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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tudy on the Dawn and Role of Design Competitions in Korea
: Focused on a Commercial and Industrial Design Exhibition Held by the Korean Government
한국디자인공모전의 태동과 역할
: 상공미술전람회를 중심으로
  • Jongkyun Kim : Korea Intellectual Property Office, Daejeon, Korea
  • 종균 김 : 특허청, 대전, 대한민국

Background This study aims to find the historical significance of design competitions and analyze their accomplishments by researching their establishment and operation methods.

Methods The design competitions led by the government from after the liberation of Korea to the contemporary period will be analyzed through a review of the literature. In particular, the establishment contexts and purposes, regulations, operations for the initial 10 years, evaluation methods, entry trends and assessment trends, winners and winning works, affiliated universities, and issues by year will be analyzed around the Commercial and Industrial Design Exhibition, and the following characteristics, properties, achievements and problems will be studied.

Results The Commercial and Industrial Design Exhibition was founded in a similar form as the National Art Exhibition, which had damaging consequences such as design imitation, factional conflicts, etc. It degenerated into a concept- oriented art exhibition as the Department of Applied Art at Seoul National University. It made a huge impact at the beginning, and the biased evaluation was pervasive due to the juries’ inclinations. It merely contributed to the development of craftwork.

Conclusion Though there were attempts to discover and cultivate people who were talented at design through the Commercial and Industrial Design Exhibition, the original goal of increasing the exports, which was set by the Minister of Commerce and Industry, was not accomplished. The goal of export promotion was partially achieved through the ‘Korea Pack’ and the ‘Good Design Exhibition’, etc.

Abstract, Translated

연구배경 본 연구는 근대 한국디자인공모전의 설립과 운영 등을 살펴, 그 역사적 의의를 찾고, 성과를 분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연구방법 문헌연구를 통해 해방이후부터, 현대에까지 정부가 주도한 디자인공모전을 분석한다. 특히 상공미술전람회를 중심으로 하여 설립배경과 목적, 규정, 초기 10년의 운영, 심사방식, 출품경향과 심사경향, 수상자와 수상작, 출신대학, 각 연도별 이슈를 분석하고 그 성격과 특징, 성과와 문제점을 분석해 본다.

연구결과 상공미전은 국전과 유사한 형태로 설립되었고, 디자인 모방이나 파벌갈등 등의 폐해가 있었으며, 초기 서울대학교 응용미술과가 지대한 영향을 미쳐 컨셉위주의 작품전시회로 변질되었고, 심사위원의 편향성으로 인해 편파적인 심사가 이루어졌다. 또 공예작품의 발전에는 기여한 바가 적다.

결론 상공미전을 통해 디자인 인재양성 및 발굴이 이루어 졌으나, 수출증대라는 본연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하였다. 수출 진흥 목적은 이후 포장대전, 굿디자인전 등을 통해 일정부분 달성되었다.

Keywords:
the National Art Exhibition, Commercial and Industrial Design Exhibition, LeeSoonsuk, Korea Institute of Design & Package, 국전, 상공미전, 이순석, 디자인포장센터.
pISSN: 1226-8046
eISSN: 2288-2987
Publisher: Korean Society of Design Science
Received: 11 Jun, 2015
Revised: 08 Jul, 2015
Accepted: 10 Jul, 2015
Printed: Aug, 2015
Volume: 28 Issue: 3
Page: 203 ~ 217
DOI: https://doi.org/10.15187/adr.2015.08.28.3.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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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tation : Kim, J. (2015). A Study on the Dawn and Role of Design Competitions in Korea – Focused on a Commercial and Industrial Design Exhibition Held by the Korean Government. Archives of Design Research, 28 (3), 203-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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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해방 후, 미군정을 통해 서울대학교가 설치되면서 우리나라에 응용미술 전공이 처음으로 신설되었다.(1946) 하지만 곧 전쟁이 일어나고 산업이 초토화되면서 응용미술 전공자가 활동할만한 사회적 여건은 마련되지 못하였다. 1960년대 응용미술은 취약한 산업 기반과 디자인에 대한 낮은 인식으로 이를 전공하는 남성은 ‘실패한 미술가’로, 여성에게는 ‘시집가기 좋은 전공’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실무차원의 도안이나 포장 등 상업미술은 인쇄소에서 식자공들이 맡아 하는 수준이었고, 기업의 제품은 외국 것을 모방하는 수준에서 제작되었다. 응용미술을 전공한 학생들의 활동범위가 좁아 많은 수가 졸업 후 가사에 전담하거나, 중등교사가 되는 정도였고, 일부는 제약회사에 취직을 하고, 간혹 순수미술로 전향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디자인의 사회적 인식과 디자이너의 위상을 제고한 사건이 1966년 상공미전의 설치였다. 비록 ‘수출품 제값받기 운동’의 일환으로 정부가 주도해 시작한 공모전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디자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개선되고 디자이너 입지가 마련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글에서는 전후 한국사회에서 디자인공모전, 특히 상공미전이 설립되는 배경과 운영 실태 등을 살펴 그 역사적 의의와 문제점, 과제 등을 생각해 보기로 한다.

2. 전후 응용미술의 위상과 공모전
2. 1. 국전 공예부

한국의 디자인 발전 과정에서 대한민국상공미술전람회(현 대한민국디자인전람회, 이하 상공미전)의 역할은 매우 지대했다. 초기 상공미전의 성향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즉 국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해방 후, 미술계 최초의 공모전은 1947년 미군정청 문교부가 주최한 조선종합미술전(경복궁 근정전 개최)이다. 이를 1948년 미군정으로부터 정권을 넘겨받은 제1공화국이 이어서 주최하기 시작했다. 조선종합미술전은 일제강점기 조선미술전람회(이후 선전) 규약을 모방해 만든 것으로, 선전의 구성과 동일하게 동양화부, 서양화부, 조각부, 공예부, 서예부로 구성되었고, 심지어 규정까지 거의 동일했다(Won, 1985). 국전은 경력이나 학력과 무관하게 몇 번의 특선을 거듭하면 추천작가가 되었고, 심사위원 및 초대작가도 될 수 있었다. 또 교수나 교사 임용 자격을 문교부가 보장했다. 이 같은 특혜는 부패로 이어졌는데, 서울대와 홍익대가 각각 중심이 된 대한미술협회와 한국미술협회의 마찰이 극심해졌다. 국전의 심사위원은 운영위원이 지명하는 식으로 운영되었고, 입상자 선정에 학연과 인맥이 작용하는 등 폐단을 보였다. 각 대학에서는 국전 입상을 위해 파행적으로 수업이 이루어지는가 하면, 학연에 따른 파벌 경쟁이 첨예해졌고, 국전 무용론(無用論)과 폐지론이 끊임없이 주장되었다. 결국 국전은 1981년을 끝으로 폐지되고 민간으로 이양되었다(Kim, 2013).

