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s of Design Research
[ Article ]
Archives of Design Research - Vol. 32, No. 4, pp.179-191
ISSN: 1226-8046 (Print) 2288-2987 (Online)
Print publication date 30 Nov 2019
Received 23 Sep 2019 Revised 20 Oct 2019 Accepted 20 Oct 2019
DOI: https://doi.org/10.15187/adr.2019.11.32.4.179

바우하우스 베를린 시기 연구

Sangkyu Kim김상규
Department of Design, Professor, Seoul National University of Science & Technology, Seoul, Korea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디자인학과, 교수, 서울, 대한민국
Study on the Bauhaus Berlin

Correspondence to: Sangkyu Kim ksk2010@seoultech.ac.kr

초록

연구배경 오늘날 바우하우스를 언급할 때 대체로 데사우 시기 중 일부 기간의 교육 활동에 집중되어 있다. 반면에, 베를린 시기의 바우하우스는 그동안 거의 조명되지 않았다. 물론 그로피우스 재임 기간이 전체 시기 중에서 성과가 두드러지고 자료가 풍부하기 때문일 수 있다. 그러나 바우하우스에 대한 보편적 인식이 왜 특정한 시기의 활동으로 한정되었는지 재고할 필요가 있다.

연구방법 먼저, 바우하우스 관련 선행 연구, 특히 주요 단행본에서 베를린 시기를 언급한 내용을 종합하여 공통된 인식을 정리한다. 다음 단계로, 바우하우스 베를린 시기의 의미, 그리고 베를린 시기 이후에 바우하우스 출신들의 활동 중 선행 연구에서 다루지 않은 폭넓은 활동 사실을 밝힌다. 이로써, 현재 바우하우스에 대한 보편적 인식이 편향되었음을 입증한다.

연구결과 바우하우스 출신들이 미국으로 이주한 이후에 바우하우스는 탈정치적, 탈역사적으로 재구성되었으며 그에 따라 특정 시기가 중요하게 부각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선별된 사실이 바우하우스에 대한 동질성의 신화를 낳았고 베를린 시기가 주목받지 못한 것은 동질성에서 벗어났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바우하우스의 명목을 이어가기 위해 베를린에서 교수와 학생들이 고군분투했고 바우하우스 출신들 몇몇은 베를린에서 독자적인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따라서 베를린 시기는 격변기에 바우하우스의 이상을 다각적으로 펼친 활동기라는 의미가 있다.

결론 베를린 시기는 디자인사의 중요한 사건이나 개념이 어떻게 편향된 인식을 낳는지 추론할 사례이자 근거로서 연구 가치가 있다. 베를린 바우하우스의 사례 연구를 통하여, 바우하우스에 대한 오늘의 인식은 특정 시기의 활동을 중심으로 선별된 것이며 이로 인해 바우하우스에 대한 다양한 해석보다는 동질적인 시각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Abstract

Background Most research on the Bauhaus has been focused on a certain period of time of the Bauhaus Dessau, while hardly illuminating the Bauhaus Berlin followed by the times in Dessau. It needs to be reexamined on how the general understanding of the Bauhaus has been embodied based on their activities in a limited period of time.

Methods First, this study conducts a literature review on the subject of the Bauhaus. Primarily focusing on key publications and their views on the Bauhaus Berlin, I attempt to summate the existing perspectives on the Bauhaus Berlin commonly shared amongst the scholars and the public alike. Second, I inquire into the meanings of the Bauhaus Berlin and the broad design activities of the School members since the Berlin era, which have rarely been explored in existing studies.

Results Since the School members relocated to the United States, the Bauhaus has been reconstructed apolitically and ahistorically, while design practices of the Bauhaus Dessau have been significantly emphasized. Such an unbalanced study resulted in a mythic homogenization in the study of the Bauhaus. During the Berlin era, the Bauhaus faculties and students struggled to maintain the School’s tradition, while some members conducted individual practices.

Conclusions The study on the Bauhaus Berlin provides a case and the ground upon which we can conceive that certain incidents or concepts in design history could bring about unbalanced understandings about the history. The case study of the Bauhaus Berlin concludes that today’s understanding of the Bauhaus has been established based on the practices of a limited time period (Dessau) of the whole history of the School.

Keywords:

Bauhaus, Berlin Period, Myth of Homogeneity, Ahistoric, Cold War, 바우하우스, 베를린 시기, 동질성 신화, 탈역사, 냉전

1. 서론

1. 1. 연구의 배경 및 목적

바우하우스는 14년의 짧은 시기 존재했지만 현재까지도 영향을 미친다는 데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바우하우스를 언급할 때 집중하는 시기는 대체로 데사우 바우하우스가 존속한 시기 가운데 일부이고 내용적으로는 교육에 집중되며 창작 결과물은 바우하우스 교수를 역임한 거장들의 작품이다.

그동안 바우하우스 연구와 논의를 보더라도 베를린 시기는 거의 조명되지 않았다. 짧은 기간 존속했고 이전의 시기에 비해서 규모도 작았지만 바우하우스의 한 시기였던 것은 분명하다.

바우하우스 전반이 아니라 특정한 시기의 특정한 부분에 주목하는 것은 그 성과가 탁월하다거나 해당 자료가 상대적으로 많고 잘 알려졌다는 이유를 들 수 있겠다. 그러나 그 탁월함의 기준은 무엇이고 지금껏 특정한 시기의 자료가 확산된 배경은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으며 나머지 부분이 잘 드러나지 않게 되는 결과를 낳은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어떻게 해서 후대에 그런 선별적인 수용이 이뤄졌는지 의문을 제기해 볼 수 있다.

