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s of Design Research
[ Article ]
Archives of Design Research - Vol. 27, No. 2, pp.171-181
ISSN: 1226-8046 (Print) 2288-2987 (Online)
Print publication date May 2014
Received 10 Jun 2013 Revised 12 Feb 2014 Accepted 12 Feb 2014
DOI: https://doi.org/10.15187/adr.2014.05.110.2.171

Social Recognition of the Car in the Modern Era

LeeOakboon ; 이옥분
Design Studies Lab. Kookmin University, Seoul, Korea 국민대학교 테크노디자인 전문대학원, 디자인학전공, 서울, 대한민국
근대기 자동차에 대한 사회적 인식


This journal was supported by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 Grant Funded by the Korean Government(MEST)
이 학술지는 2013년도 정부재원(교육과학기술부)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출판되었음

Background The car, which was introduced in the late 19th century, has become a daily object imposing a wave of shock and emotion. The car has changed the lifestyle and behavior patterns of people and has had many kinds of significance in serving their needs.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the social recognition of the car in the modern era. The modern era is a starting point of the recognition of the car, and this starting point is the foundation in determining the unique characteristics of today’s automobile design and culture.

Methods The study targeted cars in the modern era, advertisements or articles that showed social recognition of cars were collected, and preceding materials such as social and cultural commentary were used as references.

Results When the car came was first introduced, it was limited to a certain class, so the car’s symbolic nature as being connected with class was strong. In Seoul, where there was a lack of a practical and material foundation such as the production, manufacturing and operating of cars, the car was deeply connected to the formation of a consciousness immersed in the western civilization discourse. The upper class embraced the car as a product of western civilization, and understood it as a typical code to show one’s status and prestige, and as an ostentatious icon on the cutting edge of fashion. In short, the car’s symbolic meaning was separated from its essentially functional meaning in great excess.

Conclusion The viewpoint of the car led to the development of cognitive framework that affected the development direction of the car industry and car design after liberation. This study can contribute to the establishment of the early history that achieved the foundation of the car design and industrial development that continues to grow with dazzling brilliance today.

초록

연구 배경과 목적 19세기말 도입된 자동차는 충격과 감동의 물결을 일으키며 점차 일상의 사물로 자리 잡았다. 자동차는 사람들의 생활양식과 행동 패턴을 바꾸고, 삶의 욕구에 깊이 관여하며 다양한 의미를 형성했다. 이 연구의 목적은 근대기 자동차를 중심으로 형성된 사회적 인식에 관해 살펴보는 것이다. 근대는 자동차에 대한 인식이 출발하는 지점이며, 이러한 출발점은 오늘날 자동차 디자인과 문화의 독특한 특성을 결정짓는 밑바탕을 이룬다.

연구 방법 근대기 자동차를 대상으로 하여, 자동차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살펴볼 수 있는 광고나 기사를 수집하고 사회문화 해설서 등 선행 자료를 참고하였다.

연구 결과 처음으로 국내에 들어온 자동차는 일부 한정된 계층에서 이용하는 물건이었고, 따라서 계층과 결부된 상징적인 성격을 강하게 지녔다. 자동차는 생산과 제작, 운행 등 현실적이며 물질적인 기반이 결여된 경성에서 서구의 문명 담론에 몰입된 의식의 형성에 깊이 관여했다. 상류층은 자동차를 서구의 첨단 문물로 수용하며, 권력과 신분을 나타내는 전형적인 기호이자 유행의 첨단을 달리는 과시적 아이콘으로 이해했다. 즉 자동차의 본래 기능과 분리된 상징적 가치에 과도하게 집중했다.

연구 결론 자동차가 일상 사물로 정착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이와 같은 시각은 해방 후 한국의 자동차 산업과 디자인의 발전 방향에 영향을 미치는 인식적 틀을 이루었다. 이러한 연구는 오늘날 눈부신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자동차 디자인과 산업 발전의 기초를 이룩한 초기 역사의 정립에 기여할 수 있다.

