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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y on the emergence of the modern design subject in Korea
한국에서의 근대적 디자인 생산주체의 출현
  • Chang-Sup Oh : Konkuk University

This paper examines design subjects who existed before industrial designer emerged as a profession. Specifically, the paper shows the possibilities and limitations of these design subjects through a discussion on the significance of their actions. Such an approach can be helpful to gain a deep understanding of Korean design history. Design subjects can be created by discourse acts and changes of social, economic, and political situations. By the 1960s, the subject of "industrial designer" emerged in earnest in South Korea. However, design-related subjects and various movements existed in the previous period. The subjects are some craftsmen in Yiwangjik art workshop and some people who returned to Japan after studying design. This study examines these institutions and personalities through the method of critical analysis. As a result, it is known that the tradition of craft did not naturally develop into modern industrial design in South Korea due to the fact that we accommodated modernity under colonial rule.

Abstract, Translated

본 논문은 산업디자이너들이 출현하기까지 어떠한 근대적 디자인 생산주체들이 있었는지, 디자인의 맥락에서 그들의 활동이 가지는 의의와 한계는 무엇이었는지를 고찰함으로써 한국 디자인 역사에 대한 이해를 확장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근대적 디자인 생산주체는 전통적 장인과는 달리 현대 산업디자이너의 성격을 분유한 주체로서, 사회, 경제, 정치적 상황의 변화와 그에 따른 담론 작용 속에서 탄생하였다. 우리의 경우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산업디자이너라는 자의식을 가진 주체가 본격적으로 출현하였지만, 그 이전 시기에도 그러한 성격을 분유한 주체와 다양한 움직임들이 있었다. 공업전습소와 이왕직미술품제작소에서 활동했던 이들이나 일본 유학을 통해 도안을 학습하고 활동했던 임숙재, 이순석 등이 바로 그들이다. 본 연구는 이들 기관과 인물들을 비평적 서술의 방법으로 분석 고찰하였다. 그 결과 우리의 경우 일부 서구 나라들의 경우와 다른 고유한 매개적 주체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는 근대 수용의 특수성에 주요한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다.

Keywords:
modernity, design subject, korea design history, 모더니티, 디자인생산주체, 한국디자인사.
pISSN: 1226-8046
eISSN: 2288-2987
Publisher: Korean Society of Design Science
Received: 10 Aug, 2011
Accepted: 22 Nov, 2011
Printed: Feb, 2012
Volume: 25 Issue: 1
Page: 57 ~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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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논문은 2010년도 건국대학교 학술진흥연구비 지원에 의한 논문임

Citation: Oh, C. (2012). Study on the emergence of the modern design subject in Korea. Archives of Design Research, 25(1), 57-68.

1. 서 론

산업디자인을 삶에 자리하는 인공물, 특히 제품의 미학적 존재방식과 인터페이스를 결정하는 활동이자 그 산물이라고 정의한다면, 그러한 활동주체, 즉 제품의 기능과 미학적 존재방식을 결정하는 주체를 우리는 산업디자이너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산업디자이너라는 주체는 언제 어떻게 출현하였을까?

푸코(Michel Foucault)는 주체를 담론 현상의 산물이라고 보았다. 실제로 그는 18세기말 임상의학 담론의 출현과 그에 따른 의료 환경의 변화를 주목하면서 근대적 의미의 의사라는 새로운 주체가 어떻게 등장하였는지를 고찰한 바 있다.1) 담론은 현상과의 관계 속에서 출현하고, 구체적인 현상에 영향을 미치며, 새로운 주체들을 구성해낸다. 만일 푸코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참고한다면 산업디자이너라는 주체 역시 관련 담론의 생성, 그리고 그와 연동하는 물질적 환경의 변화 속에서 출현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산업디자이너의 출현은 산업화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자본주의의 확장과 과학 기술의 발전, 그리고 그에 따른 대량생산방식의 출현으로 제작과 분리된 기획 활동이 하나의 독립된 직업 영역으로 자리하기 시작하였다. 산업디자이너라는 새로운 주체는 이러한 환경 변화의 결과로 출현하였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를 보면 이야기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쇄국정책과 개항, 36년의 일제강점기, 해방정국의 혼란, 6.25전쟁 등과 같은 특수한 사회, 정치적 사건들로 인해 본격적인 산업화의 시기는 늦어졌다. 때문에 산업디자이너라고 부를 수 있는 디자인 생산주체의 등장 역시 그만큼 늦어졌다. 역사적으로 보면 자의식을 가진 산업디자이너는 기계적 생산방식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1960년대에 이르러서야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산업화 이전 시기 동안 일상에서 사용되던 물건들은 수공예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이러한 이유에서 공예는 산업디자인의 기원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그런데 물건 만들기로서의 공예, 즉 현상으로서의 공예는 늘 있어왔지만, 그러한 활동이 ‘공예’라는 명칭으로 불리며 새롭게 지각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에 이르러서였다. 공예의 발견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러한 현상은 전통적 수공예와 산업디자인의 출현 사이에 자리하면서 산업디자이너라는 새로운 주체형성의 매개적 역할을 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일본에서 유입될 당시 ‘공예’라는 용어는 수공예적 생산방식뿐만 아니라 공업적 생산방식까지를 포함하는 개념으로 유통되었다. 하지만 20세기 초를 지나면서 공예는 손에 의한 제작, 질이 우수한 산물이라는 의미를 띠게 된다. 이러한 의미 변화는 기계에 의한 물건 만들기가 도입되면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서구의 경우도 그러했지만, 초창기 기계에 의해 만들어진 제품들의 질은 손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보다 우수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예는 질 좋은 제품, 그리고 그것을 만들어내는 우수한 기술을 의미하였던 것이다.

19세기 말에 유입된 ‘미술’이라는 용어 역시 공예의 의미 변화에 영향을 끼쳤다. 초기에 미술은 문명화된 근대적 기술을 의미하였다. 이러한 의미가 오늘날과 유사한 의미로 이해되기 시작한 것은 1910년대 이후의 일이다. 물론 이러한 의미변화가 일시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때문에 의미변화가 시작된 이후에도 한동안 미술은 앞선 최신의 기술이라는 의미의 자기장과 공명하면서 유통되었다. 당시 잘 만들어진 수공예 명품이 ‘미술공예’라는 이름으로 불린 것은 이러한 맥락과 관계가 있다.

