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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그래픽 디자인의 정체성 연구- 선구적 그래픽디자이너들을 중심으로
Identity in Japanese Graphic Design: Pioneering Graphic Designers
  • Heekyoung Shin : Department of Visual Design, Associate Professor, Semyung University, Jecheon, Korea
  • 신 희경 : 세명대학교 시각·영상디자인학과, 부교수, 제천, 대한민국

연구배경 근대기 디자인 연구에서 자국의 정체성과 지역성(Identity and Regionality)에 관한 논의는 자생적 모더니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서구에서의 이식(移植)이라는 형태로, 즉 근대화를 서구화의 형태로 수용한 나라에서는 언제나 화두일 수밖에 없다.이에 ‘세계성과 지역성’ 논의, 자국의 정체성 추구 과정의 사례로서 한국보다 앞서 19세기 말부터 디자인을 유입하여 디자인교육기관을 설립하고 디자인의 서구화를 이룩하였으며, 디자인에 있어서 ‘세계화와 지역성’ 논의를 거친 일본의 경우를 고찰하였다.

연구방법 문헌연구 방법과 작품 사례연구 방법으로 진행하였다. 세계적 레벨에서의 ‘국제성과 지역성’ 논의는 일본 국내 입장에서는 ‘세계성과 일본적 정체성(Identity) 및 고유성’의 문제로 치환된다. 문헌연구는 제품디자인과 공예 분야의 잡지 『공예뉴스(工藝ニュース)』(1946~74), 그래픽디자인 분야 잡지 『IDEA』(1953~), 『Graphic Designs』(1959~86)의 1950, 60년대 출간물을 대상으로 논의를 고찰해 보았다. 이어 모던디자인에서 고뇌와 각성을 통하여 일본적 정체성 추구로 작품이 변모한 대표적 선구 그래픽 디자이너 4명을 사례연구하였다. 모던디자인 경향에서 고뇌와 각성을 거쳐, 일본적 정체성 추구로 그들의 사상과 작품이 변모한 과정을 고찰하였다.

연구결과 1950년대 일본적 문자 환경을 고민한 하라 히로무(原弘), 1960년대 모던디자인 안에서 일본적 전통을 발견한 가메쿠라 유사쿠(龜倉雄策), 1970년대 아시아로 작품 경향이 전환한 스기우라 고헤이(杉浦康平), 1980년대 일러스트레이션 기법으로 일본적 정체성 추구로 전환한 나가이 가즈마사(永井一正)의 사상 및 작품 전환과 그 과정을 고찰하였다.

결론 그 결과 본 연구는 일본에서 모던디자인을 선구적으로 받아들였던 작가주의 디자이너들이 자신의 정체성 찾기의 일환으로 일본적 디자인을 추구하는 방향으로의 변모한 과정을 추적할 수 있었으며, 소재 차용, 양식 차용을 넘어서, 문화적 근거의 재확인이라는 심층 단계까지 이르렀음을 확인하였다.

Abstract, Translated

Background In the study of modern design, the discussion of national identity and regionality is always a hot topic in countries that have undergone modernizaion in the form of “transplantation” from the West rather than a natural self-modernizaion process. Therefore, we examine Japan as a case study of ‘globalization and locality’ and the process of pursuing its own identity, thus an example of a country that imported design, established design education institutions and westernized ahead of Korea during the end of the 19th century.

Methods The research was conducted using the literature review method and the case study method. For Japan, the discussion of ‘internationality and locality’ at the global level is translated into the issue of ‘globality and Japanese identity and uniqueness’ at the domestic level. For the literature review, I referenced the following magazines: product design and crafts magazine ‘Kōtai no Nihon’(1946-74), graphic design magazine ‘IDEA’ (1953-present), and ‘Graphic Designs’(1959-86) from the 1950s and 60s. Then, as a case study, the works of four representative pioneer graphic designers who turned their focus from modern design to the pursuit of Japanese identity, were examined. Their works transformed from the following modern design trends to the pursuit of Japanese identity through an artistic process of anguish and awakening.

Results The study examined the transformations and processes of the following pioneering graphic designers: Hara Hiromu, who pondered the Japanese literary environment in the 1950s; Kamekura Yuusaku, who discovered Japanese tradition within modern design in the 1960s; Sugiura Kouhei, who turned to Asia in his works in the 1970s; and Nagai Izumasa, who sought a Japanese identity through illustration techniques in the 1980s.

Conclusions This study traces the transformation of auteurist designers who pioneered modern design in Japan by pursuing Japanese design as part of their identity search and confirms that they went beyond the borrowing of materials and styles and into a deeper level of reaffirmation of cultural grounds.

Keywords:
Locality, Identity, Japanese Graphic Design, Modern Design History, 지역성, 정체성, 일본 그래픽디자인, 디자인사.
pISSN: 1226-8046
eISSN: 2288-2987
Publisher: 한국디자인학회Publisher: Korean Society of Design Science
Received: 29 Aug, 2023
Revised: 06 Oct, 2023
Accepted: 22 Oct, 2023
Printed: 30, Nov, 2023
Volume: 36 Issue: 4
Page: 347 ~ 363
DOI: https://doi.org/10.15187/adr.2023.11.36.4.347
Corresponding Author: Heekyoung Shin ( (shinhk05@semyung.ac.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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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tation: Shin, H. (2023). Identity in Japanese Graphic Design: Pioneering Graphic Designers. Archives of Design Research, 36(4), 347-363.

Copyright : This is an Open Access article distributed under the terms of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Non-Commercial License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3.0/), which permits unrestricted educational and non-commercial use, provided the original work is properly cited.

1. 연구의 배경 및 방법

최근 근대 디자인에 대한 연구와 디자인 선구자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하여 국립현대미술관, DDP 등에서 일본을 통하여 서구 모던디자인 (圖案)을 수용한 한홍택, 이완석 등 도입기 선구자들과 전후 서구에서 직접적으로 모던디자인을 수용하고 한국에 정착시키는 과제를 안고 있었던 조영제, 김교만, 권명광 등 정착기 선구자들의 고뇌와 활동을 보여주는 전시가 개최되었다. 외부로부터 수용과 정착, 그리고 자국 정체성과의 고뇌를 동반한 활동은 서구로부터 수용이라는 형태로 디자인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디자인 후발 국가에서 공통되게 발견되는 현상이다.

앞서 서술한 2023년 초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디자인 아카이브로 기증된 한홍택(韓弘澤, 1916~1994)의 작품과 자료들을 중심으로 개최된 <모던 데자인: 생활, 산업, 외교하는 미술로>전에서는, ‘정체성과 주체성’ 파트가 있었다. 한국 디자인계에서 정체성, 혹은 지역성과 세계화에 관한 화두는 언제나 첨예한 논의 대상이었으나, 한국 근대기 디자인 연구는 아직 발굴 · 기록 · 아카이브의 단계로 한국적 정체성에 대한 논의와 연구에 관해서는 구체적 서술도 있으나 대부분 당위론의 단계이다.

이 ‘정체성과 지역성(Identity and Regionality)’에 관한 논의는 특히 자생적 모더니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서구에서 이식(移植)이라는 형태로, 즉 근대화를 서구화의 형태로 받아들인 나라에서는 언제나 화두일 수밖에 없다. 이에 본고는 세계성과 지역성 논의, 정체성 추구 과정의 사례로서, 한국보다 앞서 19세기 말부터 디자인을 유입하고 디자인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모던디자인을 수용하고, 세계화와 지역성 논의를 거친 일본의 경우를 고찰하고자 한다.

일본에서는 모든 문명의 모던화, 근대화는 서양화로 치환 가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과정은 서양의 복사로 시작되었으나, 차츰 일본에서 지역적, 토착적으로 존재하던 문화적 내용을 내포하는 단계로 이동하여 논의되고 실천되었다. 경제가 회복되던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 이후, 그들은 의식적으로 모더니즘과는 다른 표현 어법을 지니려 노력하여, 작가 개개인이 자기 정체성 찾기에 나섰다. 자기 찾기의 제일보는 먼저 자신의 피에 흐르는 고유한 조형 의식, 조형 언어 찾기부터 시작한다는 것은 용이하게 상상할 수 있다.

본 연구 대상의 시기를, 외부로부터 모던디자인 유입이 완료되고, 사회경제가 안정되기 시작한 1950년대 중반 이후로 잡고, 서구 모던 추구 경향에서 자기 정체성 추구 경향으로 작품이 변모한 작가를 대상으로 하였다. 고찰 방법은 사상계에서 지역성 논의를 통한 이론 고찰과 작품 사례연구를 병행하여 진행하였다. 즉 사상연구로는 당시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졌던 잡지로 제품디자인, 공예분야의 잡지 『工藝ニュース(공예뉴스)』(1946~74년), 그래픽디자인 분야 잡지 『アイデア IDEA』(1953~현재), 『グラフィックデザイン Graphic Designs』(1959~86)에서 1950년대, 1960년대 출간물 전권을 대상으로 논의를 고찰해 보았다. 

