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s of Design Research
[ Article ]
Archives of Design Research - Vol. 33, No. 2, pp.231-247
ISSN: 1226-8046 (Print) 2288-2987 (Online)
Print publication date 31 May 2020
Received 18 May 2020 Revised 10 Apr 2020 Accepted 27 Apr 2020
DOI: https://doi.org/10.15187/adr.2020.05.33.2.231

김교만 그래픽 스타일의 형성과 전개

Hyeon Joo Kang강현주
Department of Design Convergence, Professor, Inha University, Incheon, Korea 인하대학교 디자인융합학과, 교수, 인천, 대한민국
The Formation and Development of Kim Kyo-man's Graphic Style

초록

연구배경 김교만(1928~1998)은 한국의 1세대 그래픽 디자이너다. 2019년에 두 차례 전시회가 개최되어 그의 작품세계가 재조명되었다. 이 전시회를 통해 김교만의 독특한 인물 캐릭터가 공식적으로 처음 등장한 시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인물 캐릭터를 중심으로 한 김교만 그래픽 스타일의 형성 및 전개 과정을 살펴보고 역사적 배경과 의미, 그리고 서구 디자인과의 관계에 대해 검토하였다.

연구방법 본 연구는 문헌연구와 인터뷰 방법으로 진행하였다. 먼저 김교만의 생애와 활동에 대한 선행연구 및 작품을 검토하고 정시화, 황부용과의 인터뷰 자료도 참고하였다. 또한 한국디자인사 연구 동향과 김교만의 작업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되는 서구 디자이너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연구결과 김교만 그래픽 스타일의 변천 과정은 크게 네 시기로 구분된다. 첫째는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초까지로 이 시기에 김교만은 현대적 조형언어와 한국적 주제를 탐구하였다. 둘째는 그가 인물 캐릭터를 창안하여 자신의 그래픽 스타일을 구체화 시킨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다. 셋째는 198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로 이 시기에 김교만 그래픽 스타일은 표현이 더욱 다양해지고 풍부해졌다. 넷째는 1990년대 초반부터 1990년대 후반까지로 김교만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방식으로 작업을 확장했다. 그의 그래픽 스타일에서 가장 중요한 특징인 인물 캐릭터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75년이지만, 이와 관련한 기본적 탐구는 1960년대 중반에 이미 시작되어 말년까지 이어졌다.

결론 김교만은 한국적 소재를 현대적 조형언어로 표현해낸 독특한 인물 캐릭터를 창안하여 자신만의 고유한 그래픽 스타일로 발전시킴으로써 20세기 중반에 한국 그래픽 디자인이 응용미술 단계에서 나아가 시각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으로 발전하는데 기여하였다.

Abstract

Background Kim Kyo-man (1928-1998) is a first generation graphic designer in South Korea. Two exhibitions have been held in 2019 to rekindle his design work. While participating in the preparation of the exhibitions, the researcher could see when Kim's unique character design first appeared. This study looked at the formation and development of Kim Kyo-man's character-centered graphic style. It also examined the historical background and meaning of his style and the impact of Western design.

Methods This research was carried out by reviewing literature and conducting interviews. First of all, preceding papers on Kim's life and work were reviewed. And interview materials with Chung Si-wha and Hwang Bu-yong were referred. A recent study on South Korean design history and Western designers who help understand Kim's work have also been considered.

Results Kim Kyo-man's graphic style changes are largely divided into four periods. The first stage was from the mid-1960s to the early 1970s, when modern design forms and South Korean themes were explored. The second stage was from the mid-1970s to the early 1980s when Kim formed a unique graphic style. The third stage was from the mid-1980s to the late 1980s, when his graphic style became more diverse and enriched. The fourth stage was from the early 1990s to the late 1990s, when his graphic style shifted from analog to digital. It was in 1975 that Kim’s unique character design, the most important element in his graphic style, first appeared. But the quest for this began in the mid-1960s and lasted until his late years.

Conclusions Kim Kyo-man's graphic style emerged in the mid-20th century in South Korea as applied art developed into visual communication design. He created a unique character design that successfully combined modern design forms with South Korean themes and expanded them to his own graphic style.

Keywords:

Kim Kyo-man, Graphic Design, Design History, 김교만, 그래픽 디자인, 디자인사

1. 서론

1. 1. 연구 배경 및 목적

김교만은 1928년 충청남도 공주에서 태어나 1998년에 타계한 1세대 그래픽 디자이너다. 그는 한국의 전통문화와 생활풍속을 소재로 삼아 한국인의 서정과 해학을 고유한 스타일로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그가 작고한 지 21년만인 2019년 가을에 열린 <김교만 : 한국의 가락>1) 전과 <서울 김서방 DDP 가다>2) 전은 김교만의 작품세계를 재조명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생전에 유근준(1976)은 ‘디자이너로서 김교만의 성장 과정은 곧 한국 시각디자인의 발전사’라고 평가하였다.

본 연구자는 「김교만과 한국 현대 그래픽 디자인」(2011)을 통해 김교만의 생애와 주요 활동 및 작품세계에 관해 포괄적으로 다룬 바 있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의 시각디자인교육, 1965-1994 : 디자이너 -교수 3인의 활동을 중심으로」(2013)에서는 디자인 교육자로서의 그의 면모를 주목하였다. 한국디자인진흥원과 네이버가 공동 기획한 네이버 캐스트 디자이너 열전에 「김교만: 현대적인 조형감각과 한국적인 정서의 디자인」(2014)을 게재하기도 했다. 김교만 생전에는 인터뷰 기사인 「한국인의 서정과 해학을 담은 작가, 김교만」(1988)을 『월간 디자인』 지에 실었다. 또한 작고 10주년에 한국시각정보디자인협회(VIDAK)가 개최한 <VIDAK 수요일: 1세대 디자이너를 만나다-고(故) 김교만 교수의 작품세계에 초대합니다> 포럼(2008)을 기획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선행연구에도 불구하고 김교만 그래픽 스타일의 가장 큰 특징인 일명 ‘김서방’이라고 불리는 인물 캐릭터가 언제 처음 등장했으며 어떠한 변화 과정을 거쳤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다루지 못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김교만의 인물 캐릭터와 그의 그래픽 스타일이 어떻게 형성되고 어떤 과정으로 전개되었는지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이와 함께 김교만 그래픽 스타일을 한국 디자인사 맥락에서 검토하고 서구 디자인사 맥락과의 관계도 알아보았다. 디자인계에서만이 아니라 일반인으로부터도 관심과 사랑을 받았던 김교만의 작품세계에 대한 고찰은 20세기 한국 그래픽 디자인사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데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1. 2. 연구방법 및 범위1

본 연구는 문헌연구와 인터뷰 방법으로 진행되었다. 먼저 김교만의 생애와 활동, 그리고 그의 작품을 다룬 논문과 단행본 등 주요 선행연구 자료와 신문 및 잡지 기사 등 기초 문헌을 조사하였다. 또한 김교만과 동시대에 활동하며 영향을 주고받았던 정시화, 황부용과의 인터뷰 자료를 통해 한국 현대 그래픽 디자인 발전 과정에서 김교만의 역할과 영향을 알아보았다. 본 연구에서는 김교만이 그래픽 디자인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1960년대 중반부터 그의 독특한 인물 캐릭터가 처음 등장한 1970년대 중반, 그리고 그의 작품이 완성도를 높이며 성숙기에 접어들었던 1980년대 중반을 거쳐 컴퓨터 그래픽을 활용한 디지털 작업으로까지 확장된 1990년대 후반까지 약 30여 년간의 시기를 다루고자 한다.