상공미전이 생기기 전까지, 국전 공예부는 유일한 응용미술부문의 공모전 역할을 하고 있었다. 1954년에는 국전 공예부를 응용미술부로 개칭하기도 했다.(55년 공예부로 환원) 하지만 국전 공예부는 응용미술 분야를 수용할만한 인적, 제도적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못했다. 실용적인 물품보다 작가 성향의 일품(一品) 공예나, 숙련된 가공기술 등이 국전 공예부의 관심사였다. 또 과거 선전에 대한 반성 없이 기존의 일본식 절충주의 전통이 국전을 통해 계속 이어져 내려왔다. 초창기 응용미술을 전공한 학생들은 마땅한 공모전이 없어 국전공예부에 출품하여야 했으나 벽지, 캘린더, 포스터 등이 입선할리 만무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응용미술을 위한 별도의 공모전이 생겨난 것이 상공미전이다.

2. 2. 수출과 상공미전

상공미전의 설립과정은 불명확하다. 산업 발전과 더불어 디자인 수요의 급증으로 정부가 디자인 진흥의 필요성을 느껴 설립했다는 정도의 설명이 되고 있으나(Kim, 2013), 1960년대 디자인수요가 급증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며, 굳이 상공미전으로 이어져야 할 인과관계도 없다. 이에 대하여 박대순이 디자인계의 동료들과 함께 상공부에 ‘국전’에 상응하는 국가적 행사개최를 제안했는데 이것이 받아들여졌다는 주장을 한다(Kim, 2014). 한편 이순석은 미술계에서 미전(美展)의 필요성이 거론되어, 정부 측에 건의했고, 1965년 11월 상공부에서 24명의 공예인들을 초청, 간담회를 연 것을 계기로 개최되었다고 회고하고 있다(경향신문, 1974.3.20 4면).

하지만, 당시 상공부 제1공업국장(이후 청와대 경제수석)이었던 오원철은 상공부에서 먼저 제안하여 공예인들의 의견을 청취한 것으로 증언하고 있다. 당시 국내 섬유수출이 국내 경제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중 고급제품인 모직물 수출이 외국에 비하여 턱없이 부진했고, 상공부 국장으로서 오원철은 이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최신기계를 도입하고 다양한 지원책을 펼쳐 일본에 비해 생산성 차이도 나지 않았지만, 도안이 약해서 수출이 안 되는 것이 문제였다. 외국의 미술가를 초청하여 몇 가지 디자인을 시도했는데, 꽤 성과가 좋았다. 하지만, 한, 두 명의 외국 디자이너가 국내 섬유수출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1965년 오원철은 서울대 미술대학에 이순석 교수를 찾아가 대책을 상의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 첫째, 무드조성 목적으로 상공 미술대전을 매해 개최한다.
  • 둘째, 디자인센터를 설립한다. 디자인을 할 수 있는 인재를 모아 업계를 도와준다. 우선 포장지의 디자인부터 시작한다.
  • 셋째, 각 대학에 디자인과를 신설한다.

상공미술전은 다음 해부터 바로 시작되었는데, 오원철이 기억하는 분야는 상업미술, 공업미술, 두 부문이며 두 가지 기준을 지시했다.

  • 첫째, 수출을 돕는 디자인, 대량생산 가능한 디자인이어야 한다. 미술품을 장려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디자인으로 대량생산을 해서 수출액이 커질 가능성이 있는 것이 대상을 받아야 한다.
  • 둘째, 한국의 전통미를 살릴 것. 그 첫째 과제는 한국을 선전하는 포스터, 즉 관광용 포스터로서 제목은 'Come to Korea'로 정했다(Oh, 2006).

1960년대 시대상에 비추어 보건데 디자인분야 진흥의 필요성을 먼저 제기한 것은 상공부로 보이며, 상공미전이라는 행사의 아이디어는 이순석이 제시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정부(상공부)는 상공미전을 오늘날의 ‘굿디자인전’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상공미전의 설립 목적을 보면 “현재 국가 총력을 경주(傾注)하는 수출 진흥의 방해 요인 중 특히 디자인의 낙후는 우리나라 상품의 수출 부진을 자초하여 왔음을 비추어 정부에서 수출 진흥책의 일환으로 대외적으로 우리나라 디자인의 후진성을 만회하여 수출 증진을 기하고 대내적으로 우수한 디자인의 창안기풍(創案氣風)을 조성하여 디자인의 진흥사업을 전개함으로써 수출 증진의 실(實)을 거두기 위한 것”(강조-인용자)이라고 밝히고 있다. 한 문장 안에 ‘수출’이라는 단어가 무려 5번이나 등장하고 있으니, 이 전시의 목적은 명백히 수출 진흥을 위한 것이었고, 공예인들이 건의한 국전과 같은 성격의 전람회는 아니었다.

3. 상공미전
3. 1. 상공미전의 설립

제1회부터 제11회까지는 대한민국상공미술전람회라는 이름으로 상공부가 주최하고, 행사주관은 1~5회는 상공회의소, 6회 이후는 한국디자인포장센터가 맡았다. 행사는 국전과 비슷한 규모로 매해 개최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상공미전은 기존 국전에서 활동하던 공예인들이 주축이 되어 설립됐기 때문에 추천작가 제도나 심사위원 선정 방식 등 여러모로 형식과 성격이 유사하게 진행됐다. 상공미전 규정은 2회가 개최되는 1967년도에야 마련되었다. 가시적 성과를 중시하는 군사정부에서 일단 정책을 먼저 실행하고 사후적으로 제도를 보완하는 경우는 비일비재하였다. 상공미전 규정에는 오원철의 주장과 달리 상공(상업), 공예, 공업, 우량디자인(굿디자인) 4개 부문으로 규정되었다. 1966년 1회 상공미전에서 빚어진 일본디자인 표절 논란을 의식하여서인지, 규정 제7조에서 모방금지 규정을 두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대한민국상공미술전람회규정
  • [시행 1967.5.16.] [상공부령 제184호, 1967.5.16., 제정]
  • 제1조 (전람회의 개최 등) 상공부는 디자인의 창안기풍을 조성하여 생산제품의 품위를 향상시키고 수출 진흥의 목적을 달성하게 하기 위하여 매년 대한민국상공미술전람회(이하 "상공미전"이라 한다)를 개최한다.
    (중략)
  • 제3조 (부문) 상공미전에 다음의 4부문을 둔다.
    1. 상공미술부문
    2. 공예미술부문
    3. 공업미술부문
    4. 우량디자인상품부문
    (중략)
  • 제7조 (작품의 출품제한) 다음 각 호의 1에 해당하는 작품은 상공미전에 출품할 수 없다.
    1. 국내외에서 이미 공개 발표된 작품. 다만, 우량디자인상품에 있어서는 그러하지 아니한다.
    2. 다른 작품을 심히 모방하였다고 인정되는 작품
    3. 우리나라의 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질서에 해롭다고 인정되는 작품 (이하 생략)
3. 2. 상공미전의 운영
3. 2. 1. 제1회 상공미전