이 편향은 바우하우스 폐교 이후에 바우하우스 출신들(Bauhäusler)의 활동을 다룬 기록에서도 발견된다. 대체로 미국으로 이주한 이들의 활동이 언급된다. 이 때문에 1년 밖에 존속하지 않은 뉴바우하우스가 중요하게 다뤄지고 아시아, 동독과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있었던 교육과 실험은 제외되어 있다.

이것으로 볼 때 현재 널리 알려진 바우하우스의 역사가 특정한 이해관계 속에서 선별된 것이라는 문제를 가설로 제기할 수 있으며 바우하우스의 베를린 시기에 대한 무관심을 사례로 조사하여 이 가설을 확인해보고자 한다.

1. 2. 연구의 목적 및 방법

본 연구는 바우하우스 14년의 기간 중에서 잘 다뤄지지 않았던 베를린 시기를 조명하고 이 시기를 통해서 바우하우스에 대한 인식의 편향을 밝혀보고자 한다. 이것은 바우하우스에 대해 더 깊이 연구할 주제이기 보다는 디자인사의 중요한 사건이나 개념이 어떻게 편향된 인식을 낳는지 추론할 사례이자 근거로 설명하고자 한다. 특히, 바우하우스와 같이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알려진 대상이 후대에 노출된 특정한 성과에 의해 특정 인물이나 시기가 중요하게 부각된 것, 그리고 그것이 바우하우스가 존속한 14년 전체에 동질성(homogeneity)을 부여하는 것의 한계를 밝히고자 한다.

먼저, 바우하우스 관련 선행 연구, 특히 주요 단행본에서 베를린 시기를 언급한 내용을 종합하여 공통된 인식을 정리한다. 다음 단계로, 바우하우스 베를린 시기의 의미, 그리고 베를린 시기 이후에 바우하우스 출신들의 활동 중 선행 연구들이 다루지 않은 폭넓은 활동 사실을 밝힌다. 이로써, 현재 바우하우스에 대한 보편적 인식이 편향되었음을 입증하고자 한다.


2. 베를린 바우하우스에 대한 기록

2. 1. 베를린 바우하우스의 경과

먼저, 데사우 바우하우스가 폐쇄되고 베를린에 학교를 세운 것부터 학교가 문을 닫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고자 있다. 아래의 요약 내용은 다음 장에서 소개할 바우하우스 관련 주요 단행본의 내용을 종합하여 사실 중심으로 구성한 것이다.

데사우 바우하우스의 폐쇄가 결정되기 직전에 데사우 시장인 헷세는 당시 교장이던 미스 반 데어 로에와 데사우 시 사이의 계약을 체결했다. 여기에는 기업에서 바우하우스에 지불하는 모든 로열티를 포함하여 특허권 일체를 미스에게 양도한다는 내용, 1932년 8월 1일부로 교수들의 계약이 취소되었지만 1935년 3월 31일까지는 봉급의 절반을 지불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직물 공방의 직기와 장비를 빌려주었고 바우하우스라는 이름의 권리까지 미스에게 일임했다.

1932년 9월에 데사우 시에서 바우하우스 폐쇄 결의안이 확정되었고 8월 18일에 미스가 베를린 남부 교외의 슈테글리츠(Steglitz)에 있는 전화공장 건물을 임대했다. 1933년 1월 3일에 수업이 시작되었는데 교과과정 중 요제프 알베르스가 예비과정을, 미스와 루드비히 힐버자이머가 건축을, 릴리 라이히가 인테리어와 직물 공방을, 칸딘스키가 조형이론과 자유회화를 가르쳤고 발터 페터한스가 사진공방에 광고를 추가했다. 3월 30일에 방학에 들어갔다가 4월 10일에 새 학기가 시작되었으나 다음날인 4월 11일에 나치가 경찰을 보내어 학교를 조사하고 폐쇄 조치를 취했다.

그 이후에 데사우 시가 일방적으로 미스와의 계약을 취소하고 5월1일로 교수들의 봉급 지불을 중단했다. 미스가 수차례 게슈타포 사무실을 방문하여 예술학교 허가 권한을 요구했고 다시 학교를 열어도 좋다는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칸딘스키와 힐버자이머가 더 이상 수업을 맡지 않도록 할 것, 유태인 스텝이 없을 것, 바우하우스라는 이름으로 활동하지 않을 것을 조건으로 내세웠고 나치당에 가입을 종용하는 내용도 포함되었다.

결국, 7월 20일에 미스와 교수진들은 학교를 해체하기로 결정했다. 그날 곧장 게슈타포에 서신을 보내고 8월 10일에 학생들에게 폐교를 통보함으로써 베를린 시기가 종결되었다.

2. 2. 베를린 시기에 대한 인식

데사우와 바이마르는 학교의 흔적이 유산으로 보존된 반면 베를린 바우하우스는 명판 하나만 남아 있어서 베를린 시기에 대한 인식의 단면을 보여준다. 이러한 인식은 단행본, 전시에서도 잘 나타나는데 그것이 국내 연구자들에게도 영향을 주었음을 살펴보고자 한다.