2. 김교만 그래픽 스타일의 변천

김교만 그래픽 스타일을 시기별로 살펴보기에 앞서 그의 생애와 주요 활동을 개괄할 필요가 있는데 선행연구인 「김교만과 한국 현대 그래픽 디자인」(2011)에서 상세히 다루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김교만 그래픽 스타일의 형성 및 전개 과정과 연관된 주요 사항을 연보로 제시했다.3)

Kim Kyo-man's Graphic Design Works and Activities

2. 1. 현대적·한국적 조형감각의 모색(1960년대 중반-1970년대 초반)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에 서울대학교 응용미술과에 입학한 김교만은 1956년 대학 졸업 후 일 년 선배인 권순형과 함께 디자인 스튜디오인 K.K.디자인연구소를 열어 1958년까지 운영했다. 이후 진명여고 미술 교사로 근무하다가 1960년에 동양방직주식회사(동일방직의 전신)에 입사하여 3년간 일했다. 이 회사에서 광고 및 텍스타일 패턴 개발 업무를 담당한 김교만은 한국인이 좋아하는 색상과 패턴을 알아보기 위해 동대문시장을 돌아다니며 시장조사를 했는데 당시를 회고하며 김교만(1988)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꽃, 화초 무늬를 좋아하고 색깔은 갈색과 회색 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어요. 동물을 그린다든가 원색을 쓴다든가 하는 것은 위험한 시도일 수도 있지요. 그러한 조사를 바탕으로 대중적 패턴을 생산해서 많은 판매실적을 올린 적이 있었습니다.4)

김교만이 1967년에 제작한 <‘68 한일은행 달력>에는 동양방직에서 쌓은 경험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김교만 : 한국의 가락> 전과 <서울 김서방 DDP 가다> 전을 총괄한 김성천 CDR 대표는 김교만 그래픽 스타일에 등장하는 한국적 소재들, 즉 전통혼례, 북춤, 강강수월래, 십장생, 전통건물 등이 이미 대부분 이 작품에 녹아 있다고 보았다.

Figure 1

Hanil Bank Calendar(1967)

Figure 2

Posters for Korea Design Exhibition Award (1966/1971/1972/1973)

대학 재학시절부터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 공예 작품을 출품해온 김교만은 1966년에 대한민국상공미술전람회(상공미전)가 신설되자 상업미술부 심사위원으로서 포스터를 출품하기 시작했다. 제1회 출품작인 <사자표 구두>를 시작으로 1970년대 초반까지 그가 상공미전에 출품한 작품을 보면 두 가지 경향이 나타나는데 첫째는 단순하고 기하학적인 형태와 밝고 선명한 색상으로 현대적인 조형감각을 표현한 것이고, 둘째는 한국적 소재에 대한 지속적 관심이다.

2. 2. 김교만 그래픽 스타일의 형성(1970년대 중반-1980년대 초반)

김교만 그래픽 스타일의 기점이 된 작품은 1975년 제10회 상공미전 출품작인 <한국을 위한 관광포스터>다. 농악대 장구재비가 상모를 돌리며 흥겹게 노는 모습이 파란 바탕 중앙에 그려졌고 율동감이 강조된 상모가 화면의 절반을 차지하며 크게 표현되었다. 1976년 제11회 상공미전에서 김교만은 <금강 카세트 레코드 포스터>로 대회장상을 수상했는데 여기에는 일 년 전 출품작에 등장했던 장구재비와 동일한 인물 캐릭터가 구름 위에 한가롭게 누워 하늘에서 지저귀는 새에게 마이크를 대주며 새소리를 듣는 모습이 위트 있게 표현되었다.

Figure 3

Tourism Promotion Poster for Korea(1975)

Figure 4

Cassette Tape Recorder Poster for Gold Star(1976)

Figure 5

Article about Kim Kyo-man's Exhibition (Dongailbo, Dec. 18, 1976)

Figure 6

Kim Kyo-man's First Solo Exhibition Brochure(1976)

상공미전에서 대회장상을 수상한 1976년 12월에 한국디자인포장센터 전시실에서 김교만은 첫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한국을 주제로 한 관광포스터 전>인 이 전시회에는 관광포스터 25점이 공예 작품 5점과 함께 전시되었다. 관광포스터에는 농악, 전통혼례, 부채춤, 악사, 줄타기, 활쏘기, 그네타기, 첨성대, 신라 금관, 제주 해녀와 돌하르방, 법주사 등이 소재로 등장하였다. 당시 김교만(1977)은 ‘우리나라의 아름답고 특유한 생활풍속들과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유산들을 발전하는 현대상과 융합시켜 신선하고 건전한 관광포스터로 관광산업홍보에 이바지할 수 있다는 데 의의가 있다고 사료 되어 한국을 위한 관광포스터를 발표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김교만(1993)은 이 전시회를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처음부터 어떤 세계를 의식적으로 구축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야. 1976년 첫 개인전을 갖게 되었을 때 무슨 테마를 갖고 어떤 테크닉을 활용해야 할 것인가를 놓고 많은 고민을 했었지. 그때 비로소 나만의 이미지를 가져야 할 필요성을 느꼈어. 그 결과 테마는 민속적인 것을, 표현기법은 현대적인 간결함을 추구하자는 결론을 내렸지. 불필요한 디테일을 제거하고 형태를 극도로 단순화하여 통일감을 주는 현대적 디자인을 시도하기로 한 거지. 첫 개인전은 그런 면에서 성공적이었던 셈이지. 개성이 뚜렷하고 서정적인 분위기가 담겨있으며 ‘한국’이라는 주제를 훌륭히 소화를 시켰다는 평가를 받았으니까.5)

김교만은 1980년에 <김교만 일러스트레이션>6) 전을 열고 단행본인 『한국의 가락』을 펴냈다. 이 책에서 김교만은 아트디렉터 겸 일러스트레이션을 담당했고 경기대 국어국문학과 교수인 장주근(1925~2016)이 작품 주제에 관한 글을 썼다. 『한국의 신화』 『한국의 민간신앙』 『한국민속학 개설』 등의 저서를 집필한 장주근은 한국민속관(현 국립민속박물관의 전신) 개설에 참여하여 1966년부터 1975년까지 운영을 담당한 1세대 민속학자였다. 『한국의 가락』에는 김교만이 첫 개인전(1976)에 선보였던 농악대, 전통혼례, 악사, 첨성대, 법주사, 제주 해녀와 돌하르방 등의 소재가 일러스트레이션 형식으로 다시 소개되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활쏘기는 마상재 시리즈로 확장되었고 그 밖에 수문장, 해태, 장승 등이 새로운 소재로 선보였다.

