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s of Design Research
[ Article ]
Archives of Design Research - Vol. 25, No. 3, pp.66-75
ISSN: 1226-8046 (Print) 2288-2987 (Online)
Print publication date Aug 2012
Received 28 Feb 2012 Revised 04 Apr 2012 Accepted 12 Jun 2012

A Design Origin of the Braun AG and Dieter Rams: the new Bauen in the 1920s

LeeByeong-Jong
Division of Design and Art, College of Liberal Arts, Yonsei Uuniversity
브라운 사와 디터 람스의 디자인 기원: 1920년대 신건축

In 1954, Braun AG began developing a new design program for "the good lifestyle" under the consultation and direction of F. Eichler. In the process, H. Gugelot in the School of Ulm developed a new design program based on its guide-lines of the "Umweltgestaltung". D. Rams and G. A. Müller rounded out the design program of all the products in the department of design, which was established in 1956. Since 1961, D. Rams had been the director at Braun Design and promoted Gugelot's "Umweltgestaltung". The "Umweltgestaltung" inherited the Neues Bauen tradition of the new Sachlichkeit and the Zweckmäßigkeit of the 1920s was based on logical positivism, and an avant-garde-movement that criticized the mass comsuming products problems of Americanized consumer society. Therefore D. Rams always says "user, not consumer" in his speeches and interviews and strongly reminds that a designer has environmental responsibility as a counsellor for users. Also he emphasizes that good form is based on the self-confidence via a long-living durable aesthetic.

초록

브라운 사는 1954년부터 아이흘러(F. Eichler)의 자문을 통해 “좋은 생활양식(der gute Wohnstil)”을 향한 새로운 디자인 개발을 시작했고, 특히 울름조형대학의 귀즐로(H. Gugelot)에 의해 새로운 브라운 디자인의 기본 방향이 정립되었다. 1956년에 신설된 브라운 디자인실에서 람스(D. Rams)와 뮬러(G. A. Müller)는 귀즐로의 환경디자인(Umweltgestaltung) 개념에 따라 전 제품 프로그램의 디자인을 해나갔고, 1961년부터 디자인실장이 된 람스는 환경디자인 개념을 더욱 발전시켰다. 그것은 1920년대 논리실증주의에 입각한 신즉물성과 합목적성을 따르는 신건축의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1950년대 시작된 미국식 소비사회의 문제에 직면하여 일어난 일련의 아방가드 운동이 기업의 대량생산 제품에서 실현된 것이었다. 그래서 람스는 브라운 디자인에 관련된 강연회와 인터뷰에서 언제나 “소비자가 아닌 사용자”를 무엇보다 강조하고, 사용자를 위한 변호인으로서 환경문제에 책임을 갖는 디자이너의 역할에 대해 역설한다. 그리고 좋은 형태란 오랜 사용을 통해 신뢰를 쌓음으로서 얻어지는 아름다움에 있다고 주장한다.

Keywords:

H. Gugelot, The New Sachlichkeit, The Zweckmäßigkeit, The Neues Bauen, H.귀즐로, 신즉물성, 합목적성, 신건축

1. 서 론

최근 재조명을 받는 브라운 사(Braun AG)와 디터 람스(Dieter Rams)의 디자인은 1955년부터 울름조형대학1)과 협동으로 개발한 것으로 그 초기부터 전 세계적인 극찬을 받았다. 이 디자인은 1958년 뮌헨 국립미술관과 MoMA 등의 유명 미술관에 정기 컬렉션 대상으로 선정되기 시작했고, 제 3회 카셀 도쿠멘타(documenta 3, Kassel 1964)에서는 브라운 디자인을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한 분야로 소개했다. 1965년 동경 전시를 시작으로, 브라운 디자인은 다수의 전 세계 순회 전시를 해왔으며, 건축과 디자인지뿐만 아니라 유명 언론매체의 특집기획으로도 다뤄졌다. 그러던 브라운 디자인은 1970년대부터 포스트모던 운동 계열의 대표적 표적이 되어 강한 비판을 받았다. 특히 브라운 디자인의 책임자였던 디자인실장 람스는 “기능주의” 디자인의 비인간적인 획일성을 야기한 대표 인물로 간주되어 강한 질타를 받았고, 그가 미스반 데어 로에(Mies van der Rohe)를 따라 표명한 “적을수록 많다(less is more)”는 “적을수록 따분하다(less is bore)”라는 말로 바뀌어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2000년대 중반부터 애플 아이팟(ipod)의 성공에 부응하여 돌연 애플의 디자인과 람스의 디자인을 연관 짓고 람스를 천재적인 디자인 스타로 부각시키는 이야기들이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2007년에는 후카사와(N. Fukasawa)와 모리슨(J. Morrison)의 『슈퍼 노멀(Super Normal)』2)이 출간되었고, 2008년에는 『레스 앤 모어』3)라는 전 세계 순회전과 함께 동명의 책이 출간되었다. 같은 해, 건축디자인지 『아비타레(Abitare)』에서는 람스의 디자인을 따르는 5명의 스타디자이너 특집기사를 발표했다.4) 그 과정을 통해 산업디자인 분야의 전문가들이나 브라운 디자인 전문 수집가들 사이에서만 알려졌던 람스는 돌연 20세기를 대표하는 천재 스타디자이너로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졌고, 브라운 디자인은 그의 천재적 능력의 결과물로 설명되었다. 브라운 디자인이 람스 개인의 천재성의 소산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설명이 대중적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간 브라운 디자인에 대한 연구의 미진함과 더불어, 1990년대부터 나타난 ‘디자인 클래식’ 유행의 맥락 속에서 람스와 그의 디자인에 대한 작가적 측면을 부각시킨 출판물들에 기인한 것으로 풀이된다.

