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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Influences of Japanese Design on Korea from the 1960s to the 1980s and the Tasks
1960~80년대 국내 일본디자인의 영향과 과제
  • Jongkyun Kim : Korea Intellectual Property Office, Daejeon, Korea
  • 종균 김 : 특허청, 대전, 대한민국

Background This research examines the influences of Japanese design on Korea from the 1960s to the 1980s. It aims to study the reasons for the greater influence of Japanese design over any other overseas design, its background, the ways it was accepted and the reaction of the public, and also look into the relevant problems and tasks.

Methods The influences of Japanese design, which became a social issue, were analyzed by area through the case studies. The similarities with Japanese design were discovered around works introduced in past newspapers, exhibition catalogs, and other sources, and the following effect relationships were investigated. In addition, the domestic reaction and accepting attitudes regarding Japanese design were studied and the remaining legal and moral issues to be resolved in the future were considered.

Results Through this, it was identified that the influence of Japanese design on Korea was greater than on any other advanced countries, and the accepting attitudes were different according to the design type. Though the hostility toward ‘Japanese style (Japanese tradition)’ and ‘Japanese’ were high, the appropriation of technique was frequent and the practice of imitation was generously allowed in contemporary design, especially in the industrial design sector.

Conclusion The practice of copying Japanese design did not cause any legal problems but it morally lowered the creativity of Korean design and brought not the independent and new but the material oriented design works into vogue.

Abstract, Translated

연구배경 본 연구는 1960~80년대, 국내 일본디자인의 영향을 살펴보고 있다. 해외 디자인 중에 유독 일본디자인의 영향이 큰 이유와 배경, 수용 방법, 일본디자인에 대한 대중의 반응 등을 조사하고, 문제점과 과제를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연구방법 사례연구방법을 통해 각 분야별로 사회적인 이슈가 되었던 일본디자인의 영향을 분석하였다. 과거 신문기사와 전시회 도록 등에 소개된 작품을 중심으로 일본디자인과 비교하여 유사점을 발견해 내고, 그 영향 관계를 살펴본다. 또 일본디자인에 대한 국내의 반응과 수용 태도를 살펴보고, 법적·윤리적인 문제점을 따지며, 앞으로 남겨진 과제를 생각해 본다.

연구결과 이를 통해 국내에서 여타 선진국에 비해 일본디자인의 영향이 컸고, 디자인 유형에 따라 국내의 수용태도가 각기 달랐음을 확인하였다. ‘왜색(일본전통)’과 ‘일본인’에 대한 반감은 컸으나, 기법 면에서의 차용은 두드러졌고, 현대디자인, 특히 공업디자인에서는 모방에 관대하였다.

결론 과거 일본디자인의 모방이 법적 문제를 야기하지는 않으나, 윤리적으로는 한국디자인의 창작성을 저하시키고, 새롭고 주체적인 디자인보다는 소재 중심의 디자인작품을 유행시켰다.

Keywords:
Japan Design, Japanese Style, Copy, Korean Design., 일본디자인, 왜색, 모방, 한국적 디자인.
pISSN: 1226-8046
eISSN: 2288-2987
Publisher: Korean Society of Design Science
Received: 03 Jun, 2015
Revised: 03 Jul, 2015
Accepted: 03 Jul, 2015
Printed: Aug, 2015
Volume: 28 Issue: 3
Page: 187 ~ 201
DOI: https://doi.org/10.15187/adr.2015.08.28.3.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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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tation : Kim, J. (2015). The Influences of Japanese Design on Korea from the 1960s to the 1980s and the Tasks. Archives of Design Research, 28 (3), 187-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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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한국의 근대디자인은 그 출발이 일제강점기라는 불운으로 인해 서구 조형사조를 일본을 통해 우회적으로 접하는 특수한 상황에서 시작하였다. 또 한국경제와 마찬가지로 짧은 기간 동안 압축적으로 성장해 오며, ‘서구디자인=수출유망디자인’이라는 잘못된 등식을 내재화한 채, 모더니즘이나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을 거치지 않고, 단지 표피적인 스타일만을 차용하는 방식을 택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역시도 일본을 우회한 경우가 많았다. 1980년대 이전까지는 폐쇄적인 국가관 때문에 해외여행이나 유학이 어려웠고, 해외 서적이나 잡지 등의 매체를 접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나마 비교적 접하기 쉬운 정보는 지리적으로 인접하고 경제적인 교류가 왕성하며 영어에 비하여 언어장벽이 낮은 일본이었고, 일본디자인 모방이라는 가장 손쉬운 방법을 택하게 되었다. 또 1990년대 이전까지 값싼 노동력을 강점으로 하여 줄곧 일본기업의 OEM 생산 전진기지 역할을 하였고, 중국 개방이전까지는 미국을 제외하고는 어쩔 수 없이 가장 큰 경제협력국가였다. 80년대에는 세계경제력 1위 공업 대국으로서의 저력을 과시하며 세계 100대 기업 대부분을 보유했던 일본디자인의 우수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기에, 우리의 디자인 모델은 언제나 일본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점에서 한국근대 디자인은 일본의 디자인의 모방을 통해 발전되었다고 주장해도 터무니없는 소리는 아니다. 하지만 국민들의 의식 속에 뿌리 깊게 남아있는 ‘반일정서’로 인해 미국이나 유럽의 디자인 영향에 대해서는 전혀 문제를 삼지 않으면서도, 유독 일본디자인의 영향을 외면하거나 축소하고, 왜색논쟁이 일곤 했다. 이 글에서는 우리의 산업화기 1960~80년대의 일본디자인영향과 수용형태, 현대에 남은 과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한다.

