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s of Design Research
[ Article ]
Archives of Design Research - Vol. 26, No. 1, pp.465-481
ISSN: 1226-8046 (Print) 2288-2987 (Online)
Print publication date Feb 2013
Received 18 Oct 2012 Revised 13 Dec 2012 Accepted 16 Jan 2013
DOI: https://doi.org/10.15187/adr.2013.02.26.1.465

'citizens' as others in public design

OhChang-Sup
College of Art and Design, Konkuk University, Seoul, Korea
공공디자인에서 타자 관계에 있는 ‘시민’

Correspondence to: Chang-Sup Oh changsup@konkuk.ac.kr

Background Since the mid-2000s, 'public design' has popular in South Korea. However, public design has been receiving criticism in South Korea since 2011, after being in vogue only for five or six years.

The reasons for the decline are changes in the political geography, ignorance of the public, design practices without reflection, and so on. The planners and executors of public design misunderstood the meaning of 'citizens' or exploited the word for their profits. This study aims to uncover problems related to the concept of public design to understand and to interact with citizens and to propose a desirable model to relate with citizens.

Methods Relevant literature was utilized to identify issues related to public design in this study. On the basis of these materials, not only the citizens but also the planners and executors in public design were studied by the critical narrative method.

Results It was a big problem for the planners and executors of public design to consider public design as an activity to satisfy the eyes of people who experience the city in the context of its aesthetics. They understood a city as a target of spectators rather than as a space for life. However, a city is a space of life and citizens. ‘Citizens’ does not refer to community members to share their tastes, values, ideals, and so on. Citizens, who are not homogeneous members in a community but heterogeneous members in a society, do not share them.

The planners and executors of public design can be divided into three types according to ways how they understand citizens. First type of planners and executors do not perceive the existence of the others. Second type of planners and executors know the existence of others, but they are considered as a problem. Third type of planners and executors understand the existence of others and explore how to communicate with them.

The first type of subject is naive and ignorant. The second type of subject is self-centered and self-righteous. Not only politicians but also political designers correspond to one of two types. They have spoken as if the citizens were a single community with the term 'citizen'. Then they superimposed their desires on the needs of citizens. It is not for citizens but for the subject of public design. These impure approaches have distorted public design practices.

Conclusion Public design by a subject who does not perceive the existence of others or considers others as problems can easily degenerate into a work which embodies the subject's tastes, values, and interests. Only when citizens meet the subject who understands the existence of others and explores how to communicate with them, it becomes possible for public design to gain publicity. This type of subject can emerge only when we meet the citizens with interest, engagement, affection, and care like the relationship between a mother and her baby.

초록

배경 '공공디자인'은 2000년대 중반 이후 한국사회에서 가장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디자인 개념이다. 접두어 ‘공공’이 만들어내는 효과, 그 효과에 주목한 정치인들과 디자이너들의 등장으로 공공디자인은 유행하였다. 하지만 2011년에 접어들어 공공디자인은 한국 사회에서 비판받는 대상이 되어버렸다. 본격적으로 다루어진지 불과 5-6년 만의 일이다.

공공디자인 쇠퇴는 정치적 지형의 변화 이외에도 공공성에 대한 이해와 성찰 없이 진행된 디자인 실천이 원인이 되었다. 특히 그 이면에는 실천 주체들이 ‘시민’의 존재를 오해하였거나, ‘시민’이라는 말을 악용하였다는 문제가 자리하고 있었다. 본 논문은 ‘시민’에 대한 공공디자인 실천 주체들의 이해방식과 관계방식의 문제를 밝히고, 그로부터 바람직한 시민 이해의 모델을 제시하는데 목적이 있다.

방법 본 연구에서는 관련 내용을 이해하고 공공디자인의 문제를 파악하기 위해 관련 문헌자료들을 활용하였다. 이러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비평적 서술의 방법을 활용하여 공공디자인에서 시민의 문제를 연구하였다.

결과 공공디자인의 주체가 도시를 미학적으로 경험하는 이들의 시선만을 의식한다는 것은 문제라 할 수 있다. 그들은 도시를 삶의 공간이 아닌 관람의 대상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시는 삶의 공간이고 시민의 공간이다. 여기서 시민은 취향, 가치관, 이념 등을 공유하는 하나의 공동체가 아니다. 시민은 오히려 그것들을 공유하지 않는, 즉 서로가 서로에게 타자인 존재들의 집합이다.

타자들의 집합인 시민과 관계하는 방식에 따라 공공디자인의 주체는 3가지 유형으로 구분될 수 있다. ‘첫째, 타자의 존재를 지각하지 못하는 유형’, ‘둘째, 타자를 문제로 보는 유형’, ‘셋째, 타자와 소통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유형’이다.

