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s of Design Research
[ Article ]
Archives of Design Research - Vol. 25, No. 2, pp.125-134
ISSN: 1226-8046 (Print) 2288-2987 (Online)
Print publication date May 2012
Received 07 Sep 2012 Accepted 29 Mar 2012

The International Style and Functionalism in the 1920s

LeeByeong-Jong
Division of Design and Art, College of Liberal Arts, Yonsei Uuniversity
1920년대 국제양식과 기능주의

The Bauhaus, which was founded as an art school through the efforts of the Arbeitsrat für Kunst Berlin to liberate art, focused on arts and crafts questions at first. It gradually developed experiments of neo-plasticism to express the technically oriented Zweck- mäßigkeit with fine geometric forms influenced by the Neues Bauen Movement in the 1920s. The Neues Bauen was an architecture and design movement for social engagement according to the growth of social ethics at that time. It pursued “the Machine Aesthetic” to visualize the equality of “the International” industrial culture by rejecting ornamentations for strict, ascetic and fine geometric forms in order to save materials. Its “Machine Aesthetic” with Sachlichkeit and Zweckmässigkeit culminated in the Weißenhofsiedlung. It was first and foremost diversified geometric form-giving experiments by the Zeitgeist pursuing a scientific rationality at that time. Therefore the Bauhaus and the Neues Bauen in the 1920s were far from the “International Style” or “Functionalism” which follows the functions of capital economic efficiency based on pragmatism defined since the 1950s.

초록

미술 해방을 위한 미술노동평의회의 노력으로 설립된 바우하우스는 미술과 미술공예의 물음들에 전념한 미술학교였으나, 점차 1920년대 신건축 운동의 영향을 받아 순수 기하학적 형태를 통해 기술지향적인 합목적성을 표현하는 다양한 신조형주의 실험을 전개했다. 신건축은 사회적 윤리의식의 성장으로 일어난 현실참여적인 건축과 디자인 운동이었다. 이는 장식을 배제하고 재료를 절약하는 엄격하고 금욕적인, 순수 기하학적 형태를 통해 “국제적” 산업문화의 평등을 표현해내는 “기계미학”을 추구했고, 바이센호프 주거단지에서 신건축이 추구한 즉물적이고 합목적적인 “기계미학”이 절정을 이루었다. 그러나 신건축은 무엇보다도 당시의 과학적 합리성을 추구한 시대정신 하에 다양하게 펼쳐진 순수 기하학적 조형실험을 추구하였기에, 1920년대의 바우하우스와 신건축은 1950년대 이후 직각의 입방체로 설명되는 ”국제양식“이나 실용주의에 입각하여 자본 경제적 효율의 기능을 따르는 ”기능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Keywords:

International Style, Functionalism, The Neues Bauen, The Bauhaus, 국제양식, 가능주의, 신건축, 바우하우스

1. 서 론

서양에서는 20세기로 접어들면서 산업사회로의 변화가 본격화 되었다. 자본주의적 사회계급체계와 산업생산체계가 그 모습을 분명히 드러냈고, 당대의 미술가1)들은 그러한 변화 속에서 미술의 새로운 비전과 사회변혁의 가능성을 보았다. 그리고 입체파와 미래파의 개념으로부터 사회개혁을 기대하며 미술의 형식적인 추상화와 기술적 이상화를 꾀했다. 그러한 변화를 펩스너(N. Pevsner)는 『근대건축과 디자인』에서 현대 서구 이성이 일궈낸 지고한 이상으로 평가하고, “건축이나 디자인이 결과적으로 공공적인 서비스가 되도록 하며 건축물과 일상용품이 디자이너의 미적 요구를 충족시킬 뿐 아니라 실용적인 목적을 완전하고도 적극적으로 충족시킬 수 있도록 디자인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2).

그 중에서도, 독일 바이마르 시대 미술가들이 건축과 디자인에서 즉물성(Sachlichkeit)과 합목적성(Zweckmäßigkeit)을 추구한 신건축(Das neue Bauen) 운동을 “과학과 테크놀로지의 진보”를 보여주는 “가장 희망찬 것들”이라 평했다.3) 그 신건축 운동은 1932년 MoMA에서의 전시『국제양식: 1922년 이후의 건축(The International Style: Architecture Since 1922)』을 통해 미국에 소개되었다. 거기서 미술사가 히치코크(H.-R. Hitchcock)와 존슨(P. C. Johnson)은 투명하고 간결한 양식요소를 갖는 모던 건축사례로서, 1920년대 신건축 운동을 주도한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그로피우스(W. Gropius), 미스 판 데어 로에(L. Mies van der Rohe) 등을 비롯한 83명의 건축가들의 대표작을 소개하면서 “국제양식”이라 명명했다.4) 그로부터 영미권에서는 페니 스파크가 말한 바와 같이, ”국제양식“을 ”기능주의(Functionalism)“와 동일시하고, “모더니즘(Modernism)”으로 정의하는 것이 일반화되었으며, 독일공작연맹(Der deutsche Werkbund)과 그로피우스와 미스 판 데어 로에의 바우하우스(Das staatliche Bauhaus)를 그 전형으로 꼽았다.5)

그러나 우리가 “모더니즘 = 기능주의 = 국제주의” 라는 공식과 함께 독일공작연맹과 바우하우스를 그 전형으로 인식하게 한 것은 무엇보다 정시화의 『현대디자인연구』와 『산업디자인 150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6) 그로부터 “기하학적인 간결한 형태”7), 특히 직각의 간결한 디자인을 “기능주의”디자인이라 여기며 “국제주의 양식”8) 또는 “모던 디자인”이라 부른다. 즉 “모더니즘”이나 “국제주의” 혹은 “기능주의”라는 것은 무엇보다 “합목적적 기능”의 실현에 역점을 둔 결과로서의 “기하학적인 간결한 형태”로 설명되는 양식적 경향을 지칭하는 서로 다른 이름인 것이다. 그리고 김민수는 이러한 양식에 대해 『모던 디자인 비평』에서 “기능주의”로 대변되는 “국제양식” 또는 “모던 디자인”을 반미학적 (기계)미학으로서 기능성과 객관성의 강조를 통해 “공산당 선언문”과도 같은 익명성과 평등성을 드러낸 것이라 비판하였다.9) 이러한 비판은 1970년대 이후 서구 ‘기능주의 비판’, 또는 ‘모더니즘 비판’에서의 주류 견해이기도 했다.