1965년 상공미전 개최가 결정되고, 1년만인 1966년부터 상공미전이 개최되었다. 회장은 상공부장관, 부회장은 상공부 차관과 상공부 광공전차관보가 되고 간사와 서기는 상공부 소속 공무원 중에서 상공부 장관이 임명했다. 집행위원회는 이순석(서울대), 한홍택(홍익대), 박대순(경기공전), 민철홍(서울대), 권길중(서울여대) 5명이며, 이순석은 1회부터 5회까지 운영위원장을 맡았다. 제1부 상업미술에는 김교만, 김명호, 김수석, 김홍련, 봉상균, 염인택, 이명구, 조병덕, 조영제, 한홍택, 제2부 공예미술에는 권순형, 박성삼, 백태원, 백태호, 유강렬, 이순석, 이신자, 임홍순, 제3부 공업미술에는 권길중, 민철홍, 박대순, 이우성, 한도용이 맡았다. 상공미전이 정한 응모부문은 1부 상업미술부는 포장지, 포스터, 인쇄광고, 책커버, 캘린더, 직물, 수출용 벽지디자인, 신문잡지광고, 마크 등 이고, 제2부 공예미술부는 목공예, 칠공예, 금석(金石)공예, 도자기, 염색, 직물, 죽세공, 피혁, 유리 및 각종 수지공예, 그리고 제3부 공업미술부는 가구, 금속기구, 지물가공(紙物加工), 기계, 기구, 프라스틱물 등이다.


Figure 1 The 1st Presidential prize-winning work ‘Seoul station color plan’

제1회 상공미전은 박정희 대통령의 참석 하에 경복궁 미술관에서 성대하게 개최되었다. 총 1,074점이 응모되었고, 이중 대통령상 1점, 각 기관장상 14점, 특선 35점, 입선 243점이 선정됐다. 대통령상은 ‘서울역 색채안내실시’의 강찬균(중앙산업), 국회의장상 ‘음료수 냉각기’ 신용학(서울대재), 국무총리상 ‘받침을 겸한 장식’ 송광자(서울대조교), 경제기획원장관상 ‘칼렌다’ 유재우, 상공부장관상 ‘원탁용 특수 선풍기’ 한영희, 문교부장관상 ‘화병’ 김덕겸, 공보부장관상 ‘포장지’ 김영자, 대한상공회의소회장상 ‘관광포스터’ 박조향, 대한무역진흥공사 사장상 ‘텔스타7 트랜지스터’ 배천범, 대한방직협회회장상 ‘전기스탠드’ 차성희, 한국경제인협회회장상 ‘테이블 램프’ 박윤정, 한국무역협회회장상 ‘라벨’ 이병오, 한국생산성본부이사장상 ‘윳세트’ 박준자, 한국양회공업협회회장상 ‘문갑’ 최승자, 한국합판공업협회회장상 ‘육아기(育兒器)’ 이순혁이 수상했고, 특선은 나재오, 최명자, 한운성, 김선영, 김효, 양승춘, 금귀자, 김영기, 허민자, 이원구, 이창호, 박정인, 이종성, 김말자, 권혜자, 박인규, 김정화, 최회권, 이용자, 최대익 등이었다. 전체 출품작 중 약 22%가량 작품이 수상, 전시되었다. 제1회 상공미전에서는 대통령상 수상작에 대해 ‘동경 올림픽촌 심볼·마크’를 모방했다는 표절논란이 일었다(경향신문, 1966.8.11).

3. 2. 2. 제2회 상공미전

1967년 제2회 상공미전은 박대통령의 참석 하에 덕수궁 내 임시 전시관에서 개막했다. 특이한 점은 제1부 상업미술, 제2부 공예미술, 제3부 공업미술에 이어, 제4부 우량디자인(굿디자인) 부문이 신설되어 작품을 접수한 점이다. 하지만, 우량디자인부분은 전람회 규정에만 있을 뿐, 심사기준도 명확히 제시되어 있지 않았고, 출품작도 별로 없었다. 총 1,519점이 출품되어, 특선 오은심 외 27명, 입선작 273점, 각 단체 및 심사위원들의 작품 207점, 총 480점이 전시됐다. 전체 출품작 중 31%가량 수상했다. 대통령상은 ‘오토라이너’를 출품한 김길홍(이화여고 교사)가 수상했고, 국회의장상 ‘팍스피아노포스터’ 이태영(합동통신광고부), 국무총리상 ‘화기(花器)’ 박윤정(서울대 대학원), 상공부장관상 ‘관광캘린더’ 김영자(서울대졸), ‘혈함탁(穴含卓)장’ 김덕겸(숙대 강사), ‘아시아무역박람회를 위한 계획’ 박영보·유성오(홍익대재) 등이었다. 제2회 상공미전은 행사포스터(염인택 작, 1967)가 일본인 가메쿠라 유사쿠(龜倉雄策)의 포스터디자인(1962)을 모방한 것으로 밝혀져 물의를 빚었다(Joh, 1967).

3. 2. 3. 제3회 상공미전

1968년 제3회 상공미전은 한홍택을 중심으로 하는 그래픽디자인협회와 홍익대학의 반발로 시작되었다. 집행위원장부터 집행부 대부분이 서울대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고, 수상작 중 높은 상은 서울대가 소위 ‘싹쓸이’를 해가다 시피 하자, 전시 출품 전부터 주최 측에 대한 추천작가들의 연판장 소동, 홍대 학생들의 출품거부 성명 등으로 혼란이 있었고, 정상 운영이 가능할 것인지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다. 결국 1부 상업미술부에 유일한 홍대 측 심사위원이던 한홍택은 사퇴하였다(경향신문, 1968.7.27). 당시 출품작 대다수가 학생작품이었고 비록 작품은 무기명으로 되어 있으나, 심사과정에서 누구의 작품인지 쉽게 알 수 있었다. 세간에는 3회 대통령상 수상자로 서울대 ‘양승춘’이 내정되어 있다는 소문마저 돌았다.