2. 영향과 모방, 표절(剽竊)의 대상으로서 일본디자인

모든 작가는 타인의 작품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특히 주관적인 내면세계의 표현보다 객관적이고 상업적인 미술을 추구하는 디자인분야는 항상 트렌드를 주시하며, 시대적 흐름에 발맞추어 왔다. 혁신적인 기술이나 새로운 기법이 등장하면 많은 작가들은 이를 차용하여 작품을 만들어내고 문화는 더욱 발전하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저작권법에서는 작품의 표현기법에 대해서는 저작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기도 하다. 디자인에서 타인의 영향, 스타일의 차용이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경향이다.

단순히 영향관계를 벗어나 좀 더 노골적으로 대상을 직접적으로 추구하는 것을 모방이나 표절이라 한다. 모방이란 다른 것을 본뜨거나 본받는 것을 말한다. 모방은 단순히 무엇을 따라서 만드는 것을 의미할 뿐, 윤리적인 판단이 들어있지 않다. 예술사에서 모방은 오래된 전통이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다는 명제는 역사이래로 타인의 장점을 본받아 새로운 발전을 이루는데 밑거름이 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유명 작가의 작품을 모사(模寫)함으로써 여러 가지 기법을 훈련하고, 더욱 발전시켜 낸 작품에 대해 단순한 모방 이상의 가치를 평가를 하고 있다. 또 오마주(Hommage)나 패러디 같은 형태의 모방은 예술의 기법으로 정당한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남의 그림을 단순히 베껴서 자신의 것인 양 세상에 내보이는 것은 엄연히 표절에 해당한다. 표절이란 다른 사람의 저작물의 일부 또는 전부를 몰래 따다 쓰는 행위를 말하며, 허락 없이 몰래 끌어다 쓰는 행위를 도용(盜用)이라고도 일컫는다. 표절은 윤리적 개념으로 사용되는 용어이며, 부정한 작품이라는 가치판단이 들어있다. 이를 법률 용어로는 침해(侵害)라고 말한다. 저작권법이나 디자인 보호법에서 말하는 침해란 타인의 재산상의 피해를 주는 범죄행위를 말하며 민·형사상의 처벌이 수반된다.

영향, 모방, 표절의 경계는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한국 근대미술에서는 늘 모방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공모전에서 표절작품이 문제가 된다거나, 평론가가 표절작품으로 지목하여 작가와 논쟁이 일어나고, 인신공격이 있기도 하였다. 표절논쟁은 미술작품의 본질적인 존재근거인 독창성과 관련하여 시대와 분야를 불문하고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쟁점이기도 하다(Kim, 2014). 이에 반해 대중적인 호응에 민감한 상업미술분야, 특히 디자인에서는 순수미술에 비하여 모방에 둔감하고, 표절문제에 대해서 별다른 논쟁이 있지 않았다. 창작성의 평가척도가 상업적인 성공인 이상, 디자인에서 윤리적인 문제를 논하는 것은 불필요한 논쟁으로 치부되었다. 평론가가 아닌 대중의 평가를 받는다는 점에서 ‘왜색’과 같은 반일감정을 건드리는 것을 조심해야 할 부분이지, 해외의 디자인을 모방했다는 것이 큰 결격사유가 되는 일은 없었다.

