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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 디자인 운동으로서 1970년대 농촌 새마을운동 재평가
Reassessing the 1970s Rural Saemaul Movement as a Modern Design Movement
  • Jongkyun Kim : Korea Intellectual Property Office, Deputy director, Daejeon, Korea
  • 김 종균 : 특허청, 행정사무관, 대전, 대한민국

연구배경 본 연구는 1970년대 후반에 진행된 농촌 새마을운동의 배경과 내용과 전개 방식, 성과를 분석하고, 디자인사적 관점에서 의미를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연구방법 한국에 모더니티와 모더니즘이 유입되고 정착되어 가는 과정을 일제시대, 만주국, 미군정기의 건축을 중심으로 하여 시대순으로 되짚어 본다. 이어서 농촌 새마을운동의 중점 정책인 초가지붕 개량, 불량주택 개량, 취락 개선, 미신 타파 정책의 경과와 성과를 디자인 관점에서 파악한다.

연구결과 농촌 새마을운동은 국가가 강압적으로 주도하고, 주민이 총동원된 점 등에서 그 전개 과정이 불합리하여 근대성이 결여되었으나, 결과만 보면 전통을 단절하고, 주거환경에 위생과 과학이 반영되고, 주거 양식에 규격화와 대량생산 등이 이루어져 서구 모더니즘 운동과 유사한 결과를 도출하였다.

결론 1970년대 농촌 새마을운동은 식민지 근대성, 결여된 모더니티에 관한 판단은 필요할 것이나, 결과적으로 국내 최대의 모더니즘 운동으로 규정할 수 있다.

Abstract, Translated

Background This study aims to analyze the background, content, development, and achievements of the Rural Saemaul Movement (New Village Movement) that took place in the late 1970s in South Korea from a design perspective.

Methods The study examines the process of the influx and establishment of modernity and modernism in South Korea, focusing on architectural examples from the Japanese colonial era, the Manchukuo, and the US military government era. Subsequently, the study investigates the progress and achievements of the key policies of the Rural Saemaul movement, such as improving thatched roofs, upgrading substandard housing, enhancing living conditions, and dispelling superstitions, from a design perspective.

Results Although the development process of the Rural Saemaul movement lacked rationality due to a top-down approach led by the government and the mobilization of residents, the outcomes resulted in a disruption of tradition and the incorporation of hygiene and science into the living environment, as well as standardization and mass production in housing styles, yielding results similar to Western modernist movements.

Conclusions While it may be necessary to assess the colonial modernity and the deficiency of modernity in the 1970s Rural Saemaul movement, in terms of its results, the movement can be identified as the largest Modernist movement in South Korea.

Keywords:
Cultural Housing, Saemaul Movement, Substandard Housing Improvement, Colonial Modernization, Modernism Movement, 문화주택, 새마을운동, 불량주택 개선, 식민지근대화, 모더니즘운동.
pISSN: 1226-8046
eISSN: 2288-2987
Publisher: 한국디자인학회Publisher: Korean Society of Design Science
Received: 07 Jun, 2023
Revised: 30 Jun, 2023
Accepted: 27 Jul, 2023
Printed: 31, Aug, 2023
Volume: 36 Issue: 3
Page: 419 ~ 433
DOI: https://doi.org/10.15187/adr.2023.08.36.3.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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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tation: Kim, J. (2023). Reassessing the 1970s Rural Saemaul Movement as a Modern Design Movement. Archives of Design Research, 36(3), 419-433.

Copyright : This is an Open Access article distributed under the terms of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Non-Commercial License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3.0/), which permits unrestricted educational and non-commercial use, provided the original work is properly cited.

1. 서론

한국사회는 1970년대를 거치며 서구식 생활양식과 모더니즘 건축으로 통일되었다. 모더니즘은 1960~70년대를 거치며 근대화의 언어로 자리매김했고 디자인교육의 아카데미즘으로 굳어졌다. 이 시기 지어진 김수근의 ‘세운상가’(1967)나 김중업의 ‘31빌딩’(1970) 등은 모더니즘에 충실한 건축이다. 마포아파트나 잠실주공아파트 등, 대단위 아파트 단지나 공공시설물도 박스 형태에 기능 중심의 공간으로 지어졌고, 거리 곳곳의 근대화 기념탑 등도 무채색의 기하학적 형태를 띠며, 모더니즘 조형언어가 토착화되었다.

하지만, 이는 서울이나 새롭게 개발된 창원, 울산 등, 일부 도시에 국한되는 사례였고, 국토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촌은 70년대까지도 전통적인 생활환경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농촌을 일거에 변화시킨 사건은 1970년대에 집행된 농촌 새마을운동이며 그 중 특히 불량주택 개량과 취락개선 사업의 영향이 컸다. 하지만 새마을운동은 ‘잘 살아보세’라는 정치 구호만 내세웠지, 특정한 삶의 방식이나 조형 양식을 제시한 적이 없으며, 건축가 등의 전문가 참여도 없었으므로 조형운동으로 주목받은 적이 없다.

