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s of Design Research
[ Article ]
Archives of Design Research - Vol. 34, No. 1, pp.201-211
ISSN: 1226-8046 (Print) 2288-2987 (Online)
Print publication date 28 Feb 2021
Received 14 Jan 2021 Revised 15 Feb 2021 Accepted 17 Feb 2021
DOI: https://doi.org/10.15187/adr.2021.02.34.1.201

디자이너 한도룡의 생애과 작품에 비추어 본 초국가적 디자인사 연구

Jongkyun Kim김종균
MA Curating of Contemporary Design, Student, Kingston University, London, UK 현대디자인큐레이팅 전공, 학생, 킹스턴대학교 대학원, 런던, 영국
Transnational Design History Based on Designer Han Do-ryong's Life and Works

초록

연구배경 기존의 한국 근대 디자인 역사 연구는 대개 외부에서 이식된 디자인관, 즉 식민주의적 관점의 역사관이 지배적이었다. 최근 ‘초국가적 디자인사’가 주목받는 가운데, 한국 현대 디자인의 역사를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이 글은 우선 한도룡의 생애와 작품이라는 미시사를 살펴보고, 이를 통해 한국 현대 디자인이라는 거시사를 재발견하고자 한다.

연구방법 인터뷰와 문헌연구를 바탕으로 한도룡의 성장과 서울대 응용미술과에서 받은 교육, 한국미술전람회에서의 수상, 신성공예사와 한국공예시범소, 홍익대교수와 ‘인타’디자인 대표로서의 활동, 작품 성향 등을 연대기별로 조사한다. 근대기 한국 디자인의 사회적 위상과 작품 경향, 환경디자인분야의 개척 과정을 살펴본다. 더불어 한도룡의 활동이 현대 디자인에 끼친 영향을 살펴본다.

연구결과 한도룡은 해외 유학을 다녀오지 않는 전통공예가로, 생업을 통해 몸에 익힌 한국 전통문화를 바탕으로 현대 디자인을 해석해 내었다. 대학 내 공업디자인 교육의 기틀을 확립하였으며, 또한 디자인의 영역을 확대하고 개척하였다. 근대 한국 디자인의 지평을 확장하는데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

결론 한국 현대 디자인을 외래에서 이식된 문화로 인식하는 것이 학계의 지배적인 흐름이나, 일정 부분 현대 디자인은 전통공예에서 출발하여 자생적으로 발전해 왔다고 볼 수 있다. 기존의 한국 디자인 역사는 내재적 발전론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Abstract

Background Existing research on the history of modern South Korean design was dominated by a design view implanted from the outside, that is, a view of history from a colonial perspective. With the recent transnational design history attracting attention, it is necessary to reconstruct the history of modern Korean design. This article first looks at Do-ryong Han's life and works in the micro-history context, and then tries to rediscover and interpret the macro-historical perspective of Korean design history.

Methods Based on interviews and a literature search, the study researches the growth of Do-ryong Han's professional career, which includes education received at the Department of Applied Art at Seoul National University, awards at the National Art Exhibition, works in 'Shin-sung crafts company' and 'Korean Handicrafts Demonstration Centers', activities as a professor at Hong-ik University, representatives of 'INTA Design', and the propensity of his works. In parallel, the study reviews the social status of Korean design in the modern period, the trend of works, and the process of pioneering the field of environmental design. In addition, the study reassesses the influence of Do-Ryong Han's activities on contemporary design.

Results Do-ryong Han is a traditional craftsman who did not study abroad and he interpreted contemporary design based on the traditional Korean culture that he acquired through his career, He also established the foundation for industrial design education in the university, and expanded and pioneered the area of design. In addition, he played a leading role in expanding the horizons of modern Korean design.

Conclusions A dominant trend in the academic world, Korean contemporary design is recognized as a culture transplanted from the outside world dominated by Western influence. However, it can be seen that certain parts of contemporary design have developed spontaneously starting from traditional crafts. The existing history of Korean design needs to reexamine its existing development theory.

Keywords:

Transnational Design History, Han Do-ryong, Micro-History, Environmental Design, Korean Style Design, 초국가적 디자인사, 한도룡, 미시사, 환경디자인, 한국적 디자인

1. 연구의 배경 및 목적

얼마 전부터 서구에서는 기존 서유럽 중심의 계몽주의1)적 디자인사 서술방식에 반성하고, 개별 국가의 역사 발전의 특수성이 반영된 초국가적(Transnational) 디자인사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초국가적 디자인사 서술에서는 미시적이고 개별적인 것들을 주목하며, 젠더나 식민지, 계급, 지역문화 등 기존에 주목받지 못하던 주변부의 문화를 들여다보고 의미 있는 결과나 통찰력를 이끌어 낸다. 반면, 한국 디자인사는 줄곧 식민주의적 사관을 고수하고 있다. 최근 한국의 국력 신장과 더불어 디자인 문화의 급속한 발전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디자인사를 서술할 수 있는 배경은 갖추었으나, 내재적 발전론, 내지 혼합형 발전론을 주장하는 목소리는 나오지 않고 있다.