Figure 1

A commemorative plaque attached onto a building near the Bauhaus’s last place

2. 2. 1. 주요 단행본의 경우

바우하우스를 소개한 주요 단행본에서는 전체 분량에 비해서 베를린 시기는 대단히 짧게 기술되어 있다. 대표적인 저서로 알려진 한스 M. 빙글러의 <바우하우스>에는 256~265쪽에 ‘사립연구소, 탄압과 해산’이라는 제목 아래 바우하우스 베를린의 교과과정부터 사무국에서 작성한 일지까지 정리되었고 651~654쪽에 관련 사진들이 실렸다. 권명광이 편역한 <바우하우스>에는 178~182쪽에 여러 단락에 걸쳐서 ‘사립연구소’, ‘카니발’, ‘봉쇄’, ‘끝장’이라는 소제목과 함께 수업과 폐교 과정을 다루었는데 데사우에서 지원받던 급여가 정지되는 등 재정 문제로 교수회의에서 폐교를 결정했다고 기록되었다.

상대적으로 많은 지면을 할애한 것은 하워드 디어스틴이 쓴 <바우하우스>인데 ‘6부. 굿바이 바우하우스’라는 큰 제목 아래 ‘제19장 베를린 바우하우스-마지막 바우하우스’라는 소제목을 두었다. 그는 당시 재학생으로서 직접 겪었던 일을 세세하게 기록했다. 예컨대, 바우하우스가 문을 닫은 이후에도 미스와 함께 했던 시기, 그리고 미국에서 미스와 릴리 라이히를 만났던 기억 뿐 아니라 사적인 대화 내용까지 남겼다.

위 단행본들은 베를린 시기를 다룬 분량이 적을 뿐 아니라 다른 시기와 달리 교육 내용이나 활동 등을 거의 다루지 않았다. 베를린 시기에 대한 아무런 가치 평가 없이 그저 바우하우스가 종결되는 단계로 약술한 것이다.

Chapters for the Berlin period in books on Bauhaus

2. 2. 2. 주요 전시의 경우

바우하우스를 다룬 대표적인 전시가 1938년 뉴욕현대미술관(MoMA, 이하 ‘모마’)에서 열린 <Bauhaus 1919-1928>전이라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이 전시는 바우하우스를 미국 사회에 알린 중요한 계기이기도 했다. 당시 모마의 관장인 알프레드 바가 그로피우스, 헤르베르트 바이어와 함께 기획한 이 전시는 바우하우스의 전체 기간을 다룬 것이 아니라 그로피우스가 재임한 9년을 다룬 것이었다.

이처럼 제한된 전시 구성에 사람들이 의문을 갖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그로피우스와 다른 교장들 사이의 반목이라든가 독일과 미국의 정치적 쟁점 때문이라는 여론이 형성되었다.(Kwon, 2019) 애초에 1938년 전시는 바우하우스의 모든 시기를 포함하려 했고 알베르스, 모호이너지는 그로피우스에게 블랙 마운틴 칼라지, 뉴바우하우스까지 포함하여 미국에서도 여전히 살아있는 바우하우스를 보여주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그로피우스는 미스와 그의 제자들이 전시에 부정적인 입장이라는 이유를 들면서 자신이 재임하던 시기로 한정하자고 바에게 서면으로 제안했다.(Sajic, 2013)

1968년 슈투트가르트 미술관(Württembergischer Kunstverein Stuttgart)에서 열린 <50 Jahre Bauhaus>전도 그로피우스 시기에 초점을 맞춰서 베를린 시기는 거의 다루지 않았다. 이 전시의 기획에도 그로피우스와 바이어가 주도적으로 참여했으므로 모마의 사례와 비슷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모마 창립 80주년과 바우하우스 탄생 90주년을 기념하여 2009년에 <Bauhaus 1919-1938, workshop for the modernity>전이 열렸는데 이때는 바우하우스 전체 시기가 뉴바우하우스까지 포함되었다. 종합해보면, 위의 세 전시는 베를린 시기를 다루지 않았거나 시카고로 이어지는 과도기 정도로만 다루었다.

2. 2. 3. 국내 연구자들의 인식

정시화(Chung, 1995)는 1995년에 4월호 <월간디자인>에 기고한 글에서 “바우하우스는 바이마르 바우하우스, 데사우 바우하우스, 베를린 바우하우스를 거쳐 나치스에 의해 폐쇄된 이후 미국 시카고 뉴 바우하우스, 시카고 디자인학교로 그 이념이 계승되었고”라고 언급한 바 있다.

또한, 강현주(Kang, 2019b)는 논문에서 “1919년부터 1933년까지 바이마르, 데사우, 베를린 등 독일의 세 도시로 옮겨 다니며 14년간 존속하다 나치의 집권으로 폐교한 바우하우스가 전 세계적인 영향력을 갖게 된 것은 무엇보다 이 학교 출신 교수와 학생들이 미국으로 건너가 바우하우스의 디자인 교육 프로그램과 이념을 이어나갔고 그것이 다시 유럽과 아시아로 전파되며 널리 확산되었기 때문이다.”라고 압축적으로 표현했다.