농촌 새마을운동은 매우 짧은 시간에 모더니즘적 생활양식과 주거환경을 한국 전역에 전파했다. 전통 주거 양식과 주술적인 공간을 일소하고 위생을 강조하고 표준자재를 사용하면서 바우하우스가 추구했던, 이념이 제거된 균질한 공간을 만들어 내었다. 또,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어 불과 수년 만에 한국사회를 기저에서부터 바꾸는 변화를 이끌어냈다. 이 모든 과정이 비자율적이나마 농민의 노력으로 이뤄졌다는 점에서 한국 최대의 모던 디자인 운동으로 재평가해 볼 여지가 있음에도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다. 이 글에서는 농촌 새마을운동의 배경과 경과를 살펴 디자인사적 의미를 재평가하고자 한다.

2. 식민지 근대성과 서구식 생활양식, 모더니즘
2. 1. 만주국 건설과 하이 모더니즘

한국인이 모더니티를 전격 학습하고 전파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1930년대, 만주국 건국으로 추정된다. 만주국은 1931년 일본 제국 관동군이 만주 사변을 일으켜 만주 지역을 점령하고, 1932년 3월 1일 청나라 마지막 황제, 선통제(宣統帝, 재위 : 1908년~1912년)를 내세워 수립한 괴뢰 국가이다. 새롭게 독립한 만주국은 주민을 동원하여 일사불란하게 근대 국가를 건설하고 있었는데, 1930년대 후반 조선 사회에 만주 이민 바람이 불어, 200만 가까운 조선인이 만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Han, 2003). 조선 내에서 조선인은 ‘황국신민(皇國臣民)’, 즉 2등 시민으로 자아실현이 불가능하였던 반면, 만주는 모두에게 기회의 땅이었고, 의사, 변호사, 군인 장교, 화이트칼라, 전문직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역시 1940년에서 1945년까지 만주국 육군 군관학교1)를 마치고(1940~1942) 연이어 일본 육군사관학교로 진학하여 수석 졸업(1944)하고, 만주국군 장교로 임관하여 활동했다(1944~1945). 이외에도 5.16 혁명군 중 군부의 많은 인사가 일본이나, 만주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이다.


Figure 1 The South Manchuria Railway’s high speed train ‘Asia Express’ at Dalian’s station (1930s)

만주국 건설 과정은 불도저식의 경제개발, 중공업 육성, 도시ㆍ철도 건설, 위생 개선 등, 발전에 대한 강박적 신념을 드러내는 하이 모더니즘(High Modernism) 그 자체였다(Han, 2010). 하이 모더니즘이란, 과학ㆍ기술적인 진보에 대한 강력한 신념을 말하며, 국가 주도의 사회공학적 기획, 전문가적 과학지식에 대한 신뢰, 총력 동원, 속도전, 열정과 강제의 혼합 등의 특징을 가진다.

만주국에 관동군은 1930년대에 걸쳐 100개 이상의 마을과 도시를 건설하였고, 극단적인 계획 경제체제를 추진하였는데 제1차 경제건설(1932~1936), 제2차 경제건설(1937~1941) 등을 진행한 것은 우리의 새마을운동 및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매우 유사하다. 하이 모더니즘을 바탕으로 전광석화같이 새 국가를 세워나가는 만주에서 박정희와 관동군 조선인 장교들은 중간 관리 내지, 실무진으로 만주국 건설 과정을 지켜보고 학습했으며, 이 과정에 근대성, 모더니티에 관한 강렬한 각인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만주국은 건설국가였으며, 강력한 동원체제를 유지했다. 수도 건설을 위해 국도건설국(國都建設局)이란 기구를 만들고, 국가사업과 충돌하는 전통은 의례를 제정하여 철거시키고 속도와 획일성을 유지했다. 충령비(忠靈碑)와 충혼탑 광장 건설과 추도식을 전국적으로 개최하고, 1937년 중일전쟁 이후에는 만주국의 주요 국가행사로 위령제를 거행했다. 또 시민동원을 위해 멸공대회, 시민대회, 반공대회, 재건체조, 표어 짓기, 웅변대회 등을 개최했다. ‘위생’에 대해서도 강박적이어서 5월과 9월의 2주간을 매년 전국 청소 기간으로 정했고, 방재 사업에 강박적이었다. 전국적으로 쥐를 잡았다. 기타 ‘신체’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여 주요 도시마다 체육관을 건립, 중요한 행사마다 운동회를 벌였으며 ‘체육향상, 민족융화’라는 구호의 건국체조를 제정하는 등 유신정권과 매우 흡사한 근대화 정책이 전개되었다(Han, 2010, pp.130~135).

2. 2. 일제 근대화의 외양
2. 2. 1. 제관양식

건축 조형 측면에서 보자면, 만주국의 일반 상업건물은 아르데코 등의 동시대 유행하는 모더니즘 건축양식을 채택하였고, 일반 주택건축은 서구식 모더니즘 주택을 선호하였다. 하지만, 관공서만큼은 콘크리트 건물에 기와지붕을 올린 제관양식(帝冠樣式, Imperial Crown Style)이 주종이었다. 제관양식이란 일제 특유의 건축양식으로, 신고전주의 양식 건축에 일본식 기와 등 지붕 구조를 얹는 형태를 말한다.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대만도 관공서와 공공시설은 제관양식이 붐이었다. 우리나라 1960~70년대에 집중적으로 지어졌던 소위 ‘한국적 건축’ 역시도, 그 형식적 특징이나 규모, 건축 배치 등이 일제 제관양식과 매우 유사한데, 정부가 발주한 많은 공공기관은 콘크리트 벽체에 기와지붕을 올리는 방식으로 지어졌고, 이를 통해 근대 국가의 외형을 형성했다. 제관양식은 일본 외에는 만주와 대만, 한국에서만 유행하는데, 대만과 한국은 공통적으로 과거 일본의 식민지였고, 장개석은 일본 육사 출신으로 해방 이후 장기 집권하며 근대 국가 형성에 기여한 점이 박정희 대통령과 매우 닮았다. 결국, 한국과 대만은 모두 일제 근대화의 방법론을 차용하였다는 것을 쉽게 추론할 수 있다.