3. 왜색논쟁과 문화선도자로서의 일본디자인
3. 1. 60년대 일본디자인과 민족주의
3. 1. 1. 왜색논쟁

1950년대를 거치며 미국의 원조와 지원을 통해 일본의 디자인 영향력이 급속히 사라지고, 대신 서구디자인 사조를 직접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했다. 미군정을 통해 국내 대학 내에 디자인학과가 신설되기 시작했고, 미국 연수를 다녀온 교수진들이 대학 강단에 등장하면서 미국식 학제와 수업이 일부 도입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후진적인 사회구조와 산업화 수준으로 인해 사회적으로 디자인의 인식수준은 여전히 낮은 편이었다. 1960년대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고 한일국교 정상화를 진행하면서 반일정서는 확산되고 있었다. 1960~70년대 우리 사회의 디자인수준은 낮은 편이었고, 여느 후발 산업국가들이 그러하듯이 건축, 제품, 그래픽, 의상 등을 막론하고 해외의 작품을 참고하고 모방하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었다. 그런데 프랑스나 미국 등의 서방국가 작품과 유사하거나, 모방한 작품에 대해서 관대하였으나, 유독 일본풍의 디자인 작품에 대하여 가혹하였고, 실제 표절논란보다 훨씬 더 감정적으로 부각시키고 히스테리적인 거부반응을 보였다. 논란의 중심에 선 작가는 ‘왜색작가’라는 여론의 뭇매를 맞아야 했다. 우선 1960년대 정부가 주도한 박물관과 해외 박람회, 상공미전을 살펴보면 이러한 경향을 금방 확인할 수 있다. 일본 동경예대 건축과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귀국한 건축가 김수근의 건축 작품은 1967년 2건의 왜색시비를 일으켰다. 하나는 캐나다 세계박람회 한국관 건축이었고, 또 하나는 국내에서 두번째로 지어지는 국립부여박물관 건축이었다(Fig 1, 2). 두 건축 모두 표절 등의 문제라기보다는 양식적 차용에 가까운 것이었으나, 표절의 문제로 대두되었다. 캐나다 세계박람회 한국관의 경우, 국내에 지어지지 않고 정해진 기한이 있기 때문에 별다른 문제없이 넘어갔지만, 건축기한이 급박하지 않은 부여박물관의 경우, 왜색논쟁으로 인해 위원회 구성, 설계 변경 등을 거치며 몇 년간 분쟁의 중심에 섰고, 실제보다 2배의 건축비가 소요되었다. 김수근은 과거 백제의 문화가 일본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자신의 작품은 백제문화재에서 모티프를 딴 것이라는 해명을 내 놓았으나 묵살되었고, 여론 재판식의 논쟁이 계속되어 일본 느낌이 들지 않도록 한식기와를 씌우고 양쪽 벽면에 완자무늬를 집어넣고 단청문양을 칠하는 등 설계를 수정하였음에도 결국 완공 후 박물관으로 활용되지 못한 채 현재에까지 이르고 있다.

당시 건축부문에서는 해외 디자인을 표절한 것으로 논란이 되는 다수의 근대 기념비적 건축물이 있다. 대표적인 예로 김중업의 삼일빌딩은 미스 반 데 로에(Mies van der Rohe)의 대표적인 모더니즘 건축인 뉴욕의 씨그램(Seagram)빌딩과 매우 흡사하여 표절이라는 주장도 간간이 제기되지만, 김중업에 대해 매도하는 여론이 형성된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한국 근대화의 상징’ 등과 같은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Fig 3). 삼일빌딩은 2013년 동아일보와 건축전문잡지 월간 ‘SPACE’가 공동으로 조사한 ‘건축 전문가 100인이 뽑은 한국 최고의 현대건축 20’에서 13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김중업의 작업에서는 많은 경우 르코르뷔지에(Le Corbusier)의 모티브가 차용되고 있으나 이에 대한 지적도 드물다. 또 김수근의 자유연맹건물은 르코르뷔지에가 설계한 인도 찬디가르 고등법원(1955) 정면부와 형상이 유사하지만, 이에 대한 비판은 거의 없는 편이다(Fig 4). 이외에도 한국 대표건축물인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1984)의 경우 서울올림픽을 치룬 기념비적인 경기장이나 프랑스의 파리 스테디움(1972)과 유사한 점이 있다(Fig 5). 하지만, 미국이나 프랑스, 독일 등 서구권의 건축물과 표절, 또는 모방논쟁이 있는 것에 대해서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유독 일본의 건축, 특히 일본색이 드러나는 것으로 보이는 작품에 대해서 예민하게 반응하고, 왜색 논쟁이 발생하며 비판적인 여론이 형성되었다.


Figure 3 3-1Building(Kim chung Up, 1971) and Seagram Building(USA, Mies van der Rohe, 1958)

Figure 4 Chandigarh Court(India, Le Corbusier, 1955) and Namsan Freedom Center(Kim Soo Geun, 1963)

Figure 5 Parc des Princes(Paris, 1972) and Jamsil Main stadium(Kim Soo Geun, 1984)
3. 1. 2. 일본 작품의 거부감

Figure 6 Kyunghyang newspaper.(1966. Aug 10)

디자인에서도 해외의 디자인이 많이 차용되었는데, 특히 일본의 영향력은 지대한 것이었다. 6~70년대, 영어 보급력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일본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았고, 유사한 문화와 정서로 수용에 거부감이 없었으며, 지리적으로 인접하여 최신 디자인경향을 실시간으로 전수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 한도룡, 조영제 등은 일본을 자주 왕래하며 최신 디자인을 들여오고 왕성하게 활동했다. 하지만, 국민 여론을 의식하고 일본디자인을 배척해야 하는 이율배반적인 상황은 지속되었다. 공모전에서도 일본디자인 논쟁이 초기부터 제기되었다. 가령 제1회 상공미전의 경우, 대통령상을 수상한 ‘서울역 색채 안내 실시 특선’(강찬균)이 ‘동경 올림픽 픽토그램을 모방했다는 논란에 휩싸였다(Fig 6).


