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s of Design Research
[ Article ]
Archives of Design Research - Vol. 26, No. 4, pp.235-253
ISSN: 1226-8046 (Print) 2288-2987 (Online)
Print publication date Nov 2013
Received 24 Jul 2013 Revised 13 Sep 2013 Accepted 25 Sep 2013
DOI: https://doi.org/10.15187/adr.2013.11.26.4.235

Korean Craft-arts Culture of the Modern Era

ChangJuyoung
Department of Industrial Art, Chungnam National University, Daejeon, Korea
한국 근대기의 공예상황

Background Background This paper studies the development of craft culture throughout Korea’s complicated modernization era, during which industrial design and contemporary craft-arts began to see a division.

Method This study examines the internal and external aspects of modern Korean crafts. The external aspect study includes categorization of the craft products by their intended market, and by types of producers. The internal aspect study analyzes the social and cultural contexts of the political and ideological elements that influenced the crafts.

Results & Conclusion Modern crafts have reflected the social ideologies of their era. Modern-era Korean crafts were influenced by the social environment such as Japanese colonial culture and Confucianist ideologies more than by the creativity of individual producers.

초록

연구배경 본 연구에서는 현대적 공예와 산업디자인 개념의 태동기인 한국 근대의 공예가 복잡한 상황 속에서 전개되어온 양상을 개괄해보았다.

연구방법 당대의 공예 인식의 변천에 대한 설명과 더불어, 한국 근대 공예의 양상을 외형적·내부적 모습으로 구분하여 체계적으로 이해해 보고자 했다. 근대 공예의 외형적 모습은 공예의 생산주체의 고찰과 수요기반에 근거한 공예품의 분류로 정리해보았고, 내부적 모습은 생산과정에 개입한 정치적 이념적 요소라는 사회문화적 맥락에서의 분석을 통해 이해해보았다.

연구결과 및 결론 결국 근대의 공예품은 시대적인 상황과 사회적 이념을 반영한 것이었다. 개화와 문명,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자주와 독립, 자율과 통제, 전근대와 근대주의, 전통과 서구화, 수공업과 산업화 등의 공예환경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혼돈의 근대기를 거쳐 온 초기 장인, 공예가, 디자이너들의 의식은 시대 변화의 큰 폭을 따라가지 못했고, 한꺼번에 몰아친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기술적 경험을 소화하지도, 그 경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도 없었다. 근대기 공예 상황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보고 제 경향을 종합 정리해봄으로써 현대공예와 디자인으로 이어지는 분기점의 상황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하였다. 이로 인해 기존 연구의 폭을 넓히고 다각화한 것에 본 연구의 의의를 둔다.

Keywords:

Modern Craft, Craftsman, Artisan, Craft Arts, Artifacts, 근대공예, 장인, 공예가, 공예품

1. 서론

1.1. 연구의 배경 및 목적

한국 근대기의 공예에 관한 연구는 소수의 선학들에 의해 이제 겨우 기본 틀을 갖추기 시작했다. 이제 이를 바탕으로 근대 공예사의 다양한 시각과 방법의 심층적인 연구가 이어져야 할 것으로 여긴다. 본 연구에서는 현대공예와 디자인 개념의 태동기인 근대시기의 한국 공예의 양상을 개괄 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당대 공예인식의 변화과정을 고찰해보고, 근대공예의 상황을 외형적·내부적 모습으로 구분하여 이해해보고자 한다. 근대 공예의 외형적 모습은 공예품의 생산주체의 고찰과 공예품의 분류로 정리해보고, 내부적 모습은 공예의 생산과정에 개입한 정치적·이념적 요소라는 사회문화적 맥락에서의 분석을 통해 이해해본다. 이를 통해 근대기 공예의 제 경향을 종합 정리해보고, 근대 공예를 보는 새로운 이해와 시야를 확장하는 데 본 연구의 목적이 있다 하겠다.

1.2. 연구의 범위와 방법

‘근대’라는 개념의 설정은 역사학계에서도 주요한 논제 중의 하나이며, 아직도 일치되지 않는 논쟁이 지속되고 있는 간단치 않은 문제이다. 하지만 본고에서 연구의 범위를 한정하기 위한 ‘근대기’란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시대구분으로서 근대의 기점이 된 1876년 개항이후부터 일제의 통치가 완료된 시점인 1945년까지 상정하여 연구를 진행한다. 연구의 방법은 한국의 물질사, 경제사, 공예·디자인사 등의 문헌자료와 선행연구를 중심으로 위에 열거한 연구의 순서에 의거해 근대의 공예를 분류, 분석, 재정리하는 방법을 취하였다.


2. 근대 공예의 개념과 인식

2.1. 근대 공예의 개념

생활에 필요한 도구 만들기로서의 공예는 인류 초기부터 시작되었지만, 그러한 활동이 현재의 ‘공예’라는 의미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 일본을 통해서이다. 근대 이전의 공예(工藝)는 “백공기예(百工技藝)”의 준말로서 기술로 분류되는 것을 총칭하는 용어였다. 그 후 근대에 들어 공예를 인공으로 만든 모든 산물, 즉, 공업 또는 산업과 같은 제작기술 분야를 총칭하던 개념으로 사용하였다. 그 당시 공예라는 용어의 개념은 부분적인 기계수용과 수공예적 제작방식을 기반으로 한 장인의 제작품 전체를 포괄하는 개념이었다. 본고에서도 실용과 조형의 결합이라는 공예 본래의 형성원리와 더불어 그 시기에서 이해되던 인공물 전체를 망라하는 확장된 개념으로 규정하여 연구를 진행한다. 이러한 확장된 개념으로서의 근대기 공예는 해방 이후로 이어지는 현대미술공예와 산업디자인의 각 갈래까지 잠재되어있는 그 모태가 되는 개념으로 볼 수 있다.