“모더니즘”으로 대변되는 “기능주의”, “국제양식”에 관한 논의에서는 대부분 바우하우스와 독일공작연맹이 주도한 1920년대 신건축 운동, 특히 바이센호프 주거단지(Weißenhofsiedlung)를 합목적적 기능 실현의 대표 사례로 꼽는다. 그러나 실제 그 사례들을 살펴보면, 일반적으로 논의되는 것처럼 “합목적적 기능”의 실현을 최우선으로 한 “기능주의”의 결과라기보다는, 오히려 엄격한 고전의 비례질서를 따르는 기하학적 입방체를 통해 새로이 개막된 산업시대의 “국제적(The International)” 산업문화의 평등을 표현해내는 기계미학(Machine Aesthetics)을 창조하는데 주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복원된 데사우 바우하우스 건축물들과 바이센호프 주거단지 및 다시 재생산되는 1920년대 제품들은 그룹 멤피스(Memphis)가 1981년 컬렉션 “신국제양식(The New International Style)”10)에서 선보인 몇몇 가구들을 연상시킨다. 이는 곧 지금까지의 “기능주의”와 “국제양식”에 대한 논의가 본질적으로 상충되는 모순을 갖고 있음을 대변해주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모순을 밝히는 것은, 21세기 디자인 미래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위해, 최근 다시 부각되고 있는 1920년대 신건축과 바우하우스에 대한 이해에 중요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 이를 위해, 본 연구에서는 “국제양식”과 “기능주의”의 대표 사례로 꼽히는 1920년대 독일 바이마르 시대의 독일공작연맹의 바이센호프 주거단지와 바우하우스의 사례들을 사회문화적 맥락 속에서 즉물적으로 조사, 분석하여 밝히고자 한다. 이는 곧, 1920년대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사회문화적 배경 속에서 당시 신건축의 대표자들이 접한 당대의 문제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추구한바가 무엇인가를 규명하는 것이다.


2.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

2.1. 역사적 배경과 시대정신

서구는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산업사회로 진입했다. 산업을 기반으로 지배권력을 장악한 시민(bourgeoisie)은 국가 이데올로기를 강화시키면서 그들의 보편적 합리성을 공고히 했다. 그에 따른 합리론은 측정과 계산이 가능한 수학적 인식만을 원형으로 삼아, 순수하게 양적인 요소만을 다루는 수학, 역학, 자연과학 등의 논리로 얻어진 실증적 지식만을 추구했다. 그리고 주체의 수리적 논리에 따라 대상을 수리적 함수관계로 파악하는 이분법적 인식론, 즉 기계론이 주류를 이루었다. 인간의 정신, 육체, 노동 모두가 기계론적 대상이 되었다. 그로부터 인간의 노동을 양적으로 측정하여 노동의 합리성을 꾀하는 테일러주의와 그 노동 합리성과 규격화를 기반으로 생산성의 극대화를 꾀하는 포드주의가 탄생했고, 모두에게 황금빛 미래를 열어줄 진리로 추앙 받았다.

그러나 전체주의적 폭력으로 국가를 지배하는 시민계급과 가축처럼 미천한 존재로 취급 받던 노동계급 간의 갈등은 사회존속의 근간을 위협하는 가장 큰 문제로 대두되었다. 사회문제를 극복하고 새로운 이상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단일화된 민중 속에서 미래의 희망을 찾았다. 그들은 계몽주의적 대중교육을 통해 주체성을 함양한 민중이 보편적 복지를 누리며 평등하게 살아가는 이상사회의 건설을 꿈꿨다. 그 한편에서는 마르크스(K. Marx) 이론을 바탕으로 국가와 계급을 극복한 국제(The International) 사회건설을 꿈꾸는 공산주의가 급성장했고, 다른 편에서는 자유주의와 사회주의가 넓은 공감대를 형성해나갔다. 그로부터 모든 과거의 역사적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전통과 대립하며 끊임없이 변혁을 추구하는 급진적 시대정신이 지배하는, “현대(Modern)”라는 새로운 시대가 개막되었다.11)

산업화와 함께 등장한 공장과 발전소는 그 압도적인 규모로 사람들에게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며, 그 폭발적인 힘으로 세상을 뒤바꿔 놓았다. 기관차와 자동차는 기존의 전통적인 거리와 시간개념을 여지없이 뒤엎어 버렸다. 경제성장과 함께 새로운 미래를 열어줄 것은 기존의 전통적인 생산방식이 아니라 산업적 대량생산방식이란 것이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현실이 되었다. 기계기술은 엔지니어에게 국한된 것이라는 기존의 관념이 깨지고, 모두가 기계에 열광하며 기계미학을 찾아나갔다. 특히 미술가들은 철강, 콘크리트, 유리, 합판 등과 같은 새로운 산업 재료들을 새로운 창조적 조형(Gestaltung)의 원천으로 보았다. 여객선, 기관차, 자동차, 항공기 등 기계들에서 기능에 충실한 합목적적 특성들을 경험하면서, 미술가들은 역사적 전통양식의 과도하고 불필요한 장식 일체를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여길 만큼, 미적 혁신에 대해 깊은 감명을 받았다. 기계들의 기능에 정확히 부합하는 정밀한 선의 흐름과 외관, 매끈한 재료의 표면, 계산된 경량화와 강도 등은 미적으로도 그에 상응하는 인상을 줌으로써 미술가들의 감수성을 자극했다. 그로부터 미술가들은 신기술에 주목하며 새롭고 흥미로운 조형실험들을 펼쳐나갔다.

