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s of Design Research
[ Article ]
Archives of Design Research - Vol. 37, No. 5, pp.457-472
ISSN: 1226-8046 (Print) 2288-2987 (Online)
Print publication date 30 Nov 2024
Received 26 Mar 2024 Revised 29 Aug 2024 Accepted 29 Aug 2024
DOI: https://doi.org/10.15187/adr.2024.11.37.5.457

활자 디자인의 여성주의적 표현 사례 연구

Seoyeon Kim , 김서연 ; , Soojin Park , 박수진
Division of Design, Student, Ewha Womans University, Seoul, Korea 이화여자대학교 디자인학부, 학생, 서울, 대한민국 Division of Design, Professor, Ewha Womans University, Seoul, Korea 이화여자대학교 디자인학부, 교수, 서울, 대한민국
Analysis of Feminist Expressions in Type Design

Correspondence to: Soojin Park curioussofa@ewha.ac.kr

초록

연구배경 활자 디자인이 언어 전달을 위한 용도를 넘어 그래픽 표현의 한 갈래로 자리 잡음에 따라 ‘작가로서의 디자이너’ 개념의 제안 이후, 활자 디자인으로 사회적 발언을 표출하는 사례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동시에 2015년 이후 한국에서 여성주의가 부상함에 따라, 여성주의를 표현하는 그래픽 디자인 작품에 발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었다. 따라서 본 연구는 활자체라는 매체를 활용하는 방법에 집중하여 여성주의를 표현하는 방식을 이해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여성주의를 표현한 활자 디자인을 알리고 작품 제작에 도움이 되는 것이 목적이다.

연구방법 본 연구는 여성주의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활자 디자인 사례를 탐구한다. 사례 수집 기준은 두 가지로, 첫째, 활자체 자체를 디자인한 경우와, 둘째, 활자체의 형태적 특성이 디자이너의 사회적 메시지와 연관된 경우를 선택했다. 연구는 여성주의와 그래픽 디자인에 관한 이론적 탐구를 진행한 후, 활자 디자인이 사회적 발언으로 사용되는 방식을 조사하며 전개된다. 사례 연구에 있어서는 문헌에서의 디자이너 인터뷰 등을 통해 표현 의도와 방법을 분석한다. 수집된 사례를 표현 방법에 따라 유형화하여 정리함으로써 활자 디자인의 여성주의적 표현을 분석했다.

연구결과 크게 네 가지 유형으로 사례들의 표현 방법을 분류하였다. 첫 번째 유형은 ‘활자체 이름으로 재조명이다. 두 번째 유형은 ‘상징적 그래픽 치환’이다. 세 번째 유형은 ‘활자 형태와 의미 연결’이다. 마지막 유형은 ‘단체 또는 활동 내 글자 재현’이다. 이 중 여성주의적 의미를 활자체라는 매체의 특성을 가장 적절히 반영한 유형은 첫 번째와 세 번째이다. 첫 번째 유형은 타이포그래피 역사에서 부재한 여성들을 후대의 활자체로 보완하는 역사적 맥락을 지니며, 세 번째 유형은 여성주의를 활자의 표현적 요소에 연결지었다는 점이 돋보인다.

결론 다양한 영역의 사회적 메시지를 활자로 표현한 사례와 여성주의적 표현 사례 간의 차이점과 유사점을 알아보며 여성주의 표현에서 관찰한 특수성과 발전 가능성을 살펴보았다. 앞서 분류한 사례 유형들에서 첫 번째 유형과 두 번째 유형은 여성주의 표현에서 특수한 지점이 있었으며, 세 번째와 네 번째 유형에서는 또 다른 발전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 활자 디자인은 실재적 언어와 시각적 언어를 혼합하여 더욱 효과적으로 발언을 전달할 수 있게 한다. 앞으로 이와 같은 디자인이 더욱 많아져 사회에 변화를 불러오길 기대한다.

Abstract

Background Since type design has evolved as a form of graphic expression and the concept of the “Designer as Author” has emerged, there has been a growing number of cases where type design is used as a social voice. Meanwhile, with the rise of feminism in South Korea since 2015, the development of graphic design that expresses feminism in South Korean society has great potential. Therefore, this study aims to understand how feminism can be addressed through typefaces. The goal is to promote and assist in creating feminist type designs.

Methods This study primarily investigated cases of feminist expressions in typeface design. The criteria for case selection were twofold. First, the work needed to be presented in a typeface format. Second, the design had to reflect the designer’s intention to convey a message for positive social change. Before analyzing the cases, the study reviewed feminist approaches to graphic design. Subsequently, the study examined letterforms as a means of social voice. Based on this conceptual understanding, the analysis and categorization of typeface designs interpreted as feminist were conducted.

Results After analysis, this study classified four main design methods: ‘Rediscovering by typeface naming,’ ‘Substituting with symbolic graphics,’ ‘Connecting meaning with type elements,’ and ‘Reproducing letters from past organizations or events.’ The first and third methods especially appeared to link feminism effectively with typographic features, since the first method had a historical context by supplementing the absence of women in the history of typography, while the third method stood out for connecting feminist ideas with the components of letterforms.

Conclusions This study examines the differences and similarities between type design cases addressing various social issues and those that address feminism. As a result, unique characteristics are identified in feminist expressions, along with the potential for further development. The first and second methods illustrate these unique characteristics, while the third and fourth methods suggest further potential. Since type design allows for an effective conveyance of statements by blending verbal and visual languages, this study concludes with the hope that such designs will become more prevalent in the future, bringing about positive social change.

