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Vol. 25, No. 3

The Characteristics and Meaning of Hong-Taik Han’s Design: The Prehistory of Korean Graphic Design
한홍택 디자인의 특징과 의미: 한국 그래픽 디자인의 전사(前史)
  • Hyeon-joo Kang : Dept. of Visual Communication Design, Inha University

Hong-Taik Han (1916~1994), active in the formative period of Korean modern graphic design, studied both painting and design in Tokyo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People consider him not only as a designer but also as a painter who worked in both fields of advertisement and poster design, even though he only took up painting after retiring from the design field in the mid-1970s. Hong-Taik Han used to work as an art director at Yuhan Corporation, while operating the Hong-Taik Han Design Studio. He also established the Korean Industrial Artists' Association and held the position of chairman for 30 years. In addition, he taught design as a professor at Hongik University and Duksung Women's University. From 1953 through 1976, he gave a total of 9 solo exhibitions in which he displayed his own graphic design works. The designs of Hong-Taik, which are characterized by figurative style and the use of Korean themes, have significant historic meaning which should be examined when considering the prehistory of Korean modern graphic design.

Abstract, Translated

한홍택(1916~1994)은 일제강점기에 동경유학을 통해 디자인교육을 받고 1940년대 초반에 귀국, 1970년대 중반까지 약 30년 동안 활동했던 한국 현대 그래픽 디자인 태동기의 선구적 디자이너이다. 한홍택은 일본 유학시절부터 디자인과 순수미술을 병행하고, 말년에 디자인계를 은퇴한 후 회화 작업에 매진하여 디자인계 일각에서는 그를 디자이너가 아니라 광고 및 포스터 작업도 했던 화가로 평가하기도 한다. 하지만 유한양행의 아트디렉터를 거쳐 한홍택도안연구소를 개소하고, 대한산업미술가협회를 창립하여 30년간 대표를 역임했으며, 홍익대와 덕성여대 교수로도 재직했던 한홍택은 디자인실무와 디자인교육의 현장을 넘나들며 왕성한 활동을 펼친 그래픽 디자이너였다. 본 논문에서는 한홍택의 생애와 디자인 활동, 디자인 특징 등을 살펴보고 초창기 한국 현대 그래픽 디자인 변천과정에서 그가 미친 영향과 디자인사적 의미를 고찰했다.

Keywords:
Hong-Taik Han, History of Korean Graphic Design, 한홍택, 그래픽 디자인, 한국디자인사.
pISSN: 1226-8046
eISSN: 2288-2987
Publisher: Korean Society of Design Science
Received: 19 Jun, 2012
Revised: 17 Jul, 2012
Accepted: 17 Jul, 2012
Printed: Aug, 2012
Volume: 25 Issue: 3
Page: 142 ~ 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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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tation:Kang, H. (2012). The Characteristics and Meaning of Hong-Taik Han’s Design: The Prehistory of Korean Graphic Design. Archives of Design Research, 25(3), 104-151.
1. 머리말
1-1. 연구의 필요성 및 목적

20세기 동안 그래픽 디자인은 이미지 전통과 문자 전통이 마치 씨줄과 날줄처럼 서로 교직하며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해왔다.1) 필립 B. 멕스는 『그래픽 디자인의 역사』에서 그래픽 디자인의 기원을 선사시대 동굴벽화에서부터 찾음으로써 그래픽 디자인의 중요성을 보편적 인류 문화 차원에서 강조하고자 했다. 필립 B. 멕스의 이러한 확장된 인식은 디지털 정보혁명을 겪고 있는 현재 상황에 비추어 볼 때 혜안을 지닌 것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래픽 디자인을 이처럼 광의로 해석하게 되면, 이때 ‘그래픽’이라는 용어의 사용은 과연 적절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왜냐면 산업혁명 이후 인쇄술의 급격한 발전으로 대량생산, 대량복제가 가능해지고2) 그에 따라 광고 및 출판 시장이 성장하면서 황금기를 맞았던 그래픽 디자인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기업 마케팅과 결합된 비즈니스로서의 특성이 강화되면서 시각디자인, 커뮤니케이션디자인, 시각전달디자인, 시각정보디자인, 정보디자인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며 활동영역이 변화되어 왔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예로부터 전해온 고유한 이미지 전통과 문자 전통이 있기 때문에 한국 그래픽 디자인 역시 한국 시각문화의 역사적 발전과정과 함께 해왔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그래픽 디자인이 오늘날과 같이 사회적으로 독립된 전문분야로 인식되고 직업인으로서의 자의식과 정체성을 갖춘 디자이너가 등장하여 활동이 구체화되기 시작한 것은 해방을 전후한 시기부터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유학을 통해 디자인교육을 받았던 초창기 디자이너들이 귀국하여 본격적인 활동을 펼치면서 점차 한국 현대 그래픽 디자인은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게 되었다.

본 연구에서는 한국 현대 그래픽 디자인의 태동기에 활동했던 한홍택의 생애와 작품을 통해 우리 사회에서 현대적인 그래픽 디자인이 자리 잡게 되는 과정과 그 특성은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1916년에 태어나 1994년에 타계한 한홍택은 1940년대 초반에 일본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 1970년대 중반까지 30여 년간 활발히 활동했던 한국 그래픽 디자인계의 선구자이다. 한홍택에 앞서 일제강점기에 디자인을 공부했던 인물로는 임숙재3), 이순석4), 김재석5) 등이 있다.

