 서구식을 상정하되 특별히 프랑스풍을 지향함과 동시에 전통적 상징 요소를 절충함으로써 황제로 격상된 지위와 정통성을 부여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경운궁의 알현실에 사용된 마감재들은 중산층의 고급 주택 수요를 위해 생산된 제품들로 추정된다. 돈덕전과 창덕궁의 가구를 중심으로 실내양식을 분석한 최지혜(Choi, 2019) 또한 동일한 견해를 제시한 바 있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 중산층 가정에서는 주택의 응접실, 서재, 침실 등을 과거 양식으로 조성하는 것이 유행하였는데, 특별히 한 공간 내 일관된 양식을 부여하는 것이 권장되었다. 그리고 실내장식 제품들은 이를 손쉽게 실현할 수 있는 방편으로 여겨졌으며, 대중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수많은 매뉴얼과 패턴북이 발행되기도 하였다(Lasc, A. I., 2013). 이처럼 건축과 실내공간이 분리되는 현상 및 취향 소비 주체의 등장은 실내 디자인사에서 근대성의 주요한 징표로 인식되고 있다. 프랑스 양식을 격상의 이미지로 인식하고 접견 공간에 일관되게 반영하려 한 움직임은 대한제국 황실 역시 유럽의 실내 이미지를 소비하는 근대적 주체가 되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접견실 실내공간에 나타난 전통적 상징 요소와의 절충을 통해 나름의 독자적 이미지를 추구하려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즉 알현실에 나타난 절충 양상은 조선의 임금이었던 고종이 근대 군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지향한 공간적 표상이자 과도기적 감성의 결과라 할 수 있다.
5. 함의 도출
3장과 4장에서 분석된 접견 절차에 따른 행위와 실내구성 요소 간의 상관성을 도출하기 위해 각 요소를 근대와 전통 요소로 [Table 02]와 같이 세분화하였으며, 이를 통해 다음과 같은 함의를 도출하였다.

The relationship between behavior and interior elements in the reception process of the Daehan Empire* indicates a part that reflects a specific symbolic meaning
5. 1. 대한제국 외교 접견 행위와 실내 요소의 관계성
접견 동선에 따른 주요 행위를 살펴보면 대기와 응접 단계에서는 서양식 예법에 따른 활동이 주가 되고 있으며, 이를 지원하는 휴게실의 실내 마감과 가구도 서양식으로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접견 의례의 근대화가 공간을 서양식으로 조성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알현실 내 황제 접견 절차는 조선말의 체계와 서양식 인사법이 절충되는 변화가 있었으나 외빈의 동선과 의식의 순서는 조선말의 절차가 준용되고 있었다. 따라서 전통적인 당(堂)의 형식을 갖춘 함녕전의 경우 여기에 변화한 서양식 인사법을 지원하는 요소로 서양식 응접 가구를 수용하여 절충하였고, 돈덕전의 경우 내외부 모두 완전한 서양식 홀을 추구하는 변화에 대응하여 서양식 공간구조 내에 전통적 알현 의식을 지원하는 장치로서 기둥과 단상을 배치하는 절충이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5. 2. 대한제국 외교 접견 공간의 지향과 표상성
알현실 실내공간의 상징화는 각 시기에 따라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음도 확인된다. 명성황후 상례 이후 시점인 대한제국 초기 알현실의 실내공간에 대한 기록은 확인할 수 없었지만, 전통 전각들과 양관들이 근대성과 정통성이라는 이질적 표상을 담당하며 양립되었던 경운궁의 체제에 맞추어 이질적 양식의 알현실(구성헌, 함녕전)이 함께 마련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황궁 정비와 칭경예식 준비가 이루어지던 중기에는 함녕전이 접견장으로 주로 활용되었는데, 이를 통해 문과 마당을 거쳐 왕의 영역(처소)으로 진입하는 과정과 당의 구조에 통합된 알현 절차를 통해 전통적 상징성과 행위가 합일되는 경험이 제공될 수 있었다. 이에 맞추어 전통적 의례를 위한 공간과 의복, 기물의 모든 표상을 황제를 상징하는 단계로 격상하는 작업도 이루어졌다. 그러나 일부 서구화된 예법을 수용하기 위해 서구적 요소를 도입하며 특별히 프랑스 양식의 특징을 지닌 요소들을 반영함으로써 정통성과 근대성의 이중적 표상이 한 공간에 공존하게 되었다. 후반기 조성된 돈덕전의 경우 프랑스 장식예술의 특징을 공간적으로 확장하려는 시도가 확인된다. 이와 더불어 서양식 공간 위에 전통적 의례 절차를 지원하고, 황제의 영역을 표상하기 위해 기둥과 단상이라는 전통적 요소를 도입함으로써 이질적인 두 양식을 통합하고자 한 시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황금색으로 실내 분위기를 통일하고 이화문을 투각한 서양식 가구, 한국의 전통적 예술성을 반영한 근대적 사물을 조합하는 등 이중적 표상의 합일을 이루려 한 점도 확인된다.