Keywords:

Typography, Feminism, Feminist Design, Type Design, Typeface, 타이포그래피, 여성주의, 여성주의 디자인, 활자 디자인, 활자체

1. 서론

1. 1. 연구 배경 및 목적

오늘날 활자 디자인은 언어를 전달하기 위한 용도를 수행하는 것을 넘어 그래픽 표현의 한 갈래로 자리 잡았다. 활자체의 형식에 장식성을 더하는 것은 오래전부터 관찰되었던 현상이나, 기능보다 그래픽 표현을 위해 활자체라는 매체가 활발히 사용된 것은 80년대 이후부터이다. 동시에, 비슷한 시기에 ‘작가로서의 디자이너(designer as author)’ 개념의 제안으로 그래픽 디자인이 주체적 작품으로 기능할 가능성이 제시됨에 따라 그래픽 표현으로 사회적 발언을 표출하는 작품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이에 그래픽 표현의 갈래로서 활자체로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례 또한 늘고 있다. 본 연구는 사회 변화를 촉구하고 문제 제기하는 활자체의 제작이 늘어나는 현상에 주목하여 그래픽 표현으로서 활자체를 활용하는 방식을 이해하고, 특히 여성주의에 대한 메시지를 표출하는 방식에 대해 탐색하고자 한다.

2015년 이후 한국 사회에서는 일명 ‘페미니즘 리부트(Sohn, H., 2015)’라 불리는 흐름과 함께 여성주의가 부상하였다. 사회의 여성 차별과 억압을 인식하고, 동시에 해결하고자 하는 움직임들이 활성화되며 한국 디자인계 또한 변화의 면모를 보였다. 그러나 국내에서 여성주의를 주제로 표현한 작품 및 연구는 비교적 적어, 연구자의 관점에서 다양하게 발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었다. 따라서 본 연구는 메시지를 표출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활자체를 활용하는 방법에 집중하여 탐색하며, 이를 바탕으로 활자 디자인으로 여성주의를 표현하는 방식을 이해하고자 한다. 여성주의 표현뿐 아니라 활자체를 사용해 다양한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사례들의 표현 방법을 폭넓게 관찰하며, 비교 분석을 통해 활자를 매체로 한 표현이 취하는 보편적인 방식과 여성주의 표현의 특수성을 알아본다. 그럼으로써 여성주의를 표현한 활자 디자인을 알리고, 작품 제작에 도움이 되는 것이 목적이다.

1. 2. 연구 방법 및 범위

본 연구에서 ‘활자 디자인의 여성주의적 표현’은 여성주의를 주제로, 활자를 매체로 삼은 그래픽 표현을 의미하며, 이러한 표현을 관찰할 수 있는 디자인 사례를 탐구 대상으로 삼았다. 사례 연구에 앞서, 본 연구에서는 이론적 이해를 위해 먼저 그래픽 디자인과 여성주의의 관계를 조망한다. 다음으로, 사회적 발언으로서 활자 디자인을 다룬다. 디자이너의 사회적 발언 표출을 위해 활용하는 시각 매체로서의 활자 디자인에 접근하고, 여러 영역의 사회 문제를 제기하는 활자체 사례를 간략하게 조사한다.

사례를 수집하는 데 크게 두 가지의 기준을 고려하였다. 첫 번째로, 글자의 일시적 운용 또는 변형이 아닌, 활자체 자체를 디자인한 사례를 수집한다. 따라서 완성된 형식이 레터링과 같이 한정된 글자 표현인 경우는 제외하였다. 활자체 형식에서는 일관된 활자의 디자인을 살필 수 있을 뿐 아니라 사용자가 활자를 운용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기에 표현 방법을 다방면으로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활자체의 형태적 특성이 디자이너의 사회적 메시지와 맞닿아 있는 사례를 선별한다. 따라서 제작된 활자의 특성과 관련 없이 단순히 디자이너의 정체성과 관련되어 있거나, 관련 운동을 지지하고 있음을 표명하거나, 활자 판매의 수익을 관련 단체 등에 기부하는 경우는 제외하였다. 이는 활자 형태를 통한 사회적 메시지의 표현을 집중적으로 분석하기 위해서이다.

사례 연구로 중점적 탐구 대상인 여성주의적 표현의 활자 디자인은 디자인 매거진, 문헌 등에 기재된 설명글 또는 디자이너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구체적 표현 의도와 방법, 특징을 이해하여 분석한다. 도출한 내용을 토대로 활자체 사례의 표현 방법을 기준으로 유형화하여 정리한다.


2. 여성주의와 그래픽 디자인

2. 1. 여성주의 디자인

여성주의는 20세기 초 서구의 여성 참정권 운동을 중심으로 제도적 성평등을 위한 집단적인 움직임을 시도한 것을 시초로 한다. 당시 주요 목표는 참정권 획득이었기에 이를 달성한 후 운동의 집단적 형태는 점차 약화되었다. 이후 1960년대 후반부터 전 세계적으로 급진적인 사회, 정치적 문제 제기가 이루어지면서 여성주의 또한 부흥하였으며, 여성 참정권 운동을 1세대 여성주의로, 1970년대의 여성주의를 2세대 여성주의로 부르게 되었다. 2세대 여성주의는 사회 전반의 가부장제와 성차별을 인식하고, 해결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1970년대 초부터 미술의 영역에도 여성작가에 대한 차별적 인식 및 기회 불균형에 대항하는 흐름이 유입되고 성별 불균형의 문제를 드러내고자 하는 작가적 태도의 미술 작품이 적극 창작되었다. 이러한 작품들은 공통의 조형적 특징은 없지만, 여성주의적 태도와 예술관을 공유하므로 여성주의 미술이라는 이름으로 이해된다.

여성주의 미술의 발달과 함께 디자인의 영역에도 여성주의가 비평적인 관점으로 반영되었다. 가부장적이며 남성 중심적인 산업 구조 및 디자인 결과물에 대한 비판과 함께, 여성 디자이너의 역할이 축소된 디자인사를 분석하고, 여성의 디자인을 반영할 수 있는 대안적 역사를 쓰려는 노력이 이어졌다. 오늘날 여성주의와 디자인은 이러한 문제 제기와 대안 제시뿐만 아니라, 여성주의 미술처럼 디자이너 개인의 여성주의적 시각이 디자인 작품에 드러나는 형태를 보인다.