독일어권에서는 브라운 디자인을 주로 울름조형대학이 추구한 “기능주의”가 람스를 중심으로 실현된 결과로 평하거나, 혁신적인 코퍼레이트 디자인개발을 이끌어낸 어빈 브라운의 뛰어난 디자인경영 능력의 소산으로 말한다.5) 영미권에서의 브라운 디자인은 스파크(P. Sparke)가 언급한 “기능주의”의 코퍼레이트 디자인을 통한 시장에서의 성공에 초점을 두고 설명하는 것이 주를 이룬다.6) 국내에서는 정시화를 필두로 영미권에서의 브라운 디자인에 대한 설명을 간략히 전해왔으며, 브라운 사의 공식자료를 역사적 맥락 속에서 설명한 이병종의 『독일 브라운 사의 디자인 전략 분석』만이 예외적인 것이었다.7) 그 후, 1990년대 스타디자이너 열풍과 함께 ‘디자인 클래식’의 ‘스타’ 람스에 대한 출간물이 하나 둘씩 나오자, 국내 디자인 관련 잡지들에서도 람스와 그의 브라운 디자인을 독일을 대표하는 디자인으로서 하나의 새로운 유행처럼 소개해 왔다. 그리고 2010/11년 『레스 앤드 모어』국내 전시를 계기로 월간 디자인에서 디터 람스와 그의 디자인을 특집기사로 다루었는데, 기존 『아비타레』기사의 간략한 소개와 전시설명으로 배포된 『디터 람스의 디자인 10계명』을 보도하는 것에 머물러 있었다.8)

브라운 사의 디자인실장 람스와 그의 디자인 팀이 이루어낸 브라운 디자인은 무엇보다 대량생산제품에 있어 좋은 디자인(Good Design)의 대표적 모범 사례로 손꼽힌다. 특히, 브라운 사는 디자인을 통해 현대 디자인 전문교육의 길을 개척한 울름조형대학의 과학적 디자인방법을 실천함으로써 현대 디자인 역사에서 하나의 전환점을 이루어 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람스와 브라운 디자인의 양식적 특성과 그 기원을 밝히는 연구는 아직 매우 부진하며, 최근 『레스 앤드 모어』기획전을 위해 클렘프(K. Klemp)와 우에키 폴렛(K. Ueki-polet)이 독일 “기능주의”의 역사적 연속성 상에서 간략히 서술한 것이 전부인 실정이다.9)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브라운 디자인을 ‘디자인 클래식’의 맥락에 따라 람스의 미술가적 천재성으로 설명하는 경향에서 벗어나, 엘리아스(N. Elias)와 브르디외(P. Bourdieu) 등의 이론에 기초하여 브라운 사와 람스의 디자인 특성과 그 기원을 독일의 역사적 사회 현실의 총체적 환경 속에서 고찰하여 그 실체를 밝히고자 한다.


2. 브라운 사와 디터 람스 디자인의 배경

2.1. 사회문화적 배경

제 2차 세계대전으로 패망한 독일은 미국과 소련의 주도하에 두개의 정치․경제 지역으로 나뉘어졌다. 미국은 1947년 서독지역을 달러화에 기초한 미국의 경제단위로 통합함과 동시에 동독지역을 경제적으로 단절시키고자, 마샬플랜(Marshall Plan)에 따른 경제원조와 함께 서독의 화폐개혁을 이룸으로써 서독진영의 산업과 기반시설의 빠른 복구를 촉진시켰다. 마샬플랜과 초대수상 아데나우어(K. Adenauer)가 “모두를 위한 복지(Wohlstands für alle)“라는 구호 하에 주도한 사회시장경제정책 및 한국전쟁 특수에 힘입어, 서독은 경제기적을 이루고 미국화된 소비사회로 전향해나갔다.10) 그 과정에서 서독 사람들은 처음으로 물질적 풍요를 누리면서 미국식 소비-레저사회 안으로 빠져들었고, 미국식 소비사회와 자유시장경제가 희망찬 밝은 미래를 가져다주리라 믿었다. “소비는 자유롭게 한다(Konsum macht frei)”라는 슬로건에 따라 사람들은 소비만을 꾀하는 새로운 복지생활을 시작했고, 다양한 소비물결이 나타났다. 처음 50년대초 음식-음주소비물결을 시작으로 가구와 자동차 소비물결이 차례로 뒤를 이었다. 노동시간의 단축에 따라 늘어난 여가시간은 물질적, 성적 자아실현의 자유 영역으로서, 그리고 자동차의 보급으로 확장된 이동성(Mobility)은 새로운 현대적 시민의 자유로서 이해되었다. 그 과정에서 일반대중의 과시욕구가 급성장하여 1930년대 과시적 양식들이 부활하고 대중적으로 유행한 반면에, 상류층에서는 자신들을 타 계층과 구별 짓고자 당시 엘리트 미술로 부각된 추상미술사조와 함께 세계적으로 유행되는 미국의 유기적 디자인(Organic Design)과 유선형(Streamline) 스타일링을 최신 유행의 “모던”으로 지향했다.11) 그러나 이들 상류층의 취향은 중간계층에서 상승된 부(富)의 과시를 위해 곧바로 모방되었고, 상류층은 다시금 최신 유행의 “모던” 내지는 서방세계의 “멋(chic)”을 찾아 중간계층과의 구별을 꾀했다. 그 결과, 지속적으로 유행의 급속한 변화만을 꾀하는 소비주의의 “모던”은 더욱 넓은 계층들로 확산되었고, 최신 유행을 따르는 “모던”의 원칙은 일상생활양식의 전제조건이 되었다.12)

[그림 1]

1950년대의 다양한 유행양식

2.2. 독일 디자인 전통과 진흥정책

유행에 치중한 미국식 스타일링으로는 세계시장에서의 경쟁력 향상을 기대할 수 없었기에, 국가적 차원에서 디자인의 개발이 요구되었다. 수출증대에 대한 관심 속에서 디자인은 무엇보다 상품의 질을 규정짓는 요소로서, 그리고 판매증진의 수단으로서 이해되었다. 여기서 디자인은 대량생산기술과 직결된 ‘형상부여’라는 관점에서, 그 개발이 강하게 요구되었다. 따라서 산업발전의 측면에서 디자이너 양성을 위한 교육프로그램이 새로이 편성되었고, 당시 재건되던 독일공작연맹(Der Deutsche Werkbund) 등과 같은 협회들이 세계시장에서의 경쟁력강화에 부합되도록 정치적으로 재편되었다. 그렇게 재편된 디자인협회들은 모두 산업의 총체적 이익과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거기서 “좋은 형태(Gute Form)”는 1920년대 신즉물성(Neue Sachlichkeit)과 합목적성(Zweckmäßigkeit) 전통에 따라 정의되었고, 산업체의 판매증진 수단으로서 자리 잡게 되었다.