2.2. 시대적 배경과 공예인식 상황

19세기 후반기의 한국사회는 내부적으로는 봉건사회의 해체의 징후가 뚜렷해지고, 밖으로는 선진 자본주의 세력의 침탈이 본격화되는 시기였다. 이 시기 사상가들의 시대인식이란 일차적으로 반봉건과 반제국주의였다. 이러한 와중에 한편으로는 당시의 피폐한 경제를 살릴 수 있는 서양의 이기(利器)에 주목하였는데, 핵심 관건은 서구 문물의 수용 여부였다. 최공호(Choi, 1996)에 의하면, 개화정국에서는 ‘공예’를 산업과 통합적 관점에서 경세적 기능을 가진 국가 기간산업으로 인식하였는데, 이는 부국지술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공예관의 고찰을 통해 유학자들과 당대의 현실인식과 실천의 다양한 방법을 확인할 수 있다.

2.3. 조선 성리학의 공예관

성리학의 말업관(末業觀)은 상공업의 생산활동에 부정적이어서 절용적 생활태도를 강조하였다. 일상용 공예품에 적용되었던 절용주의적 정책 지표는 생산 활동 보다는 절제된 소비생활에 중점을 두었다. 결과적으로 공예양식의 다양한 발전을 저해하고, 기술의 퇴조와 공예품의 질적 저하 현상을 초래하였다. 또한 신분적 질서를 강조하는 유교적 봉건사회에서, 공예품 제작을 담당했던 장인(匠人) 계층은 공상천례(工商賤隸)라 하여 노비와 같은 신분으로 여겨졌다. 미술은 당시 사대부 문인들이 문장과 함께 갖추어야 할 교양으로 받아들였지만, 공예품을 만드는 장인들은 사회의 최하층 집단으로서 천시를 당하였다.

2.4. 북학파의 공예관

북학파의 실학자들은 중농주의적 경세치용학파와 상공업의 생산과 유통, 기술 혁신을 강조하는 중상주의적 이용후생학파 중심으로 나누어졌다. 북학파의 대표적 실학자인 박제가(Park, 2011)는 서양의 선교사를 초빙해 ‘경세적용지인재(經世適用之人材)’를 양성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재물은 우물과 같아서 퍼 쓸수록 가득차고 이용하지 않으면 말라버린다. 비단을 입지 않으므로 비단 짜는 사람이 없다. 따라서 그릇이 비뚤어지든 어쩌든 개의치 않으므로 공묘함을 일삼지 않아서 공장(工匠) 과 도야(陶冶)가 없어지고, 또 기예도 없어졌다.”며 성리학적 말업관과 절용주의적 정책에 한탄하였다. 기술개혁론인 기예론(技藝論)은 성리학적 경세관을 수정하는 혁신적 인식으로 물산의 흥업과 제작기술의 개량 등 상공업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공예의 질적 향상과 개량을 강조하였다.

2.5. 위정척사파(수구론자)의 공예관

위정척사파들은 서도(西道, 천주교)와 서기(西器) 등 서양의 문물을 모두 사학(邪學) 으로 보고 철저히 배격함으로써 고유의 문명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특히 ‘공(工)’과 ‘상(商)’은 ‘기기음교물’(奇技淫巧之物:기묘한 재주와 요사한 기술로 만든 물건)이라면서 인간의 사치와 욕망을 자극해 순풍양속(醇風良俗)을 해친다고 했다. 최익현(Choi,1876)은 토지에서 산출되는 농산물은 필수품으로 보고, 인공의 산물인 공예품은 사치품으로 보는 관점으로 외국문물의 수용의 폐해를 지적하였다. 이는 공예품을 자연산물에 대립하는 소모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한계점을 드러냈다. 이숙인(Lee, 2001)에 의하면, 그들은 형식적인 제도가 바뀌면 본질인 의리도 떠나가는 것으로 이해하여 서양문물의 수용을 거부하면서, 서양문물에 내포된 물질주의적 탈윤리성을 지적하고 민족의식의 각성과 서양문명의 본질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주창했다.

2.6. 동도서기파(개화론자)의 공예관

동도서기파들은 서도(西道)와 서기(西器)에서 서기 만을 선택하여, 국가의 경제 자립을 위한 근대화에 대한 의욕과 공예기술의 개량의지를 보이며, 시무(時務)를 중심으로 개화와 공예를 이해했다. 이구열(Lee, 1992)에 의하면, 장지연의 황성신문 논설 「논공예장려지술(論工藝奬勵之術)」은 당시의 공인·공장 사회의 실정과 서양에서의 공예미술의 다채로운 발달상에 자극되어 공예의 시급한 진흥대책이 필요함을 언급하고 있다.

2.7. (급진)개화파(개혁론자)의 공예관

이숙인(Lee, 2001)에 의하면, 서도와 서기, 모두를 수용한 급진 개화파의 개화 이념은 유교전통이 지닌 폐단을 비판하였다.

2.8. 일제 강점기: 이왕직미술품제작소와 조선미술전람회의 공예관

공예와 산업이 분화되기 시작한 시점으로, 그 동안 진행되던 근대기의 대외인식론이 수구와 개화라는 이원구조로 나누어졌다. 그러면서 민족주의 진영의 견해가 집약되었는데, 최공호(Choi, 1999)에 의하면, 이왕직미술품제작소는 “제조법은 비록 개량할지라도 의장(意匠)은 총히 조선식으로 할 것”을 천명함으로 전통의 복원과 계승의지를 확고하게 표명하였다. 이후 총독부 정책에 의해 그 의도가 변질된다. 조선미술전람회의 공예부를 통해 미술공예적 근대 공예관이 생성된다.