2. 2. 그래픽 디자인에서의 여성주의

그래픽 디자인의 영역에서 여성주의는 20세기 초 서구의 여성 참정권 운동을 홍보하기 위하여 제작된 포스터, 엽서, 우표 등에서부터 살필 수 있다. 이러한 시각물들은 당대의 남성 유권자들을 설득하려는 의도에 따라 파격적인 표현보다는 보수적인 스타일을 택했다(Morley, 2017). Figure 1의 예시와 같이 성녀처럼 우아하게 그려진 여성과 부드러운 어조를 통해 회유하는 방식으로 주장하는 바를 표현했다.

Figure 1

Printed media for women’s suffrage in the United States (1911, 1912)

이와 대조적으로 2세대 여성주의 이후 여성주의적 태도의 그래픽 디자인 또한 표현 방식에서 급진적 변화를 보였다. 성차별과 억압에 저항하고자 하는 의도로 사용되는 문구도 더욱 과격해졌으며 강렬한 색상 대비와 크고 선명한 그래픽으로 강한 에너지를 나타내고자 하는 작품들이 등장하였다. 사회 전반적으로 여성주의에 관한 관심이 증가하면서 여성주의적 그래픽 디자인을 다루는 모임도 다수 형성되었다. 일례로 영국에서 1974년에 발족한 ‘씨 레드 여성 워크숍(See Red Women’s Workshop)’은 페미니스트들이 운영한 스튜디오로, 사회의 여성 차별적 이미지를 타파하고 여성주의 시각 문화에 기여하고자 했다(Figure 2).

Figure 2

Feminist posters made by See Red Women’s Workshop (1978, 1977)

1980년대 후반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여성주의와 교차성 개념이 결합함에 따라, 다양한 사회적 정체성과 이념을 여성주의와 함께 포용하는 작품들을 살필 수 있다. 시각 표현 또한 다양화되어 각각의 주제에 걸맞은 조형성을 띠게 되었다. 여성주의적 태도의 그래픽 디자인은 이제 크게 두 가지의 방향으로 나뉜다. 하나는 개인의 사회적 발언을 표출하기 위한 목적 그 자체이며, 다른 하나는 여성주의 콘텐츠(행사, 저서, 전시, 브랜드 등)를 시각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다.

2. 3. 한국 여성주의 그래픽 디자인

한국에서는 2015년의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여성주의적 태도의 그래픽 디자인 작품이 가시적으로 늘어났다. 직접적으로 여성주의를 주제로 한 프로젝트도 있지만, 주로 여성단체 또는 여성주의를 표방한 콘텐츠를 위한 디자인을 살필 수 있다. 이 중에서 글자를 매체로 삼은 작품 사례도 확인할 수 있다. FDSC에서 2019년 8월 진행했던 ‘fflaghigh’ 워크숍도 그 중 하나다. 워크숍에서는 총 27명의 학생 디자이너들이 팀을 형성해 동시대 한국 페미니스트들의 문장을 주제로 레터링 작업이 주요하게 등장하는 깃발을 결과물로 제작하였다. 2022년 8월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개최한 행사 《미투운동 중간결산: 지금 여기에 있다》의 일환인 전시 《미투운동이 당신에게 건넨 말》에서도 디자이너 15인이 미투운동의 문장들을 시각화하였다. Figure 3과 같이 레터링 및 그래픽으로 각각의 여성주의를 표현한 작품을 걸개의 형태로 전시하였다.

Figure 3

Works from the exhibition 《Words From the MeToo Movement》 (2022)

김헵시바, 허수빈 디자이너가 참여한 2023년 한국성폭력상담소 후원 행사 《페미본색》의 디자인은 페미니스트들이 다채롭게 ‘본색’을 드러내길 바라는 기획 의도를 밝고 강렬한 색상과 발랄한 형태의 레터링 디자인으로 해석하여 제작하였다. ‘페미니즘 출판사’라는 수식어를 내걸고 2016년부터 운영하는 출판사 봄알람에서 출간하는 저서들의 책 디자인 또한 모두 여성주의가 중심 키워드로 관통하고 있다. 신인아 디자이너가 협업하여 디자인하는 한국여성민우회 소식지는 사회적 소수자가 디자인한 활자체를 활용하거나, 뒤표지에 여성 작가들과 협업하는 공간을 마련하는 방식으로 여성주의를 표현하고 있다.


3. 사회적 발언으로서의 활자 디자인

3. 1. 활자 디자인을 통한 문제 제기

포스트모더니즘의 흐름과 함께 90년대 중반, 그래픽 디자인의 영역에서 ‘작가로서의 디자이너’의 개념이 제안되었다. 디자이너가 작가가 된다는 것은 디자인이 특정 기능을 위한 수단 이상으로 디자이너의 주체적인 작품이 될 수 있음을 내포하는 것으로, 그래픽 디자인의 형식을 통해 디자이너의 사회적 발언을 표출할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러한 변화 가운데 활자 디자인도 독자적으로 사회적 메시지를 표현하는 데에 사용되었다. 일례로 디자이너 주자나 리코(Zuzana Licko)의 1997년 작 ‘힙노피디어(Hypnopaedia)’가 있다. ‘힙노피디어’는 언론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이유로 활자체 저작권이 법으로 보호되지 않았던 당대 미국의 실정을 비판하고 변화를 촉구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 Figure 4와 같이 장식적 자형 네 개를 회전시킨 패턴 형태를 통해 표현적 그래픽으로서의 측면을 부각하였는데, 활자는 언어와 분리된 디자이너의 지적 재산임을 시각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Figure 4

Construction of ‘Hypnopaedia’ pattern letters

활자 디자인을 사회적 발언의 매체로 활용하는 이유의 첫 번째로, 다양한 곳에 적용되어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배포된 활자를 여러 사용자가 이용하는 것만으로도 활자에 담긴 함의를 더욱 널리 퍼트리고, 다루고자 하는 문제에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두 번째로, 언어 전달 수단으로써 메시지를 보다 증폭시킬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사회적 문제의식을 담은 문장을 동일한 문제의식으로 제작된 활자로 표현하면 언어적 측면과 시각적 측면 둘 다 활용한다는 점에서 주장을 보다 강력하게 표현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오늘날 활자체의 디자인은 여러 영역의 사회 문제에 대한 변화를 촉구하기 위해 적극 활용되고 있다.