Figure 2 The 3rd Presidential prize-winning work ‘Korean Mushroom’

결국 제3회 상공미전은 경복궁에서 개막했고, 대통령상은 홍익대학교 도안과 출신, ‘양송이재배’ 포스터를 출품한 권명광에게 돌아갔다. 수상작은 커다란 포스터와 여러 장의 안내장 도안이 국문과 영문으로 제작된 평범한 작품이었다(Fig 2). 당시 권명광은 육군본부 참모총장실에서 병장으로 복무 중이었다. 상공미전에 출품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서울대 출신들을 제치고 대통령상을 수상한 것은 당연히 의아스러운 결과였다. 국회의장상을 받은 작품은 ‘공공건물내 자동수표기’를 출품한 안종문으로, 우체통에 우표를 무인판매하도록 고안하였다. 국무총리상은 ‘머리 탁자’ 한명철(서라벌 예대)이었다.

3. 2. 4. 제4~5회 상공미전

1969년 제4회 상공미전은 서울대 미술대학내 막 신축된 한국디자인센터에서 진행되었다. 상업미술 186점, 공예미술 212점, 공업미술 41점, 굿디자인(우량디자인) 2점 등, 전체 출품작이 고작 441점에 불과했고, 266점이 전시되었는데, 무려 60%정도가 수상을 했다. 대통령상은 ‘택시 미터기 디자인’을 출품한 부수언(서울대, 한국디자인센터 상임연구원)이었고 상금은 30만원이었다. 부수언은 제3회 상공미전에서도 ‘휴대용 소형 저울’을 디자인하여 특선을 수상한바 있다. 국회의장상은 ‘수출용 인삼차 포장디자인’ 최아영(서울대), 국무총리상은 ‘과자그릇’을 출품한 유리지(서울대 대학원), 경제기획원장관상은 ‘수출용 한산모시광고 및 포장’ 이정숙(서울대), 대한상공회의소 소회장상은 ‘곡용계량용기’ 김철수(서울대)였다.

1970년 제5회 상공미전은 덕수궁 옆 국립공보관에서 개최됐다. 응모작 출품을 독려하기 위하여 시상금이 대폭 상향되었는데, 대통령상 100만원, 국회의장상 50만원, 국무총리상 30만원, 상공부장관상 24만원 등이 지급되었다. 박정희 대통령, 이낙선 장관 등이 참석했고, 총 640점이 출품된 가운데 상업미술 105점, 공예미술 181점, 공업미술 33점, 3개 부문 총 319점이 전시됐다. 출품자의 약50%가 수상을 한 셈이다. 대통령상은 ‘기와디자인’을 출품한 김철수(서울대재), 국회의장상 ‘홍삼포장디자인’ 최아영(서울대재), 국무총리상 ‘식탁용기’ 최회권(서라벌예대 조교), 경제기획원장관상 ‘한국냉동새우’ 홍종일(한국은행), 상공부장관상 ‘실크포스터’ 권인수(한일은행), ‘과반’ 이중회(홍익대재), ‘학생스트링커터 디자인’ 이중일, 대한상의회장상 ‘과기세트’ 김규식(서라벌예대 강사) 등이었다. 입상이 8점, 특선이 66점, 입선이 245점이었다. 굿디자인 부문 수상자는 없었다.

3. 2. 5. 제6회 이후 상공미전과 포장대전

상공미전은 초기 제1회부터 제5회까지 이순석 심사위원장을 중심으로 하여 서울대 중심의 심사위원으로 구성되었고, 학계 인사가 행사에 적극 관여하여, 마치 대학종합제전의 인상을 풍겼다. 수상자중 많은 수가 학생, 특히 서울대 재학생 및 졸업생으로 구성되어 편파심사 논란이 끊임없이 일었고, 작품 수준도 낮은 편이었다. 이 기간 박정희 대통령의 적극적인 관심에도 불구하고 국전에 비하여 위상이 현저히 낮아 각 언론의 외면을 받는 상황이었다. 상공부는 상공미전에 관한 개선에 착수하여, ①상공미전의 심사 또는 추천작가제도의 재검토 ②학계 중심의 현 상공미전의 내용 재검토 ③출품자들의 무모한 출혈을 강요하는 듯한 인상의 심사방법 시정책 ④문공부 주최 국전에 비해 상공부 주최 국전인 상공미전에 관한 각종 매스컴의 무관심도 시정책 등을 논의했다(KIDP, 1971).

1971년 제6회부터는 상공회의소에서 한국디자인포장센터로 행사주관이 이관되었다. 디자인포장센터는 상공미전 개최를 위해 2층 건물을 3층으로 증축계획을 세웠으나, 결국 국립공보관에서 개막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어김없이 참석하였고, 3개 분야 총5백31종, 1,450점의 출품작품 가운데 617점이 입상·전시되었다. 굿디자인 분야는 수상작이 없었다. 1971년도부터는 아이디어보다는 재료와 기능이 주요한 평가기준으로 작용했고 일반인의 수상이 두드러졌다. 대통령상은 ‘건(乾)전복수출을 위한 재료별 포장’을 출품한 신용태가 수상했다. “상대국의 기호에 알맞은 포장 재료에 한국적 이미지를 담고 있는 작품”이라고 평가 받았는데, 대나무를 사용하여 토산물 이미지를 부각하고, 공업생산에도 적합했다는 것이 높이 평가되었다. 금메달과 부상 1백만 원이 수여되었다. 국무총리상 ‘체스 세트’ 박진홍(공예가), 경제기획원장관상 ‘Book End set’ 최금용(금강제화), 상공부장관상 ‘수출용 꿀포장계획’ 오은식(백화양조), ‘스탠드’ 이옥영(홍익대 대학원), ‘차임벨’ 이은환(수출정보센터), 한국디자인포장센터 이사장상 ‘휴지통 디자인’ 김선자(서울대 3년) 등이었다.