1920년대 독일공작연맹을 중심으로 부각된 신즉물성과 합목적성은 도스플랜(Dawes Plan)13)으로 촉진된 신건축(Neues Bauen)의 핵심 조형관이었고, 대다수의 구성주의자들 뿐 아니라 표현주의자들까지도 신즉물성과 합목적성을 지향하는 신건축으로 전향했었다. 신건축은 당시 사회적 윤리의식의 성장으로 일어란 현실참여적인 건축과 디자인 운동으로서, 무엇보다 논리실증주의에 입각하여 테일러(F. W. Taylor)와 포드(H. Ford) 시스템을 모범으로 삼아 장식을 배제하고 재료를 절약하는 엄격하고 금욕적인, 순수 기하학적 형태를 통해 평등을 표현해내는 “기계미학”을 추구했다.14) 이러한 신건축의 신즉물성과 합목적성은 1930년대 국가사회주의자들(Nationalsozialist, Nazi)에게도 현대 산업기술을 상징하는 우수한 “민족문화창달”의 과시적 성과를 낳는데 매우 적합했기에, 정치적 차원에서 지속적으로 진흥되었다.15) 그리고 아이어만(E. Eiermann)16), 바겐펠트(W. Wagenfeld)17), 히르헤(H. Hirche)18) 등과 같이 1930년대 신즉물성과 합목적성의 대표 디자이너들은 1947년 독일공작연맹의 재건과 함께 “좋은 형태”의 선도자로 명성을 얻었다. 이러한 사회적 맥락 속에서 “좋은 형태”의 발전을 위한 디자이너 교육의 질적 향상의 필요성 또한 대두되었고, 이는 울름조형대학을 설립하게 하는 하나의 밑거름이 되었다. 또한 이러한 변화는 브라운 사에게도 울름조형대학과의 협력으로 “좋은 생활양식(guter Wohnstil)”의 디자인 개발을 시작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19)

[그림 2]

E. 아이어만 의자 디자인과 독일공작연맹 전시포스터 『새로운 생활』

2.3. 브라운 사의 재건과 “좋은 생활양식”의 시작

1921년 막스 브라운(Max Braun)이 설립한 브라운사는 유럽을 대표하는 라디오 및 전축 전문회사 중 하나로 급성장했으나, 1944년 연합군의 폭격으로 생산시설 대부분을 잃었다. 1947년 전쟁으로 파괴된 시설들을 복구한 브라운 사는 손전등 마눌룩스(Manulux)20)의 재생산을 시작으로 라디오 및 전축생산을 재기했고, 전기면도기 S 5021)과 함께 주방기기 물티믹스(Multimix)의 생산을 시작으로 사업 분야를 확장해나갔다. 그러나 그 제품들은 당시 유행하던 1930년대 바로크풍의 과시적 양식이나 아르데코 양식 또는 스트림라인 스타일링을 따르고 있었다.

[그림 3]

브라운 면도기 S50, 라디오 Piccolo50, 주방기기 Multimix, 1950

1950년 막스 브라운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회사를 물려받은 어빈(Erwin)과 아투어(Artur) 브라운은 무엇보다 새로운 디자인 개발의 중요성을 깊이 깨달았다. 그래서 어빈 브라운은 독일공작연맹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 한편, 디자인을 통해 “좋은 생활양식(der gute Wohnstil)”을 실현하고자 아이흘러(F. Eichler)22)의 자문을 구하면서 당시 유명 디자이너들과의 협동을 꾀했다. 그는 디자인을 통해 품질을 향상시킬 뿐만 아니라 새로운 문화를 창조함으로서 기업에 대한 확고한 신뢰를 이끌고 시장에서 장기적인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는 스타일링과는 다른 본질적인 디자인 개발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후 그들은 1954년 아이흘러를 디자인고문으로 영입하여 현대적인 “좋은 생활양식”의 기본방향을 연구를 하는 한편, 사내소식지에 다음과 같은 새로운 계획을 발표했다: “(좋은 생활양식), 이의 실현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성공만 한다면 우리는 장기간에 걸친 훌륭하고 건실한 성장 및 개발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23)

어빈 브라운은 1954년 9월에 열린 독일미술교육가 연합(Bundes deutscher Kunsterzieher) 총회에서 바겐펠트의 강연에 감명을 받고 디자인 개발을 의뢰했다. 그리고 “좋은 형태”를 알리는 독일공작연맹의 전회들을 통해 명성을 얻은 히르헤와도 디자인개발 협약을 맺었다. 또한 아이흘러의 추천으로 울름조형대학과의 산학협동을 체결하고 아이혀(O. Aicher)24) 와 귀즐로(H. Gugelot)25)와 함께 디자인개발을 추진했다. 그 첫 결과들은 1955년 뒤셀도르프 전파박람회에서 선보였는데, 거기서 1920년대 신즉물성과 합목적성에 입각한 기계미학을 드러낸 브라운의 새로운 디자인은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그림 4]

1920년대 신건축의 고전 비례를 따른 브라운 로고, 슈미텔(W. Schmittel), 1952

[그림 5]

1920년대 신건축의 기계미학을 따른 브라운 전시관 디자인과 제품 디자인, 1955


3. 브라운 사의 “좋은 생활양식”과 울름조형대학

3.1. “좋은 생활양식” 디자인의 개발

뒤셀도르프 전파박람회의 성공에 힘입어, 1956년 아이흘러를 실장으로 디자인실이 신설되었다. 건축가로 1955년에 갓 입사한 람스와 뮬러(G. A. Müller)26)는 디자인실로 자리를 옮겨, 히르헤와 바겐펠트 및 귀즐로와 함께 “좋을 생활양식”을 향한 브라운 전 제품의 새로운 디자인을 개발해나가는 한편, 아이혀와 함께 섭외물(편지지, 봉투, 카탈로그 등) 모두를 통합해내는 코퍼레이트 디자인(Corporate Design) 개발을 병행했다.