Figure 7 A comparison of Presidential prize-winning works(1966) and the pictogram for 1964 Tokyo Olympic

두 작품을 비교해 볼 때, 일견(一見) 유사한 점을 발견할 수 있기는 하나, 전체 작품에서 일부분에 해당한다는 점과, 모더니즘을 표방하는 픽토그램의 유형이 전 세계적으로 대개 비슷비슷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표절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다(Fig 7). 하지만, 당시 언론에서는 제1회 상공미전의 수상작에 대해 “외국 것 본뜬 것, 제1회 상공미전 대상에 말썽 있다.”라는 제목의 기사로 일본의 ‘동경 올림픽촌 심볼·마크’를 모방했다고 지적하였다. 문제가 된 부분은 식당, 다실, 변소, 이발소 등을 표시하는 12개의 심볼마크가 일본의 것을 모방했고, 또 서울역 시발의 열차 시간표의 노선 색채 구분, 열차의 1, 2, 3등칸 표지를 적, 녹, 청으로 한다는 아이디어는 “외국의 공항이나 역구내의 열차(지하철 포함) 표지판에서 이미 상식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라고 익명의 관계자의 주장을 싣고 있다.

제2회 상공미전은 행사포스터가 말썽을 일으켰다. 언론에서는 상공미전의 포스터가 1966년도 일본 광고미술연감에 수록된 일본인의 디자인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경향신문 1967.8.26). 실제 상공미전 포스터는 일본의 그래픽디자이너 가메쿠라 유사쿠의 작품과 극히 유사한 것으로 밝혀져 망신을 당했다(Fig 8).


Figure 8 The book cover of ‘Design’ (Yusaku Kamekura, 1962) and the 2nd Commercial & Industrial Design Exhibition poster (Yeom In Taek, 1967)

1970년도에는 전매청에서 내놓은 담배 ‘신탄진’이 구설에 휩싸였다. 서울대 민철홍 교수에게 의뢰하여 제작한 새 디자인은 은색 배경에 흰색 줄 2가닥을 ‘7’자 모양으로 그어서 고속도로를 그려 넣고 있는데, 이를 두고 일본 ‘스미도모’ 상사의 광고 작품과 유사하다는 지적과 함께 “국위(國威)손상”이라는 주장을 내놓았다(동아일보, 1970.3.14). 실제 두 작품을 비교해 보면, 전체적인 구성이나 색감, 사용형태 등이 현저히 달라 표절을 주장하기에는 무리다(Fig 9). 이 기사는 한 독자가 일본잡지를 들고 신문사를 찾아가 ‘국위’를 운위하며 표절이라고 주장한데서 비롯된 것인데, 일본에 대해 극도로 과민해진 여론의 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그래픽에서도 일본디자인의 모방이 만연해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3. 2. 7~80년대 공업대국과 첨단문화의 이미지로서의 일본디자인
3. 2. 1. 캐릭터와 패션, 문화트랜드

Figure 10 Taekwon-V and Mazinga-Z (Photo Source: http://bookloud.kr/archives/1298)

Figure 11 Korean copies of the Japanese animation

선진국, 공업대국과 첨단문화 생산지로서의 일본문화는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도 뿌리 깊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디자인의 분야에만 한정하면 아동 캐릭터나 만화영화는 일본문화의 아류로 전락했다. 유일하게 국산 캐릭터로 국민적인 사랑을 받았던 로봇 ‘태권V’ 조차도 많은 부분 일본의 ‘마징가Z’을 차용하고, 투구부분만을 한국전통 갑옷에서 모티브로 따온 정도였다(Fig 10). 기타 6~70년대 생산된 만화나 만화영화는 일본 캐릭터를 조잡하게 베끼는 수준이었고, 1980년도에 제작된 독수리 ‘5형제의 경우’, 비단 캐릭터를 베끼는 수준을 넘어서 일본 만화영화 ‘과학닌자대 갓차맨(科學忍者隊ガッチャマン)’을 거의 그대로 다시 그리는 수준으로 스토리 전체를 베꼈음에도 불구하고 높은 인기를 구가했다. 당시 일본제작사로부터 하청을 받을 때 얻은 자료를 무단으로 이용해 극장판을 만들어서 개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fig 11). 이 경우는 비단 저작권 침해 문제에 그치지 않고, 민·형사상의 소송으로 비화될 수 있는 부분이지만, 당시 국내의 저작권법은 해외 저작물의 저작권을 인정하지 않았고, 기타 별다른 문제도 제기되지 않았다.


Figure 12 Kyunghyang newspaper.(1996. Jan 15)

패션이나 생활문화 저변에서 확산되고 있는 일본 문화도 심각한 수준이었지만, 대부분 현대문화였고, 일본의 전통이나 왜색풍의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다만 일본 전통색상이 배어나오는 왜색풍의 디자인은 예외 없이 비난의 대상이 되곤 했다(Fig 12).