2.2. 1920년대 미술운동의 사회문화적 배경

제 1차 세계대전 전후의 극심했던 사회적 혼란은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점차 사라지고, 입체파와 미래파 등의 아방가르드 미술운동 역시 사실상 종말을 고했다. 대신 그 자리에 제국주의가 지배적이었던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을 중심으로 신고전주의(Neo-Classicism)라는, 고전의 과시적 비례질서로 회귀하는 경향들이 자리 잡으면서 새로운 창조적 노력은 사라져갔다. 1920년대 말 오장팡(A. Ozenfant)과 르 코르뷔지에의 잡지 『신정신(L’Esprit nouveau)』에서 전개한 기계미학만이 예외적이었다.12) 반면, 제국주의가 상대적으로 취약했던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는 다양한 세계관을 어느 정도 자유롭게 펼쳐나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정치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는 환경으로 말미암아, 제자백가(諸子百家) 시대에 중국사상의 전성기를 맞이했던 것처럼, 바이마르 공화국 역시 “현대”를 주도하는 미술운동을 꽃피울 수 있었다.

전쟁에 패한 독일제국은 1918년 11월 혁명으로 붕괴되고, 사회민주당을 중심으로 바이마르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바이마르 공화국은 군부가 패전에 대한 책임회피를 위해 권력을 넘겨주면서 수립된 태생적 한계로 인해, 좌우익 모두로부터 공격을 받는 매우 취약한 정치적 구조를 갖고 있었다. 사회민주당은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의 영향을 미연에 차단하고자 룩셈부르크(R. Luxemburg)와 리프크네히트(K. Liebknecht)의 처형 등을 통해 좌익혁명세력을 무력으로 진압하고자 했지만, 11월 혁명세력은 계속해서 소련과 같은 노동자위원회 시스템을 이룩하고자 노력하면서, 점진적으로 사회문화 전 영역으로의 세력 확장을 꾀했다. 그러한 정치적, 사회적 환경으로 말미암아 다방면으로 자유로운 사상이 펼쳐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극심한 사회적 분열과 경제적 빈곤이 대부분 사람들의 일상을 좌우했다. 생존위기상황에 처한 노동자 가정과 극빈층은 당시 현대적이고 위생적인 생활양식을 누리기 시작한 계층과는 전혀 다른 양극을 이루었다. 실업과 빈곤으로 생존형 범죄는 주변 어디에서나 발견되는 일상이었다. 그래서 바이마르 시대는 이러한 사회적 문제를 중심으로 정치에서부터 미술에 이르기까지 사회 전 영역에서 강한 반목과 대립이 난립한 시기였다. 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 자유주의, 국가주의 등 각각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갈등이 벌어졌고,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이데올로기적, 미술적 입장 모두가 서로 뒤섞이며 미술에 대한 새로운 관점들이 다양하게 실험되었다.

11월 혁명을 전후로 공산주의와 이상적인 무정부주의를 표방하는 다다주의(Dadaism)와 표현주의(Expressionism)가 절정을 이루었고, 미술해방을 위한 오랜 노력의 결실을 일궈내고자 베를린에서는 11월 그룹이 결성되었다. 11월 그룹은 미술과 민중이 하나됨을 목표로, 미술이 더 이상 향락과 사치의 전유물이 아니라 민중의 행복과 삶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민중이 미술을 직접 향유할 수 있도록 모든 건축 활동에 공공성과 민중성을 강조했다. 기존의 미술 아카데미를 해체하고, 모리스(W. Morris)가 주창했던 바와 같이, “자유로운 생산노동으로서의 미술”을 창조하여, 생산현장에서 마이스터(Meister)에 의한 도제식 미술교육으로의 전환과 민중교육기관으로서의 미술관(Museum)의 부활시킬 것을 주장했다. 아울러 모든 공산주의적인 양식을 통해 국제적으로 혁명적인 통합을 이루어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이는 볼셰비키 혁명운동으로 전개된 구성주의와 매우 흡사한 것이었다.13)

바이마르 공화국의 볼셰비즘에 대한 대대적 탄압이 강행되자 11월 혁명의 한계가 매우 명백하게 드러났고, 표현주의와 다다주의 역시 결국 많은 것을 잃고 쇠퇴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성장한 정치 참여적 미술 이념들은 1920년대 동안 미술뿐만 아니라 모든 문화영역까지 아우르는,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놀라움과 감동을 주는, 그런 “현대 미술”의 창조적 성취를 가능케 했다. 그 “현대 미술”의 가장 큰 특징은 합리적이고 기술 중심적인 경향과 사회 참여적 역할에 중점을 두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새로운 재료와 기술의 가능성에 집중했고, 또한 국제적, 문화적, 정신적 교류가 활발했기에 가능했다. 러시아 구성주의 미술의 해외 첫 전시가 1923년 베를린의 판 디멘 갤러리(Galerie van Diemen)와 바우하우스 바이마르에서 “미술과 기술 – 새로운 통일(Kunst und Technik-eine neue Einheit)“이라는 주제로 열렸다. 또한 독일공작연맹과 바우하우스 안팎의 미술가들은 데슈테일(De Stijl) 운동에서 직각의 형태구조로 도입했던 입체주의의 조형언어를 받아들였다. 그 신조형주의(Neo-Plasticism)의 각진 형태와 어둡고 강한 선 등은 타이포그래피에서부터 건물과 가구에 이르기까지 모든 미술분야로 퍼져나갔다.