Figure 2 Chiang Kai-shek Memorial Hall gate, Taipei(1980) vs Hyun-chung gate, Seoul (1969)

Figure 3 Modern hosing in Hsinking in the 1930s
2. 2. 2. 문화주택(文化住宅)과 위생, 모더니즘 건축

근대 국가 건설에서 위생은 건축과 도시 건설의 가장 핵심이 되는 개념이다. 지식인과 상류층에서 위생은 곧 문명과 등치가 되고, 비위생은 미개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국내에 서구식 생활양식과 주택의 도입되면서 위생의 개념이 강조되기 시작했는데 주로 부엌과 화장실 개선을 중시했다.2) 서구식 주택은 ‘문화주택’3)이라는 이름으로 국내에 소개되었는데, 서양식 생활양식과 주거형태, 공간구조를 경제적이고, 기능적이며, 위생적인 주택 형식으로 믿는 일종의 서구 선망적인 시선이 담긴 명칭이다. 문화주택의 반대편에는 전통주택이 위치하는데 비기능적, 비경제적, 비위생적인 건축이라는 대조군으로 설정되었다. 문화주택은 1920년대부터 일부 일본인 주거지를 중심으로 공급되어, 비록 서구식 양식임에도 불구하고 조선인에게 일식 주택으로 더 알려졌다. 일부 상류층만 문화주택을 소유하여 조선 내에서 큰 파급력을 가지지는 못하였지만, 선망의 대상으로 자리매김하기에 충분하였다.

초창기 형성된 ‘서구=문화와 위생’라는 인식은 해방 이후로 이어진다. 전후 복구사업으로 공급된 공공주택은 거실의 개념이 도입된 서구식으로 지어졌는데, 이를 ‘문화주택’이라 불렀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농촌 주택 개량에서도 거실 중심의 가옥 구조와 위생 개념이 도입된 표준주택을 문화주택으로 지칭하였는데, 그 배경에는 역시 일제시대 식민지 통치 개념인 ‘전통=비위생’이라는 암시가 내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문화주택은 서구에의 선망과 더불어 문명, 근대, 문화 등의 다의적인 의미를 내포하며 궁극적으로는 선(善)이라는 가치를 내포한 것이었다. 이들 모더니즘 건축4) 형태를 ‘양옥(洋屋)’으로 통칭하기 시작했고 현대에 이르고 있다.


Figure 4 Yoongi Kim, Healthy Housing Proposal 4, (Donga Ilbo 1930.10.11.)

Figure 5 Western-style house spread in Gyeongseong (late 1920s) / ‘Hu-seng House’ in Yongdu-dong, built with US and ICA aid (1958)
2. 3. 개혁과 반공의 표상, 모더니즘

일본의 근대화 과정은 서구 추종적이었고, 신고전주의를 근대의 산물로 오해하는가 하면, 모더니즘 양식이 등장하는 과정에 ‘동도서기(東道西器)’화된 제관양식을 탄생시키고, 서구식 주택을 선망의 대상으로 여겨 보급하는 등 여러 혼선이 있었다. 식민지 조선 역시, 일본을 통해 왜곡된 근대성이 전파되었다. 여기에 더해, 해방 이후 국내에 모더니즘이 이식되는 과정에도 많은 변형과 왜곡이 일어났다. 미군정의 지원하에 지어진 많은 모더니즘 건축은 모더니즘의 표피를 한국인에게 익숙해지도록 하는 효과를 가져왔지만, 모더니즘 이념은 누락되었다. 박정희 정권으로 접어들면서 모더니즘은 프로파간다의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줄곧 추상미술을 자유 진영의 대표 예술 양식이라고 주장하며, 냉전 시대의 선전 도구로 활용했다. 1930년대 소련에서 스탈린이 사실주의(Realism)를 사회주의 예술로 공인한 것의 대척점에서, 미국은 여러 가지 제약이 있는 사실주의와 달리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추상미술이 자유 진영을 대표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추상미술 양식을 ‘진보적’ ‘국제적’ ‘민주적’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였고, 우리와 비슷한 상황인 구 서독에서는 거의 강박적이었다. 미술 양식의 이데올로기화는 1990년대 초 사회주의가 붕괴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1960년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사회 전 분야에서 대대적인 개혁을 시도했고, 국전도 개혁의 대상으로 보아 1961년부터 추상미술 부문을 신설했다. 추상미술은 ‘전위’, 즉 아방가르드의 진보와 개혁의 이념을 따르고 있어서 5·16 군사정변이라는 ‘혁명’의 관점에서 개혁을 주장하는 정권의 이미지를 드러내는 데 효과적이었다. 추상미술은 정권이 주장하는 ‘자유’와 ‘민주’라는 이미지를 창출하는 데 효과적이었고, 넓게는 ‘반공’의 의미까지 내포한 것이었다. 추상미술의 적극적인 육성은 박정희 정권이 ‘독재’라는 비난에 ‘민주성’을 덧칠할 수 있는 효과적인 홍보 수단이었고, 작가들도 적극 동조하여 ‘한국적 추상’이 성행했다(Kim, 2013).