상공미전과는 별개로 1971년부터 디자인포장센터는 ‘한국포장대전’을 개최하기 시작했다. 포장대전은 “유통상품의 포장개선을 유도하고 우수포장을 개발 육성하여 물적 유통의 혁신을 목적”으로 디자인포장센터가 개최한 것으로, 상공미전에 패키지 부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복적인 사업을 펼친 셈이다. 11월4일부터 코스모스백화점 4층에서 상공부 장관 등이 참석한 가운데 개막하였는데, 제1부 상업포장부에 ‘다이알비누’(동산유지) 등 143점, 제2부 공업포장부에 ‘판유리통함상자’(한국유리) 등 16점, 제3부 포장자재 및 관련기기에 ‘에어캡’(명신화학)등 115점 등 총 274점이 전시되었다. 시상방식은 상공미전과 달리 금상에 해당하는 코리아스타상, 은상, 동상 순이었다. 제1부 상업포장부 코리아 스타상은 ‘홈세트 포장’ 중앙도자기, 은상 ‘양말포장’ 덕양흥상, 동상 ‘설탕포장’ 제일제당, 장려상 ‘헤어스프레이’ 태평양화학, ‘쉐터포장’ 경국산업, ‘만화극장 캐라멜’ 해태제과였다. 제2부 공업포장부 코리아 스타상은 ‘스치로폴재 담수어상자’ 디자인포장센터, 은상 ‘투명구를 부착한 지대’ 제일지대, 동상 ‘선어상자’ 디자인포장센터, 장려상 ‘이동식 만능콘테이너’ 삼영화학, ‘양모포장’ 대영화학, ‘트랜지스트포장’ 대한전선이다. 제3부 포장자재 및 관련기기 부문 코리아 스타상은 ‘아파트 김칫독’ 태서화학, 은상 ‘훗·멜트를 사용한 은박 병마개용 필름’ 삼진알루미늄, 동상 ‘로프 포장재’ 롯데물산, 장려상 ‘철대대용 나일론 밴드’ 홍상기업, ‘에어캡’ 명신화학, ‘기화성 방청지’ 명림화학 순이었다. 상공미전과 달리 기업중심으로 진행되었고, 컨셉제품보다 양산품이 주종을 이루었다.

1972년 제7회 상공미전은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경복궁 현대미술관에서 열렸다. 총 2,383점이 출품되어 956점이 전시되었다. 예년에 비해 월등히 많은 수량의 다양한 품목이 출품되어 배에 가까운 수상작이 나왔다. 특히 공업디자인의 약세가 두드러졌다. 대통령상에는 ‘개폐식 간이식탁’을 출품한 이건((주)덕성화학)이 수상했다. 기능적인 생활용구로 합성수지를 재료로 써서 생산비가 저렴하고, 운반용 용기로 사용할 수도 있는 다목적 기능에, 동남아 국민생활에 적합해 신규수출시장 개척이 가능하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국회의장 수상작은 ‘굴의 알루미늄 포장 연구’를 출품한 안정언(스튜디오에이스社), 국무총리상은 칠기 목재에 금속으로 마감한 ‘촛대’를 출품한 서갑주(서라벌예대 3년), 경제기획원장관상은 대나무와 목재로 만든 ‘완구를 겸한 응접세트’의 박상우(디자인포장센터 연구원)가 수상했다. 상공부장관상은 ‘수출용 야구공포스터’ 고춘혜, ‘펜(Pen)접시’ 김재영, ‘커피세트 디자인’ 박영춘, 문교부장관상은 ‘카메라 포스터’ 김진평(서울대 4년), 한국디자인포장센터 이사장상은 ‘휴대용 트랜지스터 라디오’ 고공한(디자인포장센터 연구원) 등이다. 이 해에는 지방의 수출의욕고취를 위해 서울에서 전시회를 마치고, 대전, 전주, 대구, 부산 등으로 순회전시를 했고, 크게 흥행했다.


Figure 3 Overseas goods Traveling exhibition of KOTRA

상공부는 상공미전과 함께 포장대전도 개최했는데, 코리아스타상에는 상업부문 ‘의료품포장’ 녹십자사, 공업부문 ‘군용 얼룩무늬상자’ 오용환(융림산업), 포장재료부문 ‘포장용 하조기’ 양선구(현대상품포장) 등이 수상했다. 이와 별개로 ‘문방구 비교전’, ‘해외경쟁상품전시회’ 등도 개최하여 수출 진흥을 위한 다각적인 노력을 펼쳤다(Fig 3).

1973년, 국무회의에서는 상공미전 규정을 의결했다. ①상공미전의 대회장은 상공장관, 부회장은 상공차관이 되고, ②상공미전에는 상업미술부문, 공예미술부문 및 공업미술 부문의 3부문을 두기로 했고, ③추천작가제도를 만든다는 내용이다. 이로서 굿디자인 부문이 완전히 사라지고 3개 부문으로 확정되었다.


Figure 4 ‘73 Korea Pack’ award-winning works

제8회 상공미전은 경복궁 현대미술관에서 개막했다. 총 698종 2,134점이 출품되어 289종 1,091점이 전시되었다. 상공부는 심사기준을 변경하여 실용화할 수 있는 작품을 우선 선정하도록 하고, 입선작품은 3개월 이내에 실용화에 착수하기로 계획했다. 심사위원도 산업계와 경제계 인사를 중심으로 구성했다. 수상자는 대통령상 ‘장식을 겸한 병따개와 조미료통’ 박인숙, 국무총리상 ‘전자라이터 디자인연구’ 고을한, 경제기획원장관상 ‘대한항공포스터’ 김인철, 상공부장관상 ‘밤의 수출상품화에 따르는 포장계획’ 김순성, ‘촛대 겸 재떨이’ 최선순, ‘부엉이 저금통’ 정주훈, 문교부장관상 ‘벨톤전축포스터’ 윤학중, 디자인포장센터 이사장상 ‘내프킨 홀더세트와 조미료세트 8조’ 박상우, 대한상공회의소회장상 ‘투명시계’ 정경원, 무역협회회장상 ‘잠자리 온도계’ 이병구 등이다. 개막식에 참여한 박정희 대통령은 “수출 상품의 디자인과 포장수준이 많이 향상되었다”고 치하하고, “수출상품의 디자인과 포장기술 개발에 더욱 힘써 국제 경쟁에서 승리하도록 하라.”고 상공부장관에게 지시했다. 수상작은 서울, 전주, 대전, 대구, 부산으로 순회 전시를 열었다.

상공미전과 함께 포장대전도 개최했다. 상업포장부분에 109종 495점, 공업포장부문 34종 65점, 포장자재 부문에 37종 175점 등 모두 734점이 출품되었다. 최고상은 없었고, 제1부 상업포장부문 은상 ‘삼미 화장품 포장’ 태평양화학, 동상 ‘부스·글라스’ 삼광유리, 제2부 공업포장부문 은상에 ‘수출용 병포장설계’ 삼화포장, 동상 ‘어상자 및 운반상자 40호’ 럭키화학, 제3부 포장자재 및 관련기기 부문 은상 ‘뜯기좋은 비닐봉지’ 구기숙, 동상 ‘방청지’ 롯데물산이 선정됐다(Fig 4).