본 논문은 산업디자이너들이 출현하기까지 어떠한 근대적 디자인 생산주체들이 있었는지, 그리고 그들의 활동이 가지는 의의와 한계는 무엇이었는지를 고찰함으로써 한국 디자인 역사의 이해를 확장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논문의 목적으로 볼 때 1907년에 설립된 공업전습소와 1908년에 만들어진 한성미술품제작소는 주목할 만한 기관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물건 만들기로서의 공예의 의미 변화에 이 기관들이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산업화 이후 제품생산에서 산업디자이너가 담당하던 역할의 전조적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산업디자이너의 출현이라는 맥락에서 또 하나 주목해 보아야하는 개념은 ‘도안’이다. 도안은 물건 만들기에 있어서 그 내용과 방점이 변화하였음을 암시한다. 도안이라는 개념은 1900년 전후에 이 땅에 들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2) 하지만 본격적으로 이 개념이 유입된 것은 일제강점기 일본 유학파들을 통해서였다. 본 논문에서는 담론의 차원에서 도안에 대한 나름의 이해를 표명했던 임숙재와 이순석의 사례를 통해 수공예에서 산업디자인으로의 이행 과정에 자리한 도안의 의미를 고찰하고 있다.

본 논문은 산업디자이너의 출현 이전에 어떠한 근대적 디자인 생산주체들이 있었는지를 고찰하고 있다. 연구목적에 따라 연구자는 당시에 발간된 신문이나 잡지, 그리고 이후에 이루어진 관련 연구들을 통해 내용을 파악하였고, 그 내용을 비평적 서술의 방법으로 분석하였다. 논문에서 근대적 디자인 생산주체라 함은 인공물의 미학적, 기능적 존재방식을 결정하는 현대 산업디자이너의 성격을 일정 부분 분유한 주체를 의미한다. 전통적인 물건 만들기의 방식은 근대성의 유입과 함께 변화하였고, 그에 따라 관계하는 주체들의 모습 또한 변화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 연구에서의 근대는 특정한 시기를 지칭하는 시간적 개념이라기보다는 전통이 해체되는 과정에 작동한 하나의 힘으로서의 의미를 보다 강하게 함축하고 있다. 시간적으로 보았을 때 전통적 물건 만들기의 주체와는 다른 디자인 생산주체들은 구한말, 그리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그 움직임은 해방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본 논문이 구한말이나 일제강점기에 머물지 않고 1960년대까지를 다룬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2. 공업전습소와 이왕직미술품제작소

근대적 디자인의 출현은 공업화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일반적으로 식민지 조선에서의 공업화는 1930년대 전시경제체제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1920년대나 1930년대 초반부터 단계적으로 공업화가 이루어졌다는 주장들이 최근 나오고 있다.3) 우리가 이러한 최근의 주장들을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그 시기는 1920년대 전후를 넘어서지 못한다. 더욱이 1920년대 전후의 공업화라는 것은 매우 제한적으로 이루어졌고, 그 내용 역시 단순한 경공업차원에 머물렀다는 점에서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의미의 산업디자인 생산주체가 형성되기 위한 물적 토대는 마련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이로 인해 대량생산되는 사물의 존재방식을 결정하는 활동으로서의 산업디자인과 그러한 디자인을 생산하는 주체의 출현은 미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디자인 생산주체와의 관계에서 예외적인 현상들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1907년 ‘공업전습소’4)가 만들어지면서 근대적 기술교육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그 하나일 것이다. 공업전습소에서는 조선말기의 궁중화가였던 조석진(趙錫晉)이 도화과목을 가르쳤고, 1912년에는 연구기관인 ‘중앙시범소’가 기관 내에 만들어져 김진갑, 백태원 등이 활동하였다. 여기에는 ‘염직과’, ‘도기과’, ‘금공과’, ‘응용화학과’, ‘목공과’등이 있었는데, 특히 목공과의 교과과정에 투영도, 가구도, 가구제작 및 의장, 가구도 및 설계도, 설계제도 등의 과목이 있었던 것은 디자인의 맥락에서 주목할만한하다.5) 왜냐하면 이러한 과목들은 산업디자이너의 표현방법인 제도와 투시법이 사물의 제작에 활용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공업전습소에서는 전통적인 물건 만들기의 맥락에서 벗어나 근대적 제작방식과 양식들이 소개되고 교육되었다. 물론 설립 초기에는 수공예 기능 인력 양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하지만 이후 관립경성 공업학교, 경성공립공업학교로 명칭이 바뀌면서 점차 기술자 양성을 위한 체제로 전환되었다. 이 기관에서 교육받은 이들은 이후 근대 산업을 수용하는데 참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실업 교육의 확대에도 기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변화의 내용이 일본적인 것의 수용이라는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한계를 드러내었다. 때문에 최공호는 “공예 전통의 원형이 손상되고 일본화가 촉진되는 등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6) 했다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비판은 대상과 거리를 둔 시선, 즉 대상을 관조하는 관찰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가능한 것이다. 그 시선에는 전통적 가치의 순수성이 그대로 유지되기를 바라는 낭만적 이해가 가득하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우리의 시선을 그 당시 현실을 살았던 이들의 시선과 잠시 겹쳐본다면,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식민지 상황과 절박함을 외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교육주체가 식민지 지배자였다는 점, 피교육자의 상당수가 일본인들이었다는 점, 사회적으로는 근대적 공업과 기술에 대한 관심과 열망이 컸다는 점, 근대적 제도와 산물들의 유입됨에 따라 생활 방식이 급변하던 시기였다는 사실 등은 이 기관의 의미를 판단할 때 무시할 수 없는 조건들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전통적 공예의 모습이 오염되지 않고 유지되기를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욕심일 수 있는 것이다.

아쉬운 부분이 없지 않지만 공업전습소는 변화에 기여하였다. 무엇보다 디자인사의 맥락에서 이 기관은 공업적 기계생산에 의한 물건 만들기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결과적으로 ‘공예’가 공업적 기계생산이 아닌 수공예적 생산과 관계된 활동이라는 이해를 만들어내는 역할을 하였다. 실재로 1940년대로 가면서 이 기관의 교육내용은 토목, 전기, 기계, 광산, 건축 등으로 변화하였는데, 이는 전통적인 물건 만들기인 수공예가 그로부터 분리되었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두 번째로 공업전습소에서는 제작과 분리된 디자인 활동의 독립성이 탐색되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이것은 후기에 와서 공업적 기계생산이 다루어지면서 자연스럽게 나타난 현상이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이와 관련해서는 공업전습소와 유사한 시기에 만들어진 한성미술품제작소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08년 대한제국황실에 의해 설립된 ‘한성미술품제작소’는 1911년부터 1922년 사이 ‘이왕직미술품제작소’라는 이름으로 활동하였고, 일본인에게 양도된 1922년부터 폐쇄된 1930년대 후반까지는 ‘주식회사조선미술품제작소’로 불렸다. 이왕직미술품제작소는 “제조법은 비록 개량할지라도 의장(意匠, Design)은 총(總)히 조선식으로 할 것”7)이라는 그 기본 방침에서 알 수 있듯이,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나전칠기 제품이나 도자기 등의 디자인을 전통의 연장선상에서 생산하였던 미술품 제작 기관이었다.