3. 근대기 공예의 생산주체들

장인(匠人)은 손의 솜씨로 여러 가지 물건을 만드는 사람으로, 흔히 공장(工匠), 장색(匠色) 등으로 이칭 된다. 김헌선(Kim, 1996)에 의하면, 전통적인 수공업에 종사하는 장인은 천민 또는 하층민 집단이었다. 김종태(Kim, 1994)에 의하면, 장인은 대물림으로 이어지는 세습되는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류지연(Ryu, 국립현대 미술관, 1999)에 의하면, 대부분 20세기 초까지 제작된 공예 작품에는 작가의 이름이 알려진 바가 없으며, 작가미상의 익명성이 근대이전의 공예품의 특징이다. 이는 당시의 공예와 공예가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일면을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이후 공예가들의 존재는 조선미술 전람회에 출품한 작가로부터 확인되기 시작한다. 공예품은 실제 생활에서 쓰인다는 점에서 도구와 일맥상통하면서도, 생활과 감성의 풍요로움을 강조하는 예술적 미의식을 갖는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이러한 예술적 미감은 본질적으로 장인의 손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3.1. 조선말의 관공(官工), 사공(私工)

조선 후기의 관영수공업은 왕실의 수요에 대응하여 공장적(工匠籍)에 등재한 장인들의 사역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으로, 중앙의 각 관청에 속해 있는 경공장(京工匠)과 지방의 도나 현에 속해있는 외공장 (外工匠)으로 나누어졌다. 또한 민영수공업은 전업적 수공업과 농업 등을 주업으로 하는 부업적 수공업자가 있었다. 그러나 조선 말기 관영수공업은 차차 쇠퇴해가면서, 민영수공업의 비중과 역할이 커졌는데, 민영수공업자들의 활동은 주로 놋그릇, 농기구, 갓, 장도(粧刀) 제조분야에서 두드러졌다. 경공장의 관청수공업 체제가 붕괴된 이후 공예기술이 현저히 퇴조되었다.

3.2. 이왕직미술품제작소

‘이왕직미술품제작소'는 조선왕실에서 사용하던 양질의 왕실용품의 지속적인 생산과 공예의 전통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1908년 대한제국 황실에서 설립한 근대공예 여명기의 중요한 시설이었다. 최공호(Choi, 2010)에 의하면, 이왕직미술품제작소는 금속공예, 목공예, 도자공예, 염직공예와 제묵 등 기계제작을 제외한 수공예만으로 제작부를 개설하였고, 조직에 있어서 도안실과 제작실, 사무실 등 각기 임무가 다른 방을 두어 전문성과 효율성을 높이는 등 근대적 체제를 갖추었다. 초창기에는 궁중의 소용을 조달하기 위하여 왕실의 지원을 받고 출발하여 조선 왕실 공예품의 형식과 도면을 전범으로 삼아 공예품을 제작하였다. 설립초기 각 분야별 제작기술뿐 아니라 제작에 필요한 기초적인 도안을 그리는 방법도 가르쳤는데, 이러한 면에서 이 시설을 초기형태의 공예교육기관으로 간주할 수 있다. 또한 이곳에서 작업하고 교육을 받았던 장인들이 이후 근대 공예계를 이끄는 초기 근대공예가 집단이 되었다. 김진갑, 이학응, 장기명 등이 바로 이왕직 미술품제작소에서 배출된, 무명의 장인에서 이후 근대공예가로 불릴 수 있는 첫 번째 세대라고 볼 수 있다. 본래 이 기관은 한성미술품제작소(1908~1910)로 설립되어, 이왕직미술품제작소 (1911-1922)에 이어 주식회사 조선미술품제작소(1922-1930)로 이름과 체제의 변화를 거치는데, 운영자와 운영방법이 바뀌면서 점차적으로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고 설립취지가 퇴색하게 된다. 초기에는 조선왕실 및 고급수요층의 취향과 요구를 바탕으로 제작되다가, 후에 일본인 중심의 판매조직이 결성되어 일반판매에 나서게 된다. 최공호(Choi, 2010)에 의하면, 운영권이 일본인에 의해 주도됨으로써 ‘오동문’등 일본식 문양과 기형이 등장하게 되고, 이어 후기에는 일본을 비롯한 외국의 수집가들을 위한 청자나 금속기의 도안이 제작, 일본 취향의 공예품이 생산되었다.

3.3. 관립공업전습소

1907년 근대적 기술교육이 시작된 곳으로 1904년 대한제국이 설립한 농상공학교가 해체되면서 만들어진 교육기관이다. 염직과, 도기과, 금공과, 응용화학과, 목공과가 있었으며, 근대적 제작방식과 양식이 소개되고 교육되었다. 초기에는 수공예 인력 양성에 초점을 두었으나, 점차 기술자 양성을 위한 체제로 전환되었다. 이곳에서 수공예 시스템의 개량을 통한 기계생산방식의 전환으로 산업화의 단계로 진입할 수 있는 기초가 마련되었고, 이후 공업적 기계생산에 의한 물건 만들기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전통공예로부터 현대적인 공업생산 기술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역할의 교육을 담당 하였다.

3.4. 기업적 공장수공업

가내수공업형태의 전업 독립수공업자들에 의해 대량생산되어 상품화된 제품들이 전국적 규모로 유통되었다. 그리고 점차 공장 수공업이 근대적인 기업적 수공업의 형태로 이행되었다. 대량 생산체제의 도입으로 소수의 장인들은 자본가나 기업가로 변신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기계 조작의 기술자, 노동자로 전락하게 되었다. 공산물은 공장에서 기계조작에 의해 대량으로 찍어내기 때문에, 예술의 영역은 제외되었으며, 장인들의 설 땅은 없어지고, 그로 인해 질적으로 조악한 물건이 생산된다.