한국 사람으로는 최초로 1928년 일본 동경미술학교 도안과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안국동에 도안소를 설립했던 임숙재는 1928년 경복궁에서 개최된 조선박람회의 광고탑을 디자인하고, 동아일보에 공예와 도안에 관한 글을 기고하는 등 의욕적인 활동을 펼쳤으나 1937년 3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남으로써 안타깝게도 그 활동을 이어가지 못했다. 이순석은 1931년 동경미술학교 도안과를 졸업한 후 귀국하여 그해 6월 동아일보사 강당에서 디자인 개인전을 개최했으나6) 이후 그래픽 디자이너로서보다는 공예가로 활동했다. 1940년에 제국미술학교 공예도안과를 졸업하고 조선공예가협회 초대 회장을 역임했던 김재석도 초창기 국전 공예부에 관여하며 대학에서 디자인 강의를 했으나 그래픽 디자인 활동에 적극적이지는 않았다.7) 반면 한홍택은 지속적인 작품 활동을 통해 한국 현대 그래픽 디자인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1-2. 연구의 방법 및 범위

본 연구가 대상으로 삼고 있는 시간적 범위는 한홍택이 해방 후 조선산업미술가협회8)를 창립하고 협회 대표로서 첫 회원전을 개최했던 1946년부터 1976년 회갑기념전을 겸해 개최된 제9회 개인전을 마지막으로 디자인계에서 은퇴한 시점까지 약 30년간이다. 도안, 공예도안, 도안공예, 공예미술, 응용미술, 산업미술, 선전미술, 상업미술 등으로 불리던 그래픽 디자인은 이 기간 동안 점차 대학이나 사회에서 하나의 독립된 전문분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연구방법으로는 우선 한홍택의 생애주기를 중심으로 그의 삶과 작품세계를 살펴보는 종적인 접근방법을 택했다. 연구대상인 한홍택의 작품은 1988년에 출간된 『한홍택 작품집』9)에 수록된 것을 중심으로 했다. 이 책에는 1939년 일본 동경도안전문학교 졸업작품에서 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의 작품들이 그래픽 디자인과 회화 부문 두 개로 구분되어 있다. 이 책 외에 신문이나 잡지 등 여러 매체에 기고한 한홍택 자신의 원고와 한국디자인사 관련 잡지 및 단행본 등도 함께 검토하였다. 한홍택이 디자인과 회화 작업을 병행해온 점을 고려해 해당 시기 한국 미술계의 동향도 살펴보았다.

2. 한홍택의 생애와 디자인 활동

한홍택은 1916년에 3남 2녀 중 2남으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의 외할아버지 박영효는 조선조 25대 철종의 부마로 구한말에 한성부 판윤을 지내면서 한성부에 최초로 신문국을 두고 신문창간을 기획한 바 있으며10) 1884년에 일어난 갑신정변을 주도한 개화파의 일원이었다.11) 한홍택은 1934년에 종로구 낙원동에 소재한 협성고등학교12)를 졸업한 후 1935년 일본으로 건너가 1939년 동경도안전문학교를 마쳤다.13) 1941년에는 제국미술학교(현, 무사시노미술대학) 서양화과 연구과에 입학하여 1942년에 수료했다.14) 제국미술학교 재학 중 한홍택이 도안공예학과의 수업을 들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재학 중 그의 서양화 작품에는 간략화와 평면화 등 디자인적 특성이 일부 반영되어 있었다.15) 한홍택은 1939년부터 1944년까지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에 출품하여 입선했고16) 1943년에는 서양화 동인전 그룹인 녹과회 전시회에도 유화 작품을 출품했다.

귀국 후 한홍택은 유한양행에서 아트디렉터로 근무하면서 광고 제작 및 디자인을 담당했다.17) 한홍택이 초창기 한국광고사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회사인 유한양행에 입사하게 된 계기는 그가 동경도안전문학교 재학시절인 1939년에 유한양행이 개최한 광고현상공모에 응모하여 수상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유한양행의 창립자인 유일한은 미국에서 유학하면서 기업경영에 있어서 광고의 중요성을 일찍이 깨닫고 광고제작에 많은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18)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미술계에도 1945년 해방 후 1948년 정부수립 전까지 각종 협회 및 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이합집산을 거듭했다.19) 이 시기에 한홍택은 조선조형예술동맹, 조선미술동맹, 조선미술문화협회 등 여러 단체에 참여했고 1945년 12월 27일에는 조병덕, 김관현, 조능식, 홍남식, 이완석, 유윤상, 이병헌, 엄도만 등과 함께 조선산업미술가협회를 조직했다.

한홍택은 1953년에 개최된 제2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 서양화부에「귀향」이라는 작품을 출품해 특선을 받았고, 1954년 제3회 때는 무감사20)로 「폐허의 땅」이라는 작품을 출품했다. 그러나 그 후 국전 운영방식에 실망을 표하며 더 이상 참여하지 않았다. 1953년 5월 국립도서관화랑에서 개최된 재경미술가작품전에 참여한 한홍택, 조능식, 권영휴, 이완석 등은 관광, 녹화, 북진 등을 주제로 포스터 작품을 선보였고21) 같은 해 7월, 한홍택은 산미개인전을 개최했다. 명동에 한홍택도안연구소22)를 설립한 해인 1956년부터 서울미대 응용미술과에 출강했고, 1959년에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공예과 전임강사로 부임했다.23)

한홍택은 1961년 10월에 열린 제3회 개인전 명칭을 <한홍택 그라픽디자인전>이라고 붙여 당시로서는 생소했던 그래픽 디자인이라는 용어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1964년 4월에는 <한홍택 문하생 그라픽디자인전>을, 같은 해 5월에는 제5회 개인전을 연이어 개최했다. 1966년 상공부 주관으로 제1회 대한민국상공미술전이 개최되자 추천작가이자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

1969년 홍대 교수직을 그만두었던 한홍택은 1975년에 덕성여대 응용미술과 교수로 교직에 복귀했다. 1981년 정년퇴임 후 장남이 거주하던 미국으로 건너가 1982년에는 로스앤젤레스에 위치한 삼일당화랑에서 그래픽 및 유화 작품 전시회를 가졌다. 1984년에 귀국하여 그로리치화랑에서 한홍택 중남미 스케치화전를 개최했고, 단국대학교 대학원 강의도 담당했다. 1980년대 후반에는 대한산업미술가협회와 한국미술가협회 고문으로도 활동했다. 1993년 제25회 대한민국 문화예술상을 수상한 후 1994년 향년 78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3. 한홍택 디자인의 특징
3-1. 한홍택 디자인의 회화적 특성