일제강점시기에 이 기관이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의 오리엔탈리즘적 시선과 무관하지 않다. 일제는 서구가 그들을 바라보았던 것과 동일한 시선으로 식민지 조선을 바라보았고, 같은 맥락에서 가장 조선적인 것들을 찾아 나섰다. 전통적인 나전칠기나 도자기 등을 주목하였던 그들의 움직임은 이러한 맥락의 연장선상에 자리하는 것이다. 그들의 오리엔탈리즘적 시선은 전통적인 맥락에서 일정한 기능을 하던 사물들을 이국적이고 신기한 조선의 미술품이나 기념품으로 바라보았고, 또 그러한 시각으로 그 사물들을 소비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1926년 경성부교육회(京城府敎育會)에서 발간한 <경성안내>에 실린 글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미술품제작소:이왕직의 경영으로서 조선 특유의 미술품 조도품(調度品)8)을 제작했는데 그 후에 경영을 민간으로 넘겨서 지금은 주식회사로 되어있다. 특별히 대사현(大仕縣)인 것은 아니지만 조선인이 어떠한 방면에 취향을 갖고 있는지를 알기에는 적합한 곳이다. 식기(食器), 발식구(髮飾具), 혼수용구, 기타 일용품을 보면 일반적인 조선풍습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곳에서 선물을 구입하면 된다.”9)

이 글은 이왕직미술품제작소에서 생산한 식기, 칠기, 도기 등을 일상 삶의 맥락에 자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관광기념품이나 선물용품의 맥락에서 이해하고 있다. 1912년 일본여행협회 조선지사가 설립되면서 일본인들의 조선 관광은 본격화되었다. 일본은 “‘한국의 저녁’이라는 프로그램을 마련해 일본 주요 도시의 각 극장에서 상영하는 등 식민정책의 일환으로 일본 국내 거주자들의 한국여행 유치를 위해 노력”10)하였다. 이왕직미술품제작소는 이러한 맥락 속에 자리하면서 일본관광객들을 위한 관광기념품 제작소로 호명되었던 것이다.


[그림 1] 이왕직미술품제작소

이왕직미술품제작소에서는 뛰어난 식기, 칠기, 도기 등을 생산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제작소의 의미를 이러한 점에서만 찾으려 해서는 안된다. 한국 디자인사의 맥락에서 오히려 주목해야 할 부분은 ‘제작실’과 ‘도안실’을 분리하여 운영하였다는 점에 있다. 이는 생산과 분리되어 하나의 독립된 활동으로서 디자인이 자리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에이드리언 포티(Adrian Forty)는 그의 <욕망의 사물: 디자인의 사회사>에서 18세기 웨지우드(Wedgwood)도자기회사를 같은 이유에서 주목한 바 있다. 그에 의하면 웨지우드사 역시 디자인과 제작을 분리하여 도자기를 생산하였는데, 이는 새로운 유통방식의 도입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 것이었다. 웨지우드사가 취한 새로운 유통방식은 ‘선주문 후제작 방식’이었다. 이것은 재고를 줄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수요에 따른 생산을 함으로써 매출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이 방식이 효과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주문하기에 앞서 구매자가 원형을 먼저 경험할 수 있어야 했다. 웨지우드는 생산될 제품의 디자인 원형을 만드는 존 플랙스만(JohnFlaxman)과 같은 미술가를 고용하여 제품의 원형을 디자인하게 하였다. 이렇게 제작된 원형은 자체에 마련된 쇼룸에 전시되었고, 판매되는 상품들을 담은 카탈로그도 제작되었다. 1750년대에 이미 원형을 만드는 ‘모델러’라는 사람이 생산자와 분리되어 존재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오늘날 산업디자이너11)와 같은 존재들이었다. 고객은 쇼룸이나 카탈로그를 통해 모델러에 의해 디자인된 안을 보고 주문을 하였으며, 그 주문에 따라 실재 생산이 이루어졌다. 이 시스템에서는 고객이 주문한 내용(디자인된 안)과 실제 제작품이 동일한 모습으로 생산되는 것, 즉 균질한 생산이 무엇보다 중요하였다. 쇼룸이나 카탈로그를 통해 자신이 선택하고 주문한 내용과 다른 제품이 주어진다면 구매자는 그 제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웨지우드는 이러한 문제를 기술개발과 생산시스템의 효과적 관리를 통해 해결해 나갔다.12)

웨지우드사의 모델러가 산업디자이너의 원형으로 이야기되는 이유는 제작과 분리된 디자인 업무를 담당한 새로운 주체였기 때문이다. 이왕직미술품제작소 역시 디자인을 사전에 결정하고 제품을 생산하였다는 점이 주목할 만한데, 제작실과 분리된 도안실의 존재가 이를 증명한다. 하지만 이왕직미술품제작소의 디자인 활동은 웨지우드사의 방식과 동일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이왕직미술품제작소에서 이루어졌던 디자인은 사물의 표면 장식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이드리언 포티가 주장하는 것처럼 ‘생산과 분리된 고유한 원형의 창조’활동에 초점을 두고 산업디자인 활동을 정의한다면 이왕직미술제작소 도안실에서 일했던 이들은 산업디자이너의 초기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들은 디자이너로서의 자의식을 가진 주체도 아니었고, 그들이 행했던 도안 역시 전통적 내용을 답습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으며, 제품의 제작방법도 여전히 수공예적 방식에 머물렀다는 한계를 가지지만 말이다.

3. 도안을 매개로 한 디자인 생산주체

일제강점기 동안 일본 유학을 통해 관련 내용을 습득한 주체들이 있었다. 임숙재, 이순석, 한홍택 등이 대표적인 인물인데, 이들이 일본에서 학습한 주된 내용은 ‘도안’이라 불리는 것이었다. 그들이 다녔던 학교의 학과 명칭 역시 ‘도안과’였다. 그들의 글과 활동 내용들을 보면 당시 도안이 무엇이었으며, 도안과 관련된 내용들을 그들이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를 어렴풋이 알 수 있다.