기존의 한국 근대디자인 연구는 식민주의적 관점, 즉 디자인은 이식된 문화라는 관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형식 면에서는 제도권 내에 서구디자인이 도입되는 과정을 살피고, 내용 면에서는 추상적인 형태의 근대디자인이 등장하는 시기를 살펴보는 데 집중한다. 그 결과, 일본 동경예술대학에서 응용미술을 배웠던 초대 디자이너들을 주목하고, 이들이 처음 강의하던 서울대 응용미술과의 수업 내용을 살핀다. 또한 미국의 지원을 통해 일리노이 공과대학(IIT)에서 1년간 수학했던 민철홍(1933-2020)을 통해 한국 디자인과 바우하우스의 연결을 시도하기도 한다. 이와 더불어 제도권의 정책적 육성을 부각시키는데, 한국공예시범소나 한국디자인 진흥원의 활동 내용이 과장되어 부각된다. 일본이나 미국을 통해서 디자인이 전파되고, 정부가 주도적으로 발전을 이끌어 왔다고 믿고 있다. 동경대나 일리노이 공대의 디자인 프로그램이 국내에 전파되었다고 믿는 편이 세계사적 흐름에 편승하는 것 같고, 앞선 미국의 기술을 가지고 왔던 한국공예시범소가 국내의 수공예를 산업화시켰다고 기술하는 것이 더 설득력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반면, 자생적이고 주체적인 디자인발전사는 거의 언급되지 않고 있다. 나전칠기가 자연스럽게 현대 디자인으로 발전됐다거나, 목공예가 한국 현대 디자인의 근간이라는 주장은 터무니없어 보인다. 한도룡은 국내 대학에 처음으로 공업디자인과를 만들고 해외박람회 전시를 도맡아 한국을 알리며, 전시와 환경디자인 분야를 개척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 디자인의 기틀을 닦았다. 그런 그의 업적은 인정하면서도, 그가 숙련된 나전칠기 장인이었다는 점은 잊혀졌다. 한도룡의 이력은 외국 대학에 연결고리를 만들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전형적이다. 경남 통영과 부산의 나전공장에서 생업수단으로서 전통공예를 익혔고, 국내 최고의 신성공예사에서 일하며 서울대 응용미술과를 졸업했다. 이후, 한국공예시범소 디자인부장, 홍익대학교 교수, 스페이스디자인연구소와 인타디자인을 경영하며, 올림픽, 엑스포, 해외박람회 등 언론을 장식하는 대부분의 대형 국책프로젝트를 수행했다. 이 모든 것은 기존에 서술된 한국 공예사나 디자인사에서 각각 중요하다. 특히 신성공예사, 한국공예시범소, 서울대학교 응용미술과는 오늘날 한국 디자인의 원형이 생성되는 중요한 장소이고, 박람회는 6~80년대 한국 디자인계의 최대 프로젝트였다. 한도룡의 생애를 들여다보면, 전통공예가 어떤 식으로 현대 디자인으로 탈바꿈되어 발전해 왔으며, 현대 한국 디자인의 풍토가 어디에서 기인하였는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한다. 한도룡의 개인사가 곧 한국 디자인 역사의 축소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한 개인의 생애사를 통해 주체적이고 자생적인 한국 근대 디자인의 형성과정을 재구성해 볼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한도룡 개인의 생애사, 즉 미시사를 통해 한국 근대 디자인이라는 거시사를 재탐색해 보고자 한다.2)


2. 한도룡의 생애

2. 1. 출생과 성장

한도룡은 1933년 일제 강점기에 통영에서 태어났다. 통영에서는 진남 국민학교를 3학년까지 마치고, 일가족 모두 만주로 건너가, 4학년부터 만주에서 일본학교를 다녔다. 1년 반 후 해방이 되어 초등학교는 졸업하지 못한 채 통영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에도 가난하여 학업은 통신강의록으로 대신하고, 대신 나전칠기 공장에서 급사(給仕)로 일하며 청소를 하거나, 숯불에 아교풀을 끓이는 등의 일을 했다. 나전칠기는 어깨너머로 배웠는데, 1년 정도 되자 문양 다루는 솜씨나 톱질이 어른만큼 능숙해졌다. 어려운 형편으로 통영에서 중학교 진학이 어렵게 되자, 당시 부산에서 유명한 ‘통영칠기사’에 찾아가 공장에서 숙식 근무를 하며, 인근 동주(東州) 상업중학교를 다녔다. 하지만, 중학교 3학년 무렵, 6‧25 전쟁이 일어났고 학업은 중단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다시 영남상업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당시는 고등학교에서 한 사람이 하나의 기술을 익히자는 문교부 정책에 따라 ‘일인일기(一人一技)’를 장려하던 시기이다. 그 일환으로 문교부 주관의 고등학교 공예품 공모전이 개최됐는데, 한도룡은 거북선 도안의 자개를 오려 붙인 나무 보석상자를 출품하여 국회의장상을 수상했다. 영남상고에는 미술반이 없었지만, 미술 선생님의 도움으로 대학입시를 준비하여 서울대학교 응용미술과로 진학했다. 서울대학은 학비도 싸고, 나전칠기 기술을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응용미술과가 개설된 유일한 대학이라는 이유에서였다.