Keywords:

automobile, culture, design cognition, authority and wealth, trendsetter, 자동차, 문화, 디자인 인식, 권력과 부, 트렌드 세터

1. 서론

19세기말 서양 문명에 대한 충격과 감동의 물결을 일으키며 도입된 자동차는 곧바로 조선의 근대적인 삶을 이루는 주요 사물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자동차는 새로운 삶의 방식과 태도를 형성하고, 삶의 욕구에 깊이 관여하며 다양한 의미를 형성했다. 디자인 역사가 존에이 워커(John A.Walker)는 사회적 맥락이 디자인 생산에 반영된다고 주장하며 디자인 생산-소비 모델을 제시하였다. 이 모델은 자동차로 인해 일어난 생활의 변화와 이에 대한 태도가 자연스럽게 자동차의 제작 방향을 결정한다는 설명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연구의 목적은 근대기 자동차를 중심으로 형성된 대중의 인식과 태도에 관해 살펴보는 것이다. 근대는 자동차를 보는 사회적 인식이 출발하는 지점이며, 이러한 출발점은 오늘날 자동차 디자인과 문화의 독특한 특성을 결정짓는 밑바탕을 이룬다. 즉 이 연구는 사회 전반의 맥락이 어떻게 디자인 영역으로 객관화되는가에 대한 이해를 돕는 기초적인 작업이다. 연구 범위와 방법은 근대기 자동차를 대상으로 하여, 자동차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살펴볼 수 있는 광고나 기사를 수집하고 사회문화 관련 해설서 등 선행 자료를 참고하여 진행하였다. 이러한 연구는 오늘날 눈부신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자동차 디자인과 산업 발전의 기초를 이룩한 초기 역사의 정립에 기여할 수 있다.


2. 자동차의 국내도입과 용도

2.1. 왕실·관용

처음으로 조선에 들어온 자동차는 외교관이나 선교사들이 본국에서 가져오거나 왕실에서 구입한 차량이었다. 경성부사에 간단하게 기록된 내용에 따르면, 최초 자동차는 1903년 고종황제가 국내 주재 미국 공관을 통해 들여 온 캐딜락이나 포드였다고 한다. 1906년 <대한매일신보>는 권병수 등이 자동차회사를 설립하여 자동차 5량을 주문했다고 전하는데 그 후의 내용은 알 수 없는 것(Geon, 2011)으로 보아 자동차를 운행할 수 있는 환경이 미흡한 상태에서 도입 시도만 있던 것으로 보인다. 1909년 영국의 화보지 <더 그래픽>에는 남대문을 배경으로 프랑스 공사가 탄 자동차를 본 조선백성들이 놀라 허둥대는 모습을 풍자한 그림이 실렸고, 이 차를 1911년 본국으로 귀환할 때 대한제국 황실에 팔았다고 한다.(Jeon, 2010) 자동차 도입에 관한 이러한 사례를 통해 1900년대 자동차가 국내에 소개되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지만, 이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나 유물이 없어 공식적으로 확인되지는 않는다. 손정목에 의하면 기록으로 확인되는 최초 자동차는 1911년 고종의 영국제 다임러4기통 리무진으로 이 차는 조선총독부에서 총독용과 왕실용으로 들여온 것이라고 한다.(Son, 1996) 1913년에는 순종의 캐딜라 리무진, 순정왕후의 영국제 다이뮬러, 의친왕 이강공의 GM 오버랜드, 이준공, 윤택영의 자동차가 들어왔고, 이 차들은 일제가 유화정책의 일환으로 왕실에 선물한 것이었다.(Lee, 1991) 이처럼 국내에서 처음으로 접한 자동차는 외교관이나 선교사, 또는 왕실과 총독부 등 최고 권력층에 속한 사람들이 소유한 물건이었다.