3.5. 조선미술전람회(선전)

선전은 1921년 조선총독부의 문화통치의 일환으로 창설되었고, 제11회인 1932년부터 공예부가 신설되어 근대적 의미의 공예미술가가 배출된다. 공예가 조형미술의 한 분야로 정식으로 편입되면서 제작활동 전반에 전환기를 맞게 된다. 명실상부한 근대미술로서의 공예개념이 정착된다. 이로 인해 공예는 기계생산방식과 결별하고 공예활동은 산업으로부터 분리 된다. 선전 공예부 출품작의 경향은 조선시대 기형(基形)과 문양을 그대로 전승한 전통양식, 서양문물 영향의 과도기적 절충양식, 일본적 취향 등으로 분류된다. 최공호(Choi, 1996)에 의하면, 장인들에게는 과거 조선의 열악한 신분적 조건에서 벗어나서 창조적 예술가로 새로운 사회적 지위를 얻는 좋은 기회가 되었으며, 선전은 이러한 역할을 공인하는 등용문이 되었다. 1930년대에 선전 공예부를 통해 주목되었던 공예가에는 목칠 분야의 강창원, 김진갑, 장기명, 조기준, 김봉룡, 염색 분야에서 강욱형, 김재석, 문재덕, 그 밖에 금공, 지승(紙繩), 죽세, 편집공예의 이남이, 이만승, 전운룡, 정인호 등이 있다.

Figure 1, 2, 3

Award winners of Chosun Art Competitions(Craft-art dept)1. 이남이, 유기촛대, 2. 이만승, 지승기(紙繩器), 3. 강창원, 건칠16각화병(특선작)

3.6. 근대미술공예가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공예가들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작품을 출품하며 새로운 근대적 공예계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왕직 미술품 제작소 출신과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작가들을 중심으로 실명을 내건 공예가들이 등장하였다. 또한 일본에서 서구적인 현대적 감각의 응용미술 (당시 도안으로 통칭)을 전공한 이순석을 비롯한 당시 일본에 유학한 작가들은 현대감각의 조형을 다루었다. 이들은 공예의 본래적 기능에서 벗어나 미술사조의 영향으로 개인주의와 자의식을 표현하는 순수예술적 조형 작업을 하였다. 이들은 산업현장 보다는 전시회 활동에 치중했고 이후 대학에 공예전공 개설로 교직에 몸담게 된다.

3.7. 전승공예가

목칠공예가 김진갑을 중심으로 하는 전승주의적 공예가들은 장인적 공예기술을 가지고 활동하였다. 이들은 스승에게 이어 받은 전통기술로 전통적 공예품을 제작하였고, 기술의 전수에 힘을 기울였다. 전성규, 김봉용, 김정섭, 황인춘, 이학응 등을 들 수 있다.

Figure 4, 5

Award winner of Chosun Art Competitions(Craft-art dept)4. 5. 김진갑, 螺鈿茶棚, 나전탁자, 선전 입상작


4. 근대 공예품의 분류

4.1. 왕실용(왕실 생활용품, 제기, 의례(儀禮)용, 관상용) 공예품

과거 조선 왕실에서는 조의(朝儀), 제의(祭儀)등 국가적 행사에 사용되던 예기(禮器)들의 수요가 많았다. 그러나 구한말에 와서 전통수공업체제의 붕괴와 기계제 생산으로 인한 공예품의 질적 저하현상이 지속되자 '이왕직미술품제작소'를 설립하고, 공예 전통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하였다. 이곳에서 생산되었던 공예품은 제작형식상 엄격한 형식적 기준이 마련되어 있었고, 상당히 질이 높고 정세한 공예품의 제작되었다. 형식적 보수성이 두드러지는데, 특히 제기 형태의 양식적 변화가 매우 더딘 것이 이러한 인식을 증명해준다.

Figure 6. 7. 8

Fine Craft Art Products for Royal Use6. 이화문탕기, 7. 이화문작(爵), 8. 이화문화병, 1910년대 이왕직미술품제작소 제작

4.2. 박람회 출품용 공예품

과거 조선에서 제작되던 대중진헌용(對中進獻用)) 공예품은 중국에 보낼 진헌방물(進獻方物)로 명분 상 사대의 예(禮)에 따라 직공(職貢)을 충실히 수행한다는 뜻에서 일정한 격식을 갖추었다. 박홍갑(Park, 2009)에 의하면, 진헌품은 형식적 엄격성이 강조되었고, 성의를 다하여 만든 고급품이어야 한다는 의식이 보편화되어 있었다. 이러한 성격의 공예품은 개화기 이후, 박람회출품용 공예품과 비견된다. 교수신문(2012년 06월 04일)에 의하면, 이는 일본과 러시아 등 열강의 압력이 심해지는 가운데 조선 나름의 국제 사회의 주체로 인정받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해석 된다. 최초의 박람회 출품은 1893년의 시카고 만국박람회였다. 주한미국 공관의 적극적인 주선과 협조로 정식 초청을 받고 참가했는데, 문일평 (Moon, 1945)에 의하면, 그때의 출품품목은 나전, 병풍, 비단, 발, 돗자리 등 이었다. 박람회가 끝난 후 그 물건들은 미국의 여러 박물관과 학교에 기증되었다. 1900년의 파리 만국박람회에도 한국의 공예품이 소개되었다. 이때엔 프랑스 공관의 주선과 협조로 이루어졌는데, 출품품목은 시카고 때보다 풍부하고 다양하였다. 목기, 도자기, 유기 등을 비롯하여 악기, 서책, 지속(紙屬) 등이었다. 그것들도 박람회가 폐막된 후 역시 파리의 여러 박물관에 기증되었는데, 당시 정부 파견 관사였던 민영찬(황성신문, 1901년 2월 4일자)은 「우리 물품이 너무 정려하지 못하여 값을 부를 수 가 없고 따라서 팔리지도 않았으며 남은 물건을 도로 가져오는 데에 운반비가 많이 들겠기에 기증하여 영구 보존케 하였다.」라는 말로 부끄러운 현지평가를 솔직히 보고하고 있다. 두 번에 걸친 구미만국 박람회에서의 우리 공예의 낙후성의 확인과 깨달음은 정부로 하여금 공예 장려정책을 검토하게 하였다. 1901년에도 스코틀랜드의 박람회에서 한국의 참가를 요청해 왔지만 정부의 관계당국이었던 농상공부는 「我韓製造品이 심히 정미치 못하여 供覽에 부족하기로」(황성신문 1901년 3월 7일자) 스스로 사양하고, 대신 국내의 공예진흥 및 개발을 서두르는 정책을 펴기 시작한다. 새로운 정부시책은 1902년 9월에 제정·발표된 농상공부령 「임시박람회사무소 규칙」으로 확인된다. 그 사무소에서는 전국의 여러 분야의 공장들이 만드는 공예품들을 수시로 사들이고, 상설 진열하여 품평시상 (品評施賞)함으로써 공장사회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그러나 앞서와 같은 농상공부의 공예진흥책은 그때 벌써 정부 각처에 침투하고 있던 일본세력의 침략적 관여와 교도를 빙자한 간섭을 받고 있었다.