먼저 라디오와 전기면도기 그리고 주방기기와 사진광학기기 등, 네 가지 분야에서부터 새로운 디자인개발이 시작되었다. 브라운 사는 시장에서 디자인을 선도해나가기 위해, 울름조형대학과의 디자인개발 협력을 체결하고 귀즐로의 연구개발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거기서 브라운 디자인실의 람스는 라디오와 사진광학기기를, 뮬러는 전기면도기와 주방기기를 맡아, 귀즐로의 지도를 받으며 디자인을 개발해 시작했다. 울름조형대학에서 귀즐로의 지도하에 학업을 마친 바이스(R. Weiss)가 1959년 입사하여 뮬러와 함께 가전주방기기 디자인을 맡고, 1960에는 오버하임(R. Oberheim)이 디자인실에 들어와 사진기기와 모발미용기기 디자인을 해나갔다. 그리고 1961년부터 람스는 디자인실장이 되어 귀즐로와의 협력을 더욱 긴밀히 하면서 새로운 디자인 개발을 주도했다.

이 새로운 디자인 개발에서 개념적 혁신을 이룬 첫 결과는 무엇보다 1956년 귀즐로와 람스가 개발한, 백설 공주의 관(Schneewittchensarg)으로 불리는 라디오-전축-콤비네이션(Radio-Phono-Combination) SK4이다. SK4에서는 음향기기로서의 기본개념과 설계 그리고 형태 사이의 완벽한 조화가 이루어졌고, 이로부터 가전통신기기가 가구로서의 의미에서 벗어나 독립된 새로운 개인용 기기로 자리 잡는 바탕이 마련되었다. 이듬해에는 귀즐로의 유닛시스템 디자인개념이 뮬러의 주방기기시스템 KM3 디자인을 통해 실현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디자인들은 1958년부터 저명한 대형 미술관의 지속적인 수집품으로 선정되었을 뿐아니라, 당시 스타일링의 한계를 공감하는 다른 기업들에게 새로운 디자인 개발을 촉진하는 자극제 역할을 했다. 그 결과, 브라운 사를 주축으로 크놀 인터내셔널(Knoll International), 로젠탈(Rosenthal), 베엠에프(WMF) 등의 9개 회사가 모여 “좋은 생활양식”을 향한 새로운 디자인 개발연합이 결성되었다.27)

[그림 6]

라디오-전축-콤비네이션 SK4, H. 귀즐로 / D. 람스, 1956

[그림 7]

주방기기시스템 KM3, G. A. 뮬러, 1957

3.2. 귀즐로의 과학적 디자인과 유닛시스템

울름조형대학의 말도나도(T. Maldonado)와 귀즐로 등은 타틀린(W. Tatlin)과 러시아 구성주의자들의 국립미술공방 브후테마스(Wchutemas, 1920-27)와 마이어의 데사우 바우하우스(1927-30)에서의 과학화 전통을 계승 발전시켜나갔다.28) 타틀린과 마이어 등의 구성주의자들처럼, 그들도 디자이너를 더 이상 미술가가 아닌, 인본적인 환경시스템과 조형을 창조하는 엔지니어, 즉 환경엔지니어(Umwelt-Ingenieur)로 정의하면서 교육프로그램에 과학과목을 적극 도입하기 시작했다.29) 특히 귀즐로는 과학과목들을 통합해내는 총체적 디자인개념으로서, 팔(G. Pahl)과 바이츠(W. Beitz)의 시스템디자인론, 즉 독일엔지니어협회가이드라인(Verein der Deutschen Ingenieur, VDIRichtlinie) 2221/2222에 기초한 유닛시스템 디자인교육을 실천했다.30)

귀즐로의 유닛시스템 디자인개념은 각각 다른 기능을 갖은 제품들을 더 이상 개별적으로 제작하지 않고, 통일된 하나의 전체 유닛시스템 하에서 유닛을 이루는 다양한 요소로 생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제품의 종류를 다양하게 넓히면서도, 동시에 다품종 생산에 따른 단위 생산량 감소에 대한 부담을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한 것이다. 이는 곧 합리적 디자인으로 총체적 인공물 환경을 구축하고자 하는 것으로서, 그 실현을 위해서는 사용성과 생산기술에 대한 과학적인 새로운 개발이 전제되었다. 여기에서 디자이너는 하나의 전체 시스템에서 사용과 관계되는 영역들과 사람을 연결시키는 전문가, 즉 생산계획의 현장에서 인간-기계-관계(Human-Machine-Relation)와 그 구조의 설계를 전문으로 하여, 공학설계와 생산설계 엔지니어들과 협업하는 엔지니어였다. 그래서 인간공학은 디자이너에게 필수적인 것으로 강조되었고, 생산계획은 제품생산에만 관계된 것이 아니라, 제품의 사용관계와 생활환경에서의 상호작용관계에 대한 것이기에, 제품의 사용가치를 향상시키고 생산비용을 감소시키는 것이 디자이너의 주요 임무였다.31) 따라서 디자이너는 소비를 조장하는 스타일링으로부터 사용자를 보호하고, 인위적 폐기를 조장하여 환경문제를 일으키는 유행을 극복하는 초월적인 미(美)를 개발해야 한다고 보았다.32)

이러한 귀즐로의 유닛시스템 디자인개념은 조작과 작동 부분들을 수학적 질서와 상호관계를 이루는 하나의 시스템으로 통일시키고, 그 안에 모든 요소들을 과학적으로 배치한 브라운 라디오-전축-콤비네이션 SK4와 그가 지도한 린딩어 (H. Lindinger)의 하이파이 유닛시스템에서 잘 드러난다. 특히, 하이파이 유닛시스템은 음향기기의 모듈화가 논리적이고 경제적이라는 생각에 따라 개발된 것으로, 1962년 람스에 의해 최초의 하이파이 컴포넌트 오디오(Audio) 1로 탄생했다. 오디오 1은 무엇보다 기능을 중심으로 명료하고 깨끗하게 정리하여 단순화한 것이었다. 이 새로운 유닛시스템 개발에 대해 람스는 사용자에게 보다 편리한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질서정연한 기기들의 세상을 개발하고자 동일 부품의 사용으로 생산비용의 감소, 변화 가능성과 사용성의 증대, 일률적이고 집약적인 조작, 유닛들의 독립성과 거실영역에 적합한 형태개발에 노력했다고 설명했다.33)