첫 번째 유형은 시민에 대해 무지한 주체이고, 두 번째 유형은 자기중심적인 독선적 주체다. 정치적인 공공디자인 주체들은 이 두 유형 어딘가에 자리한다. 그들은 ‘시민’이라는 용어를 통해 타자관계에 있는 시민들을 마치 하나의 공동체인 것처럼 이야기해왔다. 그리고는 자신의 욕망을 그렇게 하나로 환원된 시민들의 요구와 포개었다. 물론 그것은 시민이 아닌 주체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불순한 접근은 결과적으로 공공디자인 실천을 왜곡시켰다.

결론 주체가 ‘타자의 존재를 지각하지 못하는 유형’이거나 ‘타자를 문제로 보는 유형’인 경우 공공디자인은 그 주체의 취향이나 가치관, 이익을 일방적으로 구체화하는 작업으로 전락하기 쉽다. ‘타자와 소통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유형’인 경우에만 시민은 존중받을 수 있고, 공공디자인은 공공성을 확보할 수 있다. 이러한 주체 유형은 엄마와 아기의 관계처럼 관심과 포용, 애정과 배려로 시민과 관계하려는 경우에만 출현한다.

Keywords:

korean design, public design, citizens, user, city, social design, 한국의 디자인, 공공디자인, 시민, 사용자, 도시, 사회적 디자인

1. 서론

2001년 12월, 예술의 전당 디자인미술관에서는 <de-sign korea: 디자인의 공공성에 대한 상상>이라는 전시가 열렸다. ‘공공디자인’이라는 이름은 이 전시에서 본격적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전시의 내용은 오늘날 우리가 공공디자인이라고 부르는 대상들, 즉 가판대, 버스정류장, 공문서, 도심의 자투리 공간 등을 다루었다. 만일 이 전시에 가치를 부여하여 기원의 지위를 부여한다면, 우리사회는 공공디자인을 어느덧 10년이라는 기간 동안 논의하고 실행한 샘이 된다. 특히 2005년 이후 공공디자인은 한국사회에서 가장 활발하게 전개된 디자인 실천이었다. 하지만 개념적 혼란과 사적 이해관계 속에서 추진된 그 실천은 여러 문제들을 파생시켰다. 최근 공공디자인에 따라다니는 ‘일방적’, ‘하드웨어 중심적’이라는 수사는 문제들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본 연구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공공디자인의 내용과 개념들을 성찰하고자 한다. 특히 공공디자인이 이야기될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시민’에 대한 이해의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룰 것이다. 연구는 공공디자인 실천 주체들의 ‘시민’에 대한 이해방식과 관계방식의 문제를 밝히고, 그로부터 바람직한 시민 이해의 모델을 제시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그림 1

연구목적 및 방법

연구는 크게 4단계로 진행되었다. 우선 공공디자인이 2000년대 중반 이후 한국에서 급속히 유행하게 된 배경을 고찰하였다. 두 번째로 공공디자인에서 ‘시민’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이해되고 유통되고 있는지, 그 효과는 무엇인지를 비평적으로 밝혔다. 세 번째로 공공디자인의 역량을 ‘배치’와의 관계에서 새롭게 고찰하였다. 이는 공공디자인이 삶과 얼마나 밀접한 관계에 있는지를 이해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지금까지 이루어져온 공공디자인 실천들의 한계를 밝혔다. 네 번째로 공공디자인 활동에서 ‘시민’이 어떠한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는지 ‘타자’ 개념을 매개로 고찰하였다. 이를 토대로 3개의 모델을 제시하고, 바람직한 시민 이해 모델을 제시하였다.


2. 공공디자인의 유행과 ‘시민’

2.1. 공공디자인의 유행

2000년대 초반부터 공공디자인에 대한 이야기가 간헐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앞서 <디자인의 공공성에 대한 상상>이라는 전시에서 보듯이, 그러한 움직임은 상상의 차원에 머물러 있었다. 이러한 양상은 2000년대 중반에 접어들어 갑자기 바뀌기 시작하였다. 사회적으로 공공디자인이 빠른 속도로 유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유행은 자신을 따르지 않는 이들에게 배제되었다는 느낌, 혹은 뒤떨어졌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이러한 소외의 느낌은 견디기 어려운 감정이다. 무엇인가가 유행할 때, 이유를 묻는 움직임보다 그에 따르는 무조건적인 실천이 이루어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공공디자인의 유행 역시 같은 효과를 만들어 내었다. 유행의 맥락에 자리하면서 공공디자인은 이유를 묻지 않고 무조건 따라해야 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이로 인해 공공디자인의 의미와 가치, 역할 등에 대한 이해와 성찰의 기회는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한국사회에서 공공디자인은 왜 그렇게 빠른 속도로 유행하게 되었을까? 이 물음에 명확히 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정치인들이 정치적 이유 때문에 관심을 보이면서 공공디자인이 유행하였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1]