Figure 7

Common Themes of Tourism Promotion Posters for Korea(1976) and Illustrations in Rhythm of Korea(1980)

Figure 8

Rhythm of Korea (1980)

2. 3. 김교만 그래픽 스타일의 성숙(1980년대 중반-1980년대 후반)

1980년대 중반에 들어서 김교만의 그래픽 작업은 작품의 완성도가 높아지고 인물 캐릭터가 다양한 매체에 적용되며 성숙기를 맞았다. 말년에 김교만은 가장 기억에 남는 자신의 작품으로 이 시기에 제작된 88서울올림픽 문화포스터(1987)를 꼽았다.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는 한국 문화 소개와 친숙한 대회 분위기 조성을 위해 공식 포스터 외에 김교만 작품을 포함하여 총 12종의 문화포스터를 개발했다.7) 그는 이에 앞서 발표된 86서울아시안게임 문화포스터(1986) 제작에도 참여하였다.

Figure 9

Culture Poster for the Asian Games Seoul 1986

Figure 10

Culture Poster for the Olympic Games Seoul 1988

1986년에 김교만은 정연종, 김현, 나재오와 함께 『그래픽 4: 아름다운 한국 86』 단행본을 펴냈다. 86서울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그래픽 디자인을 통해 한국 문화의 아름다움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리고자 한 이 책은 국영문 혼용으로 제작이 되었다. 김교만은 한국의 가락을, 김현은 한국의 선을, 나재오는 한국의 얼굴을, 정연종은 한국의 얼을 주제로 삼았다. 1988년에 김교만은 정부가 올림픽 홍보 차원에서 한국 문화와 상품을 일본에 알리고자 도쿄 세이부 백화점에서 개최한 <Soul of Seoul> 행사의 총괄 아트 디렉터를 맡았다. 그해 회갑을 맞은 김교만을 위해 제자들이 회갑기념전을 마련했는데 이 전시회에서 그는 올림픽과 아시안게임, 그리고 일본에서의 행사와 관련되거나 국제 일러스트레이션 비엔날레나 국제 그림동화 원화전과 같은 해외 공모전에 출품했던 작품, 그리고 실제 발행된 우표 시리즈 등을 보여주었다. 이 중 흥미로운 것은 국제그래픽디자인단체총연합회인 ICOGRADA 25주년 기념 포스터다. 이 작품에서 김교만은 색연필, T자, 붓, 에어브러쉬와 같이 당시 그래픽 디자이너가 즐겨 사용하던 디자인 도구를 인물 캐릭터 옆에 배치하여 보여주었다. 이러한 도구는 그 자신이 오랫동안 작품 제작에 사용해 온 것이기도 했다. 1980년대 중후반에 김교만은 바탕 화면에 그라데이션 효과를 과감하게 주어 공간감을 살리거나 배경 화면을 분할하고, 원근법 효과를 주어 입체감을 높이고 로트링펜이나 스크린톤을 사용하여 질감을 풍부하게 하는 등의 방법으로 작품의 밀도를 높이는 다양한 시도를 했다. 인물 캐릭터의 모습도 전보다 더 자연스러워졌고 동작에 있어 율동감도 커졌다.

Figure 11

Brochure of Exhibition Celebrating the 60th Birthday of Professor Kim Kyo-man(1988)

2. 4. 김교만 그래픽 스타일의 변형(1990년대 초반-1990년대 중반)

1990년대 초반에 김교만은 당시 국내에 도입되기 시작한 애플 컴퓨터와 데스크탑 퍼블리싱(DTP)에 관심을 가지고 포토샵과 일러스트레이터 등의 그래픽 프로그램을 직접 배웠다. 1995년에는 젊은 디자이너들과 함께 산업디자인포장개발원(현 디자인진흥원)에서 40일간 진행된 매크로미디어 디렉터 교육을 받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당시 그는 컴퓨터를 다루지 못하면 디자이너로서 주저앉는 느낌일 것 같아서 컴퓨터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Figure 12

Brochure of Kim Kyo-man Exhibition in New York(1998)

컴퓨터 그래픽에 도전한 그의 작업 성과는 유작전이 된 <리듬 오브 코리아> 뉴욕 전시회(1998) 작품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인물 캐릭터를 유지하면서도 그것을 과감하게 해체하고 재구성함으로써 컴퓨터와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그래픽 스타일을 디지털 시대에 맞게 변형하고 확장시키고자 치열하게 실험했다. 이 전시회 도록에서 김교만(1998)은 자신의 컴퓨터 작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오늘날 멀티미디어화되어 가는 정보사회에서 첨단 도구인 컴퓨터와의 만남은 나의 창작 세계와 예술의 표현을 넓히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새로운 메커니즘은 새로운 이념과 표현을 낳습니다. 앞으로 나의 일러스트레이션 세계가 또 한 번 변화되어 더욱 친근하고 사랑받는 작품으로 다가갈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8)

한편, 1996년 9월 평화방송과의 인터뷰에서 김교만은 고희기념전을 통해 개별 작품이 아니라 주어진 바닥, 벽, 천장까지 전체 전시공간을 활용하여 디자이너로서 자신의 체질을 온전히 인정받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컴퓨터 덕분에 인물 캐릭터 정면 모습과 자유로운 동작까지 묘사할 수 있게 되어 즐겁다면서 전시장에는 인물 캐릭터의 다양한 모습을 네 벽면에 둘러치고 가운데에는 배너를 늘어뜨려 평면을 벗어나 전체 공간 속에서 작품을 보여줄 계획이라면서 인물 캐릭터를 3D로 제작해보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9) 이러한 희망은 그가 작고한 지 20여 년의 세월이 흐른 후인 2019년에 개최된 <김교만 : 한국의 가락> 전에서 전시 연출을 맡은 이음파트너스의 안장원 대표에 의해 실현이 되었다. 안장원 대표는 전시장 네 벽면을 차분하게 작품 위주로 구성하고 중앙에는 사방으로 망사 원단을 늘어뜨려 김교만의 생애와 업적을 기념하고 추모하는 공간으로 연출했다.