임숙재는 휘문고보를 졸업한 후 동경미술학교 도안과에 입학하여 1928년 3월 졸업하였다. 동경미술학교 졸업 작품으로 그는 서책용 장식대를 디자인하였다. 이 작품은 일본의 전통적인 공예제품을 바탕으로 거기에 들어가는 문양을 도안의 이름으로 디자인한 것이었다. 임숙재는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한 해인 1928년 8월 16일 <동아일보>에 “공예와 도안”이라는 글을 게재하였다. 이 글은 그의 생각뿐만 아니라 당시 공예와 도안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는지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공업은 예술의 위대한 힘을 빌게 된 고로 공예라 하는 명칭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술의 색채를 일반 공업 상에 응용하자면 도안의 방법이 무(無)하고는 되지 않을 줄 압니다. 그러면 도안이라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즉 진성미술을 응용하야 제반공예미술로 인도하여 주는 한 소개물에 지내지 못하는 고로 도안의 성질을 들어 말하자면 회화조각의 진성미술도 아니요 작성된 공예미술도 아니오 소개하는 의장도형물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고로 참으로 도안가가 되자면 회화의 동양화나 서양화는 물론이오 조각에도 목조, 소조, 금공, 칠공, 염색, 직물자수, 자기인쇄 그 외 백방의 수공의 실물제작에까지 일반상식이 풍부한 자가 아니면 참 곤란할 것 갓습니다. 그리고 도안의 정의를 들어 말하겠습니다. 우리 의식주에 관한 제반물건과 기물에 대하여 자기두뇌에 착상되는 형태와 문양과 색채 등을 어떠한 기물 상에 표현시킬 것을 소위 도안의 정의라고 하겠습니다.”13)

그는 여기서 공예를 공업과 예술의 결합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런데 그가 이야기하는 결합방식은 “예술의 색채를 공업 상에 응용”하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공업과 예술의 결합은 도안이라는 것을 매개로 이루어지는데, 도안이란 화화나 조각과 같은 순수미술(그는 진성미술이라고 표현함)도 아니고 작성된 공예미술도 아니다. 여기서 작성된 공예미술이란 사물을 제작하는 것, 혹은 그렇게 제작된 사물을 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임숙재는 도안이 이러한 움직임과 분명히 구분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도안은 사물을 ‘소개하는 의장도형물’로서, 그의 말대로 기물 위에 표현되는 형태와 문양, 색체 등을 의미한다. 이는 오늘날 제품을 기획하는 산업디자인에서처럼 사물 자체의 존재방식을 사고하고 결정하는 움직임이기보다는 그가 진행 한 작업에서처럼 사물의 표면을 장식하기 위해 동물이나 식물의 이미지를 추상화하는 작업과 그것을 사물에 적용하는 움직임에 가까운 것이다.


[그림 2] 임숙재의 “공예와 도안”(동아일보 1928년 8월 16일)

위 글에서 임숙재는 문화가 발전하려면 ‘도안기술가’가 많이 나와서 조선 상공계의 일대 혁신이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공예학교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그가 이야기하는 ‘도안기술자’는 성격은 다르지만 현재의 맥락에서 보면 디자이너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주목할 부분은 간간히 산업과의 관계를 언급하거나 기능과 미의 기능적 결합을 이야기하는 대목이 등장하는 점인데, 이는 근대적 의미의 디자인에 대한 전조적 징후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디자인 관련 내용을 습득한 또 다른 주체로 이순석을 들 수 있다. 이순석은 1926년 동경미술학교 도안과에 입학하여 1931년 졸업하였다. 졸업당시 그는 15점의 책표지 디자인을 졸업 작품으로 제출하였다. 그 작품들의 성격을 보면 아르누보 스타일의 장식적 디자인이나 회화적으로 표현된 작품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기하학적 조형을 이용해 추상적으로 표현한 작품도 있었다.

기하학적 조형은 기능적이고 탈 전통적인 조형언어로 당시 유럽에서 일고 있었던 아방가르드 운동의 결과물들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기하학적 언어를 사용한 이순석의 책표지 디자인은 이와 외형적 유사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외형적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아방가르드와 직접적 관계속에서 작품이 만들어진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물론 당시 일본에는 그러한 영향 속에서 작업하고 있던 이들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 미즈타니 타케히코(水谷武彦)를 들 수 있는데, 그는 1927년부터 1년간 바우하우스에서 건축을 공부한 후 일본으로 돌아와 동경미술학교에 재직하며 활동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그는 1930년부터 <도안과>가 아닌 <건축과>에 재직했기 때문에 이순석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14) 이렇게 직접적 관계성을 찾기 어렵다면 이순석의 기하학적 디자인은 우발적 산물일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실재로 이순석은 이후에 연관된 작업을 보여주지 않았다.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한 해인 1931년, 이순석은 <동아일보사>에서 ‘공예도안개인전’이라는 전시회를 열었다. 이는 국내 디자인 관련 전시로 최초였다는데에 그 의미가 있다. 그는 화신상회에서 디스플레이 디자인을 하기도 하였고, ‘락낭파라’라는 찻집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찻집은 그가 동시대의 문화적 분위기와 일정부분 공명할 수 있었던 주요한 창구였다. 1933년 10월 1일자 <삼천리>에 박옥화(朴玉花)가 쓴 “인테리 청년 성공 직업(1)”이라는 글에는 그의 찻집에 대한 자세한 묘사가 실려 있다.