3. 1. 1. 환경주의

환경 문제를 주제로 다루는 경우, 관련된 실제 통계 자료를 반영하여 활자체로 시각화한 표현을 관찰할 수 있다. 먼저, ‘기후 위기 폰트(Figure 5)’는 핀란드 신문사 헬싱긴 사노마트(Helsingin Sanomat)의 기획하에 다니엘 쿨(Daniel Coull), 에이노 코르칼라(Eino Korkala) 그리고 한국의 노타입(NohType)이 기후 위기의 심각성을 알리고 변화를 촉구하기 위하여 2021년과 2022년에 걸쳐 라틴과 한글로 제작한 활자체이다. 미국 국립 빙설자료센터(NSIDC)에서 1979년부터 2019년까지 측정하고,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에서 앞으로 2050년까지 예측한 북극해 빙하량 데이터를 바탕으로 녹아내린 빙하의 형태를 활자로 형상화하였다(NohType, 2021). 배리어블 폰트 형식을 활용하여 얇아지는 활자 뼈대를 통해 녹아내리는 빙하의 모습을 더 극적으로 인지하게 된다.

Figure 5

‘Climate Crisis Font’, Latin (2021) and Hangeul (2022)

다음, 세계자연기금(WWF) 포르투갈 지부와 마케팅 에이전시 오길비(Ogilvy)가 협업하여 제작한 ‘멸종위기체(The Endangered Typeface, Figure 6)’에서는 각 알파벳이 머리글자가 되는 멸종위기종을 상징하고 활자 속 패턴의 밀도가 남은 개체 수를 나타낸다.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의 적색목록에 등록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표현되었다. 지속된 멸종 위기 문제의 심각성을 나타내기 위하여 ‘멸종위기체’는 배포된 후 연 단위의 업데이트로 최신 개체 수 변화를 활자 패턴의 밀도에 반영한다.

Figure 6

‘The Endangered Typeface’ (2023)

3. 1. 2. 반인종주의 및 다문화주의

미국 기반의 디자이너 트레 실즈(Tré Seals)의 보컬 타입(Vocal Type)은 활자체로 반인종주의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1인 타입 파운드리(Type Foundry)이다. 예시로, 대표작 ‘마틴(Martin)’은 흑인 해방 운동가 마틴 루터 킹 주니어(Martin Luther King Jr.) 목사의 이름을 활자명으로 상징화한 활자체이다. 형태적으로는 루터 킹 목사가 암살당했던 1968년 미국 멤피스 흑인 미화원 파업 시위에서의 피켓 글씨를 재현하였다. 보컬 타입은 이처럼 사료를 통해 역사적 시위에서의 피켓 글씨를 재현하거나 재해석함으로써 활자체에 사회적 함의를 담으며, 반인종주의를 지향하는 여러 집단의 운동을 주제로 다룬다(Figure 7). ‘마틴’, 그리고 비슷하게 흑인 운동을 주제로 다룬 활자체 ‘바이어드(Bayard)’, ‘마샤(Marsha)’는 2020년 세계적으로 일어난 ‘블랙 라이브스 매터(Black Lives Matter)’ 운동 당시 관련 시위, 벽화, 전시 등에 활발히 활용되며 주목을 받았다.

과거가 아닌 현재의 운동을 주목한 사례로는 디자인 스튜디오 비타민 런던(Vitamin London)의 ‘토픽 타입 BLM(Topic Type BLM, Figure 8)’이 있다. ‘토픽 타입 BLM’은 ‘블랙 라이브스 매터’ 운동 당시 제작되었던 전 세계의 시위 피켓 글씨들을 모아서 재료로 활용하였다.

Figure 7

Example of typefaces made from Vocal Type (2019, 2019, 2022)

Figure 8

‘Topic Type BLM’ (2020)

작가 조혜진의 《타이포잔치 2023》 출품작 ‘이주하는 서체(Figure 9)’는 한국에 거주하는 이주민들의 손글씨를 모아 개발한 활자체이다. 설문을 통해 참여자들로부터 손글씨를 수집하여 620자를 생성한 뒤, 기존의 한글 바탕체와 섞어 배포하였다. 이주민과 한국인을 구별 짓는 권력이 작동하는 체계로서 한글 활자체를 바라보고 이를 균열 내는 의도로 이와 같이 표현한 것이다(Korea Craft & Design Foundation, 2023).

Figure 9

‘Migrating Typeface’ (2023)

3. 1. 3. 퀴어

퀴어를 상징하는 무지개 깃발을 창시한 인권 운동가 길버트 베이커 (Gilbert Baker)를 기리고자 만들어진 ‘길버트체’는 활자 색상으로써 그 의미를 나타낸다. 2017년 베이커의 작고 이후 그를 기념하기 위한 ‘타입 위드 프라이드(TypeWithPride)’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마케팅 에이전시 오길비와 타입 파운드리 폰트셀프(Fontself)가 협업하여 제작하였다. 배포 이후 6월 프라이드 먼스(Pride Month)를 기념하여 뉴욕시 곳곳에 전시되었다. 2019년에는 기존의 라틴 활자체에 일본 가타가나 활자가 추가되었으며, 레바논의 베이루트 프라이드(Beirut Pride)에서 개별 아랍어 활자체로 만들고자 하는 시도가 있었다. 2020년 한국에서는 474명의 공동제작자와 함께 비온뒤무지개재단에서 ‘길벗체’라는 이름으로 한글 활자체를 개발하여 배포하였다(Figure 10).

Figure 10

‘Gilbert’ in Latin (2017), Korean (2020), Japanese Katakana (2019)

미국 기반의 디자이너 냇 파이퍼(Nat Pyper)가 2018년에 작업한 《러브 레터의 퀴어한 해(A Queer Year of Love Letters)》는 퀴어 활동가, 단체, 예술가를 기리는 의미로 제작한 아홉 가지의 활자체가 담긴 활자 연작이다. 각각의 활자체가 상징하는 인물과 관련된 작품 등에서의 글자, 글씨를 활자체로 재해석하였다. 일례로 연작 중 ‘마틴 웡(Martin Wong)’은 중국계 미국 작가이자 퀴어 예술가였던 마틴 웡의 회화 작품 중 미국 수화 알파벳 그림을 바탕으로 제작한 활자체이다(Figure 11).