[그림 8]

H. 린딩어의 하이파이 유닛시스템 연구, 1957/58(좌), 브라운 Audio 1, 1961(우)


4. 브라운 디자인과 디터 람스

4.1. 디터 람스의 디자인

람스는 1947-53년 비스바덴의 수공공예학교(Handwerker-Kunstgewerbeschule)에서 1920년대 신건축에 참여했고 데사우 바우하우스를 지향했던 죄더(H. Soeder)로부터 건축을 배우고, 2년간 아펠(O. Apel)34)의 건축사무실에서 일했다. 당시 독일공작연맹의 재편과 함께 부각되던 1920년대 신건축의 신즉물성과 합목적성의 기계미학, 특히 “좋은 형태”의 모범으로 떠오른 아이어만과 히르헤의 즉물적이고 합목적적인 디자인은 람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1955년 브라운 사의 건축/실내건축 부서에 입사하여, 이듬해인 1956년 뮬러와 함께 신설 디자인실로 자리를 옮겼다. 브라운 디자인실 역시 건축가들이 모여 디자인개발을 시작하던 당시 유럽 대부분의 다른 회사들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울름조형대학과의 협동을 통해, 람스와 뮬러가 귀즐로의 지도를 받으며 제품디자인 실무에 대한 경험을 쌓고 전 제품의 디자인을 새로이 개발해나가면서 변화가 시작되었다.35)

람스는 무엇보다 과학적 시스템 원리에 바탕을 둔 귀즐로의 즉물적이고 합목적적인 디자인 방향을 받아들여, 귀즐로처럼 고전의 법칙에 입각한 단순하고 명료하며 체계적인 디자인을 추구해 나갔다. 그러나 람스는 단지 귀즐로의 디자인을 이해하고 따르는 것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더욱 발전시키고 성숙시켜나갔다. 람스는 사람들이 무엇보다 미(美)에 대한 욕구를 갖고 있기에, 디자인을 통해 미적 욕구를 충족시켜져야 한다고 보았다.36) 그리고 그는 진실되고 공평하며 단순하고 겸손한 디자인이 진정한 미의 실천이라 여겨서, 미스 판 데어 로에의 “적을수록 많다(Less is More)”라는 말을 따라, 엄격한 고전의 비례를 따르는 “적은 디자인일수록 더 많은 디자인(Weniger Design ist mehr Design)”이라는 입장을 취했다. 이러한 그의 디자인관은 무엇보다 디자인이 생활환경 속에서 혼란스러운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일익을 다해야 하는 것이고, 결코 무리하게 사람들의 시선을 끌거나 감각을 자극해서는 안된다는 것으로 이어졌다.37) 즉, 디자인은 유행양식에 따라 제품을 장식하는 스타일링이 아니라, 제품생산에 관련된 전체를 체계적으로 조직화 함으로써 제품의 모든 각각의 기능들을 가능한 완벽하게 충족시키는 엔지니어링이었다. 그래서 그는 디자이너를 생산의 다양한 요구들을 구체적인 제품에 통합시키는 “디자인 엔지니어”라고 했다.38) 이는 곧, 울름조형대학과 귀즐로가 추구한 환경시스템을 창조하는 환경엔지니어를 말한다.

4.2. 브라운 스타일과 브라운 디자인 원칙

브라운의 새로운 디자인은 1958년부터 저명 미술관의 정기 컬렉션 품목으로 선정되고 주요 전문지와 잡지들에서도 연이어 브라운 디자인 관련 기사들을 실었다. 특히, 리차드 모스(Richard Moss)는 1962년 미국의 디자인 전문지 『인더스트리얼 디자인』에서 브라운의 새로운 디자인을 규칙과 조화 및 경제의 법칙을 따르는 “브라운 스타일”로 설명했다.39)

그러나 람스는 디자인에서 무엇보다 기능성과 외부로 드러나는 형태 간의 조화를 가장 중시했고, 그 시작점이자 목표는 바로 제품의 기능과 일상생활에서의 사용을 최적화 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그는 “(디자인에서) 뚜렷한 미적인 효과는 곱게 꾸미고 화려하게 과장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형태의 균형과 명확한 비례, 그리고 침묵을 통한 형태 그 자체에서 나온다”라고 설명했다.40) 이는 높은 질서의 수준을 갖는 ‘인본적인 세상’을 추구하는 것으로서, 울름조형대학의 환경디자인 이상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41) 람스는 이러한 맥락에서 브라운 디자인에서 추구한 좋은 디자인의 기준으로서 사용성과 재작성 및 미적 수준을 꼽았다.42) 그리고 1983년 오사카에서 열린 국제회의에서 브라운 디자인이 지키고 따르는, 그리고 좋은 디자인의 열한가지 원칙을 발표했다: 진실성의 원칙, 기능성의 원칙, 정보전달의 원칙, 인간공학의 원칙, 단순성의 원칙, 질서의 원칙, 자연성의 원칙, 성실성의 원칙, 미의 원칙, 시간적 초월성의 원칙, 그리고 이 열 가지 원칙들의 통일이 그것이다.43)

이는 다름 아닌 귀즐로의 『환경디자인원칙』에 기초한 원칙이었고, 람스가 디자인실장이 된 1961년 이래로 브라운 디자인실에서는 오랜 동안 큰 변화 없이 지켜졌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일본제품들에게 시장을 잃은 브라운 사는1990년 하이파이 오디오 “Last Edition”을 끝으로 음향기기 사업을 중단했고, 브라운 사의 전 제품 프로그램들은 시장에서의 쇠퇴를 거듭했다. 그 과정에서 마케팅이 디자인 개발을 주도하게 되었고, “좋은 생활양식”을 위해 람스가 지키고자 한 브라운 디자인의 원칙들은 점차 그 힘을 잃어갔다.44) 그리고 마침내 1995년 람스가 디자인실을 떠난 후, 브라운 사의 디자인 원칙들은 마케팅에 밀려 끝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4.3. 뉴 디자인의 스타들과 브라운 디자인