Figure 9

‘The Chicago Record’s History of the World Fair(1983) p1679. 고종이 파견한 출품대원단 대표 4인의 모습

4.3. 수출용(외국인 취향 관상용) 공예품

일본을 비롯한 외국의 컬렉터들을 위한 청자나 금속기 등의 공예품이 생산되었다. 공장에서는 일본 수출에 선도적 역할을 할 수 있는 물품들이 도안으로 제작되어 대량으로 찍어져 나왔다. 일제의 상고 취향으로 급조되었던 모조품 청자가 대표적인 상품이었다. 시장산업을 추구한 조직적인 기업화 현상으로 주로 일본인들의 상업주의에 의해서 독점적으로 주도되었는데, 그들은 서울, 광주, 개성, 통영 등지에 대소 기업공장을 차리고 고려자기, 이조자기, 문방구 등 조선의 옛 공예 미술품의 모조 또는 모방품을 대량생산해서 해외시장으로 판매하였다. 그것은 시대적인 창조문화로서의 공예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4.4. 작품(공모전 또는 전시용), 미술공예품

공예작가들은 해외에서 도입된 각종 외국문물을 바탕으로 실생활에서는 사용할 수 없는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주로 순수미술공예로 분류된다. 조형예술의 한 영역으로서의 창조적 공예미술이었다. 1925년 파리 만국장식미술공예박람회에 출품했던 김봉룡과 전성규의 나전칠기가 은상과 동상을 차지하여 크게 뉴스가 되어, 사회의 인식계몽에 큰 역할을 하였고, 이로 인해 공예가들은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과거 천한 직업 이라는 의식에서 벗어나 공예가로서 자신의 미의식을 발휘하는 작품 활동을 하게 되었다. 또한 조선미술전람회에서의 공예부의 신설은 미술 작품으로서의 공예의 근대적 인식을 사회적으로 보편화시키는 데에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Figure 10, 11

Craft Arts10. 1925년 김봉룡의 파리세계장식미술품박람회 은상 상장11. 1933년 강창규작, 건칠반, 조선미술전람회 특선작

4.5. 상업용(기념품, 관광토산물) 공예품

일제강점기 일본인 관광객들은 오리엔탈리즘적 시선으로 식민지 조선을 바라보았고, 가장 조선적인 것을 찾았다. 때마침 야나기무네요시의 민예론과 조선자기 예찬으로, 전통적이고 향토색이 짙은 토산품에 주목 하였다. 그들의 눈에는 이국적이고 신기한 조선의 미술품과 기념품을 찾았고, 그러한 시각으로 사물을 소비 하였다. “미술제작소: 이왕직의 경영으로서 조선 특유의 미술품 조도품을 제작하였는데 그 후에 경영을 민간으로 넘겨서 지금은 주식회사로 되어있다. 특별히 대사현인 것은 아니지만 조선인이 어떠한 방면에 취향을 갖고 있는지를 알기에는 적합한 곳이다. 식기, 발식구(髮飾具), 혼수용구, 기타 일용품을 보면 일반적인 조선의 풍습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곳에서 선물을 구입하면 된다.” (경성부교육회, 1926년)는 안내글에서, 조선미술품제작소에서 생산한 물건을 관광기념품이나 선물용품의 맥락에서 이해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후 일본 관광객들을 위한 관광기념품 제작소로 호명 되었고, 그 후 미군정기 지방특산품이라는 명목으로 질이 떨어지는 각종 키치적 공예품이 성행하였다. 물산장려운동 과정에서 지역특산품으로 제작된 복고적 도자나 관광민예품 성격의 전승도자 등이 있다.