3. 김교만 그래픽 스타일의 디자인사적 의미

3. 1. 김교만 그래픽 스타일의 시대적 배경과 영향

해방 후 한국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하고 그래픽 디자이너로 활동한 인물 중 김교만은 가장 원로 세대에 속한다. 정시화는 서울대학교 응용미술과 초창기 졸업생 중 그래픽 디자인 분야에서 활동한 인물로 김교만을 비롯하여 이명구, 김수석, 조영제, 봉상균, 김명호, 유관호 등을 꼽았다. 이들보다 앞서 활동한 인물로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유학하고 귀국한 한홍택(1916-1994)이 있다. 하지만 그는 1975년에 30여 년간 유지해오던 대한산업미술가협회(구 조선산업미술가협회)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나며 디자인계에서 일찍 은퇴했다. 상공미전에서 대회장상을 수상하고 첫 개인전을 성공적으로 개최했던 1976년에 김교만은 이미 현역 디자이너 중 최고 원로의 위치에 있었다. 회갑을 앞둔 한홍택이 디자인 분야를 떠나 회화에 전념하기로 한 것은 유화 작업에 대한 남다른 애착도 있었지만 1970년대 들어 달라진 디자인 환경 변화도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1966년 신설된 상공미전을 통해 배출되는 디자이너들과 1972년 창설된 한국그래픽디자인협회(KSGD, 후에 한국시각디자인협회(KSVD)로 개칭)에 참여하는 디자이너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며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도안, 응용미술, 상업미술 등으로 이해되던 그래픽 디자인은 시각 커뮤니케이션을 바탕에 둔 현대적 디자인 개념으로 재정의가 되기 시작했다. 한홍택이 은퇴한 시점(1975)과 김교만이 첫 개인전(1976)을 통해 새로운 그래픽 스타일을 선보인 시점, 그리고 김교만과 같은 해(1965) 서울대 응용미술과 교수로 부임한 조영제가 <조영제 디자인展: DECOMAS>(1976)를 통해 생소했던 CI 개념을 기업인과 일반인에게 널리 알린 전시회를 연 시점이 서로 겹치는 것은 우연이라기보다는 1970년대 중반 디자인계의 달라진 분위기가 세대교체를 이끌어내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김교만 그래픽 스타일의 출발점이 되는 인물 캐릭터는 처음에는 관광포스터에 등장했는데 작품을 이어가면서 김교만은 자신의 작업을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새로운 일러스트레이션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국내에서 일러스트레이션은 삽화 개념 정도로 단순하게 이해되고 있었고 광고 및 출판시장에서의 수요도 많지 않았다. 해방 후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했던 인물로는 김영주, 이순재, 전성보, 홍성찬, 김광배 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신문, 잡지, 단행본, 교과서, 동화책 등에 그림원화를 그리는 일을 했고 이들의 활동은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그래픽 디자인 작업이나 대학 차원에서의 디자인 교육과는 연관성이 적었다. 그러다가 1979년에 『월간 디자인』지에서 트리엔날레 형식의 공모전인 ‘베스트 일러스트레이터즈 메달상(약칭 BIM상)’ 제도를 마련하면서 일러스트레이션이 부각 되는 계기가 되었다. 김교만(1979)은 「BIM 일러스트레이션전 소고」라는 글을 통해 1970년대 후반의 그래픽 디자인 및 일러스트레이션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1965년경부터 우리나라는 경제 발전과 병행하여 인쇄술, 광고기술, 매스미디어의 다양화와 그래픽 교육의 전문화로 그래픽 디자인계의 급진적 발전과 변모를 가져왔다. 이 상황에 대처해야 할 시각적 문화는 새로운 일러스트레이션의 세계를 너무나 갈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과학의 물결에 따라 출현한 사진은 매스커뮤니케이션과 광고계에 군림하여 사진 선풍시대를 이루어왔다. 그로 인하여 일러스트레이션의 출항은 하루하루 지연되기만 했던 것이다. 그래픽 디자인계의 세계적인 동향을 살펴보아도 사진술에 의한 커뮤니케이션의 범람으로, 광고에 대한 개성화의 요구와 감성적인 창의성의 표현은 기대하기가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나 최근의 광고계에서는 상상과 환상의 풍부한 세계를 자유로이 구사할 수 있는 일러스트레이션이, 메말라 가는 이 시대에 스스로 유효성을 주장하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더욱이 렌즈가 표현하지 못하는 내면의 본질을 그려내는 데에서 일러스트레이션의 참신한 가치가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10)

1970년대 후반에 일러스트레이션은 표현이 자유롭고 창의성 있는 디자인의 새로운 영역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는데 김교만(1979)은 자신이 일러스트레이션을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오늘날 커뮤니케이션 디자인 분야에서 일러스트레이션이 어느 미디어보다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측면보다는 타인의 간섭을 받기 싫어하는 나의 성격에서 우선 일러스트레이션이라는 미디어를 좋아했을 것이다. 까다로운 조건에 시달리지 않고 남의 눈치를 살필 필요성도 적으며 비교적 자유로이 자기 개성을 주장할 수 있는 미디어이기에 마음이 쏠리며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 이유뿐이랴. 일러스트레이션은 보여지는 대상이 아니고 성찰이 있고, 과장이 있고, 색상이 있고, 더 깊게는 환상이 있고, 우화가 있고, 시가 있고, 정서가 있고, 인간상이 있기에 더욱 친밀해지며 애착이 가는 것이다.11)

김교만에게 있어 일러스트레이션은 디자이너로서의 개인적 특이성이 반영된 독자적인 작품세계 구축에 용이한 매체이자 상업적이고 기업중심적인 디자인 비즈니스와 차별화되는 매체였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생각에 대해 최성민(2011)은 “김교만이 남긴 주요 작품은 오늘날은 물론 당대에도 ‘일러스트레이션’으로-또는 ‘삽화’-로 불리던 활동과 다소 거리가 있고, 오히려 포스터나 CI 등 ‘그래픽 디자인’의 핵심 영역에 가까운 모습을 보인다”면서 “김교만의 ‘일러스트레이션’ 작품은 현실적인 일러스트레이션으로서 실현이 되었다기보다 오히려 전시나 자율적 출판물 형태로 실현되었던 듯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12) 실제로 그의 작품은 일러스트레이터보다는 그래픽 디자이너에게 영향을 미쳤다.