그룹 멤피스(The Memphis)의 대중매체를 통한 대 성공은 1980년대 전반에 걸쳐 전 세계적으로 나타난 “포스트모던” 유행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당시의 젊은 디자이너들은 멤피스를 모범삼아 대중매체에서의 성공을 꾀했다. 젊은 디자이너들은 독특한 개성과 극도로 다원적인 양식의 컬렉션 전시와 함께 대중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는 현란하고 호사스러운 스펙터클 이미지로 대중매체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그렇게 뉴 디자인 운동은 전 세계로 확산되었고, 그들은 대중매체를 통해 스타디자이너로 부각되었다.45)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현란하고 호사스러운 스펙터클한 이미지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이 수그러들자 대중매체에서는 “새로운 단순함(New Simplicity)”을 부각시켰고, 점차 “미니멀리즘”과 “젠스타일(Zen-Style)” 유행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었다. 모노(mono)와 베엠에프(WMF) 등의 식기세트와 불트하우프(bulthaup)와 포겐폴(pogenpohl) 등의 주방가구에서부터 시작하여 폭스바겐 파사트(Passat)와 아우디 TT 등에 이르기까지 금속표면을 즉물적으로 드러낸 “새로운 단순함”이 주류 유행양식으로 주목을 받으면서 1980년대 포스모던운동, 뉴디자인의 스타디자이너들과 그 뒤를 따르는 젊은 디자이너들 또한 점차 “새로운 단순함”으로 전향해나갔다.

[그림 9]

양산품 디자인의 성공으로 유명한 스타디자이너 P. 스타크의 대중매체에서의 소개 모습

또 다른 한편에서는, 그룹 멤피스와 그 뒤를 따르는 뉴 디자인의 대중적 성공으로 현대 미술과 현대건축 및 디자인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제 8회 카셀도쿠멘타(1987)를 기점으로 세계 주요 미술관들과 미술행사에서의 대규모 디자인 기획전이 급증하면서 현대 건축과 디자인은 현대 미술의 중심으로 부각되고 디자이너들은 현대를 대표하는 미술가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1990년대를 거치면서 바우하우스를 위시한 현대 디자인의 선구자들을 재발견하는 대규모 기획전들이 활발해지자, 마침내 현대 디자인의 선구자들을 스타디자이너로 발굴하고 그들의 디자인을 ‘디자인 클래식’으로 개발하는 한편, 소더비(Sotherby), 크리스티(Christie's) 등의 경매시장을 중심으로 ‘디자인 클래식’ 시장이 급성장했다. 브라운사와 람스의 디자인 또한 2005년의 전시『브라운혁신 50주년』46)을 계기로 경매시장에서 ‘디자인 클래식’의 주요 품목으로 급부상했고, 2008년의 기획전 『레스 앤드 모어』를 통해 그 가치가 고전 미술품에 버금갈 정도로 폭등했다. 그와 동시에 대중매체에서는 후카사와(N. Fukasawa), 그리칙(K. Gricic), 헤히트(S. Hecht), 아이브(J. Ive), 모리슨(J. Morrison) 등의 스타디자이너들이 람스를 선조로 여기며 따른다는 기사와 함께, 애플 사의 디자인 책임자 아이브가 람스의 디자인을 모방 혹은 표절했다는 기사를 대서특필했다. 이를 통해 람스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스타디자이너로서, 이전에는 그의 이름을 접해보거나 알지도 못했던 대중들에게까지도 널리 알려졌고, 그 과정에서 ‘디자인 클래식’으로 꼽히는 브라운 사의 제품들 모두가 람스의 디자인처럼 대중에게 소개되었다.

[그림 10]

건축 디자인 전문지『Abitare』특집 표지, 삽화의 라디오는 귀즐로가 디자인한 Exporter 2


5. 결 론

대중매체에서 소개한 람스와 그의 ‘열 가지 원칙’에 관한 기사들을 보면, 1980년대 초 대중매체에서 예전에는 없었던 천재적인 새로운 디자인으로 멤피스 컬렉션을 소개했던 것과 매우 흡사하다. 람스는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아이브가 아이팟과 아이폰을 선물하는 멋진 제스처를 보여줬다면서 아이브의 아이팟과 아이폰 디자인은 자신의 디자인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고 밝혔다.47) 그러나 사용을 쉽고 편하게 하는데 중점을 두었다는 근본적인 부분에서만큼은, 브라운과 애플의 디자인이 같다고 평했다.48) 또한 람스는 최근의 유명세로 벌어진 강연회와 인터뷰에서 무엇보다 “소비자가 아닌 사용자”를 빠지지 않고 강조하면서, 사용자를 위한 변호인으로서 환경문제에 책임을 갖는 디자이너의 역할을 역설했다.49) 거기서 그는 좋은 형태란 현혹적인 치장으로 시선을 끄는 것이 아니라, 오랜 사용을 통해 신뢰를 쌓음으로서 얻어지는 아름다움에 있다고 강조했다. 이는 귀즐로가 1960년 국제디자인회의에서 주장한 바와 같은 것으로, 귀즐로는 이처럼 람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람스의 빗소에(vitsoe) 시스템가구는 귀즐로의 M125 시스템가구에서 보여준, 고전의 법칙에 입각한 구성주의 “기계미학”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또한 그의 브라운 제품들에서는 독일공작연맹이 “좋은 형태”로 제시한, 고전의 법칙에 기초한 실증주의적 신즉물성과 합목적성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그가 주로 담당한 브라운 하이파이 오디오와 기타 소품들에서는 그 무엇보다 미스 반 데어 로에의 엘리트 고전주의를 읽을 수 있다.