베를린 시기를 포함하여 바우하우스에 대해 국내 연구자들이 갖고 있는 인식은 정시화와 강현주가 약술한 위의 문장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국내 연구자들이 유사한 인식을 갖게 된 이유를 두 가지로 추측할 수 있다. 첫째는 50년대 말에 미국에서 공부한 김정자, 민철홍, 유강렬이 서울대와 홍익대에 교수로 부임하여 바우하우스 교육 모델을 적용한 디자인교육의 틀을 잡았다는 점이다.(Kang, 2019a) 또 다른 이유로는, 앞에서 언급한 정시화(Chung, 1995)의 글을 참고할 수 있는데 그는 모마의 <Bauhaus 1919-28>전과 빙글러의 저서 <바우하우스> 영문판이 향후에 사람들이 바우하우스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자료가 되었다고 소개했다. 이 두 자료와 정시화의 글이 국내 연구자들에게는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3. 베를린 시기가 다뤄지지 않은 이유

2장에서 다룬 선행연구들에서는 베를린 바우하우스와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언급하지 않는 이유가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다. 주요 단행본만 하더라도 베를린 시기를 공통적으로 짧게 언급하였기 때문에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렇지만 단행본을 비롯한 바우하우스 관련 글에서 이유가 될 만한 단서를 찾을 수 있고 글의 맥락과 정황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는 있다. 즉, 베를린 바우하우스는 존속 기간이 짧았고 사립학교였고 정치적 논쟁에 휘말렸다는 점을 들 수 있다.

3. 1. 짧은 기간

고영란(Koh, 2019)은 “바우하우스의 마지막 단계인 베를린에서의 정규 교육 활동은 제한적일 수 밖에 없었으며, 최종적으로 폐쇄되기 전까지의 짧은 과도기에 불과했다”고 기록했다.

바우하우스를 본격적으로 다룬 책은 아니지만 <인더스트리얼 디자인>에서 베른트 뢰바하(Löbach, 1976)가 짧게 평가한 부분도 비슷한 인식을 보여준다. 그는 “베를린에서 사립학교의 형태로 지속되었던 바우하우스는 곧이어 1933년 국가사회주의자(나치)들에 의해 결국 폐교되고 말았다. 우리의 관심거리가 될 만한 아무런 교육 결과물도 만들어내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바우하우스의 실제적 기능의 산업제품디자인에 초점을 맞춘 그의 시각에서는 베를린 시기의 짧은 활동이 성과를 기대할 수 없는 조건이었던 것이다.

3. 2. 사립학교

디어스틴(Dearstyne, 1992)은 베를린 시기에 바우하우스가 처음으로 정부의 보조를 받지 않는 사립 기관이 되었다고 기록했다. 바우하우스를 다룬 주요 단행본, 정시화를 비롯한 국내 연구자들의 글에서도 사립학교라는 점이 강조되었다. ‘사립학교’라는 표현이 사용된 맥락을 살펴보면 베를린 바우하우스가 바이마르나 데사우 시기처럼 공적 재원이 확보된 공식적인 학교가 아니라고 구별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정상적인 기관이 아니라 미스 반 데어 로에의 ‘개인’ 학교로 본 것이며 “미스의 개인 학교일 뿐”이라는 표현도 종종 발견된다.

실제로 미스 역시 자신의 학교임을 주장한 바 있다. 게슈타포가 학교 출입을 통제할 때 “내 학교”라고 항의했던 것이다. 그리고 미스는 문화선전부에서 나치의 문화정책을 주도하던 알프레드 로젠버그에게 연락했고 밤 11시에 만날 수 있다는 말에 직접 찾아갔다. 릴리 라이히 등 동료 교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구속될 위험을 무릅쓰고 로젠버그를 만나러 갔다. 미스의 인터뷰에 따르면, 그 이후에도 이틀에 한번 꼴로 게슈타포 사무실을 찾아가서 학교 문을 열도록 요구했는데 가장 큰 이유는 ‘개인’ 학교이고 많은 돈(27,000 마르크)을 걸고 계약한 사유재산이기 때문이었다.(Dearstyne, 1992)

3. 3. 정치적 논쟁

위의 2장에서 언급한 모마의 바우하우스 전시가 열리자 탈정치적인 의도에 대한 비판이 있었다. 미술사학자 카렌 쾰러(Karen Koehler)는 그로피우스를 비롯한 기획자들이 의도적으로 바우하우스를 탈정치적으로 보이려 했고 정치적 논쟁을 거부하고 역사적 특수성을 피하려 했다고 주장했다.(Sajic, 2013)

쾰러가 주장한 만큼 탈정치적 의도가 강하지 않았더라도 그로피우스와 바이어는 바우하우스의 활동 중 논쟁이 될 부분을 빼고 교육 방법론으로 한정하여 미국의 교육에 적용할 수 있음을 알리는 방향으로 전시를 기획한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모마의 전시 이후에 1940년까지 하버드대학 등 미국 전역의 대학과 미술관에서 순회전을 열었다.(Sajic, 2013)

이 현상은 독일, 엄밀히 말해서 서독에서도 이어졌다. 바우하우스 개교 50주년을 기념하여 열린 <50 Jahre Bauhaus>전은 온전히 그로피우스에 대한 헌정이었고 그의 시각을 고스란히 담았다.(Dressler & Christ, 2018) 슈투트가르트 미술관이 2018년에 다시 이 전시를 해석하여 개최한 <1968년 바우하우스 50년 이후의 50년(50 Jahre nach 50 Jahre Bauhaus 1968)>전에서, 기획자인 드레슬러와 크리스트(Dressler & Christ, 2018)는 50년 전의 전시가 모마의 바우하우스 전시에서 나타난 탈정치적 태도의 연장이었을 뿐 아니라 그로피우스가 한네스 마이어를 마르크스주의자이자 ‘반역자(traitor)’ 취급했다고 비판한다.