이어서 작품 사례연구로서 그 정체성을 추구하는 과정을 동일하게 일본의 1950~60년대 그래픽디자인 부흥을 이끌었던 선구자 중, 이후 모던 경향에서 일본적 추구로 방향을 틀고 성공한 그래픽 디자이너 4명을 선정하여, 그들의 사상과 작품 변모를 고찰하였다. 그들은 모두 1950~60년대부터 활발하게 활동한 이들이나, 정체성 발현 시기는 각각 다르다. 이들이 어떻게 일본적 정체성을 추구하고 성공하였는지, 그 방법론 및 일본적 정체성의 요인을 고찰하였다.

2. 사상으로의 일본 디자인의 정체성 논의 고찰
2. 1. 세계성과 지역성 논의

일본 내에서 세계성과 자국 정체성인 지역성에 관한 논의는 2차 세계대전 이후 1950년대 중반 본격화되었으며, 1960년에 동경에서 개최된 <세계디자인 회의>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통칭 WoDeCo라 불리는 1960년 <세계디자인 회의>는 세계 각국에서 84명, 일본 국내에서 143명, 합계 227명의 디자이너, 디자인 연구자들이 처음으로 동양에서 6일간에 걸쳐 논의한, 기념비적 디자인회의이다. 바로 이 회의의 주요 테마가 ‘개별성(Individuality)’, ‘지역성(Regionality)’, ‘세계성(Universality)’이었다. 이 회의 이전 지역성에 대한 논의는 각 디자인 분야에서 개별적으로 이루어졌던 것에 반해, 처음으로 전 디자인 영역이 참여하여 횡단적으로 논의가 이루어진 점이 큰 의의이다. 물론 주된 주장은 세계성을 전제로 하는 보편성의 증진이었으나, 이에 맞서는 개별성, 지역성을 주장하는 경우도 있었다. 당시 회의 의사록<Figure 1>에 의하면, 세계성이란 개성과 상대적인 관계에서 성립하는 것이며, 더구나 양자에는 우열의 순서는 없고, 개성은 세계성을 만들어내는 단위이며, 동시에 세계성은 개성을 사회적인 것으로 하기 위해서 작용하는 것이라 언급되어있다(Edited by Editorial Board, 1961, 46p).


Figure 1 World Design Congress

이러한 세계적 시점에서의 ‘국제성과 지역성’이란 테마는 일본 국내로 시점을 바꾸어보면, 서양에서 일본으로 들어온 모던디자인과 일본 모던디자인 내에 존재하는 ‘일본적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즉 세계적 레벨에서의 ‘국제성과 지역성’ 논의는 일본 국내 입장에서는 ‘세계성과 일본적 정체성(Identity) 및 고유성’의 문제로 치환된다. 이러한 논의는 실제로 모던디자인 도입기인 1920~30년대, 정착기인 1950~60년대에 활발하게 논의되었다. 이에 본격적으로 논의된 2차 논의(1950~60년대)를 디자인계의 대표적 잡지―『공예뉴스(工藝ニュース)』, 『IDEA』, 『Graphic Designs』―를 통하여 고찰하고자 한다. 건축디자인 분야는 이른 시기부터 심포지엄 <일본적 디자인을 둘러싸고>가 개최되는 등 다른 디자인 분야와는 도입 과정과 시기가 다르며, 또 공간 및 건축 분야는 그 자체가 지역 풍토와 관련이 깊어 타 디자인과는 성격이 다르기에, 본 연구의 논의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2. 2. 켄모치 이사무(剣持勇)의 ‘재패니즈 모던’

일본 디자인에서 ‘일본적인 것’의 추구라는 테마는 문학, 건축, 회화 등에서와 마찬가지로 간헐적으로 언급되어 온 테마로 초기의 주목할 만한 논의는 서구 모더니즘 수용 초기인 1920년대에서 1930년대에 걸친 논의이다. 이 시대 논의의 대표적 주장은 작가가 일본인이라면 일본적인 것을 자동적으로 지닌다는 태생론으로, 고이케 신지(小池新二) 지바대학 명예교수를 위시한 <일본공작문화연맹>1)의 중추적 사상이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이전 서구 모던디자인 도입기 디자인(특히 그래픽디자인)에서 일본적 요소라는 것을 강력하게 배제하고 서구화를 지향하던 시대였기에, 일본적 지역성 추구 의견은 소수 의견이었다.

전후에 이루어진 일본적 지역성, 고유성에 대한 추구 논의는 대외적인 관계 속에서의 내셔널 아이덴티티를 추구하는 기운이 확산된 1950년대 중반에서 1960년대 초에, ‘일본적인 모던디자인’이라는 형태로 논의되고 ‘재패니즈 모던(Japanese modern)’이라 불리는 스타일을 이끌었다. 이는 일본적인 것과 국제적인 모던한 것과의 갈망을 동시에 반영한 것으로, 공예와 인테리어디자인 분야에서 먼저 나타나, 이후 전체 디자인 분야로 확산되었다. 이 일본적인 아이덴티티에 대한 추구는, 초기에는 급격한 서구 수용에 대한 반발인 복고취미로 등장하였고, 후에는 사회복구와 비약적 경제성장에 발맞추어 근대화된 일본이라는 이미지 건설로 등장하였다. 이 ‘근대화된 일본’이라는 이미지는 공예/제품디자인 분야에서 수출진흥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상투적 이미지인 후지야마(富士山), 게이샤(芸者)로 표현하는 ‘자포니카(Japonica)’가 일본에 주둔하던 미군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것에 대한 반동이 계기가 되어 ‘근대적인 일본’을 추구하기 시작하였다. 현재에도 ‘후지산’과 ‘일본 전통 머리 스타일의 여자―게이샤’를 소재로 표현하는 디자인은 혐오 대상이 될 정도로 ‘쟈포니카’ 이미지는 기피되었다.

이때의 이론적 뒷받침은 켄모치 이사무(劍持勇, 1912~1971)가 미국을 방문할 때 작성한 평론 「미국 공예와 일본적 근대조(美國工藝と日本的近代調)」(아사히신문 1953년, 2월 1일)에서 처음 펼친 주장이다. 대단히 큰 사회적 반응을 일으켰던 이 ‘일본조(調), 재패니즈 모던’에 대한 이 발상은 당시 미국 출장길에 마주한 미국 시장을 압도했던 ‘스웨디시 모던(Swedish Modern)’에 대한 충격과 미국 디자이너들의 일본적 디자인에 대한 낭만적 동경을 목격한 것이 계기가 되어 발상한 것이었다. 더구나 당시 사회 풍조는 정책과제로 디자인을 수출진흥을 위한 방법론으로 삼았던 시기로, 그는 1953년 캐나다에서 개최된 박람회에서 일본 전시장을 담당하면서 이 발상을 구체화해 나갔다. 그가 디자인한 전시관은 해외를 향한 일본적 이미지로 디자인되어, 외부 시각을 의식한 결과이기에 실제 일본의 아이덴티티의 추구라기보다는, 해외에 이렇게 보이고 싶다는 바람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일본적인 것이 하나의 이상적 형태로 표현되었다.

당시 동경예대 교수이자 대표적 가구 디자이너이자였던 토요구치 캇페이(豊口克平)에 따르면, 수출하기 위해서는 일본적 디자인을 행해야 하며, 모티프나 기술에 안이하게 의지하지 않고, 일본적 본질을 어디서 발견하고, 이를 디자인에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에 대해 깊이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Toyoguchi, 1949, 15p).

2. 3. 공예지도소의 『공예뉴스(工藝ニュース)』 고찰

켄모치의 구체적 사상을 그가 소장으로 재직하던 공예지도소의 기관지 『공예뉴스(工藝ニュース)』를 통하여 고찰해 보겠다. 가시와기(Kashiwaki. 1986, 21p)에 의하면 잡지 『공예지도(工藝指導)』는 정부 상공소(商工所) 산하의 공예지도소―工芸指導所<Figure 2>2)에서 1928년에 기관지(機關誌)로 발간되고, 1942년에 가츠미 마사루(勝見勝)가 편집 고문을 맡으며『공예뉴스(工藝ニュース)』<Figure 3>로 개명하였고, 1944년에 휴간되었다가 1946년에 복간하여 1974년에 3/4월호로 폐간된 일본 인더스트리얼 디자인계의 대표적 잡지이다. 정부 기관의 기관지이기에 단순한 정보뿐 아니라, 공예지도소의 연구나 시험제작물 보고서 등 심도 있는 전공지식을 게재한 일종의 저널 성격을 지닌 잡지이다. 초기에는 민족적 표현에 대한 의문을 나타낸 글(사토우 도라타로우(斎藤寅太郎),「나의 의문: 민족표현에 왜 도달해야하는가?(私の疑問 : 民族表現になぜ到着しなくてはならぬか?)」 , 『工藝ニュース』v.23, 19p)이나 국제적 시야를 염두에 두고 보편적 디자인을 지향해야 한다는 논조(에가와 가즈히코(江川和彦),「일본공예에 대한 근대생활의 기초매김(日本工芸に対する近代生活の基礎づけ)」, 『工藝 ニュース』v.16, 10p)도 게재되곤 하였다.