2.2. 오락·여흥용

자동차가 왕실용으로 처음 들어온 이후 귀족이나 소수 고관들이 차를 구입하고 계속해서 지주나 재벌 등 부자들을 중심으로 늘어나면서, 자동차는 특권층의 전유물로 여겨졌다. 이들은 자동차를 ‘자동으로 움직이는 차를 타고 즐기는’ 오락거리로 수용했다. 1912년에는 자동차사업자가 생겨 빌려 탈 수 있는 임대 자동차가 등장했다. 임대 자동차는 오늘날의 대절 택시처럼 일정 사용료를 지불하고 자동차와 운전수를 임대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경성에서 포드T형 두 대로 시작한 이 사업은 시간당 5원~6원을 받았고, 주로 귀족과 갑부들이 사용했다.(Jeon, 2010) 주로 온천으로 떠나는 신혼여행, 술 취한 부자들의 심야 귀가, 서울 관광 등에 이용되었다.(Lee, 1991) 1913년에는 자동차 판매점이 등장했다. 개업 초기 자동차를 아는 사람도 구입할 수 있는 사람도 거의 없는 상황에서, 판매상은 이목을 끌기 위해 판촉행사를 벌이기도 했다. 차체를 울긋불긋 비단으로 감고 장안의 명기와 지방 유지를 태워 카퍼레이드를 했고, 한 바퀴 돌고 나서는 술잔치까지 벌이는 행사였다.(Lee, 1991) 이러한 판촉행사는 도입 초기 자동차를 이동 수단이라는 기능적인 측면보다는 유흥과 오락거리로 소개하는 모습이었다. 이처럼 자동차는 일상의 이동수단이라기 보다는 관광이나 놀이삼아 타는 ‘드라이브’용의 성향이 강했다. 드라이브는 ‘시내 요정 가튼데서 권태감을 늣기는’ 일부 부유층의 색다른 취미거리였다. ‘추기청상’이란 제목의 포드자동차 신문 광고는 이러한 태도를 부추겼다.

“추공일벽 기청하고 마음이 시원합니다. 질거운 것은 가을의 행락, 쾌한 것은 신포드의 드라이브 흥취는 또한 무진합니다.”(Kim, 2005)

자동차가 부자들의 유흥거리로 사용되면서 대중들에게는 부정적으로 비추어졌다. ‘자동차를 모는 부랑자’, ‘황금을 뿌리는 야유랑(방탕아)의 자동차’라는 표현이 나타나고(Kim, 2005) 신문에는 이러한 행태를 비난하는 기사가 자주 실렸다.

“돈 만히 가진 부자들은 쓸데업는 사치를 좀 덜하고 비단 옷 좀 덜 입고 자동차에 실고 다니는 기생 좀 덜 실고 다니고” (Dongailbo, 1920.4.18)

“요사이 일 업는 사람이 화창한 일긔에 마음이 움작여서 자동차를 타고 경성부근 각처로 도라다니다 못하야- 기생끼고 술 실고 유람차로 가는 것은 엇더타고 말할는지” (Dongailbo, 1920.5.11)

“상류인으로 자처하며 몸에는 비단으로 전신을 감고 금안경 금시계에다 보석 반지 끼고 자동차인력거상에 반드라시 안자 빈천한 사람을 멸시하고(Dongailbo, 1920.5.27)

“삼십일부터는 시내 다섯 권번 기생 중에 만일 한사람이라도 자동차에만 오르면 엄중 처벌한다는 당국의 훈령이 잇섯슴으로 각 권번 취톄들은 그 뜻을 일일이 각 기생에게 전달하얐다더라.” (Dongailbo, 1920.5.31)

자동차는 고가였고, 운전기술과 운전시험도 매우 어려웠으며, 운전을 할 줄 아는 사람도 별로 없어 운전수를 고용하기도 쉽지 않았다.(Son, 1996) 개인 소유의 자가용보다는 영업용으로 늘어났고, 영업용은 차량 관련업에 종사하던 일본인이나 조선인 지주들이 운영했으며, 고객도 대부분 일본인이나 조선인 부유층이었다.