디자인과 건축에서도 모더니즘은 시대정신이었다. 삼일빌딩, 세운상가, 광화문 정부청사는 국제주의에 충실하였고, 기타 철근콘크리트에 조립식 공법이 아닌 건물에서도 장식 없는 기하 형태의 건축이 주를 이루었다. 도시 곳곳에 구호나 시를 새겨놓은 환경조형물, 공공시설물은 천편일률적으로 추상조형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 신도시에서 가장 먼저 조성되는 광장과 그 가운데 위치한 기념비는 별다른 특징이 없는 추상조형물로 제작되어 조국근대화를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수단이 되었다.

이상과 같이, 근대 한국에 침투한 모더니티와 모더니즘에 대한 인식은 서구의 선망과 건국(근대화)의 수단으로서 강박적인 하이 모더니즘이거나 반공, 개혁의 이미지를 띤 이념화된 모더니즘으로 식민지 근대성에 기반한 것이다. 서구식 건축 및 추상적인 모더니즘은 조형언어의 선(善)이었고, 그 반대급부로 전통과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은 악(惡)이었다. 이는 서구적 개념의 사회계몽적 성격을 띤 엘리트주의로서의 모더니즘과는 다소 동떨어진 오리엔탈리즘이자 프로파간다에 가깝다. 식민지 근대성과 모더니즘 경향은 1970년대 농촌 새마을운동을 통해 한국 전역에 급진적으로 확산되었다.

3. 농촌 새마을운동과 모더니티

1960년대 이후, 국내에 다양한 근대화 정책이 펼쳐졌는데, 고속도로 건설은 공간을 좌표화하여 전통적인 시공간 감각에 변화를 불러왔고, 농촌 라디오 보내기 운동 등을 통해 정보에서 고립된 농민들의 의식을 직접적으로 변화시켰다. 특히 농촌 새마을운동(1971)은 한국의 근대의 풍경과 조형 문화를 기저로부터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농촌 새마을운동의 목표는 크게 ①주거환경 개선, ②농가소득 증대, ③농촌주민의 의식 개혁으로 나뉘는데, 이 글에서는 조형양식의 변화에 큰 영향을 미친 주거환경 개선활동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Table 1
Progress of the Saemaul movement in the 1970s

Yr Activity
‘71 (사업 시작) 마을과 산 녹화, 마을 진입로 확장, 마을 소하천과 둑 보수, 퇴비장 설치, 소류지 준설, 관정 보수 및 관리, 마을 청소 및 하수구 파내기, 공동우물, 공동빨래터, 쥐 없는 마을 만들기
‘73 기초마을, 자조마을, 자립마을로 구분, 자조/협동의 기틀이 갖추어진 마을 집중 지원, 전국 170개 새마을 공장 설치 가동
‘77 취락구조개선사업 실시(246개 마을)
‘78 농촌주택 개량사업 실시 : 7만동(지원 5만동, 자력 2만동) 개량 새마을 사업의 광역화 시도 : 마을권 개발사업, 마을간 협동권 개발사업, 읍면개발사업, 소도읍 기능화사업 시도

3. 1. 시멘트 무상 공급

1960년대까지 정부의 근대화사업은 성공적이었지만 경제성장은 도시와 일부 계층에 집중되었다. 고도성장의 혜택을 받지 못한 도시 민중의 불만이 극대화되어 지지도가 급락했고, 박정희 정권은 정치적 위기에 봉착했다. 이에 1972년 유신체제를 선포하고, 도시 대신 인구 대다수가 거주하는 농촌지역을 주목하고 농촌 새마을운동에 박차를 가했다. 1970년대 이전까지 농촌의 풍경은 근대화의 영향이 거의 없어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마을 형태에 흙벽과 초가지붕의 전통가옥이 대부분이었다. 마을 공동체와 세시풍속이 유지된 전통적인 취락(聚落)형태였고, 새로 짓는 주택도 재래식 건축기법으로 지어지고 있었다.

농촌 새마을운동은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 길도 넓히고”로 시작하는 노래가사처럼 마을 진입로 및 도로 확장, 농로(農路) 확장, 하천 보수, 상하수도 건설, 급수시설 개선, 전기시설 확대, 지붕 개량 공사, 소규모 교량 건설, 공동목욕탕과 빨래터 만들기 등을 대대적으로 진행하며 농촌의 풍경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이런 변화는 정부의 시멘트 무상 공급이 계기가 되었다. 정부는 1970년 10월부터 전국 33,267개 마을에 시멘트를 335포대씩 무상으로 제공했다. 당시, 국내 시멘트 소비량이 적어 시멘트 공장에 많은 재고가 쌓였고, 업계의 요청에 따라 정부는 남아도는 시멘트를 각 마을에 무상 제공하여 새마을사업에 이용하도록 했다. 정부는 시멘트 이용실적이 좋은 마을에만 추가적인 시멘트와 건설자재를 공급하는 식으로 마을 간 경쟁을 유도했고, 각 지역은 경쟁적으로 시멘트를 소비하며 환경 개선 작업에 돌입했다.