미스는 마이어 재임 기간의 문제를 잘 알고 있었고 급진 성향의 학생들을 배제했지만 결국 베를린 바우하우스 시기는 그와 동료 교수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치가 권력을 잡은 뒤에 정치적 논쟁에 휩쓸렸다. 미국과 서독의 전시 및 출판물에서는 또다시 논쟁에 휩쓸릴 위험 때문에 베를린 시기를 다루기 꺼려했을 수 있다.


4. 베를린 시기를 다루어야 할 이유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연구자들 입장에서는 굳이 베를린 시기를 자세히 조명할 필요가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데사우 이후에 베를린이 새로운 활동의 근거지가 된 배경과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 바우하우스에 대한 오늘의 인식을 이해하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4. 1. 왜 베를린이었나

바이마르에서 바우하우스가 문을 닫은 뒤에 여러 도시들이 그로피우스에게 유치 의사를 밝혔던 것처럼, 데사우에서 바우하우스 폐교를 결정한 뒤에 마그데부르크(Magdeburg), 라이프치히(Leipzig) 등 사회민주당 도시들(Social Democrat cities)이 바우하우스를 유치하려고 했다. 그러나 미스는 데사우 시의 폐교 결정이 있기 몇 달 전에 이미 베를린에서 새롭게 시작할 것을 마음먹었다.(Droste, 2002)

베를린은 1920년대에 황금기를 맞았고 30년대 초에는 절정을 이루었다. 브레히트의 연극, 프리츠 랑의 영화를 비롯한 새로운 예술 실험이 가능했던 한편, 음악, 댄스 등 대중문화가 촉발되어 기분전환을 위한 욕망이 드러난 도시였으며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함에 따라 건축 프로젝트도 많았다.(Metzger, 2007) 바우하우스를 유치할 의사를 보이지 않았던 베를린 시가 재정적인 지원을 할 리 만무했지만 그 대신에 프로젝트 기회가 많았다. 빙글러(Wingler, 2001)는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이 상황을 설명한 바 있다. “훨씬 규모가 큰 도시인 베를린에서 새로운 위탁 연구를 얻고 새로운 기회를 발견할 수 있으리란 전망은 보조금의 중단을 보상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바우하우스가 획득한 여러 저작권과 교사들의 고용 계약이 큰 도움이 되었다. 이들 중 많은 교사들은 데사우 시의 고용 계약상의 의무에 따라 내리 수년간 데사우 시로부터 봉급을 계속해서 받기로 되어 있으므로 베를린에서는 무보수로 가르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라이프치히 같은 곳에서 시의 재정 지원을 받으면 안정적이었겠지만 데사우의 경험에 비추어보면 결국 정책에 휘둘릴 게 뻔했으니 재정적으로 자립하여 독립적인 운영을 하는 것이 현명했을 수 있다. 게다가 베를린은 미스가 1926년에 건축가 집단 ‘Der Ring’의 설립을 주도했던 활동 근거지였다. 일찌감치 베를린에서 사무소를 운영한 그로피우스가 베를린의 지멘스슈타트(Siemensstadt) 프로젝트를 수행하던 차였으니 미스 역시 명망 있는 건축가로서 이 대열에 빠지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4. 2. 베를린 시기 학생들의 활동

베를린 바우하우스에 신규 등록한 학생은 31명이었고 데사우에서 교수들을 따라 베를린으로 간 학생들도 있었다. 이들은 학교 상황이 불안정함을 알았지만 바우하우스에서 더 공부하고 싶어했다. 버려진 공장을 학교로 수리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고 학교를 알리고 후원금을 받기 위한 파티를 준비하기도 했다. 학기 중에는 데사우 시기와 다를 바 없이 기업과 협력 작업도 진행하였으며 결과물도 남아 있다.

Figure 2

Students’ works in Berlin Bauhaus

디어스틴(Dearstyne, 1992)의 기록에 따르면, “미스가 나치와 협상을 벌이고 있을 때 학생들은 베를린에 남아 학교가 틀림없이 다시 열릴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고 한다. 학교가 폐쇄된 기간에도 그와 동료 몇 명은 미스의 개인 아틀리에로 찾아가 개인 지도를 받았다. 게다가 8월 10일에 학생들에게 공식적으로 폐교를 공지한 후에도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수업료를 모아서 미스에게 수업을 받았다.

4. 3. 바우하우스 출신들의 베를린 활동

바우하우스가 베를린에서 문을 열던 시점에 이미 베를린에는 바우하우스 출신 여럿이 자리 잡고 있었다. 요하네스 이텐은 1926년에 베를린에 자신의 이름을 딴 개인 학교를 열고 1934년까지 운영했다. 마이어와 결별하고 브레슬라우 예술학교로 자리를 옮겼던 오스카 슐래머도 베를린 예술학교에 교수로 와 있었다. 그 외에도 여러 사람이 베를린 바우하우스와 동일한 시기에, 동일한 도시에 머물고 있었다.

Bauhaus people worked in Berlin during Bauhaus Berlin

물론 이들은 바우하우스가 게슈타포에 의해 폐쇄당하고 어려움을 겼던 시기에도 같은 도시에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 중 누구 하나 바우하우스가 다시 문을 열 수 있도록 애쓴 기록이 없다. 오직 미스가 애를 쓸 뿐이었다.