Figure 2 Craft Studio-Bruno Tout, Kenmochi Isamu

Figure 3 Magazine 『Craft News』

하지만 논쟁의 당사자인 켄모치가 『工藝ニュース』의 발행기관 공예지도소 소장이었던 관계로, 본 잡지들에서는 ‘재패니즈 모던’ 추진론이 대세였다. 공예지도소에서는 이전부터 ‘근대 일본조―재패니즈 모던디자인’을 연구 테마로 시범작을 만들어왔고, 당시 공업기술원 연구 프로젝트로 확대되며 공예지도소에서 전력을 다하여 추진하던 테마였기에 개념이나 필요성이 열성적으로 논의되고 있다. 하지만 아직 명확한 기준이 없었는지, 구체적 내용에 관한 서술은 찾을 수 없었다.

그 후 켄모치가 의도한 ‘재패니즈 모던’의 개념이 세상에 받아들여지고 확산됨에 따라, 이에 파생되는 여러 논쟁이 이어서 전개되었다.

예를 들어 고이케 이와타로(Koike, 1964, 55p)은, 사회에서 ‘쟈포니카 디자인’과 ‘재패니즈 모던디자인’이 혼동되어 사용되고 있다며, 즉 일본적인 형태를 취하면 디자인적으로 우수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인가 등 미적인 면과 정체성면 간의 우위 문제, 일본적 모티프를 단지 차용하는 소위 ‘쟈포니카 디자인’까지도 ‘재패니즈 모던’으로서 통용되는 상황에 대한 의문 등을 제시하였다. 재패니즈 모던과 쟈포니카 디자인의 두 개념 사이에 간격과 오해가 생긴 이유는 다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쟈포니카 디자인과 재패니즈 모던디자인은 명확히 다르나, 둘 다 일본적인 것이라는 ‘지역성’의 발현이 공통적이었으며, 양자를 가르는 선이 확실하지 않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논의의 배후에는 양자를 개념적으로 가르는 추상적인 구별은 가능하나, 실제 작품에서 구분이 명확하지 않았던 점이 작용하였다. 그리고 둘째는 모던이라는 단어의 개념이 ‘근대’인지, ‘현대’인지 일본어 번역이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셋째, 모던디자인이라는 용어 자체가 세계대전 이전의 문화 르네상스기 ‘다이쇼 모던(大正モダン)’을 연상시켜, 향수를 자극하는 뉘앙스를 불러일으키는 점 때문이다.

이로 인한 오해에 대하여, 켄모치는 『工藝ニュース』 22호에 「재패니즈 모던이냐, 쟈포니카냐 : 수출공예의 2가지 길」에서 ‘재패니즈 모던’을 ‘쟈포니카’와 구별하여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이제까지의 통속을 노린 3류 상품(쟈포니카를 의미 : 본 연구자)이 아닌, 일본 현대생활과 현대공예, 혹은 수공예에서 탄생하는 일본의 우수한 것을 찾고 있다. 이는 ... ‘재패니즈 모던디자인’이라 불리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번역어 ‘근대 일본조’가 잘못되어 ... 다이쇼 가야금(大正琴), 나비부인 세트 등과 같은 저속한 것을 연상시키게 되었다. 미국인의 이국 취미를 노린 패션 디자인 등등 ... ‘재패니즈 모던’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내용으로 (잘못) 전달된 듯하다 ... ‘재패니즈 모던디자인’은 보편적이며 진정성이 있는 단어로 현대일본의 디자인을 의미할 따름이다. 그러니 일본의 전통적 양식을 디자인의 결정적 근거로서 (단지: 연구자) 키포인트로 사용하는 것은, ‘쟈포니카’라는 타이틀에 적합하다”고 하였다(Kenmochi, 1954, 2p). 이외에도 『工藝ニュース』에는 디자인에 있어서의 국제성과 지역성에 관한 논의가 다수 게재되었다.

잡지 고찰을 통하여 일본적 정체성을 추구하자는 켄모치의 신문 칼럼에서 촉발된 일본적 디자인에 대한 논의는 반향을 일으켜, ‘일본조 디자인’, ‘재패니즈 모던디자인’으로서 진화하여 사회에 받아들여지게 되었으며, 이후에는 동일하게 서양의 이국적 취향, 오리엔탈리즘을 노린 ‘쟈포니카’와 혼동, 오해되어 ‘쟈포니카’와 ‘재패니즘 모던’에 대한 논의가 1950년대에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3. 그래픽 분야에서의 논의 고찰

그래픽디자인 영역에서는 제품디자인 분야의 켄모치 이사무처럼 명확한 추진론자가 존재하지 않았으나, 그래픽디자인 분야에서도 조금 늦게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에 걸쳐 일본적 아이덴티티를 추구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논쟁을 주도한 잡지를 통하여 일본적 정체성 추구에 대한 논의를 고찰해보겠다.

3. 1. 그래픽 잡지 『IDEA』 고찰

1953년에 격월지로 창간된 그래픽 잡지 『IDEA』 <Figure 4>에 게재된 오쿠야마 기하치로(奥山儀八朗)의 「어디로 가나, 일본 : 서양문명에 허우적대는 일본, (何処にいった日本)」 (『IDEA』1958, 27号, 83p), 우에무라 다카치요(植村鷹千代)의 「디자인의 풍토를 끄집어내라 : 민족적 디자인 폴리시의 필요성 (デザインの風土を押し出せ)」(『IDEA』 1958, 28号, 82p)에 일본적인 것을 뜨겁게 요구하는 주장이 담겨 있다. 또한 오가와 마사류(小川正隆)는 「최근의 일본 포스터(最近の日本 ポスター」 (『IDEA』 1958, 30号, 15p)에서 일본 포스터의 성격은 모던디자인과는 상이하여, 메이지 시대 말기부터 다이쇼 초기에 걸친 미츠코시 백화점의 포스터 등에서 볼 수 있는 일종의 회화주의적 경향, 감상용 포스터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있다고 주장한다. 즉 일본 포스터는 모던디자인이 추구하던 인쇄표현의 실험대로서 새로운 이미지의 추구보다는, 회화와 디자인의 양 세계에 겹쳐있는 독특한 시각 세계에 있다고 논하였다(Kogawa, 1958). 이와 관련하여, 『IDEA』잡지에 게재된 내용은 아니나, 고야마 기요오(小山清男)는 『工藝ニュース』에 「에마키모노(絵巻物)공간과 역원근법」라는 일본적 시공간의 표현에 관한 연구 등, 본래라면 미술전문지에 실려야 할 내용을 디자인 전문지에 게재한 바 있다(『工藝ニュース』 20호, 7p). 게재된 내용, 그 자체보다 그와 같은 미술사적 내용이 디자인 잡지에 6페이지에 걸쳐 실렸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즉 당시의 그래픽디자이너에게 일본적 공간표현에 대한 이해는 해외의 글로벌 그래픽디자인 상황에 대한 파악만큼 필수적이고 중요하였던 것이다. 이상에서 일본 디자인의 회화적 경향의 전통 계승 주장을 엿볼 수 있다.


Figure 4 Magazine 『IDEA』
3. 2. 그래픽 잡지 『グラフィックデザイン(Graphic Design)』 고찰

잡지『Graphic Design』<Figure 5>는 디자인평론가 가츠미 마사루(勝見勝)가 종신 책임편집장을 맡으며 1959년 11월에 계간지로서 창간하여 미술출판사(美術出版社), 다이아몬드사(ダイヤモンド社), 고단샤(講談社)로 출판사를 옮기면서 1986년 100호를 마지막으로 폐간된, 세계에서 주목을 받은 잡지이다(Habara, 1986). 유니버설을 주창한 가츠미 마사루가 편집장이었기 때문에 내용도 디자인계의 정통적인 ‘세계성과 보편성(Internationality and Universality)’을 자지하는 입장으로, ‘일본적인 것’에 관한 관심은 『IDEA』지 정도는 아니었다.