일본 유학시절부터 화가이자 디자이너로 활동했던 한홍택은 그래픽 디자인 작업에 있어서도 회화성과 화력(畵歷)24)을 중시했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해방 후 우리나라에서는 디자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낮았기 때문에 디자인만으로는 자기만족이나 사회적 명예를 얻기 어려웠다고 밝히면서 디자인과 순수미술 작업을 함께 했던 것이 개인적으로는 잘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한홍택은 디자인은 엄연히 회화나 조각 등 순수미술과는 다른 독자적인 전문영역이며, 디자이너는 국민생활과 직접적인 연관성을 갖고 국가사회 발전을 위한 산업의 동맹 역할을 하는 ‘생활하는 미술인, 산업하는 미술인, 나아가서는 외교하는 미술인’이라는 점 역시 강조했다.25)

한홍택은 1953년에 산미개인전이라는 명칭으로 첫 개인전을 연 후 모던데자인전(1958), 그라픽디자인전(1961), 그라픽아트전(1966), 시각언어전(1969) 등 매번 자신의 전시회에 새로운 명칭을 붙여가며 1976년까지 23년간 총 9회에 걸쳐 디자인 개인전을 개최했다. 그가 각각의 전시회에 다른 이름을 붙인 것은 개인전 개최를 통해 디자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높이고자 하는 계몽적이고 교육적인 목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40, 50년대 초창기 광고디자인 작업 때부터 붙여진 ‘회화적 일러스트레이션’26)이라는 말은 한홍택 디자인의 특징을 잘 나타내주는 표현이다. 한홍택의 주요 작품들은 회화적 드로잉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형태를 간결하고 평면적으로 표현하고 화면 구성에서는 비대칭을 즐겨 사용함으로써 회화적 특성과 함께 현대적인 서구 모던 디자인의 영향도 함께 보여주었다.27)

[표-1]
1940, 50년대 한홍택의 광고디자인


한홍택 디자인에 나타나는 회화적 특성은 평생 미술과 디자인 작업을 병행하고자 했던 개인적 관심 때문이기도 하지만, 응용미술로서 출발했던 그래픽 디자인 초기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라 서구에서도 현대적인 디자인 작업을 하는데 필요한 사진술과 제판술, 인쇄술 등이 충분히 발달하기 이전에 활동했던 디자이너들은 광고나 포스터 등 디자인 매체를 다루면서도 그리기 중심의 작업을 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한홍택 작품집』에 소개된 그래픽 디자인 작품은 1939년부터 1940년대까지가 21점, 1950년대 34점, 1960년대 72점, 1970년대 59점으로 총 186점이다. 한홍택은 사진을 직접 사용하거나 마치 사진처럼 묘사한 작품을 일부 제작하기도 하고, 보다 단순화되고 평면적인 패턴 형식으로 색과 질감 자체를 강조한 작업을 하기도 했지만 그의 대부분의 작품은 회화적이고 구상적인 표현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한홍택이 활동했던 시기에 국내 화단에서 점차 추상미술에 대한 관심과 영향력이 높아졌었던 점을 생각해보면 그가 구상적 표현을 고집했던 것은 오히려 특이하다. 왜냐면 한홍택과 동시대를 살았던 김환기28)는 초창기 구상미술 경향에서 점차 벗어나 한국 현대 추상미술의 선구자로서의 위상을 구축해나갔는데29) 회화보다 더 현대적인 조형언어라고 할 수 있는 디자인 작업을 하면서 한홍택은 전통적인 매체와 구상적인 표현만을 고집했기 때문이다.

한편, 한홍택은 작품의 대상과 소재는 한국적인 것을 즐겨 채택했는데 이러한 특성은 이미 1939년 동경도안전문학교 졸업작품([표-2] 참조)에서도 볼 수 있다. 이 작품에는 장승, 한복을 입은 여인, 패랭이를 쓴 남자 등 한국적 소재가 등장하는데 전체적인 비례와 형태는 서구적인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일본에 전해진 서구의 아르누보와 아르데코 스타일의 영향이 엿보이는 이 작품에 드러난 한국적 소재와 서구적 조형형식의 결합은 이후 그의 다른 작업에서도 꾸준히 계속되었다.

3-2. 한홍택 디자인의 한국적 특성

화가로서 한홍택은 한국의 농촌이나 소, 집, 산과 같은 자연과 풍물을 주제로 한 그림을 주로 그렸다. 그것은 잃어버린 조국과 단절된 전통문화에 대한 향수 때문이었다.30) 이러한 정서는 회화 작품에서만이 아니라 그래픽 작업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났다. 일본 유학시절부터 한국 전통문화에 관심을 갖고 있던 그는 한복을 입은 여인이나 농악대, 전통악기, 불국사, 다보탑, 수원화성, 궁궐 등 전통문화와 관계된 소재와 대상을 즐겨 사용했고 산이나 나무, 물고기, 새, 풍경 등 자연의 모습도 꾸준히 작품에 담았다.