“대한문(大漢門)압흐로 고색창연(古色蒼然)한 녯궁궐을 끼고 조선(朝鮮)호텔 잇는 곳으로 오다가 장곡천정(長谷川町-현재의 소공동)초입(初入)에 양제(洋製)2층(層)의 숙선(潚洒)한 집 한 채 잇다. 입구에는 남양(南洋)에서 이식(移植)하여 온드시 녹취(綠翠)흐르는 파초가 노엿고 실내에 드러서면 대패밥과 백사(白沙)로 석근 토질 마루 우에다가 「슈-벨트, 데-도릿지」등의 예술가 사진을 걸엇고 조흔 뎃산도 알맛게 걸어 노아잇서 엇전지 실내 실외가 혼연조화(渾然調和)되고 그리고 실내에 떠도는 기분이 손님에게 안온(安穩)한 침정(沈靜)을 준다. 이것이 「락낭(樂浪)팔라」다. 서울 안에 잇는 화가, 음악가, 문인들이 가장 만히 모히고 그리고 명곡연주회(名曲演奏會)도 매주 두어 번 열니고 문호(文豪)「꾀-터」의 밤 가튼 회합(會合)도 각금 열니는 곳이다. 이 집에서는 맛난 틔(茶)와 「케-크」「푸룻」등(等)을 판다. 이 다실(茶室)의 주인이 년전(年前)동경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를 마춘 화가 이순석씨(李舜石氏)다. 씨(氏)는 30을 상하(上下)하는 청년예술가다. 그래서 그의 2층에는 「아토리에」(화실)을 꾸미어 노코 제작에 늘 분주한다. 이 집의 감촉은 마치 파리(巴里) 「리정(裏町)」에서 정절(淸節)을 직혀가며 전심예도(傳心藝道)에 정진(精進)하는 예술가의 화실가튼 늣김을 준다.”15)

2층에 아뜨리에가 있다는 박옥화의 묘사로부터 락낭파라를 운영하던 시기에도 이순석은 관련 작업을 계속적으로 하고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이순석이 운영했던 락낭파라는 일종의 다방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당시 다방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다방과는 그 성격이 많이 달랐다. 글에서도 알 수 있지만 그곳을 찾는 이들은 화가, 음악가, 문인들이었고, ‘문호 괴테의 밤’과 같은 회합이나 ‘명곡연주회’가 그곳에서 열렸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락낭파라의 성격은 오늘날의 문화공간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16) 아늑한 인테리어에 슈베르트 사진이 벽에 걸려있고, “틔(茶), 케-크, 푸룻”같은 이국적 용어가 유통되던 공간, 그 공간은 당시로서는 근대와 서구를 경험할 수 있는 첨단의 예술 공간이었던 것이다.

1936년, 이순석은 락낭파라를 접고 노고산 자락에 여우를 기르는 목장인 양호장을 개장하였다. 이는 당시 여우목도리의 유행과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939년, 사치품 금지령으로 양호장을 닫고 그의 형이 운영하던 이명래 고약에서 일을 도왔다. 그리고 얼마 후 해방과 함께 미군정이 시작되었다. 1946년 이순석은 미군정청 문교부 예술고문으로 근무하게 된다. 같은 해 서울대학교 예술대학이 설립되고 미술학부에 <도안과>가 만들어지면서 그는 도안과의 교수로 임용되어 후학을 양성하기 시작하였다.17)

서울대학교에서 이순석은 미술의 맥락에서 도안 위주의 교육을 진행하였다. 그에게 미술은 대상의 가치를 고양시키는 일종의 지향점이었다. 때문에 그는 자신의 작업이 미술의 맥락에 자리하기를 원했다. 이순석은 1961년 10월 22일자 <동아일보>에 ‘생활과 디자인’이라는 글을 기고한다. 이 기고문에서 일상생활과 디자인과의 관계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이순석은 생활 속의 공예가 미술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공예미술’보다 격이 낮은 것으로 인식하였다.18) 이러한 그의 인식은 유교적 전통 속에서 구체화된 사농공상의 이해방식이 작용한 결과로 보인다.

이순석은 십장생과 같은 전통적인 모티브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이러한 관심은 서구문물을 수입할 당시 일본이 경험한 내용에 대한 그의 이해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메이지유신 이래 우끼요에 같은 일본의 회화나 공예품들은 오리엔탈리즘적 시선에 기대고 있던 서구인들에 의해 환영받았다. 이로 인해 종교적 목적으로 제작된 사물이나 이미지는 물론이고 일상에서 사용되던 사물들이 미술품이라는 이름으로 호명되어 박람회 등을 통해 팔려나갔다. 당시 서구로부터 환영받을 수 있었던 유일한 일본의 것은 바로 이러한 미술품으로 호명된 전통적인 산물들이었다. 일본에서 일정한 공부 기간을 가졌던 이순석이 이러한 내용을 몰랐을 리가 없다. 일본의 전통적 산물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순석에게 조선의 전통적인 것은 당시 일본을 포함한 외부로부터 환영받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소재였던 것이다.

이순석에게 기능을 가진 사물, 특히 공예품을 주목하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었다. 그림이나 조각이 아닌 공예품을 대상으로 주목함으로써 그는 동시대의 예술가들과 다른 새로운 영역에 스스로가 자리한다고 이해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순석은 ‘대상으로서의 공예’가 ‘방법론으로서의 도안’의 과정을 거쳐 근대적인 것이 될 수 있고, ‘지향점으로서의 미술’을 통해 가치 있는 것으로 변화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그는 자신을 미술의 차원에 자리하는 공예가이자 작가로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19)

4. 산업디자이너의 출현

1926년 11월 30일, JODK 경성방송국이 설립되어 이듬해인 1927년 2월 16일에 첫 라디오 방송을 송출하였다. 일제강점기하에서 개국된 라디오 방송에 대해 일제는 조선인들의 무지를 계몽하고 문화를 발전시키기 위함이라고 주장했지만, 실상은 당시 이 땅에 살고 있었던 일본인들에게 문화적 혜택을 제공하기 위한 목적과 일제의 식민 통치를 원활하게 하기 위한 의도가 배경에 자리하고 있었다. 당시의 라디오 방송은 수신기를 등록하고 청취료를 지불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등록된 수신기 수는 개국 당시 총 1,227대(일본인 1,023대, 한국인 254대)였으며, 1932년 말에 이르러는 20,565대였다. 지역별로는 전체 수신기의 60%이상이 경성에 있었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비싼 수신료 때문에 도청을 하는 사례가 많아 실제 수신기 보급률은 등록대수보다 훨씬 높았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20)

라디오방송이 시작된 것은 1927년도의 일이지만, 국산 최초의 라디오 수신기는 1959년 11월 <금성사>에 의해 생산된 ‘A-501라디오’로 알려져 있다.21)독일인 기술고문 헹케(H.W. Henke)의 지도하에 개발된 이 라디오는 진공관식으로, 약 60%의 국산 부품이 사용되었다. 금성사는 이후에 다양한 라디오 제품들을 출시하였다. 당시 신문광고를 보면 최초의 라디오를 생산한지 불과 3년만인 1962년에 A-501라디오 이외에도 8종의 라디오가 더 생산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림 3] 금성 라듸오 A-501 신문광고22)