2. 2. 서울대학교 응용미술과와 국전

1954년, 서울대학교 응용미술과에 입학하여 장발, 이순석, 김정자 교수 등에게 교육받았다. 입학 동기인 민철홍, 조영제와 항상 어울려 다녀 주위에서 ‘세 마리의 까마귀’, 즉 ‘단짝’이라는 의미의 일본어 ‘삼바 가라스(三羽烏)’라 불리었다. 서울대는 응용미술과를 설치한 유일한 곳이었지만, 벽지도안, 책표지 따위의 평면작업이 중심이었다. 2학년부터 목공예 중심의 입체작업이 처음 시작되었는데, 한도룡, 민철홍, 조영제는 대학 2학년부터 국전 공예부문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당시 대학생이 국전에 참가하는 일은 드물었다. 서양화 부분은 가끔 출품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기성작가들이 참가하기 때문에 대학생은 입선조차 힘들었다. 또, 국전에서 공예란 나전칠기, 즉 자개를 붙이고 칠하는 작업이라는 인식이 팽배했고, 간혹 목기도 눈에 띄었다. 공예부에 출품하는 사람은 나전칠기에 매우 숙련된 장인이 대부분이었고, 형태보다는 칠을 얼마나 깨끗이 했는지가 작품을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이었다. 하지만 한도룡 일행은 전통기술보다 새롭고 기능적이며, 조형성에 중점을 둔 작품을 출품했다. 기존 관습을 타파하여 다양한 형태를 탐색하고, 새로운 기법을 적극 도입한 것이 반향을 일으켰다. 응미과 대학생이 출품한 작품은 기존 공예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고, 이례적으로 3명 모두 학생 시절 국전 특선을 수상했다. 특히 한도룡은 1955년부터 59년까지 국전 공예부 특선을 3번이나 수상 했고, 1960년도에는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하여 추천작가가 되었다.

Figure 1

Han Do-ryong's National art competition Award-winning works(1955~57)

2. 3. 신성공예사와 한국공예시범소

한도룡은 서울대학교를 다니는 동안 국내 최고 명성의 신성공예사에서 기거했다. 공장에서 숙식하며 학교를 안 가는 때에는 늦게까지 일을 했다. 신성공예사는 다양한 나전칠기를 생산했으나, 백태원(白泰元, 1923-2008)은 당시 수출품과 관광기념품 개발에 골몰하였으므로 전통공예보다는 늘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려고 노력 중이었다. 한도룡은 특히 자개 도안에 뛰어나 기존의 전통문양에서 벗어나 여러 가지 어려운 문양을 다루었고, 백태원의 요구를 전담하여 처리하는 수석기술자였다. 백태원은 나전칠기 제품을 수출하고 싶어 했지만, 전통 제품으로는 힘들 것이라는 판단에 서양 문화와 관련이 있는 제품 제작을 시도했다. 이 작업은 주로 한도룡이 맡았다. 밥상이나 보석함 같은 것이 아니라, 테이블, 파티션용 병풍 등, 수출용 디자인을 제작했는데 공장 운영에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Figure 2

Catalogue of Shinsung Craft's Export goods (1950s)

신성공예사는 화신백화점 등에 점포가 있었고, 국내 굴지의 일은 모두 맡아 제작했다. 경무대의 실내 비품도 신성공예사 제품이었으며, 프란체스카3) 여사 침대 머리 양쪽에 용(龍)머리를 나무로 조각한 이가 한도룡이었다. 경무대에 자주 출입하던 노먼 디 한(Norman R. De Haan)은 마침 프란체스카 여사의 숙소에서 신성공예사 제품들을 발견하고, 제작사를 물어 본 뒤, 한도룡을 찾아 신성공예사를 찾아왔다. 요컨대 한국공예시범소 멤버 중, 노만 디 한이 직접 섭외한 사람은 한도룡이 유일하다. 대학 졸업 후, 신성공예사에 1년간 더 머무르고 있던 한도룡은 노먼 디 한의 요청으로 한국공예시범소의 디자인부장(chief designer)으로 자리를 옮겼다.4) 노먼 디 한은 공예시범소 단장으로 주로 건축설계, 인테리어를 맡았다. 피스틱은 도자기 화학실험과 가마, 전기로 등을 주로 만들었다. 탈렌티노는 금속공예를 맡아 주얼리 샵을 맡았고, 주로 제품을 담당했다. 이 중, 초자(유리), 죽세품, 목기, 액세서리 같은 공예품 개선 작업 대부분을 맡은 사람은 탈렌티노였는데 그는 한도룡과 가까이 지내며 호흡을 맞추었고, 함께 청주나 담양, 남원 등 전국을 누볐다. 한도룡은 수출공예품 디자인을 담당했다.

Figure 3

Han Do-ryong on a tour of craft survey with Min Cheol-hong and Paul Talentino

한도룡은 공예품 조사를 목적으로 지역 답사를 많이 다녔다.5) 이 기간 동안 한도룡의 전통공예에 대한 식견은 더욱 높아졌을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당시 국내 최고 공예가였던 이순석 등으로부터 지도받고, 백태원 및 노먼 디 한, 탈렌티노의 수석디자이너로 일했으며, 전국의 한국전통공예에 대한 산업현황조사까지 했으니 적어도 디자인과 공예를 아우르는 부문에서만큼은 한국 최고의 전문가였다. 또한 한도룡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했다. 1950년대, 서울대 응용미술과, 신성공예사, 한국공예시범소가 조금씩 방향은 달랐을지 모르나, 모두 그에게 새로운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2. 4. 홍익대학교 교수 부임과 공업디자인 전공 설치