3. 독일공작연맹과 국제양식

3.1. 독일공작연맹의 즉물성과 합목적성 전통

독일어권에서의 즉물성과 합목적성 개념은 젬퍼(G. Semper) 등과 같은 건축미학 이론가들 사이에서 시작되었다. 1851년 런던 국제박람회를 통해 과도한 장식을 구사한 역사주의 양식의 문제가 명백히 드러나자, 영국에서부터 역사주의에 대항하는 미술개혁운동이 나타났다. 당시 몇 년 동안 영국에 머물렀던 젬퍼 역시 역사주의 장식문제에 집중하여 『기술적이고 구성적 미술 또는 실용미학에서의 양식(Der Stil in den technischen und tektonischen Künsten oder Praktische Ästhetik, 1860/63)』을 출간했다. 그는 거기서 양식적 개념을 실제적 욕구라는 고정변수와 재료, 기후, 인간 등의 유동변수 간의 관계로 결정된다고 보고, 그 변수들 간의 함수 관계식 정의를 통해 밝힌, 경험 과학적 이론을 제시했다.14) 특히, 모든 기술적 생산품은 기능의 구현과 생산을 위해 적용된 재료의 결과물이기에, 건축적 조형양식은 재료와 기술적 수준 및 통일된 양식을 추구하는 현대의 미적 표현형을 통해 결정되는 것이라 했다.

그러나 당대 가장 엄격한 고전주의 대표였던 바그너(O. Wagner)의 제자 호프만(J. Hoffmann)과 로스(A. Loos)가 그 누구보다도 독일공작연맹과 바우하우스의 기하학적 형태언어로 표현되는 즉물성과 합목적성에 직접적 영향을 끼쳤다. 특히, 로스는 『장식과 범죄(Ornament und Verbrechen, 1908)』에서 장식의 절제를 넘어 장식 자체를 완전히 부정했다. 그것은 무엇보다 금욕적 즉물성의 미적 윤리에 관한 것이었을 뿐, 형태와 기능에 대한 언급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림 1]

Kubus-Fauteuil, J. Hoffmann, 1910(우), Villa Müller, A. Loos, 1930(좌)

1904년 독일제국의 통상무역장관이 된 건축가 무테지우스(H. Muthesius)는 과거 역사적인 전통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현대적 재료를 사용하여 기계시대에 상응하는 표준화(Typisierung)를 통해 국제시장에서 독일 제품의 경쟁력을 높이고자 노력했다. 그러한 목표에 따라 독일공작연맹을 결성하고 그 방향정립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1914년 쾰른에서 열린 공작연맹회의에서 그의 “미래의 공작연맹작업(Die Werbundarbeit der Zukunft)“이라는 강연은 판 데 펠데(Henry van de Velde)를 위시한 그로피우스 등 대부분의 공작연맹 미술가들의 강한 반발을 사게 되었고, 그 유명한 “표준화논란(Typenstreit)“을 일으킴으로써 공작연맹은 결국 분열되고 말았다. 그 와중에도, 유겐트슈틸(Jugendstil) 선구자 중 하나로서 당시 공작연맹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고전주의 건축가 베렌스는 그 누구보다 즉물적이고 합목적적인 미술을 주장하며, 미술과 산업의 불가분의 결합을 추구했다. 특히, 그가 이끌었던 건축사무실에서 그로피우스, 미스 판 데어 로에, 르 코르뷔지에 등 후에 신건축을 선도해나간 대표적 건축가들이 일했던 것으로 말미암아 그의 즉물적 고전주의 조형관은 현대 디자인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3.2. 신건축운동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11월 혁명과정에서 미술가들에게 고취된 사회적 책임의식은 1920년대에 다시금 즉물성을 부각시켰다. 즉물성은 당시의 사회적 갈등에 대한 속죄적, 봉사적 측면에서 설정된 일련의 윤리적 규범과 같은 것이었고, 사회적 빈민화를 핵심 주제로 다루면서 현실 참여적인 미술경향으로 특징지어졌다.15) 그 당시 산업화과정을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경제성장과 함께 새로운 미래를 열어줄 것은 기존의 전통적인 생산방식이 아니라 산업적 대량생산방식이란 것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현실이었다. 그래서 산업기술을 기반으로 사회 통합적인 원칙을 따르고자 하는 미술이 부각되었다. 그 목표는 바우하우스의 예에서 잘 드러나듯이, 일상 삶에 봉사하는 새로운 미술로서, 즉 칸딘스키(W. Kandinsky)나 슐렘머(O. Schlemmer) 등이 추구한 바와 같은 총체적 미술로서 사회 전체를 아우르는 조화를 일궈내는 것이었다.16)

또한 그로피우스나 타우트(B. Taut)와 같이 유겐트슈틸 미술가로 출발했던 대다수의 표현주의 건축가들도 이제 즉물성을 따르면서 신건축으로 전향해나갔다. 신건축 운동의 목표는 사회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산업기술을 기반으로 새로운 건축의 미적 형태를 개발하는 것이었다. 새로운 재료인 유리, 철강, 콘크리트 등을 일관되게 사용하면서, 생산경제성을 따르는 단순한 형태와 구성방식을 찾아나갔다. 거기서 포드(H. Ford)의 자동차 『모델 T』는 지향해야할 대표적 성공사례로 꼽혔고, 테일러(F. W. Taylor)의 『공장관리(Shop Management, 1903)』17)의 소개와 함께 알려진 테일러시스템은 신건축 운동에서 따라야 할 원칙으로 부각되었다.18) 따라서 신건축 운동을 주도했던 마이(E. May)와 타우트는 테일러시스템에 입각한 세 가지 신건축언어의 경제적 기본원칙을 주창했다: 1. 장식을 배재한 사회적 경제성, 2. 구조설계와 시공의 낭비를 줄이는 구성적 경제성, 3. 형태적 엄격함과 금욕적 형태를 통한 보편적 객관성을 갖는 양식적 경제성.19)