브라운 사의 마케팅실장 슈미텔은 1952년 새로운 브라운 로고를 고전의 법칙에 따라 디자인했다. 어빈 브라운이 1954년부터 아이흘러의 자문을 받으며 추구한 “좋은 생활양식” 또한 고전의 법칙을 따르는 신건축의 전통을 계승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1955년 뒤셀도르프 전파박람회에서 보여준 브라운 전시관 디자인과 어빈 브라운과 아이흘러가 공동으로 디자인한 브라운 소형 라디오 SK2, 그리고 히르헤와 귀즐로 등이 디자인한 제품들은 한결같이 고전의 법칙에 따라 통일된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그 후, 람스를 비롯하여 뮬러, 바이스, 오버하임 등과 같이 신건축 전통의 영향을 받은 디자이너들이 브라운 디자인을 주도함으로써, 1980년대까지 브라운 사의 전 제품들은 고전의 법칙을 따르는 통일된 모습을 잃지 않았다. 그 결과, 브라운 사의 “좋은 생활양식”과 람스의 디자인은 신건축의 전통을 함께 하는 크놀 인터내셔널, 파프, 로젠탈, 베엠에프 등 제품들 뿐 아니라, 심지어 1920년대 당시의 신건축과 데사우 바우하우스 금속공방의 디자인과도 통일된 조화를 이루고 있다.

Glossary

1) Hochschule für Gestaltung, HfG Ulm, 독일 바덴뷰르텐베르크 소도시 울름에 1953년 설립되어 1968년 폐교된 조형대학

2) Naoto Fukasawa, Jasper Morrison, Super Normal: Sensations of the Ordinary, Lars Müller Publishers, 2007

3) 일본 산토리 뮤지엄에서 2008년 기획한 전시 『Less and More: the design ethos of Dieter Rams』는 2008년 오사카에서 시작하여 2009년 동경과 런던, 2010 프랑크푸르트와 서울, 2011년 샌프란시스코 등에서 전시되었다.

4) Abitare 487, 『Un designer in azienda』, 2008. 12. 15., pp.138-145

5) cf. Selle, G. Designgeschichte, Campus Verlag, 2007 Frankfurt a.M.; Wichmann, H., Mut zum Aufbruch: Erwin Braun 1921-1992, Prestel, 1998 München

6) cf. 페니 스파크, 20세기의 디자인과 문화, 까치 1995

7) cf. 정시화, 현대디자인연구, 미진사 1997, 산업디자인 150년 미진사 1992; 이병종, 독일 브라운 사의 디자인 전략 분석, 디자인학연구 Vol.18, 1996, pp. 165-174

8) cf. 월간디자인, 2011년 2월호

9) cf. K. Klemp, K. Ueki-polet, Less and More: The Design Ethos of Deiter Rams, Gestalten, 2. Aufl., 2010 Berlin

10) cf. Jost Hermand, Kultur im Wiederaufbau: Die Bundesrepublik Deutschland 1945-1965, Nymphenburger Verlag, 1986 München

11) cf. 토마스 하우페, 디자인, 예경, 2005, p.117

12) cf. Jost Hermand, 앞의 책

13)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경제난을 격던 패전국 독일의 경제복구지원계획으로서, 1924년 첫해 8억 마르크를 시작으로 1929년까지 약 21억 마르크의 차관이 미국을 중심으로 지원되었다.

14) cf. 이병종, 독일 공작연맹과 바우하우스의 디자인 과학화 운동의 특성, 기초조형학 연구 Vol.13 No.2, 2012, pp. 355-364

15) cf. 이병종, 독일 제 3제국의 디자인 - 민족주의 디자인의 유혹과 폭력, 디자인학연구 제24권 제2호 2011, pp. 91-104

16) 1923-27년 베를린 공과대학의 포엘치히(H. Poelzig)에게 건축을 수학하고서, 1931년부터 건축사무실을 열어 베를린의 주택단지 디자인을 시작했고, 1934년부터는 주로 공장건축에 집중했으며, 1947년 이후에는 건축과 디자인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왕성한 활동을 하여 전후 독일 현대 건축과 디자인의 대표자 중 하나로 꼽힌다.

17) 브레멘 미술공예학교에서 은공예를 전공한 후, 1923년부터 바우하우스 금속공방에서 수학했고, 1929년 금속공방 마이스터, 1935년부터 라우지처 글라스공업(Lausitzer Glasswerke) 미술총 책임자로 일했다. 1954년부터 슈투트가르트의 개인공방에서 포트(Pott), WMF, 린드너(Lindner) 등의 회사를 위해 개발한 수많은 디자인들은 오늘날 디자인의 고전으로 꼽히고 있다.

18) 1930-33년 바우하우스에서 수학했고, 1934-38년 L. M. 판데어 로에 건축사무실에서, 1939-45년 E. 아이어만 건축사무실에서, 1946-48년 H. 샤로운 건축사무실에서 일했고, 1948-52년 베를린 응용미술대학 교수로, 그리고 1952년부터 슈투트가르트 미술대학 교수로 재직했다.

19) cf. Hans Wichmann, Mut zum Aufbruch: Erwin Braun 1921- 1992, Prestel-Verlag, 1998 München, pp.47-74

20) 브라운 사에서 전시용품으로 1941년부터 생산했던 수동발전식 손전등

21) 1949년 특허로 등록한 칼날 왕복식 전기면도기

22) 미술사가, 연극학자, 연출감독. 1954년부터 브라운 사의 디자인 고문을, 1956-61년 브라운 디자인실장으로 브라운 사의 디자인 철학과 기본방향을 정립했다.

23) Braun AG(ed.), Braun im Rückblick 1921-1989, Braun AG, 1990 Frankfurt, p. 12

24) 1946년부터 뮨헨 조형미술아카데미에서 조각을 전공하면서 동시에 울름시민대학에서 다수의 그래픽 개발을 했다. 울름조 형대학의 정보디자인 전공을 이끌고, 뮌헨 올림픽 픽토그램 개발 및 수많은 기업의 그래픽 디자인 개발 등을 통해 코퍼레이트 디자인의 선구자로 널리 알려졌다.

25) 1940-46년 취리히 공과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했고, 1948-50 막스빌의 건축사무실에서 근무하였으며, 1950년부터 개인건축 사무실에서 유닛시스템가구 디자인 개발을 했다. 1955년부터 울름조형대학의 산업디자인을 이끌고, 1958년 브라운디자인 개발을 주도한 귀즐로 디자인연구소를 설립했다.

26) 디터 람스와 같이, 1952-55 비스바덴 수공공예학교에서 건축/실내건축을 전공했고, 1955년 브라운 사에 입사하여, 1956년부터 디자인실에서 일했고, 1961년부터 프리랜서로 활동했다.