바우하우스 출신들에게는 위험을 무릅쓰고 바우하우스를 살려야 할 이유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우하우스의 이상을 조금이라도 공유했다면 아마도 미스와 협의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다시 학교를 운영할 수 있다고 할 때도 릴리 라이히를 비롯한 동료 교수들은 자금이 없이 어렵다는 입장이었고 미스 역시 그들의 밀린 월급을 마련해서 주는 것이 급선무여서 폐교 조치를 한 이후에도 저작권을 받으러 회사들을 찾아갈 정도였다.

흥미로운 점은, 나치가 권력을 쥔 이후에 이들이 함께 일을 했다는 사실이다. 1934년에 괴벨스가 기획한 <독일 국민, 독일인의 일(Deutsche Volk, deutsche Arbeit)>전에 바이어, 그로피우스, 미스, 릴리 라이히, 요스트 슈미트 등 바우하우스 출신 10여명이 참여한 것이다.


5. 베를린 시기 논의를 통한 재인식

베를린 시기를 새롭게 조명함으로써,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베를린에서 추구했던 것을 확인할 수 있고 또한 베를린 시기를 제외한 바우하우스 역사의 서술이 갖는 한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5. 1. 베를린 바우하우스 운영의 교훈

베를린에서 바우하우스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사립학교로 운영해야 했다. 베를린에는 이미 예술학교가 있었기 때문에 시에서 특별히 바우하우스를 지원할 이유가 없었을 뿐더러 데사우에서 겪었듯이 정책에 따라서 언제든 지원금이 끊길 위험도 있기 때문이었다.

상황에 따른 결과든, 의식적이든 베를린 시기의 바우하우스는 자력으로 학교를 운영하려는 노력을 보여주었다. 우선, 미스가 사재를 털어서 건물 임대료를 선지급했다. 데사우 시와 계약하여 확보한 특허 수입 및 교수들의 급여 덕분에 기본 운영비는 충당될 수 있지만 등록금으로도 부족한 나머지 필요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교수들이 후원금을 마련할 계획도 세웠다. 학교에서 파티를 여러 번 개최한 것도 그 계획 중 일부였다. 파티를 준비하면서 학생들과 함께 상당 기간 준비한 것을 보면 학교의 역량을 보여주기 위해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당시 바우하우스 일지에 따르면, 4회에 걸쳐 법인화 회의를 했다고 기록되었는데 이것 역시 안정적으로 학교를 운영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학교를 지원하려는 도시들의 요청을 거절하고 베를린으로 장소를 정한 것도, 사립학교로 운영하기로 결정한 것도 미스와 동료 교수들이었다. 운영비를 마련하기 위해 고민하고 노력한 것도 교수들이었고 학생들 역시 동참했다. 게다가 폐쇄 조치에 항의한 것, 심지어 폐교를 정한 것도 그들의 결정이었다.

미스의 인터뷰에 따르면, 바우하우스를 다시 열어도 좋다는 서신을 게슈타포로부터 받고서 릴리 라이히에게 곧장 전화를 했으며 동료인 알베르스, 칸딘스키, 힐버자이머, 페터한스를 불렀다. 그리고는 학교 재개교 허가에 감사하지만 문을 닫기로 결정했다고 답신하자는 의견을 동료들에게 내놓았고 모두 이에 동의했다.(Dearstyne, 1992)

공식적인 관련 문서에는 미스와 교수들이 7월 20일에 학교 문을 닫겠다고 서신을 보냈고 그 다음날인 7월 21에 재개교를 허가한다는 서신을 게슈타포가 보낸 것으로 되어 있다. 어느 것이 우선이든 폐교를 결정한 것은 미스와 동료들이었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이데올로기, 정책에 좌우되지 않고 자율적으로 학교를 운영하고자 했던 의지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는 그들의 의지와 달리 수개월 밖에 지속하지 못하여 많은 결과물이 남지 않았을 뿐이다. 따라서, 짧은 기간에 존재한 사립학교라는 이유로 베를린 바우하우스를 이전 시기와 달리 평가절하 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 오히려 당시 상황에서 대안을 찾으려 했던 독립적인 의지로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

5. 2. 바우하우스 폐교 사유

미스가 문서에 기록한 공식적인 폐교 결정의 이유는 경제 사정이었다. 물론 그 경제 사정은 나치에 의해 데사우 시에서 지원을 계속할 수 없었고 분명하지는 않지만 수수료를 지급하던 몇몇 기업이 계약을 파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이 선행연구에서는 바우하우스가 나치에 의해, 또는 나치의 압력에 의해 문을 닫은 것으로 기록되었다.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의 유인물이 발견되었다는 것을 빌미로 베를린 바우하우스를 폐쇄했고 데사우에서도 마이어가 해임할 때, 시에서 폐교를 결정할 때, 모두 공산주의 성향이 강하다는 이유였다. 그렇지만 정작 공산주의 성향이 실질적인 문제가 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독일 연방의회 총선 결과만 보더라도 공산당이 적지 않은 의석을 차지했을 정도다.