Figure 5 Magazine 『Graphic Desgin』

하지만 리처드 소튼(Richard S. Thornton) 워싱턴대학 교수의 모던디자인과는 다른 일본 디자인의 특성에 대한 기고(Thornton, 1969, 75p)은, 미국에서는 디자인 체제에 관해 생각할 때 지리적으로 분류하지, 나라 전체의 고유성으로 논하지 않는다.... 이는 일본적 상황이다. 주로 지리적 협소함으로, 또 섬나라 문화로 인해 디자이너들의 발자취를 찾아 디자이너의 성장을 지켜보는 연구가 일본에서는 무척 편리하였을 것이다. 바다가 일본의 많은 전통을 용이하게 유지하게 하며, 체제(일본이라는 지역성)라는 강한 전통이 작용하였다고 서술하였다.

일 본 그래픽디자인계를 이끌던 평론가 가츠미 편집장은 1980년 영국 런던의 빅토리아 앤 앨버트(V&A)미술관에서 개최된 <Japan Style>전 (1980.3.12.~7.20.)에 디렉터로 참여하였다. 이 전시는 전후 일본의 굿 디자인을 전시한 전시로, 단지 나열식으로 전시하는 방식이 아닌, 넓은 시야에서 조망하여 재패니즈 모던을 지향한 일본의 디자인 운동이 주제별로 전시되었다. 가츠미(Katumi, 1980, 11p)에 따르면 본인은 아직 ‘Japan Style’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른다고 전제하면서도 주변의 외국에서 온 잡스러운 것을 거둬버린, 맑은 물과 같은 것이라 생각하며, 전후 일본 디자인운동에 동참한 한 사람으로 자신도 일종의 ‘재패니즈 모던’을 지향하였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의 사상을 단적으로 표현한 두 기념 강연 <토끼집에 관한 생각>, <국제 심벌 계획>을 강연하고, 잡지에 게재하였다(『Graphic Design』94호, 72p). 바로 이 ‘토끼집론’은 디자인 심벌의 일종인, 픽토그램을 통하여 유니버설론을 펼친 그의 작업3)을 뒷받침하는, 일본적 특성인 일본 가문(家紋)4)의 전통과 관련된 사고이다(Katumi, 1984, 72p). 그는 동경 올림픽 이후 오사카 만국박람회, 삿포로 동계올림픽, 오키나와 해양박람회 등의 국제 행사에서 심벌과 픽토그램을 활용하여 일본의 문장(紋章) 전통을 국제적인 문맥에서 심벌로서 재평가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문장에 대한 깊은 관심은 심벌 마크에 관한 특집기사 「일본의 디자인 100선, 심벌 마크, 좌담회: 가츠미 마사루, 가메쿠라 유사쿠」 (勝見勝, [座談会・勝見勝 亀 倉優策」, 『Graphic Design』73호, 45p)에서도 충분히 읽을 수 있다.

정리하자면, 정부산하 기관지로서 『공예 뉴스』가 정부의 수출진흥을 위한 정책과 발을 맞추어, 1950~60년대 재패니즈 모던에 관한 주장을 펼쳤다면, 가츠미 마사루가 편집장이었던 잡지 『그래픽디자인』, 1970년대 말 가메쿠라 유사쿠가 책임편집장을 맡아 출판한 잡지 『크리에이션 -CREATION』5)은 유니버설 주의의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그 안에서 일본적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유니버설 디자인의 주류 안에서 일본적 전통과의 일치하는 부분―일본 문장, 가타치―범주 안에서의 논의이다. 반면 현재도 간행되는 『IDEA』지는 시대마다의 트렌드와 사상을 보여주고 있으며, 재패니즈 모던이 대세였던 시대에는 궤를 같이 하여 그래픽 분야에서 재패니즈 모던의 필요성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상에서 언급한 대표적 일본 그래픽 잡지 외에도 국내외의 디자인잡지에서 일본적 아이덴티티에 대한 관심이 컸던 1960년대 초, 경제 버블기인 1980년대에는 일본 디자인의 정체성 관련 특집 <일본 특집>『GRAPHIS』 (138/139, Swiss, 1968), 「特集:日本のグラフィズム」, 『アイディア』(1995), 「特集: 海外に打ち出されたニッポン」, 『縦組ヨコ組』(Vol. 52, 1999), 「特集 : デザインは風土を越えられるか」, 『縦組ヨコ組』(Vol.55, 1999) 등이 연이어 출판되었다.

이를 통하여, 1960년대 초, 1980년대 등 일본 경제 부흥기에, 경제적 성장과 동반하여 자국의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고조되었으며, 이에 함께 정체성과 고유성 논의가 전 문화 분야에서 이루어졌으며, 이는 디자인 분야에서도 활발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픽 내의 논쟁은 이론적 사상이라기보다는 비평으로서의 틀을 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4. 그래픽디자인 분야에서 일본적 정체성 추구 경향

인더스트리얼 디자인 분야도 전통적인 가치에 무게를 두고 일본 공예품이 지니는 전통적 특성이 일본 산업제품의 완벽한 형태 마감 처리에 계승되었으나,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정보와 교통의 발달에 의해 국제적, 익명적인 어휘를 반영하는 방향으로 진화되었다6). 즉 오늘날 일본 인더스트리얼 디자인의 아이덴티티와 이를 둘러싼 문맥은 어느 문화에서 유래하는가 하는 부분이 논의되기보다 세계 공통의 테크놀로지가 창조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반면 그래픽디자인 분야는 아직 ‘지역성’과 ‘정체성’ 표현이 농후하며, 도리어 그 경향이 더욱 강화되는 경향을 보여주었다. 개인적 개성을 내뿜고, 작가로서 존재감을 표현하는 경향이 강한 그래픽 디자이너는 표현에 있어서 조금 더 자유로운 입장이었다. 더구나 일본의 미술 전통은 ‘우키요에(浮世絵)’로 대표되듯이 장식성과 실용성이 강하여 회화와 디자인의 경계가 약한 회화적 전통을 지니고 있다. 신(Shin, 2008, 210p)에 따르면, 일본의 문화적 전통에 있어서는 예술작품이 일상생활에서 분리된 별도의 세계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순수예술’과 ‘응용예술’과의 구별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다. 일본 그래픽디자인의 이처럼 예술과 경계가 불분명한 회화적 경향을 그래픽 디자이너가 계승하는 경향이 짙어서, 일본화가 하시구치 고야(Hashiguchi Goya)는 우키요에 중에서 미인화<Figure 6>의 형식을 계승하여 최초의 백화점 포스터<Figure 7>를 1907년에 제작하였고, 그래픽 디자이너 스기우라 히스이(Sugiura Hisui)는 아르누보풍 백화점 포스터<Figure 8>를 1917년에 제작하면서 일본의 근대기 포스터가 성립되었다. 오늘날에도 그래픽 디자이너들은 클라이언트가 본인으로서 발주 포스터를 지속적으로 제작하고 발표하는 작가주의 포스터의 문화 풍토가 있다. 이로 인하여 일본 그래픽디자인계는 상업적 기업 디자인과 개인의 작가주의적 경향으로 구별되고 있다.


Figure 6 Ukiyo-e(1790)

Figure 7 Goyo Hashiguchi(1907)

Figure 8 Hisui Sugiura(1914)

그래픽디자인계에서는 그래픽 디자이너의 성향상, ‘정체성, 지역성’에 관한 직접적이고 심도 있는 논쟁은 드물지만, 그러한 문제의식을 사상 전개를 통한 문장으로 서술하여 논쟁하기보다는 스스로의 작품에서 표현하기를 선호하였다. 당시 일본적이라 평가되었던 대표적 포스터로는 하라 히로무(原弘)의 <일본 가부키>(1957), <일본 타이포그래피 전시>(1958), 하야카와 요시오(早川良男)의 <일본 JAL 항공>(1958) 등이 있으며, 1960년대에는 다나카 잇코(田中一光)의 <제8회 산업관세음공연 포스터> 등에서 ‘재패니즈 모던디자인’ 표현 스타일의 전형을 볼 수 있으며, 그 후의 ‘재패니즈 모던디자인’ 경향으로 1970년대의 요코오 다다노리(横尾忠則)의 우키요에를 연상시키는 일본식 키치 포스터, 아와즈 기요시(粟津潔)의 연극 포스터들, 1980년대의 일본 붐 이 있었다(Kashiwagi, 1986, 97p).