Figure 6 Farmers mobilized for construction regardless of gender or age

하지만, 자재만 보급되었을 뿐 전문 인력이 없는 농촌은 토목과 건축에 문외한인 마을 주민들을 동원하여 속도전으로 환경 개선 작업을 진행했다. 개량, 또는 건설 대상으로 지목된 공공시설물은 조형이나 제작 방법 등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못한 체, 대개 시멘트를 덕지덕지 바른 형태로 마감되었다. 초기 시멘트 무상 공급의 성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마을 도로의 확장은 차량 출입을 쉽게 하여 도시와의 교류를 촉진했다. 상하수도 설치와 전기 가설은 가전제품이 농촌에 보급되는 토대가 되었고, 농촌 생활문화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전기밥솥, 냉장고, 세탁기 등 가전의 보급은 가사노동의 성격을 바꾸고, 라디오나 TV는 도시문화를 실시간 노출해 농촌의 전근대성을 지워나갔다. 농촌 새마을운동을 통해 도시에 비하여 가시적인 국가 성장의 혜택을 보지 못한 농민의 박탈감이 일부 감쇄되고, 농민 스스로가 운동의 주체가 되어 자신감을 회복하는 계기를 만들었으며, 궁극적으로 정권의 지지도 회복에 큰 도움이 되었다.

3. 2. 지붕개량사업

유신이 선포된 1972년, 정부는 새마을운동의 중점 사업으로 지붕개량사업을 시작했다. 사전 논의 없이 갑작스럽게 흙벽과 초가지붕을 없애야 할 대상으로 지정하며, “초가지붕은 상투머리, 개량지붕은 깨끗이 이발한 머리”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초가는 가난과 낙후, 비위생의 상징이고, 지붕개량 사업이 현대화의 상징임을 강조하며 시멘트 기와나 슬레이트로 바꿀 것을 강요하였다. 또한 정부는 농촌의 가난은 비생산적인 농업과 게으른 농민이 원인이라고 보았고, 농민 자신의 노력과 비용으로 지붕을 교체할 것을 독려하였다(Kim, 2017).

농촌 주민들은 ‘선조가 물려주신 지붕을 마음대로 뜯어내는’ 정부의 행태에 반발하였고 참여가 저조했다. 하지만, 대통령의 최고 관심사이다 보니 저항은 의미가 없었고 공무원들이 돌아다니면서 갈고리로 초가지붕을 강제로 벗기고 다닐 정도로 열심이었다(Koh, 2006). 정부는 마을에 발전단계에 따라서 ‘기초마을, 자조마을, 자립마을’ 등의 칭호를 주고, 새마을운동의 성과 지표로 삼았는데, 자립마을 칭호를 얻기 위해서는 지붕개량 비율이 80%를 넘어야 했다. 그런데, 1978년에 이미 목표치를 상회하는 107%의 실적을 올렸고, 1979년에는 자립마을 칭호가 전체 마을의 97%에 달할 만큼 사업은 급속히 진행되었다.5)

3. 3. 불량주택개량사업

1977년까지 지붕개량사업의 가시적 성과에 고무된 정부는 1978년부터 주택개량사업을 본격화했다. 원래 우리 전통주택은 바람을 막고 햇볕이 잘 드는 배산임수형(背山掩水型) 입지에 남향으로 배치하고 동쪽으로 문을 내었다. 자연환경을 중시한 탓에 가옥 배치는 중심축에 맞지 않고, 一자형, ㄱ자형, ㄷ자형 또는 口자형으로 다양하며, 위채(여러 채로 된 집에서 위쪽에 있는 채)와 부속사(附屬舍, 집에 부속된 건물)의 배치에 규칙이 없이 자연발생적으로 지어졌다. 정부는 이들 주택을 ‘불량주택’으로 규정하고, 1973년부터 57종의 표준 설계를 작성하고 국민주택자금을 지원하여 농촌주택 개량을 시작했다. 국도변의 노후 불량주택 및 각종 재해에 피해를 본 국민부터 표준 설계에 따른 주택 개량을 추진했다. 1976년에는 다시 농촌 주택의 특성과 농가의 경지면적 및 가족 수 등을 고려한 15평ㆍ18평ㆍ20평의 一자와 ㄱ자형의 6가지 표준 설계도와 규격 자재를 생산하여 시범사업을 추진했다. 시범사업은 자재의 염가 보급과 건축 자재의 규격화에 중점을 두었고, 농가소득 1백만 원 이상의 농가 및 홍보 효과가 높은 고속도로와 국도나 철도 주변, 관광지 주택을 우선 지원하였다.