무엇보다 2000년대 중반 서울 시장이었던 이명박이 ‘청계천 복원’이나 ‘버스체계 개편’과 같은 사업을 통해 시민들의 인기를 얻었고, 이를 기반으로 대통령에 당선 되었다는 사실은 공공디자인 유행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를 계기로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공무원과 정치인들이 공공디자인에 관심을 나타냈고, 또한 공공디자인 관련 사업들을 활발히 펼쳐나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공디자인의 유행을 디자인에 대한 정치인들의 관심만으로 설명하기에는 여전히 부족한 점이 있다. 현실 정치가 관심을 보였더라도 지속적인 공명이 없었다면 찻잔 속의 태풍으로 머물렀을 것이기 때문이다. 공명은 공공디자인 주변을 맴도는 몇 가지 환상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우선 ‘공공’이라는 접두어가 만들어내는 환상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공공’이라는 접두어는 ‘많은 사람들과 관계된’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갖고 있다. 하지만 공공디자인에서 ‘공공’은 ‘다수에게 이익이 되는’이라는 확장된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이로 인해 공공디자인은 그 자체로 좋은 것이고, 시민들을 위한 것이며, 그것을 실행하기만 하면 시민들이 만족할 것이라는 연속된 이해의 고리를 만들어 내었다. 사실 현실 정치가 공공디자인에 관심을 가진 것은 이러한 ‘공공’의 환상과 무관하지 않다.

공공디자인의 유행에 자리하는 두 번째 환상은 ‘디자이너들의 환상’이었다.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대부분의 디자이너들은 소비 확대를 통한 기업의 경제적 이익 창출에 봉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문화 창조’나 ‘인간의 삶’을 언급하면서 자신들의 활동이 나름의 의미와 사회적 가치를 지닌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러한 이야기들이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그들 행하는 근본적인 역할을 가리지는 못한다.

공공디자인은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디자이너들이 가질 수밖에 없었던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감을 달래주었다. 공공디자인을 이야기하고 그 활동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소비확대의 단순한 수단이 아닌,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활동으로서의 디자인을 하고 있다는 환상과 믿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1980년대 대학에서 디자인을 공부한 이들은 신자유주의가 확대되는 공간에서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다른 어떤 세대보다 분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1980년대 한국은 독재에 대한 저항과 민주화에 대한 열기가 분출되던 시기였고, 따라서 당시 대학은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이 충만했다. 필자의 경험(Oh 2006)에 따르면 이 시기 대학에서 디자인을 공부한 이들은 자연스럽게 그러한 분위기에 노출되었고, 그 영향을 받았다. 1980년대, 제3세계를 위한 디자인을 설파했던 빅터 파파넥이 한국에서 인기 있는 디자인사상가였다는 사실은 그러한 영향관계의 증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영향 속에 있던 학생들은 사회에 나가 자신들이 비판했던 대상과 가치를 위해 봉사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모든 이에게, 그리고 항상 그러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이러한 모순된 상황은 디자이너들에게 ‘의식과 실천의 불일치’라는 괴리감을 느끼게 하였다. 공공디자인은 바로 이러한 느낌으로부터 그들을 자유롭게 하였다.

그림 2

공공디자인 유행의 배경

공공디자인의 유행 배경에는 ‘공공이라는 이름이 주는 환상’과 ‘디자이너들이 기대었던 환상’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와 함께 보다 근본적인 오해가 유행의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그것은 공공디자인 실천의 중요한 출발점인 ‘시민’에 대한 오해였다. 시민에 대한 오해는 공공디자인 실천과 흐름을 왜곡시키는 치명적인 결과들을 초래하였다.

2.2. 공공디자인에서의 ‘시민’

공공디자인이 이야기될 때마다 거기에는 ‘시민’이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공공디자인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진행하는 주체는 자신들의 사업이 시민들의 편리한 생활과 행복을 위한 것이라고 홍보한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홈페이지에서 “시민을 위한 공공디자인”이라는 표현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디자인 잡지나 일간지와 같은 매체 역시 “시민을 위한”, “시민에 의한”, “시민의 공공디자인”이라는 수사를 통해 공공디자인을 표현한다.

그런데 이러한 표현을 접하고 있노라면 동일한 가치관을 갖고 있고, 동일하게 느끼고, 동일하게 생각하는 ‘시민’이라는 이름을 가진 개인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적으로 알고 있듯이 시민은 어떤 개인이 아니다. 시민은 다수다. 그것도 계급, 취향, 이념, 가치관 등에 있어서 서로 차이를 드러내는 다수인 것이다.

물론 그들 일부는 공동체를 형성하기도 한다. 공동체란 공통의 관심사와 코드를 바탕으로 엮여진 개인들의 집합이다. 공동체 내부의 개인들은 서로 소통하고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하나의 공동체는 공동체 밖의 개인이나 다른 공동체에 대해서는 차이와 적대를 드러낸다. 이렇게 서로 다른 개인, 그리고 서로 다른 공동체들이 함께 자리하는 공간, 그것이 바로 사회인 것이다.