그 때, 패전국 독일의 경제복구지원계획, 도스플랜(Dawes Plan)으로 미국의 자본이 유입되면서 신건축은 전성기를 맞이하고 대대적인 건설사업이 펼쳐졌다. 만하임에서 “신즉물성(Die neue Sachlichkeit)“이라는 전시회가 열렸다. 바우하우스는 신건축의 상징이 된, 그로피우스의 데사우 건물로 이전했다. 마이는 프랑크푸르트 건설개발 10개년 계획에 착수했고, 표현주의적인 유토피아를 꿈꿨던 타우트는 공동주거단지건축으로 즉물성과 신건축의 직접적인 성장을 보여줬다. 신건축 운동은 무엇보다 도시에서의 심각한 사회적 문제의 해결하기 위해 저렴한 주거공간을 목표로 테일러시스템에 입각한 경제적 합리성과 합목적성을 추구했다. 주택은 기능적인 주거공간으로 분할되었고, 공간의 기능에 따라 생물학적 최소 소요공간이 과학적인 분석을 통해 결정되었다. 또한 신체조건에 적합한 가구의 표준치수도 개발되었다. 이로부터 최소한의 공간으로 철저히 계획된 대단위 주거단지가 대량생산방식으로 규격화된 표준부품을 사용하여 건설되었다. 건물기초에서부터 주택기초와 실내설비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합리성에 따라 합목적적으로 만들어졌다. 그 중에서도 독일공작연맹을 중심으로 신건축의 주도적 건축가들이 공동으로 참여한 슈투트가르트의 바이센호프주거단지(Weißenhofsiedlung) 건설은 ”현대 미술“로의 길을 개척한 신건축 운동의 가장 대표적 성과로 손꼽힌다.


4. 국제양식의 전형과 기능주의

4.1. 바이센호프 주거단지

바이센호프 주거단지는 1927년 독일공작연맹 전시 『주택(Die Wohnung)』의 중심 프로젝트였다. 그 전시는 당시의 심각한 주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최소의 면적 내에서 편안하고 실용적이며 모든 욕구를 충족시키는 주택을 실현한 것으로 소개되었다.20) 거기에서는 “주택문제의 합리적 해결”을 목표로 하여, 무엇보다 재료를 절약하는 가장 최상의 디자인 개발을 추구했다. 그래서 일상의 모든 생활영역에서의 조사와 분석을 통해, 주거생활에서의 시간과 노동력 및 재료를 절약할 수 있는 최소의 주거공간, 즉 르코르뷔지에가 주창한 “주거를 위한 기계”를 표준화된 부품으로 건설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했다. 그것은 합리성을 기반으로 장식과 같은 비합리적인 것 모두를 배제하고 건축에서의 “국제적” 법칙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재료에 맞춰 구조설계를 결정하고 구조가 형태를 결정하는, 어디에서나 보편타당한 법칙을 따르는 새로운 건축양식을 이루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 “국제적” 신건축 양식의 두 가지 핵심 축은 “기계미학”을 대변하는 단순한 기하학적 입방체 형태와 표준부품의 사용으로 설정되다.

[그림 2]

르코르뷔지에 주택, 바이센호프 주거단지

[그림 3]

오우드 주택, 바이센호프 주거단지

이러한 바이센호프 주거단지 프로젝트의 실현을 위해 미스 판 데어 로에를 총괄책임자로 선임하고 베렌스, 타우트 형제, 르코르뷔지에, 오우드(J. J. P. Oud), 슈탐(M. Stam) 등과 같은 당대 유명 건축가들을 초대했다.21)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유겐트슈틸 미술가로 출발했던 표현주의 건축가들이었으며, 그중 대다수가 고전주의자로서 신건축에 참여한 건축가들이었기에, 무엇보다 순수 기하학적 형태를 통해 “국제적” 산업문화의 평등을 표현해내는 “기계미학”을 창조하는데 초점을 맞췄다.22) 특히나 미스 판 데어 로에의 바이센호프 주거단지 초기 계획을 보면, 그 계획은 비즉물적(unsachlich)이고 미술공예적이며 심지어는 호사스럽기까지 했다.23)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이센호프 주거단지의 주택들은 괄목할만한 공간과 재료의 합리적 절약을 통해 즉물적이고 합목적적인 새로운 건축언어, 즉 엄격한 고전의 비례질서를 따르는 기하학적 입방체로서 표현되는 새로운 산업시대의 “기계미학”으로 완성되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원색과 무채색의 강한 대비를 갖는 공간들은 데 스테일 건축을 연상시킨다. 그 결과, 장식을 배제하고 규격화된 표준부품을 사용하여 재료와 구조 및 공간의 합리적 경제성을 실현시켰지만, 고도의 미술가적 “기계미학”의 실현에 따른 높은 건설 및 제작비용으로 저렴한 공동주택과는 거리가 먼 비자본경제성의 문제를 낳아 완공초기부터 비판을 받았다.24) 이는 비단 바이센호프 주거단지에서의 문제가 아니라, 마이가 주도한 프랑크푸르트 공동주택단지를 비롯한 대부분의 신건축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문제이기도 했다.