라디오 생산은 본격적인 근대적 의미의 산업디자이너의 출현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금성사에서 처음 만들어진 A-501라디오는 박용귀에 의해 디자인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재학 중이었던 1958년 지금의 LG화학주식회사의 전신인 락희화학에 입사하여 20여 년간 산업디자이너로 근무하였던 인물이다. 1959년 금성사가 설립되고, 그해 6월 ‘의장실’이 만들어지면서 박용귀는 금성사의 인하우스 제품디자이너로 활동하게 된다.23)

박용귀는 앞서 살펴본 이왕직미술품제작소에 자리하던 디자이너나 초기 광고를 디자인했던 이들과는 다른 의미의 디자이너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이미지나 공예품이 아닌 기계에 의해 대량생산되는 산업 생산품의 존재방식을 고민했던 말 그대로 근대적 의미의 산업디자이너였다. 박용귀가 A-501라디오를 디자인하던 시기는 해방과 미군정, 그리고 한국전쟁 시기를 지나면서 점차 산업적 토대, 즉 제품 생산이 가능한 토대가 마련되기 시작하던 때였다.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환경이 마련되기 시작하면서 산업계는 산업디자이너를 요구하였던 것이다.

박용귀가 금성사에 입사할 당시에 산업의 요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인력은 배출되고 있지 못하였다. 때문에 산업디자인을 학습하지 못한 이들이 산업계에 진출하는 현상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박용귀 역시 회화를 전공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이후에도 상당기간 지속되었다. 이는 당시 산업계의 요구가 교육계를 변화시키는 힘으로 작용하지 못하였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실제로 산업디자인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우리 교육계와 산업계는 서로 연결고리를 가지지 못한채 일정 기간 동안 각자의 길을 갔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 초기 디자인 역사에 있어 하나의 특징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전문적인 교육의 기회를 가지지 못하고 단지 유사한 공부를 했다는 이유로 산업디자인 관련 업무를 진행하게 된 이들은 경험을 통해 산업디자인의 내용을 학습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박용귀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그가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디자인 일체를 담당했을 것으로 상상하지만 몇 가지 정황으로 볼 때 당시 그의 역할은 제한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 당시에는 디자인에 대한 인식이 매우 희박했다는 사실, 때문에 기껏해야 도안의 연장선상에서 일종의 포장술로 디자인이 이해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려야 한다.

실제로 A-501라디오를 개발할 당시 개발을 담당했던 엔지니어인 김해수의 회고에 의하면 라디오에 사용된 로고는 물론이고 외장까지 김해수 자신이 담당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24) 이러한 김해수의 회고를 전적으로 신뢰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적어도 김해수가 디자인에 일정부분 관여했다고는 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박용귀는 입사 초기의 상황을 회고하면서 “우선 나 자신도 디자인이 뭔지, 제품을 어떻게 만들어야 되는 건지, 그 과정을 모르던 때”25)이었다고 이야기 한 바 있다. 이러한 회고는 그가 자의식을 가진 산업디자이너로 발전하기까지 일정한 시간이 필요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박용귀는 1968년에 6개월간 히다치 디자인연구소에서 연수 기회를 가지게 된다. 아마도 이 기간이 산업디자인에 대한 그의 이해를 확장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박용귀를 포함한 초기 산업디자이너들은 1967년 박정희 대통령이 디자인 관련 기관을 방문한 자리에서 썼다고 알려진 ‘미술수출’이라는 휘호의 자기장 내에서 활동하였다. 1966년 시작된 <대한민국상공미술 전람회(이하 상공미전)> 역시 같은 맥락에 자리한다. 상공미전은 그 목적에 명시된 바와 같이 “산업진흥”이나 “수출진흥”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수출을 위한 미술’은 이 시기 이후 우리의 근대적 디자인 생산주체에게 ‘디자인을 왜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답으로 자리해왔다. 디자인이 수출을 위한 미술로 묘사되는 공간에서 디자인에 대한 이해는 판매를 위해 상품을 아름답게 포장하는 기술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근대 디자인은 두 가지 경로로 발전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사회개혁, 혹은 생활개선의 차원에서 이루진 움직임으로, 예술 민주화라는 이념에 토대를 둔 윌리엄 모리스의 ‘미술공예운동’이 그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비록 그것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 움직임은 이후 디자인사의 흐름에 큰 영향을 끼쳤다. 20세기 초 러시아 아방가르드나 바우하우스를 통한 디자인 실험 역시 이러한 맥락에 자리한다. 이들은 디자인을 통해 자신들이 상상하는 유토피아를 실현하려고 하였다. 또 다른 경로는 자본주의적 요구에 긍정적으로 답하는 움직임 속에서 파생된 것으로, 박람회나 20세기 초 미국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디자인 활동이 이에 해당된다. 이 움직임은 사회 개혁보다는 자본주의의 맥락에서 판매를 확대하고 경제적 부가가치를 만들어내는데서 디자인의 존재 의미를 찾았다.

우리의 경우 초기 디자인의 출현 양상을 보면 전자의 경우와 같이 이론이나 사회운동의 차원에서 진행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국가적 차원에서의 요구와 그에 따른 산업계의 부름이 있었고, 그러한 요구에 수동적으로 화답하는 과정에서 근대적 산업디자인 생산주체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초기 산업디자인 생산주체가 교육계를 중심으로 등장하여 활동하였다는 점 역시 특징적인 부분이다. 이에 대해 강현주는 “해방 후 1960년대 후반까지 20여 년간 디자인과 교수들은 우리 사회에서 유일한 디자인전문가 집단으로 활동해왔다”26)라고 주장한 바 있다. 교수들이 단순히 교육뿐만 아니라 디자이너로서 활동하는 이러한 흐름은 1960년대 후반에 이르러 변화의 조짐들이 나타났고, 디자인 에이전트나 디자인컨설턴트 회사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198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한다.27) 따라서 초기 교육 양상을 고찰하는 것은 산업디자이너의 출현이라는 맥락에서 유의미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경우 대학제도는 해방과 더불어 마련되었다. 당시 대학을 종합대학의 모습으로 만들고자했던 무의식적 의지는 미술대학에 디자인 관련 학과를 자리하게 하였다. 초기 대학에서 디자인은 ‘도안과’나 ‘응용미술과’에서 다루어졌다. 60년대 이전 시기 대학은 새로운 가능성을 상상하고 탐구하기보다는 당시 지배적인 이해방식인 도안이나 공예를 미술의 차원에서 무비판적으로 전개해 나가고 있었다.