사회는 구성원들이 서로가 서로에 대하여 차이를 드러내는 곳이다. 이렇게 서로의 다름을 확인하는 관계를 타자 관계라고 한다. 타자 관계 속에서 개인들은 이념과 취향의 차이로 인해 서로를 쉽게 인정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 배경에는 사회적, 경제적, 계급적 차이가 자리한다.

가라타니 고진은 타자를 언어의 차원에서 이해하였다. 그에 의하면 타자는 “언어게임을 공유하고 있지 않는 사람”이다.(Karatani 1998) 다른 말로 하면 서로간의 소통을 위한 규칙을 공유하고 있지 않은 사람을 의미한다. 소통을 위한 규칙을 공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동일자에게 타자는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비춰진다.

그림 3

공동체와 사회

사회에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공동체 내에서 삶을 사는 것과 다르다. 사회적 존재는 이야기가 통하는 공동체 내의 개인들과만 관계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적 존재는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다른 공동체와 그런 공동체 내의 개인들과도 관계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사회 속의 개인들은 공동체적 관계뿐만 아니라 타자 관계에도 자리한다.

공공디자인 담론에 등장하는 ‘시민’이라는 개념은 사회를 구성하는 구성원들이 이러한 타자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은폐시킨다. 마치 공동체 속에 자리하는 동일자들의 집합인 것처럼 이해하도록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오늘날 공공디자인에서 ‘시민’이라는 용어의 작동방식은 20세기 중반에 건축 담론에서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사용자’라는 용어의 작동방식과 유사하다. 당시 서유럽 국가들은 복지국가 프로그램을 도입하였는데, 복지국가가 성공적으로 실현되고 있는 것처럼 보여주기 위해 학교, 주택, 병원 등과 같은 건축이 활용되었다. 건축가들은 ‘사용자’라는 추상적 이름을 통해서 불우하고 힘없는 시민들이 다른 시민들과 동등한 사회적 구성원인 것처럼 느낄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이 느낌은 부의 재분배나 실제적 차이를 해소하는 적극적 움직임의 결과로서 나타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환상에 가까웠다. 사용자라는 개념은 이렇게 구체적인 사용자들 사이에 자리하는 차이들을 은폐시켰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앙리 르페브르(Lefebvre 2009)는 ‘사용자’라는 개념을 현대 사회가 그 구성원들을 기만하는 한 가지 수단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사용자’라는 용어가 개별 사용자들의 차이를 감추는 것처럼 ‘시민’이라는 용어 역시 개별 시민들의 차이를 감춘다. 차이를 가지지 않는, 그래서 마치 동일한 주체인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시민’이라는 용어는 공공디자인을 기획하거나 시행하는 주체에게 유용한 도구로 활용되었다. 왜냐하면 ‘사용자’라는 용어가 그랬듯이 ‘시민’이라는 용어는 다수를 연상시키고, 그 용어를 접하는 이들로 하여금 자신이 그 안에 포함된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함으로써 계급적 구조나 정치적 지형의 변화 없이 사업시행 주체가 원하는 것들을 쉽게 진행할 수 있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오늘날 ‘시민’이라는 용어가 공공디자인 주변에서 활발하게 회자되는 것은 바로 차이를 감출 수 있는 이 용어의 마법적인 작용 때문이다.

그렇게 시민들 사이의 차이가 감추어진 지점, 즉 타자들의 존재가 은폐된 지점에서 가라타니 고진이 말한 독아론적 태도, 즉 “나에게 타당한 것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도 타당하다는 사고방식”이 만들어진다.(Karatani 1998) 하지만 엄밀히 말해 그 작동방식은 역에 가깝다. 즉, 시민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의 삭제가 자기중심적 사고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중심적 사고가 차이 없는 존재로서 시민이라는 잘못된 이해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말이다.


3. 공공디자인의 역량과 오용(誤用

3.1. 물질적 배치로서의 공공디자인

오늘날 공공디자인은 특정 시설물의 형태나 색상, 재질을 변화시키는 움직임으로 이해되고 있다. 하지만 공공디자인은 강현주와 유은하(Kang & Yoo 2012)의 지적처럼 “일상생활문화 차원에서의 공공성을 회복”하는 움직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물론 공공디자인에서 ‘공공성 회복’이 중요하다는 말을 물질적 대상은 소홀히 해도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공공디자인에서 물질적 대상은 가치를 실현하는데 매우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물질적 대상의 존재방식에 따라 해당 공간에 자리하는 생활 주체들이 떠올리는 욕망은 달라지고, 궁극적으로는 다른 삶의 모습을 형성한다.