1975년, 제10회 상공미전부터는 제1부 산업미술을 시각디자인으로, 제2부 공예미술을 공예디자인으로 명칭을 변경하였고, 1977년 제12회에는 대통령령 제8249호의 법적 근거를 마련, 상공미전 규정을 개정하여 명칭을 ‘대한민국 산업디자인전람회’로 바꾸었다. 또 초대작가 제도를 신설하고, 초대작가 또는 추천작가 작품 가운데 우수작품에 대해서는 시상대상에 넣기로 결정했다. 작품의 실용화를 촉진하기 위하여 심사위원 구성도 학계 인사보다 산업계 관련인사의 비율을 높이기 시작했다. 제42회 부터는 ‘대한민국디자인전람회’로 개칭하여 ‘산업’자를 뺐다.

4. 상공미전의 평가
4. 1. 국전과 상공미전
Table 1
A comparison of prize giving details of 1970 Industrial design prize and 2005

1970 제3회 시상내용 수량 2015 제50회 시상 내용 수량
1 대통령상 1 1 대통령상 1
2 국회의장상 1 2 국무총리상 2
3 국무총리상 1 3 산업통상자원부장관상 10
4 경제기획원장관상 1 4 중소기업청장상 5
5 상공부장관상 3 5 특허청장상 5
6 상공회의소 회장상 1 6 한국디자인진흥원장상 5
7 특선 약간명 7 한국디자인단체총연합회장상 5
8 입선 다수 8 한국무역협회장상 7
9 대한상공회의소회장상 7
10 KOTRA사장상 7
11 특선 약간명
12 입선 다수

일찍부터 정부가 주관한 국전은 권위가 매우 높았기 때문에 국전 수상은 작가로서의 출세를 뜻하는 것이었다. 많은 작가들이 자신의 스타일과 무관하게 국전 입선에 유리한 작품들을 출품하는 경향이 강했다. 상공미전도국전과 유사한 경향을 보이며 발전했다. 1회 대통령상 수상자인 강찬균은 국전에 화병을, 상공미전에는 상업미술(그래픽)을 출품했다. 평생 공예에 천착했으나, 상공미전에는 그래픽 작품을 출품한 것이다. 시상방식도 국전과 유사했다. 수상작은 ‘대통령상’, ‘국무총리상’ 순으로 배정되어 관료적 계층구조에 익숙한 일반 국민들에게는 무의식중에 예술성마저도 수직적으로 고저가 매겨질 수 있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상공미전은 1977년 대한민국 산업디자인전으로 발전해오는 과정에서 점차 관료적 행사로 굳어지고, 각종 기관장 상을 신설하여 시상 계층이 두꺼워졌으며, 수량은 많아져 방만해졌다(Table 1). 1973년 개최된 포장대전이나 1985년 굿디자인전의 시상에서 정치관료 직함의 시상이 없는 것과 비교할 때, 국전과 같은 미술전람회로서의 성격이 더 강했던 것이다.

Table 2
1960s-70s Presidential prize-winning works

서울역 색채 안내 실시(66) 오토라이너(67) 양송이 재배(68) 택시미터기(69)
기와디자인(70) 마른 전복 수출을 위한 재료별 포장 계획(71) 개폐식 간이식탁(72) 장식을 겸한 병따개와 조미료통(73) 가정용 패널히터(74)
전자제품 시리즈의 포장 디자인표준화 제안(75) 스테레오 카세트 겸용 컴퓨터 캘린더(76) 포터블 전자미싱(77) 수출용 책상 용구 세트(78) 확성기기(79)

상공미전은 상업디자인과 공업디자인의 발전에는 일정부분 기여한 반면, 공예의 산업화에는 무관심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거의 매회 참관하여 테이프 커팅을 할 정도로 디자인에 관심이 높았는데, 군사정부 하에서 대통령의 관심사가 곧 상공미전 수상여부에 직결될 수밖에 없었고, 대통령의 관심사는 언제나 수출상품, 특히 공업디자인이었다. 1970년대까지 상공미전에서 출품된 공예품들의 질적 수준은 우수한 반면, 공업디자인은 출품수가 부족하고, 내용면에서 뚜렷한 작품이 없었다(KIDP, 1974). 하지만 대개의 경우 공업디자인이 대통령상을 비롯한 기관장상을 수상을 하였고, 공예품은 수상이 어려웠다(Table 2). 또 다른 문제는 국전의 공예부와 상공미전의 공예디자인의 영역이 중복된다는 점이었다. 양자는 실질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었으며 심사위원도 공유했다. 다만 국전은 해방 후 문화예술적 전통이 이어져온 것에 반해, 상공미전의 공예디자인은 이렇다 할 특징이 있지 않았고, 출품작 대부분이 전통공예임에도 수출가능성이 있는 작품, 관광기념품 등에 대해서만 간간이 수상이 이루어 질 뿐이었다(KIDP, 2004).

4. 2. 아카데미즘과 수출

초기 상공미전은 일반인이 다수 참여했으나 이후 응용미술 전공 학생들이 주로 출품하기 시작했다. 학생들에게 디자인계의 국전인 상공미전에서 수상하는 것은 사회적 명예를 얻고 출세를 하는 지름길이었다. 심사위원들도 국전과 같은 미술전람회로 인식하여 신인 작가들, 특히 대학생들의 등용문으로 활용하였다. 이는 ‘수출산업 기여’라는 본래 설립 목적과 반하는 결과였다(KIDP, 2004). 당장 제1회부터 주최 측은 응모자에게 “가급적 수출진흥에 기여할 수 있는 작품”이라고 못 박았는데, 대통령상에는 수출과 하등 관련이 없는 그래픽 작품인 서울역 색채계획이 뽑혔다. 수출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양산가능성에 높은 점수를 주어야 할 것인데도, 상공미전 수상작은 작품의 완성도 보다는 어떤 컨셉의 작품을 만드느냐가 당락의 기준으로 작용했고, 지나치게 컨셉에 중점을 둬서 실용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끊임없이 제기되었다(매일경제, 1995.5.3). 이는 학계로 구성된 운영위원들이 너무 아카데믹한 접근을 시도한 결과였다.