4.2. 바우하우스

미술과 민중이 하나됨을 목표로, 민중이 미술을 직접 향유할 수 있도록 모든 건축활동에 공공성과 민중성을 강조한 미술노동평의회의 노력에 힘입어, 그로피우스는 1919년에 바이마르 미술 아카데미(Kunstakademie Weimar)와 앙리 판 데어 펠데의 바이마르 미술공예학교(Kunstgewerbeschule Weimar)를 합병하여 국립 바우하우스 바이마르를 신설했다. 그로피우스의 바우하우스 바이마르에서는 파이닝어(L. Feininger)의 바우하우스 프로그램 표지 목판화에서 보여주듯이, 주로 표현주의에 기울어져 있었고 모리스의 미술공예운동이나 유겐트슈틸처럼 중세로 회귀하는 미술개혁의 방향을 시도했다. 미술의 통합에 있어서도 중세 성당 건축을 위해 건축가를 중심으로 미술 공예가들이 모인 길드, 돔바우휘테(Dombauhütte)를 모범으로 삼아 건축이 통합적인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텐(J. Itten), 무헤(G. Muche), 클레(P. Klee), 마르크스(G. Marks), 파이닝어, 슐렘머 등 그로피우스가 초기에 바우하우스로 초빙한 표현주의 미술가들이 바우하우스의 교육을 특징지었다. 이처럼 바우하우스는 미술학교로서 처음부터 오로지 미술과 미술공예의 물음들에 전념하였고, 독일공작연맹과 바이센호프 주거단지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르 코르뷔지에, 오우드, 슈탐 등과 같은 건축가들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판 데어 펠데의 유겐트슈틸 미술공예학교를 계승한 그로피우스의 바우하우스에 큰 변화가 찾아 온 것은 1922년 바이마르에서 테오 판 뒤스뷔르흐(Theo van Doesburg)의 데 스테일(De Stijl) 강좌가 개최되면서부터였다. 그는 특히 이텐이 가르쳤던, 주관적이고 미술중심적인 교육을 단호하게 반대하면서 바우하우스 마이스터들과 학생들을 데 스테일의 기하학적으로 명료하고 추상적인 신조형주의(Neo-Plasticism)로 이끌었다. 1922년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바우하우스의 두 번째 문장은 슐렘머가 신조형주의에 입각하여 디자인한 것이었다. 1923년 러시아 구성주의의 해외 첫 전시가 베를린의 판 디멘(van Diemen) 갤러리와 바우하우스 바이마르에서 „미술과 기술–새로운 통일(Kunst und Technik-eine neue Einheit)“이라는 주제로 열렸다. 그리고 이텐의 후임으로 대표적인 구성주의자인 모호이-노디(L. Moholy-Nagy)가 임용되자 데 스테일과 함께 구성주의의 합리적이고 기술 지향적인 방향이 도입되었다. 모호이-노디가 지도하는 금속공방에서 마침내 즉물적이고 합목적적인 현대디자인으로의 전환을 알리는, 산업적으로 생산 가능한 미술작업이 최초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학생들에게 나무, 은, 점토와 같은 수공예적인 재료를 버리고 산업적인 생산에 적합한 금속, 합판, 산업유리 등을 사용할 것을 권했다.

[그림 4]

바우하우스의 표현주의 문장 1919-22(우), 신조형주의 문장: 1922-32(좌)

[그림 5]

M. 브로이어 1922(좌), P. 켈러, 1922(우)

1925년 바우하우스는 바이마르 보수 정부의 탄압을 피해 “기능주의” 상징으로 꼽히는, 그로피우스의 데사우 바우하우스 건물로 이전했다. 그 해에 브로이어는 가구공방 마이스터로 임명되었고, 구성주의를 모범으로 삼아 스틸 파이프 의자들을 개발해나갔다. 그의 스틸 파이프 의자들은 타틀린(V. Tatlin)이 주장한 “인간의 몸에 적합한 형태”를 따르는 것이었다 당시 주거문제 해결을 목표로 경제적 합리성과 합목적성을 추구한 신건축 운동이 확산되자, 바우하우스 역시 산업표준화를 통해 폭 넓은 계층을 위한 저렴한 대량생산품 개발을 목표로 하고, 타틀린을 비롯한 러시아 구성주의자들의 국립 미술-기술 공방 브후테마스(Wchutemas, 1920-1927)를 모범으로 삼았다. 그러한 변화로 인해, 미술과 산업 사이의 학교 방향에 대한 내부 갈등이 붉어졌고, 학생들 사이에서 건축과의 부재에 대한 불만이 일었다. 그래서 1927년 구성주의 건축가 마이어(H. Meyer)를 초빙하여 건축과를 개설했고, 이듬해에는 그를 교장으로 임명했다. 그는 인간의 기본 욕구를 충족시키는 표준화된 제품을 대량생산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미술가의 모든 낭만주의적 경향에 반대했다. 그리고 교육의 과학화를 위해 심리학, 사회학, 경제학 등의 새로운 과목들을 개설했다. 기계화와 정치화를 추구한 마이어의 새로운 지도방향은 브후테마스와 학제구성과 교육프로램 및 생산미술의 지향 등 모든 면에서 닮은꼴이었고, 그 시기에 바우하우스의 즉물성과 과학적 합목적성은 절정을 이루었다.25)

그러나 1929년 대공황으로 그간의 다양한 정치적 입장들은 양극의 대립구조로 갈라섰다. 그 과정에서 그로피우스는 정치적 이유를 들어 마이어를 해임시키고, 그 후임으로 미스 판 데어 로에가 취임했으나 별다른 성과 없이 바우하우스는 1933년에 폐교되었다. 당시 마이어는 퇴임 직전에 공식 편지를 썼는데, 베를린에서 출간된 잡지 『일기(Das Tagebuch)』에 “바우하우스에서의 나의 퇴임(Mein Hinauswurf aus dem Bauhaus)”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그 편지에서는 “기능주의” 또는 “국제양식”의 전형으로 꼽히는 데사우 바우하우스의 디자인 실상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나는 취임하면서 무엇을 발견하였는가? 능력보다 명성이 몇 곱절이나 앞섰고, 이로써 전례 없이 크게 알려진 바우하우스. 각각의 찻잔에서부터 문제론적인 구성주의자인 척하는 그림이 만들어진 ‘조형대학’ … 그 안에서 파생되는 이론들은 삶에 올바른 디자인으로의 모든 길을 막아버렸다: 정육면체가 만능이었고, 그 면들은 노랑, 빨강, 파랑, 하양, 회색, 검정이었다. 이러한 바우하우스 정육면체는 아이들에게 장난감으로 주어졌고 바우하우스의 교만한 속물들에게는 놀이감으로 주어졌다. 정사각형은 빨강이었다. 원은 파랑이었다. 삼각형은 노랑이었다. 사람들은 가구라는 형형색색의 기하 도형 위에 앉고 잠잤다. 사람들은 주택이라는 채색된 입체조형물에서 살았다. 실내 바닥 위에는 어린 소녀의 정신적 콤플렉스가 카페트로서 놓여 있었다. 어디에서나 미술이 삶을 억압했다.”26)

[그림 6]

바우하우스 마이스터 하우스, 데사우 1925

[그림 7]