figure 1

A playboy who enjoys the drive taking a Korean geisha, Ford advertisement

2.3. 근·장거리 이동용

일반 시민이 탈 수 있는 자동차는 1928년부터 경성에서 운행한 시내버스였다. 이미 1912년에 버스 역할을 하는 차량이 등장해 부산, 김해, 마산 일대의 근거리 지방을 연결했고 이후 다른 여러 지역으로도 확대되었지만, 일반인이 타기 보다는 임대 택시처럼 조선인 갑부나 일본 상인이 주로 이용했다. 부유층 중심으로 자동차가 사용되면서 차량이 조금씩 늘어났고, 이에 따라 차량 운행에 필요한 제반 여건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보험업과 정비소가 생겨났고, 조선인 운전면허 소유자와 정비사가 탄생했으며 1920년대에는 자동차 강습소도 성행했다.(Jeon, 2010) 1928년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 발간한『승합자동차 운전상황』에 의하면 조선 내에 원거리를 연결하는 버스와 근거리 시외버스가 총615개 노선에 이르렀다.(Son, 1996) 지주들 사이에서 자동차사업이 돈벌이가 잘된다고 알려지면서 사업자가 상당히 늘어난 결과였다. 이처럼 자동차는 상류층의 물건으로 먼저 도입되고 관련 부문의 기초가 형성되면서 일반 시민의 생활 속으로 들어왔다.

버스는 1920년대 넘어서면서 경제가 성장하고 용산과 영등포 일대에 공업단지가 조성되는 등 화물운송과 교통 수요가 증가하고, 전차만으로는 그 수요를 감당할 수 없게 되면서 나타났다. 1928년 공공성을 고려해 경성부에서 운영을 맡아 경성역과 명동, 을지로 등 서울 시내 주요 지역을 연결했다. 처음 운행된 버스는 일본에서 들여온 검은색 상자형 버스로 좌석 14명과 입석 8명으로 총 22명이 승차할 수 있었고, 한 구간의 요금은 7전이었다. 처음에 10대로 시작한 시내버스는 1935년 56대로 증차하고 노선도 18개로 확장했으며, 승차비도 5전으로 낮추면서 본격적으로 대중의 교통수단으로 정착했다.(Jeong, 2001) 1930년대를 전후해서는 공업화가 시작되면서 화물 운송을 전담할 트럭의 수입도 잇달았다. 임대택시나 시외버스가 주로 부호들의 오락이나 이동에 사용되었던 반면 시내버스는 경제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등장했고, 대중교통수단으로 시민의 일상생활을 뒷받침했다. 교통수단이 일반적인 이동 수단으로 정착되고 시간에 맞춰 차를 타고 출퇴근하는 ‘쌀라리맨’의 삶이 일상화되면서, 경성에는 아침저녁으로 ‘교통지옥’이라는 말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1930년대 후반 이후의 대중교통 상황은 오늘날 러시아워의 지하철 풍경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1939년 어느 신문은 영등포와 구도심을 왕복하는 30인승 버스의 풍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아침저녁의 ‘러시아위’에는 물론 평상시라도 차를 타려면 팔을 걷고 단판 씨름을 하며 남녀노유간의 염치를 몰각하지 않고는 도저히 탈 수 없고 여간해서 탄다고 하더라도 화물차 이상의 초만원으로 질식할 형편인 고로 일반의 비난은 날로 높아가고 있는데---.”(Jeong, 2001)

전차와 버스가 대중의 시내 교통을 담당하며, 아침저녁으로 ‘전시와 같은 살풍경’을 연출한 데 비해, 자가용을 타고 출퇴근하는 고급 관리들은 한산한 도로를 막힘없이 질주했다. 교통지옥은 차량이 부족한 탓이었고, 초만원의 질식할 듯한 전차와 버스는 대중의 유일한 이동수단이었다.