일반적으로 물질적 환경은 인간의 의지에 의해 결정되는 수동적인 대상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일상에서 우리는 물질적 환경과 그것들의 배치가 우리의 사고와 행위를 규정하는 경험들을 흔히 발견한다. 벽에 걸린 TV와 TV를 향하고 있는 소파, 그리고 흥미로운 프로그램의 상영이라는 배치는 그 공간에 자리한 이에게 ‘TV에서 상영되는 프로그램을 소파에 앉아 보고 싶다’는 욕망을 불러일으키고, 실제로 소파에 앉아 TV를 보도록 만든다. 마찬가지로 맛있는 음식이 차려진 밥상은 ‘먹고 싶다’는 욕망을 불러일으키고, 우리로 하여금 그 욕망에 따라 움직이도록 한다.

딕 헵디지(Hebdige 1998)는 <하위문화>라는 그의 책에서 이러한 물질적 환경의 배치가 갖는 힘에 대해 밝힌 바 있다. 그는 정면을 향해 배열된 책상과 의자, 그리고 그것들을 바라보는 교탁이 그 공간에 자리하는 학생들에게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행위들을 해야 하는지를 이미 규정한다고 주장하였다.

푸코(Foucault 2003) 역시 ‘판옵티콘’이라는 건축적 구조물의 물질적 배치가 인간 개조에까지 활용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사실 판옵티콘은 감시와 교화에 효과적이었기 때문에 감옥으로 많이 활용되었다. 이 건축적 공간에서 각방에 자리하는 수감자들은 감시자의 시선에 완벽히 노출된다. 방의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은 그 공간에 자리하는 개개인의 작은 움직임마저도 감시자의 시선으로 인도한다. 때문에 방에 자리하는 이들은 늘 감시자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행동할 수밖에 없다. 특히 이 건축 구조물 중앙에는 감시인을 위한 탑이 자리하는데, 탑 속은 어둡기 때문에 그곳에 감시인이 있는지 없는지를 수감자들은 알 수가 없다. 이러한 물질적 배치는 놀라운 효과를 창출한다. 수감자들은 중앙의 탑 속에 감시인이 없더라도 감시인이 있을 때와 동일한 움직임을 보일 수밖에 없다. 감시의 시선은 그 공간에 자리하는 이들에게 내면되어 수감자 스스로가 자신을 감시하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판옵티콘은 단순한 감시 장치가 아니라 감시자의 시선으로 자신을 보고, 감시자가 욕망하는 방식으로 스스로의 사고와 행위를 통제하게 하는 장치인 것이다. 때문에 푸코는 판옵티콘을 “권력관계를 창출하고, 유지하는 기계”이자 “경이로운 기계장치”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림 4

판옵티콘의 구조

위의 사례들은 디자인을 통한 인공물 환경의 변화가 사람들의 사고와 행위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았을 때, 간판이나 가로 시설물의 존재방식을 바꾸거나 특정한 도시 공간의 존재방식을 변화시키는 공공디자인의 움직임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비록 그 움직임이 일부 아이템의 변화에 머무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효과는 그 공간에 자리한 이들의 욕망과 경험, 그리고 더 나아가 삶 자체를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이는 공공디자인 유행의 촉진제가 된 청계천 복원 사업의 예에서 명확히 나타난다. 복원이 이루어지기 전 청계천 주변은 잡다한 공구와 상품을 파는 가게들이 복개도로를 따라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그 가게들의 규모는 대부분 작았다. 청계천 복원 사업 진행에 직접적으로 걸림돌이 되는 가게들을 서울시는 교외 지역으로 이전시켰다. 물론 청계천 복원 사업 이후에도 주변 도로에는 이전하지 않은 가게들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러나 청계천 복원공사로 그곳의 지가와 임대료는 상승하였고, 따라서 예전부터 있었던 매장들은 그곳에 더 이상 자리하기 어렵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가게들은 하나 둘 그곳을 떠났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분위기 좋은 카페나 음식점들이 들어섰다.

이러한 물적 변화는 그곳을 오가는 이들에게 이전과 다른 형태의 욕망을 떠올리게 하였다. 관광과 소비에 대한 욕망이 바로 그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욕망을 매개로 청계천 주변을 경험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전까지 그 공간의 주인공들은 화려한 스펙터클 뒤의 배경으로 밀려나야만 했다.

복원된 청계천의 풍경은 그들에게 아우라의 작동방식과 유사한 경험을 만들어 내었다. 벤야민(Benjamin 2005)은 아우라를 “설령 그것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무리 가까이 있더라도 멀리 있는 것의 현상”으로 정의하였다. 그들에게 청계천은 물리적으로 가까이에 자리하고 있지만 점점 멀어지는 대상으로 경험되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공공디자인의 산물들이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해당 공간에 자리하는 이들을 배경으로 밀어내고 있다.