Figure 5 The article about Lee soon suk’s memoir (kyunghyang, 1974. Mar 19)

1회에서 5회까지 운영위원장을 맡았던 이순석은 “아이디어 부족은 무조건 낙선”시켰다고 회고한 바 있다(Fig 5). 초창기 상공미전을 주도했던 민철홍 역시 “당시 정부 관료들이 수출산업에 직접적으로 투입할 수 있는 실용적인 디자인을 기대했지만, 디자인계의 장기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창조적인 콘셉트 위주의 디자인에 높은 점수를 주었다”고 회고했다(Seo·Oh 2011). 컨셉을 중요시하는 분위기로 인해 대부분 학생들은 아이디어만 내고, 작품은 목업집에서 완성되는 발주공예가 이루어졌다. 물론 초창기 60년대에는 모든 대학에 모형을 제작할만한 시설도, 여건도 마련되지 못했다. 이런 경향은 지속되어 80년대 이후에는 목업의 완성도가 수상의 중요한 기준이 되다시피 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컨셉 위주의 디자인을 중시하는 풍조는 당시 서울대학교 응용미술과의 분위기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1960년대 당시 서울미대 장발 학장은 응용미술에 큰 기대를 걸고, 학생들에게 구태의연한 미술제작방식을 버리고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시도할 것을 요구했고, 특히 아이디어를 중요시했다. 응용미술과에서 유일하게 입체물을 제작하는 수업을 맡았던 백태원 역시,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경향이 짙었다. 이는 당시 대학 재학 중에 국전 공예부에 작품을 출품하여 특선을 다수 수상한 한도룡, 민철홍, 조영제 등의 작품 경향에서도 확인된다. 당시 국전은 전통공예품이 주류를 이루었고, 얼마만큼 완성도 높은 작품을 출품했는가가 심사의 중요한 기준이었다. 다시 말해 장인으로서 오랜 기간 생업으로 작품에 몰두하여 높은 완성도를 선보이는 숙련된 작가들만 수상을 할 수 있었고, 대학 재학 중인 20대 청년이 수상을 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하지만, 세 사람은 아이디어로 승부하여 종래의 전통공예방식을 무시하고, 새로운 재료와 기법, 제작방식으로 추상미술과 같은 작품들을 선보였고, 대거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한도룡의 경우, 신성공예사에서 나전칠기 일을 하고 있었지만, 출품한 작품의 경우 추상미술에 가까웠다. 일그러지고, 철제가 비대칭적으로 결합되는 등의 새로운 형태에 긁고, 태우는 등의 새로운 기법을 적용하여, 대학 재학 중 3회나 특선을 수상했다. 이들은 아이디어를 내고 모든 작품은 목업집에서 완성되었다. 아이디어를 중시하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서울대학의 분위기가 은연중에 상공미전으로 연장되어 반영되었던 셈이다. 컨셉을 중시하는 심사풍토는 1971년, 이순석이 위원장에서 물러나고부터 급격히 사라졌다. 대신 재료나 기능, 양산의 가능성 등이 더 중요한 평가기준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다.

1967년 상공미전 규정을 살펴보면, 상공부는 ‘우량분과위원회’를 별도로 조직하고, ‘굿디자인’에 대한 출품을 유도했다. 71년도부터는 포장대전을 시행하여, 아카데믹한 풍조의 상공미전을 대신하여 실질적인 포장디자인 개선에 나섰다. 또 국민의 수출에의 관심을 고취하기 위하여 상공미전의 지방순회전시를 시작했다. 비록 성과는 나오지 않았지만, 상공미전 수상작을 기업체와 연관하여 양산품으로 생산하려는 노력도 기울였다. 학계가 상공미전을 미술전람회와 같은 성격으로 인식한 반면, 상공부에서는 수출산업에 일조할 것을 기대하는 동상이몽이 한동안 지속되었던 셈이다. 하지만 당시 참여한 학계인사는 대부분 기업체 경험이나 수출관련 전문지식이 부족한 작가들로 구성되어, 애초 목적과 같이 수출산업에는 전혀 기여하지 못했다. 이후 디자인포장센터가 마련한 한국포장대전(71), 굿디자인전(85) 등이 등장하고서야 수출산업에 기여하는 디자인 공모전이 가능해 졌다.

4. 3. 서울대 파벌과 심사의 편파성

상공미전은 초기부터 서울대 출신의 수상이 두드러지게 많았다. 이순석이 심사위원장으로 활동하던 1970년까지 특선 이상의 상위권 수상자는 대부분 서울대 재학생 및 졸업생이었다. 당시 응용미술과가 설치된 대학이 서울대 밖에는 없었기에 서울미대생에게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서울대에서도 공업디자인 교육은 이루어지지 않는 시기였다. 79년까지 수상실적을 보면, 상공미전 보이콧 운동까지 벌였던 홍익대는 중앙대와 함께 각 2회씩 대통령상을 수상한데 그쳤다. 제1회 상공미전에서 대통령상은 서울대 졸업생, 국회의장상은 서울대 4학년 재학생, 국무총리상은 서울미대 조교가 수상했다. 4회 상공미전에서는 대통령상, 국회의장상, 국무총리상, 경제기획원장관상, 대한상공회의소 소회장상 등, 상위 기관장상 수상자 대부분이 서울대 재학생 및 졸업생이었다. 한국디자인포장센터로 이관된 1971년 이후에는 서울대 출신 이외에 디자인포장센터 직원이 수상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디자인포장센터는 서울대 내에 설치되었던 한국디자인센터를 합병한 기관으로, 디자인포장센터 연구원 대부분이 서울대 출신이었다. 편파심사를 떠나 센터가 주관하는 공모전에 센터 직원이 자주 수상을 하는 것은 윤리적인 비난의 소지가 다분한 것이었다(Table 3).

Table 3
1960s-70s Korea Commercial & Industrial Design Exhibition Presidential prize-winning works, winners, career and academic backgrounds

년도 수상자 분류 연령 수상당시 직업 출신대학
1966 1 강찬균 1부 상업 29 중앙산업 석예원(石藝院) 서울대
1967 2 김길홍 3부 공업 27 이화여고 교사 서울대
1968 3 권명광 1부 상업 26 군 복무중 홍익대
1969 4 부수언 3부 공업 32 디자인포장센터 연구원 서울대
1970 5 김철수 3부 공업 23 서울미대 4년 서울대
1971 6 신용태 1부 상업 31 디자인포장센터 포장과 서울대
1972 7 이건 3부 공업 28 덕성화학 디자이너 홍익대
1973 8 박인숙 2부 공예 23 공예가 중앙대
1974 9 고을한 3부 공업 37 한양대 강사 서울대
1975 10 김순성 1부 상업 28 디자인포장센터 연구원 경기공전
1976 11 홍성수 3부 공업 29 삼성전자 중앙대
1977 12 민병혜 3부 공업 24 디자인포장센터 공업디자인실 서울대
1978 13 박성우 2부 공예 - 공방 경영 -
1979 14 정국현 3부 공업 28 삼성전자 한양대