한홍택은 1940년대에는 주로 한복을 입은 여인을 화면에 클로즈업하고 배경에 전통건물과 자연풍경을 배치한 작업을 주로 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의 표현은 1939년 동경도안전문학교 졸업작품과 비교해 볼 때 아르누보나 아르데코 등 서구 스타일의 직접적인 영향이 상대적으로 적게 나타났다. 다만 건물의 경우 지붕이나 기둥, 문 등의 형태가 원래 한국 고유 전통건물 모습과 달라 표현의 엄밀성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 1950년대에도 인물이 강조된 작품을 했지만 이와 함께 다보탑 시리즈처럼 전통문화유산 그 자체를 클로즈업하거나 나무나 산 등 자연의 모습을 부각시키면서 인물이나 건물은 작게 배치한 경우도 있었다. 1960년대에는 작품의 소재나 표현형식 모두가 다채롭고 자유로워졌다. 궁궐 모습이나 수원화성, 석굴암, 제주도, 설악산 등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 있었고, 추상적으로 단순화된 패턴모양을 시도하기도 했다. 전통의상을 입은 인물이 등장한 경우, 앞 시기와 마찬가지로 클로즈업과 비대칭 구성으로 화면에 역동성을 주었다. 석굴암 관음보살을 소재로 한 작품의 경우처럼 드로잉이 강조된 경우도 있었고, 설악산 시리즈에서처럼 선과 면이 간결하게 표현되어 단순하고 평면적인 특성이 강조된 작품도 있었다. 1970년대 역시 전통의상을 입은 인물들이 등장하는 작품과 제주도나 단양 등 지역적 특징을 표현하고자 한 작품들이 있었는데, 이 시기 작업들은 전반적으로 다른 시기보다 구도와 색채 면에서 안정된 톤을 갖고 있었다.

[표-2]
한국적 특성이 강조된 한홍택의 주요 작품들

연대 주요 작품
1939년
1940년대
1950년대
1960년대
1970년대

한편, 한홍택이 즐겨 사용한 매체는 포스터였다. 포스터는 산업혁명 이후 유럽사회가 급속한 산업화, 근대화를 겪는 과정에서 19세기 말에 대중매체로 성장했는데 당시에는 유럽에서도 그래픽 디자이너라는 직업이 등장하기 전이라 쉐레나 로트렉 같은 화가들에 의해 그래픽 포스터가 제작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1960년대 경제성장이 가속화되면서 포스터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커지게 되었다. 특히 ‘미술수출’이라는 구호 하에 디자인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포스터는 미술과 산업을 결합시키면서 동시에 디자인이라고 하는 새 영역을 표현하는데 적합한 매체로 여겨졌다.

1970년대에는 관광산업을 진흥하는 국가정책과 연결되어 소위 ‘한국적 디자인’31)이라고 일컬어지는 그래픽 포스터들이 대거 등장했다. 이 시기 새롭게 등장한 젊은 디자이너 세대는 한국적 정체성을 강조하면서도 한홍택이 중요하게 생각하던 회화성이라고 하는 미술적 가치를 공유하기보다는 그것과 차별화된 현대적 조형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그 결과 강조된 것이 보다 단순하고 기하학적이며 구조적인 특징을 지닌 모더니즘 경향이었다. 1972년 출범한 한국그래픽디자인협회(KSGD)32)는 1973년에 한국관광포스터전을 개최하였고, 이 무렵 상공미전에도 한국관광포스터가 대거 출품되어 각종 상을 수상했다. 또한 협회전이나 국가 주도의 전람회 외에도 디자이너들이 자발적으로 ‘한국적 디자인’을 테마로 한 각종 그룹전이나 개인전 등을 개최했다. 한홍택이 디자인계에서 은퇴한 1970년대 중반은 그보다 젊은 디자이너 세대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여 한국 현대 그래픽 디자인이 제도적인 면에서나 조형적인 차원에서나 전환점을 맞던 시기였다.33)

4. 한홍택 디자인의 역사적 의미

1960년대 초반에 디자인교육을 받았던 정시화34)는 한 인터뷰에서 자신은 대학시절에 ‘응용미술은 미술과 어떻게 다른가’ 하는 문제에 골몰했었다고 밝히면서 엄연히 별개의 전공임에도 불구하고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그 답을 얻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35) 그때까지 우리나라 대학의 디자인교육은 일본 유학을 통해 서구식 영향을 간접적으로 받은 미술가, 공예가들이 응용미술로서의 디자인교육을 시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적인 미술공예, 공예도안의 사고36)에서 벗어나기 어려웠고, 특히 그래픽 디자인의 경우 회화와의 차별성을 확보하기 힘들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37)

일제강점기 한국 유학생들이 디자인교육을 받기 위해 진학했던 대표적인 학교로는 동경미술학교와 제국미술학교가 있었다. 이 중에서도 디자인전공 유학생이 더 많았던 곳은 제국미술학교였는데 1929년 개교 당시 이 학교에는 일본화과, 서양화과, 공예도안과 등 세 개 학과가 있었다. 20세기 초반에 일본에서 디자인과에 해당하는 학과 명칭으로 주로 사용된 것은 공예도안과와 도안공예과였다. 이때 공예는 디자인의 대상이나 관계를 의미했으며 도안 혹은 의장이라는 말이 현재의 디자인과 유사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38)

해방을 전후한 시기에 당대 예술가들과 지식인들이 시대정신으로 공유하던 한국적 정체성과 서구의 영향을 받은 현대적 조형성의 균형과 조화라는 이중과제를 한홍택은 그래픽 디자인 작업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다. 조형적인 측면에서 일관되게 회화성을 강조한 그의 작업은 젊은 디자이너 세대들에 의해 후에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한홍택의 작품과 여러 매체에 쓴 기고문 및 비평을 살펴보면 그가 궁극적으로 추구했던 것은 바로 한국성에 바탕을 둔 근대성의 시각적 발현이었음을 알 수 있다.39) 이러한 점에서 한홍택 디자인은 한국 현대 그래픽 디자인의 전사(前史)로서 그 역사적 의미와 가치가 크다.