한도룡은 서울대 졸업 후, 홍익대 공예과에서 목칠을, 서울대와 이화여대에서는 디자인을 가르쳤다. 이화여대는 사범대학, 자수과, 상업도안과에서 3개 강의를 맡았다. 상업도안과에는 백태원 선생도 출강하고 있었는데 그가 상업디자인을 맡고, 한도룡은 포스터를 지도했다. 이후 홍익대에서는 목공예전공이 신설되었고 한도룡이 교수로 부임했다. 공예과에는 유강렬, 한홍택, 한도룡 세 사람이 교수로 자리를 잡았다. 당시 홍익대의 학제는 1학년에 데생과 같은 기초과목을, 2학년에 탐색과목을 공통으로 진행했다. 3학년 때 도안과, 공예과 등으로 분리가 되는데 한도룡의 전공인 목칠과에 우수한 학생들이 몰렸다. 한도룡은 오랜 실무 경력으로 실기에 대단히 자신이 있었고, 학생들에게 늘 시범을 보였다. 또, 젊은 교수로 열정적으로 수업에 임해서 학생들은 목칠 전공에 관심이 높았다. 하지만 한도룡은 수작업이 많은 나전칠기보다는 변화하는 미래 사회에 더 필요한 공업디자인으로 전향해야 한다고 믿었다. 당시 금성사가 막 여러 가지 제품을 생산하며 가장 큰 가전제품 업체로 자리매김하던 시기이고, 또 대한전선(대우전자의 전신)이 이를 뒤따르고 있었다. 정부에서는 수출을 강조하기 시작했고, 수출품 디자인으로서는 칠기보다는 제품디자인이 훨씬 전망이 밝다고 믿었다. 한도룡의 이러한 고민은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며, 신성공예사와 공예시범소에서 줄곧 고민해왔던 것이 수출품이었기 때문이다.6) 1966년 공예학부 도안과를 공업도안과로 개칭하였다가, 1971년 홍익대학교가 종합대학으로 승격됨과 동시에 공업도안과를 설치하였다. 1976년 실험대학을 추진하면서 공업도안과를 산업도안과로 개칭하였고, 국내 최초로 공업디자인 전공을 설치하고 문교부에 허가를 받았다.


3. 한도룡의 활동과 작품

3. 1. 디자인 비즈니스의 시작 - 스페이스디자인연구소와 인타7) 디자인

한도룡은 대학 교수로 재직 중, 디자인 전문회사를 설립하여 경영인으로서의 수완을 발휘했다.8) 1965년, ‘스페이스디자인연구소’를 설립하여 처음에는 목칠을 하다가, 이후 제품디자인, 디스플레이로 점차 범위를 넓혀 결국 공간디자인으로 안착했다. 당시 전문가가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수주하는 일들은 매번 달랐고, 공예와 디자인이 덜 분화된 시기였으므로 쉽게 영역을 확장할 수 있었다. 작업 공간이나 인력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아 집, 학교 구분 없이 일을 했고, 일감이 몰릴 때는 호텔을 빌려 작업실로 썼다. 그러다 재일교포 정건영9) 회장의 지원으로 반도호텔에 사무실을 냈는데, 당시 교수 신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스페이스 디자인 사무실에는 건축가 김원석10)과, 당시 한일은행에서 근무하던 권명광의 도움을 받았다. 회사가 점차 자리를 잡아가자, 감당하기 힘든 양의 일이 몰려들었고, 1977년 스페이스디자인연구소는 ‘인타(人妥)디자인’으로 확장된다. 마침 반도호텔이 철거되어 정 회장은 반도호텔에 있던 지사를 조선호텔로 옮겼고, 다시 한도룡을 배려해 주어 조선호텔 2층에 큰 사무실을 가지게 됐다. 인타디자인은 제품이나 그래픽, 환경, 전시 등 디자인과 관계된 모든 분야를 취급하는 디자인회사로 성장했다. 얼마 뒤 정 회장이 부도가 나서 조선호텔 사무실이 문을 닫자, 한도룡은 사직동의 방 두 칸짜리 아파트에 사무실을 열고 일을 계속하다가, 신촌에 5층 빌딩을 새로 신축하기에 이른다. 연구실에는 홍대의 쟁쟁한 실력자들이 모여들었다. 조벽호, 박기동, 이해묵, 변상태, 김영숙, 유진영, 김인권, 강병길 등 선생의 수업을 들었던 제자들이 속속 합류했다. 한도룡은 많은 시간 인타디자인에서 학교 수업을 진행했다.

3. 2. 토탈디자인 제공 - 코트라(KOTRA)와 세계 박람회, 무역전시회

Figure 4

Korea Pavilion at the Seville EXPO 92 (1992)

한도룡은 6~70년대 국내외의 박람회와 전시회를 섭렵했다. 1967년, 캐나다 몬트리올 박람회를 맡은 건축가 김수근은 한도룡에게 실내 장식을 요청했는데, 한도룡은 신라금관을 크게 제작하여 설치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박람회 작업을 시작한 한도룡은 이후 해외전시와 박람회를 도맡았다. 같은 해, 홍콩에서 개최한 ‘한국 물산 전시’를 맡았고, 홍콩, 구룡(九龍) 해안가의 20층 정도 되는 건물을 한국무역센터로 사들여, 1층을 한국의 상사들이 입주하는 코리아센터로 개조하는 작업을 맡았다. 1968년부터는 매해에 3~4건씩 굵직굵직한 일들을 도맡아 처리했다. 대표적인 박람회로는 텍사스 산 안토니오 박람회(1968), 구로동 국제박람회(1968), 오사카 박람회(1970), 이집트 카이로 박람회(1974), 아프리카 킨샤사 박람회(1975), 트리폴리, 보고타, 시카고, 데살로니카 박람회(1976), 바르셀로나, 나고야 박람회(1978), 바르셀로나, 뉴질랜드 박람회(1979), 멕시코 세계기술전람회, 미국 녹스빌 박람회(1981), 서울 국제무역박람회(1982), 일본 쓰쿠바 박람회(1983·84·85), 밴쿠버 박람회(1986), 미국 세계우표전시회(1986), 브리즈번 엑스포(1988), 나고야 디자인엑스포(1989), 북경 엑스포(1990), 세비야 엑스포(1992) 등이 있다. 1970~80년대에 정부는 많은 해외프로젝트를 발주했지만, 건축가 김수근을 제외하고는 마땅히 인타디자인에 경쟁할 회사가 없었다.11) 상공부에서는 한도룡을 무척 신임했고, 코트라에서 하는 일은 거의 인타디자인의 몫이어서 대략 56개국의 일을 맡았고, 박람회 노하우가 쌓여갔다.