W. 타틀린, 1927(좌), M. 브로이어, 1928(우)

그런데 그로피우스의 바우하우스 건물과 마이스터 하우스 및 당시 공방생산품들을 보면, “기능주의”의 정점으로 꼽히는 데사우 바우하우스가 신조형주의 미술에 매몰되어 합목적성을 상실하고 순수 기하학적 미의 실험만을 했다는 마이어의 비판은 사실로 드러난다. 그래서 마이어는 인간의 기본 욕구를 충족시키는 표준화된 제품의 대량생산을 위해 즉물적이고 과학적인 합목적성을 추구했지만, 결국 다양한 내부 반대에 부딪혀 끝내 실현되지 못하고 말았다. 단지, 모호이-노디가 지도하는 금속공방에서 브란트(M. Brandt)와 바겐펠트(W. Wagenfeld) 그리고 브로이어(M. Breuer)가 만든 소수의 몇몇 제품들만이 예외적으로 대량생산에 적합한 합목적성과 함께 수준 높은 “기계미학”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 제품들 역시 저렴한 생산의 자본경제성과는 거리가 있었다.


5. 결 론

바우하우스는 미술학교로서 처음에는 오로지 미술과 미술공예의 물음들에 전념했으나, 1920년대 신건축 운동의 영향을 받아 점차 순수 기하학적 형태를 통해 기술지향적인 합목적성을 표현하는 다양한 신조형주의 실험을 전개해나갔다. 신건축은 사회적 윤리의식의 성장으로 일어난 현실참여적인 건축과 디자인 운동이었다. 신건축은 무엇보다 장식을 배제하고 재료를 절약하는 엄격하고 금욕적인, 순수 기하학적 형태를 통해 “국제적” 산업문화의 평등을 표현해내는 “기계미학”을 추구했고, 바이센호프 주거단지에서 신건축이 추구한 즉물적이고 합목적적인 “기계미학”이 절정을 이루었다. 히치코크와 존슨은 이러한 1920년대의 신건축을 1932년 MoMA 전시를 통해 “국제양식”이라는 하나의 양식으로 미국에 소개했다. 그러나 신건축은 하나의 통일된 양식이라기보다는, 당시의 과학적 합리성을 추구한 시대정신 하에 다양하게 펼쳐진 순수 기하학적 조형실험이었다.

그러나 신건축은 미국에서 하나의 양식인 “국제양식”으로 불리고, 그리너(H. Greenough)와 설리반(L. Sullivan)의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경구로 대변되는 ”기능주의“의 연장선상에서 양식적으로 해석되면서 ”기능주의“와 동의어가 되었다. 그로부터 ”국제양식“은 점차 획일적인 입방체 형태의 양식으로 정형화되고, 실용주의에 입각하여 자본 경제적 효율의 기능만을 따르는 통속적 ”기능주의“의 전형으로 설명되었다. 그렇게 양식으로 전형화된 ”기능주의“는 1950년대부터 독일을 비롯한 전 세계로 확산됨으로써, 일상의 획일화 문제를 심각하게 야기했다.27) 그 결과, “국제양식”과 “기능주의”를 획일화의 주범으로서, 바우하우스와 신건축을 그 근원으로서 강하게 비판하면서, “국제양식”과 “기능주의”를 극복하고자 한 “포스트모던(Postmodern)” 운동이 일어났다.

그로부터 오늘날 일정 수준 양식적 다양성을 다시 회복했는데, 그 중 적지 않은 양식적 경향들은 다시금 1920년대 바우하우스와 신건축에서 보여준 신조형주의 실험과 그 맥을 같이 할 뿐 아니라, 당시의 신조형주의 디자인 실험들이 디자인클래식으로서 다시 재생산되고 있다. 오늘날의 이러한 경향들은 1920년대 바우하우스와 신건축의 실체가 앞서 밝힌바와 같이, “국제양식”과 “기능주의”로 설명하는 기존 건축과 디자인 역사의 주류 담론과는 거리가 있음을 반증해준다. 그리고 향후에 바우하우스와 “기능주의”의 중심인물로 거론되는 그로피우의 유겐트슈틸에서부터 표현주의, 그리고 신건축과 (신)고전주의까지의 작업을 그가 발표한 선언문들과 비교 검토한다면, 1920년대 바우하우스와 신건축의 실체가 명확히 밝혀질 것이다.

[그림 8]

E. 소사스 전화기 Enorme, 1986(좌), M. 브란트 알레시 컬렉션, 2000년대(우)

Glossary

1) 이 논문에서 미술(Art, Kunst)이란 우리말에서의 관념적 의미와 달리, 20세기 중반까지 서구에서 말하던 고급미술(건축, 회화, 조각)과 공예 그리고 더 나아가 산업기술의 발달로 시작된 산업미술(industrial art)까지를 포함하는 개념으로 사용하며, 미술가(Artist, Künstler)란 그러한 미술의 전문가를 지칭하는 것으로 한다.

2) 펩스너, 근대건축과 디자인, 미진사 1991, p. 207

3) 앞의 책

4) cf. H.-R. Hitchcock, P. C. Johnson, Der internationale Stil 1932, Vieweg Verlag, 1985 Braunschweig

5) cf. 페니 스파크, 20세기의 디자인과 문화, 까치 1995, pp. 69-86

6) cf. 정시화, 현대디자인연구, 미진사 1997, 산업디자인 150년 미진사 1992, pp. 98-99, 132-134, 221-223; 이병종, 정시화의 <현대디자인연구>, <산업디자인 150년>, 월간 디자인네트 vol.33, 2000년 6월호, pp. 86-89

7) 정시화, <산업디자인 150년>, 앞의 책 p. 134

8) 정시화는 “국제양식(The International Style)”을 “국제주의” 또는 “국제주의 양식”으로 번역했다.

9) cf. 김민수, 『모던 디자인 비평』, 안그래픽스, 1994 pp. 75-93; 여기서 김민수는 바우하우스를 기능성과 즉물성을 내세운 반미학적 모던 디자인의 십자군 사관학교라고 비유했다.