1980년대에 김교만의 인물 캐릭터는 담배 포장, 명절 선물세트, 우표, 달력, 전화카드 등에 널리 사용되며 일반인으로부터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한국 사회에서 그래픽 디자이너가 자신만의 고유한 스타일로 이처럼 폭넓게 대중의 인기를 얻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Figure 13

Arirang Cigarette Packaging Design(1982)

Figure 14

CheilJedang Gift Set Packaging Design(1986)

Figure 15

Lucky-GoldStar Calendar(1988)

Figure 16

Stamp Design with the Theme of Wedding(1984) and Nongak(1986)

3. 2. 김교만 그래픽 스타일과 서구 디자인

김교만은 작품 소재는 한국적 대상을 선택하면서도 시각적 표현에서는 서구적인 조형감각을 추구했다. 1950년대 초반 서울미대 디자인 교육에는 일본과 미국의 영향이 혼재하고 있었다. 응용미술과 학과장인 이순석은 일본 유학파로 교과과정 운영 및 교육내용에서 일본식 도안 교육의 틀을 가지고 전통문양을 적용한 벽면 장식 양식화나 편화 수업을 진행했다. 반면에 미대 초대 학장을 지낸 장발은 미국 유학파로 미술이론을 전공했지만 디자인 교육에 애착을 보였다. 김민수(1995)에 따르면, 장발은 서양화가인 유영국을 도안과 교수로 초빙하여 기하학적인 소재의 구성을 가르치게 했다. 유영국이 학교를 그만둔 후에는 서울미대 최초 외국인 강사로 알려진 존 프랭크(John L. Frank)가 구성 과목을 맡아 서구식 추상조형 방법을 가르쳤다.13) 도안과 학생들은 유영국(1948.04.15.~1950.11.20.)과 존 프랭크(1953.05.01.~1954.04.30.)의 구성 수업을 통해 일본식 편화 수업과는 다른 서구 미술에서의 추상적 표현 방법을 접할 수 있었다. 1950년에 입학하여 1956년에 졸업한 김교만은 이러한 대학 분위기를 경험하였고 한국전쟁 시기에 국내에 들어온 미군 전쟁물자와 생필품, 그리고 외국 서적 등을 통해 서구식 라이프스타일과 모던 디자인에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교만은 1965년 12월에 38세의 나이로 서울미대 응용미술과 교수로 부임하여 당시 그래픽 디자인을 일컫는 용어였던 상업미술 관련 수업을 담당했다. 그가 1976년에 첫 개인전을 열게 된 것은 상공미전 대회장상 수상을 기념하는 의미도 있었지만, 또 하나의 동기는 당시 서울미대에 교환교수로 와 있던 영국 런던 세인트 마틴스 미술대학의 허버트 교수가 김교만의 작품에 표현된 단순한 형태와 밝은 색감, 그리고 유머러스한 분위기는 영국에서도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싶어 하는 것이니 그에게 전시회를 열어 작품을 널리 알리면 좋겠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이 조언에 힘입어 김교만은 개인전 준비를 서두르게 되었고 영국문화원에 장학기금을 신청하여 50세인 1978년에 세인트 마틴스 미술대학에서 6개월간 체류하였다. 이 기간에 그는 런던에서 두 번째 개인전을 열어 호평을 받았다. 영국에 가기 앞서 김교만은 『미술과 생활』지에서 1977년 5월호 별책부록으로 발간한 질리언 네일러(Gillian Naylor, 1931~2014)의 『바우하우스』를 번역하기도 했다. 귀국 후 김교만은 브르노 국제 그래픽 비엔날레(1979), 노마 국제 콩쿨(1982), 국제 일러스트레이션 비엔날레(1986), 국제 그림동화전(1988) 및 바르샤바 국제 포스터 공모전(1988) 등에 참여하며 국제 활동을 이어나갔다.

Figure 17

Posters by A. M. Cassandre, Jean Carlu and Abram Games

김교만의 활동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던 황부용(2019)은 일본으로부터 지배적인 영향을 받았던 국내 다른 1세대 디자이너들과 달리 김교만은 이른 시기부터 서구 디자인에 관심을 가지고 한국적 소재를 서구 모던 디자인의 표현방식으로 형상화해냄으로써 주목을 받았다고 평가하였다. 그는 김교만에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정되는 서구 디자이너로 에이엠 카상드르(A. M. Cassandre, 1901~1968), 장 까를뤼(Jean Carlu, 1900~1997), 아브람 게임스(Abram Games, 1914~1996)를 꼽았다.14) 이 세 사람은 1950년대에 이미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는데 이 시기는 포스터, 상표, 광고 등이 화가가 미술을 산업에 응용하는 분야가 아니라 직업적인 그래픽 디자이너가 독자적으로 활동하는 전문 분야로 인식되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김교만의 첫 개인전 때 그와 인터뷰 했던 정시화(1977)는 김교만의 포스터에는 자와 콤파스, 포스터 칼라와 룰링펜 같은 20세기 전반기의 그래픽 디자인 도구 및 재료의 특성이 잘 반영되어 있다고 보았다. 또한 밝은 색감과 간결한 선에 의한 형태의 작품이 미적 감각만이 아니라 의미도 쉽게 전달하고 있다고 평가하면서 이러한 기법적 경향이나 특성이 카상드르의 작업을 연상시킨다고 말했다. 인터뷰 당시 정시화의 이러한 의견에 대해 김교만(1977)은 다음과 같이 자신의 작업 방식을 설명하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작품의 모든 형태를 자꾸 단조롭게 정리해 가다 보니까 자연히 선이 기하학적으로 단순해져 간결하다는 말을 듣게 되는 것 같고 더구나 제 경우는 이런 기하학적 형태 위에다 인간의 여러 가지 동작과 천태만변의 그 표정을 표현해 보고자 했던 것인데 역시 표정을 위해서는 인간이 등장이 되었고 형태 양식화(Formulation Watching)를 추구하다 보니까 단조로워지고 그런 표현을 위해서 콤파스나 자가 사용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15)

생전에 김교만은 에이엠 카상드르나 장 까를뤼, 그리고 아브람 게임스 등 아르데코 시기에 활동했던 서구 디자이너로부터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밝힌 적이 없다. 대신에 그는 고유한 스타일을 평생 고수한 디자이너 사례로 일본의 후쿠다 시게오나 영국의 피터 피츠를 꼽았고, 스타일과 시각적 표현 면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토미 웅게러와 밀턴 글레이저의 작업을 높게 평가하였다. 이 밖에 1970, 80년대 한국 그래픽 디자인계에 영향을 준 서구 디자이너로는 쟝 미셀 폴롱과 피터 맥스가 있었다. 김교만 연구실에서 한일은행과 주택은행 등의 CI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가까이에서 그를 지켜보았던 김훈(2008)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매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일기를 쓰셨어요. 그 점이 놀라웠죠. 한번은 선생님 책을 빌려 간 적이 있었는데 집에서 펼쳐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선생님이 서구 디자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니까 안 가르쳐 주는 줄 알았고, 그래서 늘 콤파스로 뺑뺑이 돌리는 작업만 한다고 생각하고 무시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책을 보니 페이지마다 누런 갱지에 책의 내용이 깨알 같은 글씨로 번역되어 있었습니다. 저도 번역을 시도하다가 결국 두세 페이지만 하다 말곤 했는데 선생님은 마지막 페이지까지 똑같은 글씨체, 똑같은 간격으로 번역문을 적고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빨간펜으로 수없이 밑줄을 그어 강조해 놓으셨더라고요.16)