4.6. 일반생활용품, 공산품, 민속공예품

조선 말기 백자의 가치가 하락하면서 산업화된 도자가 출현하고 확산되었다. 이들은 국가의 정책 지표나 지배이념에 영향 받으면서 제작되었는데, 제작형식 상의 기준이 마련되었다. 즉 사치의 폐풍을 경계하고 민풍사습 (民風士習)의 교화를 도모하여 거칠고 질박한 공예품을 제작하였다. ‘덕(德)은 본(本)이요, 재(材)는 말(末)’로 보는 유교의 본말론(本末論)의 절용주의적 경향을 보인다. 박충석(Park, 1990)에 의하면, 도덕적 실천에 대하여 경제적 실천은 가치의 차원에서 말단에 위치하는 것으로 여겼다. 경제활동을 소인배의 행동으로 비하하고, 생산보다는 소비의 절용에 중점을 둔 ‘생재론’에 이념적 기반을 두었다. 이로 인해 일반인들은 거칠고 질박한 공예품을 소비 하였다. 이러한 유교적 성향은 오랜 시간 조선인의 이념 속에 각인된 것으로 이러한 이념에 근거한 미감은 시대가 변하여도 쉽게 변하지 않는 것이었다.

Figure 12, 13

Korean Markets12. 구한말 청계천 만물상점, 13. 마포나루 인근의 도기시장

4.7. 외국산 수입물품(신문물)

개항 이후의 조선과 대한제국 정부가 추구한 근대화 정책으로 국내장시(場市)에서는 생필품을 중심으로 수입상품이 범람하였는데, 서구 자본주의국가들의 상품들이 중국을 통하여 수입되기 시작하였다. 김신웅(Kim, 1985)에 의하면, 17세기중엽부터 수입되기 시작한 서구 자본주의 국가의 상품들은 국내 상품 발전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독립신문>(1897.8.7) 논설에는, “…지금 전국의 상업과 공업은 다 타국사람에게 빼앗기고 입고 쓰는 물건이 다 외국물건이다…. 심지어 사기그릇까지 외국 것을 쓰니…”라고 쓰고 있다. 최건(Choi, 1999)에 의하면, 산업기반이 급속하게 황폐화된 것은 성리학의 실천이념인 검소 절약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기술과 조형의 향상의지를 제한한 데 일차적 원인이 있다하였다. 또한 고급 도자 등 생활용품의 생산과 소비를 특정 계층으로 제한하여 사회일반의 다양한 수요욕구를 억제한 결과로도 분석할 수 있다. 상공업의 비약적 발전으로 폭 넓게 등장한 고급용품 수요자들은 자연히 중국과 일본으로부터 수입한 산업화된 화려하고 장식적인 물건에 눈을 돌리게 되었고, 국산의 생산기반이 위축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유선영(Yoo, 2004)에 의하면, 19세기 이후 하나의 경제적 문화적 세력을 형성한 도시의 부유한 상인, 자본가, 중인들은 양반문화, 민속문화와는 뚜렷이 구분되는 정서구조를 반영한 새로운 문화양식과 통속문화를 발전시키고 주도해갔다. 이들 새로운 계층군은 신문물의 소비층으로 부상하였다. 또한 개화기 이후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왕실과 귀족들의 생활양식의 서구화 현상은 눈에 띄었다. 의복의 변천으로 귀족은 물론이고 군인, 학생들까지 양복을 입었다. 마차나 4인거 대신에 자동차도 들어오고, 가구도 서양식으로 대치되어 침대, 의자, 책상 등이 사용되었다. 이와 같이 생활도구로서의 서양공예가 근대화의 물결을 타고 조선에 전해지게 되면서 기능적이고 합리적인 서양공예를 모형으로 한 모방과 개량이 시도되었다. 이경성(Lee, 1975)에 의하면, 서양공예의 한국 정착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공예미술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촉진 시켰다. 그러나 서양공예의 도입은 엄밀히 말해 일부 상류계층에 국한 되었기 때문에 일반 국민의 재래적인 생활양식과 재래 공예품의 수요에는 즉각적 변화는 없었다.

Figure 14, 15,16

Modern Street & Modern Products14. 1920년대 명동거리15. 대흑옥상점의 신상품 광고, 황성신문, 1905년 1월 6일16.백자채색모란꽃무늬설탕그릇, 영국산(SF & CO England TVRIN), 황실생활유물


5. 근대기 공예의 사회문화적 맥락에서의 분석

5.1. 인공물 생산의 문화분석의 의미

국의 근대기는 전근대의 조선시대부터 개항을 거쳐 일제강점기에 이르는 급격한 변화의 시기이며, 이로 인해 공예의 생산 과정 에서도 통제와 타율이 지배했던 특수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생산 과정에 정치적 이념적 요인이 많은 영향을 미쳤음을 예상할 수 있다. 비단 한국뿐만이 아니라 각급 사회에서 인공물 제작에 관한 지원과 통제가 있는데, 생산과정의 정치적 요소의 개입 과정을 이해함으로써 인공물의 모습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까닭을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인공물 제작의 이념적 과정을 분석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근대 공예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배영동(Bae, 2007)에 의하면, 이념은 당대 사회가 신봉하는 가치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인공물 제작의 이념적 요소를 분석한다는 것은 인공물 제작을 당대 사회이념의 실천 행위로 파악한다는 뜻이다. 곧, 사람들이 어떤 이념에 기초한 인공물을 만들었는지, 그로 인한 그 결과물의 양상을 이해할 수 있다.