3. 2. 2. 그래픽 디자인 스타일의 차용과 모방

1970년대와 80년대, ‘한국적 디자인’이라는 주제는 모든 국내 디자이너에게 과제였다. 70년대와 80년대가 그 양상을 달리하는데, 70년대는 정권의 정당성 확보와 민족주의 고취를 위한 목적의 국수적인 형태였다면, 80년대는 세계화와 더불어 서구사회에 유행처럼 불어 닥친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 처음으로 국제사회에 나가는 두려움 등이 한데 어우러져 나타난 기묘한 형태였다. 양자는 거의 모든 면에서 일관성을 가지지 못하고 다른 형태로 나타났는데, 접근방법이나 소재, 표현방법 등이 상이한 특징을 보였다. 1970년대 한국적 디자인은 민족주의적 소재, 구국 영웅 등이 중심이 되었고, 일러스트레이션류나 기하학적 형태의 아르데코풍 표현방식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80년대는 일본의 대표적인 그래픽 디자이너인 다나카 이코(田中 一光)와 가메쿠라 유사쿠(龜倉雄策)등의 작품이 큰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1981년 가메쿠라 유사쿠가 한국시각디자인협회(KSVD)의 초청으로 강연을 한데 이어, 다음해 1982년에는 다나카 이코가 내한하였고, 국내에 널리 소개되었다. 그리고 두 디자이너의 작품은 국내 그래픽 디자인에 크나큰 반향을 일으켰는데, 특히 다나카 이코의 작품은 당시 국내 디자이너들의 오래된 과제와도 같던 ‘한국적 디자인’ 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다나카 이코는 그의 작품 ‘니혼부요’ 등에서 최소한의 기하학적인 요소를 통해 일본의 전통문화를 효과적으로 표현해 내어, ‘가장 일본적이면서도 가장 세계적인’ 디자이너로 전 세계적인 사랑을 받는 작가였다. 오랜 기간 한국적 디자인에 천착해오던 국내 디자이너들은 다나카 이코의 그래픽 표현기법을 대거 수용하기 시작하면서, 비슷한 모티브의 차용, 화면의 수직분할, 강렬한 원색과 기하학적인 표현방법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Table 1).

Table 1
A comparison of Tanaka Ikko’s graphic posters and 80's Korean graphic posters

니혼부요(日本舞踊, 81)/여인의 얼굴(김현, 86) Music Today(85)/제주도 돌하루방(김현, 86)
'국제판화비엔날레'포스터(62)/한국인의 표정(정연종, 86) '다나카이코 포스터'책표지(81)/한국인(정연종, 86)
전통인형극 포스터(66)/굿노리(김상락, 86) 第8回産経観世能(61)/올림픽문화포스터(안정언, 88)

일본디자인계의 대부로 불리던 가메쿠라 유사쿠의 영향도 다수 발견된다. 가메쿠라 유사쿠의 디자인특징은 기하학적 단순함과 상징성으로 요약할 수 있다. 가메쿠라 유사쿠의 동경올림픽 포스터와 88서울올림픽 공식포스터를 비교하면 전체적인 색조가 유사하며, 특히 성화 봉송자는 모든 부분에서 매우 유사하다. 또 선이 방사형으로 퍼지는 형태는 가메쿠라 유사쿠가 즐겨 사용하는 표현기법으로 그의 작품 곳곳에서 발견된다. 88서울올림픽 포스터는 처음으로 컴퓨터 그래픽을 적용한 것으로 화제가 되었는데, 당시 국내 컴퓨터 그래픽 수준이 낮아 일본의 겐다 에수오(源田悅夫)에 의해서 구현되었다(Fig 13). 가메쿠라 유사쿠의 또 다른 작품인 ‘G’마크 역시 한국디자인진흥원의 ‘GD’마크와 유사함을 확인할 수 있다. 색상을 제외하고 원 내부에 알파벳 ‘G’를 45도 기울여 기하학적으로 배치한 방법과 비례가 매우 유사한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결코 우연히 만들어지기 힘들 정도로 많은 부분 일치하고 있다(Fig 14).


Figure 13 A comparison of the 1964 Tokyo Olympic poster (Yusaku Kamakura, 1964) and the 1988 Seoul Olympic poster (Cho Young Jae, 1988)

Figure 14 A comparison of ‘G-mark’ (Yusaku Kamakura, 1959) and ‘GD mark’ (Kim Hyun, 1985)
3. 2. 3. 수출디자인과 기술로서의 일본디자인

국내 제품디자인은 일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국내 자동차 제조업체는 일본의 노후 자동차 금형을 들여와 생산을 시작했고, 삼성·산요전기(69) 등과 같이 일본기업과 합작하거나 하청업체로 시작하여, 일본의 디자인이 자연스럽게 유입되었다. 하지만 제품디자인은 일반 예술과 달리 기술이라는 잣대를 들이대어 벤치마킹(benchmarking)이라는 논리로 모방을 정당화했다. 당시 세계 조형 언어는 국제주의 스타일(모더니즘)로 통일되어 있었고, 일본의 제품 역시 모더니즘에 충실하였다. 공업제품은 국제주의 양식(Modernism), 또는 수출디자인이라는 명목으로 모방에 관대하거나, 오히려 장려되는 실정이었다. 선진국의 첨단 제품들을 ‘패스트 팔로워(fast follower)’ 전략으로 재빨리 카피하는 것은 대개의 개발도상국들이 일반적으로 취하는 방식으로, 과거 1950년대 일본도 서구, 특히 영국의 디자인을 무차별적으로 카피했던 적이 있다. 우리의 70년대에도 역시 일본의 디자인이 무차별적으로 카피되었고, 간간이 서구의 디자인도 등장했다.