김훈은 김교만이 한국적 소재를 서구적 감각으로 표현하고 싶어 했고 이를 위해 외국 서적과 잡지를 탐독했다고 말했다. 서구 그래픽 디자인의 역사가 국내에 본격적으로 소개된 것은 1985년에 필립 B. 멕스의 『그래픽 디자인의 역사』가 번역, 출판되면서였다. 그 이전까지 김교만을 포함한 초창기 국내 디자이너들은 각자 어렵게 구한 영미권과 일본의 디자인 서적 및 잡지를 통해 서구 디자인을 단편적으로 접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황부용이 『월간 디자인』지 1987년 8월호부터 1989년 3월호까지 20개월간 총 14회에 걸쳐 1878년부터 1977년까지 현대 그래픽 디자인 100년의 역사를 정리한 「아르누보에서 포스트 모더니즘까지」라는 연표 형식의 글을 연재함으로써 비로소 유럽, 미국, 일본, 한국의 그래픽 디자인 역사를 종합적으로 비교해 볼 수 있었다.

3. 3. 김교만 그래픽 스타일의 특징과 의미

김교만 그래픽 스타일의 가장 큰 특징은 전통적인 모습을 한 인물 캐릭터의 활용이다. 이 인물 캐릭터는 <한국을 위한 관광포스터>(1975)에서 처음 공식적으로 등장한 후 그의 말년까지 변주되었다. 김교만은 상공미전에 포스터를 매년 출품했는데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출품작을 보면 그가 현대적 조형언어 및 한국적 소재에 천착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인물 캐릭터를 통해 이 두 가지 관심사를 조화롭고 개성 있는 모습으로 결합하고자 했다. 나아가 <금강 카세트 레코드 포스터>(1976)에서는 이 인물 캐릭터가 관광홍보 차원뿐 아니라 산업 차원에서도 활용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함으로써 상공미전 대회장상을 수상하였다. 김교만의 인물 캐릭터가 그래픽 스타일로 발전하게 된 계기는 첫 개인전인 <한국을 주제로 한 관광포스터 전>(1976)이었다. 이후 <김교만 일러스트레이션>(1980) 전시회 때 출간한 『한국의 가락』 단행본에서 민속학자인 장주근과 함께 협업하면서 김교만은 한국적인 소재에 대한 시각적 접근에 있어 인문학적 토대도 마련하고자 했다. 197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20여 년간 이어진 그의 인물 캐릭터 작업에 대해 디자인계 일각에서는 1980년대 초부터 동어반복이 아니냐는 지적이 있었지만 이에 대해 김교만은 자신처럼 독특한 이미지를 창안하여 평생 그 특성을 강조하는 작업을 해나가는 디자이너도 있는 것이라며 작업 스타일을 고수하였다.

김교만의 작업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가 인물 캐릭터를 반복적으로 등장 시키는 대신 그래픽 디자인 도구와 재료의 속성을 연구함으로써 표현의 밀도를 높이는 데 주력하였고, 말년에는 디지털 방식으로 과감하게 자신의 스타일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등 새로운 시도와 실험을 계속 해나갔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즉 김교만은 주제와 소재를 고정시키는 대신 재료와 도구의 표현 가능성과 완성도를 높이는 테크닉 실험을 끊임없이 이어나갔던 것이다. 김교만은 제1회 1976년, 제2회 1978년, 제3회 1980년, 제4회 1988년, 제5회 1998년 등 총 다섯 번의 개인전을 열었는데 제3회 개인전인 <김교만 일러스트레이션>(1980)까지의 작품에서는 포스터칼라를 주재료로 하여 자와 컴퓨터, 그리고 룰링펜 같은 도구가 주로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제4회 개인전 <김교만교수 회갑기념전>(1988)의 작업을 보면 기존의 재료 및 도구 외에 에어브러쉬, 로트링펜, 스크린톤 등이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 개인전인 <리듬 오브 코리아>(1998)에서는 컴퓨터를 활용하여 아예 디지털 방식으로 작업했다.

김교만 그래픽 스타일의 장점이자 또한 단점이기도 한 이러한 작업 방식을 그가 고집했던 데에는 개인적인 특성 외에 시대적 상황과 세대의 한계가 함께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 시급했던 디자인 과제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단절된 전통문화를 하루속히 회복하고 한국적인 정체성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와 함께 도안, 공예미술, 응용미술, 상업미술, 선전미술 등으로 인식되던 디자인을 순수미술과 차별화된 보다 현대적이고 새로운 영역으로 자리매김하게 하는 것이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재료와 도구, 그리고 표현방식부터 순수미술과 차별화되어야 했다. 김교만보다 앞서 그래픽 디자인 분야를 개척한 한홍택은 일본 유학 시절부터 한국 전통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이와 관련한 포스터 작업을 했고, 제3회 개인전인 <한홍택 그라픽 디자인전>(1961)을 개최하여 당시로는 생소했던 그래픽 디자인이라는 용어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한홍택 역시 ‘디자인은 엄연히 회화나 조각 등 순수미술과는 다른 독자적인 전문영역’17)이라고 보았으나 그의 작업에서는 회화적인 특성이 강조되었고, 1970년대 중반 은퇴 후 말년에는 유화 작업에 매진했다. 김교만은 한홍택이 보여준 한국적 정체성에 대한 관심은 이어가면서도 회화성이라는 미술적 가치를 공유하기보다는 그것과 차별화된 디자인만의 고유한 현대적 조형성을 추구하였다.18) 김교만이 1976년에 첫 개인전 <한국을 주제로 한 관광포스터 전> 도록 표지에 ‘Kyo Man Kim: Visual Communication Design’이라고 명시한 것이나 김교만이 초대 회장을 지낸 한국그래픽디자인협회(KSGD)가 후에 한국시각디자인협회(KSVD)로 명칭을 변경한 것은 디자인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강화하기 위해 시각 커뮤니케이션을 강조했던 1970년대 중반 디자인계의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었다. 한편, 김교만이 자신의 작업을 일러스트레이션으로 본 것은 개인적 기질이나 취향 때문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1970년대 한국 광고시장이 활성화되는 과정에서 그래픽 디자인 분야 원로로서 시각 매체에서 사진에 대한 의존도가 급격하게 커지는 것에 대한 일종의 견제 의식과 책임감도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4. 결론

김교만 그래픽 스타일의 형성과 전개 과정을 살펴보는 것은 한 개인 디자이너의 작품세계를 고찰하는 일인 동시에 이를 통해 한국 현대 그래픽 디자인의 변천 과정을 살펴보는 일이기도 하다. 그를 한국 그래픽 디자인을 대표하는 1세대 원로로 기억하는 것은 디자이너로서 그가 보여준 적극적인 태도와 끊임없는 탐구 정신이 초창기 한국 그래픽 디자인이 응용미술 단계에서 벗어나 시각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이라는 보다 현대적인 새 방향성을 찾아 나가는 데 기여했기 때문이다.