데이비드 하비(Harvy 2010)는 “도시화는 늘 계급적 현상”이라고 말했다. 도시의 변화는 계급적인 현상이고, 공공디자인 역시 이러한 맥락에 자리한다. 공공디자인을 통한 도시의 변화는 누구에게는 좋은 일이고 누구에게는 고통을 줄수밖에 없는 것이다. 모두에게 좋은 일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그리 많지않다. 도시의 변화에 있어서는 더더욱 그러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신중을 기한다면 고통 받는 이들의 고통은 줄어들 수 있고, 보다 많은 이들이 만족을 느끼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공공디자인의 이름으로 도시를 변화시킬 때 그것이 누구에게 해가 되고 또 누구에게 득이 되는 것인지를 따져 보는 일이다. 엄연히 존재하는 고통과 갈등을 화려한 스펙터클로 은폐하는 역할을 공공디자인이 한다면 그것은 분명 문제인 것이다.

3.2. 관람의 대상 만들기

그렇다면 오늘날 구체적인 공공디자인 실천은 무엇을 위해, 그리고 누구를 대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일까? 공공디자인을 이야기하는 자리에는 의례히 등장하는 “도시 경관”, “미관을 헤친다”, “아름다운 도시” 등과 같은 표현들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얻는데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경관”, “미관”, “아름다운” 등과 같은 표현들은 도시가 하나의 이미지라는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미지로서의 도시, 그 도시의 스타일을 바꾸는 것이 바로 오늘날 이루어지고 있는 공공디자인인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공공디자인을 기획하는 주체는 도시를 미학적으로 경험하는 이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사업을 펼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도시를 미학적으로 경험하는 이들은 도시를 삶의 공간으로서 보다는 관람의 대상으로 바라본다. 마치 미술관에서 작품을 바라보듯이 말이다.

그림 5

뒤샹의 변기

미학적 경험은 대상의 기능과 삶에서의 역할을 보류하는 지점에서 이루어진다. 칸트(Kant 2005)는 <판단력 비판>에서 미학적 경험이 무관심의 태도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밝혔는데, 칸트가 이야기한 무관심은 미적 관심 이외의 도덕적, 지적, 기능적 관심 등을 배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르셀 뒤샹의 변기가 어떻게 미학적 판단의 대상이 되었는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이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뒤샹의 변기는 변기로서의 기능과 역할을 보류하고 관람의 대상이 되면서 미학적 판단의 대상이 되었다. 여기서 미술관은 그 대상이 일상 삶에서 가지는 기능과 역할을 보류하고 미학적으로 바라보도록 만드는 특별한 제도이자 장치로 기능한다. 그 특별한 공간에서 우리는 시각을 주로 활성화하도록 요구받는다. 미술관에서 만나는 “만지지 마시오”, “떠들지 마시오”와 같은 사인들은 미술관이 시각 중심의 공간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공공디자인은 미술관이 일상적 사물들을 미학적 감상의 대상으로 바꾸는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도시를 바꾸고 있다. 도시는 시각이라는 감각을 통해 경험 가능한 것이고, 그렇게 경험하는 이들에게 매력을 가지게 된다. 도시를 이러한 방식으로 경험하는 대표적인 이들은 관광객이다. 관람료를 지불하고 미술관에서 작품을 감상하는 관람객처럼 관광객은 도시를 미학적으로 경험하기 위해 기꺼이 호주머니를 연다. 어쩌면 현재 공공디자인의 궁극적 관심은 그 호주머니에 있는지 모른다. 공공디자인에 대한 담론의 장에서 ‘빌바오 효과’[2]에 대한 이야기가 영웅담처럼 유통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오늘날 공공디자인을 진행하는 주체에게 도시는 팔리는 대상, 즉 일종의 상품이다. 그들은 도시를 통해 경제적 이익을 창출하려고 한다. 때문에 공공디자인은 도시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것이기 보다는 관광객, 그리고 관광객처럼 도시를 소비할 수 있는 시민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그들을 대상으로 공공디자인이 이루어질 때 도시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다양한 유형의 시민들은 공공디자인의 움직임에서 소외된다. 그들은 변기를 감상하는 이들이 아니라, 당장 변기를 사용해야 하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4. 타자로서의 시민과 3가지 관계 모형

권리를 가진 이들에게 권리를 가지지 못한 이들은 하나의 타자다. 마찬가지로 권리를 가지지 못한 이들에게 권리를 가진 이들 역시 타자다. 도시에는 이렇게 타자관계를 형성하는 수많은 공동체들이 자리한다.

여기서 우리는 구체적인 공공디자인을 기획하고 수행하는 주체 역시 특정한 공동체 내에 자리한다는 사실, 그래서 그 주체에게도 타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떠올려야 한다. 동일자로서의 공공디자인 주체가 그러한 타자들과 어떻게 관계하는가에 따라 공공디자인에서의 시민은 다음 3가지 모델중 하나의 모습으로 존재한다.

그림 6

타자의 존재를 지각하지 못하는 유형[3]

우선 동일자가 타자의 존재 자체를 지각하지 못하는 경우다.(그림 6) 이 경우 타자는 분명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지각되지 않는다. 타자의 존재를 지각하지 못하는 주체는 자신을 중심으로 사고하고 행위 한다. 이로 인해 엄연히 존재하는 타자들은 고통과 슬픔에 처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체는 그들의 아픔과 슬픔을 느끼지 못한다. 그는 무지한 주체인 것이다.