figure 2

Namdaemun street, Tram in Jongno in 1930s


3. 주요 도입 차량

3.1. 포드 T형

왕족이나 재벌이 도입한 초기 자동차는 유럽이나 미국에서 제작한 고가의 자동차가 많았으나, 1920년대 넘어서는 일본에서 조립한 포드 T형이 많았다. 포드T형은 1913년 생산 방식을 혁신해 자동차 가격을 이전에 비해 절반 이하로 떨어뜨린 역사적인 자동차였다. 이 차는 가격이 저렴할 뿐 아니라 구조적으로도 단순해 초보자들이 운전하기에 수월했고, 부속품 교체 등 정비에도 좋았다. 차체 역시 목재 프레임에 금속판을 덧붙여 만든 평면 차체로 가공에도 용이했다. 스타일은 전체적으로 차고가 높은 각진 박스형의 단순한 모양이었다.(Gu, 1998) 이 형태는 카로체리아에서 수공으로 만들던 초기 자동차에서 벗어난 디자인이었다. 수공 제작한 초기 자동차 디자인은 삼륜 자전거의 몸체와 부속품, 바퀴를 이용하고 목재 마차의 객실을 만드는 기술을 활용해 마차와 유사한 모습이었다. 또한 운전하는 동안에 여러 복잡한 기계장치를 작동시켜야 하는 전문적인 기술이 필요했고, 운행 전에 항상 검사를 해야 했다. 포드T형은 목재를 사용하는 등 재료와 형태면에서는 여전히 마차의 잔재가 남아있지만, 구조적인 측면에서는 마차와 자전거에서 탈피한 새로운 자동차였다.(Moser, 2007) 이러한 간결하며 구조적인 형식의 디자인은 기능주의라 불렸다. 기능에 초점을 두어 필요 없는 부분을 없애고 부품을 표준화한 단순한 디자인이었다. 기능주의 디자인은 기계화된 대량생산 시스템으로 가격을 낮추고 내구성을 획기적으로 향상시켰으며, 자동차가 속도와 기능 향상에 초점을 둔 실용적인 운송 수단이라는 인식의 전환을 반영했다.(Ford, 2006) 이러한 의미에서 기능주의 디자인은 카로체리아에서 수공으로 만들던 고귀한 물건의 면모를 벗어버리고 차량 자체의 이동성에 초점을 맞춘 보편성을 의미했다. 국내에 들어온 포드는 이처럼 자동차 패러다임을 사치품에서 일상용품으로 전환시켜 대중화에 기여한 의미 있는 자동차였다. 포드T형은 전 세계 자동차 시장을 석권했고, 국내에는 1924년 일본에 설립된 조립공장에서 생산되어 들어온 차가 많았다.

3.2. 지엠 유선형 자동차

포드로부터 형성된 대량생산의 개념은 유선형 스타일로 이어졌고, 곧바로 국내에 들어왔다. 1930년대에 들어서도 국내에는 여전히 각진 스타일의 포드차가 많았지만, 유선형으로 모델을 바꾼 포드나 지엠 시보레와 뷰익, 크라이슬러 등 여러 브랜드의 차량이 등장하면서 각진 마차 스타일에서부터 곡면의 낮은 유선형 스타일까지 그 종류가 다양해졌다. 유선형 스타일은 부품의 표준화를 통해 획일적이며 각진 스타일을 지닌 포드디자인에서 벗어나 대량생산 방식을 기반으로 스타일의 진일보를 이룩한 결과였다. 유선형은 차체 스타일이 유려한 곡면으로 이루어진 모양을 말했고, 프레스 판금 성형하고 용접하는 철제 성형기술이 개발되면서 나타났다. 이러한 성형 기술은 이전의 목재 차체로는 할 수 없었던 둥근 금속판의 형태를 가능하게 했다. 원래 유선형은 공기저항을 최소화한 형태라는 의미를 지니나, 이와는 상관없이 곡면의 스타일을 말했으며, 초기 성형 기술의 한계로 굴곡이 크고 부드럽고 유연했다.(Gu, 1998) 이와 같은 금속제 차체는 외형만이 아니라 자동차 디자인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자동차 구조가 외부와 내부로 격리되었으며, 실내에 기계 장치가 집중된 조종 계기판이 구성되어 모든 조작을 운전석에 앉아서 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 새로운 도료와 도장 공정이 개발되어 색상이 다양해졌다. 이와 같은 자동차 디자인의 변화는 기능적이고 대중적이며 표준적인 자동차를 제작하는 포드 개념에서 벗어나 색상, 성능, 장비 등이 다양한 모델로 전환되는 디자인 패러다임을 반영했다. 성능뿐만 아니라 스타일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다양한 기호에 부응하는 다품종 정책 시대로의 변화였다. 디자인은 해마다 개선되고, 4년마다 전면 교체되며 스타일로 브랜드가 독립되는 등의 브랜드와 마케팅 전략의 중심에 놓였다.(Moser, 2007) 이처럼 유선형 스타일의 출현은 제작비용이나 기술 문제를 넘어 자동차에 대한 대중의 요구, 즉 가격만 싼 자동차가 아닌 다양한 차종을 원하는 달라진 시대로의 전환을 의미했다. 유선형은 지엠이 주도하며, 대량생산 시스템을 기반으로 기술적 진보와 모델 다양화를 가져왔다. 일제강점기 자동차는 이와 같이 대량 생산을 실현한 보편적인 스타일의 포드와 기술적 진보가 이루어낸 유선형 지엠이 대다수를 차지했다.