김교만 그래픽 스타일은 크게 네 시기로 구분된다. 첫 번째는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로 이 시기에 김교만은 도안, 공예미술, 상업미술, 응용미술 단계에서 벗어나 그래픽 디자인의 현대적 조형언어 및 표현방식을 탐구하는 한편 한국의 전통문화와 한국인의 정서를 작품에 담아내려고 시도했다. 두 번째는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로 이 시기에 김교만은 특징적인 인물 캐릭터를 포스터 형식에 담아 처음 선보였고, 이후 이 인물 캐릭터를 여러 작품에 활용하면서 자신만의 고유한 그래픽 스타일로 발전시켜 나갔다. 세 번째는 1980년대 중후반 시기로 김교만은 86서울아시안게임 및 88서울올림픽 문화포스터를 제작하고 국내외 여러 행사와 전시회에 참여하면서 작품의 완성도를 높여 나갔다. 네 번째는 1990년대 초반부터 후반까지로 김교만은 말년에 컴퓨터 그래픽을 배워 자신의 인물 캐릭터와 그래픽 스타일을 디지털 언어로 변형하고 해체하며 재구성하는 작업을 시도했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알 수 있는 김교만 작품세계의 특징과 의의는 다음과 같다.

첫째, 고유한 인물 캐릭터의 창안과 활용.둘째, 한국적 소재 발굴과 확장. 셋째, 디자인 도구 발전에 따른 그래픽 표현방식 개발과 적용.넷째, 시각 커뮤니케이션에서 사진과 차별화된 일러스트레이션 역할 강조.다섯째, 서구 모던 디자인 형식의 한국적 수용.

김교만은 본 연구에서 살펴본 인물 캐릭터를 중심으로 한 그래픽 작업만이 아니라 주요 기업 및 관공서의 CI 프로젝트도 다수 진행하였고,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서 천주교 성당의 실내 및 성물도 디자인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향후 후속 연구에서는 한국 현대 그래픽 디자인 발전 과정에서 김교만의 위상과 영향을 보다 종합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한홍택, 조영제, 양승춘, 안정언, 권명광, 정연종, 나재오, 김현, 구동조 등 20세기에 활동했던 다른 그래픽 디자이너들의 작품과 활동을 세대론 관점에서 함께 비교 분석해보고자 한다.

Glossary

1) 2019.09.06~09.19, 서울대학교 우석홀

2) 2019.10.14~11.06,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3) <김교만 : 한국의 가락> 전(2019) 준비 자료 참조.

4) 강현주, 「한국인의 서정과 해학을 담은 작가, 김교만」, 『월간 디자인』, 1988년 10월호, 30쪽.

5) 황부용. 「단순과 정감으로 대표되는 서정적 스타일리스트, 김교만」, 『월간 디자인』, 1993년 9월호, 48쪽.

6)1980.05.22.~05.27. 롯데백화점 전시실

7) 88서울올림픽 문화포스터 디자이너: 김교만(서울대), 양승춘(서울대), 김영기(이대), 안정언(숙대), 나재오(단국대), 유영우(국민대), 오병권(이대), 백금남(성균관대), 구동조 (동덕여대), 김현(디자인파크), 전후연(연아트대표), 조종현(CDR 제작실장)

8) 김교만. <리듬 오브 코리아> 전시회 도록 인사말, 1998.

9) 박암종. 「서정과 해학으로 한국적 일러스트를 정착시킨 고(故) 김교만 선생」, 『월간 디자인』, 1998년 8월호, 171쪽.

10) 김교만, 「BIM일러스트레이션展 소고」, 『월간 디자인』, 1979년 6월호. 17쪽.

11) 김교만, 「커버스토리의 주역들을 찾아서」, 『월간 디자인』, 1979년 10월호, 6~7쪽.

12) <1954-1979,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인물과 사건 II>를 주제로 2011년 10월 28일(금)에 서울대학교미술관 MoA 소강당에서 열린 <2011 서울대학교 조형연구소 정기학술대회>에서 강현주의 「김교만과 한국적 그래픽 디자인의 향방」 발제 내용에 대한 최성민의 질의 내용.

13) 1995년 9월 27일에 김민수가 유리지를 통해 진행한 유영국과의 간접 인터뷰에 따르면 유영국은 1948년에 서울대 도안과 교수로 임용되어 1950년까지 재직했다. 또한 1995년 8월 8일에 김민수가 1949년에 도안과로 입학해 1955년에 응용미술과로 졸업한 권순형과 진행한 인터뷰에 따르면 미8군 군속이었던 존 프랭크는 1953년부터 1954년까지 약 일 년간 응용미술과의 구성 수업을 담당하며 자유구성을 통해 생성되는 추상조형의 ‘방법’을 소개했다. 김민수, 「한국 현대디자인의 추상성의 발현」, 『조형』, 제18호, 서울대학교 조형연구소, 1996, 61쪽 참조.

14) 황부용과의 첫 대면 인터뷰는 2019년 9월 18일(수) 서울대학교 우석홀에서 <김교만: 한국의 가락> 전시회를 관람한 후에 이루어졌고, 다음 대면 인터뷰는 2019년 11월 30일(토) 밤부타워에서 진행되었다. 두 차례의 대면 인터뷰 기간 중 이메일을 통한 서면 인터뷰도 병행하였다.

15) 김교만, 정시화. 「김교만 교수의 서정적 디자인 세계」, 『월간 디자인』, 1977년 3월호, 5쪽.

16) 김훈. <VIDAK 수요일: 1세대 디자이너를 만나다-고(故) 김교만 교수의 작품세계에 초대합니다> 포럼 발제 녹취록 중에서(2008년 6월 25일(수) 16:00-18:00 상상마당 아카데미).

17) 박선의. 「한홍택 선생을 추모하며」. 『월간 디자인』, 1994년 6월호 참조.

18) 강현주. 「한홍택 디자인의 특징과 의미: 한국 그래픽 디자인의 전사(前史)」. 『디자인학연구』, Vol.25, No.3, 146쪽.

Acknowledgments

This work was supported by INHA UNIVERSITY Research Grant.

Notes

Citation: Kang, H. (2020). The Formation and Development of Kim Kyo-man's Graphic Style. Archives of Design Research, 33(2), 231-247.