5.2. 생산과정에 개입한 정치적 요소의 분석

조선시대와 구한말에는 공예품의 생산에 있어서 뚜렷이 변별되는 제작 형식상의 지침을 국가에서 세우고 법제화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를 정책적 차원에서 중요하게 다루었다. 특히 박홍갑(Park, 2009)에 의하면, 과거 조선에서는 공예품의 제작 담당층인 공장(工匠)들을 관리하는 관청에서 국가와 왕실의 수요에 따라 제의용 예기(禮器), 중국에 보내는 진헌 방물 공예품 등을 제작하였다. 공예정책의 지표는 사용목적과 기능에 따라 각기 그 적용대상을 달리했다. 중종실록에 의하면(중종11년 (1516) 11월 2일의 예 참조), 공예품 제작 시설은 관리조직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으며, 포괄적인 원칙의 제시뿐만이 아니라 형태, 문양, 색채, 재료의 선택 등에 이르기까지 법전이나 법령을 통해 제작을 상세하게 규정하고 있었다. 일상공예품은 물론 특히 왕실의 의례용 공예품의 제작 시에는 도설(圖說)의 형식을 빌어 특별히 마련된 제작 규범이 엄격하게 준용되었다. 태조실록에 의하면(태조3년(1394) 1월 12일, 1월 15일 참조), 제작의 결과가 이 기준에서 어긋나거나 미치지 못하는 경우 장인은 물론 감관(監官)에게도 엄중한 문책이 가해졌다고 한다. 조형형식과 기능이 공예정책 기조에 의해 기본 틀이 형성되고 주도되었다. 이는 왕권의 명분과 통치 질서의 확고한 수립을 위해 제작형식 상의 기준이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공예품의 차등을 도식으로 규정, 공예품의 질과 형식의 차별화를 통한 계층의 분명한 변별을 수립하였다. 이는 이왕직 미술품 제작소를 통해 이러한 엄격한 형식이 계승되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이 생산에 주체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일본의 근대 공예체제를 우리나라에 그대로 적용, 혹은 일본의 편의에 맞추어서 변용하여 적용 하였다. 우리는 타자가 되어 전달하는 주체의 편의에 맞추어 수용하였다. 또한 조선미술전람회는 1932년부터 공예부를 설치하여 공예가들의 성공가도로서 경연장이 되었다. 선전의 심사위원들은 모두 일본인들로서 자신의 취향에 맞는 작품에 상을 부여하였다. 이로 인해 자연스럽게 선전에 출품하는 작가들은 일본인 심사위원의 취향에 맞는 일본풍의 공예품을 제작하게 되었다. 최은주(Choi, 현대미술관, 1999)에 의하면, 당시 선전에서 유행했던 양식은 서구에서 유입되어 일본에서 유행한 아르누보 풍의 다양한 문양을 세밀하게 장식하는 방식과 회화부에서 영향을 받은 사실주의적 묘사 및 도안화 양식으로 이를 모방하도록 부추겼다. 즉 선전에서 요구하는 예술적 취향의 공예품만을 제작하게 만들었다. 이처럼 역사적으로 한국의 공예품은 생산에 있어서 다양한 정치적 지원과 규제가 늘 있어왔기 때문에 각각의 목적에 부합하는 다양한 서열과 형태의 공예품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힐만-차트랜드와 매코히(Hillman-Chartrand & McCaughey, 1989)는 문화예술 조직의 주요 환경으로서 ‘국가’의 지원과 역할에 관한 연구를 하였는데, 이 연구는 국가의 문화적 지원에 관한 역할을 네 가지로 구분하였다. 그 중 네 번째의 ‘기관사 국가(engineer state)’에서의 국가는 예술을 정치적 목적에 활용하고 정치에 종속시키며 국가가 예술적 생산품을 소유한다고 한다. 서민수(Seo, 2011)에 의하면, 근대 이전부터 근대기에 이르는 한국의 예술문화 조직의 역사적 과정에서 나타나는 국가의 주요 역할을 ‘힐만-차트랜드와 매코히’의 기준에 적용시킨다면, 국가 또는 일제가 문화예술의 주된 소비층 역할을 담당하면서 정치적인 수단으로서 문화예술 조직을 지원했으므로 ‘기관사 국가’의 역할에 가깝다고 진단하였다.

5.3. 생산과정에 개입한 이념적 요소의 분석

조선시대 장인들의 역할은 제시된 제작기준에 따라 기술을 제공하는 기술 주체로서의 수동적 위치로 제한되어있었다. 애초부터 장인의 자율적 창의력을 발휘하기에는 한계를 지닌 구조였다. 그리고 박충석(Park, 1990)에 의하면, 일상용 공예품은 금제절목 (禁制節目)을 통해 고급 공예품의 제작을 통제하고 있었다. 거칠고 투박한 것을 유교적 세계관인 숭검정신(崇檢精神)과 결부하여 강조 하였다. 그러므로 공예품의 제작과 사용에 불필요한 장식과 금, 은, 비단 등 고급 재료의 사용을 억제토록 하였다. 채색하여 화려한 것은 경건하지 못하다고 여겨 결국 거칠고 질박한 것을 미덕으로 보아 이념의 실천으로 적용하였다. 정교한 기술을 발휘하는 일 자체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관점을 엿볼 수 있다. 최건(Choi, 국립현대 미술관, 1999)에 의하면, 도자를 예로 들어, 조선 도자의 핵심적인 특징은 도덕적이며 물질의 본성을 중요시 했던 이상주의적 도자였다. 19세기까지 조선이 지향해왔던 이상주의적 도자관은 해당사회에 보편적으로 형성되어있는 도자기에 관한 개념과 이해를 의미한다. 조선 후기 도자관의 특성은 사회적 관점에서 자원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사회일반과 국익을 도모한다는 의미에서 부국부민 (富國富民)과 이용후생(利用厚生)이며, 조형적 관점에서 조선 성리학의 실천이념인 검소 검약을 구체화한 절용주의(節用主義)였다. 그 이후 산업자본을 형성하여 상품화를 목적으로 했던 제국주의 열강의 중상주의적 도자관이 강요당한 기간이었다. 이처럼 시대별 이념이나 가치 등 시대정신이 공예 생산의 과정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한국의 미의식으로 추앙 받는 ‘소박미’는 당대 사회가 신봉하는 가치인 유교정신의 발현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근대기 공예의 내부적 양상의 분석으로서 각 공예품의 생산과정에 개입한 정치적 이념적 요소를 정리하면 아래의 도표와 같다.