figure 3

Chevrolet in 1928, Streamlined Chevrolet in 1938


4. 자동차를 보는 사회적 인식과 태도

자동차에 경도된 상류층의 전유물에서 점차 대중 교통수단으로 확대되는 과정은 자동차를 보는 다양한 시각을 형성했다. 자동차는 승용형 차량과 버스, 트럭 등을 통칭하는 말이지만, 사회적으로 의미있게 통용되는 차량은 개인이 소유하거나 사용할 수 있는 승용형으로 좁혀졌다. 버스나 전차가 시민이 사용하는 일반적인 교통수단인데 반해 승용차는 일부 사람들만이 누리는 특별한 물건으로 인식되었다.

4.1. 전형성- 권력과 부의 아이콘

자동차는 소수 특권층이 근대화의 욕구를 생활 속에서 실천하려는 열망의 중심에 있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한국의 자동차는 재력, 권력과 연관을 맺으며 조선 사회에 뿌리 내렸다. 일례로 자동차 도입 초기, 순종이 자동차를 타고 나들이 가는 장면은 기마병이 앞뒤를 호위하는 행차와 같았고, 귀족 또한 일본에서 자동차와 함께 운전수를 들여와 취미삼아 하는 드라이브에 사용했다.(Kim, 1999.2) 이들은 달릴 만한 길이나 연료도 없고, 고장이 나도 부품이나 고칠 사람도 없는 등, 기술적, 인적, 물적인 어떠한 자원도 마련되지 않은 현실에서 산업이나 경제 활동과는 상관없이 서구 첨단의 문물을 들여왔다. 1920년대 상류층을 중심으로 자동차 보급이 늘어나는 상황에서도, 이들은 오락과 여흥을 즐기려 자동차를 임대해 타고, 원하는 시간에 차가 없으면 몇 시간이라도 차를 기다리는 불편함을 감수했으며, 집 앞에서 타는 ‘문전 써비스’도 받았다. 이러한 모습 속에서 자동차는 본래의 장점인 속도를 내지 않았다.(Son, 1994) 이들에게 자동차는 이동의 편리함을 주는 실용적인 운송수단이기보다 서구 문물을 체험하는 자유로운 사물이었으며, 선망하는 근대화를 대변해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이처럼 조선의 자동차는 생산과 제조, 교통과 도로 등 제작과 운행에 관련된 물질적 현실적 기반을 결여한 공간에서 태어났고, 서구의 문명 담론에 경도된 의식에 먼저 관여했다. 신문물이 주는 풍요로움을 여유롭게 즐기는 행동에서 자동차를 소유하거나 이용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이라는 의미를 발산했고, 첨단 문명을 즐길 수 있는 부와 권력을 지닌 사람임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역할을 했다. 이와 같이 자동차가 조선 사회에 도입되는 과정은 본래 자동차가 수행하는 기능 가치에 두기 보다는 지위와 같은 상징 권력으로 이해했다.