10) “국제양식”과 “기능주의” 비판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소사스를 중심으로 한 그룹 멤피스가 대안으로 제시한 양식으로서, 포스트모던 디자인의 대표적 사례 중 하나로 꼽힌다.

11) Habermas, J., die Moderne-ein unvollendetes Projekt, in Welch, W (hrsg.), Wege aus der Moderne, Acta humaniora, 1988 Mannheim, pp. 183-186

12) Willet, J., Die Weimarer Jahre, Verlag Gerd Hatje, 1984 Stuttgart, p.10

13) Schneede, Uwe M. (ed.), Die Zwanziger Jahre: Manifeste und Dokumente, DuMont, 1979 Köln, p. 26

14) cf. A. Staskova, P. M. Lützeler(ed.), Hermann Broch und die Künste, Walter de Gruyter, 2009 Berlin, pp.60-62

15) 앞의 책

16) 앞의 책, p. 11

17) 독일어판: Die Betriebsleitung insbesondere der Werkstätten, springer Verlag, 1914

18) 테일러시스템은 신건축 운동에서 좌익 사회주의에서부터 포드가 『My Life and Work (1922, 독일어판: H. Ford, Mein Leben und Werk, List Verlag, Leibzig 1924)』에서 주장한 바와 같은 백색 사회주의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펼쳐졌다.

19) Willet, J., 앞의 책, p.14

20) Der deutsche Werkbund(ed.), Ausstellungskatalog, Werkbund Ausstellung Die Wohnung, Stuttgart 1927

21) 바이센호프 주거단지 참여건축가: Peter Behrens, Victor Bourgeois, Le Corbusier (Charles Edouard Jeanneret-Gris) & Pierre Jeanneret, Richard Döcker, Josef Frank, Walter Gropius, Ludwig Hilberseimer, Ludwig Mies van der Rohe, Jacobus Johannes Pieter Oud, Hans Poelzig, Adolf Rading, Hans Scharoun, Adolf Gustav Schneck, Mart Stam, Bruno Taut, Max Taut, Ferdinand Kramer

22) cf. B. Meuer, H. Vinçon, Industrielle Gestaltung, Anabas Verlag, 1993 Gießen, p. 139

23) P. Bonatz, Noch einmal die Werkbundsiedlung, in; F. Z. Much(ed), Denkschrift zur Werkbund-Ausstellung Die Wohnung Stuttgart 1927, Stuttgarter Gesellschaft für Kunst und Denkmalpflege, Stuttgart 1989, p. 215

24) cf. F. Z. Much(ed), 앞의 책

25) Gert Selle, Designgeschichte, Campus Verlag, 2007 Frankfurt a.M., p.140

26) H. Meyer, Mein Hinauswurf aus dem Bauhaus, Offener Brief an den Oberbürgermeister Hesse, Dessau 1930, in; H.-M. Wingler, Das Bauhaus Weimar, Dessau, Berlin 1919-1933, Verlag Gebr. Rasch & Co, 1968 Bramsche, p. 170

27) P. Bonatz, 앞의 책, p. 215

Notes

Citation: Lee, B. (2012). The International Style and Functionalism in the 1920s. Archives of Design Research, 25(2), 125-134.

References

  • 김민수, 모던 디자인 비평, 안그래픽스, 1994.
  • 정시화, 산업디자인 150년 미진사 1992; 현대디자인연구, 1997.
  • 페니 스파크, 20세기의 디자인과 문화, 까치 1995.
  • 펩스너, 근대건축과 디자인, 미진사 1991.
  • Bach, A., Formgestaltung in Weimar, Weimarer Schriften Heft 29, Weimar 1988.
  • Campbell, J., Der Deutsche Werkbund 1907-1934, Klett-Cotta, 1981 Stuttgart.
  • DWB(ed.), Die Zwanziger Jahre des Deutschen Werkbunds, anabas Verlag, 1982 Giessen.
  • DWB(ed.), Ausstellungskatalog, Werkbund Ausstellung Die Wohnung, Stuttgart 1927.
  • Hitchcock, H.-R., Johnson, P. C., Der internationale Stil 1932, Vieweg Verlag, 1985 Braunschweig.
  • Meuer, B., Vinçon, H., Industrielle Gestaltung, Anabas Verlag, 1993 Gießen.
  • Much(ed), F. Z., Denkschrift zur Werkbund-Ausstellung Die Wohnung Stuttgart 1927, Stuttgarter Gesellschaft für Kunst und Denkmalpflege, Stuttgart 1989.
  • Schneede, U. M. (ed.), Die Zwanziger Jahre: Manifeste und Dokumente, DuMont, 1979 Köln.
  • Selle, G., Designgeschichte, Campus Verlag, 2007 Frankfurt a.M.
  • Staskova, A., Lützeler, P. M. (ed.), Hermann Broch und die Künste, Walter de Gruyter, 2009 Berlin.
  • Willet, J., Die Weimarer Jahre, Verlag Gerd Hatje, 1984 Stuttgart.
  • Wingler, H.-M., Das Bauhaus Weimar, Dessau, Berlin 1919-1933, Verlag Gebr. Rasch & Co, 1968 Bramsche.

[그림 1]

[그림 1]
Kubus-Fauteuil, J. Hoffmann, 1910(우), Villa Müller, A. Loos, 1930(좌)

[그림 2]

[그림 2]
르코르뷔지에 주택, 바이센호프 주거단지

[그림 3]

[그림 3]
오우드 주택, 바이센호프 주거단지

[그림 4]

[그림 4]
바우하우스의 표현주의 문장 1919-22(우), 신조형주의 문장: 1922-32(좌)

[그림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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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 브로이어 1922(좌), P. 켈러, 1922(우)

[그림 6]

[그림 6]
바우하우스 마이스터 하우스, 데사우 1925

[그림 7]

[그림 7]
W. 타틀린, 1927(좌), M. 브로이어, 1928(우)

[그림 8]

[그림 8]
E. 소사스 전화기 Enorme, 1986(좌), M. 브란트 알레시 컬렉션, 2000년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