당시 국내 대기업에는 디자인실이 제대로 갖춰지지 못했고, 고유모델 생산의 필요성이 제기되지도 않았다. 기업 디자인실에서는 누가 더 최신의 일본제품 카탈로그를 많이 가졌는지가 디자이너의 능력을 가늠하는 정도였다.


Figure 15 A comparison of ‘Model-500’ (Henry Dreyfuss, 1953) and ‘Che-shin 1 ho’ (Min Cheol Hong, 1961)

Figure 16 A comparison of SONY ‘Walkman’ (1979) model no.1 and SAMSUNG ‘MyMy’ (1981), GoldStar ‘Poki Toki’ (1981)

금성사에서 1961년부터 생산을 시작한 최초 국산전화기 ‘체신1호’는 미국의 디자이너 헨리 드레이프스가 1953년 디자인한 ‘Model-500’과 매우 흡사하게 디자인되었다(Fig 15). 1979년에는 일본의 소니사가 휴대용 미니카세트 워크맨을 선보이며 전 세계적인 선풍을 일으켰다. 이에 우리 정부는 워크맨을 수입금지하고 금성, 삼성, 대우 등에서 미니카세트를 생산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2년 뒤인 1981년 삼성에서 생산된 ‘마이마이’ 1호와 금성사의 ‘포키토키’ 1호는 소니사의 워크맨과 매우 흡사하게 디자인되었다(Fig 16). 하지만 당시에는 우리도 선진국의 제품과 비슷한 제품을 만들어내면서 기술격차를 줄였다는 것에 대해서 만족하는 분위기였고, 디자인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일은 없었다. 제품 디자인은 예술, 또는 문화와 분리된 공업기술의 일환으로 받아들여졌던 시기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90년대 초반까지 계속되었다. 1993년 일본 통산성은 일본 제품의 디자인과 상표 등을 가장 많이 모방, 도용하고 있는 국가로 대만, 한국, 중국, 태국 순으로 밝혀, 우리나라가 중국보다 더 모방사례가 많다고 발표하였다. 내용으로는 텔레비전, VTR 등 전자기기의 모방이 가장 많았다(매일경제, 1993.3.9). 1993년 당시 우리나라 제품디자인 중 우리가 자체 개발한 것은 25%에 불과한 반면, OEM생산 50%, 외국제품 모방16%, 기술도입 5%였다. 일부 전자업체는 ‘한국형 가전제품’이라고 소개한 신제품들이 일본디자인을 그대로 가져온 경우도 있었다. 당시 국내에 제품디자인 전문 업체는 불과 25개에 불과하고, 30대 대기업 중 17개 기업만이 디자인전문부서를 설치하고 있었다(동아일보, 1993.8.29).

3. 2. 4. 디자인 비즈니스 모델로서의 일본디자인

실무적 차원에서 일본디자인의 영향을 특히 많은 받은 부분은 기업이미지 통합작업이다. 1970년대까지 국내에서 브랜드에 대한 인식이 낮았다. 대개 제품별로 상표를 부착하는 BI정도의 작업은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으나, 기업경영의 수단으로서 전사적인 브랜드 이미지 적용이나 브랜드 통합작업은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런데 조영제(전 서울대 교수)는 데코마스(DECOMAS, Design Coordination as Management Strategy)라는 용어로 70년대 후반부터 기업 CI 작업을 시작했다. 데코마스란 현대에는 통상 CI(Corporate Identity)로 불리는 개념으로, 국내에 CI라는 개념이 정착되기 이전에 일시적으로 사용되던 용어이다. 원래 '데코마스'는 일본 와세다 대학 디자인연구회를 모체로 1966년 설립된 파오스(PAOS) 사의 '나카시니 모토(中西元男, 1938~)'가 기업이미지 통합작업의 개념을 기업에 이해시키기 위해 사용하던 용어였는데, 일본에서만 사용되는 일본식 영어였다. 나카시니 모토가 한 달 동안 미국 전역을 돌며 총 50여개의 기업과 디자인사무실을 취재하여 ‘DECOMAS-경영 전략으로서의 디자인 통합(DECOMAS-経営戦略としての デザイン統合, 三省堂, 1971)’을 발간했다. 미국의 디자인시스템의 실태를 모은 ‘사례편’과, 일본의 경영풍토에 맞도록 정리한 ‘이론편’, 2권으로 구성되었는데, 이 책에서 처음으로 ‘DECOMAS’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매우 비싼 책임에도 30년간 10판을 발행하는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았고, ‘PAOS’사를 성공시키는 원동력이 된다(Nakanishi, 2013 Aug).