1920년대 말까지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전거나 인력거, 마차를 이용했고, 화물 운송에는 손수레와 우마차를 사용했다.(Son, 2005) 근대적인 교통수단이 등장했지만, 차량이 부족해 항상 북새통을 이루었고, 이러한 환경 속에서 경성은 보행 중심의 체계를 유지했다. 그리고 소수 사람들만이 가끔 자동차를 이용했다. 이와 같은 상황은 자동차가 첨단 문명을 오락거리로 즐길 만큼 부와 권력, 지위에서 특별하다는 의미를 발산하는 상징물로 자리할 공간을 제공했다. 1927년 신문 기사는 아래와 같이 보도했다.

“경성의 교통기관이 전차에 근간을 두고 있으며, 자동차는 돈 많은 사람의 호화로운 생활이나 혹은 부랑배의 유흥을 돕기 위하여 사용되고 그렇지 않으면 특수 부류 사람들의 위세 좋은 ‘어용’차로서 사용되는 형편이었고 일반교통기관으로는 아직도 널리 사용되지 못하였었다.”(Jeong, 2001)

4.2. 유행성- 트렌드 세터의 아이콘

자동차는 근대 문명의 결정체이자 최신 문화로 도입되었고, 1930년대 들어 근대 소비사회로 접어들기 시작한 경성의 삶 한가운데 있었다. 소비 사회로 이행하는 경성에는 서구적인 취향이 일상생활에 스며들고, 유행을 개인적인 취향으로 여기며 이를 따르는 것이 보편화되는 인식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서구 문화를 접하는 것만으로도 상징 권력의 내부에 속해 있다는 기호를 발산하는 시대에 유행은 이를 명징하게 확인하는 코드였다. 유행은 구태에서 벗어난 신식 사람으로 자신을 과시하며, 자신의 근대화 정도를 알리는 지표가 되었다.((Kim, 2006) 자동차는 권력과 부를 지닌 계층의 표현이었고, 자동차 스타일은 그러한 계층 내에서도 남과 차이를 둔 유행의 첨병을 달리는 수준을 과시했다. 즉 현대적 소비 사회의 욕망을 자극하는 자동차는 최신 유행 스타일 대한 관심으로 표출되었다.(Ma, 2004) 1930년대 세계적으로 유행한 유선형 스타일은 소비사회 경성의 일상을 그리는 풍경 속에 자주 등장했다. 화려한 네온사인으로 치장한 남촌의 백화점을 들락거리며, 해변이나 온천, 명산 등으로 꽃놀이나 피서를 떠나고 겨울산으로 윈터스포츠를 즐기러 가는(Jeong, 2001) 풍요로운 일상을 그리는 스타일이었다. 1937년 4월 <조광>에 실린 기사에서 이러한 모습을 볼 수 있다.(Ma, 2004)

“이곳은 W백화점 입구이다. 유선형 ’시보레’ 자동차가 한 대가 동대문 방면에서 쏜살같이 달려와 스르르 스톱을 한다. 곧 문을 열고 나오는 주인공은 ‘샤리 템플’같이 귀여운 소녀 두 명과 젊은 부부 두 사람이다. 그들은 모두 가슴에 진달래꽃을 꽂았다. 아마 정릉이나 성북동에서 꽃구경을 하고 오는 모양이다.--”(Kim, 1999)

1936년 6월 <삼천리>에 실린 ‘장안 명사의 자가용자동차’라는 제목의 기사에는 상류층의 필수품목이 된 자동차 가격을 소개하고 있다. 이 글에는 사회적 권력의 반대편에 존재하는 질시와 선망의 복잡한 시선이 그려져 있고,(Park, 2008) 그 중심에 유선형 스타일 자동차가 묘사되고 있다. 포드 T형은 곧 구물이 되고, 소비사회로 접어든 경성 거리를 달리는 최고 갑부들의 위세는 ‘유선형’의 스타일로 표시되었다. 자동차는 유행의 첨단을 달리며 근대 경성의 일상을 주도하는 트렌드 세터임을 말해 주었다.

“서울 장안에는 하루에도 수업시 ‘아스팔트’ 우으로 구으러 단이는 신형 ‘씨보레’ 유선형 자동차가 이 거리에 쏘단이는 시정인들의 말쑥 말쑥한 옷자락에 몬지를 피우며 달아나고 있다. 요즈음에 와서는 장안에서 누구 누구하는 명사들이란 거지반 자가용 자동차를 한 대쯤은 가지고 잇다. 이 분들이 사유하고 있는 자동차 가격을 알아보면, 최창학 1만3천원(지금돈 15억6천만원), 민대식 8천원(9억6천만원)--.”