여기에는 원인이 있었다. 일본은 앞의 이왕직미술품제작소의 경우에서와 같이 일상사물을 제작하는 우리 공예를 오리엔탈리즘적 시전으로 바라보았고, 이러한 시선이 1932년 <조선미술품전람회>에 공예부를 만들어내는 주요한 힘으로 작용하였다. 따라서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조선의 공예는 생활과 연결된 것이기보다는 오리엔탈리즘에 바탕을 둔 관람의 대상으로 이해되었고, 또한 그러한 시선에 응답할 수 있는 것들만이 인정을 받았다. 이것이 공예가 생활로부터 괴리되어 하나의 단품 미술로 이해되는 중요한 배경인 것이다. 이에 대해 정시화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미술권 밖의 민간 수공업 속의 공예와 장인들은 구식이고 전근대적인 것으로 취급되어 목소리를 내지 못했으며 오직 전람회의 수상을 통해서만 공예미술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이것은 1930년대부터 내려온 하나의 관행이었다. 여러 가지 면에서 폭넓게 보고 듣고 읽을 정보와 자료가 부족했던 폐쇄적이고 획일적인 시대였기 때문에 관제 공모전에 대한 사회적인 가치평가는 거의 절대적이었으며 획일적인 미적 취향의 표준으로서 강력한 영향을 주었다. 1970년대까지 국전의 공예는 우리 현대공예에 대한 유일한 가치 기준이었다.”28)

정시화의 설명은 대학이 왜 산업계와 괴리된 모습으로 움직였는지, 그리고 왜 새로운 가능성을 비판적으로 상상하지 못하였는지에 대한 답을 제시하고 있다. <조선미술품전람회>라는 강력한 제도적 장치를 통해 우리의 공예는 일제가 원하는 방식으로 길들여졌고, 그러한 전통은 하나의 관성적 움직임으로 해방이후에도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해방과 더불어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홍익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에 도안과, 혹은 응용미술과라는 이름으로 디자인 교육제도가 마련되었지만 그곳에서 이루어진 교육의 내용은 순수미술의 맥락에 자리하는 공예미술과 도안의 전통을 벗어나지 못했다. 일제강점기 <조선미술품전람회>를 이어받아 1949년에 시작된 <대한민국미술대전>은 이러한 움직임을 고착화하는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국전은 정시화가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당시 “초기 디자이너 세대(공예미술가라고 해야 타당하다)의 활동을 흡수할 수 있었고 확대할 수 있었던 유일한 공적 행사”29)였다. 산업적 기반이 성숙하지 못한 상황에서 국전은 디자인 활동의 유일한 분출구였던 것이다. 정시화는 이러한 이유로 “한국의 현대 디자인은 국전 공예부를 중심으로, 교육계를 주축으로 성장해 왔다”30)고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1960년대를 넘어서면서 대학의 디자인 교육에도 변화가 일기 시작한다. 이러한 움직임은 도안이나 공예미술로 디자인을 이해하는 직전 시대의 이해방식과는 다른 이해를 가진 디자인 교육주체가 등장하면서 가능하게 되었다. 그들은 도안이나 공예로 디자인 교육을 받았지만 동시대의 디자인의 흐름을 접할 수 있었던 특별한 계기를 통해 이전 시기와는 다른 디자인에 대한 이해를 가질 수 있었다. 미국유학을 통해 근대디자인의 세례를 받은 민철홍이 대표적 인물이다.

민철홍은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IIT에서 산업디자인을 공부하였다. 1년이라는 길지 않은 기간 동안 그는 제이 더블린의 지도아래 다양한 수업들을 접하였고, 이를 통해 동시대 산업디자인의 흐름과 내용을 흡수하였다. 그는 1959년 귀국하여 서울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교육자이자 디자이너로서 활동하였다. 초기 그의 활동을 보면 전통적인 도안이나 공예의 자기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모습을 보여주기보다는 일정부분 공명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경제의 발전에 따른 물적 토대의 성숙과 사회 정치적 변화는 그로 하여금 자의식을 가진 사업디자이너의 모습을 갖게 하였다. 특히 그는 교육의 영역에서 근대적 의미의 산업디자인 확산을 위해 노력하였는데, 아카데미적 예술관에 입각한 공예와 도안 중심의 디자인 이해를 극복하는데 특히 영향을 끼쳤다. 그로부터 교육받은 이들은 이후 산업계와 교육계에서 활동하면서 근대적 디자인의 자의식을 형성하고 확산시켜 나갔다.

민철홍이 IIT로 유학을 떠날 즈음 미 국무부산하국제협력처(ICA)의 프로그램으로 한국공예시범소(KHDC)가 설립되었다. 몇 개 나라에 유사 기관들이 세워졌는데, 한국은 미국 오하이오 에크론(AKRON)에 있는 스미스 셔 맥더모트사(Smith Scherr & McDermott)가 담당하였다. 이 기관의 디렉터는 한국전쟁당시 파괴된 반도호텔 리모델링으로 한국정부와 인연을 맺고 있던 노만 디 한(Norman R. De Haan)이 맡았다. 한국공예시범소는 국내의 열악한 산업적 상황 등으로 인해 공예의 양산 정도에 머물렀다는 한계를 드러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관의 프로그램을 통해 디자이너들이 일부 대학의 디자인 교육에 참여함으로써, 그리고 디자인 교원연수프로그램을 통해 서구의 근대디자인을 유입하는 창구역할을 함으로써 이후 우리 디자인 생산주체의 형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5. 결 론

지금까지 산업디자이너들이 출현하기까지 어떠한 근대적 디자인 생산주체들이 있었는지, 각 디자인 생산주체들은 어떠한 가능성과 한계를 드러내었는지, 그들의 활동이 가지는 함의는 무엇이었는지를 고찰하였다. 근대적 디자인 생산주체는 보는 시각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정의될 수 있다. 본 논문에서는 무엇보다 제작과 분리된 디자인 기획 활동의 독립성 여부를 주요한 판단 기준으로 삼았다. 공업전습소와 이왕직미술품제작소는 이러한 맥락에서 의미를 가졌다. 이 기관들에서는 디자인이 아닌 ‘의장’, 혹은 ‘도안’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지만, 디자인 기획을 제작 활동에서 분리하여 이해하였고, 이러한 이해 속에서 활동이 이루어졌다.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유학을 통해 도안을 공부한 후 국내에서 활동하던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임숙재나 이순석이 대표적 인물인데, 이들은 새로운 형식의 제품을 상상하기보다는 기존 제품의 표면장식 활동으로서의 도안에 천착하였다. 물론 이들은 산업과의 연결을 통한 디자인 발전을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이 수행했던 작업은 도안이나 디자인 외적인 활동에 머물렀다. 여기에는 식민지라는 특수한 사회적 상황, 근대적 디자인 생산의 토대가 되는 산업과 경제적인 환경의 취약함, 그리고 그에 따른 사회적 인식이 부재가 원인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더욱이 조선미술품전람회와 같은 전람회가 일제강점기 동안 전공자들의 주요한 활동 무대로 자리하면서, 관련 활동들은 일상과 괴리된 일종의 미술활동의 성격을 강하게 띠었다.