Figure 17 A part of DECOMAS 10th Anniversary printed materials

Figure 18 The ‘DECOMAS’ Book (Paos, 1971) and ‘OB DECOMAS Manual book’(Cho young jae, 1974)

이를 조영제가 우리나라에 도입하여 국내 기업 CI의 효시가 된 것이다. 데코마스라는 신조어는 일본보다 한국에서 일찍 실용화되어 ‘조영제 디자인전 - DECOMAS’(1976.3, 신세계미술관)에서 소개되었고, OB맥주, 제일모직, 신세계백화점 등의 CI작업에서 적극 사용되었다. 당시 이 전시는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이후 국내 기업 간에 CI 개발 붐이 본격적으로 일어났다(Nakanishi, 2013 Dec). 데코마스는 한국과 대만에만 영향을 미쳤을 뿐 서구사회에는 전파되지 않았고, 일본 내에서도 CI라는 용어로 교체되면서 점차 사라졌다. CI 역시 일본식으로 줄여진 약칭으로 우리나라에 별다른 검토 없이 그대로 적용되기 시작했다.

4. 일본 디자인 영향에 대한 평가와 과제
4. 1. 법적 문제
4. 1. 1. 저작권법

저작권법에서 말하는 침해는 표절과는 분명 다른 개념이다. 침해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사상과 감정이 표현’(저작권법 제2조 제1항.)된 창작물일 것을 요구하는데, 공업디자인의 경우 ‘사상과 감정’보다는 기능이 더 중요한 것으로 보아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 또 저작권법은 아이디어가 아닌 표현물만 보호한다. 건축의 경우, 일본풍의 목재구성방식이 설령 일본전통구조물에서 따온 것이라고 치더라도 이는 아이디어에 해당할 뿐이다. 또 전통적인 표현방식이라면 일반인들 사이에서 공유해야 할 ‘일반적인 표현 방식’으로 보아 보호하지 않으며, 오래된 문화재의 경우라면 저작물로도 인정되지 않는다. 따라서 건축물에서의 왜색시비는 그저 민족주의에 입각한 감정적 차원의 논쟁일 뿐 법적인 문제와는 하등 관련이 없다.

포스터 등의 2차원 표현물은 모두 저작권의 보호대상이다. 하지만, 색상이나 표현기법 등은 인류가 모두 사용해야 할 부분으로 보아 보호범위에 포함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래픽 포스터는 그림이 전체적으로 유사하다면 문제가 되나, 색채의 조합이나 부분적인 표현방법이 비슷하다고 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설령 똑같은 색과기법을 차용하더라도 그려진 내용만 다르다면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80년대에 등장한 ‘한국적 디자인’ 포스터작품들은 비록 색채나 표현기법을 차용했더라도 침해를 논할 것이 못 되며, 표절 등의 논쟁도 법적 근거가 없다.

이와 별개로 우리나라에서는 1987년까지 해외의 저작물을 인정하지 않았다. 1987년 세계저작권협회에 가입하면서 해외저작물을 인정하기 시작했는데, 그것도 1987년 이후부터 적용되어 그 이전에 발표된 해외저작물을 보호하지 않았다. 물론 현재는 1995년 WTO에 가입하면서 해외저작물을 소급적으로 모두 보호해주는 것으로 변화되었다. 하지만, 80년대에 발표되었던 국내의 작품들은 저작권법이 개정되기 이전의 법 적용을 받을 것이므로 해당사항이 없다.

4. 1. 2. 디자인보호법

특허법의 일종인 디자인보호법상 침해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나라 특허청에 등록된 디자인이어야 하며, 법으로 보호할 가치가 있는 디자인이어야 한다. 비교되는 디자인 간에 ‘전체 대 전체’로서 비교하여 ‘지배적인 심미감’이 유사한 디자인이어야 하며, 업(業)으로서 실시(생산)하는 것을 침해라고 한다. 디자인간의 유사판단도 디자인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의 기준으로 한다(특허청 디자인 심사기준). 이러한 기준으로 살펴보자면, 우선 일본의 디자인은 대부분 우리나라 특허청에 등록되지 않았다. 건축은 디자인보호법의 보호 대상이 아니며, 그래픽 포스터의 경우 매우 소극적으로 보호하기 때문에 보호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공업제품의 경우에는 엄격하게 법적용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인데, 설령 특허청에 등록되었다고 하더라도 일반적인 형태에 해당하는 것이라면 법으로 보호하지 않는다. 80년대 국제주의 양식이 크게 유행하며 대부분의 제품들이 사각박스 형태로 구성되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이런 경우 기하도형부분은 ‘일반적인 형상과 모양’이라는 이유로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형태로 규정하고 있다. 기하도형 부분을 제외하고 세부적인 형상과 모양을 비교하게 되는데, 완전히 똑같지 않은 이상은 침해를 구성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가령 VTR 디자인이라면 대부분의 전자제품은 직육면체이므로 이 부분은 제외하고, 전면 패널의 스위치 위치나 모양, 배치 등의 세부적인 디테일만 비교하게 되므로 비유사한 것으로 판단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비유사하다는 말은 침해하지 않았다는 말이기도 하다. 따라서 특허법상의 문제도 없는 것으로 추정된다.