5. 결론

1910년을 전후해 도입된 자동차는 서구의 진보한 문명이자 최고 상류층의 전유물이라는 사회적인 의미가 강했다. 1920~1930년대를 거쳐 경제가 발전하고 교통체계 등 물리적 기반이 자리 잡으면서 점차 공간 이동과 화물 운송을 편리하게 해주는 이동수단이며 현대 소비사회의 표상이라는 의미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자동차 도입 초기부터 일상 사물로 자리하기까지 과정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 지배하고 있는 자동차를 보는 고정 관념이 출발하는 지점이 되었다. 자동차는 한정된 계층에서 사용하는 물건이었고, 따라서 계층과 결부된 상징적인 성격을 강하게 지녔다. 상류층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문명에 대한 태도와 신분이 드러나는 사물이었고, 소비도시 경성의 유행을 주도하는 첨병에 있었다. 이러한 상징적 성격은 일반 시민이 접근할 수 없는 특별함을 발산했고, 대중과의 거리 두기에서 생긴 반대편에는 질시와 선망이 도사리고 있었다. 자동차에 대한 계층 간의 태도는 극단적으로 달랐지만, 그러나 한결같이 ‘갖고 싶은 최고의 사물’로 자동차를 바라본다는 것은 동일했다. 소유 자체에 가치를 둔 자동차는 그 실체와는 거리를 둔 이미지를 덧씌우며 고정관념을 형성했다. 이는 곧 자동차의 실제 기능이나 그 기능이 지닌 의미의 문제를 떠나 한국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설정되고 탄생된 독특한 인식의 문제로 나타났다. 서구에서도 19C 후반 자동차 관련 특허가 쏟아져 나오며 실용화를 이루던 시기에는 상류층의 전유물로 상징적 성향을 강하게 지녔다. 하지만 한국에서 파생된 상징성과는 매우 다른 양상을 지녔다. 서구의 자동차는 현대적 진보를 표현하는 보다 미래지향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적극적으로 만들어 가야 할 미래의 이정표로서 포드 T형은 획일화와 규격화의 매커니즘을 통해 계급 없는 사회를 만든 미디어의 역할을 했다. 또한 지엠 유선형은 다양성에 대한 시대적 요구를 반영해 탄생했다. 반면 한국 사회에서는 서양에서 들어온 첨단 문물로 소개되면서, 근대 문명사회의 새로운 가치 기준을 형성하는 도구적 성향이 강했다. 그러면서 신분 상징을 떠난 포드T형을 권력과 부의 상징으로, 풍족한 시대의 다양성을 준비하는 지엠 유선형을 과시적인 유행 코드로 바라보았다. 서구에서는 이동 기능을 제공하는 생활필수품으로 자리 잡는 과정에서 기술 진보와 맞물려 디자인이 진화했지만, 국내에서는 기능과 분리된 상징적 가치에 과도하게 집중된 태도를 낳았으며, 이후 한국 자동차 디자인의 발전 방향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자동차 크기에 집착하며 사회적 지위와 결부시켜 전형적인 스타일을 상정하는 태도, 유행 스타일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빠르게 교체하는 태도, 이러한 태도를 반영하는 디자인을 개발하는 등, 산업화 시기 자동차 디자인에는 사회 전반의 인식이 가감 없이 드러났다. 이러한 성향은 근대기에 싹튼 인식적 태도에서 비롯되며,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쳐 산업화와 자동차 대중화로 나아가는 시기에도 한국인의 의식 밑바탕에 자리하고 있었다.

Notes

Citation : Lee, O. (2014). Social Recognition of the Car in the Modern Era : Archives of Design Research, 27 (2), 171-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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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playboy who enjoys the drive taking a Korean geisha, Ford advertis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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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daemun street, Tram in Jongno in 193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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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evrolet in 1928, Streamlined Chevrolet in 1938