The number of main parties’ seats in the parliament(Lorant, 2017)

바우하우스 구성원들은 기본적으로 사회주의 의식을 갖고 있었으며 그 의식이 두드러진 이들이 일부 있었다. 그로피우스가 교장을 맡고 있을 때에도 브후테마스(VKhUTEMAS) 출신 등 러시아 건축가들과 교류가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바우하우스가 나치로부터 ‘볼셰비키’라는 비난을 받았고 브후테마스는 소비에트에서 ‘보헤미안’이라는 비난을 받았다는 점이다. 결국 두 학교가 비슷한 시기에 문을 닫게 된 것은 모더니즘에 대한 반감과 전체주의적 문화 정책 때문이었다.(Roman & Marquardt, 2017) 실제로 마이어가 러시아로 건너갔을 때, 처음에는 건축 교육의 모델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좋은 평가를 받다가 모더니즘의 국제주의적 성향으로 비난을 받은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바우하우스 건축가들을 시기한 일부 독일 건축가들이 나치를 이용했다는 주장도 있는데 바우하우스 구성원들을 마르크스주의자, 볼셰비키라고 비방하는 것은 당시의 상투적인 수법이었다는 것이다.(Sudjic, 2011)

따라서 바우하우스에 정치적인 인물이 전혀 없었더라도 정상적인 학교 운영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데사우와 베를린에서 바우하우스가 문을 닫은 여러 이유 중에서 급진적인 성향이 부각되었던 것은 다분히 2차 세계 대전 이후 냉전 시기에 미국과 서독 등 서방국가들의 시각으로 바우하우스의 일면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이는 급진 좌파들이 바우하우스를 어려움에 처하게 했다는 논리로, 바우하우스의 순수성을 강조하고 바우하우스 출신들의 이념적 부담을 덜어주었다.

따라서, 좌파적인 성향으로 특정한 인물들을 비판하는 것, 그리고 나치에 압력에 문을 닫은 것이 사회주의적인 성향이라는 해석은 적절하지 않다. 다분히 당시 모더니스트들에 대한 반감 등 주류의 인식 문제였다고 할 수 있다.

5. 3. 바우하우스 폐교 이후의 활동

그로피우스는 1937년 하버드대학, 미스와 힐버자이머는 1938년에 시카고 아머 공과대학(Armour Institute of Technology)의 교수가 되었다. 모호이 너지는 1937년에 뉴바우하우스로, 알베르스 부부는 1933년에 블랙 마운틴 컬리지로 옮겼다.

그런데 바우하우스 출신이 미국으로만 이주한 것은 아니다. 크로아티아, 헝가리, 일본, 팔레스타인, 러시아, 미국 등지에서 바우하우스에 입학했고 본국으로 돌아가서 각 나라의 교육과 실무에서 역할을 했다. 2대 학장을 맡은 마이어는 1930년에 교장직에서 해임된 후에 학생들과 함께 모스크바로 떠났다. 당시 브후테마스는 문을 닫았으나 건축과에서 파생한 바시(VASI, 고등건축건설연구소)에서 1933년까지 일했다.(Roman & Marquardt, 2017) 마이어는 1938년부터 49년까지 멕시코에서 활동했고, 모스크바에서 함께 활동한 바우하우스 시절의 제자 콘라트 퓌셀(Konrad Püschel)은 1955년부터 북한의 함흥 재건 프로젝트에 참여하였으며 이후에 동독으로 돌아가서 활동했다.(Kim, 2019) (von Osten & Watson, 2019)

또한 1946년, 동독에 속한 베를린-바이센제(Berlin-Weißensee)에 응용 미술 학교(Hochschule für angewandte Kunst)가 세워졌을 때 바우하우스의 초빙 강사였던 마트 스탐이 디렉터를 맡았고 두 명의 바우하우스 출신 건축가, 젤만 젤마나기치(Selman Selmanagić), 헤르베르트 히르케(Herbert Hirche)가 교수를 맡았다. 두 사람 모두 미스로부터 건축을 배웠고 히르케는 베를린 시기까지 학생으로 있었으며 1938년 미스가 미국을 떠나기 전까지 그의 건축사무실에서 일했다. 드레스덴 예술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던 마리안네 브란트도 이곳에서 1951년부터 1954년까지 강의를 맡았다.(Pfützner, 2018)

베를린 시기와 그 이후에 마르셀 브로이어, 그로피우스를 비롯한 이름있는 바우하우스 출신들이 미국으로 이주함으로써, 바우하우스 이념(Bauhaus idea)은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개념으로 특화하여 재구성되었다.(von Osten & Watson, 2019)

과거로부터 독립하고자 했던 20세기 모더니스트들이 미국에서 탈역사적인 태도를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냉전기에 사회주의 이념마저 뺀 미국화된 순수한 바우하우스의 이미지가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6. 결론

바우하우스에 대한 오늘의 인식은 2차 대전 후 냉전기에 형성된 것이며 서독에서 나치에 억압받은 대상을 되살리는 분위기 덕분에, 좌파의 온상(hotbed of leftist)이라는 바우하우스의 이미지가 순수한 예술학교라는 대중적인 이미지로 전환되었다.(Fiedler & Feierabend, 2013)