1977년도에는 규격 자재를 필수 자재와 희망 자재로 나누어 농민의 요청에 따라 공급하여, 전국 246개 마을의 취락 구조를 개선하고, 15,900채의 주택을 개량했다. 1978년부터는 사업 규모가 대폭 확대되어 7백 개 마을의 취락 구조를 개선하고 5만 호의 주택을, 1979년 이후부터는 매년 7만 5천 호의 주택을 연차적으로 개량해 나갔다. 주택 개량 자금은 정부와 지자체(40%), 농협(35%), 주택은행(25%)이 건축비의 80% 범위에서 융자해 주었는데, 주택 개량에 자기 자금 부담 능력 및 융자 상환 능력이 있는 농어촌 주민에 대하여 우선 실시했다. 주택 개량을 위한 표준설계는 15평ㆍ18평ㆍ20평ㆍ25평 등 14종의 표준 모델을 지정했는데, 이 중 규격 자재를 사용하는 모델은 6개이고, 나머지 8개의 모델은 일반 자재를 사용하여 취향에 따라 선택할 수 있었다. 표준도면 외에 실내 장식이나 실내 환경 정비에 관한 지침은 따로 마련되지 않았다.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정부의 지원금이 감소되고 건축비 인상으로 주택 개량 사업의 성과는 저조해졌으나, 1980년대 말까지 꾸준히 추진되어 오늘날 농촌 주택의 전형으로 자리 잡았다.


Figure 7 Blueprint for rural standard house (1978)

Figure 8 Completion of standard house 15py/18py (1978)
3. 4. 취락구조개선사업

1978년부터는 농촌 마을 전체의 구조를 바꾸는 취락구조개선사업이 본격화되었다. 취락의 개선 유형은 ‘신촌형ㆍ합촌형ㆍ개선형ㆍ정돈형’으로 나누었다. 신촌형(新村型)은 새로운 지역에 새 취락을 조성하는 형태로, 공단(工團) 조성, 댐 건설, 상습 수해지역 등의 주민을 집단으로 이주시켜 새롭게 택지를 조성하여 마을을 만드는 것이다. 개선형(改善型) 및 합촌형(合村型)은 기존 마을의 도로나 공동시설을 배치하면서 일부 노후 불량주택의 개량과 함께 인근에 분산된 가옥을 합촌하여 정비하는 방식이며, 정돈형(整頓型)은 기존 마을 안길 및 담장을 정비하면서 주택의 방향과 축을 조정하여 재건축하거나, 농가의 주택 2, 3동을 단위로 현지에서 개축하여 개량 주택이 선으로 연결되어 시계에서 단절되지 않도록 정비하는 형태이다(Bae, 1978). 사업은 해당 마을에서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행정기관으로부터 허가받아 진행하며, 주민의 주도하에 추진하는 것을 기본 원칙으로 하였다.


Figure 9 View of the village improvement site in Yeoju, Kyeonggi-do(1978)
3. 5. 미신 타파 운동

정부는 ‘경제적인 부와 함께 정신적으로도 건전하고 품위 있는 안정된 문화생활을 추구한다’6)는 목표 아래 음주, 도박 일소를 적극적으로 장려하였고, 특히 새마을운동 일환으로 미신 타파 운동을 강력히 전개하였다. 전국적으로 신당이 파괴되고 무당들을 불러 굿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도록 하고, 굿을 하면 소음을 이유로 경범죄로 처벌하고 무당을 잡아 가두곤 하였다. 1973년 2월 19일, 경향신문은 ‘마을 풍속을 쫓아낸 새마을운동’이라는 제목으로 경남 울주군의 한 갯마을에서 새마을운동을 계기로 300년 동안 계속돼 온 ‘미신 행사’를 청산했다는 내용의 기사를 싣고 있다. 새마을지도자가 ‘미신 타파 운동’에 앞장서 당산제나 풍어제와 같은 마을 제사를 중단한 내용을 영웅시하는 기사이다.

“...용왕이 노하면 금방 하늘에서 벼락이라도 떨어질 줄 알고 오랜 세월 미신의 공포 속에서 살아왔던 것. 이러한 마을 사람들이 대보름부터 모든 부락 제사와 굿을 없애기로 하고 대보름 풍어제에 쓰려던 돈 15만 3000원을 몽땅 새마을사업에 투입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비단 ‘굿’과 같은 주술행위 뿐만 아니라, 정월대보름에 진행된 동해안 별신굿, 당산제, 지신밟기, 솟대깎기 같은 세시풍속 역시 무차별적으로 제거되었다. 상황은 거의 모든 농촌마을의 비슷했다. 보통 농촌마을은 하나의 정주단위로 인식되어, 마을과 외부를 연결하는 입구에 경계의 표시물로 장승, 당간지주, 솟대 등을 세워 특정한 영역이 시작되는 곳임을 표시했으나, 새마을운동이 진행되는 동안 마을의 장승과 서낭당, 돌무덤, 성황당, 산신각 등 토착신앙 시설을 적극 철거하였다. 수백 년 역사를 거쳐 발생한 마을공동체와 농경문화를 불과 수년 만에 제거해 ‘전통대학살’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Choi, 2017).