한나 아렌트(Arendt 2006)는 “말하는데 무능력함”과 “생각하는데 무능력함” 이 타자를 지각하지 못하게 만든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녀가 지적한 “생각하는데 무능력함”은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데 무능력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무능력은 그녀가 이야기한 “말하는데 무능력함”, 즉 소통의 무능력에서 비롯된다.

그림 7

타자를 문제로 보는 유형

두 번째 유형의 주체는 타자의 존재를 지각하기는 하지만, 그 타자를 문제로 바라본다.(그림 7) 하나의 대상이 문제라는 이름으로 불릴 때, 그것은 지워지거나 제거되어야만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이와 마찬가지로 두 번째 유형의 관계방식을 취하는 이들에게 타자의 타자성은 문제이기 때문에 사라져야 하는것이 된다. 그들은 타자를 발견하지만, 타자에게서 그 타자성을 제거하려고 하는 것이다. 타자를 제거하는 이러한 움직임을 그들은 ‘문제해결’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타자성이 제거된 타자는 더 이상 타자가 아니다.

오늘날 공공디자인의 실행 주체가 시민과 관계하는 방식은 첫 번째 유형이나 두 번째 유형에 가깝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나에게 타당한 것은 모두에게 타당하다’는 자기중심적인 태도를 보인다. 때문에 자신의 취향과 도시에 대한 이해를 절대시하며, 타자를 만나더라도 독단적인 태도로 타자를 대한다. 그들에게 이해될 수 없는 이질적인 존재들은 문제일뿐이고, 따라서 제거되어야 하는 것이다. 타자의 타자성이 제거된 상황에서 그들은 편안함을 느낀다. 하지만 타자에게 이러한 상황은 고통스러운 것일 수밖에 없다.[4]

세 번째 유형은 타자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들과 소통하려는 주체의 모습이다.(그림8) 타자들과의 소통은 어렵다. 마음을 열지 않는 한 그들은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받아들이기 쉽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자와의 소통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타자와의 소통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그림 8

타자와 소통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유형

필자는 엄마와 아기의 모습에서 그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엄마와 아기는 타자 관계에 놓여 있다. 서로는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서로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아기는 운다. 엄마는 배고파서 운다고 생각하고서 젖을 물린다. 그러나 여전히 아기는 운다. 엄마는 추워서 우는 것은 아닐까 하고 이불을 덮어준다. 그래도 아기는 운다. 결국 기저귀를 확인하고서야 엄마는 왜 아기가 우는지를 알게 된다. 기저귀를 갈아주자 아기는 비로소 웃는다. 타자인 아기에게 다가서려는 엄마의 이러한 노력 속에서 엄마와 아기는 점점 서로를 이해하고 긴밀한 소통 관계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강한 베푸는 자’와 ‘약한 혜택을 받는 자’라는 계급적 구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공공디자인을 시행하는 정부 관계자나 일부 디자이너들은 강한 베푸는 자의 위치에 서려고 한다. 그러한 움직임 속에서 시민은 수혜를 받는 약자의 위치에 자리한다. 이러한 구도는 베푸는 자로서 정부 관계자나 디자이너들의 취향과 의도를 일방적으로 주입하는 움직임으로 나타날 수 있고, 실제로도 그러한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엄마와 아기의 모델은 이러한 계급 관계를 의미하지 않는다. 사실 엄마와 아기 모델에서 엄마는 강자라기보다는 오히려 약자에 가깝다. 이 모델의 핵심은 타자의 발견, 계속적인 소통의 노력, 상대를 이해하고 배려하려는 의지, 깊은 숙고에 있는 것이다.

‘엄마와 아기 모델’은 많은 인내와 시간을 필요로 한다. 인내는 고통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성급한 변화가 만들어낼지 모르는 큰 고통에 비한다면 그것은 충분히 감내할 수 있는 것이다. 시간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가 만들어지고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긴 역사에 비한다면 그 인내의 시간은 너무도 짧은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5. 결론

지금까지 공공디자인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공공디자인 활동에서 시민이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지, 그러한 이해 방식의 문제는 무엇인지를 고찰하였다. 더 나아가 타자의 개념을 토대로 3가지 시민 이해 모델을 제시하였다. 타자는 시민을 이해하는데 유용한 개념이다. 왜냐하면 시민은 취향, 가치관, 이념 등을 공유하는 하나의 공동체가 아니라, 그것들을 공유하지 않는 서로 다른 개인과 공동체들의 집합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공공디자인에서 ‘시민’이라는 개념은 이러한 차이를 은폐하는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수행해 왔다. 즉, 시민이라는 용어는 타자관계에 있는 시민들을 마치 하나의 동일자인 것처럼 이해하게 함으로써 공공디자인 실천을 왜곡시켜왔던 것이다. 타자의 타자성을 무시하거나,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제거해버리려는 것이야 말로 그러한 왜곡의 모습이다.