1960, 70년대에 한국 현대 그래픽 디자인은 다음의 몇 가지 계기로 인해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첫째는 한국공예시범소의 미국 연수프로그램을 통해 비록 소수의 인원이기는 했지만 서구식 디자인교육을 직접 체험한 세대가 출현하여 이들에 의해 일본식 교육이 중심이었던 대학 디자인교육이 점차 미국식으로 변화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40) 둘째는 1966년부터 개최된 상공미전을 통해 일제강점기의 선전, 그리고 해방 후의 국전 공예부에 속해 미술의 하위 개념으로 여겨지던 디자인이 비로소 제도적인 차원에서 독자적인 영역으로 자리매김하게 되고 디자이너라는 직업이 공식적으로 사회에서도 인정받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셋째는 1970년대 들어 각 대학에 디자인 관련 학과의 신설이 이어져 상공미전이 배출한 많은 수의 디자이너들이 대학교수가 되고, 또 이들이 중심이 되어 한국그래픽디자인협회(KSGD)와 같은 새로운 디자인단체가 출범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변화를 주도했던 후속 디자이너 세대에게 있어서 한홍택은 자극과 영감을 준 선생님이자 선배인 동시에 그들이 넘어야 할 극복의 대상이기도 했다.41)

한홍택은 상공미전이 신설되기 일 년 전인 1965년에 기존의 공예부와 별개로 국전에 독립된 디자인부를 신설해달라는 건의서를 문화부장관을 비롯한 관계 기관에 제출했다. 이 건의서에는 ‘20세기 후반기의 디자인은 현대생활과 밀접한 연관성을 맺는 목적미술로서 크고 뚜렷한 각광을 받고 있으며, 매년 각 미술대학의 도안과나 응용미술과 혹은 생활미술과 지망학생들의 수가 타 미술 분야 부분에 비해 월등하다는 점은 디자인에 대한 일반 관심이 그만큼 깊어지고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42) 한편 같은 해 한홍택이 대표로 있던 대한산업미술가협회는 디자인계의 신인 발굴과 등용문 마련이라는 취지하에 우리나라 최초의 디자인공모전인 <전국그라픽공모전>을 개최하였다.

1966년에 상공미전이 출범하게 된 것은 디자인을 둘러싼 여러 사회문화적인 요인들과 디자인 분야의 내적 필요성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지만43) 한홍택과 대한산업미술가협회의 활동 역시 영향을 미쳤다. 다만 아이러니한 점은 상공미전의 출범이 정작 한홍택 자신이나 대한산업미술가협회의 위상과 협회 공모전의 성공에는 그다지 긍정적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44) 왜냐하면 처음에 소규모로 열렸던 상공미전이 점차 국가적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디자이너 자격을 부여하는 역할을 맡게 되면서 많은 디자이너들이 상공미전 출품을 더 선호하였고 그 결과 상공미전이 디자인 분야를 대표하는 행사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5. 맺음말

디자인계에서 한홍택에 내리는 가장 신랄한 평가는 그를 그래픽 디자이너가 아니라 광고나 포스터 작업도 했던 화가로 보는 시각이다. 한홍택이 순수미술과 디자인 작업을 병행했고, 특히 말년에는 유화 작업에 매진했기 때문에 오늘날 이러한 평가가 존재한다. 하지만 해방을 전후한 시점에 막 발아하기 시작한 초창기 한국 디자인의 상황 속에서의 한홍택의 디자인 작업과 역할은 재평가될 필요가 있다. 회화성을 강조하며 구성적 표현을 고집한 한홍택의 작업방식은 1970년대 중반 그가 디자인계를 은퇴하기 전부터 그 한계가 지적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모든 활동과 역할이 폄하되어서는 곤란하다. 한홍택의 작품과 활동을 통해 우리는 20세기 초ㆍ중반 한국 그래픽 디자인계가 처해 있던 역사적ㆍ사회적ㆍ경제적 물적 조건과 상징적ㆍ문화적 조건45), 그리고 그러한 상황 하에서 한 개인 디자이너의 선택을 보다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한홍택은 유한양행에서 기업 내 디자인 작업을 한 후 한홍택도안연구소를 개소하여 후학을 양성하는 한편, 디자인 스튜디오 활동도 병행함으로써 디자인현장을 다양한 차원에서 경험했다. 또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디자인단체라고 할 수 있는 대한산업미술가협회를 창립하고 협회대표로서 30여 년간 활동하면서 한국 디자인의 발전과 디자이너들의 사회적 위상 확보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개인전을 꾸준히 개최하고 각종 매체에 디자인 쟁점 및 정책에 관한 비평적 글을 기고함으로써 디자인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과 디자인의 사회적 역할과 영향력을 키우고자 했다. 또한 서울대 출강과 홍대와 덕성여대에서의 교수직을 통해 디자인 교육자로서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디자인 실무와 교육 현장에서 종횡무진 활동했던 한홍택은 1976년에 개최된 회갑기념전을 겸한 제9회 개인전에 디자인과 회화 작품을 반반씩 선보인 후 앞으로는 유화 작업에만 매진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디자인계를 은퇴 했다. 한홍택의 이러한 선택에 대해 당시 디자인계 일각에서는 우려와 불만을 표시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에 대해 한홍택은 “나이 오십을 넘기니 눈이 잘 안보이고 손이 떨려 세밀한 (디자인)작업은 힘들더군.”이라는 말로 간단히 답변을 대신했다. 하지만 한홍택의 은퇴선언은 그 자신이 의식했던 하지 않았던 간에 시대의 변화에 따른 자신의 한계를 스스로 받아들이고 적절한 시기에 사회적인 활동무대에서 내려와 그 역할을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고자 한 결과였다.46)

최근 들어 한국 디자인사를 정리하고 서술하고자 하는 관심과 노력이 예전보다 커지고 있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디자인사 서술에 있어서 작업의 주체인 디자이너에 대한 작가론적 접근은 아직 충분히 시도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디자인 정책이나 디자인을 둘러싼 환경 변화를 통해 한국 디자인사를 사회문화적인 차원에서 거시적으로 바라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와 함께 디자이너 개인에 대한 탐구와 이해 역시 심화 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 현대 그래픽 디자인 태동기에 활동했던 한홍택의 디자인 작품과 활동의 특징, 그리고 그 역사적인 의미를 고찰해 봄으로써 한국 그래픽 디자인사 서술이 보다 풍부해지는데 보탬이 되기를 바란다.