해방이후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인 근대화의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그에 따라 산업디자이너들이 하나 둘 출현하기 시작하였다. 박용귀와 민철홍은 그러한 변화의 시작을 알렸던 디자인 생산주체였다. 박용귀가 산업 현장의 경험을 통해 산업디자이너로 성장했다고 한다면, 민철홍은 미국 유학을 통해 산업디자인을 공부했고 이를 토대로 산업디자이너이자 교육자로 활동하였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그들은 초기부터 자의식을 가진 산업디자이너로 활동 했다기보다는 오히려 활동 과정 속에서 산업디자이너로서의 자의식을 만들어갔다.

본 논문을 통해 자의식을 가진 산업디자이너들이 출현하고 활동하기까지 과도기적 디자인 생산주체들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은 ‘공예’나 ‘도안’과 같은 새로운 개념의 유입과 특수한 사회, 정치, 제도적 상황, 그리고 물적 토대의 발전 과정에 따라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는 우리의 경우 일부 서구 나라들의 사례에서처럼 산업화에 따라 수공예 전통이 자연스럽게 근대 산업디자인으로 이행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Notes

1) 미셀 푸코. (2006). 임상의학의 탄생. 이매진. pp.102-117.

2) 최공호. (2008). 산업과 예술의 기로에서. 미술문화. p.209.

3) 김백영. (2005). 일제하 서울에서의 식민권력의 지배전략과 도시공간의 정치학.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p.190.

4) 공업전습소는 1904년 대한제국이 만든 농상공학교가 해체되면서 만들어진 교육기관이다.

5) 최공호. (2008). 산업과 예술의 기로에서. 미술문화. pp.144-147.

6) 최공호. (2008). 산업과 예술의 기로에서. 미술문화. p.165.

7) 최공호. (1996). 한국 현대공예사의 이해. 재원. 신화 없는 탄생, 한국 디자인 1910-1960. (2004). 한가람디자인미술관 기획전도록. p.112.재인용.

8) 조도품은 세간, 혹은 생활용품을 의미한다.

9) 신화 없는 탄생, 한국 디자인 1910-1960. (2004). 한가람디자인미술관 기획전 도록. p.113재인용

10) 윤혜신. (2006). 일제시대 ‘기생의 저급화 담론’에 대한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여성학전공 석사학위논문. p.37

11) 에이드리언 포티는 그의 책 2장에서 이 내용을 설명하고 있는데, 2장 제목이 ‘최초의 산업디자이너’라는 점에서 포티가 이 모델러들을 산업디자이너의 원형으로 규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2) 에이드리언 포티. 허보윤 역. (2004). 욕망의 사물, 디자인의 사회사. 일빛. pp.38-54

13) 임숙재. "공예와 도안". 동아일보. 1928년 8월 16일자.

14) 김민수는 “한국현대디자인과 추상성의 발현:1930-1960”이라는 논문에서 직접적인 연관 가능성을 언급했지만 이순석의 작업은 미즈타니 타케히코(水谷武彦)와 직접적인 관계는 없어 보인다. 김민수. (1995). “한국현대디자인과 추상성의 발현:1930-1960”. 한국 현대미술과 추상성, 그 현대적 발견과 전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부설 조형연구소 1995학술 심포지엄. pp.44-45

15) 박옥화. (1933). “인테리 청년 성공 직업(1)”. 삼천리. 1933년 10월 1일자.

16) 시인 이상도 ‘제비다방’이라는 찻집을 운영하였다.

17) 허보윤. (2010). “미술로서의 디자인:이순석의 1946-1959년 응용미술 교육”. 인물과 사건.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형연구소 2010학술대회 자료집. pp.42-43

18) 오창섭. (2011). 제로에서 시작하라:민철홍과 한국의 산업디자인. 디자인플럭스. pp.57-64

19) 이순석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오창섭. (2011). 제로에서 시작하라:민철홍과 한국의 산업디자인. 디자인플럭스. pp.57-70을 참조하시오

20) 최창봉, 강현두. (2001). 우리방송 100년. 현암사. pp.22-23.

21) 다른 주장도 있다. 최창봉과 강현두는 ‘천우사’에서 네덜란드 필립스 부품을 수입하여 조립 생산한 라디오 수신기를 최초로 보고 있다. 그 스타일은 금성사의 것과 사뭇 다르다. 최창봉, 강현두. (2001). 우리방송 100년. 현암사. pp.104-105.

22) “세계의 수준을 달리는 한국의 기술, 금성 라듸오”. 조선일보. 1959년 12월 20일자.

23) http://www.designdb.com/history/02_other/0004_1.html

24) 김해수. (2008). 아버지의 라디오. 느린걸음. p.146

25) 박용귀. (2008). “공업의장실 풍경”. 박해천 외. 한국의 디자인2:시각문화의 내밀한 연대기. 디플. p.61

26) 강현주. (2001). “한국디자인교육의 현실”. 디자인교육2001. 예술의 전당 디자인미술관. p.13

27) 강현주. (2001). “한국디자인교육의 현실”. 디자인교육2001. 예술의 전당 디자인미술관. p.13

28) 정시화. (1995). “1950-70년대 공예의 형상성”. 한국 현대미술과 추상성, 그 현대적 발견과 전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부설 조형연구소 1995학술 심포지엄 자료집. p.29.

29) 정시화. (1986). 한국의 현대디자인. 열화당. p.27.

30) 정시화. (1986). 한국의 현대디자인. 열화당. p.28.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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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세계의 수준을 달리는 한국의 기술, 금성 라듸오”. 조선일보. 1959년 12월 20일자.
  16. “끽다점평판기(喫茶店評判記)”. 삼천리. 1934년 5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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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서울대학교 조형연구소. (1995). 한국 현대미술과 추상성, 그 현대적 발견과 전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부설 조형연구소 1995학술 심포지엄 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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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http://www.designdb.com/history/02_other/0004_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