디자인은 물질적인 배치를 조정함으로써 타자들 간의 관계를 조정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타자의 타자성을 없애기 보다는 존중으로부터 이해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움직임이어야 한다. 이러한 접근방식을 통해 우리는 공공 영역에서 새로운 모습의 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공공 영역에서 디자인은 사업 주체, 혹은 디자인 실행 주체의 취향이나 가치관을 주입하고 형태화하는 작업이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는 타자들의 삶을 이해하고, 긍정적인 삶의 방식을 제안하는 능동적인 활동으로 정의되어야 한다. 디자인에 있어 타자의 존재를 지각하고, 그것과 소통하는 방법에 대한 고민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Glossary

[1] 정치적 맥락 속에 디자인이 자리하면서 공공디자인이 유행하였던 만큼, 현실 정치의 지형 변화는 공공디자인의 급속한 쇠퇴를 가져왔다. 2011년, 디자인을 정책의 주요 수단으로 삼았던 오세훈 서울시장의 퇴임으로 공공디자인은 유행한지 5년여 만에 비판의 대상으로 전락하였다.

[2] 빌바오 효과(Bilbao Effect)는 스페인 빌바오에 프랑크 게리의 설계로 구겐하임 미술관이 들어서면서 경제와 문화가 활성화된 데에서 비롯된 용어다. 엄밀히 말하면 문화를 매개로한 경제적 효과창출이 주된 내용이다. 이후 디자인을 통한 지역재생사업들이 이를 모델로 펼쳐졌다.

[3] 그림에서 상단의 사각형은 각 유형의 내용, 즉 타자를 대하는 동일자의 관계방식을 보여주는 것이고, 하단의 사각형은 그러한 관계방식이 만들어 내는 효과를 보여주고 있다. 이는 <그림7>, <그림8>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규칙이다.

[4] 서울 청계천 복원 사업에 맞춰 주변 간판들이 새롭게 디자인되었다. 바뀐 간판의 모습은 개별적인 취향을 무시하고 획일적인 모습을 취하였다. 그 결과 그러한 변화에 대한 불만들이 쏟아져나왔다. 이는 공공디자인 시행주체가 타자를 보지 못했거나 타자를 일종의 문제로 이해한 결과라 할 수 있다.

Acknowledgments

This work was supported by the Konkuk University

Notes

Citation:Oh, C.S. (2013). 'citizens' as others in public design. Archives of Design Research, 26(1), 2013.2

 

This is an Open Access article distributed under the terms of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Non-Commercial License (http:// 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3.0/), which permits unrestricted educational and non-commercial use, provided the original work is properly cited.

References

  • Kang, H. J., & Yoo, E. H. (2012). Issues and Tasks on the Public Design 2.0 in Korea: A Case Study of Design Cheorwon. Journal of Korean Society of Design Science, 25 (2), 13-26.
  • Oh, C. S. (2006). Design Read through Nine Key-words . Seoul: Semicolon Publishing Company.
  • Oh, C. S. (2007). The Social Functions of Design and Public Design. Journal of Korean Society of Design Science, 20 (5), 165-176.
  • Hebdige, D. (1998). Subculture (D.Y. Lee, Trans.). hyunsilbook.
  • Foucault, M. (2003). Surveiller et Punir (S. Oh, Ttrans.). Nanam Publishing House.
  • Benjamin, W. (2005). Das Passagen-Werk (H. Jo, Trans.). Saemulgyul Publishing House.
  • Harvey, D. (2010). The right of the city (H. Sin, Trans.). New Left Review. Ghil Publisher.
  • Ko- jin, K. (1998). Exploration 1 (T. Song, Trans.). New Wave Publishing Ltd.
  • Ko- jin, K. (1998). Ethic 21 (T. Song, Trans.). sapyoung.
  • Forty, A. (2009). Words and Buildings (J. Lee, Trans.). Mimesis.
  • Kant, I. (2005). Kritik der Urteilskraft (S. Kim, Trans.). bkworld.
  • Arendt, H. (2006). Eichmann in Jerusalem (S. Kim, Trans.). Hangilsa.
  • Design Museum. (2001). De-sign korea: Imagination for publicity of the design. Seoul: Author.

그림 1

그림 1
연구목적 및 방법

그림 2

그림 2
공공디자인 유행의 배경

그림 3

그림 3
공동체와 사회

그림 4

그림 4
판옵티콘의 구조

그림 5

그림 5
뒤샹의 변기

그림 6

그림 6
타자의 존재를 지각하지 못하는 유형[3]

그림 7

그림 7
타자를 문제로 보는 유형

그림 8

그림 8
타자와 소통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유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