Cultural Analysis in the process of craft production


6. 결론

이상으로 현대적 공예와 디자인 개념의 태동기인 한국 근대기의 공예의 양상을 개괄해보았다. 근대기의 공예인식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고찰하면서 개화기의 식민지 지식인과 조선인의 근대적 인식의 저변이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내재적 외래적 요소들이 혼재된 복합적인 성격이야말로 한국 근대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근대 공예의 생산주체에 관한 고찰과 공예품의 분류의 시도를 통하여, 다양한 목적과 종류의 공예품이 혼재하는 상황을 정리해 보았다. 이를 통해 단순히 전승공예와 현대적 미술공예의 이분법적 구조로 정리되어온 근대 공예의 상황을 보다 다양한 시각에서 고찰하고자 하였다. 근대공예의 생산 주체인 장인은 생산에 있어 자율성을 갖지 못한 수동적 위치에 있었고, 근대기에 유통되는 공예품들은 각양의 목적을 가지고 제작되었고, 소비되었고, 사용되었음을 확인하였다. 또한 공예 생산 과정에 개입한 정치적, 이념적 요소의 분석을 통하여 근대 공예의 양상을 이해해보았다.

결국 근대의 공예품은 시대적인 상황과 사회적 이념을 반영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지그프리드 기디온(Siegfried Giedion, 1948) 은 “우리 삶에 영향을 주는 것들에 대한 의식이 부재한 세대는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모르고, 어떤 목적을 갖고 있는 지는 더욱 모른다.” 라고 하였다. 개화와 문명,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자주와 독립, 타율과 통제, 전근대와 근대주의, 전통과 서구화, 수공업과 산업화 등 공예환경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혼돈의 근대기를 거쳐 온 초기 공예가, 장인들의 의식은 시대 변화의 큰 폭을 따라가지 못했고, 이러한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기술적 경험을 소화하지도, 그 경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도 없었다. 이상 한국 근대기 공예 상황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보고 제 경향을 종합하여 정리해봄으로써 현대공예와 디자인으로 이어지는 분기점의 상황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하였다. 이로 인해 기존 연구의 폭을 넓히고 다각화한 것에 본 연구의 의의를 둔다.

Notes

Citation: Chang, J. (2013). Korean Craft-arts Culture of the Modern Era : The Structure of Modern Craft and the Influence of Political and Ideological Elements in the Process of Production. Archives of Design Research, 26(4), 236-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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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1, 2, 3

Figure 1, 2, 3
Award winners of Chosun Art Competitions(Craft-art dept)1. 이남이, 유기촛대, 2. 이만승, 지승기(紙繩器), 3. 강창원, 건칠16각화병(특선작)

Figure 4, 5

Figure 4, 5
Award winner of Chosun Art Competitions(Craft-art dept)4. 5. 김진갑, 螺鈿茶棚, 나전탁자, 선전 입상작

Figure 6. 7. 8

Figure 6. 7. 8
Fine Craft Art Products for Royal Use6. 이화문탕기, 7. 이화문작(爵), 8. 이화문화병, 1910년대 이왕직미술품제작소 제작

Figure 9

Figure 9
‘The Chicago Record’s History of the World Fair(1983) p1679. 고종이 파견한 출품대원단 대표 4인의 모습

Figure 10, 11

Figure 10, 11
Craft Arts10. 1925년 김봉룡의 파리세계장식미술품박람회 은상 상장11. 1933년 강창규작, 건칠반, 조선미술전람회 특선작

Figure 12, 13

Figure 12, 13
Korean Markets12. 구한말 청계천 만물상점, 13. 마포나루 인근의 도기시장

Figure 14, 15,16

Figure 14, 15,16
Modern Street & Modern Products14. 1920년대 명동거리15. 대흑옥상점의 신상품 광고, 황성신문, 1905년 1월 6일16.백자채색모란꽃무늬설탕그릇, 영국산(SF & CO England TVRIN), 황실생활유물

Table 1

Cultural Analysis in the process of craft production

공예품 종류 양식상 특징 생산주체 소비주체 정치적 요소 이념적 요소
왕실용
공예품
질 높은 정세한 공예품,
형식적 보수성
이왕직미술품
제작소
왕실 및
고급 수요층
조선왕실 전범의
엄격한 형식적 기준
박람회 출품용
공예품
민영찬의 부끄러운
현지평가
장인,
전승공예가
국제사회 농상공부 공예진흥
책, 국가적 장려,
일본세력 침략적
관여간섭
국제사회에 한국
공예의 우수성과
주체성을 알리기 위함
수출용 공예품 외국인 취향으로
급조한 모조품
시장산업,
조직적 기업공장,
일본인 기업주
일본과 외국의 컬렉터 일제의 상고취향만족
공예작품
/미술 공예품
순수미술,
조형예술의 한 영역
근대공예가,
조선미술 전람회
전시용 선전은 전원
일본인 심사위원
상업용
공예품
(기념품/ 관광
토산물)
오리엔탈리즘적,
타자화된 전통적인
향토색짙은토산품
주식회사
조선미술품 제작소,
근대적 기업공장
일본인 또는
외국
관광객
일본인 시선으로
바라본 이국적,
조선관광 기념품
생활용품
/공산품
/민속 공예품
거칠고 질박한 공예품 공장 수공업, 산업화
된 공장
근대 한국의 일반인 사치폐풍 경계, 유교
의 절용주의 숭검정신
외국산 수입물품
(신문물)
화려하고 장식적인
물건, 기능적
합리적인 서양공예
외국의 기업 한국의 고급용품
수요자, 도시의 부유
상인자본가, 상류층
성리학 실천이념
검소절약 다양한
수요욕구
억제결과 국산생산
기반위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