대중적인 눈높이에 맞게 바우하우스는 과격하지 않은(deradicalized) 이미지가 되어야 했으므로 바우하우스 출신들의 갈등과 분열이 드러나고 학교를 운영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의 베를린 시기는 적절하지 않았다. 다만, 나치의 압력에 학교와 구성원들이 희생된 것으로 끝을 맺는 것은 14년 바우하우스 역사의 대미를 장식하는 성역화(canonization) 일화로 요긴했다. 주요 단행본의 사례에서 보듯이, 베를린 바우하우스는 아주 짧은 시기에 별다른 성과도 없고 사립학교 형태였다는 이유로 언급을 회피할 만큼 바우하우스 역사에서 예외적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1932년에 데사우에서 폐교한 것으로 바우하우스의 역사를 끝내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데사우 시에서 폐교를 결정한 것으로 종결되면 폐교의 명분이 된 급진적 좌파 이미지가 남기 때문이다. 여기에 냉전기에 형성된 연구 분위기가 동서 진영(the East and the West)의 다양한 연구 스펙트럼을 무시한 점도 편향을 부추겼다.(James-Chakraborty, 2012)

이념적 문제를 떠나서, 바우하우스의 시기별 활동에 대한 불균질한 시각은 번성한 시기의 성과에 편향되어 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교육 기관에 기대하고 지원하는 명분으로 공공연히 언급되어서 바우하우스 당시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음을 알 수 있다. 베를린 바우하우스의 주체들이 짧은 기간만 운영하겠다고 생각했을 리 없고 지속적인 운영의 대안을 마련하는 중에 강제로 종결되었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오늘날까지도 바우하우스는 바이마르-데사우-베를린-시카고의 선형적이고 대등한 시기로 나열되지만 실제로 베를린 바우하우스는 옹색하게 다루어졌다. 베를린 시기는 바우하우스의 진보적인 모더니스트들의 희생이라는 대미, 그리고 미국으로 옮겨서 다시 이상을 펼치게 하는 중간 단계라는 명목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했다.

베를린 시기의 언급과 연구가 부재한 것은 특정한 시기의 탈역사적 성과에 치우친 관심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이것은 바우하우스가 그로피우스를 중심으로 그가 정착한 미국의 교육적 측면에 부각되고 그것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흐름을 잡아오게 된 단면이기도 하다.

물론 그 부분이 어떤 면에서는 중요한 성과로 부각될 수 있다. 그러나 바우하우스를 다양한 성향과 논쟁과 실험이 이어진 곳으로 인식하기를 거부한다면 일원적인 문화 편향일 수 있다. 이것이 바우하우스, 그리고 브후테마스가 문을 닫게 한 바로 그 힘이며 오늘 바우하우스에 대한 인식 역시 그 힘이 강제하여 화석화된 것일 수 있다. 즉, 오늘 믿고 싶어하는 이미지로서의 바우하우스인 셈이다.

이러한 편향은 디자인사 인식, 그리고 현재의 디자인 쟁점을 보는 시각에서도 시사점을 준다. 베를린 시기를 도외시한 사례에서 보듯이, 간결하게 역사적 사실과 쟁점을 보는 것은 동질적인 시각을 낳고 그 외의 움직임을 이질적으로 간주하여 각 활동이 지닌 고유한 의미를 퇴색시키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Acknowledgments

This work was done by 2018 Seoul National University of Science & Technology Research Fund.

본 논문은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교내 학술연구비 지원을 받아 개제되었습니다.

Notes

Citation: Kim, S. (2019). Study on the Bauhaus Berlin. Archives of Design Research, 32(4), 179-191.

Copyright : This is an Open Access article distributed under the terms of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Non-Commercial License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3.0/), which permits unrestricted educational and non-commercial use, provided the original work is properly c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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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1

Figure 1
A commemorative plaque attached onto a building near the Bauhaus’s last place

Figure 2

Figure 2
Students’ works in Berlin Bauhaus

Table 1

Chapters for the Berlin period in books on Bauhaus

저자, 제목 베를린 시기를 다룬 쪽수 / 전체 쪽수 소제목
Hans M. Wingler, <바우하우스> 14 / 750 사립연구소, 탄압과 해산
Frank Whitford, <바우하우스> 5 / 244 쓰라린 종말
권명광(편역), <바우하우스> 5 / 212 사립연구소, 카니발, 봉쇄, 끝장
Howard Dearstyne, <바우하우스> 18 / 320 굿바이 바우하우스, 베를린 바우하우스
-마지막 바우하우스
Magdalena Droste, <Bauhaus 1919-1933> 7 / 256 The Bauhaus in Berlin

Table 2

Bauhaus people worked in Berlin during Bauhaus Berlin

성명 재학 기간 (강의 기간, 직책) 베를린 활동 시기 활동 내용
Walter Gropius (1919-1928, director) 1928-1934 건축사무소 운영
Herbert Bayer 1921-1923 (1925-1928, master, typography and advertising) 1929-1938 그래픽 디자이너, 아티스트
Oskar Schlemmer (1923-1929, master, theatre workshop) 1932-1933 Vereinigte Staatsschulen für freie und angewandete Kunst 교수
Johannes Itten (1919-1923, master, preliminary course and workshops) 1926-1934 Itten-Schule 운영
Otti Berger 1927-1930 (1931-1932, deputy head of Weaving) 1932-1936 Atelier for Textile 운영

Table 3

The number of main parties’ seats in the parliament(Lorant, 2017)

독일공산당(KPD) 사회민주당(SPD) 나치(NSDAP)
제4대 총선 결과
(1928.5.20)
54석 153석 12석
제5대 총선 결과
(1930.9.14)
77석 143석 107석
제6대 총선 결과
(1932.7.31)
89석 133석 230석
제7대 총선 결과
(1932.11.6)
100석 121석 196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