본 연구에서는 본인의 기질로 인하여 초기작부터 일본적 정체성을 추구한 이들 작가보다는, 모던디자인을 수용하여 정점을 이룬 뒤에, 정체성에 관한 고뇌 끝에 정체성 추구 경향으로 인해 극적으로 작품 경향이 변모한 시대별 선구적 그래픽 디자이너들을 사례 대상자로 선정하였다. 즉 본 연구에서는 1930~50년대의 하라 히로무, 1950~60년대의 가메쿠라 유사쿠, 1960~70년대의 스기우라 고헤이, 1970~80년대의 나가이 가즈마사의 사상과 작품 변모를 고찰하고자 한다. 이들은 모던디자인으로 정점을 찍고, 그 이후에 자기 자신의 정체성 추구로 전환하고 또 아주 훌륭하게 전성기를 맞이한 이들이다.

5. 1950년대 사례연구 : 하라 히로무(原弘)

하라 히로무(原弘, 1903~1986)는 모던디자인 이론을 가장 먼저 도입하고 경도됨과 동시에 토착화의 길을 모색한 그래픽디자인의 첫 세대이자 선구자이다. 서양 문자와 일본 문자는 지역 문화의 차이가 명백하여, 서양 이론을 그대로 일본 문자 형태에 적용하는 것에 문제의식을 갖고, 고뇌와 성찰, 각성 끝에 독자적 타이포그래피 이론을 전개하였다.

이미 1930년대에 일본에서 가장 먼저 엘 리흐츠키(El Lissitzky), 얀 치홀트(Jan Tschichold) 등의 뉴 타이포그래피나 모호이-너지(László Moholy-Nagy)의 타이포 포토에 주목하며, 모더니즘 디자인을 가장 일찍 받아들인 그가 뉴 타이포그래피의 핵심인 산세리프체를 사용하지 않고, 명조체를 사용한 배경에 존재하는 문제의식을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5. 1. 모던디자인 수용기

하라 히로무는 미래파부터 구성주의에 이르는 아방가르드 운동의 영향을 받고, 특히 새로운 예술인 디자인은 구성파, 구성주의의 요소를 이어 받아들였다. 1926년 미국의 잡지 『Inland. Printer』에 게재된 얀 치홀트의 「뉴 타이포그래피 운동 특집(Elemetare Typographie)을 읽고 큰 충격을 받고, 소논문 「활판 도안의 신경향」을 1929년에, 「신활판술 연구(die neue typografie)」를 1931년에 집필하였다. 하라는 타이프페이스(Typeface)에서 세리프(serif)를 제거함으로써 ‘인터내셔널성’과 ‘대중성’을 추구하였는데, 여기서 서체에서의 ‘인터내셔널성’이란 산세리프(Sans-serif)체를 사용함으로써 당시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던 독일 고딕(Gothic)서체가 지녔던 민족성과 국가적 특징이라는 전통적 이미지에서 벗어나 유니버설한 서체로 전환함을 의미한다.

하라 히로무가 모던디자인을 어떻게 인식했는지는 1928년에 그가 쓴 「오늘의 공예, 신흥예술에 남겨진 길」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사카나쿠라(Sakanakura, 2000, 13p)에 따르면, 하라는 공예는 예술적일 수는 있어도 예술은 아니며, 공예에서 경제를 분리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단언하였는데, 당시는 디자인이라는 용어가 없고 공예라는 용어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기에 이 글에서의 공예는 Craft가 아닌, Design에 가까운 의미라 하였다.

5. 2. 모던디자인의 일본적 변용으로서의 명조체

당시 하라는 국제성을 주목하여 모던디자인인 ‘뉴 타이포그래피’ 이론에서 배울 것이 매우 많다고 주장하며 (Hara, 1985, 281p). 앞서 언급한 소논문 「신활판술연구」<Figure 9>의 서문에서 뉴 타이포그래피 운동에서 뉴 타이포그래피의 비대칭 이론 등 대부분을 받아들였는데, 한때는 일어 산세리프체(일어 고딕체)7)를 사용한 다수의 포스터와 북 디자인을 디자인하였다. 근본적으로 알파벳이라는 표음 문자를 가진 서구와 달리, 한자와 히라가나, 가타카나 등 표의, 표음 문자가 뒤섞인 일본 글자 체계에는 큰 차이가 있어, 일본어 산세리프체(일본어 고딕체)로는 뉴 타이포그래피의 목적인 기능적 사고를 해결할 수 없다며 생각을 전환하였다.


Figure 9 Hara Hiromu(1931)

그 결과 산세리프체를 초기에는 사용하였으나, 어느 시점부터 받아들이지 않게 되었다. 그 배경에는 서구와 일본의 국어의 다름으로 야기되는 문자(활자) 문제에 결정적 차이가 있어, 자국의 활판술을 지니려 하였던 그의 사상이 반영된 것이다. 그는 일본에 맞는 디자인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일본만을 위한 이론이 필요하다며 디자인에서 일본이라는 국가적 지역성을 강하게 의식하였다.

사가나쿠라(Sakanakura, 2000, 80p)에 따르면, 이러한 판단의 근거로 고려한 점은 첫째, 서양의 활자 상황과의 대비이며, 또 하나는 일본 문화의 시간 축적, 즉 역사와의 대비이다. 첫째 이유는 알파벳에 있어서 명쾌한 시각성을 지닌 산세리프체도 일본 문자로 바뀔 경우에는 우수한 가독성을 지닌 서체가 아니며, 일본 활자에서 가독성을 지니는 최상의 문자는 세리프체인 명조체라는 점이다. 둘째는 역사와의 대비에서 명조체는 역사적으로 오래 공유되어 친숙해져 있기에, 그는 이를 디자인 작업 시 서체 선택의 기준으로 삼았다. 명조체가 가독성에서 타 서체보다 우수하다고 생각한 것은 오랜 습관에 의지하는 부분이 크며, 그 습관이 명조체에게 안정감과 침착함이라는 이미지를 주었기 때문이다.

또 그는 활자 문제는 디자인 이전의 역사나 문화와 관련되는 근본적 부분이기에 서체 개발에는 관여하지 않고, 기존 서체 내에서 합리적인 서체를 선택하는 방법을 취하였다.

사카나쿠라(Sakanakura, 2000, 59p)에 따르면, 1935년 포스터 <시마즈 마네킹 신작 전람회><Figure 10>에서 산세리프 서체의 영문과 일문의 조화 문제를 해결하고자 명조체를 레터링이라는 방법으로 산세리프 서체로 수정하는 실험을 하였고, 그 결과 ‘exhibition of mannequins shimazu’라는 흰색 영문 문자와 ‘島津マネキン新作品展覧会(시마즈 마네킹 신작 작품 전람회)’라는 일본 문자는 당시의 산세리프 활자에서는 볼 수 없었던 통일감을 갖게 되고, 사진과도 조화를 이루었다. 이 시절부터 활자 자체의 타이포그래피보다는, 화면 전체 안에서 조화를 염두에 둔, 레이아웃을 포함한 타이포그래피 전개를 지향하였다.


Figure 10 Hara Hiromu(1935)

이는 결국 일본의 독자적 타이포그래피 탐색으로 이어져, 영문 포스터에서는 그대로 산세리프체를 사용하고<Figure 11>, 일본어 문자와 영문이 혼용될 경우는 레터링이라는 방법으로 해결책을 모색하였다.


Figure 11 Hara Hiromu(1936)

그 결과 그의 작품은 2차 세계대전 이후, 1950~60년대 북 디자인 분야에서 일본적 활판술의 절정을 이루었고 이후로도 호화로운 책 장정을 위시한 북 디자인에서 서체는 명조체로 일관되며, <Bauhausu> 전시 등 영문자만으로 구성된 포스터에서만 산세리프 서체를 사용하는 등, 디자인 콘텐츠에 따라 사용 서체를 구분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대표작 중 하나인 <일본 가부키 (띄어쓰기)무용> 포스터<Figure 12>를 명조체로 제작하였고, 또 다른 대표작 <日本 タイポグラフィ展 1959><Figure 13>는 붓글씨 서체의 붓놀림인 멈춤, 튀김 등의 명조체의 서체 요소로 디자인하여, 그의 명조체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다.


Figure 12 Hara Hiromu(1958)

Figure 13 Hara Hiromu(1959)
6. 1960년대 사례연구 : 가메쿠라 유사쿠(龜倉雄策)

가메쿠라 유사쿠(龜倉雄策, 1915~1997)는 전후 일본 그래픽디자인계를 이끌던 리더적 존재이며, 일본 모던디자인의 완성기라 자부하는 <동경 올림픽 디자인>의 로고와 포스터 제작을 위시하여 모던디자인을 실천한 인물이다. 한편 모던디자인과 상통하는 일본의 <KATACHI―형(形)> 사상을 포착하고 발표하였다.