Notes

1) 『그래픽 디자인의 역사: 이미지 구성의 역사』라는 책에서 알랭 베유(Alain Weill)는 그래픽 디자인의 역사를 프랑스어로 이미지 구성을 뜻하는 ‘미장이마주(mise-en-image)’의 역사라고 설명했다. 필립 B. 멕스가 타이포그래피 전통에 무게를 둔 반면 그래픽 아트와 광고 전문가인 베유는 그래픽 디자인의 역사를 이미지 전통 맥락에서 정리하고 있다.

2) 19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그래픽 디자인 발전에 영향을 미친 인쇄 관련 기술로는 석판인쇄술(1796, 제네펠더 발명, 이 후 엥겔만 개선), 두루마리 형태의 인쇄용지(1846, 뵐터), 자동인쇄기(쾨니히아 안드레아스 바우어), 알루미늄 평판인쇄, 아연판인쇄, 윤전인쇄기, 콜로타이프와 사진제판(1980년대 초반 피르맹 지요), 라이노타입(1886, 메르겐탈러), 모노타입(랭스턴), 오프셋인쇄(1905, 아이라 루벨) 등이 있다.

3) 임숙재(1899-1937) 1928년 동경미술학교 도안과 졸업.

4) 이순석(1905-1986) 1931년 동경미술학교 도안과 졸업.

5) 김재석(1916-1987) 1940년 제국미술학교 공예도안과 졸업.

6) 첫 개인전에서 이순석은 일본유학 시절 제작한 도자기와 수영복, 넥타이, 스카프 등의 패턴 디자인, 가구 디자인, 포스터, 구성 등 30여 점의 상업미술품, 공예미술품, 실내장식품 등을 선보였다. 그는 1946년 서울대학교 도안과 교수로 부임한 후 국전 공예부 신설, 상공미전 출범, 한국공예시범소 설치 등 정부 차원의 디자인 제도 및 정책 마련에 관여하며 영향력을 발휘했다. 황부용. (1986). 회화적 접근. 월간디자인. 6월호 참조.

7) 이들 외에 1930, 40년대에 일본에서 디자인과 공예를 공부했던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강창원(1905-1977) 1933년 동경미술학교 칠공과 졸업, 이병현(1911-1950) 1934년 일본미술학교 도안과 졸업, 유강렬(1920-1976) 1944년 일본미술학교 공예도안과 졸업. 김종균. (2008). 한국디자인사. 미진사. 52쪽 참조.

8) 조선산업미술가협회는 1948년 정부수립 후 대한산업미술가협회로 개칭하여 현재에도 활동 중이다. 조선상업미술가협회와의 긴장관계에서 출범한 이 협회는 1946년 5월 21일부터 31일까지 동화백화점(구 미쓰코시백화점)에서 <조국광복과 산업부흥전>이라는 창립전을 개최했다. 이 전시회에는 한홍택을 비롯한 10명의 작품 36점이 전시되었는데 관광, 화장품, 산업건설, 등산, 박람회, 상품, 영화, 8·15기념 등을 주제로 한 포스터들이었다. 이후 매년 회원전을 열고 1965년부터는 공모전도 개최했다. 1970년대까지 회원전에서 자주 다루어진 주제는 관광과 산업, 건설 등이었다. 이경성. (1978). 산미 30년전. 월간디자인 6월호 참조.

9) 한홍택은 작품집 출간 배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실 이번 작품집 발간은 우연한 일이었어요. 그동안 초창기 때부터 쭉 해온 작품들을 모아 두었었는데 하루는 제자들이 와서 사진을 찍겠다고 해서 보여주었지요. 그때 작품들을 다 사진으로 찍어두었는데, 그 뒤 제가 미국엘 나갔어요. 몇 년 간 거기 갔다가 돌아오니 제자 백금남이 서둘러서 작품집을 내자고 했어요. 그러다가 또 차일피일하게 되어 몇 해가 지났어요. 그 후 둘째 아들 한운성(당시 서울미대 교수)이 다시 추진해서 박선의, 윤병규, 백금남 등이 중심이 되어 펴내게 되었지요.” 최범.(1988). 한국 그래픽 디자인계의 산증인, 한홍택. 월간디자인 7월호.

10) 한홍택 선생 작품집 발간 추진위원회. (1988). 한홍택 작품집 참조.

11) 역사학자에 따라서는 우리나라의 근대의 기점을 갑신정변으로 보자는 의견을 제기하기도 한다.

12) 일제시대에 폐교됨.

13) 한홍택이 동경도안전문학교에 진학하여 디자인을 전공하게 된 계기는 분명하지 않다. 작품집 발간 후 한 인터뷰에서 한홍택은 “도안에 무슨 특별한 뜻이 있어서는 아니고 유학하면서 그게 돈벌이도 되니까 한 것이죠. 그때 집에서 부쳐주는 돈만으로는 생활하기가 어려워서 도안으로 아르바이트를 했지요.”라고 밝힌 바 있다.

14) 한홍택이 일본 동경도안전문학교에 입학한 시기는 자료마다 연도가 다른데 생전에 한 인터뷰에서 한홍택은 입학 시기를 1935년이라고 밝힌 바 있다. 제국미술학교 입학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한국근현대미술기록연구회가 제국미술학교의 조선인 유학생들에 관해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한홍택은 1942년에 제국미술학교를 수료했다.