1960~70년대는 전시회의 시대기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수출입국’이라는 슬로건 아래 ‘해외 수출만이 살길’임을 강조하며 모든 노력을 기울이던 시대였기 때문에, 상공부에서도 끊임없이 상품전시회를 열었다. 한도룡이 이끄는 인타디자인은 매해 수출의 날 행사장을 디자인하고 수출 1억불 기념탑을 제작했다. 제1회 한국 무역박람회를 맡아 심벌마크를 개발하고 박람회장 인테리어 자문을 맡아, 그 공로로 국무총리상을 받았다. 또 박정희 대통령 주관의 ‘수출확대회의’에서 수출상품 전시를 몇 년간 맡았다. 마산수출자유지역을 처음 조성할 때, 상징탑과 조경을 맡았고, 무역센터(KOEX, 1998년 COEX로 명칭 변경) 대지를 확보할 때부터 참여해서 ‘KOEX’라는 이름에서부터 태극 색깔에 엽전 모양의 심벌마크, 사인, 색상, 상징탑을 제작했다. 한도룡은 코트라가 하는 일에 건축을 제외한 그래픽, 조형물, 조경 등의 디자인을 제공했고, 1970년 광복절에 그 공로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국내 대기업 홍보관이나 전시도 독보적이었다.12) 각 기업들은 경쟁적으로 전시회장을 꾸미는 데 열심이었고, 금성, 삼성, 선경 등 국내 굴지의 기업은 인타디자인을 먼저 찾아왔는데, 한도룡은 일 욕심이 많아 모두 수주했다.

1970년대 후반에는 디자인 의뢰가 폭주했다. 1978년에는 한 달에 해외 전시가 두ㆍ세 건씩 잡히는 일이 허다했고, 6~8월은 뉴질랜드, 과테말라, 파나마, 에콰도르 등 먼 곳의 해외 박람회가 한 달에 하나씩 있었다. 당시 한도룡은 학교 수업과 더불어, 한국 현대디자인학회 부회장, 각종 협회고문이나 자문위원까지 겸하고 있는 때였다. 인타 직원은 2~30명 정도였지만, 한도룡은 직원들을 적극 활용하여 각 국가별로 팀을 나눠 움직였고, 학생들을 아르바이트로 동원했다.13) 각 전시회는 매번 주제가 달라 새로운 콘셉트가 필요했고, 학생들은 늘 신선한 아이디어를 내놓아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Figure 5

Masan Free export zone Symbol tower (1972) / Seoul International Trade Exhibition (SITRA) Tower (1982) / COEX, ‘Lucky’ Group Hall (82) / ‘KOEX’ symbol and logo

3. 3. 환경디자인 개척 - 독립기념관, 88서울올림픽, 93대전 과학엑스포

한도룡은 건축가가 아닌 디자이너로서 국내 환경디자인 분야를 개척했다. 처음에 박정희 대통령 시절, 정건영 회장의 의뢰로 경주보문단지 계획에 참여했는데, 거의 도시계획 수준의 큰 작업이었다. 다보탑을 콘셉트로 한 기념탑을 기획했으나, 결국 착수되지는 못했다. 이후, 서울 지하철 CIP를 총감독하면서 심벌은 서울시의 ‘S’자를 형상화했고, 각 지하철 라인의 색상 지정과 매뉴얼을 만들었다. 픽토그램과 노선도, 서체를 개발했으며, 사인판, 이정표 등도 개발했다.

천안 독립기념관에서 한도룡은 ‘겨레의 탑’ 시안에 계곡의 바람을 감안한 풍경을 설치하고, 탑 내부는 에펠탑처럼 사람들이 올라가서 내려다 볼 수 있는 구조로 만드는 등 거대한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예산 부족으로 탑은 원 계획안에서 1/3이 잘려나간 크기로 줄어들고, 풍경이나 내부 계단 등의 계획은 사라졌다. 이와 더불어 독립기념관의 7호관도 한도룡이 맡았다. 1호관부터 7호관까지 각기 다른 시대나 주제를 보여주는데, 7호관은 ‘현대관’으로 발전하는 대한민국의 모습을 보여주는 곳이었다. 한도룡은 새마을 운동 등의 내용으로 설계에서 시공까지 맡아서 진행했다.

Figure 6

Seoul Subway sign system(1982~91) / Tower of Gyorae(1984) / '99 SEOUL Olympic Environmental Design(1988)

88서울올림픽에서는 환경장식을 맡았다. ‘한국의 불’을 콘셉트로 빨간색을 주조색으로 잡았다. 현수막, 입구 조형물, 사인시스템 등에 대한 매뉴얼을 만들었는데 큰 책이 두 권 만들어졌다. 주경기장 입구, 축구 경기장, 복싱 경기장, 레슬링 경기장 등에 환경장식을 도맡아 진행했다. 올림픽이 끝난 후, 급작스럽게 대전 엑스포 계획이 발표되었고, 한도룡이 총괄 감독을 맡게 되었다. 주제는 ‘과학’이었고, 한도룡은 마스터플랜과 조닝(zoning, 구역설정), 엑스포 상징탑을 맡았다. 상징탑의 하단은 첨성대에서 모티브를 따오고, 가운데 동그란 원반 부분은 비행접시모양, 상부에 뾰족한 지붕은 미래를 향해 하늘로 올라가는 내용을 형상화했다. 하단은 돌, 상단은 스테인리스 스틸을 사용해서 대비를 줘, 과거와 미래를 상징했다. 탑 내부를 통해 가운데 원반까지는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서는 투명 창 너머로 별자리가 보여 우주로 올라가는 느낌이 들게 하였다. 탑의 중반에 위치한 비행접시 부분, 내부에 들어서면 바닥으로는 둥근 창을 내서 지상을 내려 볼 수 있게 했다. 탑의 주변에는 ‘십이지신(十二支神)’으로 방향각을 나타냈다.