6. 1. 모던디자인의 흡수와 완성

가메쿠라는 가와바타 렌시치로(川喜田鍊七郞)가 바우하우스를 롤모델로 설립한 신건축공예학원 (新建築工藝學院)에서 바우하우스의 구성이론과 방법론을 학습하였으며, 이후 카상드르 포스터, 엘 리히츠키가 편집 디자인한 잡지 『USSR』, 바우하우스 관련 도서, 그리고 당시 전위적인 인물들과의 교류를 통해서 모던디자인 사상을 심화하고 구성주의적 작품 스타일을 완성하였다. 또 세계 최초로 전 세계인이 그림문자인 픽토그램으로 유니버설하게 소통하는 올림픽 픽토그램을 위시하여 동경 올림픽의 디자인 폴리시를 제안하는 등, 그래픽디자인계에서 세계성, 유니버설리티를 이끈 가츠미 마사루와의 협업은 그를 모던디자인에 더욱 경도시켰다.

전후 1951년에 전국적 단위인 그래픽 디자이너 직능단체 일선미(日宣美)의 설립8)을 주도하여 그래픽 디자이너의 위상을 올리고, 1955년 최초의 상업포스터로 구성된 기념비적인 전시 <Graphic 55>9)를 개최하는 등 일본 모던디자인의 출발을 이끈 일본 그래픽디자인계의 실질적인 리더이다. 본인 작품에서 모던디자인으로 추상작품이 완성된 니콘 카메라의 포스터<Figure 14>도 이 시기 작품이다.


Figure 14 Kamekura Yusaku(1957)
6. 2. 모던디자인으로 표출한 일본적 전통 : Katachi, Kamon(家紋)

그는 이처럼 모던디자인 수용과 완성에 열성적이었으나, 동시에 일본이라는 ‘지역성’에 맞는 디자인에도 관심이 깊었다. 앞에서 서술한 1960년대 <세계디자인회의>에서 가메쿠라는 일본의 전통적인 ‘KATACHI’의 의미와 상징에 대해서 강연하면서, 전통적 형태를 현대적 디자인 차원에서 분해하여 새롭게 조직하는 것이 진정한 형태라고 주장하였다(Kamekura, 2006, 126p). 서구의 심벌에 대비되는 일본 문장(紋章) 전통의 배경에는 일본의 문화 전통 특유의 ‘형―가타치(形)’ 사유가 작용한다. 일본에서는 여러 미술이나 공예 등 예체능 분야의 학습 초기에 거장의 ‘가타치’를 답습하는 것에서 시작하는데, 이는 각 미술이나 공예 분야에서 필요로 하는 최소한의 기본을 가장 축약적이며 간소한 형태로 모은 가이드라인이라 할 수 있다. 이 ‘가타치’의 시스템화에 의하여 일본 문화는 널리 보급되었으며 시민 참가가 용이하게 되었다. 이 강연은 1954년 첫 해외여행에서 폴 랜드(Paul Rand)에게 받은 “왜 일본 디자이너는 서구 스타일을 추구하느냐, 일본에는 위대한 예술의 전통이 있지 않느냐”(Kamekura, 1983, 249p)라는 물음에서 촉발된 사상이다.

또 그는 앞서 고찰한 대로 『Graphics』지에 일본미의 특징으로서 가문(家紋)과 가타치 사상을 자세히 설명하였으며, 그가 1980년대 책임편집장을 맡아 5년간만 출간한 세계적 그래픽 잡지 『クリエイション Creation』에서도 가문에 대해 서술하였다. 이외에도 일본 전통에 대한 관심이 깊어 강연 <전통에 대하여(伝統について)>(뉴욕 타이포디렉터즈 클럽 주최 국제 세미나, 1958), 기고문 「전통적인 일본 패키지(伝統的な日本パッキーズ)」(스위스 잡지『GRAPHIS』), 「Katachi」(독일 『FORM』, 이탈리아 『MOBIL DECOTATION』) 등 다수의 문헌, 강연을 행하였다.

이상의 일본적 정체성과 지역성에 대한 그의 이론은 그의 작품, 특히 심벌 마크에 잘 반영되어있다. 예를 들어 동경 올림픽의 심벌 마크<Figure 15>는 세계성을 지니면서 일본의 조형적 특성도 획득하여, 얼핏 보면 그의 작품은 세계성에 중점을 둔 듯이 보이나, 여분을 다 잘라버린 단순하고 단단한 표면의 원초적 형태 뒷면에는 의외의 일본적 서정성이 존재한다. 이러한 간결하고 아름다운 조형성은 그가 항상 강조하는 일본의 전통인 가문(家紋)의 영향이다. 이러한 문장의 영향이 직접적으로 보이는 다수의 심벌<Figure 16>과 포스터를 제작하였는데, 포스터 <일본고전예능단 초청기념(日本古典藝能團招請記念)><Figure 17>이 대표적이다. 일본적 이미지를 금색 사각형으로 표현하고 전통예술의 화려한 이미지로 벚꽃을 선택하였다. 바탕 색채는 금색과 검정색으로 에도시대부터 이어져 오는 칠기공예인 마키에(蒔絵)기법을 연상시키며, 꽃이나 잎의 화려한 색채감은 가부키 등의 화려한 색채감을 의도한 듯하다. 결과적으로 문장으로 대표되는 일본미의 간결함, 단정함, 엄격함, 심플함을 느낄 수 있다. 그는 모던주의자이면서도, 모던디자인과 상통하는 일본적 지역성을 강하게 간직하고 표현하였다.


Figure 15 Kamekura Yusaku(1963)

Figure 16 Kamekura Yusaku

Figure 17 Kamekura Yusaku(1981)
7. 1970년대 사례연구 : 스기우라 고헤이(杉浦康平)

1970년대 모던디자인에 경도되었다가 가장 드라마틱하게 자신의 지역적 아이덴티티 추구 방향으로 전환한 그래픽 디자이너가 스기우라 고헤이(杉浦康平, 1932~)이다. 그는 초기에는 철저한 유니버설리즘 이론가이자 모더니즘 작품 경향을 실천하는 디자이너였으나, 1970년대 극적으로 일본, 나아가 아시아의 조형, 지역성 추구 경향으로 변모한다. 그의 극적인 사상 변모와 그에 따른 작품의 변화를 고찰하였다.

7. 1. 서구 조형법에 의한 디자인

스기우라 고헤이는 동경예술대학 건축가 재학 시절 서구 모던디자인과 서양 사상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기호론, 지각 심리학 등을 연구하며 모던디자인 사고에 경도해 갔다. 1956년 그는 일선미상을 수상하고 그래픽 디자이너로 데뷔하였으며, 당시 그의 서양 사상으로의 경도는 실제 작품을 통하여도 명백하였다.

그는 또 서양 모더니즘의 조형적 면 외에도 서양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특히 서양 음악에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음악과 수리적 사고를 배경으로 탄생한 것이 추상적인 패턴 구성으로 특징지어지는 일련의 ‘음악 포스터 시리즈’이다<Figure 18>.


Figure 18 Sugiura Kohei1963)

또 건축학도로 공간을 직교격자, 미리 단위의 미세한 촌법, 가산, 적분, 미적 등에 의한 정합 세계 등으로 인식하고, 질서화된 세계를 도면화하는 수리적이며 합리적 질서를 몸에 익혔기 때문에 수리적 조형 감각을 지니고 있어서, 이를 표현하는 이지적 디자인을 행하였다. <세계디자인대회> 때 일본을 방문한 울름조형대학의 수뇌부인 한스 구겔로(Hans Gugelot), 오틀 아이허(Otl Aicher), 토마스 말도나도 (Thomas Maldonado)는 이러한 그를 2년 후, 울름조형대학에 객원교수로 초대하여 1964년부터 1967년 사이에 걸쳐 독일의 모던디자인의 핵심지인 울름조형대학에 보냈다.

7. 2. 서구와 일본과의 본질적 차이 인식

스기우라는 울름에서의 경험을 통하여, 모던디자인의 원산지, 산출 근거지인 독일의 예술가, 철학자, 디자이너들의 에너지에 접하고 나니, 그 경험이 아시아에 있을 때는 도리어 보이지 않았던, 동양의 함축된 부분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수업 에피소드를 예로 들며 울름 학생들은 예스, 노의 이진법의 세계에서 엄밀하게 사고하여, 또 그러한 판단을 교수에게도 요구하지만, 스기우라 자신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찰나에 다른 선택안이 떠올라, 언제나 갈림길에 서거나 흔들림을 안으며 형태에 한발 한발 다가서는 디자인 제작 방법론을 실천해왔기에, 울름 학생에 대해서도 ‘그리고’, ‘혹은’, ‘다분히(아마)’ 등 혼돈어로 작품 지도를 할 수밖에 없었다며, 자기 자신의 ‘일본적 감성’, ‘다주어(多主語)적 사유’, ‘애매함으로 치우침’이라는 ‘비-이진법(비이성적)’ 감각을 깨달았고, 자신 안에 깊게 물들어있는 ‘일본적인 풍토’, ‘일본적인 애매함’이라는 것을 강하게 의식하게 되었다(Sugiura, 2001, 317p)고 회고한 바 있다.