6. 결론
고종 연간에 나타난 궁궐 공간의 전례 없는 변화상은 학계에서 종종 ‘변형되고 왜곡’된, ‘원칙이 결여된’ 모습으로 해석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유교적 세계관의 중심이자, 세계질서 속 제국이라는 이질적 상징성을 동시에 갖추어야만 했던 대한제국의 특수한 성격을 이해의 배경으로 두면, 경운궁 실내에 나타난 ‘전통의 계승’, ‘서구양식에의 경도’로 해석되는 이질적 요소들이 뒤섞인 혼종적 양상을 합리적 소산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서구인들과 접견을 독립국가의 지위를 지키기 위한 기회로 활용하고자 하였던 고종에게 외교 접견 공간은 대한제국과 자신의 지위를 드러낼 공간적 표상이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대한제국 궁내부는 접견 의례를 근대적으로 정비해 나가며, 황제 존립의 명분을 드러낼 전통적 상징물들과 서구화된 접견 행태를 지원할 목적의 실내장식과 사물들을 절충시킨 접견공간을 조성하였다. 초기에는 전통 궁궐 배치 속에 서양식 접객 공간을 삽입하고, 알현실을 절충양식으로 조성하며 근대와 전통의 경험이 병치되는 체계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칭경예식의 주무대로 마련된 돈덕전에서는 황제의 지위와 정통성을 상징하는 청대의 건축적 오너먼트, 대한제국 근대성을 상징하는 이화문, 서구의 시선에서 품격을 드러낼 프랑스풍 가구, 구본신참의 정신을 드러낼 수 있는 전통 공예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지닌 표상들을 한 공간에 통합하는 변화가 나타났다. 즉 대한제국의 접견 공간에 나타난 절충 양상은 조선의 임금이었던 고종과 대한제국이 근대 국가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정립한 국가관과 타문화로부터 흡수한 감성이 복합된 공간적 표상의 결과라 할 수 있다.
그간 외관 중심의 기록만이 남아있었던 근대전환기 건축 유산의 실내공간의 원형에 다가가기 위한 방대한 자료 수집에도 불구하고 문헌 중심의 연구가 지닌 한계로 인해 원형의 모습을 충분히 구체화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본 연구를 통해 대한제국 접견 의례 공간에 나타난 실내공간 요소들의 도입 배경 및 각 요소의 양식, 배치 관계, 시각적 특징 등 구체적 양상에 대해 살펴볼 수 있었다. 이는 동시대 일본, 중국 및 동남아시아 식민국가에서 나타나는 절충 양상 및 일제강점기 조성된 조선 궁궐의 것과도 차이가 있는바, 본 연구를 토대로 일본, 중국 등 동아시아 국가 및 일제강점기 한양절충 양상과의 비교 연구를 후속 연구로 이어나가고자 한다.
Acknowledgments
이 논문 또는 저서는 2023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NRF-2023S1A5B5A16083145)
This work was supported by the Ministry of Education of the Republic of Korea and the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NRF-2023S1A5B5A16083145)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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