4. 2. 윤리적인 문제
4. 2. 1. 왜색작가논란

생산을 업으로 하는 기업이 아닌 바에는 디자이너에게 치명적인 것은 법적 침해라기보다는 오히려 표절작가나 왜색작가로 낙인찍히는 일이다. 침해가 된다면 법적으로 정해진 금액이나 이익을 본 금액만큼 배상을 하는 것으로 일단락 지을 수 있지만, 표절논란에 휩싸이거나 왜색작가로 지목될 경우 작가로서의 인생이 끝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는 60년대 일부 작가들의 논란을 기점으로 국내에서 거의 드러나지 않았다. 80년대에는 수많은 작가들이 일본의 작품을 모방하더라도 일본색이 드러날 수 있는 부분은 한국 전통 소재로 대체하였고, 이는 곧 한국적인 것으로 인식되었다.

이는 한국 디자인을 소재주의로 흐르게 만들었고, 정형화된 고유 전통문화를 소비하는 방식으로 한국디자인의 문제를 해결했다. 표현기법에 있어서 모더니즘이 만연한 가운데, 박물관은 기와지붕과 처마선, 목조 공포 양식을, 전시는 거북선과 첨성대, 한글, 측우기 등을, 그래픽은 농악과 오방색, 한복 등을, CI는 태극문양과 색상 등 정형화된 한국전통소재와 상징을 주로 사용하여 왜색논쟁을 쉽게 피하고, 한국적 정서를 표현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하여, 정부 발주 디자인 프로젝트를 채워나갔다.

4. 2. 2. 창작성과 ‘한국성’

비록 법적인 문제가 없고, 왜색작가 논란을 피했다고 하더라도 일본디자인의 모방은 창작성에 있어서 전통문화를 해석하는 주체적인 방법론을 만들어 내지 못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창작성 문제는 제품과 그래픽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다. 산업계가 수출에 의존하는 구조로 서구의 스타일을 끊임없이 추구할 수밖에 없었고, 또 제조역량에서 일본의 의존도가 높았던 점, 디자이너가 제조산업의 주체가 아닌 주변부에 머물렀던 점 등을 감안한다면 제품디자인에서 모방을 배척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선택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작가성이 강조되는 그래픽에 있어서는 모방이라는 손쉬운 방법을 택함으로써 당대의 명성과 경제적 성공을 이끌어 낼 수는 있었으나, 한국디자인의 고유한 정체성을 형성할 기회를 잃어버린 것이 명백해 보인다. 모방을 암묵적으로 용인하는 분위기가 만연함에 따라 작가들은 해외의 최신 사조나 히트디자인을 끊임없이 모방하는 방법으로 창작성의 고갈 문제를 손쉽게 해결하였다. 일본 디자인에 의지한 ‘한국적 디자인’이라는 유행은 88올림픽을 정점으로 점차 사그라졌고, 새롭게 등장한 포스트모더니즘 스타일로 대체되었다.

한국사회에서 디자인의 모방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나온 것은 1990년대 후반의 일이다. 그나마도 자발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세계조류에 의해 강제된 것이었다. 1995년 WTO체제 논의와 더불어 비로소 디자인경영이나, 고유모델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고, 80년대 구미유학파들의 대거 유입으로 해외 정보가 다양화됨에 따라 일본의 종속성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현재에 이르기까지 과거 모방에 대한 반성이 없고, 새로운 한국고유 조형에 대한 문제도 크게 부각되지 않는 실정이다.

5. 결론

일제강점기 이후, 우리 사회에 반일감정은 한 번도 누그러든 적이 없으며, 영토분쟁이나 한일친선경기 등에서 간헐적으로 분출되어 나오곤 했다. 1965년 한일협정이후, 쏟아져 들어오는 일본 문화에 대한 거부감과 선진문물의 삼투압은 ‘왜색배척과 현대문화의 적극적 수용’이라는 이율배반적인 현상을 낳았다. 양자가 모두 일본문화였음에도 왜색과 현대디자인을 구분하고, 전자는 철저히 배척하고 탄압의 대상으로 만들었고, 후자는 무차별적인 모방이나 차용을 일삼았다. 일본 전통문화가 자연스럽게 표출된 현대디자인의 경우, 소재를 치환하는 방법으로 수용했지만, 누구도 일본디자인의 영향을 당당히 밝히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디자인에서 스타일의 동시대성이란 일반적이며, 외부의 영향은 곧 발전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모더니즘과 아르누보, 아르데코가 동시다발적으로 서구사회에서 발생되었지만, 누구도 영향에 대하여 부인하지 않는다. 적성국가 독일 바우하우스의 작가들이 미국으로 망명하여 미국의 건축과 디자인을 꽃피웠다. 스칸디나비아의 유기적 모더니즘이 미국에 소개되면서 수많은 아류작들이 등장하는 과정에서 알바알토 등의 영향을 모두 정리하고 기록하고 있으며, 자랑스럽게 여기는 분위기다.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일본과 유사한 작품을 작가의 포트폴리오에서 지우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며, 누가 어떤 영향을 받았고, 한국디자인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제대로 조사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국디자인이 얻은 교훈이 무엇인지를 기록하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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