또 그가 재직한 1960년대 후반은 울름조형대학이 과도하게 합리성으로 치중한 시기로, 이로 인하여 야기된 일련의 모더니즘적 사유의 위험성을 직접 목격한 것도, 그가 서구 모더니즘에 대해 회의를 하게되고,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는 ‘일본적인 것’, ‘아시아적인 것’을 각성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7. 3. 일본을 넘어 아시아 문화의 포용

1970년대 귀국 후 그는 아시아적 변용 과정에 참여하면서, 아시아적 어법을 찾아내어 디자인에 정착해갔다. 즉 서양 모던디자인이라는 이상과 자신이 존재하는 현실과의 갭을, 그대로 디자인 안에 표현하는 것이 그의 이후의 일관된 제작 태도가 되었다.

또 당시 독일의 디자인과 독일인은 디자인 교육에 있어서 스타 작가에 관심이 없고, 그 시대의 표현을 중시하여 보편성을 향하였다. ‘시대의 표현’이란 동일 문화에 귀속하는 대다수에게 공유되는 스타일을 의미한다. 즉 특정의 누군가가 만든 디자인이 아닌, 많은 디자이너가 높은 수준의 순화된 디자인을 동시에 만들어, 즉 서로가 서로에 겹쳐 가는 디자인을 지향하는 디자인을 의미한다. 이 ‘사회성이 풍부한 익명성’이라는 포인트는 근대사회를 수입문화로 받아들인 일본에는 수입되지 않은 사상이자 문화로 일본인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주제였다. 이 ‘익명성’에 대한 문제의식을 그는 귀국 후 아시아 문화를 통하여 해독해 나갈 수 있었다. 아시아에는 어떤 우수한 작품에도 제작한 작가의 이름을 기입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가 만든 것이 아니라, 신이나 부처의 힘으로 만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이는 그가 일본이라는 틀에 머물지 않고, 결국 더 넓은 아시아인으로 자아 정체성, 지역성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작품 주제 및 방법론이 일본의 틀을 넘어 아시아로 향한 결정적 계기는 1972년도에 유네스코의 공용문자개발 기초조사로 인도 전국을 순회하였던 때로, 이때 그는 문화의 중층성으로 문화충격을 받았다. 즉 아시아에서는 여러 가지 것이 중첩하여 혼재하고, 활기 넘치는 노이즈를 탄생시키고 있는 현장을 목격한 것이다. 그런 중층성, 혼돈이 민중의 미의식으로서 다양한 형태로 도상화된 것을 보고, 자기 자신에게 잠재하는 이러한 아시아인으로서 문화 중층성을 각성하였다. 이와 같은 사고의 변화를 거쳐 1970년대 중층성은 그의 핵심 주제이자 본질이 되었고 주요한 활동 분야인 북 디자인<Figure 19>, 지도<Figure 20>, 다이어그램을 포함하여 디자인 전반에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었다. 그의 이런 제작 방향은 결국 아시아의 도상(圖像)이나 세계관, 그 자체를 주제로 한 논고나 포스터에 날실과 시실처럼 직조되어 1977년 <전진언원양계(傳眞言院兩界)만다라>, 1982년(1963)<아시아의 우주전> 포스터에서 발견된다. 그 외에 대표작인 <동경국제 판화비엔날레> 포스터<Figure 21>, <전통과 현대기술전> 포스터<Figure 22>, 일본적 세계를 추구한 <마(間)> 전시회 포스터 등에서도 모던디자인과는 전혀 다른 표현 언어로 자기 세계를 구축하였다. 또한 그러한 자신의 아시아 조형관을 한국어로도 번역되어 출판된 『아시아의 음, 빛, 환영(アジアの音・光・夢幻』, 『아시아의 책, 문자, 디자인(アジアの本・文字・デザイン)』, 『형태의 탄생(形の誕生)』 외 『다주어적인 아시아(多主語的なアジア)』, 『우주를 두드린다: 불태고, 만다라, 아시아의 울림(宇宙を叩く:火焔太鼓・曼荼羅・アジアの響き)』 등 수많은 아시아 조형론 서적을 출판하였고, 강연10)을 진행하였다. 이처럼 그는 사상이론과 작품 양면에서 아시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히 표출하였다. 이와 같은 그의 사상과 작품의 의의와 특징은 울름 재직 시 재발견한 아시아적 전통이라 할 수 있는 ‘노이즈’, ‘애매함’, ‘중층성’, ‘둘이서 하나’의 사상이며, 모던디자인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세계를 모색하고 구축한 점이다.


Figure 19 Sugiura Kohei(1974)

Figure 20 Sugiura Kohei(1969-73)

Figure 21 Sugiura Kohei(1972)

Figure 22 Sugiura Kohei(1984)
8. 1980년대 사례연구 : 나가이 가즈마사(永井一正)

1980년대 극적으로 일본적 정체성으로 전환한 나가이 가즈마사(永井一正, 1929~)가 디자인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50년대, 동경예술대학 조각과를 병으로 휴학 중에 우연한 기회로 오오와방적(大和紡績)의 광고선전을 담당하면서이다. 당시 동세대 그래픽 디자이너들인 다나카 잇코(田中一光), 기무라 쓰네히코(木村恒久), 가타야마 요시미츠(片山利弘)에게서 모던디자인을 학습하였다. 특히 이론가였던 기무라는 그를 바우하우스 디자인론이나 러시아 구성주의로 이끌며 절대적 영향을 미쳤다. 그는 디자인 제작 초기부터 직선과 곡선, 색면에 의한 구성적 추상조형이 중심인 모던디자인을 추구하였고, 그 후로도 모던디자인의 탈장식성을 엄밀히 실천하며 여분인 것, 필요 없는 것을 모두 잘라내어 본질적인 것만을 명확히 구성하는 작품을 추구해갔다<Figure 23>.


Figure 23 Nagai Kazumasa(1966)

1974년경부터는 평면적인 표현에서 탈피하여 깊이감이 있는 장대한 공간 표현을 성공하여, 모던디자인으로서 받아들인 단순한 평면을 넘어, 심리적인 깊이감이 있는 공간을 추구하는 모색으로 나아갔다<Figure 24>.


Figure 24 Nagai Kazumasa(1965)
8. 1. 자기 찾기와 일본 문화 재인식에 따른 대전환

그의 모던디자인 경향 작품과는 별도로, 그가 ‘일본성’에 대하여 의식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이른 시기였다. 그는 일본 최고의 그래픽디자인 사무실인 <일본디자인센터(日本デザインセンター)>에서 도요타자동차와 아사히맥주 디자인을 담당하였고, 1965년 빨간 아침 해가 인쇄된 병뚜껑의 축적으로 추상적 형태미를 추구한 아사히맥주 포스터 <발매 1년 3억병 .... 아사히 스타이니><Figure 25>가 제1회 바르샤바 국제 포스터 비엔날레에서 금상을 수상하면서 해외에서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이를 계기로 해외 인터뷰와 전시회에 초대되며, 그간 의식하지 않았던 ‘일본적’이라는 해외 평가로 자신의 작품에서 일본성을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대해서 나가이(Nagai, 2001, 284p)는 해외 작품은 원근법적 퍼스펙티브를 지니나, 자신의 공간성은 이를 조금 벗어나 신기하게 보이는 듯하다며, 해외에 강한 소구력(訴求力)을 지니려면 자신 안의 독자적인 것을 해체하여 현대에 살아가는 자신에게 알맞게 재조직해야 한다고 하였으며, 그와 같은 독자적인 것이 자신의 피나 DNA 안에 이미 존재함을 깨달았다고 자기 평가하였다(Nagai, 2001, 285p). 하지만 1980년대 후반까지 그의 중심과제는 모던디자인 안에서 자아와 우주와의 대치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Figure 25 Nagai Kazumasa(1972)

극적으로 실제 작품에서 일본적 조형이 드러난 것은 1988년 <JAPAN>전에 출품된 <거북이><개구리><Figure 26> 등 동물 시리즈부터이다. 이 작품들을 계기로 추상에서 구상으로, 수작업 일러스트레이션으로, 그리고 일본 문화에 대한 탐구로 일대 전환이 이루어진다. 이 색다른 동물표현 창작은 일본 문화의 재검토와 깊은 관련이 있다.