15) 당시 제국미술학교에는 이미 독일 바우하우스에서 교육을 받은 일본인들이 디자인교육을 하고 있었으며 한홍택 역시 이들로부터 직ㆍ간접적인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신희경.(2004). 제국미술학교의 도안공예교육과 조선인 유학생 - 한국 근대 디자인의 자료 조사 및 연구(1). 제국미술학교와 조선인 유학생들 1929-1945. 눈빛. 251쪽 참조.

16) 한홍택이 출품하여 입선한 작품은 <어부>(1939), <머플러의 소녀>(1940), <무희>(1941), <피리>(1942), <몸뻬를 입은 부인>(1943), <오후>(1944), <어느 여인의 상>(1944) 등이다.

17) 한홍택이 유한양행에 입사하고 퇴사한 연도는 자료마다 차이가 있어 정확하지 않다. 1942년 제국미술학교를 수료하고 귀국한 후 입사한 것으로 보이며, 퇴사 시기는 일부 자료에는 1954년으로 되어 있는데 그 후로도 자문활동 등을 통해 관계를 지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홍택이 근무하던 당시 유한양행에는 도안사가 5~6명 정도 있었는데 한홍택은 그 사람들을 감독하면서 일주일에 한번 씩 중역회의에 가서 광고에 대해 조언하는 등 디자인고문으로서의 역할을 했다. 최범. (1988). 한국 그래픽 디자인계의 산증인, 한홍택. 월간디자인 7월호 참조.

18) 동서울대학 산업기술연구소. (1999). 한국 디자인 사료의 DB화에 관한 연구: 1880~1980년대를 중심으로. 산업자원부. 128-131쪽 참조.

19) 1940년대 후반은 즉, 해방 후의 정세는 격동이라 할 수 있을 만큼 혼란스러웠으며 이는 미술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 시기는 미술계에서도 좌우분열이 심각하고 새로운 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만들어지던 때였던 것이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한 해 동안 조선미술동맹(한홍택, 김봉룡), 조선조형예술동맹(강창원, 박성삼, 한홍택, 정순모 등), 조선미술가동맹 조선나전칠기공예협회(김진갑), 조선산업미술가협협회(한홍택, 조능식, 조병덕 등), 조선공예가협회(김재석, 백태원, 강창원, 김봉룡, 박철주 등), 조선상업미술가협회(김중현) 등 7개 정도의 미술관련 협회가 만들어졌다. 한홍택은 1946년에 조선조형예술동맹에 회원으로 참여했는데 이 단체는 ‘신세대 미술의 건설과 미술단체의 통합을 목표로 한 기치’를 내걸고 조선미술가협회를 탈퇴한 32명이 주도하여 만든 것이었다. 이후 한홍택은 조선미술동맹, 조선미술문화협회, 한국미술가협회 등에서도 활동을 했다. 1946년 5월에 조선산업미술가협회가 창립전을 개최하기 전 김중현을 중심으로 1946년 3월에 조선상업미술가협회가 창립되었으나 세 차례 전시회를 개최한 후 더 이상 활동하지 않았다. 정시화. (2011). 디자인의 자율성과 독자성을 위해. 지콜론 10월호 참조.

20) 당시 국전에서는 전회의 1등 수상자와 심사위원장이 심사가 필요치 않다고 인정하는 자에 한해 무감사 대상이 되게 하는 제도를 운영하고 있었다.

21) 황부용. (1986). 회화적 접근. 월간디자인. 6월호 참조.

22) 1964년 서울도안전문연구소로 개칭.

23) 한홍택이 1969년에 홍대 교수직을 사직한 것은 디자인 업무가 너무 많고 바빠서 교직과 병행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이유는 알 수가 없다. 이경성. (1988). 한홍택의 생애와 예술. 한홍택 작품집. 한홍택선생 작품집 발간 추진위원회 글 참조.

24) 한홍택은 “중요한 건 화력(畵歷)이야. 화력이 풍부하지 않고는 작가가 될 수 없어. 화력이야말로 창작생활의 근본이지. 화력 없이도 디자이너로 행세할 수 있겠지. 그러나 그것은 오래 못가.”라는 말을 종종 했다고 한다. 최범. (1988). 한국 그래픽 디자인계의 산증인, 한홍택. 월간디자인 7월호 참조.

25) 박선의. (1994). 한홍택 선생을 추모하며. 월간디자인. 6월호 참조.

26) 사진과 사진제판 기술의 발전이 이루어지기 전인 일제강점기에 광고메시지는 주로 손으로 직접 그린 일러스트레이션이었다. 당시의 일러스트레이션은 단조로운 삽화풍의 그림이 대부분이었으나 한홍택의 작업은 회화적인 특성이 강조되어 있어서 ‘회화적 일러스트레이션’이라고 불렸다. 윤호섭. (1996). 일러스트레이션. 한국광고 100년. (사)한국광고단체연합회. 126쪽 참조.

27) 동서울대학 산업기술연구소. (1999). 한국 디자인 사료의 DB화에 관한 연구: 1880-1980년대를 중심으로. 산업자원부. 128-131쪽 참조.

28) 1916년생인 한홍택은 1940년에 일본에서 귀국했고, 1913년생인 김환기는 1937년에 귀국했다. 김환기는 일본 유학시절에 접한 입체파, 구성주의의 영향을 거쳐 후에 추상미술에 도달했다.

29)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서 냉전시대에 추상미술은 특히 미국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 미술과 대비되는 서구 자유민주주의의 이상을 표현하는 예술형식으로 자리매김하며 급성장했다. 우리나라의 추상미술도 1960~70년대 제3공화국과 유신체제안에서 같은 맥락으로 이해되었다. 1960년대 초반에 추상미술이 급격히 대두되면서 한국 화단에서 구상과 추상의 대립이 첨예해졌다. 이것은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현상이 아니라 유럽과 미국 등 서구에서는 우리보다 앞서 이러한 논쟁이 있었다. 국전을 중심으로 국내 화단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던 구상 계열의 작가들은 재야 여러 단체들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을 중심으로 추상미술이 활발하게 전개되자 위기의식을 갖고 이를 견제했다. 그러나 1960년대 배출된 각 미술대학 출신의 많은 젊은 작가들이 추상적인 작품을 시도함으로써 점차 추상계열이 힘을 얻게 되었다. 오광수. (2004). 한국현대미술사. 열화당 참조.