Copyright : This is an Open Access article distributed under the terms of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Non-Commercial License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3.0/), which permits unrestricted educational and non-commercial use, provided the original work is properly cited.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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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1

Figure 1
Hanil Bank Calendar(1967)

Figure 2

Figure 2
Posters for Korea Design Exhibition Award (1966/1971/1972/1973)

Figure 3

Figure 3
Tourism Promotion Poster for Korea(1975)

Figure 4

Figure 4
Cassette Tape Recorder Poster for Gold Star(1976)

Figure 5

Figure 5
Article about Kim Kyo-man's Exhibition (Dongailbo, Dec. 18, 1976)

Figure 6

Figure 6
Kim Kyo-man's First Solo Exhibition Brochure(1976)

Figure 7

Figure 7
Common Themes of Tourism Promotion Posters for Korea(1976) and Illustrations in Rhythm of Korea(1980)

Figure 8

Figure 8
Rhythm of Korea (1980)

Figure 9

Figure 9
Culture Poster for the Asian Games Seoul 1986

Figure 10

Figure 10
Culture Poster for the Olympic Games Seoul 1988

Figure 11

Figure 11
Brochure of Exhibition Celebrating the 60th Birthday of Professor Kim Kyo-man(1988)

Figure 12

Figure 12
Brochure of Kim Kyo-man Exhibition in New York(1998)

Figure 13

Figure 13
Arirang Cigarette Packaging Design(1982)

Figure 14

Figure 14
CheilJedang Gift Set Packaging Design(1986)

Figure 15

Figure 15
Lucky-GoldStar Calendar(1988)

Figure 16

Figure 16
Stamp Design with the Theme of Wedding(1984) and Nongak(1986)

Figure 17

Figure 17
Posters by A. M. Cassandre, Jean Carlu and Abram Games

Table 1

Kim Kyo-man's Graphic Design Works and Activities

연도 나이 주요 작품 및 활동
1928 1세 충청남도 공주군 계룡면 경천리 출생.
1950 23세 서울대학교 응용미술과 입학.
1956 29세 서울대학교 응용미술과 졸업. 권순형과 KK디자인연구소 운영(1956~1958).
한국아세아반공연맹 반공 포스터 공모전 3등상 수상.
1960 33세 동양방직주식회사(동일방직 전신)에서 광고와 텍스타일 패턴 담당으로 근무(1960~1962).
1965 38세 서울대학교 응용미술과 전임강사 부임.
1966 39세 제1회 대한민국상공미술전람회(상공미전) 제1부 상업미술부 심사위원 및 추천작가 작품 <사자표 구두> 출품.
1967 40세 <‘68 한일은행 달력>, 크리스마스 씰 <거북선> 2종 발매.
1970 43세 제5회 상공미전 제1부 상업미술 분과위원장.
1972 45세 한국그래픽디자인협회(KSGD) 초대 회장 및 창립전 출품.
1973 46세 제2회 KSGD 회원전 <KAL 관광포스터> 기획전 출품.
1974 47세 제3회 KSGD 회원전 <1975년 캘린더> 기획전 출품.
1975 48세 제4회 KSGD 회원전 <가족계획> 포스터 출품.
제10회 상공미전 심사위원 작품 <한국을 위한 관광포스터> 출품.
1976 49세 제11회 상공미전 <금성 카세트 레코드> 포스터 대회장상 수상.
제5회 KSGD 회원전 <밝은 사회를 위한 포스터> 전 <불조심> 출품.
제1회 김교만 작품전 <한국을 주제로 한 관광포스터 展> 개최.
1977 50세 『월간 디자인』 지 3월호 <활쏘기> 표지.
『미술과 생활』 지 5월호 별책부록 『바우하우스』 번역.
일본 『今月の韓 This Month in KOREA』 8월호 <줄타기> 표지.
1978 51세 영국 런던 세인트 마틴스 대학교 그래픽 디자인 수학(6개월).
제2회 일러스트레이션 개인전(런던 세인트 마틴스 미술대학 전시실).
1979 52세 제7회 한국시각디자인협회(KSVD) 회원전 <어린이 보호> 및 <공해 방지> 포스터 출품.
제1회 아세아 그래픽 디자인 비엔날레 출품.
일본 디자인 전문지 『아이디어』 지 7월호 작품 소개.
『월간 디자인』 10월호 <수문장> 표지.
1980 53세 <김교만 일러스트레이션> 전 및 『한국의 가락』 단행본 발행.
제9회 부르노 국제 그래픽 비엔날레 展 <한국의 가락> 8점 출품. .
1981 54세 <어문각 일러스트레이션> 전 <견우와 직녀> 출품.
1982 55세 전매청 기념 <아리랑> 담배 패키지.
노마 국제 콩쿨 <견우와 직녀> 특선.
1983 56세 유네스코 <‘82년도 어린이 그림책 일러스트 콘테스트> 우수상.(『견우와 직녀』, 『은혜 갚은 까치』).
ASTA 총회 일러스트레이션, 판촉물 문진과 오프너 등 개발.
1984 57세 우정 100주년 기념 한국의 풍속 <결혼> 우표 4종 디자인.
1985 58세 서울일러스트레이터회(서울일러스트레이터협의회 전신) 2대 회장 취임.
1986 59세 ‘86 아시아경기대회 문화포스터 및 포스트카드 디자인.
민속시리즈 3집 <농악> 우표 발매. <그래픽 4> 전 참여.
일본 요코하마 '86 국제 일러스트레이션 비엔날레 초대작가 출품.
1987 60세 '88 서울올림픽 문화포스터 디자인 및 환경장식 전문위원.
’88 연하우표 발매.
1988 61세 <김교만교수 회갑기념전> 개최. 제12회 바르샤바 국제 포스터 공모전 특선. <'89 연하우표>, <‘89 선경그룹 달력>, <'89 럭키골드스타 달력>.
일본 세이부 백화점 <Soul of Seoul> 한국 문화행사 아트 디렉터.
'88 서울일러스트레이터협의회 회원전 출품.
1991 64세 제26회 대한민국산업디자인전람회 심사위원장.
'91 서울일러스트레이터협의회 회원전 출품.
‘92 제노바 EXPO 한국관 총괄 디렉터 및 한국관 심벌마크 디자인.
1992 65세 ‘94 한국 방문의 해 공식 엠블럼 및 로고 디자인 당선.
'92 서울일러스트레이터협의회 회원전 출품.
1993 66세 '디자인 주간' 선포식 동탑산업훈장 수훈.
'93 서울일러스트레이터협의회 회원전 출품.
1994 67세 서울대학교 정년퇴임. ’94 한국 방문의 해 기념우표 발매.
'94 서울일러스트레이터협의회 회원전 출품.
1995 68세 KIDP 멀티미디어 툴 매크로미디어 디렉터 교육 수료(40일간).
1996 69세 KIDP 선정 ‘한국의 산업디자이너 100인’ 중 최다 득표 1위 선정.
서울대학교 개교 50주년 기념우표 디자인.
1997 70세 ‘98 세계 우표 디자인 공모전 심사위원
1998 71세 6월 21일 자택에서 별세. 미국 뉴욕에서 유작전 <Rhythm of Korea> 전 개최.
‘98 서울일러스트레이터협의회 회원전 추모 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