Figure 7

Complete view of Daejeon EXPO and 'Hanbit Tower'(1993)

3. 4. 한국적 디자인 수립 - 전통과 현대의 접목

한도룡은 전통공예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현대 디자인을 개척했다. 한도룡의 디자인 작업에 배어 있는 한국 전통문양이나 공예적 기법은 80년대 한국적 디자인을 추구하던 많은 디자이너들이 피상적인 전통요소를 차용하던 식의 인위적인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성장 과정에서 일상의 노동으로 체득한 정서였다.

어린 시절 통영과 부산의 나전칠기 공장에서 밥상, 보석상, 담배함 같은 것을 만들었다. 밥상은 상판 가장자리에 자개를 얇고 긴 띠 형태로 잘라서 붙이고, 그 안에 매화꽃이나, 산수화, 소나무에 학이 날아가는 모습 등을 새겼다. 상 옆에는 한자로 ‘부귀다남(富貴多男)’, 즉 복을 받고, 애를 많이 낳으라는 글자를 새기는 작업을 했다. 도안은 예전부터 내려오는 전통문양이나 도안을 복사해서 썼다. 신성공예사에서는 다양한 전통공예를 바탕으로 수출품 디자인을 제작했고, 경무대, 백화점 등에 납품하는 가구나 혼수품, 주한미군의 기념품 등을 주로 제작했다. 대개 전통 도안의 나전칠기였지만, 전통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는 일, 즉 외국인에게 어필하는 한국의 전통을 선별하고 상품화하는 일이었다. 공예시범소에서의 역할도 마찬가지다.

정건영 회장이 동경 긴자(銀座)에 동화 상호호텔(12층)을 지으면서, 한도룡에게 3~5층에 인테리어를 맡겼는데, 5층에는 큰 연회장으로 팔각정을 만들어 넣었고, 3층, 4층은 작게 나눠진 방에 나전칠기로 장식했다. 각 객실에 있는 라디에이터에는 나전칠기로 된 장을 만들어 씌웠다. 정확히는 라디에이터 앞면을 가리는 커버였고, 윗면은 열기 배출을 위해 뚫려 있어 모양만 장이었던 셈이다. 한국 콘셉트의 인테리어는 일본의 다른 호텔과 차별화되었고, 동화호텔은 동경의 명물이 되었다. 이러한 작품경향은 해외박람회에서 수없이 재연되었다. 전시장은 대부분 거북선, 첨성대, 신라금관, 오방색 등의 요소를 상황에 맞게 활용하였다.

Figure 8

Donghwa Hotel Interior(1973) / Oriental Room (2007) / LG Memorial Hall (1998)

청와대14) 증축공사에서도 한도룡은 대통령 관저를 모던하면서 전통이 배어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청와대 본관에는 간결하게 해석한 공포(栱包)구조를 올리고, 갓을 모티브로 샹들리에를 만들었다. 각 창문에는 한국적인 전통패턴을 적용하고, 현관 계단 앞에는 동양화를 재해석한 작품을, 집무실 뒤에는 십장생을 배치했다. 좌우 별관은 각기 문(文), 무(武)로 콘셉트를 나누어, ‘문’은 세종대왕을 기려 세종홀, ‘무’는 충무공을 기려서 충무홀로 정했다. 세종홀에는 벽면에 훈민정음을 바탕으로 한 벽장식을 백금남(白金男, 1948~)에게 맡겨서 만들어 붙였다. 화려하지 않으면서 품위가 있고, 한국의 전통이 잘 드러나는 방향으로 시공을 했다. UN사무총장 관저에 ‘오리엔탈 룸’을 만들면서 벽난로 앞에 우리나라 전통 뒤주를 반 잘라서 붙이고, 바닥은 대청마루로 마감했다. 강을 향해서 바라보는 창문은 한국 창살문을 만들었다.

그의 작품에서 일관되게 드러나는 정서적 기조는 한국의 전통이다. 전통 소재의 현대적 해석은 한국 근대국가 건립 과정에서 드러나는 한국 디자인의 시대적 특징이기도 하다.


4. 한도룡의 작품 세계와 현대 한국 디자인에 미친 영향

국내 디자인 연구에서 해외 유학파 작가들에 비하여, 전통에 기반한 현대 디자인을 구현한 한도룡에 대한 평가는 박한 면이 없지 않다. 한도룡을 통해 한국 디자인 역사에 대한 재평가를 해 볼 수 있는 부분이 두 가지 있다. 우선, 전통 목공예를 현대 디자인으로의 발전시키고 한국적 조형언어를 정착시키는 가교 역할을 한 점, 둘째, 해외의 앞선 디자인을 국내에 전파하고 국내 디자인의 지평을 확장시키며 현대 디자인의 자생적이고 능동적인 발전에 기여한 점이다.

4. 1. 전통공예의 현대화를 통한 자생적 디자인 문화의 발전과 정착

우선 외래문화의 이식으로 점철된 한국 디자인사에서 해외 유학이 아닌 전통공예를 기반으로 현대 디자인을 발전시킨 공로가 크다. 목공예(나전칠기)를 발전시켜 공업디자인과 형태로 정착시키고, 세계 조류를 몸으로 체득하며 공업디자인과 환경디자인 분야를 개척해 나간 업적은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 또 그를 통하여 김성수(전 숙명여대 교수) 등, 많은 수의 목공예(나전칠기) 장인이 공업디자인계로 전향하여 초기 디자인계의 기틀을 형성하였다.