Figure 11

‘Martin Wong’ (2018) and Wong’s works related to American Sign Language

전통적인 사회의 규범 및 성별을 해체하는 ‘퀴어니스(Queerness)’를 표현하기 위하여, 대문자와 소문자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드는 방식(Figure 12)으로 활자 위계를 전복시킨 《저항체 (Protest Font)》도 퀴어 의제를 다루는 활자의 특징을 살필 수 있는 예시이다. 퀴어 출판 및 프로그래밍 단체 ‘젠더 페일(GenderFail)’의 활자 연작으로, 1960년대 후반부터 오늘날까지의 퀴어 시위 또는 행진들에서 사용되었던 피켓 글씨를 재현하였다.

Figure 12

GenderFail’s 《Protest Font》(2018-)

3. 1. 4. 소결

사례 탐구를 통해 활자라는 매체가 광범위한 사용자에게 닿을 수 있는 효과적인 메시지 전달 수단으로, 또는 특정 인물, 행사 또는 단체에 헌정하는 의미로, 그리고 불평등한 사회 권력을 들추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본 연구에서 조사한 사례들을 통하여 발언을 표현하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활자체 이름으로 재조명’, ‘활자 형태와 의미 연결’, ‘활자 색상과 의미 연결’, ‘단체 또는 활동 내 글자 재현’의 방식을 관찰하였다. 사례에 따라 여러 가지의 표현이 겹친 채 나타나기도 한다. 이를 표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넓게 보았을 때 인권 문제로 수렴되는 반인종주의 및 다문화주의 그리고 퀴어 활자체는 표현 방식이 유사하게 활용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3장에서 정리한 유형을 중심으로, 다음 장에서 여성주의적 활자 디자인 표현을 분석하고자 한다.


4. 여성주의적 활자 디자인 표현 유형

4. 1. 활자체 이름으로 재조명

남성 디자이너 중심의 타이포그래피 역사 속에서 주변부 인물로 소외된 여성 또는 그런 여성들을 상징하는 가상 인물의 이름을 활자체에 붙여 재조명하며 여성주의를 표현하는 방식이다.

프랑스의 활자 디자이너이자 디자인 연구자인 알리스 사부아(Alice Savoie)의 ‘루세트(Lucette)’는 프랑스의 활자 제작자이자 디자이너였던 루세트 지라르(Lucette Girard, Figure 13)라는 여성의 이름을 활자체 명으로 사용하였다. 그는 20세기 후반 아드리안 프루티거(Adrian Frutiger), 로제 엑스코퐁(Roger Excoffon)과 같은 저명한 남성 디자이너들의 조수로서 디자인에 기여했다. 사부아는 프루티거에 관한 저서 『Adrian Frutiger, Typefaces: The Complete Works』에서 프루티거가 파리에서 가르친 학생 중 한 명이자 그의 첫 조수로 고용된 지라르에 관하여 알게 되었으며, 지라르는 디자인에 재능 있는 이로 묘사되었으나 그 글 이외에 어느 역사적 문헌에서도 그에 관한 정보를 찾을 수 없다고 한다(personal communication, November 6, 2023). 이에 따라 사부아는 본인이 제작한 활자체에 루세트 지라르의 이름을 붙여 지라르뿐 아니라 활자 디자인에 공헌하였으나 역사 속에서 잊힌 수많은 여성 디자이너들을 기리고자 하였다(Figure 14).

Figure 13

Lucette Girard in Frutiger’s office (ca. 1956)

Figure 14

‘Lucette’ (2020, in progress)

2020년 프랑스에서 열린 전시 《앙주 데히스트 되살리기(Reviving Ange Degheest)》는 ‘루세트’와 같은 맥락을 기반으로 두고 있다. 이 전시는 브르타뉴 유럽 미술 아카데미(EESAB)의 수업 결과물로, ‘앙주 데히스트’라는 가상의 20세기 여성 활자 디자이너를 주제로 삼았다. 20세기 여성 활자 디자이너에 대한 실제 사료가 부재하기 때문에, 가상의 디자이너를 만들어 전시 주제로 삼았다고 한다(Riechers, 2022). 전시는 참여 학생들이 제작한 여섯 활자 가족을 ‘데히스트’의 작품으로 명명하여 중점적으로 선보였는데, ‘데히스트’의 작품들이 20세기 후반의 인쇄 및 활자 발달사를 반영하고 있다는 아이디어가 중심이 되어 각각 다른 활자 도구에서 비롯된 디자인을 보였다. 따라서 ‘데히스트’의 작품으로 만들어진 활자체들은 새김 글자에서 픽셀 기반의 디자인까지 아우른다. Figure 15에서와 같이 활자 작품과 함께 관련된 실제 활자 사료, 도구가 전시되었는데, 여성이 부재한 실제 역사에 대안적인 역사를 덧붙인다는 의미를 지닌다.

Figure 15

Exhibition installation view of 《Reviving Ange Degheest》 (2020)

4. 2. 상징적 그래픽 치환

여성주의적으로 상징적인 문구 또는 이슈를 담은 간결한 그래픽 형태가 활자를 치환하는 표현 방식이다. 이 ‘간결한 그래픽 형태’는 시각적으로 알파벳과 관련이 없어 보이더라도 의미 면에서 알파벳과 연관되어 활자로 기능한다.