4. 디자인사적 의미와 평가
4. 1. 모더니즘 운동으로서의 농촌 새마을운동

서구 조형양식의 발전사에는 많은 창조적 파괴가 수반된다. 모더니즘은 헤겔의 정반합의 변증법적인 역사발전을 이루는데, 전통을 부정하고 기존 질서와 권위를 급속하게 붕괴시키는 것이 특징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파괴는 반달리즘, 내지 미의식과 문명의 종말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미의식 탄생의 과정으로서 통과제의적 성격이었다. 붕괴와 재탄생 과정 역시 무작위로 진행된 것이 아니어서, 장식을 제거하는 대신 비례를 추구하여 새로운 미적 표준으로 내세우는 것과 같이 이성적인 판단과 주도면밀한 계획하에 진행되었다. 모더니즘은 궁극적으로 주체적 개인이 계급을 제거하고 평등을 추구하며, 인본중심의 새로운 세상, 즉 유토피아를 이루어 내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건축에서는 균질하고 위생적인 공간, 산업재료를 통한 대량생산, 장식 제거와 재료의 노출 등의 형태로 그 특징이 드러났다.

새마을운동 역시, 급속한 파괴를 통해 전통을 단절시키고, 표준도면과 산업재료를 통해 균질하고 위생적인 공간을 추구했으며, 궁극적으로 신화와 장식이 제거된 주거공간을 만들어 낸 점은 방법론적으로 서구의 접근과 크게 다르지 않다. 흡사 르코르뷔지에가 말한 '집은 살기 위한 기계'라거나, 아돌프 로스가 말한 '장식은 죄악', 미스반데로에가 말하는 '적을수록 많다'는 명제가 모두 표면적으로 실현되고 있다. 비록 새마을운동을 통해 서구 유럽에서 보이는 세기적인 걸작을 만들어내지는 못하였지만, 짧은 시간에 도시화를 이루고 생활방식을 개혁한 급진적인 모더니즘 디자인 운동으로 정의할 수 있다.

하지만, 동기와 접근방법은 유사점이 적다. 새마을운동은 가난 극복, 농가소득 증대를 위한 정부의 노력이었고, 흙벽과 초가지붕 등 외부로 드러난 가난의 징후를 제거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을 뿐, 철거한 자리에 무엇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에 대한 방향은 제시하지 못했다. 명확한 정부의 지시는 없었지만, 정권의 의중과 시대 분위기를 읽는 데 익숙한 국민은 일사분란하게 서구식 문화주택을 선택했고, 새로운 조형은 모더니즘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었다. 다만, 국제주의 양식이 추구했던 미니멀리즘(minimalism)적 세계관은 빠진 채 '가장 낮은 가격에 가장 많은 바닥 면적을 제공'하는 물리적 가능성만이 극단적으로 차용되었다(Lim, 1996). 동기와 과정은 상이하지만 같은 결과로 귀결된 것이며, 이는 식민지 모더니티에 기반한 동원된 모더니즘이라 할 것이다.


Figure 10 One of a house Reported to Government as Best Practices (1978)
4. 2. 식민지 모더니티와 국가 모더니즘의 탄생

디자인 평론가 최범은 새마을운동이 한국 모더니티 출현의 배경이라고 주장하는데, 초가집을 없애고 마을 길을 넓히는 과정에 자와 컴퍼스로 대변되는 모더니즘이 구현되기 시작했다고 지적한다(Choi, 2022). 모더니티는 이성을 바탕으로 개인의 자유와 자기 결정에 관한 천부적 권리를 주장한다. 삶과 자연현상을 탈신비화하고,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도시화를 이루고, 휴머니즘을 중요한 덕목으로 삼는다. 모더니티에 기반한 모더니즘은 전통과의 단절을 꾀하고, 주관적인 경험과 개인주의를 중시하며, 합리주의를 바탕으로 장식의 탈신화화를 시도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한국사회의 모더니티는 서구와 분명히 성격이 다르며, 그 결과물인 문화주택은 모더니즘 건축으로 분류하기가 애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촌 새마을운동은 전후 별다른 발전의 계기가 없이 방치되었던 농촌의 도시화가 진행되었으며, 농민을 자각시켰다는 점 등에서 모더니즘 운동으로 평가할 수 있다. 적어도 건축에 있어 짧은 기간에 전통을 제거하고 획일화된 구조물을 전 국토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생산한 점은 분명 서구 모더니즘 운동과 유사한 성과이다. 농촌 새마을운동은 서울 등, 대도시에서 진행된 근대화 운동과도 명확히 성격을 달리한다. 1960~70년대 서울에 많은 아파트가 지어지며 전통 주거와 취락 형태를 변형시켰지만, 이는 인구 과밀화에 따른 주택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서울이라는 일정한 공간 내에서 관청과 대한주택공사의 주도하에, 건축가가 참여하여 마스터플랜을 수립하고, 주로 한강백사장이나 강남의 농경지를 새로 개간하여 건설되어 전통 취락을 파괴하는 정도가 덜하였고, 체계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성공적인 모던 프로젝트였다.