한도룡의 많은 작업은 한국적 정서와 전통에 기반한 소위 ‘한국적 디자인’을 추구하고 있다. 이러한 부분은 7~80년대 여타 디자이너들에게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경향이나, 타 디자이너들이 기법상의 고민 없이 디자인 모티브에서만 전통소재를 차용하는 소재주의적인 접근을 시도하였다면, 한도룡은 기법과 소재를 모두 충족하는 한국적 디자인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엄연한 차이를 보인다. 또 타 디자이너들이 유행처럼 일정 시기에만 한국적 디자인을 추구한 측면이 없지 않으나, 한도룡은 그의 일생을 관통하면서 나전칠기와 전통의 요소가 자연스럽게 배어나온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다만,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한도룡이 제작한 수많은 기념비성 구조물은 개발독재시대의 이미지를 세팅한 측면이 있고, 이후 관(官) 주도의 환경 조형물들이 이 문법을 계속 유지해 나갔던 점은 그의 작품의 한계로 지적될 수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4. 2. 해외 최신경향의 국내 전파와 디자인의 외연 확대

한도룡은 전통공예제품에서 시각, 제품, 디스플레이, 인테리어, 환경디자인으로 점차 범주를 넓혀가며, 90년대 초, ‘토털(Total)디자인’이라는 용어를 정착시킬 정도로 종합디자인솔루션을 제공하는 회사로 성장했다. 더불어 해외 최신 디자인을 끊임없이 국내에 전파했다. 그는 쉴 새 없이 해외의 박람회장과 전시장을 뛰어다니며 최신 디자인을 접했고 대학 강의와 자신의 작업에 녹여냈다. 당시 해외 최신 디자인 경향이 국내에 전파되는데 수개월 이상의 시간이 소요되는 상황에서 한도룡은 실시간으로 동시대 세계 디자인 경향을 체득하며 국내를 선도했고, 환경디자인 분야의 지평을 개척해 나갔다. 통상 건축가가 맡기 쉬운 환경디자인분야를 선점하고, 당대 국책공사를 도맡아 진행하던 김수근과 국내 대형 프로젝트를 양분하는 사업수완을 발휘했다. 디자인이 상업미술(그래픽디자인)과 제품디자인에 한정되는 상황에서, 건축 영역으로 인식되던 환경, 조경, 인테리어 분야를 개척했고, 더불어 통상 조각가가 맡고 있던 환경조형물 역시도 디자인의 한 분야로 편입되었다.


5. 마치며

한도룡의 생애는 비전형적이면서도 모던 디자인의 이념과 사뭇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 몸에 밴 전통목공예 기술과 전통에 기반한 소재를 바탕으로 전 세계를 종횡무진하며 현대 디자인을 개척해 나갔다. 세계 조류를 전달하며 국내 디자인의 질적 수준을 끌어올리고, 디자인의 외연을 확장시켰으며, 디자인 비즈니스를 정착시켰다. 공교롭게도 한도룡의 활동은 한국 디자인사의 발전과정과 딱 맞아 떨어진다. 통영 나전칠기, 서울대 응용미술과, 국전 공예부, 신성공예사, 한국공예시범소, 홍익대, 인타디자인, 박람회와 올림픽, 엑스포는 각 시기별로 한국 디자인사의 이정표와 같은 이벤트로, 이 모두를 관통하며 그 중심에 한도룡이 있다.

한도룡의 행적을 재조명함으로써 막연히 디자인은 외래에서 전수되어 한국에 이식된 것으로 인식해 온 기존 학계의 디자인사 서술의 풍토를 반성할 기회를 가짐과 동시에, 초국가적 디자인사 서술의 관점에서 한국 디자인의 내재적이고 주체적인 움직임을 재발견하고 해석하며, 주관적이고 능동적인 내재적 발전의 역사로 디자인사를 재구성해 볼 수 있다.

Glossary

1) 여기서 계몽주의는 합리주의, 이성중심, 진보사관, 개인 중심의 사고와 같이 서양 근대 사회를 지배해온 가치관을 통틀어 말한다.

2) 이 글에 서술된 한도룡의 생애와 활동 내용은 연구자가 진행한 구술채록 인터뷰에 근거하고 있음.(『2014년도 한국 근현대 예술사 구술채록 연구 시리즈 239: 한도룡』,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15.12.)

3) Francesca Donner Rhee (1900~1992), 초대 이승만 대통령 영부인.

4) 한국공예시범소는 서울 태평로 우측 편, 3층 건물인 ‘중앙산업’에 1층과 3층에 위치했다. 미국인 스미스 셔(Samuel S. Scherr), 노만 디 한, 스텐리 피스틱(Stanley Fistic), 폴 탈란티노(Paul Talentino), 오스틴 콕스(Austin Cox)가 파견나와 있었다. 스미스 셔는 한국프로젝트의 총 책임자였지만 한국에 거의 머물지 않았고, 실질적인 총 책임자는 노만 디 한이었다. 노먼 디 한은 새로운 아이템을 늘 한도룡과 상의했으며, 디 한이 제안하면 한도룡이 스케치하고 샘플을 만드는 식으로 일했다.

5) 노먼 디 한과 탈렌티노는 여행을 좋아했지만, 디 한은 바빠서 공예산업 답사에 네댓 번 함께 했고 나머지는 대부분 탈렌티노와 함께였다. 전속기사가 있는 차량을 이용했으며, 도로 사정이 안 좋아 한번 나가면 며칠에 걸쳐서 전국을 돌아다니곤 했다. 전국 공예품답사와 더불어 자주 유명 사찰을 들렀다고 한다.