‘푸시 갈로어(Pussy Galore)’는 1994년 영국의 여성 디자인학자들이 결성한 WD+RU(Women’s Design + Research Unit, 여성 디자인 연구 유닛)가 제작한 활자체이다. 1994년의 타이포그래피 포럼 《퓨즈(FUSE)》 행사 내 강연자들이 전부 중산층 백인 남성뿐임을 인지하고 문제를 제기하며 WD+RU가 결성된 이후, 그 문제의식을 같은 해에 발간된 『퓨즈』 디지털 잡지에 시각적인 결과물로 담고자 만들어졌다(The Editors, 2016). ‘푸시 갈로어’는 여성을 대상으로 한 사회의 인식을 문제 삼고 재평가를 유도하기 위하여 고정관념을 나타내는 여성 이미지를 내용으로 삼았다. 각 활자는 알파벳보다 추상적 그래픽에 가까운 형태를 보이며, 선택된 개념 및 문구들이 그래픽 안에 직접 등장하기도 한다. Figure 16에서 문구의 일부인 ‘성녀’, ‘히스테릭한’, ‘이브의 뱀’, ‘멍청한 금발(dumb blonde)’ 등, 차별적 고정관념을 강화하는 여성상을 확인할 수 있다.

Figure 16

‘Pussy Galore’ (1994)

2017년 미국의 광고 에이전시 Y&R에서 제작한 활자체 ‘페미니스트 글자(The Feminist Letters)’는 여성 관련 이슈를 상징적으로 시각화하였다. 동일 임금, 재생산 권리, 여성의 건강, 정치, 성추행과 관련한 법률 등 다양한 이슈에 주목하는데, “‘A’는 ‘ass kicking women(강인한 여성)’, ‘B’는 ‘birth(재생산)’, ‘C’는 ‘campus assault and safety laws(캠퍼스 내 추행 및 안전 규칙)’를 대표한다(Typeroom, 2018)”는 구호처럼 각 이슈의 머리글자를 기반으로 연결 짓는다. ‘페미니스트 글자’는 2017년 1월 미국 워싱턴의 여성 행진에서의 시위 문구 피켓에 활용되어 저항의 메시지를 더 강력하게 표현하였다(Figure 17). 또한, 상원의원에게 여성문제와 관련한 메일을 보내거나 소셜 미디어에서 여성주의적 메시지를 주장할 때와 같은 문제 제기의 상황 속에서 전달하는 목소리를 증폭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Figure 17

‘Feminist Letters’ used for protest signs during the 2017 Women’s March

4. 3. 활자 형태와 의미 연결

활자의 굵기 및 너비, 활자 공간, 고유한 형태적 특징 그리고 폰트 형식의 사용 등 활자를 구성하는 여러 가지 요소들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표현 방식이다. 각각의 요소들에 담긴 의미는 디자이너가 전달하고자 하는 여성주의 메시지를 표현한다.

영국 런던을 기반으로 작업하는 디자이너 마리 블랑제(Marie Boulanger)의 배리어블 폰트 작품 ‘벌바 (Vulva)’는 여성 폭력 피해자였던 본인의 개인적 경험을 반영하는 동시에 여성 폭력 가해자에 대한 처벌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의 변화를 촉구하는 여성의 목소리를 지지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제작되었다. ‘벌바’는 대표 굵기인 ‘블랙’으로 굵어질수록 점차 활자 형태의 고유한 특징이 드러나도록 제작되었는데(Figure 18), 이 특징은 활자체의 이름이기도 한 여성의 외음부(Vulva)를 연상시키는 형태이며 ‘V, W, X, Y, M’ 내부의 대각선 기둥 사이 반형태를 통해 나타난다. 여성의 외음부를 활자체의 이름 및 형태적 특징으로 사용한 것은 여성 신체의 언급을 둘러싼 사회적인 금기를 깬다는 의미이다. 블랑제는 활자가 굵어짐에 따라 자신을 비롯한 여성 피해자들이 강요받은 침묵에서 벗어나 목소리가 점점 커지는 모습을 표현했다고 한다(Studio Ground Floor, 2021).

Figure 18

‘Vulva’ weight progression

블랑제와 마찬가지로 런던을 기반으로 작업하는 디자이너 마리옹 비세리에(Marion Bisserier)의 활자체 ‘굿 걸(Good Girl)’ 또한 형태 요소에 여성주의적 의미를 담아 제작한 사례이다. 비세리에는 같은 수의 남성과 여성이 타이포그래피 영역을 공부하고 있음에도 관련 기업 또는 콘퍼런스 등에서의 여성의 비율이 남성과 비교했을 때 현저하게 떨어진다는 사실에 주목하였다(Morley, 2019). ‘굿 걸’은 이러한 이슈에 대한 본인의 주장을 피력한 것으로, 형태가 무겁고 속공간이 매우 얇은 활자꼴로 활자 공간을 최대한 많이 차지하여 눈에 잘 띌 수 있도록 의도하여 제작되었다(Figure 19). 이는 활자 디자인 산업에서의 여성 인력 부족 현상과 반대되는 모습으로, 활자의 모습처럼 산업 내에서도 여성들이 남성과 동등한 위치를 차지하였으면 하는 바람이 시각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비세리에는 동시에 ‘굿 걸’, 즉, 착한 여자아이라는 이름을 붙여 고정관념을 깨는 이런 활자의 모습이야말로 ‘굿 걸’이라 강조하며 의미를 비튼다. 이에 따라 최종 결과물이 성별 고정관념에 따라 여성적이라 여겨지는, ‘장식적이고 유려한’ 형태를 답습하지 않도록 하였다.

Figure 19

‘Good Girl’ (2019)

4. 4. 단체 또는 활동 내 글자 재현

여성주의 단체 또는 활동에서 활용되었던 글씨를 바탕으로 활자체를 제작하여 그 활동을 기억하고 이념을 이어받는다는 의미를 가진 표현 방식이다. 따라서 활자체의 존재 자체로 여성주의를 나타낸다.