30) 이경성. (1988). 한홍택의 생애와 예술. 한홍택 작품집. 한홍택선생 작품집 발간 추진위원회 글 참조.

31) 1970년대 들면서 ‘한국적 디자인’을 표방하는 작업들이 선보이기 시작했는데, 그래픽 디자인을 중심으로 ‘한국미’, ‘한국의 이미지’, ‘한국의 멋’, ‘한국 패턴 디자인전’, ‘한국의 색’ 등과 같은 주제의 전시가 이어졌다. 김종균. (2008). 한국디자인사. 미진사. 135쪽, 149쪽 참조.

32) 후에 한국시각디자인협회(KSVD)로 명칭 변경.

33) 이순석은 1970년 서울미대에서 정년퇴임했고, 1972년에는 한홍택의 홍대시절 제자인 백금남이 첫 개인전을 개최했다. 또한 서울미대 교수인 조영제는 1975년에 데코마스전을, 김교만은 1976년에 첫 번째 개인전을 개최하는 등 1970년대 중반은 여러 모로 볼 때 그래픽 디자인계의 세대교체가 전면화 되고 구체화 한 시기였다.

34)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응용미술과 61학번. 국민대학교 조형대학 시각디자인과 명예교수.

35) 정시화. (2011). 디자인의 자율성과 독자성을 위해. 지콜론 10월호 참조.

36) 1946년 서울대의 도안과를 시작으로, 1947년 이화여대 미술과 도안전공, 1949년 홍익대 공예미술과가 신설됐다. 도안실습이나 도안법 등 표현력 중심의 실기수업으로 이루어진 초창기 이들 대학의 디자인 교육과정은 일본 동경미술학교나 제국미술 학교로부터 영향 받은 것이었다.

37) 일본 미술교육에서 그림을 뜻하는 말로 쓰이는 단어는 ‘회(繪)’, ‘화(畵)’, ‘도(圖)’ 세 가지이다. 기본적으로 전시회 출품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에는 ‘회화(繪畫)’라는 말을 사용하고 소학교와 중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도화(圖畵)’, 메이지 시대 초기의 측량도와 제도 같이 실용적인 의미로는 ‘화도(畵圖)’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엄광현. (2010). 미술에서 아트로: 일본 근현대미술에서 번역어 “미술”의 개념 성립과정. 도시 속의 예술프로젝트: 공공미술의 핵심개념에 대한 소고 심포지엄. 인천문화재단 참조.

38) 신희경. (2004). 제국미술학교의 도안공예교육과 조선인 유학생 - 한국 근대 디자인의 자료 조사 및 연구(1). 제국미술학교와 조선인 유학생들 1929-1945. 눈빛 참조.

39) 한홍택 디자인의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서구 모더니즘이 동아시아 전통사회에 유입되는 과정과 그 영향에 대한 보다 엄밀한 조사와 체계적 연구가 필요하다. 또한 일본의 영향과 기술적 한계, 그리고 정부정책의 변화 등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근대성의 시각적 발현 양상과 관련해서는 후속 연구를 통해 고찰하고자 한다.

40) 대학교육이 일본 유학생 중심에서 서구, 그 중에서도 미국 유학생 중심으로 전환된 것은 디자인분야만이 아니라 1960년대 이후 우리나라 대부분의 학문 분야에서 동시에 이루어진 현상이다.

41) 실제로 김교만과 백금남을 비롯한 많은 그래픽 디자이너들이 중고등학교 시절에 우연히 접한 한홍택의 개인전과 대한산업미술가협회의 회원전 등의 전시회를 계기로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하게 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42) 국전에 ‘디자인부’를: 산업미술가협회 건의, 1965년 11월 11일자 경향신문.

43) 상공미전의 출범과 관련하여 박대순은 1993년 5월 22일에 있었던 홍진원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밝힌 바 있다: 1965년 구 서울신문사 프레스센터에서 서울여대 공예과 졸업준비회 준비를 도와주던 박대순과 상공부 관리 오원철(201공업국장, 나중에 청와대 경제수석), 유각종(경공업과장, 후에 동자부 차관)이 만나게 된다. 자리를 옮겨가며 공예품 수출에 관한 많은 얘기가 오가고 이때 박대순은 국전 같은 전시회와 그것을 준비할 공예인 간담회를 제안한다. 그리고 공예인을 대표해서 추진할 인물로 은사인 이순석을 추천한다. 이렇게 해서 공예인 간담회가 열리게 되고 거기에서 상공미술전람회가 탄생하게 된다. 홍진원. (1993). 한국 대학 디자인교육의 역사적 전개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58쪽 참조.

44) 대한산업미술가협회 공모전과 상공미전의 관계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인 고희동이 주도하여 1921년에 처음 개최되었던 서화협회의 협전과 1922년에 총독부 주최로 창립된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의 설립배경 및 발전과정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협전에 자극을 받아 일 년 늦게 시작된 선전은 출범 후 총독부의 정책적인 지원을 받아 해를 거듭하면서 권위 있는 관전의 면모를 갖추어갔다.

45) 주윤정. (2005). 식민지적 근대성과 일상생활론. 한국사회사학회 2005년도 특별 심포지엄: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와 일상생활의 변화. 한국사회사학회.

46) 한홍택은 「월간디자인」1976년 12월호 기고문을 통해서 “나의 활동이 쇠퇴했다고는 보지 않으나 산미 일선에서 후퇴하고 산미 건설 30년 만인 1975년 산미총회에서 대표이사의 자리를 젊은 후배에게 인계했다.”라고 소회를 밝힌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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