Figure 11 Introducing the construction plan for an apartment next to the Han River

반면, 농촌은 전문 인력이나 공사 체계, 충분한 사전검토 없이 짧은 시간에 동원전이자 속도전으로 전개되고, 그 대상이 국토 전역이라는 점에서 파급력이 훨씬 크고 부작용이 심했다. 가령, 초가지붕 대체재로 정부가 권장했던 슬레이트의 경우, 건축가 조자용이 우연한 계기에 박 대통령에게 소개한 것이 검토 없이 채택된 것으로, 이후 1급 발암물질로 규정되어 현재까지도 지붕 교체 작업의 대상이 되고 있다. 시간이 갈수록 주민 노력 동원도 심해져, 하층 농민들은 고향을 떠나는 부작용도 컸다. 또, 미신타파운동으로 마을마다 성황당 등 촌락의 구심점이 파괴되어 마을의 전설과 전통, 세시풍습이 함께 소멸했고, 촌락의 임의 재배치를 통해 공동체 붕괴를 가속화시켰다. 기본적으로 자생적인 변화가 아닌 ‘위로부터’의 변화였고 동원된 모더니티, 혹은 식민지 근대성이 근간이라 할 수 있으므로, 농촌 새마을운동은 한국만의 특수한 디자인 운동, 즉 ‘국가 모더니즘운동’이라 명명해 볼 수 있을 것이다.

5. 결론

우리에게 ‘근대’와 ‘근대화’ ‘모더니즘’ 등은 서구와 표상은 같으나 내용은 상이하다. 서구의 근대화는 민주주의와 산업화를 의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식민지 제국주의의 논리였다. 일본의 근대화는 자발적 서구화를 통한 산업 발전이 중심이다. 우리의 근대화는 개발독재를 정당화하는 통치 논리에 가까웠다. ‘모더니즘’ 역시 표면적으로는 기계미학 내지 추상미술을 지칭하지만, 내용 면에서는 군사혁명정부의 표상,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와 반공, 조국 근대화의 상징이며, 주택에 있어서는 서구식 모더니즘 주택을 말하는 것이었다.

농촌 새마을운동은 초기, 공공시설 개선 과정에서 뚜렷한 성과를 보였으나, 이후 지붕, 주택, 촌락 순으로 점차 범위가 확대되는 생활환경 개선사업은 그 기간이 불과 3~4년 정도에 불과하며 불도저식 정책 추진이 이루어진 졸속 행정에 가까웠다. 수백 년 간 이어온 집과 마을을 하루아침에 철거하고, 초라한 건축자재와 대출을 통한 자금, 동원된 농민들이 삽과 흙손만으로 하이 모더니즘적 생활환경과 문화주택이라고 불리는 서구식 주택과 일직선상으로 반듯한 무국적의 농촌 풍경을 만들었다. 분명 과정은 무작위적이고, 무계획적인 것이었으나, 결과적으로는 모더니즘 디자인 운동과 유사한 결과가 전 국토에 뿌리내렸다.

비록 모더니즘의 대전제가 되는 ‘주체적 개인’이 결여된 모더니티, 즉 식민지 근대성에 기반했다는 역사적 특수성은 여전히 논란으로 남겠지만, 그럼에도 농촌 새마을운동은 국내 최대 규모의 모던 디자인 운동, 내지는 모더니즘 운동으로 재평가할 수 있다. 정부가 제시한 것은 철거 대상과 관념적인 표준도면 뿐이었고, 짧은 사업 기간에 불가피한 선택, 강요된 계획일지언정, 시각문화와 생활 조형양식 취사선택의 주체는 결국 농민이었고, 그 성과 역시 뚜렷했기 때문이다.

Notes

1) 신징(新京) 군관학교, 1939년 만주국 수도 신징에 설치된 4년제 군관학교이다. 김동하, 박임향, 방원철, 윤태일, 이기건, 이주일, 이한림, 최주종, 강태민, 강문봉 등이 졸업하였고, 많은 수가 국군 요직에서 5.16 군사정변을 도왔으며, 이후 정계 주요 요직에 올랐다.

2) 1929년 서울에서 개최된 조선대박람회에 가족 중심의 공간구성, 부엌과 화장실이 개량된 3동의 주택이 출품되었다. 박람회를 통해 위생 관념이 주택에 명시적으로 반영되기 시작했고 위생적인 부엌과 화장실의 개선을 중심으로 기능성을 확보한 주택을 추구하였는데, 주택 개량의 근간은 서양주택이었다. (출처: 「일제강점기에 서양주택의 공간구조와 외관을 따라 지어졌던 주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홈페이지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1934, 검색일: 2023.05.31.>)

3) 문화주택으로 통칭되나 1920년대는 서구주택을, 1930년대에는 서구주택 외관에 일본의 생활문화가 결합된 ‘속복도형 화양절충식 일본주택’을 일컫는다. 온돌이 결합된 한양일절충식 구조도 있다. 주택 구조와 무관하게 양식(洋式)이 문화주택의 상징이며, 외관이 중요한 기준이다. 조선식 기와집에 대청을 유리창으로 막고 소파를 들여 서재나 응접실로 사용하는 집은 “문화식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박길룡, 조선주택잡감, 朝鮮と建築, 제20집 4호, 16쪽, (안성호의 글, p.192 재인용))

4) 이 시기 서구식 건축은 이후 국제주의 양식과 차이가 있으나, 한국사회에서 양자는 구분 없이 모두 서구의 양식을 의미할 뿐이었다.

5) 새마을운동의 농촌주택개량사업<https://www.u-story.kr/m/980> (검색일: 2023.07.27.)

6) 1975년 박정희 대통령 연두기자 회견 내용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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