앞서 반인종주의 활자체 제작으로도 알려진 바 있는 보컬 타입에서 제작한 활자체 ‘에바(EVA)’와 ‘캐리(CARRIE)’는 각각 다른 여성 참정권 운동에서 활용되었던 글씨들을 활자체로 제작한 사례이다(Figure 20). 먼저 ‘에바’는 1957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일어난 여성 참정권 시위에서의 배너 글씨에 영감을 얻어 제작되었다. 활자체의 이름 ‘에바’는 아르헨티나의 여성 참정권 도입에 기여한 영부인 에바 페론(Eva Perón)을 상징한다. ‘캐리’ 또한 1915년 미국 뉴욕에서의 여성 참정권 행진에서 활용된 피켓 글씨를 바탕으로 제작된 활자체이다. ‘캐리’는 해당 참정권 행진을 주도한 활동가 캐리 채프먼 캣(Carrie Chapman Catt)을 상징한다. 활자체에 배너 또는 피켓의 글씨를 활용한 것은 여러 명의 사람이 하나의 활동으로 통합되어 내세운 문구의 글씨를 통해 공동의 이념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Figure 20

‘EVA’, ‘CARRIE’ and their origins

마찬가지로 앞서 퀴어 활자 작품을 다루었던 디자이너 냇 파이퍼의 2020년 작 활자체 ‘여성 자동차 수리 단체(Women’s Car Repair Collective)’는 해당 단체를 홍보하는 1970년대의 광고물 속 글씨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되었다. 파이퍼는 광고물의 글씨를 참고하되, 재해석으로 글자 획의 두께를 늘려 보다 깊이감이 있도록 제작하였다. 또한, 여성 자동차 수리 단체의 광고물이 담겼던 잡지 『문스톰(Moonstorm)』의 1977년 출판본에서 표현된 방식대로 O와 Q를 대체할 수 있는 여성 성별 기호 글리프도 추가하였다(Figure 21). 여성 성별 기호는 본 단체와 같이 여성을 대표해 힘쓴 당대의 수많은 활동가를 강조하는 의미이다. 파이퍼는 해당 활자체를 사용자들이 사용하는 것 자체가 본 단체의 명맥을 이어가는 방식이라고 생각하며 제작하였다고 한다(Miller, 2020).

Figure 21

‘Women’s Car Repair Collective’ (2020)

4. 5. 소결

사례 분석 결과 크게 네 가지의 유형으로 여성주의적 메시지의 표현 방법을 분류할 수 있었다. 유형별 사례와 주제, 특징을 정리하면 Table 2와 같다.

Expressions used in typefaces for positive social change

Classification of feminist expressions in typefaces

유형 중 ‘활자체 이름으로 재조명’과 ‘활자 형태와 의미 연결’은 특히 여성주의적 의미를 활자체라는 매체의 특성을 가장 적절히 반영한 표현으로 해석할 수 있다. 먼저, ‘활자체 이름으로 재조명’은 ‘보도니(Bodoni)’, ‘바스커빌(Baskerville)’과 같이 남성 디자이너의 이름을 가진 활자체들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타이포그래피 분야에서 ‘루세트’와 같이 비어있는 여성들의 공간을 후대의 활자체로 채워 보완한다. 따라서 역사적 맥락에서의 여성주의적 의미가 뚜렷하다. 다음, ‘활자 형태와 의미 연결’은 여성주의를 활자 요소에 적절히 적용하여 표현한다는 점에서 활자의 기능을 유지하며 가시적으로 여성주의를 연결하고 있다. 따라서 매체 특성을 주제와 알맞게 결합한 것으로 보인다.

‘상징적 그래픽 치환’의 유형도 활자체의 매체 특성을 반영하였다고 해석할 수 있으나, 글자 전달의 기능보다 활자체라는 형식의 특성을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 독특하다. 활자체의 형식으로 상징적 그래픽을 출력함으로써 글자보다 직접적으로 문제의식을 드러내며, 동시에 쉽게 확산시킬 수 있는 여지가 있다. ‘단체 또는 활동 내 글자 재현’은 시위, 행진, 단체를 대표하는 글자를 사용자가 운용할 수 있는 활자체로 재탄생시켜 그 이념을 기리고 널리 퍼지게 한다.


5. 결론 및 제언

연구자는 사회적 발언을 활자로 표출한 사례 연구를 통해 관찰한 표현 방법을 여성주의의 표현 사례에서도 유사하게 사용하는 동시에 분명한 차이를 가지고 있음을 살필 수 있었다. 본 연구에서 정리한 유형 중 ‘활자체 이름으로 재조명’과 ‘상징적 그래픽 치환’은 여성주의적 의미를 지녔을 때 특수한 지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활자체 이름으로 재조명’의 경우, 먼저, 앞서 살펴본 인권 운동에서 대표적인 활동가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이름을 딴 ‘마틴’과는 달리 여성주의의 경우 상대적으로 소외되고 주목받지 못한 이름을 재조명한다는 차이가 있다. 이러한 표현을 통해 특정 인물을 조명하는 의도를 넘어 궁극적으로는 사회의 불평등을 꼬집고자 한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상징적 그래픽 치환’의 경우 여성 억압이 유구하게 언어뿐 아니라 시각적인 형태로도 이루어지고 있기에,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용이하여 이러한 표현을 택한 것으로 사료되었다. 따라서 상징적 그래픽으로써 여성 억압을 단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는 특수성을 주목할 만하다.