6) 한도룡은 공업도안 전공이 생기기 전부터 목공예과 과제로 라디오, 냉장고, 선풍기, 전화기 같은 제품디자인을 내주었는데, 학생들의 반응이 매우 좋았다고 한다. 하지만, 본격적인 제품디자인 교육을 위해서는 전공 개설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7) ‘인타(人妥)’라는 이름에는 ‘타인을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게 해주는 디자인작업을 하기를 바라는 뜻’을 담았다.

8) 당시 디자인 전문인력 부족으로 사회적인 디자인 수요를 교수들이 운영하는 디자인회사에서 많은 부분 소화했다. 권순형·김교만이 KK디자인연구소(1956)를, 동기인 조영제가 디자인 연구소(CDR,1973)를 차리기도 했다.

9) 정건영(鄭建永, 1923-2002), 일본 이름은 마치이 히사유키(町井久之), 재일교포 사업가, 스포츠외교가로 알려져 있다. 야쿠자의 보스, ‘긴자의 호랑이’라는 별명이 있다. 애국심이 투철하여 일본대사관의 행사를 지원하거나 스포츠인 후원, 국내 스포츠행사 지원, 국군‧경찰 지원 등에 열심이었다.

10) 김원석(1939~): 홍익대 졸업. 건축가.

11) 박람회는 제공된 부지에 참여국가가 직접 파빌리온을 설계‧시공까지 해야 하는 1종박람회와, 미리 지어진 건물을 받아서 내외부에 디스플레이만 하는 2종박람회로 나뉜다. 1종박람회는 건축설계가 포함되기 때문에 규모가 크고 경쟁입찰을 통해 발주되는데, 대부분 건축가 김수근이 받았다. 2종은 대부분 한도룡이 수의계약으로 독점했다. 김수근 사망(1986) 이후, 마땅한 경쟁자가 없게 되자 한도룡은 세비야 박람회(1종, 1992)를 맡았다. 건축라이센스 문제는 팀 내에 건축가를 한명 합류시키는 것으로 해결했다.

12) 당시 국가차원의 많은 박람회와 전시회가 개최되었는데, 강력한 정부정책에 호응하여 각 기업들은 적극 참여하는 분위기였다.

13) 당시 학생을 동원하는 것이 용인되는 시기였고, 학생 입장에서는 해외박람회 업무를 접할 수 있는 귀한 기회여서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고 한다.

14) 대통령의 집무와 외빈 접견 등에 사용되는 건물로 1991년 9월 4일 신축되었다. 전통 목구조와 궁궐 건축양식을 기본으로 팔작지붕을 올리고 한식청기와를 이었다. 본채와 2동의 별채, 현관채 안마당, 앞마당으로 구성되었다.

Notes

Citation: Kim, J. (2021). Transnational Design History Based on Designer Han Do-ryong's Life and Works. Archives of Design Research, 34(1), 201-211.

Copyright : This is an Open Access article distributed under the terms of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Non-Commercial License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3.0/), which permits unrestricted educational and non-commercial use, provided the original work is properly cited.

References

  • Arts Council Korea Arko Arts Archive.(2015). 2014 Korea Modern Arts History Oral Record Research series 239: Han, Do-Ryong. Han, Do-Ryong oral statement. Kim, Jongkyun Record.
  • Han, Do-Ryong Interview(1) Aug, 8(Fri), 2014, 10:00~12:20, Artist House. Seoul.(1) Aug, 14(Thur), 2014, 15:30~18:00, Artist House. Seoul.(1) Aug, 21(Thur), 2014, 15:30~18:00, Artist House. Seoul.(1) Aug, 28(Thur), 2014, 16:05~18:10, Artist House. Seoul.(1) Sep, 4(Thur), 2014, 12:30~15:00, Artist House. Seoul.
  • Han, D. (1987). 전시공간 연출 [Exhibition space production]. Journal of Korea Institute of Registered Architects 216('87.3), 5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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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an, D., & Kim, Y. (1994). 공공기능 확대를 위한 시티호텔 로비라운지 디자인에 관한 연구[A Study on the Design of the City Hotel's Lobby-Lounge for Public Functions]. Journal of Korea Institute of Interior Design 3('94.10), 38-45.
  • Han, D. (1990). 박람회의 전시 디자인 [Display Design in the Expo]. Journal of Architectural Institute of Korea 157(`90. 11), 29-34.

Figure 1

Figure 1
Han Do-ryong's National art competition Award-winning works(1955~57)

Figure 2

Figure 2
Catalogue of Shinsung Craft's Export goods (1950s)

Figure 3

Figure 3
Han Do-ryong on a tour of craft survey with Min Cheol-hong and Paul Talentino

Figure 4

Figure 4
Korea Pavilion at the Seville EXPO 92 (1992)

Figure 5

Figure 5
Masan Free export zone Symbol tower (1972) / Seoul International Trade Exhibition (SITRA) Tower (1982) / COEX, ‘Lucky’ Group Hall (82) / ‘KOEX’ symbol and logo

Figure 6

Figure 6
Seoul Subway sign system(1982~91) / Tower of Gyorae(1984) / '99 SEOUL Olympic Environmental Design(1988)

Figure 7

Figure 7
Complete view of Daejeon EXPO and 'Hanbit Tower'(1993)

Figure 8

Figure 8
Donghwa Hotel Interior(1973) / Oriental Room (2007) / LG Memorial Hall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