이는 심사위원 대부분이 서울대 출신으로 채워져, 심사가 편파적으로 이루어진 결과라고 밖에는 달리 해석할 방법이 없다. 당시 상공미전 수상자는 약간의 상금과 해외연수의 기회 밖에는 별다른 특전이 없었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디자인에 대한 인식이 낮은 상태에서 국가가 공인한 디자이너로 인식됨에 따라 대학교원 임용이나 취직에 유리한 고지를 점하게 된다는 점에서 무척 매력적이었다. 실제 상공미전 대통령상 수상자는 수상당시 대부분 20대 중후반의 젊은 나이였는데, 수상을 계기로 거의 대학 전임으로 자리 잡았다. 초기 상공미전의 심사 편파성에 대해 다수의 지적이 있었다. 이순석이 위원장을 맡았던 5회 차까지 주최 측의 불신이 심해지면서 출품작수는 지속적으로 감소하였고, 일반인 출품은 사라지는 대신 대학생 작품으로 채워졌다. 작가들 사이에 심사불신과 잡음이 끊이지 않자, 71년 제6회 차에 상공부는 돌연 심사위원 위촉을 작품출품 마감이후로 연기했다(경향신문, 1971.4.10). 심사위원과 출품자간의 뒷거래설이 파다하자 사전에 출품자가 심사위원을 접촉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출품이 마감된 날 밤, 심사위원을 전격 위촉했다. 위촉된 다음날부터 2일간 집중적으로 작품심사를 마치는 방식으로 소위 ‘007작전’을 방불케 하는 심사를 펼쳤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였는지, 1972년부터는 출품작이 예년의 2배 가까이 뛰어 올랐으며, 종래 90% 이상을 차지하던 학생출품이 45%로 줄고, 생산업체 45% 등 출품자의 범위가 다양해져 전시가 흥행에 성공하기 시작했다(Table 4). 이후 지속적으로 출품작이 증가하고 특히 수준 높은 공업디자인 분야 수상작이 많이 등장했다. 성과에 고취된 상공부는 전국 순회전시를 통해 디자인계몽에 나섰고 대 성황을 이루었다(매일경제, 1972.5.9).

Table 4
The annual number of entries, prize-winning works

주관 상공회의소 한국디자인포장센터
회( 년도) 1(66) 2(67) 2(68) 4(69) 5(70) 6(71) 7(72) 8(73) 9(74)
출품 1074 1519 - 441 640 1450 2383 2134 3003
수상 239 480 354 261 319 617 956 1091 1179
수상비율 22% 31% - 60% 50% 43% 40% 51% 39%

원래 상공미전의 심사위원은 추천작가회의를 통해 추천작가 중에서 비밀투표로 선정되었다. 추천작가 중심의 운영은 특정 학연과 인맥으로 작동되는 시스템상의 부작용을 낳았다. 심사위원 구성은 서울미대 교수진 이외에 백태원(포장센터 상무, 서라벌예대 교수), 백태호(이화여대 교수)등이 참여하고 있었다. 출품된 작품들은 심사장에 모두 무기명으로 나열되어 있었지만, 대개 대학교수로 구성된 심사위원들은 자신의 학생이 제출한 작품을 이미 알고 있었다. 심사편파성에 폐해가 막심했던 순수미술 쪽의 국전은 1976년, 공개심사제 채택 등으로 제도를 개혁하여 심사과정에 잡음을 없앴다. 심사방법은 입선의 경우 당락 표시로, 특선 및 수상작품 선정은 1백점 만점의 평점제를 채택, 다득점 순위를 결정했고, 동점일 때는 출품경력이 많은 사람에게 우선권을 주었다(동아일보, 1976.4.17). 상공미전도 1976년 대한민국산업디자인전람회로 이름이 바뀌고 일부 규정을 개정했다. 심사방식도 바뀌어 비밀투표제를 임명제로 바꾸게 되었고, 추천작가들과 함께 비전문가들도 심사에 참여하게 됨으로써 이 같은 문제점들을 점차 해소해나갔다.

5. 상공미전의 평가

일본은 1950년대까지 양산공예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고, 전후 부흥과정에서 외국제품의 디자인을 무분별하게 모방하여 세계적인 물의를 일으켰다. 특히 영국제품을 무차별적으로 모방하여 외교부장관이 공식석상에서 문제를 제기하기에 이르자, 1957년 ‘G마크’ 제도를 도입했다. 일본디자인진흥회(JDP)의 주관으로 제정된 이 공모전은 디자인, 사용성, 혁신성 등을 평가해 수상작에 'G'마크를 부여한다. G마크와 더불어 1959년에는 ‘수출품 디자인법(輸出品 デザイン法)’을 법률 106호로 제정했다(1997년 폐지). 외국 제품의 디자인과 상표 모방을 방지하여 수출품에 대한 외국의 신용을 떨어트리지 않도록 제정된 법안이다. G마크 인증을 통해 모방품의 수출을 금지하고, 고유모델 생산에 박차를 가한지 불과 10여 년 만에 세계 정상에 우뚝 올라서는 저력을 발휘했다(KIDP, 2006).

상공부는 상공미전에서 이러한 성과를 기대했을 것이다. 수출 증대라는 취지는 같았으나, 그 접근방법이 달라 상공미전 초기에 혼선을 빚었다. 상공미전은 국내 산업 여건에 비추어 결코 시기가 늦거나 정부지원이 부족하지 않았으나, 운영상의 미숙과 구성원의 편향성이 상공미전의 발전을 가로 막았다. 이후 정부 전시성 행사로 굳어져 결국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것으로 판단된다. 수출산업에의 기여라는 본래 목적은 상공미전이 아닌, 한국포장대전이나 굿디자인전 등을 통해 이루어졌다.

대한민국 산업디자인전은 과거 6~70년대 디자이너 등용문으로서 활용되고, 디자인 신경향을 전파하며, 국민들의 디자인 인식제고에 기여한 부분이 있다. 하지만, 관주도로 형성되고 상공부 및 서울대 중심으로 운영되면서 엘리트 중심의 대국민 계몽적 성격의 디자인 전시로 자리 잡아 갔다. 현재 50년의 역사를 가진 관전임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지방디자인협회가 주관하는 ‘iF’ design award(1953)나 ‘red dot’ award(1955), 미국 디자이너 협회가 주관하는 ‘IDEO’(1970), 일본 ‘굿디자인전’(1957) 등, 해외 유수의 디자인공모전에 비하여 그 명성이나 권위가 비교할 수 없이 낮은 편이다. 또 디자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부재하던 시기에 수출을 목적으로 한 디자인 정책과 홍보, 전시행사 진행 등을 통해 디자인은 곧 수출, 경제 발전이라는 등식을 만들어 냈고, 국민생활과는 동떨어진 기술로 이해되게끔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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