27) Wichmann, H., 앞의 책, p.68

28) cf. Gert Selle, Designgeschichte, Campus Verlag, 2007 Frankfurt a.M., pp.138-140

29) cf. Nobert Korrek, Die Hochschule für Gestaltung Ulm, pp. 127-142

30) cf. Werner Blaser, Element System Möbel, Deutsche Verlags-Anstalt, 1984 Stuttgart, pp. 34-37

31) cf. H. Gugelot, WDC 강연, 1960 Tokyo, in; Hans Wichmann, System-Design Bahnbrecher: Hans Gugelot 1920-65, Birkhäuser Verlag, 2. Aufl., 1987 Basel, pp. 55-56

32) cf. H. Gugelot, 앞의 책; Nobert Korrek, 앞의 책, p. 130

33) Dieter Rams, Hören und Sehen im System, form 29, 1965 Frankfurt a.M., p.40

34) 1925-27년 카셀 건설학교에서, 1929년 베를린 미술 아카데미에서 건축을 배우고, 현대적 개혁을 주창한 대표 건축가로서 신건축과 맥을 같이 한 테세노프(H. Tessenow)의 건축사무실에서 일했고, 1949년부터 독립하여 1950년대를 대표하는 활발한 현대건축 활동을 했다.

35) cf. Dieter Rams, Erinnerungen an die ersten Jahre bei Braun, in; Jo Klatt, Dieter Rams: Weniger, aber besser, Jo Klatt Design+Design Verlag, 1995 Hamburg, pp.13-23

36) R. Joppien, in; Katalog, Mehr oder Weniger: Braun-Design im Vergleich, 1990 Museum für Kunstgewerbe Hamburg, p. 13

37) cf. Dieter Rams, Und so einfach ist es, ein guter Designer zu sein, in; Industrie Forum Design Hannover(ed.), Dieter Rams, Designer: Die leise Ordnung der Dinge, Steidl Verlag, 1990 Göttingen, p. 116

38) Dieter Rams, Design ist eine verantwortliche Aufgabe in der Industrie, in; 앞의 책, p. 109

39) Jo Klatt, 앞의 책, p.26

40) Dieter Rams, Das Chaos lichten helfen, in; Industrie Forum Design Hannover(ed.), 앞의 책, p. 190

41) cf. Dieter Rams, Design? Umwelt wird in Frage gestellt, in; 앞의 책, p. 71

42) 앞의 책

43) Braun AG(ed.), Braun Design: Grundsätze und Richtlinien, 1991 Frankfurt a.M.

44) cf. Dieter Rams, in; Stern 2008년 5월 10일자

45) cf. Volker Albus, Volker Fischer, 13 nach Memphis, Prestel Verlag, 1995 München; 뉴 디자인의 대표 스타: Ron Arad, Garouste/Bonetti, Ginbande, Massimo losa Ghini, Konstantin Grcic, Danny Lane, Xavier Mariscal, Jasper Morrison, Marc Newson, Denis Santachiara, Borek Sipek, Philip Starck, Zeus etc.

46) 2005년 P&G 그룹이 브라운 사를 합병하면서 미국 보스톤에서 개최한 전시

47) Dieter Rams, in; Frankfurter Allgemein Zeitung, 2010년 5월 27일자

48) Dieter Rams, 앞의 신문

49) cf. Dieter Rams, Manifesto, 2008 Tokyo, 2009 London, 2010 Frankfurt / Seoul; 앞의 신문; Stern 2008년 5월 10일자

Notes

Citation: Lee, B. (2012). A Design Origin of the Braun AG and Dieter Rams: the new Bauen in the 1920s. Archives of Design Research, 25(3), 66-75.

References

  • 토마스 하우페, 디자인, 예경, 2005.
  • Albus, V., 13 nach Memphis, Prestel, 1995 München.
  • Blaser, W., Element System Möbel, DVA, 1984 Stuttgart Braun AG(ed.), Braun im Rückblick 1921-1989, 1990; Braun Design: Grundsätze und Richtlinien, 1991.
  • Erlhoff, M.(ed.), Deutsches Design 1950-1990.
  • Fukasawa, N., Jasper M., Super Normal: Sensations of the Ordinary, Lars Müller Publishers, 2007.
  • Hermand, J., Kultur im Wiederaufbau: Die Bundesrepublik Deutschland 1945-65, Nymphenburger, 1986.
  • Industrie Forum Design Hannover(ed.), Dieter Rams, Designer: Die leise Ordnung der Dinge, Steidl, 1990.
  • Klatt, J., Dieter Rams: Weniger, aber besser, Jo Klatt Design +Design Verlag, 1995.
  • Klemp, K, Ueki-polet, K. Less and More: The Design Ethos of Deiter Rams, Gestalten, 2. Aufl., 2010.
  • Korrek, N., Die Hochschule für Gestaltung Ulm.
  • Selle, G. Designgeschichte, Campus, 2007.
  • Wichmann, H., System-Design Bahnbrecher: Hans Gugelot 1920-65, Birkhäuser, 2. Aufl., 1987; Mut zum Aufbruch: Erwin Braun 1921-1992, Prestel, 1998.

[그림 1]

[그림 1]
1950년대의 다양한 유행양식

[그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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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아이어만 의자 디자인과 독일공작연맹 전시포스터 『새로운 생활』

[그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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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운 면도기 S50, 라디오 Piccolo50, 주방기기 Multimix, 1950

[그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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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신건축의 고전 비례를 따른 브라운 로고, 슈미텔(W. Schmittel), 1952

[그림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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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신건축의 기계미학을 따른 브라운 전시관 디자인과 제품 디자인, 1955

[그림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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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전축-콤비네이션 SK4, H. 귀즐로 / D. 람스, 1956

[그림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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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방기기시스템 KM3, G. A. 뮬러, 1957

[그림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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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 린딩어의 하이파이 유닛시스템 연구, 1957/58(좌), 브라운 Audio 1, 1961(우)

[그림 9]

[그림 9]
양산품 디자인의 성공으로 유명한 스타디자이너 P. 스타크의 대중매체에서의 소개 모습

[그림 10]

[그림 10]
건축 디자인 전문지『Abitare』특집 표지, 삽화의 라디오는 귀즐로가 디자인한 Exporter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