사회적 발언으로서의 활자체 사례들과 유사점을 통해서는 여성주의적 표현의 발전 가능성을 엿보았다. 먼저, ‘활자 형태와 의미 연결’은 앞선 ‘벌바’의 예시와 같이 배리어블 폰트로 제작하여 의미 연결에 활용한 점을 살필 수 있었다. 이는 환경주의 메시지를 담은 ‘기후 위기 폰트’에서도 관찰되는 시도이기에, 여성주의 활자 디자인에서도 데이터를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 ‘단체 또는 활동 내 글자 재현’은 대부분의 사례가 유사한 형식을 띠고 있음을 알 수 있었으나, 퀴어 주제를 다룬 ‘마틴 웡’과 같이, 여성주의적 활자체에서도 예술가의 작품에서 특징적인 글자를 재현해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디자인은 사회의 가치 체계를 그대로 반영하고 재생산한다. 영국의 디자인 사학자 셰릴 버클리(Buckley, 1986)에 따르면 디자인은 재현의 과정이기에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힘과 가치를 재현한다. 이러한 사회의 가치들은 기호화된 채 디자인에 녹아들어 있기 때문에 구태여 짚지 않는 이상 간과하기 쉽고, 무의식적으로 생활에 침투하여 사회적 권력관계에 따른 차별을 더욱 공고히 한다. 시각 매체를 활용한 디자인은 특히 파급력이 크고 더욱 빠른 속도로 내포하고 있는 가치 체계를 확산시키기도 한다. 특히 활자 디자인은 구체적으로 언어를 다루는 글자를 디자인하는 일인 만큼, 실재적 언어와 시각적 언어를 혼합하여 더욱 강하고 효과적인 어조로 전달할 수 있게 한다. 그러므로 시대가 처한 고민과 문제를 활자라는 매체 안에서 더욱 다양한 형태로 실현하고 제시하기를 기대한다. 본 연구는 서구권 그리고 한국의 여성주의 그래픽디자인을 중점적으로 탐구하였다. 다양한 배경의 여성들을 포용할 수 있는 교차성 기반의 여성주의 흐름이 이어지고 있는 현시점에서, 보다 다양한 사회의 여성주의와 활자 디자인에 대한 후속 연구들이 이어지길 바란다.

Notes

Citation: Kim, S., & Park, S. (2024). Analysis of Feminist Expressions in Type Design. Archives of Design Research, 37(5), 457-472.

Copyright : This is an Open Access article distributed under the terms of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Non-Commercial License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3.0/), which permits unrestricted educational and non-commercial use, provided the original work is properly cited.

References

Figure 1

Figure 1
Printed media for women’s suffrage in the United States (1911, 1912)

Figure 2

Figure 2
Feminist posters made by See Red Women’s Workshop (1978, 1977)

Figure 3

Figure 3
Works from the exhibition 《Words From the MeToo Movement》 (2022)

Figure 4

Figure 4
Construction of ‘Hypnopaedia’ pattern letters

Figure 5

Figure 5
‘Climate Crisis Font’, Latin (2021) and Hangeul (2022)

Figure 6

Figure 6
‘The Endangered Typeface’ (2023)

Figure 7

Figure 7
Example of typefaces made from Vocal Type (2019, 2019, 2022)

Figure 8

Figure 8
‘Topic Type BLM’ (2020)

Figure 9

Figure 9
‘Migrating Typeface’ (2023)

Figure 10

Figure 10
‘Gilbert’ in Latin (2017), Korean (2020), Japanese Katakana (2019)

Figure 11

Figure 11
‘Martin Wong’ (2018) and Wong’s works related to American Sign Language

Figure 12

Figure 12
GenderFail’s 《Protest Font》(2018-)

Figure 13

Figure 13
Lucette Girard in Frutiger’s office (ca. 1956)

Figure 14

Figure 14
‘Lucette’ (2020, in progress)

Figure 15

Figure 15
Exhibition installation view of 《Reviving Ange Degheest》 (2020)

Figure 16

Figure 16
‘Pussy Galore’ (1994)

Figure 17

Figure 17
‘Feminist Letters’ used for protest signs during the 2017 Women’s March

Figure 18

Figure 18
‘Vulva’ weight progression

Figure 19

Figure 19
‘Good Girl’ (2019)

Figure 20

Figure 20
‘EVA’, ‘CARRIE’ and their origins

Figure 21

Figure 21
‘Women’s Car Repair Collective’ (2020)

Table 1

Expressions used in typefaces for positive social change

표현 유형 응용 방식 해당 작품 사례
활자체 이름으로 재조명 표현하고자 하는 사회적 메시지와 맞닿은 활동가, 단체, 예술가의 이름을 활자체명으로 사용 ‘길버트(길벗체)’, ‘마틴’, ‘바이어드’, ‘마샤’, ‘마틴 웡’을 포함한 ‘러브 레터의 퀴어한 해’
활자 형태와 의미 연결 실제 현상을 정리한 데이터를 활자 형태에 적용하여 표현 ‘기후 위기 폰트’, ‘멸종위기체’
기존 활자체 안에 이질적 형태의 활자를 부분적으로 삽입 ‘이주하는 서체’
활자체라는 형식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는 위계를 전복 ‘저항체’
활자 색상과 의미 연결 작고한 활동가의 대표적인 활동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색상 활용 ‘길버트(길벗체)’
단체 또는 활동 내 글자 재현 시위, 행진에서 활용된 피켓 글씨 재현 ‘마틴’, ‘바이어드’, ‘마샤’, ‘토픽 타입 BLM’, ‘저항체’
특정 활동가, 예술가의 글씨 또는 작품에서의 글자 재현 ‘마틴 웡’을 포함한 ‘러브 레터의 퀴어한 해’

Table 2

Classification of feminist expressions in typefaces

표현 유형 작품명 주제 표현적 특징
활자체 이름으로 재조명 루세트 루세트 지라르 20세기 여성 활자 디자이너의 이름을 활자체 명으로 활용
앙주 데히스트 되살리기 가상의 여성 활자 디자이너 앙주 데히스트 가상의 여성 활자 디자이너 이름으로 활자가족 제작
상징적 그래픽 치환 푸시 갈로어 여성이 언어적으로 재현된 방식 짧은 문구가 담긴 그래픽으로 활자를 대체
페미니스트 글자 다양한 사회적 여성 이슈 그래픽을 알파벳 형태에 결합
활자 형태와 의미 연결 벌바 여성에게 강요된 침묵 활자 굵기를 목소리에 비유
굿 걸 활자 디자인계 여성 부족 및 성별 불균형 활자 공간을 여성이 사회적으로 차지하는 공간에 비유
단체 또는 활동 내 글자 재현 에바 아르헨티나 여성 참정권 시위(1957) 배너 또는 피켓의 글씨를 활자체로 재현
캐리 미국 여성 참정권 행진(1915)
여성 자동차 수리 단체 여성 자동차 수리 단체(1970s) 단체의 홍보 광고물 속 글씨를 활자체로 재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