Figure 26 Nagai Kazumasa(1988)
8. 2. 염색 문양 등 장식성의 계승

『나가이 가즈마사 작품집』에 실린 가네코 겐치의 평론(Nagai, 1985, 10p)에 따르면, 1988년 <JAPAN>전의 개구리는 ‘지라이야(児雷也,じらいや)11)’가 타고 있던 묘지 개구리의 특징을 지니며, 각 형태는 문양으로 가득 차 있고 형태 내부를 장식하는 문양은 바로 가부키 세계를 연상시키는 염직 문양과 동일하다고 한다. 거북이도 동일한 세계를 연상시키는 한편, 에도시대(江戸時代) 공예 마키에(蒔絵)에 종종 등장하는 경사스러움을 상징하는 장수거북이 문양이라 평하였다. 이는 모모야마시대의 장벽화(障壁畵)나 린파(琳派)로의 회귀라 할 수 있는 일본 특유의 장식성이다. 그 후로는 일본을 의식한 포스터 연작 시리즈를 제작하고 있으며, 이들 조형에서는 전통사찰이나, 고분벽화에 그려진 현무, 주작 등을 연상시키는 동양의 신화적 세계를 제작하거나, ‘LIFE’를 주제로 한 동물 시리즈를 제작하는데, 주제뿐 아니라 표현에 있어서도 매우 장식적인 일본 미술의 전통을 잇고 있다.

특히 2007년 <오늘의 일본 포스터전>을 위한 홍보 포스터<Figure 27>는 취리히, 베를린, 바르샤바 등 순환 국가별로 포스터를 각각 제작하였는데, 고전적인 일본과 현대적인 요소를 동시를 조형으로서 성취하였다. 일본 그 자체의 이미지를 화려한 비주얼로 표현한 것으로, 나가이 가즈마사의 오리지널 일러스트레이션에 의해 전통에 근거하면서도 새로운 현대적인 조형을 성취하였다.


Figure 27 Nagai Kazumasa(2007)
9. 결론 및 시사점

1950, 60년대 하라 히로무나 가메쿠라 유사쿠는, 서구의 모던디자인을 존중하고 받아들이면서도 문화적 차이로 인해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일본 풍토에 맞게 일본적 문화전통을 반영한 디자인 방법론―명조체와, 심벌에서의 가문의 영향―으로 승화하였다. 나아가 1970, 80년대 스기우라 코헤이와 나가이 가즈마사의 전환은, 서구 수용의 완료 이후에 자신을 재확인하는 일과 일본적, 아시아적 스타일을 취한다는 일은 하나임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일본적 정체성의 표현이라 할 경우, 1단계가 단순한 소재 차용 단계이며, 2단계가 표현에 있어서 전통적 스타일을 취하는 것, 즉 표면상의 양식 차용으로 표현하는 단계이고, 3단계가 사물을 만드는 원리(절차, 순서), 특히 창조의 논리에서 문화적 근거를 재확인하는 단계이다. 진정으로 정체성과 지역성의 표현단계라 할 경우에는 3단계까지 진행된 경우라 할 수 있으며, 이들은 이 단계까지 이른 이들이다. 즉 서양적 디자인 원리, 회화적 법칙 내지 양식에서 이탈하여, 뿌리로서의 일본 문화, 그리고 디자인이라는 것의 본래적 사명, 이들을 종합적으로 인식한 결과, 이제까지의 디자인 세계, 정확히 말한다면 서양 모던디자인에는 없던 새로운 조형론을 기반으로 하는 디자인 조형을 탄생시켰다.

모던디자인이라는 서구에서 탄생한 디자인을 동북아 3국은 시차를 두고 받아들였다. 모던디자인이란 모름지기 지역성, 민족성, 풍토성, 시대성, 계급성을 단지 보편성이라는 강령으로 대체시키는 디자인 운동이다. 하지만 일견 공통되듯이 보이는 모던디자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지역성을 완전히 벗어난 디자인이란 있을 수 없으며, 하물며 (언어적 문제로) 제작자 및 받아들이는 수용자를 그 지역으로 한정하며, 개성의 발현을 중시하는 그래픽디자인 분야에서는 이 경향이 심하다.

일본 그래픽디자인 분야에서 서구에 의한 모던디자인 도입기를 거쳐, 전후 1950년대, 1960년대, 1970년대, 1980년대에는 나름의 자국 정체성 추구로 나아가며, 그 안에서도 그들만의 조형적 특성을 추구하는 작가 사례를 고찰하였다.

본 연구는 일본에서 모던디자인을 선구적으로 받아들였던 작가주의 디자이너들이 자신의 정체성 찾기의 일환으로 일본적 미의식, 디자인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변모하는 사례들을 통해 그 일본적 그래픽디자인의 정체성 찾기를 고찰해 보았다. 그 결과 이식이라는 형태로 제3국(이번 경우에는 일본)에 수용된 모던디자인은, 수용이 완료되어 정착된 이후에는 작가는 자신 안의 정체성 탐구로 향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그들에게 일본, 아시아 등 원점에 다시 되돌아가는 것, 이는 자신을 재확인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고, 그것이 자신의 디자인 원점이 되고자 일본적 작품을 시작하였다. 이는 한국에서도 동일하리라 유추할 수 있다. 정체성 추구 과정을 테마로 한 연구를 대상과 국가를 달리하여 후속 연구로서 지속하고자 한다.

Notes

1) 1936년에 결성된 건축가와 공예(제품디자인) 관계자 단체로 잡지『신건축』을 간행하였다. 독일공작연맹을 본받아, 건축을 포함한 조형 행위 전반을 ‘공작’으로 보고, 건축의 틀을 넘어, 공예부터 도시에 이르기까지를 대상으로 하는 종합적 시각을 지녔다.

2) 1928년 상공성(商工省)은 세계공황으로 악화한 경제에 대해서, 각지의 산업을 디자인으로 활성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국립연구지도기관 「공예지도소(工芸指導所)」를 설립하여, 제품의 디자인을 양산에 맞게 합리적으로 하는 다양한 시도를 행하였다. 1952년에는 통상산업성 산하 공예기술원 산업공예시험소로 명칭을 바꿨다.

3) 동경 올림픽에서 올림픽 사상 처음으로 픽토그램을 제시하여, 픽토그램을 통하여 전 세계가 소통하는 유니버설 입장을 견지하였다.

4) 일본 고유의 대대로 내려오는 집안을 상징하는 심벌 마크의 전통.

5) 가메쿠라 유사쿠는 1989년부터 1994년까지 5년에 걸쳐서 시류에 따르지 않고, 뉴스와 상관없이 자신의 안목으로 선정한 세계의 그래픽디자인, 아트, 일러스트레이션을 소개하는 계간 디자인잡지를 간행하였다.

6) 예를 들어, 일본의 대표적 인더스트리얼 디자이너인 후카사와 나오토(深沢直人)는 수많은 해외 메이커의 디자인을 담당했고, 일본 국내 메이커인 야마기와(ヤマギワ)의 조명디자인을 루이지 꼴라니(Luigi Colani)나, 에트레 소트사스(Ettore Sottsass) 등이 디자인하는 등, 이제 제품디자인 영역에서는 국가 간 경계가 흐려지고 있다.

7) 영문의 고딕(Gothic)서체는 세리프가 있는 독일풍 서체이다. 다만 고딕이라는 단어가 일본에 들어올 때 최초의 일본어 번역이 잘못되어, 일본어 고딕서체는 세리프가 없는 산세리프체를 지칭하게 되었다. 이는 일본어 번역을 그대로 받아들인 한국도 마찬가지여서, 즉 영문 고딕서체:세리프체, 한국·일본의 고딕서체:산세리프체라는 어긋남이 발생하였다.

8) 1951년에 최초의 그래픽 디자이너의 직업별 단체, 日本宣傳美術家協會를 설립하여 1970년 해산을 결정하였다. 특히 신진 등용문인 공모전을 1953년부터 개최하여, 일선미상을 받은 디자이너는 화려하게 그래픽디자인계로 등장할 수 있어, 전국의 미대 학생 및 신진작가들이 참여하였다.

9) 가메쿠라유사쿠(亀倉雄策), 고노 다카시(河野鷹思), 하라 히로무(原弘), 하야카와 요시오(早川良雄), 야마시로 로쿠이치(山城陸一), 이토겐지(伊藤憲治), 오하시 마시시(大橋正), 폴 랜드의 8인이 니혼바시에 있는 다카시마야백화점에서 처음으로 상업포스터전을 개최하였다.

10) 1995년 4월부터 6월까지 <NHK 인간대학>에서 형태의 탄생 연속 강좌를 진행한 바 있을 정도로, 그의 아시아 조형 사상 강연은 유명하다.

11) 가부키에 등장하는 괴도. 가부키에서는 <지라이야호걸이야기(児雷也豪傑 物語)>라는 제목으로 1852년에 초연되었다. 호걸이야기(児雷也豪傑 物語)>라는 제목으로 1852년에 초연되었다

Acknowledgments

This work is a further development of part of my PhD the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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